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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이야기

03. 인경궁(仁慶宮) 이야기

작성자管韻|작성시간19.08.09|조회수352 목록 댓글 0


03. 인경궁(仁慶宮) 이야기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원래 동쪽에 있던 문을 남쪽으로 옮겨 복원하였다.


경복궁은 태조 4(1395)에 최초로 창건하였고, 선조 25(1592)에 궁궐 내 목조건물 전체가 전소된 후, 273년이 지난 고종 2(1865)에 흥선대원군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덕수궁 석어당은 월산대군 집이었고, 임진왜란 후 행궁이 되면서 선조가 승하한 곳이고, 바로 옆 별전에서 제15대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인경궁(仁慶宮) 주요 전각

 


 

명화문(明化門)-인경궁의 정문으로 정면 5, 측면 2칸에 중층으로 되어 있었다. 창덕궁 돈화문(敦化門)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인경궁(仁慶宮)의 정문(正門)은 돈화문(敦化門)의 예에 따라 층문(層門)으로 조성하고, 경덕궁(慶德宮)은 그저 잠시 피해 거처하는 곳일 뿐이니 단층문(與化門)으로 알아서 조성하도록 하라."

 

명화문(明化門)은 이미 역사가 끝나 높게 우뚝 솟아 정문의 위용을 갖추었고, 다만 앞뒤가 큰 길이어서 사람들이 문 옆으로 통행하게 되고 담과 문 사이에 월랑을 짓는 공사만 남아있었고, 이 때 경덕궁(慶德宮) 공사가 끝나 내보낼 장인목수(匠人木手) 260여 명을 명화문(明化門) 월랑(月廊)공사를 하게하고, 사용할 목재는 강상(江上)1천여 개를 가져와 짓게 하여 완공한 후 출입을 엄하게 하였다. 16227월 인경궁의 정문의 두 기둥과 작은 협문(挾門)이 벼락을 맞았고, 당시로서는 백성들의 원망으로 하늘이 노하여 벼락을 내린 재앙으로 알았기에, 개수공사를 미루다 다음 해 반정이 일어나 정문 공사는 결국 완성하지 못하였다.

 



 

정전(正殿)인 홍정전(弘政殿)은 창덕궁 경훈각이 되었다.

 

"서별궁의 이름을 경덕궁(慶德宮)’으로 정하라고 도감에 말하라. 그리고 홍정(弘政)’은 조하전(朝賀殿)에다 쓰고 광정(光政)’은 시사전(視事殿)에 쓰는 일을 도감으로 하여금 살펴서 하게 하라."

 

 

인조 22(1644) 홍정전이 헐려 창덕궁 경훈각이 되었다. 1617(광해 9) 7월 이 전각의 기둥을 세워 골격을 다 갖춘 후 서까래를 걸기 이전의 마지막 최상부인 종도리(宗道里)에 홍전(弘政)이란 묵서(墨書)를 써 걸었다. 광해 112월 선수도감 이충(李沖)이 정전을 포함한 광정전(光政殿), 경수전(慶壽殿), 흠명전(欽明殿), 시사전(視事殿), 함인당(涵仁堂) 등 인경궁궐 내 대부분 전각을 마무리 하였다. 인조 5(1627) 정묘호란이 끝난 4년 후, 1632628일 인목왕후(仁穆王后)가 승하하니, 1010일 금나라 조문의 예로 사신(金差)이 와서 홍정전(弘政殿)의 전문(殿門) 및 정문(正門)에 발을 드리워 엄중히 보이고, 홍전문(弘政門) 밖 섬돌에서 그들의 예에 따라 지내게 하였다. 인조 22(1644) 홍정전(弘政殿)이 헐려 창덕궁 경훈각(景薰閣)이 되었다.

 

순종 10(1917) 대조전(大造殿)에서 오후 5시에 불이 났다. 불은 대조전 서온돌(西溫突)에 연접한 나인內人들의 갱의실(更衣實)에서 일어나 내전(內殿)의 전부를 태워버렸다. 1920년 경복궁내 만경전(萬慶殿)을 옮겨와 경훈각(景薰閣)을 세우면서 이전의 모습과 다르게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조전(大造殿), 흥복헌(興福軒), 통명문(通明門), 양심합(養心閤), 장순문(莊順門), 희정당(熙政堂), 찬시실(贊侍室), 내전(內殿), 창고(倉庫), 경훈각(景薰閣), 징광루(澄光樓), 옥화당(玉華堂), 정묵당(靜默堂), 요화당(曜華堂), 요휘문(曜暉門), 함광문(含光門)이다.불은 오후 8시에 비로소 진화(鎭火)되었다.

 



 

광정전(光政殿)은 창덕궁 선정전(宣政殿)이 되었다.

 

인경궁의 광정전이 창덕궁 선정전으로 이건 되었으며 옛 모습 그대로 청와(靑瓦)로 아름답다.

 

1617(광해9) 528일에 터를 닦아 621일에 대조전과 같게 조성하되, 인경궁의 두 전(殿)은 크기와 너비(廣狹)를 똑같게 조성하게 하였다. 시사전(視事殿)이 광정전(光政殿)이며, 왕의 침전으로 지었고, 창덕궁 대조전과 동일한 규모로 1617(광해 9) 84일 기둥을 세웠고, 훗날 인경궁(仁慶宮) 경수전(慶壽殿)이 이건 되어 대조전이 되며 소실과 중수를 거듭하다 이전의 모습은 없어지고, 순종110(1919) 11월에 경복궁에 있던 교태전(交泰殿)을 이건(移建)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9(광해군 1) 창덕궁 재건 때 다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대조전 규모의 침전을 광해군이 3채를 짓게 된 셈이며, 창덕궁 대조전은 성종 때 중수 기록으로 보아 태종 때 지어진 건물로 보인다.

 

() 궁궐의 기와를 굽는 일은 이충(李沖)이 전담하였고, 특히 청기와 굽는 장인으로는 윤간(尹侃)과 한사성(韓師聖)을 책임자로 하였다. 두 궁전(弘政, 光政)은 푸른 기와를 덮고 경복궁 근정전보다 단청(丹靑)과 조각을 극도로 교묘하고 화려하게 하고 진한 채색으로 칠하려고, 지방에서 올려 보낸 돈(銀子)을 세 번째 가는 사신행차 때 통역관과 함께 가서 화원(畫員)들에게 채색(彩色)을 골라 무역해 오도록 하라고 도감에게 명령하였다.

 


 

침전(寢殿)인 경수전(慶壽殿)은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이 되었다.

 

창덕궁 대조전은 성종 때 중수 기록으로 보아 태종 때 지어진 건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9(광해군 1) 창덕궁 재건 때 다시 지었으며, 1617(광해군 9) 528일에 터를 닦아 621일에 대조전과 같게 조성하되, 인왕산에 올라가서 지세를 살펴본 뒤에 위치와 방향을 잡아 기둥을 세우도록 했다.

 

 

인경궁(仁慶宮)의 침전(寢殿)인 경수전(慶壽殿)의 재목과 기와, 섬돌까지 옮겨와 영건(營建)하여 창덕궁 대조전이 되었다. 1917년에도 불에 타자, 1919년에 경복궁에 있던 교태전(交泰殿)을 이건(移建)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양 침전(寢殿)은 대조전(大造殿)의 제도에 의거하여 조성하되, 두 전(殿)은 대소와 광협(廣狹)을 똑같게 조성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1623년 반정하던 날 창덕궁에 군사들이 앞을 다투어 침전으로 들어가 횃불을 들고 수색하다가 그 횃불이 발[()]에 옮겨 붙어 여러 전각이 거의 다 불타고 인정전(仁政殿)만 남았다. 그러던 것이 인조 25(1647)에 다시 중건되었다. 인조는 창경궁 양화당에서 기거하다 저주(詛呪)의 변'이 일어나자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인경궁(仁慶宮)의 경수전(慶壽殿)의 재목과 기와, 섬돌까지 옮겨와 영건(營建)하였다.

 

1833(순조 33)에 또다시 소실되었다가 이듬해 재건되었다. 1917년에도 불에 타자, 1919년에 경복궁에 있던 교태전(交泰殿)을 이건(移建)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경궁 경수전의 목재의 크기이다.

 

인경궁(仁慶宮)의 두 침실을 예로 든다면, 그 길이가 고주(高柱) 19, 중고주(中高柱)16, 평주(平柱)10, 상복(上栿)21, 중복(中栿)15, 도리창방(道里昌防)이 정간(正間)12, 변간(邊間)11, 별당(別堂)은 고주 13, 평주 10, 도리창방이 11척입니다. 경덕궁(慶德宮) 당실(堂室)의 재목도 대개 이와 비슷한데, 경덕궁의 후궁(後宮)이 기거할 별당과 같은 것은 주()와 도리의 길이가 모두 9척입니다.

 

인경궁 경수전 목재이고 창덕궁 대조전 건물이 됐으나 이괄의 난 때 불탔다. 흠명전(欽明殿)은 인목대비가 거처로 삼았다.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하고 대북파를 몰아내자, 인목왕후는 복호(復號)되어 대왕대비(大王大妃)로서 인경궁 흠명전(欽明殿)을 거처로 삼았다. 1632년 여름에 왕후가 병으로 누운 지 한 달이 지나 더욱 위독하여, 628일 인경궁(仁慶宮)의 흠명전(欽明殿)에서 승하하니, 춘추(春秋)49세였다.

 

인목왕후가 인경궁 흠명전(欽明殿)에서 승하한 후 유품을 정리하던 중, 백서삼폭(帛書三幅)이 발견되었다. 비단에는 왕을 폐위하고 세우는 일과 같았다라는 문구가 있었다. 이 문구가 발견될 때 마침 인조는 병이 들어 고생하면서, 자기 대신 누구를 왕으로 세우려는 글귀로 의심하여 그 배후로 정명공주(貞明公主, 1603~1685)를 지목했고, 그동안 반정의 명분으로 삼아 받들던 관계에서 핍박의 대상으로 삼았다.

 

함인당(涵仁堂)

 

창경궁 수리소 의궤(昌慶宮修理所儀軌)에 의하면 함인정의 9칸 중 5칸은 인경궁 경수전(慶壽殿)의 후행각을 옮겨 지은 것이고 나머지 4칸은 새로 지은 것이라고 하였으니 침전의 부속건물이다. 인조 11(1633) 창경궁 명전전 서쪽 집서(集瑞)의 동쪽에 인양전(仁陽殿)의 옛터에 인경궁 함인당을 이건하여 당()을 정()이라 바꾸었다. 창경궁 함인정은 마당이 넓어 임금이 신하들을 맞이해 연회를 하거나 국사를 논하는 장소로 쓰였다.

 

중휘당(重暉堂)

 

소현세자(昭顯世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이 지난 1645425일 세자는 다시 침을 맞았으나, 병세가 급격히 나빠지면서 그 다음날 26일 오시(午時)에 창경궁 환경당(歡慶堂)에서 사망했다. 인조는 경덕궁(경희궁)의 경현당(景賢堂)이 비좁으니 혼궁(魂宮)을 인경궁(仁慶宮)의 중휘당(重暉堂)에 설치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소현세자를 고양(高陽)에 장사지내고, 인경궁의 중휘당을 혼궁(魂宮)으로 정하여 신주를 받들었다.

 

인경궁의 동궁을 헐어 둘로 나누어 동궁(東宮, 창경궁)의 저승전(儲承殿)과 평선당(平善堂)을 새로 지었다. 예전부터 창경궁을 동궁(東宮)이라 하였으며 소현세자의 빈 강씨가 머문 곳은 저승전(儲承殿)이고, 저주의 변이 있은 후, 건설 과정에 행랑의 섬돌 안쪽과 담장 위, 기와 사이, 시민당 처마 아래의 섬돌 등에서 썩은 뼈, 죽은 까치, 옷을 태운 재 등의 물건이 많이 묻혀 있어 철거하고 봉림대군을 위해 중건하게 되는데, 인경궁의 동궁은 중휘당(重暉堂)이며, 이 전각을 헐어 저승전(儲承殿) 한 채와 평선당(平善堂) 한 채를 나누어지었다. 창경궁(昌慶宮)의 저승전(儲承殿)은 성종 18년에 완공한 세자의 생활공간이다.

 

기묘년(인조 17, 1639)에 임금이 병이 나서 자리에 누웠는데 궁중에서 저주의 변고가 일어났다. 임금이 한 외척 중신을 최명길의 집에 보내 이르기를, ‘과인의 병이 날로 중해지는데 의심스러운 단서가 이미 드러났다. 부득이 장차 외정(外廷)으로 나거서 치료해야겠으니 마땅히 경은 이 뜻을 알라.’ 하였다. 대개 임금은 정명공주(貞明公主)를 의심한 것이었다. 이에 최명길이 아뢰기를, ‘선조대왕의 골육으로는 다만 정명공주가 있을 뿐입니다. 이제 만약 옥사를 일으키면 반정한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또 저주의 일은 예로부터 애매해서 밝히기 어려운 것이 많습니다.’하였다. 그런데 며칠 뒤에 과연 임금이 궁중 저주의 일로 정명공주의 여종들을 체포하려 했다. 최명길이 빈청에 들어가 아뢰기를, ‘다만 별궁으로 이어하여 궁인들을 잡아 문초하소서.’하고 청하니, 임금이 엄한 비지(批旨, 상소에 대해 임금이 내리는 답)를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중략..”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창덕궁 중희당(重熙堂)1849년 헌종(憲宗)23세로 후사 없이 죽은 곳이며 중휘당(重暉堂)과 다르다.

 

금천교(禁川橋)

 

금천교를 궐내에 들일 경우 담을 물려 쌓아야 되는데, 철거해야 할 인가는 76()이고, 담 밖에 금천교를 그대로 둘 경우 어로(御路)만 통로와 비슷하게 새로 만들면 되기 때문에, 철거해야 할 민가는 35호이라는 서계(書啓)를 그림으로 작성해서 올렸다는 내용으로 보아 이 때 궐내공사가 진행 중이고 철거에 따른 민원 등의 문제로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여러 궁궐의 금천교는 궐내에 있었기에 아마도 궐내에 들인 것으로 보인다.

 

인경궁 누정(樓亭)

 

인경궁에 못을 판 곳에는 경회루(慶會樓)의 건물구조로 조성하되 높이와 크기는 경회루와는 달리 강선루(降仙樓)와 동일하게 조성하라 하였고, 광해군이 세자시절 왜적을 피해 그곳에 관사를 정하여 지낸 적이 있는데, 그 누대를 모방하여 지으려고 하였다. 주변에 별당과 정자를 세우고 배를 띄우며 연회나 조정 신하들을 접견하고, 무술시험을 시범 보이는 장소로 경관을 조성하게 할 재목을 모두 준비하였으나, 공사가 지연되어 미처 이루지 못했다.

 

인경궁 누정(樓亭) : 강선루(降仙樓)와 동일하게 조성하라 하였고, 광해군이 세자시절 왜적을 피해 그곳에 관사를 정하여 지낸 적이 있는데, 그 누대를 모방하여 지으려고 재목을 모두 준비하였으나, 공사가 지연되어 미처 이루지 못했다.

 

인경궁(仁慶宮) 훼철(毁撤)

 

궁궐 공사 마무리에 반정이 일어났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이후 악화된 사회 기강과 경제를 수습하였고, 명나라와 금()과와도 동시에 맺은 중립정책으로 외교관계도 안정되어 있을 무렵, 이귀(李貴) 등 서인들이 광해군과 대북파를 몰아내고, 이종(李倧, 16대 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정변이 인조반정(仁祖反正)이다.

 

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김자점(金自點, 1588~1651) 등이 세검정에서 광해군의 폐위를 다진 후 홍제원(弘濟院)에 집결하여 도성으로 진입할 때 김유(金瑬)가 앞장서기로 했지만, 계획이 누설되었다는 이유 등 핑계를 대고 늦게 나타나자, 이괄(李适)이 대장으로 선출되어 자하문(彰義門, 이귀·김자점·최명길 등의 정사공신(定社功臣) 이름이 새겨진 현판이 걸려 있다)을 통하여 무혈 입성하게 된 것은 창덕궁의 경호대장(訓鍊大將) 이홍립(李興立)의 도움이 있었다.

 

1623(광해 15) 312일 광해군은 창덕궁 후원 어수당(魚水堂, 석거문(石渠門)에서 연경당(演慶堂) 중간)에서 여러 여인들과 연회를 하며 술에 취하여 오랜 뒤에야 이종(李倧)이 반정을 일으켜 궁 안으로 진입함을 알았다.

 

이 때 광해군은 후원 담을 넘어

 

평상시에 궁인들이 후원에 긴 사다리를 설치하여, 밤에 출입하기에 편리하도록 하였는데 왕이 이 사다리를 사용하여 궁성을 넘어갔다.

 

젊은 내시가 업고 가고 궁인 한 사람이 앞에서 인도하여 사복시(司僕寺) 개천가에 있는 의관 안국신(安國信)의 집에 숨었고, 이때부터 15대 조선의 임금이 아니였다.

 

중종은 연산군의 악정에 대신들이 일으켜 옹립(擁立)된 왕이였지만, 인조는 스스로 왕이 되려고 정변을 철저히 준비하여 반정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반정의 명분을 인조의 숭명배금(崇明排金)의 외교정책과 광해군의 패륜적 행위인 폐모살제(廢母殺弟)로 삼아 광해를 축출(逐出)하였다. 즉 명나라의 은혜를 저버리고 오랑케를 가까이 하며,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을 죽이고 대군을 강화에 유폐하여 죽게 이르렀고, 대비 김씨의 존호(尊號)를 폐하여 서궁(西宮)이라 칭하게 했으니, 연산군의 폭정과 비유하여 추락 시키고, 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왕권을 위협하는 광해년간의 신료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면서 철저히 패륜과 혼군으로 몰아가야 했다.

 

이 명분에 부합하려면 폐조(廢朝)의 실정(失政)을 찾아내어 부각시켜야 했기에, 인경궁을 헐어 없애면서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 다음으로 복위된 인목대비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김제남의 관작을 복구하였고, 그녀의 소생 정명공주를 깍듯이 대우했다.

 

인조반정(仁祖反正)과 혼군(昏君)이 된 광해(光海)

 

 

인조가 의병을 일으켜 왕대비(王大妃)를 받들어 복위시킨 다음 대비의 명으로 경운궁(慶運宮)에서 즉위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을 폐위시켜 강화(江華)로 내쫓고 이이첨(李爾瞻) 등을 처형한 다음 전국에 대사령(大赦令, 집권 기반이 취약하거나 민심이 흉흉할 때 내리는 사면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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