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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이야기

대한제국(大韓帝國)

작성자管韻|작성시간18.09.08|조회수129 목록 댓글 0


대한제국(大韓帝國)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근대 국가이자 한반도 최후의 군주국가. 조선 왕조 제26대 왕 고종태황제(高宗太皇帝)'대군주(大君主)'의 칭호를 폐지한 후, 황제(皇帝)를 칭하면서 건국한 국가이다.

 

전통적 가치를 바탕으로 서구적 근대국가로 변모하려 노력했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라 일본 제국의 간섭에 의해 주권을 침해당하다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사실상 속국이 되었고, 1910년 합병의 바람을 타고 멸망했다.

 

일각에선 자주적인 독립국가임을 천명한 의미는 있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며, 여기서 더 나아가 독립국가를 주장한 것에 비중을 두어 시모노세키 조약 이후를 제국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 1899'대한국대청국통상조약'처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청나라와 대등한 황제국 지위로 외교 관계를 맺기도 했다. 얼마 안가 둘 다 망한건 함정 애초에 청일전쟁 이후라 이미 한반도엔 일제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던 시기긴 했지만.

 

약칭은 한국(韓國). 현대의 대한민국의 약칭과 겹치는데, 구분하여 구한국(舊韓國)이라고도 한다. 자주 쓰이지는 않으나 대한제국을 기준으로 하고 현재 대한민국을 신한국(新韓國)이라 하기도 한다.

 

 

2. 상세

 

 

국명은 '대한제국(大韓帝國)', 국기는 대한제국 태극기, 국가는 대한제국 애국가, 황실 상징이자 국장은 이화문(李花紋)이다. 여기서 국명의 '대한(大韓)'과 국기 태극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계승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그대로 사용 중. 황실 상징인 이화문은 전주 이씨 종친회가 계승하여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다. 국가는 국권 침탈 이후 금지곡이 되었다가 광복하면서 남북으로 갈라지고 양쪽이 서로 다른 국가(하지만 제목은 둘 다 애국가)를 채택했다.

 

영어명 Empire of Dai Han은 대한제국 정부의 공식 명칭이고, 일반적으로는 Great Korean EmpireEmpire of Great Korea가 주로 통용되었다. Korea의 어원이 '고려'인데 바로 그 고려를 무너뜨리고 세워진 나라였던 조선에서 그대로 이어진 대한제국은 외국인들이 대한제국을 코리아라고 부르는 것을 싫어해서, 'Great Korean Empire'라고 하지 말고 'Empire of Dai Han'이라는 영문 호칭을 사용해주길 주한 외국 공사관에 요청하기도 했는데 무시당했으며, 결국 코리아란 명칭을 받아들인다. 당시 발행한 우표를 보면 잘 알수 있다.

 

대한제국의 존속기간은 18971012~ 1910829일까지의 1210개월 18일 동안 존속했던 한반도의 나라이고, 조선 왕조까지 합치면 1392년부터 시작해서 1910년 까지 대략 518여년 이다.

 

근대문물도 많이 들어왔는데, 동화약품의 부채표 활명수가 생긴 게 바로 직전인 1897925일 한국은행도 그렇고, 서울의 많은 대학도 이때 들어왔다.

 

대한제국은 한일 병합 조약으로 일본 제국이 국권을 강탈하면서 사라진 국가로서, 한반도에 존재했던 제국. 대한민국과 구별하기 위해 '구 한국'이라는 표현을 쓰거나 1910년 일본에게 국권을 침탈당하기 전이라고 하여 구한말이라고도 한다. 엄밀히 말하면 '구한말'이라는 용어 자체는 대한제국 시기를 가리킨 것이지만, 일반적으로는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시점 혹은 흥선대원군(명목상으로는 고종)이 왕위에 오른 1863년부터 경술국치까지의 시기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사실상 1905년의 을사조약 이후로는 망국과 다름 없어서 실질적 황제는 고종 황제밖에 없다. 1907년 강제로 퇴위된 후 순종 황제가 뒤를 이었으나 별 의미는 없었다. 비공식적으로 광무제, 융희제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이는 대한제국 당시의 공식 의전 명칭이 아니다. 흥했으면 모르겠지만, 10년 만에 멸망했기에 조선사의 연장선상으로서 다뤄지고 순종도 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여겨진다.

 

또한 국호가 바뀌기는 했지만 역성혁명으로 왕조가 갈아엎힌 것도 아니고 원래부터 있던 왕조가 이름만 바꾼 것일 뿐더러, 어차피 대한제국으로 바뀌어 봤자 왕의 호칭이 황제로 바뀐 것을 제외하면 그 전의 조선과 별로 다를 것도 없었기 때문에 일반인들 머릿속에서의 역사상의 비중은 '그런 게 있었지' 수준이다. 이 시대를 구한말이라고 부르면서도 '조선 언제 망했어?'라고 물어보면 대부분이 1910년의 경술국치를 댄다. 사실 우리나라의 여타 왕조들의 사례로 미루어 보면 대한제국만 따로 특별히 취급해야 할 이유가 칭제말고는 없긴 하다. 고구려의 경우 장수왕 때 국호를 '고려'로 바꿨으며 이의 사용 기간 역시 '대한제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되어 후기에 이르러서는 대내외적으로 '고려'라는 호칭이 널리 보편화되었으나, 그렇다고 하여 단지 국호 변경만을 이유로 '고구려'의 멸망 시기를 장수왕 때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고구려'로 불리든 '고려'로 불리든 700년 역사 전체를 고구려의 것으로 보고 있지. 백제도 '십제''남부여'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고, 신라 또한 '사로국' · '서라벌' · '계림' 등 다양한 국호를 사용하다가 지증왕의 통치기인 503년에 이르러서야 '신라'로 국호를 통일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냥 전체 역사를 통칭해서 '백제''신라'로 부른다. 궁예의 태봉 역시 '고려''마진'으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한 나라로 취급하며, 심지어 조선마저 극초창기(1392~1393)에는 이전 왕조의 국호인 '고려'를 그대로 유지하였으나 그렇다고 하여 그 시기만을 따로 떼어 내어 이때의 조선을 '고려'라고 부르거나 조선의 건국 연도를 1392년이 아닌 1393년이라고 말하는 경우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대한제국이 그나마 이전 왕조들과는 차별화되는 특징인 '칭제'와 관련해서도 그다지 특별하다고는 할 수 없는 게 이미 우리나라 역사에서 외왕내제의 사례는 수도 없이 많으며, 특히 고려는 사실상 껍데기만 제후국이었을 뿐 대내적으로는 대한제국 뺨칠 정도로 황제 놀이를 그야말로 제대로 즐겼던지라... 물론 대한제국의 '대외적인' 황제국 선포는 이전 사례들보다 한 걸음 나아간 거긴 했다.

 

이러한 사례들로 미루어 보면 이름만 바꾸었을 뿐 왕조 교체 없이 국체가 조선에서 물 흐르듯 그대로 이어진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부르는 게 아주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으며, 오히려 조선과 대한제국을 칼로 무 베듯 생판 별개로 취급하여 조선이 1897년에 끝났다고 생각하는게 되레 이상하다고 하겠다. 정치체제가 공화제, 하다못해 입헌군주제로라도 바뀌었으면 몰라도 실제로는 통치자의 직함 이름이 ''에서 '황제'로 바뀌었을 뿐인 전제군주제를 그대로 유지했으니 정치체제에 급격한 변동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게다가 역대 조선 군왕들의 신위를 모신 종묘에는 고종과 순종의 신위도 버젓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당대 백성들에게 있어서도 이전부터 계속 써온 '조선'이란 단어가 훨씬 친숙했으며, 후에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한 일본도 한반도를 일본의 일부이자 한 지방으로서 '조선'으로 불렀다.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도 자신들의 단체명에 '조선'이란 단어를 포함시킨 경우가 부지기수였으며, 3.1 운동 때에도 군중들 사이에서는 '대한 독립 만세'보다 '조선 독립 만세'라는 구호가 훨씬 많이 쓰였다. 기미독립선언서에도 '대한' · '대한인'이 아닌 '조선' · '조선인'이란 단어를 사용했으며, 심지어 해방 직후인 1946114일 중앙청 앞에 처음 태극기를 게양하면서 부른 애국가의 마지막 구절도 '대한사람 대한으로'가 아닌 '조선사람 조선으로'였을 정도로 '조선'이란 국호는 1897년 공식적으로 없어진 이후에도 끈질기게 생명력을 유지했다. 이런 시각은 당대에도 널리 퍼져 있던 모양인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새 나라의 국호를 정하자는 회의에서는 '대한민국'이란 이름이 '조선'이란 이름과 경쟁을 했었다. 전주 이씨의 황실 복원도 '대한제국'이 아닌 '조선 황실 복원'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 다만 황실 복원 관련 인물이나 단체들은 '대한제국 황실 복원'을 공식 명칭으로 사용한다.

 

정식 국호는 '대한제국'이지만, 아래 항목에서 설명할 대한국 국제의 경우처럼 1890년대 초창기에는 국호 '대한국'과 섞어 쓰기도 했다. 따라서 이 문서는 대한국으로 검색해도 접근할 수 있다. 약칭으로는 '대한''한국'이 사용되었는데, 보통 단체명 등에서 접두어의 개념으로 대한이 더 자주 사용되었다. 다만 미-소 군정 시절까지 사용된 그리고 지금도 북쪽에서 사용되고 있는 '조선'에 비하면 그 용례가 상대적으로 적다.

 

학자에 따라선 대한제국의 건국 시점을 한국 근대 시대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참고로 보통 근현대사 교과서는 조선 고종 시절 쯤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3. 대한국 국제

 

 

1899817일 발표된 국제. 두산백과에서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헌법으로 정의하고 있다.

 

 

 

대한국 국제(大韓國國制)

 

제일조(第一條) : 대한국(大韓國)은 세계 만국(世界萬國)의 공인(公認)되온 바 자주독립(自主獨立)하온 제국(帝國)이니라.

 

제이조(第二條) : 대한국(大韓國)의 정치(政治)는 유전즉 오백년 전래(由前則五百年傳來)하시고 유후 항만세 불변(由後恒萬歲不變)하오실 전제 정치(專制政治)이니라.

 

제삼조(第三條) : 대한국(大韓國)

대황제(大皇帝)께옵서는 무한(無限)하온 군권(君權)을 향유(享有)하옵시나니 공법(公法)에 위()한 바 자립 정체(自立政體)이니라.

 

제사조(第四條) : 대한국 신민(大韓國臣民)

대황제(大皇帝)의 향유(享有)하옵시는 군권(君權)을 침손(侵損)할 행위(行爲)가 유()하면 기이행 미행(其已行未行)을 무론(勿論)하고 신민(臣民)의 도리(道理)를 실()한 자()로 인()할지니라.

 

제오조(第五條) : 대한국(大韓國)

대황제(大皇帝)께옵서는 국내(國內) 육해군(陸海軍)을 통솔(統率)하옵시어 편제(編制)를 정하옵시고 계엄(戒嚴), 해엄(解嚴)을 명()하옵시나니라.

 

제육조(第六條) : 대한국(大韓國)

대황제(大皇帝)께옵서는 법률(法律)을 제정(制定)하옵시어 그 반포(頒布)와 집행(執行)을 명()하옵시고 만국(萬國)의 공공(公共)한 법률(法律)을 효방(效倣)하사 국내 법률(國內法律)도 개정(改定)하옵시고 대사(大赦), 특사(特赦), 감형(減刑), 복권(復權)을 명()하시옵나니 공법(公法)에 위()한 바 자정 율례(自定律例)이니라.

 

제칠조(第七條) : 대한국(大韓國)

대황제(大皇帝)께옵서는 행정(行政)각 부부(各府部)의 관제(官制)와 문무관(文武官)의 봉급(俸給)을 제정(制定) () 개정(改定)하옵시고 행정(行政)() 필요(必要)한 각항(各項) 칙령(勅令)을 발()하옵시나니 공법(公法)에 위()한 바 자행 치리(自行治理)이니라.

 

제팔조(第八條) : 대한국(大韓國)

대황제(大皇帝)께옵서는 문무관(文武官)의 출척(黜陟)임면(任免)을 행()하옵시고 작위(爵位) 훈장(勳章) () 기타(其他) 영전(榮轉)을 수여(授與) () 체탈(遞奪)하옵시나니 공법(公法)에 위()한 바 자선 신공(自選臣工)이니라.

 

제구조(第九條) : 대한국(大韓國)

대황제(大皇帝)께옵서는 각 유약국(各有約國)에 사신(使臣)을 파송, 주찰(派送駐紮)케 하옵시고 선전(宣戰), 강화(講和) () 제반 약조(諸般約條)를 체결(締結)하옵시나니 공법(公法)에 위()한 바 자견 사신(自遣使臣)이니라.

 

 

출처는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 1899917일자 대한국 국제 관보. 원 출처의 강제개행 역시 똑같이 적용하였다. 참고로 여기서 강제 개행을 한 이유는 전통적으로 높으신 분을 쓸 때에는 무조건 행갈이를 하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강제개행 문서에도 나와 있으니 그쪽도 참고하자.

 

대한국 국제에서 볼 수 있는 특색있는 점은 대한제국 반포가 당시 조선 왕실(정부)의 혁신을 통한 유의미한 발전을 꾀하려던 것으로, 국가의 권력의 주체를 황실에 두고 이에 따른 권력의 범위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 전제주의적 성격이 강한데 대부분의 근대 헌법이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국가의 시작점에 있기 때문에 권력의 주체를 인민으로 보고 있는 것과 비교된다. 그러나 대한국 국제는 국민주권, 의회주의, 기본권 보장과 같은 요소가 없기 때문에 제대로 된 근대적 헌법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하다못해 외견적 입헌주의에 해당하지만 진정한 근대적 헌법 취급은 받지 못하는 비스마르크 헌법이나 메이지 헌법조차도 제한적으로나마 기본권이나 의회제 같은 것이 있었다. 심지어 당시 전제군주국의 대명사였던 러시아 제국마저도 다음과 같이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헌법 차원에서는 명시한 것과 비교할 때, 지나치게 구시대적인 면모가 강하다.

 

 

 

2

 

 

30. 신민 그 누구도 법률이 예외조항을 둔 것에 제외하면 법 위반이라는 이름으로 박해되지 않는다.

31. 신민 누구도 합법적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구금되거나 조사되지 아니한다.

38. 법에 저촉되지 아니하면, 특정한 목적으로 어떤 사회 단체 혹은 연맹을 조직할 권리를 신민은 갖는다. 이 조직의 조건 및 그들의 행동, 시한 및 규정 등의 합법성 획득 및 연대권한의 사용은 법률이 정한다.

 

 

또한 1908년에 제정된 청나라 헌법인 흠정헌법대강과 비교해도 이 문제는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다.

 

 

 

흥정헌법대강 제2

1조 신민 중 법률명령에 부합해 자격을 갖춘 사람은 문무관리나 의원이 될 수 있다.

2조 신민은 법률의 범위 안에서 자유롭게 언론, 저작, 출판 및 집회, 조직을 결성해 정치 활동을 할 수 있다.

3조 신민은 법률에 정해진 바를 위반하지 않는다면 체포, 감금, 처벌이 불가하다.

4조 신민들은 법관에게 청해 심판의 과정 중 안건에 대해 소송을 걸 수 있다

5조 신민은 오로지 법률에 의한 절차에 의해서만 심판을 받으며 또한 관청의 심판에 응할 수 있다.

6조 신민의 재산은 거주하는 곳에 미치며, 무고하게 침범당할 수 없다.

7조 신민은 법률에 의거해서만 납세와 병역의 의무를 진다.

8조 신민의 현재 세금부담에 대해서는, 새로운 법률이 제정되기 전까지는 모두 옛 규정에 따른다.

9조 신민은 국가법률의 의무를 준수해야 한다.

 

 

4. 성립

 

 

4.1. 전제군주국

 

 

칭제는 근본적으로 갑신정변에서 비롯되었다. 3일 천하에 그쳤으나 김옥균 등은 왕의 공식 칭호를 군주(君主)에서 대군주(大君主), 전하를 폐하(陛下), 왕 자신의 호칭을 짐()으로 부르도록 하였고 이 대군주가 내리는 명령을 칙()으로 하는 등 사실상의 칭제 계획을 올린다. 여기서 보듯, 제국의 선포는 곧 자주국의 선포였다. 물론 이런 꿈도 결국 사흘 만에 청나라의 위안스카이가 들어오고 명성황후 민씨의 복귀로 실질적 독립조차도 물거품이 되어버렸지만.

 

아관파천이 독립협회의 요청으로 중단되고, 고종은 덕수궁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황제 드립이 시작된다. 독립협회는 대한제국이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기를 주장하였고 고종도 내심은 그게 아니었지만 일단 겉으로 동의한 상태였다. 하급 관료와 황실종친이 주축인 독립협회는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줄기차게 주장해왔고, 고위 관료가 추축인 근왕파는 독일식 전제입헌군주제를 주장했다. 그런데 독립협회도 엄연히 종친이 관여하고 이완용 등 관료의 상당수가 참가했기에 단순히 입만 산 집단으로 이해하는 것 또한 올바른 이해는 아니다. 이름만 빌려 줬다는 말도 있지만, 왕세자 이름으로 당시로는 적지 않은 지원금이 나간 것을 봐서는 초기에는 정부에서 만든 단체로 이해하기도 한다.

 

독일식과 영국식을 단순하게 설명하면, 영국식이 지금 널리 알려진 바로 그 형태라면, 독일식은 의회가 국왕권의 영역과 약간의 특수성은 인정하는 형태로 공존하는 체계로 군주정과 민주정의 중간 정도 되는 시스템이다. 영국식은 영국과 일본이, 독일식은 당연히 독일이 채택하고 있었다. 사실 이 둘의 결정적 차이는 군주가 정치에 참여할 권한이 있느냐 없느냐였다. 이 때문에 군주가 주도하거나 동의한 경우는 독일식이 되는 거고, 하부에서 군주권을 빼앗는 식으로 입헌군주제가 되면 영국식이 되는 것이다. 이래서 메이지 유신을 거친 일본이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취한 것이다.

 

사실 이 주장은 독립협회와 정부 간의 협상 과정에서 성립된 것에 가깝다. 고종은 당연히 전제 군주정 하고 싶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독일 모델은 고위 관료라기보다는 홍종우를 중심으로 하는 황국협회(皇國協會)를 중심으로 나왔다. 황국협회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황권 강화에 방해되는 단체(즉 독립협회)에 대항하는 성격을 띄고 있으며, 조직 건설에 고위 관료들이 대거 관여 되어 있고, 정부의 계속된 지원을 받았으며 언제든 폭력집단으로 활용이 가능한 보부상들을 대거 끌어들였다. 흥미로운 건 서울과 중추원(상원)으로 제한을 두려고 한 독립협회에 대항해서, 황국협회는 전국적인 선거를 통한 하원 설치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는 출범한 지 얼마 안 되는 독립협회의 영향력 범위가 아직 서울 일부로 제한적이었다는 약점 때문이었다. 결국 지방민들은 아직 왕을 하늘로 떠받드는 근왕 의식이 남아있었던 만큼 황국협회의 세력은 작지 않았다. 어째 이승만이 직선제를 획책했던 일과 겹쳐 보인다 이걸 단순히 독립협회에 대한 안티테제라고만 볼 수는 없는 것이, 황국협회를 주도한 홍종우 역시 프랑스 유학을 거친 근대적 지식인이었고, 독립협회의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터무니없는 과욕이었다. 집도 절도 없고, 애초에 독립문 만들겠다는 목표 하나로 시작했던 독립협회가 당시 한양의 어설픈 동조자들을 기반으로 하고 국내 외국 공사관들의 암묵적 지지를 배경으로 해서 정권 하나를 통으로 먹으려고 했던 것이다.

 

여하간 그래도 대강 절충이 되어서, 영국식 입헌 군주국은 아니지만 그래도 독립협회가 주축되었던 중추원(상원) 설립이 우여곡절 끝에 성공으로 끝나는가 싶더니, 독립협회 임원들의 거대한 막장짓으로 시작과 동시에 박살이 난다.

 

당시 법제상으로 중추원에서는 내각 추천 권한이 없었는데, 바로 1회의 첫 번째 의제로 내각 구성을 들고 나온 것이 문제였다. 내각 구성권을 의회가 가지면 실질적으로 영국식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그 내각 구성원으로 당시 반역죄로 일본에 망명한 박영효나 국외추방된 미국인 서재필(필립 제이슨) 등의 이름이 나온 것도 원인이었다. 이것은 독립협회가 정권을 장악하고 고종을 허수아비로 만들겠다는 정치적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더구나 이 둘은 각각 일본과 미국의 대변인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독립협회 내부의 친미, 친일 쪽 계파들의 성향을 그대로 반영할 인물들이었다. 무엇보다 고종이 가장 혐오하던 인물들이기도 했는데, 이들을 귀국시켜서 각료에 앉힐 수 있다는 것은 고종의 인사권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의미였다. 이 사실을 듣고 분노한 고종은 무기명으로 행해진 투표지를 하나하나 필적 대조로 다 잡아내었고, 중추원은 바로 해산당한다. 더불어 이전과는 달리 독립협회에도 유례 없이 강하게 나서서 바로 박살내었다.

 

이 시기 독립협회는 당시 조선의 상황에 비해서는 지나치게 강성화되어서 공화주의까지 이야기되고 있던 상황이기도 했다. 박영효 국왕설은 반대파의 모략이라고 해도, 박영효 대통령 주장은 입헌군주정과 공존할 수 없는 주장이었다. 독립 협회 지도부도 이를 인식하고 정부와 협상 과정에서는 공화정 언급을 특별히 단속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일단 중추원이 성립되자 바로 기존의 자세로 돌아갔고, 강경파들을 제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고종은 이 상황에서 외교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했다. 무력으로는 답이 안 나온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당시 외교적 인식의 한계이기도 하다. 사실 이 문제는 중립화론, 3.1 운동의 독립청원, 상해임시정부의 국제연맹을 이용한 외교독립론 등 끝이 없이 이어진다. 처음엔 제국 선포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이 시기가 러일전쟁으로 나아가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아관파천 이후부터는 언제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당시 기록을 보면 고종은 계속해서 신하들에게 '이게 무슨 소용이야? 이런거 안 하면 안 될까?'하는 말을 계속하고는 있었다.

 

황제 선포 괜히 했다가 휘말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 인데 본심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고종은 환구단을 이미 짓고 있었다. 환구단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이전에는 사직단이었다. 사대부 중에서는 환구단을 짓고 제국을 선포하게 되면 나라 예산만 축날 뿐이니 하지 말자고 반대한 사람들도 있었다. 원구단의 경우는 세조가 실제로 지었고, 광해군이 하려다 못 한 것이긴 했다. 이것만으로 고종이 제국이 되는 걸 반겼다는 걸 증명하기엔 조금은 부족하다..만 심증은 된다.

 

고종은 몇 번이고 사양하면서도 비등한 여론에 못 이기는 척하며 급하게 제국을 선포하게 된다. 중국인들은 고대부터 자기들 나라 이름은 외자로 쓰고 인근 민족과 나라 이름은 두 자로 써왔다. 근세에 서양 열강과 접촉하면서부터는 이들 나라의 이름을 굳이 세 글자에 맞추어 미리견, 영길리, 불란서, 노서아 등으로 썼다. 서양 열강의 침탈로 중화주의가 패퇴한 뒤에야 이들 나라 이름을 한 글자로 고쳐 불렀다.

 

주자학적 화이론(華夷論)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당시 조선 사람들에게, 제국은 당연히 외자 이름을 가져야 했다. 그래서 정한 '()'은 고종의 말에 따르면 우리나라를 옛부터 중국 등에서 불렀으며, 삼한을 이었기 때문에 적절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는 대청제국, 대명국 등 당시 중국왕조들이 관용적으로 쓰던 접사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곧 삼한의 땅인데, 국초에 천명을 받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지금 국호를 대한이라고 정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 또한 매번 각국의 문자를 보면 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한이라고 하였다. 이는 아마 미리 징표를 보이고 오늘이 있기를 기다린 것이니, 세상에 공표하지 않아도 세상이 모두 다 대한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을 것이다. ... 국호가 이미 정해졌으니, 원구단에 행할 고유제의 제문과 반조문에 모두 대한으로 쓰도록 하라."

-고종실록 18971011

 

 

4.3. 상제는 황제를 도우소서

 

 

앞서 보듯이 정치적으로는 입헌 군주정 운운하던 세력이 전멸한 상황. 이제 길은 하나뿐이다. 결국 대한제국은 헌법격인 대한국 국제를 통해서 전제 군주국으로 태어난다. 이런 전제 군주화는 실제로 미국인과 영국인이었던 당시 법률 고문들이 전제 군주정이 아니라면 반란의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을 정도의 막장 상황이긴 했다. 고종의 경우는 반대파도 많았다. 박영효 등의 야심가는 국내와 연락해서 꾸준히 반란 시도를 이었고, 부친인 흥선 대원군과 고종의 형제들은 수시로 반란을 일으키거나 반란과 연루되었다. 거기에 자기 아버지에게 그렇게 배웠고 자기 목숨이 오락가락한 상황을 꾸준히 겪은 고종의 불안감이 더해진 결과였다. 결정타는 앞서 언급한 독립협회의 입헌 군주국 헛발질이었다.

 

그렇게 대한제국은 1. 언제 러일전쟁이 터져서 열강에 의해 하던 것이 리셋될지 모르는 시대적 상황에서, 2. 그나마 배웠다는 인물들은 독립협회 사건 등으로 병크짓 벌리다가 밀려나가는 인적풀의 고갈이 더해지는 절망적 상황이 더해지는 전개를 바탕으로 성립되었다. 결국 대한제국은 고종이 그나마 자기 측근이나 믿을 만해 보이는 외국인 고문들 몇 명 데리고 좌충우돌 하는 형태로 이것저것 시도해보는 엽기적 상황으로 흘러갔다. 이른바 광무개혁의 시작이다

 

국제 정세나 외교에는 큰 힘을 기울였지만 감각은 부족했던 고종의 노선은 제국 선포 8년 후인 러일전쟁 때 제대로 깨지게 된다. 그 당시 현실적으로 대한제국이 살아남는 길은 러시아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고종이 러시아 황제와 같은 황제의 입장에서 협상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에 부동항을 할양하고 친러 세력으로 뛰어들면 국가가 망하지는 않을 가능성은 존재했다. 러시아의 공산화, 즉 러시아 혁명에 피의 일요일 등 러일전쟁의 패배가 미친 영향을 고려하면,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했으면 대한제국은 공산화 되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은 그렇게 높지만도 않다.

 

하지만 대한제국은 자기 땅에서 벌어지는 전쟁에서 중립국을 선언한다. 물론 일본은 대한제국의 중립국 선언을 가볍게 씹고 고종을 협박하여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하고는 뒤이어 전쟁에 승리한다.

 

 

5. 제국의 노력과 냉랭한 현실

 

 

광무개혁 문서 참고.

 

 

 

6. 광무가 융희가 되고

 

 

1905년 일본 제국은 러시아 제국과의 전쟁에 승리해 방해물을 제거한 후 을사조약을 맺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해 병탄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여기에 미합중국과 대영제국 역시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명확하게 인정하게 된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인정한 포츠머스 조약을 주선한 공로로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했다. 그가 고종을 한마디로 물먹인 이야기는 문서 참고. 고종황제는 빌헬름 2세에게 붙어서 애걸복걸해 보았고, 빌헬름 2세는 "카이저 폰 코리아"(한국의 황제께)라고 쓴 답장까지 써주면서 나름대로 관심을 표명했으며, 황제의 내탕금 백만 냥(500억 상당)을 독일은행에 입금까지 시켜주었지만 결과적으로 국제정세 하에서 독일 황제가 직접적으로 힘을 쓰지는 못하게 되었다. 일만 잘 돌아갔으면, 자신이 싫어하는 영국과 그 동맹 파트너인 일본을 견제할 좋은 찬스로서 독일이 한국에 적극 개입했을지도 모르기에 나름대로는 고종이 머리를 잘 쓴 거긴 했다. 삼국간섭의 선례도 있다. 하지만 안됐다. 그리고 삼국간섭의 결말이 을미사변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결국 대한제국이 이런 상황에서 탈출할 마지막 실날 같은 희망은 결국 러일전쟁에서의 러시아의 승리밖에는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고종은 최후의 방법으로 만국 평화 회의에 헤이그 특사를 보내게 되지만 정식 초대장을 지참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거부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던 일본은 이를 빌미로 고종을 몰아내고 순종을 옹립했다.

 

 

7. 융희가 명치가 되다

 

 

순종이 새 황제로 즉위하자 일본은 정미7조약, 기유각서 등의 불평등조약으로 군대를 해산하고 사법권, 경찰권 등의 국가 권력을 하나 둘 빼앗았으며 그렇게 대한제국은 국가로서 기본적 권리마저 모두 사라진 말 그대로 허울 뿐인 제국이 되었다. 결국 1910829일 경술국치를 맞이해 대한제국 황실은 이왕으로 격하되어 일본의 귀족으로 편입되고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이는 아무리 외교를 잘해도 자기 밑천이 없으면 허사라는 교훈을 준다.

 

 

임시정부가 세워질때 국호에 대해의견이 둘로 나뉘였는데 여운형 등은 대한제국을 비난하며 대한이 아닌 조선을 주장했고, 신석우는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였기 때문에 국호를 대한으로 국호를 정하자고 주장하였다. 이후 1948년 제헌의회에서 71일자로 대한민국이 국호로 정해졌다.

 

경술국치 이후에도 대한이란 국명은 남아서 후에 대한민국이란 이름의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는 대한제국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대한제국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이란 국호도 없었을 확률이 높고, 북한과 남한은 지금도 북조선, 남조선 하면서 지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실제 북한 정식명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기도 하고. 그 외 한민당은 고려공화국을 지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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