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충무공 이순신(忠武公 李舜臣, 1545년~1598년)
이순신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자 임진왜란 시기 조선 수군을 통솔했던 지휘관으로 자는 여해(汝諧)이며, 시호는 충무공(忠武公)이다.
임진왜란 시기 조선 수군을 이끌고 해상에서 연전연승을 거듭하며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북상을 저지하였다. 적과 싸워 모든 전투에서 최소한의 희생으로 항상 승전을 거두었으며, 조정으로부터는 지원은커녕 불합리한 모함과 추궁을 당하였으나 끝까지 충성을 다했으며, 임진왜란 최후의 대전투인 노량 해전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사후에도 조정에서는 관직을 추증했고, 선비들은 찬양시(詩)를 지었으며, 백성들은 추모비를 세우는 등 지속적으로 많은 추앙을 받아왔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에 와서도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으로 꼽힌다. 현대 한국에서 성웅, 명장, 군신이라는 최고급 수사들이 이름 앞에 붙어도 어떤 이의도 제기받지 않는,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위인 중 한 명이다. 가장 존경하는 위인을 묻는 설문조사에서도 늘 순위권을 다투며, 한국에서 성웅이라는 호칭은 일반적으로 이순신에게만 사용되고 있다.
사실 이순신이 이토록 위대한 평가를 받는 이유는 그가 한국사의 위인이며, 빛나는 군사업적을 이뤘다는 점을 떠나서, 같은 인간으로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성인(聖人)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잔혹하고 거대한 형태의 폭력인 "전쟁"이라는 상황을 수행하며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감당하면서도, 한 사람이 태어나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절망과 역경, 시련을 겪으면서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는데, 전쟁 기간 동안 여러 사람들의 질시와 모함으로 인한 파면, 어머니와 아들까지 연이은 죽음으로 부모와 자식을 전시에 잃었으며, 관리로서 받은 조정의 비합리적인 처우 등 앞으로는 왜적과 싸우면서 뒤로는 조정과 임금이라는 내부의 적을 홀로 버텨야 했던, 실로 참담하고도 절망적인 상황을 좌절하지 않고 극복해냈고, 천재적인 능력과 노력을 발휘하여 임진왜란 당시 존망의 위기에 빠진 조국과 백성을 끝끝내 지켜냈다.
그는 웃음이 적고 행동이 단아했으며, 좌절과 포기를 모른 체 제 사명에만 충실하게 전장에서 싸우기를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위신을 높이고자 높으신 분들에게 뇌물을 주는 등의 부정행위를 하지 않고 무관으로서의 본분에만 충실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원리원칙적인 성향과 굉장히 청렴한 성격 탓에, 당시 상사들과 갈등이 많아 임진왜란 전에는 인사이동이 자주 있어 여러 지역을 옮겨 다녔다. 한 번은 당시 임금 바로 밑으로 강력한 권력과 인사권을 가지고 있던 이조판서(현재의 행정부 장관)였던 율곡 이이가 당시 같은 덕수 이씨 가문의 말단 무관이었던 이순신과의 만남을 먼저 요청하였으나, 이순신은 만남으로 인해 주변에 오해의 여지가 생기고 혹시나 부적절한 인사권이 제시될 수도 있다고 판단, 이순신이 만남을 거절해버린 실제 기록이 있을 정도로 인간이 기본적으로 갈망하는 권위, 권력 같은 원초적인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자신의 신념대로만 매사에 임하는, 참으로 견줄 이 없는 인간이었다. 전장에서 전투를 벌이다 전사하던 그 순간까지 누구의 인정과 보상도 바라지 않고, 오직 나라와 백성을 구하고자 죽는 순간까지 무인으로서 나라를 위해 헌신하였다. 몇몇 전투는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공적을 세워 어떻게 이걸 이뤄낸 건지 아직도 학설이 분분할 정도이다. 가령 명량 해전의 초반부에서 물살이 바뀌기 전까지 약 두 시간 가량, 이순신은 대장선 한 척으로 일본측 함선 133척과 정면으로 붙어 하나하나 박살내고 있었다. 분명히 조선측과 일본측의 풍부한 사료로 교차검증이 가능한 기록임에도 너무 믿어지지 않아서, 대중들이 오히려 왜곡된 유사역사학자들의 주장을 믿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임진왜란과 같은 전란의 시기에 때맞춰 등장하여 경이로운 활약상을 남긴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 하겠다.
또한 함대의 설계 및 훈련, 운영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전국이 털리는 바람에 교지를 쓰거나 기록을 남길 종이마저 부족해진 중앙 정부에게 종이를 바치기도 했다. 남해안 여러 섬에 둔전(屯田)을 만들어 식량을 자급자족했으며, 어로 활동으로 군량과 군비를 충당하기도 했다. 당시 기피대상이던 수군의 병력 유지를 위해 직접 발 벗고 뛰어다닌 결과 10,000명 이상의 병력을 중앙 정부의 지원 없이 유지했다. 이순신이 중앙 정부에 무언가를 요구했던 것은, 역병으로 병사들이 죽어나갈 때 의원을 보내달라는 것 한 번 뿐이었다. 반면 원균에게는 오히려 5천 명의 병력을 지원해주기까지 했는데도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였다(...). 자기 휘하로 피난온 백성들을 잘 보살피고 다스려 칭송을 받으며 목민관으로서도 훌륭한 면모를 보였다. 다방면으로 뛰어난 업적과 충성심으로 인해 적국 일본에서조차 사후 연구 및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2. 직위
유명 수군 도독 조선국 증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덕풍부원군
(有明 水軍 都督 朝鮮國 贈 效忠杖義迪毅協力宣武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 兼 領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 德豐府院君)
행 정헌대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行 正憲大夫 全羅左道 水軍節度使 兼 三道水軍統制使)
시 충무공 이순신 (諡 忠武公李舜臣)
• 사후 추증 직위 해석:
◦ 명 직위: 수군 도독
◦ 공신호: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 품계: 대광보국숭록대부
◦ 직위: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 군호: 덕풍부원군
◦ 시호: 충무공
• 생전 직위 해석:
◦ 품계: 정헌대부
◦ 직위: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상기된 80여 자의 기나긴 직위명들을 현대식으로 설명하자면, 이 충무공은 생전에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으로서 장관급의 명예직과 예우를 받은 뒤, 해군 작전사령관 및 함대사령관을 겸직하고,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미 해군 원수직을 수여받은 셈이 된다.(물론 미국이 명국과 같은 조공 상태에 있는 상국이란 의미는 아니니 오해는 금물이다.) 나아가 사후에는 대한민국장과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고, 총리급의 명예직과 예우를 수여받은 것이 된다. 훈장의 경우에는 다소 애매한 비유이지만, 수여된 관직들의 경우 일반인들이 쉽게 인식하는 현재의 관제로 비교하자면 위와 같은 셈이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미 해군 대원수와 무임소 장관직 및 명예 부통령직을 동시에 받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즉, 무임소 장관직과 명예 부통령직은 대한민국 대통령이 취임함과 동시에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이 되며, 대내외적 인정을 받기에 예우에서 밀리지만 미국에서는 동급으로 대우하는 셈이고, 죽은 뒤 200년 가까이 되어서야 미국에서 받은 최고위 계급과 유사한 국무총리를 부여받은 격이다.
생전에 이순신이 계급이 낮을 때 장군이라고 불린 적은 있지만, 정작 가장 잘 알려진 시절에는 장군으로 불리지 않았다. 상기된 직책들 가운데 가장 품계가 낮은 직책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인데, 수군절도사면 절충장군 품계로 장군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품계 중 최상의 품계이며, 또한 당상관에 해당되었다. 당연히 조선시대에 정3품 당상관 이상의 관리에게, 통제사또나 영감이라고 부르지, 장군이라는 호칭을 쓰는 일은 없었다. 게다가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는 종2품 직으로 가의/가선대부 품계가 필요했는데 이는 엄연히 영감이라고 불리는 문반 품계였으니 장군이라고 부르면 모욕이다. 그러나 현대의 통상적인 장군이라는 호칭이 대중들에게 좀 더 익숙하게 다가오는 말이었고, 여러 미디어에서 대중들에게 익숙한 장군이라는 호칭을 쓰면서 이순신 장군이라는 칭호가 굳어지게 되었다. 대한민국 해군이나 관련 관계자들은 현대에 육군 계열의 칭호로 쓰이는 장군 칭호를 기피하고 대신 해군이 사용하는 칭호인 제독을 붙여서 이순신 제독이라고 부르는 편이다. 현대 대한민국 국군에서 육군 장성은 장군, 해군 장성은 제독 칭호를 쓰기 때문이다.
시대적으로도 장군이라는 명칭은 맞지 않고, 현대 기준에서는 제독 혹은 원수라고 부르거나, 당시 기준으로 정3품부터는 군대를 전역하고 문관으로서 올라가야 했기에 더이상 장군이 아니라 사또나 영감 그리고 정2품부터는 대감이라고 불러야 한다. 따라서 수사또, 수사 영감, 통제사또, 통제사 영감, 통상 대감(정헌대부 시절), 종3품 이하일땐 전부 나리(나으리) 등으로 부르는게 올바른 역사적 고증이다. 이순신/평가 항목 참조. 외국에서도 이순신 같은 해군 지휘관은 철저히 Admiral이라고 붙여 부른다.
3. 어록
三尺誓天삼척서천 山河動色산하동색
一揮掃蕩일휘소탕 血染山河혈염산하
석 자 칼에 맹세하니 산과 강이 떨고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
이순신의 장검 두 자루에 새겨져 있는 문구이며, 해당 문구는 이순신의 친필이다.
鑄得雙龍劍주득쌍룡검 千秋氣尙雄천추기상웅
盟山誓海意맹산서해의 忠憤古今同충분고금동
쌍룡검을 만드니 천추에 기상이 웅장하도다.
산과 바다에 맹세한 뜻이 있으니 충성스런 의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도다.
쌍룡검에 새겨져 있는 문구
閑山島月明夜上戍樓한산도월명야상수루 撫大刀深愁時무대도심수시 何處一聲羌笛更添愁하처일성강적경첨수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던 차에
어디서 일성 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이순신의 시조 ‘한산섬 달 밝은 밤에’
勿令妄動물령망동 靜重如山정중여산
망령되이 움직이지 말라! 산처럼 무거이 침착하라!
옥포 해전을 개시하면서
今臣戰船금신전선 尙有十二 상유십이
戰船雖寡전선수과 微臣不死則미신불사즉 不敢侮我矣불감모아의
지금 신에게 아직 열두 척 전선이 있사옵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므로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충무공전서』, 이분, 「행록」에 실려있는 명량 해전에 앞서 올린 장계.
必死則生필사즉생 必生則死필생즉사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난중일기
此讎若除차수약제 死即無憾사즉무감
이 원수를 갚을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이충무공행록에 기록된 노량 해전을 앞두고 한 맹세
今日固决死금일고결사 願天必殲此賊원천필섬차적
오늘 진실로 죽음을 각오하오니, 하늘에 바라건대 반드시 이 적을 섬멸하게 하여 주소서!
백사집에 기록된 노량 해전을 앞두고 한 맹세
戰方急전방급 愼勿言我死 신물언아사
싸움이 급하다. 부디 내 죽음을 말하지 말라.
노량 해전에서 전사하면서 남긴 유언 - 이분의 충무공행록
1545년(1세) 인종 1년
◦ 3월 8일 : 서울 건천동에서 이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남.
• 1565년(21세) 명종 20년
◦ 이즈음에 방진의 딸인 방수진과 결혼. 그 전년도였을 수도 있다.
• 1573년(29세) 선조 6년
◦ 훈련원 별과에 응시, 낙마(落馬)해서 탈락하다.
• 1576년(32세) 선조 9년
◦ 2월 : 식년시 무과에 급제.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첫 관직 생활을 시작하다.
◦ 12월 : 종9품 함경도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으로 부임하다.
• 1579년(35세) 선조 12년
◦ 2월 : 종8품 한성훈련원 봉사로 재직.
◦ 10월 : 충청도 병마 절도사 군관이 되어 충청도 해미 병영으로 가다.
• 1580년(36세) 선조 13년
◦ 둘째 형 이요신이 죽다.
◦ 7월 : 전라 좌수영 관내 발포 종4품 수군만호(水軍萬戶)(종4품 이상의 무관부터 장군)로 전근, 서익이 불러 부당 인사를 제안하나 일언지하에 거절함.
• 1582년(38세) 선조 15년
◦ 1월 : 군기경차관으로 온 서익이 과거의 일에 대한 보복으로 근무 태만이라 거짓 보고를 올려 발포 수군 만호 직에서 파직되다.
◦ 5월 : 종8품 훈련원 봉사로 복직되다.
• 1583년(39세) 선조 16년
◦ 7월 : 함경도 남병사 이용이 이순신을 자신의 군관으로 삼다.
◦ 8월 : 여진족 토벌의 공을 세워 훈련원 참군으로 승진하다.
◦ 10월 : 경원 고을 건원보의 권관으로 자리를 옮기다.
◦ 11월 15일 : 부친 이정이 74세의 나이로 별세하다.
• 1584년(40세) 선조 17년
◦ 1월 : 아버지의 별세 소식을 접하고, 잠시 벼슬을 떠나 삼년상을 치른다.
• 1586년(42세) 선조 19년
◦ 1월 : 복직하여 사복시 주부(종6품)가 되다.
◦ 2월 : 종4품 조산보 만호(造山堡萬戶)(종4품 이상의 장군직)로 임명되다.
• 1587년(43세) 선조 20년
◦ 1월 : 맏형이었던 이희신이 사망하다.
◦ 8월 : 정언신의 추천으로 녹도 둔전사의(鹿島 屯田事宜)도 겸직하다.
◦ 10월 : 녹둔도 전투 발발. 이순신이 이일 측에 지원 병력을 요청했으나 거절, 그리고 전투 후 북병사 이일의 모함으로 1차 백의종군 처벌이 내려지다.
• 1588년(44세) 선조 21년
◦ 1월 : 여진족 시전부락 공격에 참가, 공을 세워 사면되어 백의종군 해제.
◦ 6월 : 아산으로 내려가다.
• 1589년(45세) 선조 22년
◦ 1월 : 비변사에서 불차채용을 하게 되자 이산해와 정언신의 추천을 받다.
◦ 2월 : 이광의 추천으로 전라도 감사 휘하 조방장에 임명되다.
◦ 11월 : 선전관으로 임명되어 서울로 올라가다.
◦ 12월 : 류성룡의 천거로 전라도 정읍현감(종6품)이 되다.
• 1590년(46세) 선조 23년
◦ 7월 : 류성룡이 고사리진 병마첨절제사(종3품)로 천거했으나 사간원의 반대로 개정되다.
◦ 8월: 평안도 만포진 병마첨절제사로 천거되었으나, 역시 사간원에서 지나치게 진급이 빠르다는 이유로 개정되다.
• 1591년(47세) 선조 24년
◦ 2월 13일 : 이억기, 이천, 양응지와 함께 이순신을 남해 요해지로 임명하여 공을 세우게 하라는 선조의 전교를 받았고, 이전처럼 진급이 빠르다는 이유로 거절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종6품 정읍현감에서 종4품 진도군수(珍島郡守)로 승진시킨 후, 부임하기도 전에 종3품 가리포진 수군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로 전임시켰으며, 이 또한 부임하기 전에 정3품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초수(超授)하다.
• 1592년(48세) 선조 25년
◦ 4월 12일 : 거북선(귀선) 건조를 완료하다.
◦ 4월 13일 : 임진왜란이 발발하다.
◦ 4월 15일 : 전쟁 발발 소식을 고지 받다.
◦ 5월 4일 : 전라 좌수군의 1차 출동.
◦ 5월 7일 : 옥포와 합포에서 승리로 거두다.
◦ 5월 8일 : 적진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 5월 29일 : 전라 좌수군의 2차 출동. 사천 앞바다에서 승리로 거두다. 이때 이순신이 총상을 입었다. 거북선을 실전에서 처음으로 사용하다.
◦ 6월 2일 : 당포 앞바다에서 승리를 거두다.
◦ 6월 5일 : 당항포에서 첫번째 승리를 거두다.
◦ 6월 7일 : 율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 7월 6일 : 전라 좌수군의 3차 출동.
◦ 7월 8일 : 한산도에서 승리를 거두다.
◦ 7월 10일 : 안골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 8월 24일: 전라좌수군의 4차 출동.
◦ 8월 29일: 장림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 9월 1일 : 화준구미, 다대포, 서평포, 절영도, 초량목, 부산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 1593년(49세) 선조 26년
◦ 2월 6일 : 전라 좌수군의 5차 출동.
◦ 2월 10일 : 웅포로 진격하다.
◦ 3월 6일 : 웅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 5월 2일 : 웅포에서 두 번째 승리를 거두다.
◦ 7월 15일 : 전라 좌수영 본영을 한산도로 이주하다.
◦ 8월 15일 : 초대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다.
• 1594년(50세) 선조 27년
◦ 삼도 수군 통제사 이순신의 6번째 출동.
◦ 3월 4일 : 당항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 9월 29일 : 장문포에서 첫 번째 승리를 거두다.
◦ 10월 1일 : 영등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 10월 4일 : 장문포에서 두 번째 승리를 거두다.
• 1597년(53세) 선조 30년
◦ 2월 6일 : 선조가 이순신의 파직을 명하다.
◦ 2월 10일 : 부산포로 출정해 무력 시위를 벌이고 돌아오다.
◦ 2월 25일 : 통제사 직에서 해임되다.
◦ 2월 26일 : 후임 삼도 수군 통제사인 원균에게 인계 후 서울로 압송당하다.
◦ 3월 4일 : 감옥에 갇히다.
◦ 4월 1일 : 옥중 생활을 마치고 나오다.
◦ 4월 2일 : 류성룡을 만난 후,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을 지시 받고 내려가던 도중 아산에 들러 잠시 머물다.
◦ 4월 11일 : 어머니가 별세하다.
◦ 4월 13일 :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접하다.
◦ 7월 23일 : 이조판서 이항복, 경림군 김명원의 건의로 이순신이 종2품 삼도 수군 통제사에 복직하다.
◦ 8월 15일 : 선전관 박천봉이 찾아와 수군을 폐하라는 지시를 전하다.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 배 12척이 남아있나이다."라는 장계를 올리며 수군의 폐지를 반대하다.
◦ 8월 18일 : 경상 우수사 배설로부터 전선 12척을 인계받다.
◦ 8월 28일 : 어란진에서 왜선 8척과 조우, 교전 끝에 승리를 거두다.
◦ 8월 29일 : 진도 벽파진으로 진을 옮기다.
◦ 9월 2일 : 배설이 도주하다.
◦ 9월 16일 : 전선 13척과 피난선에 힘입어 명량(鳴梁)입구인 임하도의 좁은 목(우수영 앞바다)을 이용하여 일본군 133척과 맞서 싸워 승리하다.
◦ 10월 14일 : 셋째 아들 이면의 전사 소식을 듣다.
◦ 10월 29일 : 고하도로 진을 옮기다.
• 1598년(54세) 선조 31년
◦ 2월 17일 : 고금도로 이진하여, 새로운 통제영으로 삼다.
◦ 7월 19일 : 절이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 9월 20일 : 명군과 합류해 장도에서 승리를 거두다.
◦ 10월 7일 : 명군과 합류해 왜교성에서 전투를 진행하였으나, 명군의 무리한 전술로 소득을 얻지 못하고 물러나다.
◦ 11월 19일 : 퇴각하는 왜군을 노량에서 요격하던 중 관음포에서 총탄에 맞아 전사하다.
• 1604년 선조 37년
◦ 덕풍부원군으로 추봉되었으며 이후 좌의정에 추증되다.
• 1643년 인조 21년
◦ 충무라는 시호를 받다.
• 1706년 숙종 32년
◦ 충청도 유생들의 상소로 사당 건립을 윤허받다.
• 1707년 숙종 33년
◦ 숙종이 친히 현충사(顯忠祠)라는 현판을 하사하다.
• 1793년 정조 17년
◦ 영의정으로 추증되다.
5.2. 태어나기 이전
본관은 덕수 이씨로서, 고려 때의 중랑장 이돈수(李敦守)의 12세손이자 조선 초의 영중추부사였던 이변(李邊)의 후손이다. 아버지 이정(李貞)은 부인 초계 변씨와의 사이에서 네 아들을 두었는데, 신(臣)을 돌림자로 중국 고대의 성인인 복희, 제요, 제순, 대우 임금의 이름을 차례대로 붙여 희신(羲臣), 요신(堯臣), 순신(舜臣), 우신(禹臣)이라 지었다. 할아버지 이백록이 태몽에 나타나 이름을 '순'이라 지으라고 했다는 설화도 있지만, 이러한 견지에서 보면 설화가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임진왜란 전까지만 해도 덕수 이씨는 문반에 가까웠는데, 할아버지가 기묘사화 때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하고 집안이 무반으로 전환하게 되었다는 낭설이 퍼져 있지만 기록으로 보나 상식적으로 보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사실 덕수 이씨는 오늘날 한국 기준 인구 4만 명 정도의 적은 성씨치고는 파가 굉장히 많고 저마다 특색이 달랐다. 그 점을 무시하고 이이나 이식 같은 유명 인사 몇 명만 떠올리고 멋대로 문반 명문으로 결론짓고 상상의 나래를 편 것일 뿐이다.
기록상 이순신의 할아버지인 이백록(李百祿)은 사림파에 속하기는 했지만 기묘사화에 연루되지 않았으며 그 이후 기록에도 등장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백록은 기묘사화 이후에 관직에 진출했다. 1522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어느 순간부터 평시서 봉사를 역임하다가 시정잡배들과 어울리고 다닌다고 파직되었다거나, 중종의 국상 기간에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벌였다는 좋지 않은 기록이기는 하지만 당연히 그것으로 사형당하지는 않았다. 명종 3년에는 아들을 혼인시키기는 했지만 잔치를 벌였다는 것은 이백록이 아닌 이준으로 이백록은 무고하다는 탄원이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이러한 까닭에 집안 자체도 역적으로 몰리지 않았으며, 애초에 역적 집안 출신이면 무과고 잡과고 간에 과거 응시를 못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사육신의 한 명인 박팽년의 가문인데,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은 당시 멸문지화를 간신히 면해 후에 성종 때에 가문의 죄에 연좌되는 것을 면하고 이름까지 받았으나, 이후로도 박팽년의 자손들은 조상이 뒤집어쓴 역적의 오명을 벗기 전까진 과거 응시를 할 수 없어서 꽤 근래까지도 곤궁하게 살아야 했다.
또한 기묘사화에 연루됐던 사람들은 선조 1년에 신원되어, 오히려 기묘사화에 연루된 이들을 기묘제현(己卯諸賢)이라 부르며 그것이 가문의 영광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조광조와 같이 사사되었던 김식의 증손자 김육(金堉)은 오히려 이로 말미암아 조정 대신 중에서도 산림과 대등한 인물로 여겨졌고 재상에 왕실과 인척까지 맺게 되었다. 그전부터 사림들은 기묘사화에 연루된 사람들을 동정적으로 보았고, 훈구 권신들에게 청렴한 선비들이 억울하게 희생된 것으로 여기는 여론이 강했으니 일이 이렇게 풀린 것이다. 여담으로 위의 김육이 기묘사화와 관련된 선비들의 전기를 집성한 기묘록(己卯錄)에는 이백록도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본편도 아닌 속집에, 그것도 별과에 천거된 사람의 하나로 이름만 올리고 있을 뿐이다.
그런고로 흔히 알려진 '칭기즈 칸 어록'을 본따 창작된 이순신의 어록 중에서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몰락한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라났다."는 대목은 엄연히 존재하는 기록을 무시하는 것이다.
5.3. 임진왜란 전야까지
1545년 봄에 서울 건천동 부근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 일대이며, 때문에 이 근처에 충무로라는 이름을 붙였다. 소년 시절에 충남 아산으로 거주를 옮겼는데, 참외를 주지 않았다고 말을 몰아 참외밭을 짓밟았다는 등의 일화로 보아 어려서는 상당한 개구쟁이였던 모양이다. 공이 20세 되던 1565년에는 무관 출신으로 보성 군수를 지냈던 방진(方辰)의 딸 방수진(方守震)과 혼인하였고, 22세 즈음에 처음으로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28세에 무과 별시에 응시하여 승마 도중에 갑자기 말이 넘어져 낙방했는데, 전하는 이야기에 따라서는 빈혈이었다고도 하고 이때 발목을 다쳤다거나 다리가 부러졌다고도 한다. 위인전에는 낙마한 직후 시험장 안에서 자란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그 껍질로 다리를 동여매고 시험을 속개했으나 결국 탈락했다고 묘사되어 있다. 다시 이로부터 4년이 지나 32세가 되던 1576년 2월이 되어서야 식년 무과에 급제하여 12월에 함경도 동구비보에 종9품 권관으로 부임했다. 이렇게 이순신은 국경을 수비하는 야전에서 육군 초급 장교로 처음 공직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함경도 국경에서 근무하던 초급 장교 시절 <함경도일기>라는 진중 일기를 남겼다는 소문이 돈 적이 있는데, 사실은 이미 이 일기(단 하루치 뿐이었다)가 일반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2000년대 중반부터 실은 위조품이 아닐까 하는 의혹을 받고 있었다. 다만 발견자인 노산 이은상, 그리고 이순신의 일기로 고증한 서지연구가 이종학 등이 워낙 쟁쟁한 인물이라 고민하고 있었던 것인데, 결국 몇몇 연구자들이 김성일의 유고집인 학봉전집에 실린 1579년 여행기 북정일록의 글자 몇 개를 바꾸고 날짜와 간지를 고증에 맞게 수정한 정교한 위조품임을 밝혀냈다. 이순신이 그 시기에 실제로 일기를 썼는지 안 썼는지를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현재 발견된 실제 일기는 없다.
동구비보의 권관으로 3년을 근무한 이순신은 중앙직인 훈련원 봉사로 배속되었다. 종8품의 낮은 품계였으나 이순신은 병조정랑인 서익이 가까운 사람을 특진시키려 하자 반대했고, 이 때문인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8개월 만에 충청도 절도사의 군관이 되었다. 일단은 좌천이라 할 수 있으나 이 일로 그는 이름을 알리게 됐다.
일본에 이상 징후가 포착되자 선조는 능력있는 장군들을 특진시켜 배치하게 되는데 이순신도 그 중 하나로 서른여섯에 전라도 고흥 발포진의 수군 만호(종4품)로 부임해서 최초의 수군 근무를 시작한다. 이 전까지 종8품 이하였던 이순신은 그야말로 파격적인 승진을 한 셈이다. 기록상으로 보아 발포는 판옥선 2척, 사후선 2척의 소형 수군 기지로 파악된다. 여기에서도 적지 않은 일화를 남겼는데, 오동나무 사건과 이 사건 이후 부임해 온 전라 좌수사가 전임자인 서익의 말만 듣고 이순신을 해코지하려고 하다가 당시 전라 감영의 도사(都事) 직을 수행하고 있던 조헌이 이순신의 실제 근무 평점을 조목조목 들먹이고 타 진포와 비교하는 식으로 정면 논파해서 이순신에 대한 평가를 고쳤다는 일화가 제일 유명하다. 어쨌든 서익과의 악연은 계속 이어진 셈이었고, 이순신은 군기 경차관으로 온 서익이 조정에 근무 태만이라고 거짓 상소를 올리는 바람에 1581년 2년 전 재직한 훈련원 봉사로 강등되었다.
이후 1583년 10월, 병마 절도사 발포 만호 시절 성박의 일로 이순신을 부당하게 괴롭혔던 전라 좌수사 이용이 함경도로 전근가면서 마침 모함을 받아 파직돼 있던 이순신을 일부러 지목해서 자기 종사관으로 삼아 함경도의 권관이 되었다. 다만 이는 이순신을 일부러 괴롭히려던 건 아니고, 이용이 잘못을 뉘우치고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때 이순신은 여진족의 족장 울지내를 유인 작전으로 생포했다. 다만 상관 김우서의 모함으로 전공은 인정받지 못했다. 김우서는 이순신의 전공을 시기하여 상관에게 보고하지 않고 행동했다고 억지를 부렸다. 그래도 그 이후 동년 11월엔 훈련원 참군(종7품)이 되었다. 그러나 그 직후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는데 당시 북방 최전방에 있다가 귀경하고 있던 이순신이었기에 이 소식은 이듬해 1월에서야 이순신에게 전해졌다. 당시의 풍습에 따라 3년상을 지낸 이순신은 사복시 주부(종6품)로 복직되었다.
1586년, 42세에 함경도 조산보 만호로 임명되었고, 1년 반 뒤에는 녹둔도의 둔전관을 겸했다. 이때 함경도 국경에서 근무 당시 북병사 이일에게 밉보여 녹둔도 전투 이후 군관 이운룡, 이경록과 함께 자신의 첫 번째 백의종군을 시작하게 된다. 보통 1,000명 이상의 기마병에게 기습당한 상황에서 불과 수십 명으로 방어에 성공하고 반격까지 감행, 절반 이상의 포로를 구출해 피해를 최소화한 전투를 패전이라고 하진 않는다. 아군 피해도 방어가 취약하니 병력을 지원해 달라는 이순신의 요청을 북병사 이일이 거부해서 생긴 일이었으며 조정에도 대략적인 전말이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 선조는 이일의 장계를 받고도 일반적으로 패배한 것과는 다르다고 구분을 짓고 장형을 친 후 백의종군으로 마무리지었다. 아래는 관련 기록이다.
이경록(李慶祿)과 이순신(李舜臣) 등을 잡아올 것에 대한 비변사의 공사(公事)를 입계하자, 전교하였다.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병사(兵使)로 하여금 장형(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 종군(白衣從軍)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선조 20년 10일 16일자'
녹둔도 전투는 조정에 이순신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백의종군 석 달만에 이일이 이끄는 400여 명의 여진족 토벌군에 합류해 선조 21년인 1588년 1월에 일명 '신전부락 전투'로 불리는 대대적인 여진족 토벌전에서 추장인 우을기내(于乙其乃)를 생포하는 공을 세우고 백의종군을 끝낸 후 아산으로 가서 가족들과 함께 지냈다.
1589년 12월에 류성룡이 천거하여 전라도 정읍 현감이 되었다. 정읍이 독립된 현으로 만들어진 후 최초로 부임한 현감이 이순신이다. 이순신은 임지에서 선정을 베풀어 칭찬이 자자하였다. 1590년 8월 선조는 종3품의 직책인 고사리진과 만포진의 첨사로 거듭 삼으려 했으나 한 번에 종6품에서 종3품(10급 승진)까지 진급할 수 없다고 논핵되어 개정되었다.
1590년부터 1591년까지 이순신의 인사 발령은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고을 현감, 육해군 절제사의 직책의 발령이 계속되었다. 이런 혼란스러울 정도로 급속한 인사 발령 및 승진은 당시 조선의 급박한 전쟁 준비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유능하고 실전 경험 있는 장수를 최전선에 배치하기 위한 특례였다. 또한 이는 이미 이순신이 이때부터 조정에 유망한 장수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간관들이 이순신이 관례에 어긋날 정도로 승진이 너무 빠르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는 불차채용이라는 방식으로 비변사가 처음 선조에게 올린 불차채용 대상자 명단에는 이순신의 이름이 없었다. 그러나 선조가 따로 몇몇 장수를 거론하여 추가시켰는데, 여기에 이순신이 포함되어 있었다. 1591년 2월에 선조는 이전의 논핵을 피하기 위해 벼슬의 각 단계마다 임명하여 제수하고 승진시키는 방법으로 정읍 현감에서 진도 군수로 승진시키고, 부임하기도 전에 가리포첨절제사로 전임하고, 곧바로 이번에도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 좌수사로 임명했다. 이 때 간관들이 승진이 너무 빠르다며 간하자 선조는 다른 사람의 승진은 좀 늦출 수도 있다고 하면서도 이순신의 전라 좌수사 발탁은 끝까지 고집했고 결과적으로 이것이 조선을 구하는 신의 한수가 되었다.
드디어 1591년 47세로 정3품인 전라 좌도 수군 절도사에 임명되었다. 2년 만에 종6품에서 정3품이 된 것인데 이는 조선 왕조에서 빠른 속도의 승진으로 이름난 조광조와 비슷한 속도였다. 조광조는 2년 4개월 만에 종6품인 사간원 정언에서 정3품인 홍문관 부제학이 된다. 여기에서 유성룡과 선조가 얼마다 다급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전쟁을 확신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둘 수 없는 무리수였다.
전라 좌수영은 5관 5포, 즉 5개 고을과 5개 전문 수군 기지 소속 병력을 지휘하에 두고 있었으며, 이순신은 이들의 전력 강화에 주력했다. 유명한 거북선의 건조도 이때부터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순신은 전란에 대비해서 실전과 완벽하게 동일한 수준의 훈련을 꾸준히 실행했다. 이순신은 자신의 휘하 군관들의 순번을 정해서 차례대로 가왜장(假倭將)으로 임명했고 이 가왜장이 이끄는 함선이 가왜장선이 되었다. 오늘날로 따지면 대항군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순신은 이마저도 엄격하게 진행했으며 제대로 된 격식을 갖춰서 가왜장으로 임명된 군관에게는 직접 가왜장 임명서를 발급하기까지 했다. 이순신은 전란을 대비해서 거북선만 건조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실전 훈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5.4. 임진년의 맹활약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이순신은 이틀 뒤에 이 사실을 고지받았다. 5월 4일 최초의 출격 작전(일명 1차 출전)으로 옥포만에서 도도 다카토라가 이끄는 적선 26척을 전멸시켜 임진왜란 최초로 해전에서 승리를 거뒀다. 옥포 해전은 임진년에 벌어진 여러 해전의 전형적인 모델을 이룬다. Search & Destroy. 즉, 수색 섬멸전은 이순신이 임진년 당시 사용했던 기본 전략이었다. 이 전투에서의 조선 수군 피해는 부상자 3명. 옥포 이후 적진포와 합포에서 각각 5척과 15척을 추가로 격침하고 여수 전라 좌수영으로 귀환했다. 선조는 이 싸움의 공으로 공을 가선대부로 봉한다.
5월 29일에 이순신은 노량에 적선들이 왔다는 정보를 듣고 2차 출전을 시작, 사천에서 적선 12척을 격멸한다. 여기서 최초로 거북선이 투입됐다. 여기서 이순신이 조총에 부상을 입었다. 6월 2일에 왜선들이 당포에 집결해 있다는 걸 알고 당포로 향해 21척을 박살내고 당포에서 도망간 왜선들이 당항포로 도망갔다는 걸 알고 추격해 당항포에서 39척, 율포에서 7척을 격침했다. 2차 출정에서 조선 수군 총 전사자는 11명. 이 공으로 8월 16일 자헌대부 승자를 받는다.
7월 4일에 가덕도와 거제도 등지에 왜선 40여 척이 출몰했다는 정보를 들은 이순신은 3차 출전을 감행, 7월 6일 한산도 해전에서 승리한다. 이는 대첩이라 부를 만큼 세계 해전사에서 의미 깊은 전투였다. 이때 사용한 전술은 거짓 후퇴로 인한 유인 후 함대 반전 및 포위 섬멸인데 이토록 복잡한 함대 운용을 보여준 해전은 거의 없다. 굳이 예를 들자면 일전에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 알키비아데스가 이끄는 아테네 해군이 스파르타의 해군을 상대로 쓴 적이 있었다. 이런 전술을 실전에서 육지에서라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충분히 명장의 반열에 들어설 수 있을 정도다. 이순신은 항구에 틀어박힌 적의 주력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유인해서 격파했다.
여기서 흔히 세간에서 이순신의 장기로 인식되는 학익진이 처음으로 구사되었다. 학익진은 본디 단순한 포위 섬멸용 진형이나, 이순신은 이것을 거짓 도주하다가 돌연 180도 선회하면서 양쪽으로 날개를 펼쳐 적을 포위, 섬멸하는 전술로 개량하였다. 성능이 우수한 전함, 강도 높은 군사 훈련과 지휘관의 대담성만이 학익진 성공을 담보할 수 있었다. 거짓 후퇴 전술은 자칫 진짜 패퇴가 될 수 있는 매우 어려운 전술임을 생각해본다면 이순신의 역량을 짐작할 수 있다.
한산도 대첩은 규모로만 따지면 국지전이었으나 그 결과는 임진왜란 전체의 국면을 바꾸어놓았다. 적들은 남해안의 제해권을 조선에 넘겨주어야만 했다. 보급로가 끊겼으며 적의 서해 우회를 좌절시킴으로서 조선은 전라, 충청, 황해 등 주요 곡창 지대를 지켜냈다. 임진왜란에서 조선군과 의병들이 끈질기게 저항할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곡창 지대가 온전히 남아있었기에 가능했다. 조선군은 반격의 교두보를 확보했고, 지휘 계통 또한 회복되었다. 또한 한산도 대첩의 소식이 퍼지자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면서 의병활동이 매우 활성화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한산도 대첩 참고.
대승을 거둔 조선 수군은 가덕도로 향하려다가 안골포에 적선 40여 척이 있다는 보고를 받고 7월 10일 안골포에 도착하여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 등이 이끄는 왜선 40여 척을 추가로 박살내고 여수로 귀환한다. 총 전사자는 19명. 이제까지 보다는 조금 많은 편이지만 그래도 새발의 피 수준이다. 이 공으로 이순신은 정헌대부 승자를 받는다.
3차 출전으로 왜군의 수륙 병진 계획은 완전히 좌절됐으며 이 과정에서 가뜩이나 모자란 화약과 화포를 포함한 수많은 물자와 인력이 물고기밥이 되자 경악한 히데요시는 해전 금지령까지 내리고 만다.
일각에서는 이순신의 성과를 단순히 보급 차단 수준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으나 보급 차단은 보기에는 적 전투 병력 섬멸보단 그 비중이 가벼워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고 봐야 한다. 몇 백 년 뒤, 독일군의 북아프리카 전선 붕괴나 미국의 무기대여법 같이 해상 보급로는 그 유지에 따라 전선은 물론 전쟁의 흐름까지도 결정짓게 된다.
일본의 보급은 부산 항으로 하역된 물자가 육로로 이송되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기본 계획은 접수한 정복지에서의 현지 조달이었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것은 가다노 쓰기오나 기타지마 만지, 사토 가즈오 등 일본 측 역사학자들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다. 일본의 역사학자 기타지마 만지 교수는 당시 제대로 된 육로가 닦여 있지 않아 수레를 운용할 수도 없는 조선에서 육로를 통한 보급은 불가능에 가까우며, 억지로라도 부산에서 조선의 각 전략적 요충지 및 주둔지까지 육로로 식량을 조달할 경우 이를 수송할 인원과 호위할 인원들이 대거 필요하고, 이들이 목적지까지 가면서 수송할 군량을 먹어 치우고(...) 빈 손으로 목적지에 도달하여 되려 본진에 돌아가야 하니 식량을 달라고 했을 상황이 발생했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게다가 보급 물품에는 군량 등 식량만 있는 것이 아니다. 조총의 탄환 및 조총의 부속품과 화약, 일본식 활의 화살 및 활대와 각종 병장기 관련 소모성 물품들이 필요하다. 현지 조달을 통해 식량을 그럭저럭 구했다 해도 이러한 것들은 현지 조달로 구할 수 없으며, 당연한 말이지만 장비 보급이 안 되면 제대로 싸울 수 있을 리가 없다. 또한 손실된 병력의 보충 역시 수로를 통해 이루어지기때문에 이미 한양을 넘어 진격하느라 병력 손실을 입은 일본 육군이 더이상 병력 충원을 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일본군은 훗날 2차 세계대전에서도 스스로도 보급에 대하여 경시를 하다시피 한 데다, 가토급 잠수함을 비롯한 미 해군의 통상파괴 작전으로 그나마 유지하던 해상보급로마저 차단 당하면서 태평양 전쟁에서도 애를 먹어야 했다.
따라서 이순신의 공로는 적의 해상 작전 전체의 봉쇄이자 보급로 차단이었으며 이를 통해 적의 기본 전략 그 자체와 전쟁 의욕마저 붕괴시켰음을 의미했다.
8월 8일에 왜군이 김해와 양산 등지로 도주하려 한다는 정보를 받자, 이순신은 아예 적의 본거지가 돼버린 부산을 직접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8월 24일에 4차 출전에 나섰다. 부산으로 향하는 길에 왜군이 5번이나 소규모 기습을 가하나 죄다 바닷속에 쓸어넣고 부산 앞바다에 나타나 대포로 포격을 퍼부어 왜선 100여 척을 죄다 가라앉힌다. 이때 전사자는 6명에 불과했다. 여담으로 이렇듯 피해가 적었던 것은 거듭된 패전으로 조선 수군만 보면 학을 떼게 된 일본 수군이 조선군의 출현 직후 배를 버리고 죄다 육지로 도주해 버린 까닭도 있다. 덕분에 손쉽게 적의 배를 싹쓸이했지만 이순신이 신임하던 녹도 만호 정운이 전사해서 대승을 거두고도 이순신은 침울한 귀환을 했다.
부산포 해전의 결과로 본진마저 두들겨맞자 왜군은 더욱 조선 수군을 기피하게 된다.
부산포 해전은 전략적으로 볼 때는 빈 배 100척을 불태우고도 종전보다는 피해를 많이 입었기 때문에 한산 해전과 같은 대접을 받지 못한다. 다만 그 이후로 왜군은 각지에 왜성을 쌓고 촘촘히 함선을 배치해서 종전처럼 조선 수군이 부산포를 공격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었고 그 결과 조선 수군은 한산도에 주력을 전개하고 제해권을 완벽 장악한다.
임진년의 이순신의 공적은 첫째 우선 해상에서 승전을 통해서 백성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고 의병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해상에서의 승전이 없었다면 한 방에 밀릴 뻔한 상황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왜군의 침공에 왕과 양반, 무장, 평민, 노비 가릴 것 없이 도망가기에 정신없었던 상황이었는데 해상에서의 승전은 민족의 자긍심을 높여서 왜군의 침공에 저항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둘째 왜군의 주력은 육군이 아닌 수군으로서, 수군을 제압함으로써 전쟁 수행에 막대한 차질을 빚었다. 당초 왜군의 전략은 알려졌다시피 수륙병진이었고 해상에서의 승리는 따 놓은 것처럼 왜군 지도부는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다. 수군의 패배는 필연적으로 보급로의 단절로 이어졌고 진군한 육군은 고립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쉬운 예를 들자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전선을 유지하기 급급한 상황에 비견될 만하다. 수군이 패함으로서 왜군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만들었다. 셋째 호남 지역을 수호함으로써 조선군의 보급선을 확보했다는 점이다. 유일하게 호남이 온전하게 보존되어서 추후 명군의 파병과 전쟁 수행을 가능하게 할 수 있었다. 특히 이순신은 전력을 유지하면서도 둔전에 힘쓰고 백성들을 보호해서 인심을 얻었다.
5.5. 계사년 이후
계사년(1593년) 2월 6일에 조선 수군은 5차 출전을 하여 웅포에서 왜군을 7차례 공격해 왜선들을 격멸했으나 육지에서 왜성을 쌓고 버티는 전략으로 대응방침을 트는 바람에 작년에 비해서는 큰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7월 15일에는 전라 좌수영 본영을 한산도로 이주하고 돌산도에 피난민들을 위한 터전을 개간했다.
8월 15일 이순신은 삼도 수군 통제사에 임명되었다. 삼도 수군 통제사는 경국대전에 없는 별정직으로 전라 좌수영, 전라 우수영, 경상 우수영, 충청 수영으로 구성된 조선 수군 전체가 각 지휘관들의 갈등 없이 통제사 하나의 지휘를 따를 수 있는 직위였다. 현재로 치자면 해군 삼남 작전 사령관이나 해군 작전 사령관 급이라고 봐도 될 위치이다.
1594년에 6차 출전으로 당항포에서 다시 한 번 왜선 30여 척을 분멸하나, 담종인의 금토패문을 받고 병중인데도 불구하고 항의의 서한을 올린다.
이때 《난중일기》서 본격적으로 원균에 대한 혐오와 경멸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1595년에는 아예 원균을 조선 수군에 두지 말아달라고 상소까지 올려 보낼 정도로 둘의 사이는 험악해진다. 이 개놈이 나중에 조선 수군 장병들을 상대로 저지를 일을 생각해 본다면, 이순신의 사람 보는 눈이 참 탁월하다고 하겠다. 단 이순신은 자신을 비호한 류성룡, 이원익과 시시콜콜한 요구에도 모두 응한 충직한 부하들을 제외하면 다른 대신들이나 무장들 또한 제법 거리를 두고 묘사했고, 구면일 경우엔 경멸감도 나타냈다는 면에서, 그 연장선으로 볼 수도 있다. 특히 그는 장수 평가 기준도 몹시 까다로워서 이순신에게 높은 평가를 받은 무장은 별로 없다. 개중에는 나름 능력있는 장수도 있었지만 비교 대상이 이순신이니... 대신 그는 남에게 엄격한 만큼 자신에게는 배로 엄격했다. 또한 명이나 왜의 장수들에 대해서는 경멸감을 감추지 않았는데, 조선의 장군이 침략군의 장군에게 증오를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명나라 장수들이 조선에서 보여준 각종 범죄는 비난받기에 충분했다. 아무튼 둘 사이의 영향인지 원균은 충청병사로 전직된다.
전쟁이 소강 상태에 들어가자 이번엔 기근과 전염병이 조선 수군을 괴롭혔다. 전쟁으로 인한 인명 피해, 대규모 징발, 토지 유실은 농업 생산량의 급격한 감소를 불러왔고 이는 3년에 걸친 지독한 흉년으로 이어져 보급과 병력 유지에 치명타를 입혔다. 여기에다 가공할 역병까지 겹쳐 수천의 장졸들이 역병으로 떼죽음을 당했으며, 이때문에 탈영병도 속출했다. 이순신은 1594년 4월 20일에 작성한 장계에서는 삼도 수군 17000여 명 中 사망자 1904명, 감염자 3759명. 도합 5663명의 비전투 손실을 입었음을 밝혀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전하고 있다.
이순신은 탈영병을 처벌하고 어떻게든 병역 자원 유지를 위해 애쓰는 한편 피난민, 유민들을 수습하고 둔전을 경작해서 보급을 자급자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