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견율비바사(善見律毘婆沙)
「선견율비파사」는 모두 18권으로 소승율 전반에 대한 주석서로 알려져 있지만, 특히 그 주석 원본에 대해서는 현재로선 알 수가 없다. 이 책은 일명 선견론이라고 부르는데, 그 의미는 율에 대한 모든 것을 잘 알 수 있는 주석서라는 뜻이다. 「선견율비파사」는 440년경 마가다국의 석학 불음(佛音)이 지금의 스리랑카에서 저술한 율전으로, 5세기 초 승가발타라가 한역했다. 승가발타라는 세 친의 구사론에 대항하여 순정리론과 현정론을 지은 유명한 논사이기도 하다.
이 율에서는 제3결집과 스리랑카에 대한 불교 포교 이야기가 서문에 실려 있고, 다음에 소승율 전반에 대한 주석을 싣고 있다. 여기에서는 서문에 실려 있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제1결집과 제2결집은 이미 언급한 적이 있으므로, 곧바로 제3결집을 살펴보자. 부처님이 입멸한 후 218년이 지나 파타리불국에서는 아쇼카왕이 집권하게 되었는데, 그는 전 인도를 통일했다. 처음에 아쇼카왕은 바라문 교도였고 매우 광폭해서 신하와 여자들을 마구 죽이고 전쟁으로 세월이 가는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아쇼카왕의 석주에 새겨진 글에 따르면, 그는 즉위 8년에 칼링가를 정복해서 포로 15만, 살륙 10만의 무수한 대참사를 일으킨 후 불교에 귀의했다고 한다. 그는 그 후로 도처에 불교사원을 짓고 비구들을 특히 우대했다. 따라서 세가 약해진 외도들은 먹고 살기가 어려워져 비구로 위장해서 불교사원에 모여들게 되었고, 그로 인해 불교도들 사이에는 분쟁이 그치지 않아 포살법회도 중단되는 등 불교계가 혼탁해져버렸다. 이에 아쇼카왕은 목건련자제수라는 고승에게 교세확장과 불교계의 정화를 위해 불교교리에 정통한 비구 1,000명을 모아 계율과 경전을 다시 결집할 것을 위임했다. 이것을 제3결집이라고 한다.
다음에는 아쇼카왕의 이들 마신타가 사자국, 즉 지금의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파한 이야기가 나온다. 마신타가 비구가 된 연유는 이렇다. 하루는 아쇼카왕이 목건련자제수에게 자기는 사원도 많이 짓고 공양도 수없이 했으니 그만하면 많은 공덕을 쌓은 게 아니냐고 물었다. 이에 목건련자제수는 참다운 신자가 되고 그 보람을 얻고자 하면 재물만을 보시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며 가족을 출가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아쇼카왕은 태자 마신타와 왕녀 승가밀다를 출가시켰다. 마신타는 원래 총명해서 목건련자제수의 제자가 되자 곧 불교교리에 정통하게 되었다. 그는 스승의 당부를 받고 전법을 위해 바다 건너 사자국에 도착하여 국왕 천애제수의 극진한 환대 속에 그 나라의 왕족과 대신들 그리고 일반 백성들에게 설법을 했는데, 이것은 불멸 후 236년이 지난 뒤에 있었던 일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선견율비바사 [善見律毘婆沙] (한 권으로 읽는 팔만대장경, 2007.6.10, 들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