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대한민국 이야기

09.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년~1895년) 이야기

작성자管韻|작성시간19.04.06|조회수36 목록 댓글 0


09.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 이야기

 

 

 

 

 



 

갑신년 고종 211017일 저녁 7시 안국동.

 

 

조선에서 최초로 근대적인 우편제도를 실시하기 위해 지은 우정국 낙성식의 축하연을 베푸는 날이다.

 

 

연회 시간이 되자 홍영식 이름으로 초대된 주요 내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외무 독판 김홍집을 비롯하여 민영익, 한규직, 이조연, 민병석, 윤치호 등 주요 수구파 인사들이 들어왔다.

 

 

연회가 한참 무르 익을 무렵 김옥균의 일본 서기관 스기무라와 일본 말로 얘기를 나누다가 서로 암호를 교환했다.

 

 

"()을 아시오?"

 

 

그의 말에 스기무라가 뜻을 알고 대답했다.

 

 

"요로시(좋소)"

 

 

두 사람의 암호 교환 내용은 거사가 예정대로 실시된다는 뜻이었다. 거사란 바로 갑신정변을 말한다. 김옥균이 수구당 일파를 제거하기 위한 거사 계획을 꾸몄던 것이다.

 

 

거사 계획은 이러했다.

 

 

먼저 우정국 낙성식이 거행되는 도중 세자가 혼례 때 거처하는 별궁에 불을 질러 거사의 신호로 삼는다.

 

 

별궁에 불이 나면 낙성식에 참석했던 정계의 요인들이 궁에서 화재가 났기 때문에 직책상 모두 화재 현장으로 달려갈 것이며 그 자리에서 수구파를 선별해서 모두 처치한다.

 

 

별궁은 서광범의 집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어 방화가 용이했으며 거사를 위해 힘이 좋은 이규완, 임은명, 윤경순, 최은동, 이인종, 이희정 같은 장안의 소문난 깡패들까지 끌어들였다.

 

 

윤경순과 이인종이 민영익을 맡고, 박삼룡, 황용택이 윤태준을 맡고, 최은동 신중모는 이조연이 맡고, 이규완과 임은명은 한규직을 맡아 책임지고 처지하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거기에 혹 실수할 경우를 대비해 일본인 네 명에게 조선 옷을 입혀 대비해둔 상태였다. 이어 김옥균은 거사 계획을 미국 공사 푸트와 영국 영사 애스턴을 만나 정변에 대한 계획을 미리 예고해두었었다.

 

 

그러나 식사가 끝나갈 무렵인 9시에도 아무런 기별이 없었다. 그때 박제형이 와서 별궁의 방화는 실패했으나 사람들이 우정국 쪽으로 몰려오고 있음을 김옥균에게 알려주었다.

 

 

김옥균과 스기무라는 초조해졌다.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안 연회장의 분위기도 착 가라앉았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다과가 나올 무렵 밖에서 갑자기 "불이야! 불이야!" 하는 아우성과 외침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순간 연회장은 경악과 혼란으로 뒤덮였다.

 

 

낌새를 알아채고 밖으로 도망갔던 민영익은 윤경순과 이인종들에게 칼을 맞고 다시 연회장 안으로 들어와 쓰러졌으나, 영국 외무 협판 묄렌도르프가 그런 민영익을 들쳐업고 자기 집으로 데려가 응급처지를 하였다.

 

 

거사가 실패하자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은 즉시 우정국에서 멀지 않은 일본 공사관으로 달려갔다. 일단 일본 공사 다케조오를 만난 앞일을 상의한 일행은 곧 창덕궁으로 달려갔다.

 

 

김옥균은 자신이 왕을 만나고 있는 사이에 조용한 대궐을 공포 분위기로 조성하기 위해 휘하 장사 김봉균, 이석이에게 폭약 폭발을 지시한다.

 

 

지금 김옥균의 목표는 왕과 왕비를 일본군 보호하에 두기 위해 창덕궁 금호문 앞에 있는 경우궁으로 옮긴 후 대궐을 장악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대궐의 분위기를 일부러 어지럽게 만든 것이다. 침전에서 고종과 왕비를 만난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은 우정국에서 위급한 사태가 발생하였으니 빨리 이곳을 피해야 한다는 뜻을 전했다.

 

 

왕비는 우선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김옥균의 표정을 날카롭게 살폈다. 그때 김옥균의 지시대로 김봉균 등이 폭약을 터뜨렸고 이에 왕은 크게 놀랐으며 그제서야 왕비는 왕에게 빨리 피하라고 말했다.

 

 

왕을 경우궁으로 옮긴 김옥균 등 개화당 일파와 일본 공사 다케조오는 궁궐을 빈틈없이 수비했다.

 

 

왕궁을 옮긴 것은 청국군이 반격해오더라도 창덕궁보다 궁궐을 수비하기 좋다는 전략적인 이유때문이었다.

 

 

왕과 비빈의 좌우에는 김옥균과 다케조오가 서 있고, 왕의 앞에는 서재필이 지휘하는 젊은 사관생도 13, 어전 밖에는 이인종 등을 비롯한 장안의 자객들 수십여 명이 지키고 있고,

 

 

궁궐문은 일본군이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어 김옥균 일행은 변란 소식을 듣고 궁으로 달려 들어온 윤태준, 이조연, 한규직, 민영목, 조영하, 민태호 등이 처치한다.

 

 

왕비의 신임을 받고 있는 환관 유재현을 많은 궁인들이 보는 앞에서 본보기로 목을 친다. 이어 그들은 서둘러 새 내각의 재가를 요청했다.

 

 

새 내각은 영의정엔 왕의 종형인 이재원, 좌의정엔 홍영식, 박영효와 서광범에게는 군사권과 경찰권을 쥐게 하고, 서재필은 병조참판이 되었으며 김옥균은 내무와 재무권을 장악하고 도승지에는 박영효의 형 박영교가 임명됐다.

 

 

새 내각의 특징은 대원군파의 대거 등장이었다.

 

 

영의정 이재원은 대원군의 조카이며 좌찬성 이재면은 대원군의 아들이고 병조판서 이재완 역시 대원군의 조카이며 세자와 보필하고 가르치는 직책인 세마와 설서에는 각각 대원군의 손자와 외손인 이준용과 조한국이 기용되었다.

 

 

왕비는 새 내각의 명단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현재 대궐의 수구파 대관들은 모조리 제거되고 대원군계와 조씨 일파들은 실권 없는 직책을 차지했으며 주요 핵심 권력은 개화파로 권력분배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왕비는 순간 김옥균의 속셈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

 

 

'너는 지금 일본을 등에 업고 청국 세력과 결탁된 대궐의 권력층을 몰아내고 왕권을 장악하여 개혁하겠다는 야망을 보이고 있구나.'

 

 

그날, 개화파가 명성황후 큰아버지의 외손이자 경기 감사인 심상훈의 입궐을 허락한 것은 큰 실수가 되고 만다.

 

 

심상훈은 전날 밤 사태를 파악하고 김윤식, 민영익, 원세개 등을 만나 논의를 마친 후 개화돵 반역자들에 의해 감금되다시피한 왕에게 정확한 정보를 알리기 위해서 찾아왔던 것이다.

 

 

심상훈은 왕에게 낮은 목소리로 정변의 진상과 개화파의 계략을 알려주고 왕비에게는 따로 은밀히 피살된 대신들의 이름을 말했다. 그 말은 들은 왕비의 얼굴 순간 사색이 되었다.

 

 

이어 심상훈은 이제 방법은 대궐로 다시 환궁을 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알린다. 그 후 청국이 나서기로 돼있다는 것이다.

 

 

심상훈이 물러간 후 왕비는 왕에게 그 사실을 숨긴 채, 김옥균을 불러 왕궁을 즉각 창덕궁 본궁으로 옮길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개화파는 난색을 표시한다. 이에 왕비는 더욱 강력하게 환궁을 주장했고 결국 일본 공사 다케조에가 환궁을 수락하게 된다.

 

 

이어 환궁이 시작되었고 왕은 입궐 후 대조전에 들지 않고 관물헌에 거처를 정했고, 김옥균 등 개화파 요인들은 다케조에와 숙식을 함께 했다.

 

 

그날 밤 창덕궁 수비대가 날이 저물어 궁궐문을 닫기 시작할 때 한 떼의 청국병이 몰려와 선인문을 닫지 못하게 하였다. 청국군의 도발행위였다. 그 소식은 바로 개화파 병영에 전달되었다.

 

 

개화파는 선제공격을 주장했지만 다케조에는 청국과의 대결을 피하기 위해 선제공격을 피하고 수세작전에만 몰두했다.

 

 

다음날 1019일 아침 김옥균은 청국군의 도발에 대해 원세개에게 강력한 항의문을 전달했다. 그러나 김옥균은 다케조에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게 된다.

 

 

지금 형세로는 일본군이 대궐에 오래 주둔하는 것이 불리해서 병력을 철수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다케조에가 선제공격을 하지 않고 또 일본군의 철수를 선포한 것은 모두 본국의 지령이었다.

 

 

그 때 청국은 프랑스와의 인도차이나전쟁에서 휴전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 섣불리 싸움을 벌일 처지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김옥균이 다케조에와 논쟁을 벌이고 있는 사이 총격소리가 들렸다.

 

 

청국군이 창덕궁의 돈문과 남문에서 협공을 시작했던 것이다.

 

 

원세개가 이끄는 8백의 병력은 돈화문에서, 오조유가 이끄는 4백의 병력은 선인문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이에 다케조에는 할 수 없이 요새를 사수하고 방어를 철저히 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청국군의 포위가 좁혀 들어오자 일본군은 궁지에 몰리고 만다. 일본군의 희생도 점차 늘어났다. 이어 다케조에는 다시 한번 결단을 내린다.

 

 

"일이 이쯤 되면 어차피 일본군은 청국군에게 패해 여기서 모두 죽을 뿐이오. 나는 폐하를 원하시는 대로 보내 드릴 것이오. 당신들은 폐하를 따르든지 나를 따르든지 둘 중에 하나를 지금 선택하시오."

 

 

다케조에의 결단에 주위는 금세 숙연해지고 말았다. 김옥균은 절망과 비탄에 쓰러질 듯했다. 이제 대세는 판명이 났던 것이다.

 

 

이어 각자 입장 표명을 하기 시작했다. 김옥균, 서광범, 서재필, 박영효 등은 다케조오를 따르기로 했고 홍영식과 박영교는 어가를 따르기로 결정했다. 개화파 일행은 다케조에를 따라 일본 공사관을 향해 궁궐 문을 나섰고, 국왕의 어가는 옥류천으로 내려가 북장문을 향했다.

 

 

그 때 왕을 따라간 홍영식, 박영교를 비롯한 개화파와 사관생도 7명은 북묘에 도착하자마자 청국군 오조유에 의해 모조리 피살되는 것으로써 개화파의 3일 천하는 허무한 종말을 맞게 된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