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대한민국 이야기

01. 양반 타도 외친 개혁론자 김옥균(金玉均, 1851년∼1894년)

작성자管韻|작성시간21.03.23|조회수564 목록 댓글 0

01. 양반 타도 외친 개혁론자 김옥균(金玉均, 1851년∼1894년)

 

 

 

 

 

 

 

 

김옥균(金玉均, 1851년 2월 23일 ∼ 1894년 3월 28일)은 조선 말기의 정치가, 사상가, 급진개화파이다. 1872년 문과 장원급제 후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쳤고, 충의계를 조직해 개화 사상 확산에 힘썼으며, 동남제도개척사 겸 관포경사에 임명돼 울릉도와 독도를 개척했다. 임오군란 후 일본식 급진 개혁을 주장했으나, 양무 운동식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는 외척 민씨 세력에 번번히 발목을 잡히다 못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얼마 안되는 병력 부족으로 청나라 개입에 막혀 3일 만에 실패했으며 일본으로 망명했다. 청일 전쟁의 발발 직전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가 홍종우에게 암살됐다(김옥균 암살 사건). 조선으로 송환된 시신은 부관참시 후 8도에 효수됐다. 청일 전쟁 때까지 중일 두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그의 존재는 늘 뜨거운 감자였으며 동양 3국 어디에도 그의 자리는 없었다. 후일 개화파가 집권한 뒤 복권됐고 일제 강점기 순종에 의해 충달공의 시호가 추서됐다.

 

본관은 장동(신 안동), 호는 고균(古筠), 별호는 고우(古愚), 망명 중에는 이와타 슈사쿠(岩田周作)란 가명을 썼는데 갑신정변 실패 직후 망명길에 치토세마루(千歲丸)호 선원 츠지 도쥬로(辻藤十郞)가 지어줬다 한다. 이와타 산와(岩田三和)란 가명도 사용했다. 박규수, 유대치, 오경석의 문인이기도 하다.

 

1851년 2월 23일에 조선 충청도 공주군 에서 인조 때 우의정을 지낸 문충공 김상용의 9대손 김병태와 부인 은진 송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살결이 '백옥같이 곱고 희다'고 하여 이름을 '옥균'이라 지었다고 한다.

 

6살 때 김옥균은 5촌 당숙이자 당대 정계 거물인 김병기의 양자가 됐다. 당시 유력 집안에 적자가 없는 경우 일가 친척 중 양자를 들여 정치적 지위와 제사를 잇게 하는 경우는 흔했어도 맏이를 양자로 보내지는 않는데, 그럼에도 그는 친아버지인 김병태의 결정으로 세도가 집안에 입양가게 됐다.

 

수학과 개화 사상을 배운 청년기​

 

어려서부터 문장·시·글씨·그림·음악 등에 두루 다재다능했다. 입양 후엔 후계자 수업을 받아야 해 유명한 선생들을 찾아다니며 과거 준비만 전념했다. 11살 때 양부 김병기가 외직에 나갈 순번이 돼 강릉부사로 갔다. 옥균도 강원도 강릉으로 이주해 송담 서원에서 배웠다. 강릉은 서인의 원조 율곡 이이의 고향으로, 율곡의 사당을 모신 그곳에서 노론의 학통을 이었다. 5년 후인 16세 때 다시 중앙으로 전임하는 양아버지를 따라 상경했다.

 

1870년 당시 홍문관 제학으로 제너럴셔먼호 사건 등을 진압하고 흥선대원군의 총애를 받던 박규수의 문하가 됐다. 경복궁 동편 북촌 스승댁 사랑방에 드나들던 한의원이자 개화 사상가이며 뜻있는 젊은이들에게 백의정승(白衣政丞)이라고 불리는 유대치도 만나 배웠다. 스승 박규수의 집엔 신기한 물건과 사람이 많았다. 수도승으로 부산 왜인촌을 자주 드나들던 이동인도 만났고, 역관 수석으로 스승과 함께 청나라행 사신단에 있었던 오경석도 만났다. 일본에서 들여온 지구본, 만화경, 망원경 등의 신기한 물건도 있었고, 청나라에서 들여온 ❮영환지략❯,❮해국도지❯ 등 서구 지리와 정세, 문물을 소개한 서적들도 탐독했다.

 

그는 철종의 부마로 고종의 매제였던 박영효, 여흥 민씨의 총아 민영익, 유길준, 박정양, 서재필 등 동문수학하던 영재들과 함께 동대문 밖 봉은사에 자주 몰려나가 이동인이 계속 사나르던 최신 일본 서적들을 읽으며 서로의 생각을 토론했다. 그러던 중 1872년(고종 10년) 문과 알성시(謁聖試)에 장원급제했다. 1등이기도 했지만 집안이 받쳐주지 않으면 문과에 급제해도 바로 임관되기 쉽지 않은데, 양아버지의 배경과 우의정에 오른 스승 박규수의 인도로 바로 권지 에서 성균관 전적(典籍)에 보임됐다.

 

관료생활 초반​

 

1876년 2월 불평등조약인 강화도 조약 체결 후, 김옥균 등 개화파(開化派) 청년들은 나라의 자주 독립과 실력 양성, 개혁을 추진할 정치 단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신분을 초월한 비밀결사를 결의했다. 신분 문제 때문에 처음엔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자주독립과 근대 개혁을 위해서는 이를 초월해야 한다고 설득해 뜻을 모았다.

 

그들은 조선 말기 미몽에 빠져 허우적대는 조국을 수렁에서 건지려면 새 사상에 의한 일대 혁신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근대화된 조국에의 신념을 모토로 개화에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규합해 충의계를 조직했다.

 

단체 정강을 만들고 사회 각 계층의 동지들을 모아 조직하되, 옛 칠서의 변, 홍길동 사건 들처럼 신분질서 문란죄로 찍혀 탄압됐던 단체들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비밀 계의 형태로 조직을 짰다. 김옥균, 홍영식, 민영익, 서광범, 박영효, 서재필 등이 주축이 돼 유대치, 오경석, 이동인, 윤웅렬 등이 자문하는 식이었다.

 

신문물 수용과 일본 왕래​

 

1876년(고종 16년) 조선 조정에 강력히 건의해, 일어에 능했지만 일개 승려에 지나지 않던 이동인을 정식 사신 자격으로 일본에 보내 신문물을 견학하게 했다. 이동인은 바로 귀국하지 않고 몇 년간 일본에 머무르며 1880년 6월 수신사를 이끌고 방일한 김홍집과 만나는 등 조정 내부에 개화란 화두를 던졌다. 김옥균 자신도 일본에 가고자 80년 말 이동인의 귀국 후 고종을 여러 번 설득한다. 결국 신사유람단을 꾸려 일본에 가게 됐는데 동행하려던 이동인이 출발 직전 왕궁에 들렀다 행방불명된다. 척화파들에 의해 암살됐다는 소문이 곧 퍼졌다.

 

일본 방문과 신문물 시찰​

 

신사유람단 견학

 

1881년 12월 신사유람단을 조직한 김옥균은 생가와 양가 재산 및 주변의 후원금 등을 모두 환전, 총 2만 엔의 거금을 마련해 방일했다. 일행은 나가사키를 거쳐 각자 흩어졌다. 김옥균은 나가사키현 조선소, 제련소, 탄광, 금광 등을 시찰하고 채굴기계의 존재와 금속 가공원리를 어깨너머로 파악하려 애썼다. 이어 고베, 오사카로 건너가 군수기지 공장과 조폐국을 둘러보고 물자 운송용 차량과 지폐 주조 기술을 관람했다. 그 후 교토를 거쳐 1882년 3월 도쿄에 도착했다. 그는 게이오 대학교를 설립한 개화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집에 4개월 정도 머물며 일본의 발전상에 대해 담론을 나누는 한편, 그를 연줄로 일본 정재계 인사들을 만나 그들의 조선에 대한 시각과 일본의 진의를 파악하려 했다. 후쿠자와는 이들의 귀국 후로도 서신을 몇 차례 주고받았다.

 

임오군란 직후​

 

1882년(고종 20년) 6월까지 곳곳에서 일본의 개화상을 관람하던 그들은 본국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났다는 급보를 받고 황급히 귀국했다. 흥선대원군의 척화파가 쿠데타에 성공하면 개혁은 끝이었다. 상경했을 때는 명성황후는 간신히 충주로 이미 피신한 상태였다. 이윽고 청나라가 개입해 흥선대원군을 톈진으로 끌고간 후 명성황후가 환궁했다. 난이 수습되고 고종 부부가 실권을 잡아 척화파가 축출되자 개화파 청년들의 발언권도 덩달아 높아졌다. 그는 승정원 우부승지, 참의교섭통상사무(參議交涉通商事務)를 거쳐 이조참의, 호조참판, 외아문협판(外衙門協辦) 등 각종 화요직(華要職)에 임명됐으며 개화당 동문들을 조정에 심기 위해 노력했다. 동문 막내 서재필이 문과 증광시에 최연소 합격하는 경사도 있었다. 아울러 제1차 일본 방문을 중도에 그치고 귀국해야 했던 그는 틈틈이 《기화근사 箕和近事》를 저술해 왕에게 바쳤다. 그는 저서에서 일본이 동양의 영국이 되려하므로 조선은 동양의 프랑스처럼 근대문화국가를 만들어 완전 독립을 성취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정치 전반에 대경장개혁(大更張改革)이 단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4차 수신사 파견에 참여

 

홍영식

1882년 7월 임오군란이 청나라의 개입으로 수습이 됐음에도 일본이 배상을 요구해왔다. 또다시 제물포 조약이란 불평등 조약을 강요당한 조선 조정 여론이 급속히 반일로 돌아섰다. 당황한 개화파들은 일본의 진의를 파악하고 조약을 재협상해 배상금을 줄이려는 목적으로 금릉위 박영효 일행이 수신사로 가기로 했다. 귀국 직후였던 김옥균 역시 고종에게 다시 방일하게 해달라 건의해 윤허를 얻었다. 수신사는 박영효를 대표로 김만식(金晩植), 홍영식, 서광범 등으로 허가가 났으며 김옥균은 동문 민영익과 함께 고문 자격으로 참여했다. 일본 각계 인사와 인맥을 넓혀 놨던 그였지만 예상보다 훨씬 더 재협상에 어려움을 겪었다. 다만 일본의 서구식 정부 조직과 삼권 분립에 깊은 감명을 받고 조선 개혁의 필요를 다시금 절감했다.

 

일본은 수신사 일행을 국빈 대접하는 등 극진하게 대해 젊은 사신들을 친일 혹은 지일파로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했다. 당시 외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는 개화파 관료들에게 차관 17만 엔을 제시하며 고종의 신임장만 가져온다면 더 많은 차관을 무상으로 제공하겠다 약속했다. 당시 수신사 일행은 빌린 17만엔의 차관 중 제물포 조약에 따라 배상금 1회분 5만엔을 변제하고 나머지는 수신사 체류 경비 등으로 모두 일본에서 썼다. 귀국 후 수중에 남은 돈은 없었다.

 

일본 체류​

 

1882년(고종 19년) 11월 수신사 일행은 새로 부임하는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와 함께 귀국하고, 김옥균과 서광범 등만 일본에 남아 정세를 더 살피고 조약 재개정에 대한 일본 정부의 협조와 차관 도입에 대한 돌파구를 찾기로 했다. 그는 국빈 자격이었지만 여관에 투숙하고 막일을 하며 생활비와 활동 자금을 스스로 모았다. 그가 6개월 일본 체류 중 반드시 우선 도입해야겠다고 생각한 것 중 하나는 바로 전매 제도였다. 일본은 서구를 본따 소금 및 주류와 담배를 국가에서 전매하고 주요 해산물과 교통 시설 등에 세금을 부과해 늘어난 국가 재정을 바탕으로 근대화 및 군사력 증강에 심혈을 기울였다. 귀국 후 김옥균은 일본처럼 술과 담배, 소금, 인삼 등의 특산품을 전매해 정부의 재정을 늘릴 것을 건의했으나 이는 제안 전매 품목을 독점하던 왕실 종친들, 일부 특수 혜택 계층의 반발을 부를 것이 명약관화했으므로 묵살됐다. 이 기간 중 저서 《치도약론》을 보면 도로 정비를 위한 치도국(治道局) 설치, 기술자 양성, 기계 구비, 오물 처리법 등의 개혁안과 재원 마련을 위한 17개 세목(稅目)들이 열거돼 있으며 같은 내용을 한성순보에도 게재해 공감을 얻기 위해 애썼다.

 

그의 일본 체류중 일본 정부측은 자국 군비 증강이 조선의 독립을 돕고 아시아의 평화를 도모하기 위함이라 감언을 흘리고는 차관을 주선하겠다 다시금 강조하며 그를 설득했다. 그는 그들의 진의가 무엇인지 반신반의하면서도 그들의 대의명분을 받아들였다. 김옥균은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종주국이 된 청나라의 내정간섭에 매우 비판적이었으며 조선의 자주 국방력을 키워야 한다고 믿었다. 고종도 이에 공감해 서재필과 그의 동생 서재창 및 개화파에 입당한 부하들인 17명의 청년들을 일본으로 보내 근대식 군사기술을 배워오게 했다. 그는 조선에 서구식 군사학교를 짓기 위한 청사진을 만들었다. 그는 조선 조정에 유학생을 더 선발해 보내자고 상소하는 한편 동문수학한 동생들과 부하들이 일본에 도착하자 이들의 신원을 보증해 일본 내 여러 학교에 입학시키고는 1883년(고종 20년) 3월 나가사키에서 배편으로 귀국했다.

 

신분제 폐지와 사회개혁론​

 

그는 우선 신분제도, 문벌의 철폐, 인재의 공평한 등용, 공개 채용 시험 도입을 건의했다. 이어 왕실재정과 국가재정의 분리, 무상 토지 분배로 실질 세수 확보를 주장했다. 산업 장려책으로 근대 공업의 건설, 광업의 개발, 선진 과학기술의 도입을 주장하고, 상업진흥책으로 회사제도 입법, 화폐개혁, 관세 자주권 확보와 세금 영수증 제도의 도입을 건의했다. 그밖에도 철도 부설과 기선 해운의 도입, 전신회사 설립, 인구 조사, 농업과 양잠, 목축 등 상업적 농업 진흥, 임업 개발, 어업 개발과 포경업 도입 등 상공업 전반에 걸친 대개혁을 부르짖었다. 또한 서양식 학제를 도입해 신식 학교를 전국적으로 설립하자고 주장했다. 자주 국방력 양성과 지방관의 경찰권, 법관권한을 분리하며 아울러 경찰제도, 형사행정과 사법권 개혁을 촉구하고, 도로 개선과 정비, 위생의 개혁, 종교와 신앙의 자유 허용, 조선의 영세 중립화까지 주장김옥균정치 활동

 

개화파 활동​

 

일본의 군비 확장과 정한론에 대해 알게되자 일본이 미구에 침략할 가능성이 있음을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윤치호 등 개화당 동지들에게 넌지시 비치기도 했다. 아울러 울릉도와 독도 해역에서 포경 사업으로 떼돈을 벌어가던 일본을 경계했다.

 

1883년(고종 20) 3월 귀국과 동시에 동남제도개척사 겸 관포경사(東南諸島開拓使 兼 管捕鯨使)로 임명됐다. 이는 김옥균이 원하는 것이기도 했으나 사실 좌천이었다. 임오군란을 수습한 후 고종의 어심은 동도서기로 기울어 있는데다가 명성황후와 외척들이 정치 전면에 등장하면서 밀려난 결과였다. 그러나 외직에 나가서도 그는 맡은 바 임무를 다했다. 우선 울릉도에 남해안과 호남 출신 어부들을 정착시켜 무인도화를 막았다. 울릉도에 주민을 정착시키는 일은 가뜩이나 어려운 정부 재정을 기울여야 하는 일이었으나 고종도 결단했다. 어쨌든 정착민들이 고기잡이를 나가면서 조선 때 지리 명칭인 우산도를 '돌섬'이라는 뜻의 호남 방언 '독섬'으로 불렀다. 이게 독도의 어원이 된다.

 

민씨 척신, 척사파 세력과의 갈등​

 

조일수호조약 연회기념도, 건너편 가운데가 김옥균, 앞줄 맨 좌측 무관복을 입은 이는 홍영식, 맞은 편 서양인은 묄렌도르프이다. 식탁에는 스테이크와 나이프가 보인다.

(안중식 작, 1883년)

1883년 음력 2월 내부 모순과 거듭된 배상 조약등으로 거덜난 조선의 재정 문제 때문에 묄렌도르프가 청나라에서 고문 자격으로 파견됐다. 그는 민씨 외척들을 주축으로 한 수구파들에게 당오전 주조를 주장했다. 이를 알게 된 김옥균은 펄쩍 뛰었다. 이미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때 발행한 당백전의 잘못을 또 하겠느냐며 급히 상소를 올렸다. 그는 당오전이 재정 확보는커녕 물가 폭등으로 민심만 이반될 거라며 반대했다.

 

이 문제를 놓고 아직은 개화당 동문이던 민영익의 집에 묄렌도르프를 비롯한 온건파(수구당) 중진들과 급진개화파들이 모였다. 스테이크와 포크 나이프를 앞에 둔 채로 김옥균은 묄렌도르프를 논리적으로 몰아붙여 입도 못떼게 했다. 이는 두 파의 반목이 표면에 드러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삼정이 문란한 조선의 현실에서 기득권을 그대로 두고 근대화를 위한 돈을 마련할 방법은 밖에서 꿔오든가 아니면 찍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수구파의 뜻대로 당오전은 발행됐고 물가는 폭등했다. 당오전은 당시까지 통용되던 상평통보의 5배에 달하는 액면가로 상평통보 5전과 동일한 액면가로 가치가 정해졌지만 시중에서는 상평통보와 동일한 액면가로 통용되고 있었다. 지방관들은 상평통보와 당오전의 단위가 냥으로 같은 점을 악용해, 조세를 당오전 액면가의 5배로 유통되던 상평통보로 걷어놓고 나라에는 당오전의 액면가대로 대납하는 과정에서 차액을 착복한 후 중앙고관대작들에게 상납했다.

 

김옥균은 잘못된 통화 정책으로 엔화 환율이 1 대 2.5 정도에서 1대 8로 급락하며 더욱 악화된 대일(對日) 무역 역조 및 정부 재정 적자에 대해 상소를 멈추지 않았지만, 오히려 민씨 일파를 비롯한 수구파, 묄렌도르프들은 '김옥균과 개화파가 발목을 잡기 때문에 정책 효과가 더디 나타나는 거'라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묄렌도르프 등 조선에 청나라 입김이 강해져 영향력을 잃을까 우려한 일본은 조선에 차관이란 카드를 내민다. 1883년 김옥균을 통해 일본은 고종이 위임장만 주면 차관을 추가 제공하겠다고 조선 조정에 알려왔다. 고종 역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고종은 바로 김옥균에게 위임장을 들려보냈다.

 

일본의 입장 변경과 차관도입 실패​

 

1883년 6월 고종의 위임장을 받아든 김옥균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를 알게된 묄렌도르프와 수구파들은 고종에게 달려가 당장 취소하라고 압박하는 한편, 개화파가 비자금을 만들려한다고 루머를 퍼뜨렸다. 묄렌도르프는 다케조에 신이치로 일본 공사에게 김옥균의 위임장이 위조된 거라 흘렸다. 다케조에 공사는 바로 이를 본국에 타전했다. 수구파의 방해 공작은 전방위적이었다.

 

이를 까맣게 몰랐던 김옥균은 차관 교섭 테이블에 앉았으나 일본 정부는 그를 불러놓고는 차관을 일방적으로 취소했다. 김옥균은 정부 차관에 실패하자 일본에 주재하고 있는 외국계 상사와 민간 은행을 통한 국채 발행을 시도했다. 조선 정부는 국제 신용이 없었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일본 정부의 보증을 요구했고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김옥균의 일본행은 완전히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미국행 고려와 단념​

 

김옥균은 차선책이었던 국채 발행마저 여의치 않자 서광범과 함께 미국에 가려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미국행만은 단념했다.

 

갑신정변 전후​

 

조련국 설치 시도와 실패​

 

김옥균은 1883년 3월 서재필, 서재창, 이규완, 신응희, 정행징(鄭行徵), 임은명(林殷明), 유혁로, 신중모, 윤영관, 하응선, 정난교 등을 일본으로 유학보낸 바 있다. 이 중 서재창, 이규완, 유혁로 등은 도야마 하사관학교에 입학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각자 전공 학교에서 정치, 경찰, 우편, 관세, 재정 제도를 배웠다. 이들은 정부 지원이 끊어지자 1년 후 귀국해야 했다. 이 무렵 경기도 광주 유수로 좌천돼있던 박영효가 하사관 학교 재학생 신복모, 이규완, 유혁로, 정난교 등을 주축으로 신식 군대 창설에 착수했다. 총원 600명 정도로 병조 산하의 조련국이란 서구식 군사학교 형식으로 허가됐다. 박영효는 자기 집까지 일본 공사관에 판 대금 5000원으로 군자금까지 마련했다.

 

그러나 개화파들의 성장을 경계한 민씨 외척들은 고종을 압박해 조련국 설치를 취소시키고 이듬해 해방영(海防營)을 설치해 민씨 척족과 이완용 등 문벌의 자제들을 중심에 앉혔다. 민영환이 주장해 강화도 등 주요 방어지점에 설치된 해방영은 경기, 충청, 황해도 3개도에 설치됐다가 갑신정변 후 통위영으로 개칭된다.

 

일본 차관도입 실패​

 

1884년 2월까지 차관 및 국채 조달에 매달린 그는 빈손으로 귀국했다. 그는 상경길에 일본 영사관에 갔다가 협상이 왜 실패했는지 뒷사정을 알게 됐다. 분노와 좌절에 빠진 그는 일본영사관을 나와 고종에게 귀국인사만 하고 조용히 돌아갔다. 이미 개화파의 모든 사업은 중단된 상태였다. 박영효가 추진하던 병력 양성 사업과 신식 무기 구입 역시 자금 부족으로 중단되고 600여 병력은 한규직, 윤태준의 해방영 밑으로 편입돼 결국 민씨 정권만 좋은 일이 됐다. 박영효는 광주 유수 자리마저 해임됐다.

 

수구파 타도 계획​

 

개화파들이 주장해 설립된 조선 최초의 관립 언론 출판사 박문국 발행의 한성순보도 폐간 위기였다. 청나라 군사들의 행패를 보도했다가 외교문제로 비화돼 일본인 직원들이 쫓겨나고 정부 지원이 끊겨 경영난에 빠졌다. 개화파들의 언로가 막힌데다가 김옥균은 외적으로는 외자 도입 실패를 계속 추궁당했고 내적으로는 자객에게 목숨까지 노려졌다. 그는 곧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현재 정독도서관 자리인 북촌 집에 칩거했다.

 

그의 잠재적 은퇴 후에도 민씨 척족 및 수구파들은 김옥균을 죽이라 상소를 올리는 한편 호시탐탐 자객을 보내 위협했다. 대원군의 척사파는 더더욱 김옥균 등에게 이를 갈았다. 그런데 개화파 동지 민영익조차 점차 원래 출신인 민씨 외척 세력으로 기울었다. 민영익이 1883년의 유럽 시찰 등 서구 문명 자체를 직접 본 터였음에도 오락가락하자, 더욱 절망에 빠진 김옥균 등은 혁명을 계획한다.

 

갑신정변 전야​

 

수구파(온건개화파)와 척사파 양측의 공격 및 청나라의 압력, 묄렌도르프 등의 방해 공작 등으로 궁지에 몰리자 김옥균은 순리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혁명을 머리에 그렸다.

 

당시 조선은 전국 각지에서 민란으로 관공서 습격까지 있었고 동학교도들의 교조 신원과 포교 허용 요청, 천주교의 포교 허용 요구 및 개신교 유입과 확산, 전염병과 흉년, 유랑민 등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게다가 1884년 8월 청나라는 베트남 종주권을 두고 프랑스와 충돌해 가용 병력을 거의 베트남 전선에 투입해야 했다. 감군 계획에 따라 주조선 청군 병력 역시 이미 반토막 난 상태였다. 모든 상황은 개화파에게 결단을 요구하고 있었다.

 

김옥균에게 동원 가능한 병력은 '충의계'의 40여 비밀조직원과 일본 유학생 출신 30여 명을 주축으로 개화파 동지인 함경남도 병마절도사(줄여서 남병사) 윤웅렬의 병력 1500이 있었고, 비록 해방영 산하에 있으나 원래 조련국 출신인 600여 명 등이었다. 문제는 수구파 배후의 청나라 군이었다. 반드시 일본군의 힘이 필요했다.

 

김옥균은 일본을 떠보기 위해 다케조에 신이치로 공사에게 차관 교섭 실패 건에 대해 항의하고 조선 개혁을 역설했다. 그러자 다케조에는 차관 교섭 실패가 자신의 책임임을 시인하고 앞으로는 김옥균에게 적극 협조하겠노라 약속했다. 거사를 결심하기에는 아직 그 정도로는 믿을 수 없었다. 며칠 후 왕실 종친 박영효를 보내 다시 떠보자 김옥균의 뜻을 파악한 그는 "청나라는 장차 망할 것이니 귀국의 개혁 지사들께서는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마시오."라고 답했다.

 

거사 직전​

 

그해 9월 추가 병력 모집과 군자 조달 등의 본격적인 거사준비에 나섰다. 김옥균은 거사 10월 초 다케조에를 다시 만나서 이른바 '삼책(三策)'을 알려 주고 협조에 대한 확답을 받아 냈다. 삼책이라 함은 첫째, 충의계를 중심으로 한 개화파의 단결을 통하여 정변을 계획대로 추진시키고 둘째, 고종을 설득하여 정변을 승인받아서 거사 명분을 확립한 다음 셋째, 청군의 간섭이나 방해 책동은 일본군이 막아 준다는 내용이었다. 일본측의 동의를 얻어낸 김옥균은 거사 5일 전인 10월 12일에 대궐 안으로 들어가 고종과 단독으로 대면하여 세계의 정세와 청나라와 결탁한 민씨 정권의 매국적 작태를 설명하고, 민씨 일파가 요직을 장악하여 왕을 꼭두각시로 여긴다는 점을 지적한 뒤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새 정부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김옥균의 역설에 감동한 고종은 마침내, "국가의 명운이 위급할 때, 모든 조처를 경의 지모에 맡기겠다."는 지시를 은밀히 내렸다.

 

고종의 동의를 얻은 김옥균은 윤치호를 통해 미국 공사에게도 곧 정변이 있을 것임을 알리고 협조를 부탁하여 대내외적으로 거사를 위한 준비 작업을 마쳤다. 아직 완전히 미덥지 않은 일본 측에게는 거사 일자를 정확히 알리지 않았지만, 홍영식의 우정국 낙성식 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동지들과 준비를 마무리했다. 이때 다케조에로부터 일본 정부의 정확한 지시를 받은 후에 거사를 일으키자는 요청을 받았지만 김옥균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1884년 10월 17일 오후 6시 정동에 신축한 우정국 낙성식에는 우정국총판 홍영식의 초청으로 많은 내외 귀빈의 참석하여 낙성 축하연을 했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김옥균은 옆자리에 앉아 있던 일본 공사관의 시마무라 서기관에게 이날 거사를 일으킬 것임을 은밀히 알려서 일본군 동원을 준비시켰다. 김옥균의 연락을 받은 서재필은 바로 병력을 집결, 이동시켰고, 우정국 입구에 매복시켰다.

 

연회가 거의 끝날 무렵 우정국 북쪽 건물에서 불길이 치솟으며 화재가 발생했다. 가장 먼저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던 민영익이 매복하고 있던 개화파 무사들에게 칼을 맞고 한쪽 귀가 떨어진 채 피투성이가 되어 허겁지겁 다시 들어오자 연회장 안은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때를 틈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은 급히 우정국을 빠져나와, 매복하고 있던 서재필 휘하 사관 생도들을 다시 경우궁으로 이동시키고 김옥균은 교동에 있는 일본 공사관으로 가서 일본군의 출동을 확인한 후에 대궐로 향했다.

 

갑신정변과 삼일천하​

 

갑신정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0월 17일 저녁 김옥균 등은 창덕궁 금호문 앞에 당도하여 김봉균, 신복모 등이 거느리고 온 40여명의 병사들을 문 밖에서 지키게 하고는 미리 내통하고 있던 수문군이 문을 열어주어 바로 입궐했다. 또한 윤경완이 인솔하는 무장병력 50여명에게는 전문 앞을 지키게 하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세 사람은 고종이 있는 침전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고종에게 우정국에서 변란이 일어난 것과 그 원인이 민씨 척신 세력의 음모와 부패, 민생의 피폐 때문임을 알리고 형세가 위급함으로 경우궁으로 피난할 것을 요청했다. 처음에는 사태의 자초지종을 다지던 고종 내외도 침전 동북쪽 통명전 부근에서 엄청난 폭발음이 들려오자 놀라서 그들을 따라나섰다.

 

고종 일행이 경우궁에 도착하자 박영효는 다케조에와 함께 일본군 병사 200명을 경우궁 주변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서재필이 지휘하는 사관 생도 13명은 국왕의 거처 바로 앞을 지키면서 출입자를 통제하도록 조치한 후에, 왕명으로 중신들을 불러들여서 일단의 민씨 척신 세력을 척살해 버렸다. 그날 밤 군사들은 척신계와 수구파 인사들은 윤태준, 이조연, 한규직, 척신인 민영목, 조영하, 순명효황후의 친정아버지 좌찬성 민태호 등과 거사에 동조하기로 했다가 변절한 내시 유재현 등을 살해하였다.

 

10월 18일 척신 정권 지도자들을 처형한 개화파는, 18일 새벽 신정부의 발족을 알리고 인사를 단행하였다. 고종의 사촌형 이재원을 영의정에, 홍영식은 좌의정에, 윤웅렬은 형조판서, 박영효는 전후영사, 서광범은 좌우영사, 서재필은 병조참판, 신기선은 이조참판, 승정원도승지는 박영교로 내정하여 내각을 장악하였다.

 

김옥균은 재무와 내무를 관장하는 호조의 차관인 호조참판을 맡아 개혁에 필요한 재정의 조달을 담당하기로 했다. 내각 구성을 마친 새 정부는 14조항의 강령을 발표한다.

 

 

첫 번째, 청에 잡혀 간 대원군을 환국시키고 청에 대한 조공을 폐지한다.

두 번째, 문벌을 폐지하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한다.

세 번째, 조세 제도를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가난한 백성을 보호하여 국가 재정을 늘린다.

네 번째, 내시부를 없애고 그 중에서 우수한 자는 관직에 등용한다.

다섯 번째, 탐관오리 중에서 그 죄가 극심한 자는 처벌한다.

여섯 번째, 백성들에게 빌려 주었던 정부 소유의 환자미는 모두 탕감하고 받지 않는다.

일곱 번째, 규장각을 폐지한다.

여덟 번째, 빠른 시일 내에 순검(巡檢)을 두어 치안에 주력한다.

아홉 번째, 혜상공국(惠商公局)을 폐지한다.

열 번째, 유배되거나 구속되어 있는 자는 형을 감해 준다.

열한 번째, 4개영을 1개영으로 통폐합하되, 그 중에서 장정을 봅아 근위대를 설치한다.

열두 번째, 일반 재정은 호조에서 통할하고 기타 모든 재정 담당 관청은 폐지한다.

열세 번째, 대신과 참찬은 매일 합문 안에 있는 의정소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

열네 번째, 육조 이외의 모든 불필요한 기관은 없애되, 대신과 참찬이 이를 결정하게 한다.

 

그밖에 개화파 혁명 정부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개혁안을 발표했다.

 

 

첫 번째, 전 국민은 단발한다.

두 번째, 외국 유학생을 선발하여 파견한다.

세 번째, 궁내성을 별도로 설치하여 왕실 업무와 일반 국무를 구분한다.

네 번째, 국왕을 '성상(聖上) 폐하(陛下)'로 칭해서 타국의 황제와 동등하게 예우하며 대조선국의 군주로서 존엄을 유지한다.

다섯 번째, 지금까지의 관제를 폐지하고 내각에 여섯개의 부서를 둔다.

여섯 번째, 과거제도를 폐지한다.

일곱 번째, 내외의 공채(公債)를 모집하여 국가 재정을 충실히 한다.

 

그러나 지지기반이 취약한 내각은 민씨의 척신 정권이 청나라 군사를 끌어들여 반격을 가하자마자 그대로 몰락하게 된다.

 

정변의 실패와 은신​

 

이후 '인민평등', '문호개방' 등 개혁을 단행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오히려 역심을 품는 것으로 곡해되었다.

 

1884년 보수파인 사대당의 민씨 일파를 후원하는 청나라가 안남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틈을 타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사대당의 중심인물을 숙청하는 등 정변을 주도하여 당시 신정부의 호조참판 겸 혜상공국 당상에 취임했다. 그러나 정변이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삼일천하로 끝나자 다케조에 신이치로와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여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의탁하였다.

 

명성황후 민씨는 경우궁으로 옮긴 다음 날 민씨 척신 세력으로부터 민영목, 조영하, 민태호 등의 암살 소식과 민영휘의 부상 소식을 접했다. 수구파의 일원인 전 경기감사 심상훈(沈相薰)을 통해 사건의 실상을 알게 된 민씨 세력이 청나라 군대를 개입시켰고, 곧 만주에 주둔중인 청나라 군사를 끌어들였다. 민비는 계속 거처가 너무 협소하다면서 창덕궁으로 환궁하자고 고종에게 닦달하였다. 넓은 창덕궁과 달리 경우궁은 좁아서 경비하기가 쉽기 때문이었는데 왕후 민씨가 이를 트집잡고 나온 것이었다. 왕후의 불만에 고종은 할 수 없이 조금 더 넓은 계동궁으로 옮기도록 하였으나 왕후는 계속해서 환궁을 요구했다. 그러나 명성황후와 민씨 일파가 청나라와 내통한 것을 인식하지 못한 김옥균 등이 외부 수습에 바쁜 틈을 타 민씨는 경비를 책임지고 있던 다케조에를 졸라서 다시 환궁하였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김옥균은 다케조에에게 항의했지만 다케조에는 "창덕궁으로 환궁해도 경비에는 문제가 없다."며 큰소리를 쳤다. 이미 왕후의 강력한 요구로 번복이 어렵게 되자, 박영효 등은 일본군의 무라카미 중대 병력과 함께 국왕 부처를 호위하여 창덕궁으로 인솔하였다. 그러나 해질 무렵 대궐 문을 닫으려고 하자, 선인문 밖에까지 당도한 청나라 지원군이 방해하여 양측 사이에 교전이 발생했다. 박영효는 강경하게 대응하자고 주장하였으나 김옥균과 다케조에는 타협안을 하기로 결정, 궐문을 닫지 않고 궐 밖은 청군이 경비를 서고 궐 안은 일본군이 지키는 것으로 청군 측과 합의했다.

 

10월 21일 아침이 되자 다케조에는 돌연히 태도를 바꾸어 일본군은 형편상 오랫동안 조선의 궐 안에 머무를 수가 없다고 하면서, 그날 안으로 철수하겠다고 통보했다. 갑작스러운 다케조에의 태도돌변에 당황한 김옥균은 바로 일본공사관으로 달려가 다케조에와 담판을 벌여서, 개화 정권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을 때까지 3일간 동안 철병을 미루고, 개혁 사업의 추진을 위한 자금 조달에 협조한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그러나 다케조에는 철병을 강행한다.

 

21일 오전 청나라 제독 우주유(吳助維)는 도성이 평안하다는 편지가 고종에게 전달되고 바로 위안스카이가 600여명의 병사를 대동하여 국왕과의 접견을 요청했는데, 김옥균 등은 위안스카이의 접견은 허락하나 청군이 대궐로 들어오는 것은 안 된다고 주장하여 물리쳤다. 그러나 그날 오후 위안스카이는 전 우의정 심순택에게 청군 출동을 요청하게 하여 청군의 군사적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억지로 확보한 다음, 마침내 5백명으로 구성된 한 부대는 우주유의 지휘 아래 선인문 쪽으로, 8백명으로 편성한 다른 부대는 위안스카이 자신이 직접 지휘하여 돈화문에서 창덕궁 방향으로 진격하여 궁궐 외곽을 지키고 있던 일본군과 청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다. 당시 창덕궁을 에워싸고 공격했던 인원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 전 병력과 수구파가 장악했던 좌우영 소속 조선 군졸들에다가, 개화파가 일본과 결탁하여 국왕을 연금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한 일반 백성들까지 가세하여 엄청난 수의 대부대를 이루었다. 그러나 궁궐을 수비하던 병력은 일본군 200명과 개화파 자체 동원 병력 800명 정도로 그 수에서 이미 결판이 나 있었으며, 더구나 개화파의 병력은 변변한 무기조차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았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