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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이야기

02. 인경궁(仁慶宮) 이야기

작성자管韻|작성시간19.08.09|조회수187 목록 댓글 0


02. 인경궁(仁慶宮) 이야기

 

 

 

 




 


인왕산에서 경희궁 방향으로 바라본 전경, 빌딩숲이 경희궁 자리이고, 더 멀리 남산타워이며 왼쪽이 경복궁이다. 그 중간쯤 사직단이 있고, 그 안쪽으로 인경궁이 있었다.



창덕궁 선정전(宣政殿)은 인경궁(仁慶宮) 편전인 광정전(光政殿)을 옮겨 지은 전각으로, 푸른색 기와(靑瓦)를 덮었는데, 궁궐에 유일하게 현존하는 인경궁의 건물이다.


 

경운궁(慶運宮) 확장

 

창경궁도 예외 없이 임진왜란 때 전소되어, 광해군 8(1616)에 명정전(明政殿, 정전환경전(歡慶殿, 침전인양전(仁陽殿, 침전, 현재 함인정(涵仁亭))을 중건하였다. 그 많은 건물이 이괄의 난 때 대부분 소실되었으며, 남은 건물은 정문인 홍화문과 정전인 명정전뿐이고, 9년 후인 인조 11(1633)에 부속 건물인 회랑을 복원하여 현재까지 남아있어, 5대 궁궐의 정전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광해군은 경운궁으로 이어한 후, 1617(광해군 9)에 대대적으로 확장 공사를 시작하여 600여 칸의 공사를 벌였으나, 인경·경덕궁 공사까지 일시에 엄청나게 벌려놓아 물력(物力) 조달이 어려워졌고, 마무리가 되지 않자 경운궁 공사를 포기하고 1618년 석어당과 즉조당만 남기고 다시 헐어, 그 자재를 내수사로 집결시킨 후, 인경(仁慶경덕(慶德) 양궁을 축조하는데 쏟아 경덕궁은 마무리하였다.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광해군은 전란을 수습하여 복구가 겨우 마무리되는 무렵에, 만주족 누르하치가 후금(後金)을 세워 세력을 날로 키워 명나라 정벌에 나서는데, 후금의 편에서 보면 친명(親明)의 조선이 등 뒤에서 칼을 들이대는 형세가 되었다. 명나라 만력제(萬曆帝)는 후금을 공격하기 위해 28년 전(1592) 조선을 도운 일이 있으니, 후금을 칠 때 지원병을 요청하니 거절할 수 없어, 문신이면서 중국어에 능통한 강홍립을 5도도원수(五道都元帥)로 임명하여 지원하기로 하였다.

 

 

인경궁(仁慶宮) 공사지연과 부차전투(富車戰鬪)

 

광해 10(1618) 10월 강홍립이 13,000 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출병하였고,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만주 부차(富車)에서 후금군과 벌인 대규모 전투였다. 명나라 유정(劉綎)의 군과 관전(寬甸) 지역에 합류하여, 이듬해 2월 조·명 연합군이 후금을 공격하였다. 이 싸움에서 죽은 조선의 군인은 무려 8, 9천 명인데, 인경궁 공사에 투입된 승군(僧軍)이 대부분 차출되어 갔으며, 이 전투 때문에 궁궐 공사가 지연되게 되었다.

 

이때 광해군은 밀지를 보내어 형세(形勢)를 보아 향배(向背)를 정하라하였고, 실제 후금의 주둔지역인 부차(富車)전투에서 대패했다. 강홍립은 예하 병사들을 거두어 후금에 투항하면서 조선군의 출병은 부득이 이루어졌다고 털어 놓으니, 후금()이 받아들여 이듬해 전원 석방되어 돌아왔다. 당시 국제 정세의 흐름은 명나라는 이미 쇠퇴하여 기댈 수 없는 대국이고, 아래로는 왜적을 방비해야 되며, 위로는 후금의 세력이 날로 커져 조선의 운명은 그야말로 벼랑 끝에서 독자적으로 살아남아야 된다는 것을 광해군은 간파하고 중립적 외교정책을 펼쳤다.

 

이충(李沖)이 죽어 공사가 지연되다

 

광해 11(1619) 3월 경덕궁 공사는 끝난 상태이고, 인경궁은 착공한 지 9년째 이어지면서 전당(殿堂)은 조성을 하였으나, 궁녀들이 거처할 곳과 각 아문을 짓지 못하였는데, 미포(米布)를 담당하는 제조(提調)로서 가장 긴요한 일을 맡아 공사를 추진해 온 이충(李沖)이 죽었다.

 

경복궁 중건 때 쓸 대목을 함부로 베어 궁궐 공사를 키운 장본인이고, 사론(士論)에 버림받은 자인데 원망을 받아도 돌아보지 않고 나랏일에 마음을 다하였다. 두 대궐의 공사를 시작한 것도 이충이 사실 주장하였으며, 왕의 뜻에 아첨하는 모든 일에 있는 힘을 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당시의 정파 싸움에 학식이나 덕망이 미흡하고 오직 토목건축 분야에 재주가 있어 높은 품계로 뛰어올랐고, 공사를 일으킨 규모가 너무 크고 엄청나 온갖 비난을 받아, 거의 마무리되던 그 때에 이르러 죽자 마무리가 어렵게 되었다.

 

왕은 이틀 동안 조시(朝市)를 중지하고, 관곽(棺槨)을 지급하고 별도로 부의를 전하게 하였다. 그리고 특별히 우의정에게 제수하였는데 죽고 난 후에 추증하지 않고 곧장 재상직에 임명하는 것은 이충으로부터 시작된 일이다.

 

인왕산을 휘감은 전각(殿閣)이 즐비(櫛比)하여 들보와 기둥은 법궁보다 작았으나, 칸수는 10배는 되었고, 토목공사의 장대함과 장식의 사치스러움이 예전에 없던 바였다. (이 공사가 끝나면) 또 경복궁(慶福宮)을 중건하고 경복궁으로부터 각도(閣道, 복도)를 만들어 인경궁(仁慶宮)에 연결하고자 하였는데, 미처 시작하기 전인 1623(광해 15) 312일 반정(反正)의 거사가 있었다.

 

 

궁궐의 재원-자금마련(資財差備)

 

쌀과 포목을 각도에 부과하여 거두게 하고, 우선 군자창(軍資倉)의 세미(稅米) 3천 섬을 가져다 썼다. 그리고 조도사(調度使조도장(調度將)등의 관원 1백여 명을 팔도에 보내어 자금을 마련하는데, 거두어 들여 사용한 면포(綿布)3,240여 동()이고 미곡이 34,400백여 섬이였다. 동원된 승군(僧軍, 승려로 조직된 군대)6백명에서 15백 명으로 늘렸으나 부족하여, 승려들을 독려하고 직급을 주어(摠攝) 공사에 동원하였고, 군장(軍匠, 군에 입대한 장인)들을 추가로 배정하니 도합 58백여 명으로 늘어나, 앞으로 동원 될 승군도 많아 양식(식량)이 한 없이 들어가게 되었고, 이 공사가 끝나면 장차 법궁(法宮, 경복궁)을 영건할 계획까지 세우는데, 이를 합산할 경우 앞으로 미곡 10만 섬과 면포 수천 동을 더 마련해야 공사 진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궁궐 터

 

궁궐 터는 첫 해에 황일호의 집터 400칸을 포함하여 27여명에게 3,028칸이 몰수 되었고, 궁궐 면적이 넓고 전당(殿堂)이 너무 많은 탓으로, 돌 공사는 더욱 많이 들게 되었는데, 이효달(李孝達)9명에게 주춧돌 1천여개를 포함하여, 2,269개를 도감에 납부하였고, 주춧돌과 첨폐(簷陛, 처마 아래 섬돌)로 쓰는 것 외에 중사(重戺, 돌쩌귀)와 층체(層砌, 돌층계)에 들어가는 돌도 한이 없었으며, "30리 바깥에서 돌을 뜰 경우 시급한 역사를 결단코 완료할 수 없을 것이다.(...)창의문 밖의 돌을 그대로 떠다가 실어와서 쓰라." 언덕이나 벼랑 같은 곳은 다듬은 돌을 입혀야 할 석재를 운반해 둔게 길거리와 골목에 가득한데, 공사 현장까지(各所) 배정하는 공력(工力) 또한 엄청나게 들었다.

·황와(·黃瓦)

 

청기와 30()을 구울 때 사용할 염초(焰硝) 200근은 내수사에서 내려주고, 부족한 염료는 회회청(回回靑, 아라비아 산)으로 수입하게 하는데, 이 재료를 다루어 청기와를 굽는 장인 22명에게는 서울 부근에 기루던 말()을 특별히 하사하였고, 일반 기와장이들도 상품을 주어 독려하였다. 청기와 2백 눌()을 만든다면 3만 근()의 염초(焰硝)를 써야 되는데 다른 재료 즉 흙과 숯도 이에 비례하고, 청기와를 쓸 전각(殿閣)을 따로 정해 덥도록 하였다. 기와는 대아련(大牙鍊)이 거의 70여 눌이고 중아련(中牙鍊)도 그 정도이며 상와(常瓦)60여 눌이나 되었고 이를 합하니 2백여 눌이며, 각종 기와 및 잡상까지 포함하여 짐바리(馬駄)로 계산해 보면, 95백여 바리가 되고, 수레로 계산해 보면 19백여 부()가 되는데, 그 운송비를 쌀로 계산하면 4백여 석이고 목면으로 계산하면 25(, 1동은 쌀 16)쯤 되었다. 쌀과 포목으로 운송비용을 지급하고 실어다 수성동(壽城洞) 빈집(空家)에 들여다가 지키게(守直) 하여 보관하면서 공사를 진행하였다. 장인(匠人)으로 하여금 많은 돈을 가지고 중국에 가서 황기와 굽는 방법까지 배워오게 하여, 석자황(石雌黃)을 약물(藥物)에 첨가해 넣었더니 그 색깔이 평시에 만들던 것과 대략 동일하게 되었다.

 

 

황기와는 천자가 정전(正殿)의 지붕을 덮을 때 쓰는 기와로, (() 이하는 참람스럽게 사용하지 못한다고 한다.

 

 

결국 청·황와(·黃瓦) 중 황기와를 포기하고 청기와(靑瓦)로 화려하게 짓기로 하였다.

 

기타자재(餘之資)

 

정경신은 정철(正鐵) 200근을 납부하고 김순(金純)은 수레를 끄는 소(車牛) 7마리, 소금 1백 섬, 신철(薪鐵) 47부리(夫里), 정철(正鐵) 34백 근, 인가내(刃加乃) 136, 광과이(廣鍋伊) 125, 113, 큰 솥 10(), 대가리(大加里) 26좌를 마련하여 그가 친히 가져와 바쳤다.

해상 운송(水運)

 

선착장에 배가 없어 쌓아 놓고 미쳐 실어오지 못한 물자는 숯 15백 섬과 기와를 굽는 토목(吐木) 12만 근, 송판 1백 개, 소금 1백 섬이나 되고, 숯과 토목은 모두 공사장(本所)에서 급히 쓸 물건이니, 관할 관찰사에게 각 고을에 배()를 나누어 정해서, 3개월 안으로 배에 실어 올려 보내기로 하였다.

 

단청(丹靑彩色)

 

또 단확(丹艧, 고운 빨간 빛깔의 흙으로 된 물감)을 중국에서 수입 하려면 은냥(銀兩)이 모두 천() 이상이며, 이 단학의 농도를 조절하여 박채(薄彩)와 진채(眞彩)로 구분하여 칠하게 되는데, 완전히 진채로만 칠할 경우 엄청난 차이가 나게 되고, 창경궁(昌慶宮)의 채색이 창덕궁(昌德宮)보다 훨씬 낫다고 하는데 진채로 한 것이며, 새로 짓는 전당(殿堂)에 쓰는 채색은 또 창경궁보다 화려하게 칠해야 하므로, 전각이 즐비하여 거기에 드는 물감이 한이 없어, 그 값을 마련하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도감(都監) 이충(李沖)이 죽었다.

 

인경궁·창덕궁·경운궁 확장까지 합하여 1617년부터 시작하였는데, 공사 규모가 엄청나 마무리가 어렵게 되었다. 인왕산을 휘감은 전각(殿閣)이 즐비(櫛比)하여 들보와 기둥은 법궁보다 작았으나, 칸수는 10배는 되었고, 토목공사의 장대함과 장식의 사치스러움이 예전에 없던 바였다.

 

이 무렵 경덕궁 공사는 끝난 상태이며, 인경궁의 전당(殿堂)은 완공 하였고 단지 궁녀들이 거처할 곳과 각 아문을 짓지 못하였는데, 앞으로 모든 공사까지 합하면 미곡 수만 섬과 면포 수천 동을 써야 끝낼 수 있게 되었다. 이충(李沖장만(張晩최관(崔瓘) 등은 모두 미포(米布)를 담당하는 제조(提調)로서 가장 긴요한 일을 맡아 거의 마무리할 즈음, 선공도감(繕工都監)으로서 최선을 다해 최고의 자리에 오른 이충(李沖)이 죽었다.

 

이충은 원망을 받아도 돌아보지 않고 나랏일에 마음을 다하였다.’ 왕은 매우 슬퍼하고 애석해 하였다. 경복궁 중건 때 쓸 대목을 함부로 베어 궁궐공사를 키운 장본인이다.

 

두 대궐의 공사를 시작한 것도 이충이 사실 주장하였으며, 왕의 뜻에 아첨하는 모든 일에 있는 힘을 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즉 장대한 궁궐공사를 맡아 끌어온 동력을 잃은 셈이다. 당시의 정파 싸움에 학식이나 덕망이 미흡하고 사론(士論)에 영합하지 않으니, 따돌림을 당한 외톨이로 오직 토목건축 분야에 재주가 있어, 이이첨이 천거(通望)하여 높은 품계로 뛰어올랐고, 서로 결탁하여 너무 큰 공사를 일으켜 온갖 비난을 받아 거의 마무리 되어가는 이때에 이르러 죽자 왕은 이틀 동안 조시(朝市)를 중지하고, 관곽(棺槨)을 지급하고 별도로 부의(賻儀)를 전하게 하였다. 그리고 특별히 우의정에게 제수하였는데 죽고 난 후에 추증하지 않고 곧장 재상직에 임명하는 것은 이충으로부터 시작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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