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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이야기

01. 의빈 성씨(宜嬪 成氏, 1753년~1786년)

작성자管韻|작성시간22.04.13|조회수474 목록 댓글 0

01. 의빈 성씨(宜嬪 成氏, 1753년~1786년)

 

 

 

 

 

 

의빈 성씨(宜嬪 成氏, 1753년 8월 6일 (음력 7월 8일) ~ 1786년 11월 4일 (음력 9월 14일))는 조선 제22대 왕 정조(正祖)의 후궁이며, 문효세자의 어머니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이름은 덕임(德任)이다. 영조 때 입궁했고 청선공주, 청연공주, 궁녀 영희, 경희, 복연과 고전소설 《곽장양문록》을 국문 필사했다. 정조의 유일한 승은 후궁으로 정조가 내린 승은을 두 번 거절하고 나서 후궁이 되었다. 정조와의 사이에서 문효세자와 옹주를 낳았다. 사후 의빈 성씨의 소망대로 효창원 왼쪽 산등성이에 묘소가 조성되었고 일본에 의해 서삼릉 후궁 묘역으로 이장되기 전까지 어머니와 아들의 무덤이 백 걸음 떨어진 곳에 나란히 있었다. 공식적으로 궁호를 받은 기록은 없으나, 정조 때 의빈궁(宜嬪宮)이라는 칭호를 받았고 고종 때 칠궁(七宮)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순종 때 제사 제도가 개정되어 칠궁에서 폐지되었으나 명칭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의빈 성씨(宜嬪 成氏)의 본관은 창녕이고 이름은 덕임(德任)이며 1753년(영조 29년) 음력 7월 8일에 증 찬성 성윤우(贈 贊成 成胤祐)와 증 정경부인 부안 임씨(贈 貞敬夫人 扶安 林氏)의 딸로 태어났다.

 

《어제의빈묘표》와 《어제의빈묘지명》에 따르면 의빈의 신분과 집안은 한미했다. 고조부 성경(成景)은 군자감 정(정3품)의 자리까지 올랐으나, 증조부 성근립(成謹立)과 조부 성수산(成壽山)은 평생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1787년(정조 11년) 이전에 성근립은 판결사(정3품), 성수산은 좌윤(종2품)에 증직 되었고 1787년(정조 11년)에 각각 이조참판(종2품), 이조판서(정2품)로 다시 추증되었다.

 

아버지 성윤우는 정조의 외조부가 되는 영풍부원군 홍봉한(洪鳳漢), 승지 한준증(韓俊增)의 청지기로 지낸 적이 있고 미포아문의 고직으로 있기도 했다. 1753년(영조 29년)에 교련관으로 무관직에 올라 1754년(영조 30년)에 경복궁 가위장이 되었고 1755년(영조 31년)에 절충장군(정3품), 가선대부(종2품)를 거쳐 1761년(영조 37년)에 첨절제사(종3품)가 되었다.

 

성윤우는 장흥 마씨(長興 馬氏)와 초혼을 하고 부안 임씨(扶安 林氏)와 재혼하고 단양 지씨(丹陽 池氏)와 삼혼을 했다. 《창녕성씨세보》와 《창녕성씨상곡공파보》에 따르면 장흥 마씨는 1775년(영조 51년)에 사망했다. 그러나 1769년(영조 45년)에 성윤우가 사망하자 장흥 마씨, 부안 임씨와 합장 되었고 사망연도가 미상인 단양 지씨는 춘성군에 묘가 조성되었다. 따라서 장흥 마씨의 사망연도는 오류인 것으로 보인다.

 

외조부 임종주(林宗胄)는 통례원 인의(종6품)였는데 1786년(정조 10년) 11월 이후에 통덕랑(정5품)으로 증직 되었다. 어머니 부안 임씨는 의빈 성씨가 4살이 되는 1756년(영조 32년)에 3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첫째 오빠 성담(成湛)은 무과에 합격했지만 1783년(정조 7년)에 무관직을 제수받기 전에 사망했고, 둘째 오빠 성협(成浹)은 절충장군(정3품), 셋째 오빠 성완(成浣)은 부사용(종9품), 막냇동생 성흡(成洽)은 만호(종4품)의 자리까지 올랐다. 넷째 오빠 성숙(成淑)은 무과에 합격하지 못했다. 조카들 중에서는 성국민(成國民)은 현감(종6품), 성도민(成道民)은 선략장군(종4품), 성순민(成舜民)은 첨정(종4품)이 되었다.

 

궁녀 입궁

황윤석의 《이재난고》에 따르면 아버지 성윤우가 홍봉한의 청지기였던 인연이 계기가 되어 1762년(영조 38년) 이후에 입궁했고 혜경궁 홍씨가 친히 길렀다. 다른 원인으로는 성윤우가 전포아문 관리와 7천 냥을 범포해서 거의 죽을 지경이 되자 혜경궁 홍씨가 의빈 성씨를 거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이와 같은 사건이 나오지 않는다. 성윤우는 1761년(영조 37년) 6월에 첨절제사가 되었고 다음 달에 하직했다.

 

첫 번째 승은 거절

1765년(영조 41년)에 정조는 여색을 가까이 했고 그해 11월부터 병을 앓기 시작했다. 감기, 복통, 피부질환, 담증, 번열, 현기증, 식은땀 등의 증세를 겪고 1766년(영조 42년) 6월이 지나서야 쾌차했다. 그해에 정조가 승은을 내리자 울면서 "세손빈(효의왕후)이 아직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했으니 감히 명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하고 죽음을 맹세하며 사양했다. 이에 정조는 의빈의 뜻을 받아들이고 종용하지 않았다.

 

1769년(영조 45년)에는 평소에 담벽증을 앓고 있었던 아버지 성윤우가 사망했다.

 

《곽장양문록》 필사

1773년(영조 49년)에 청연공주, 청선공주, 궁녀 영희, 경희, 복연과 고전소설 《곽장양문록》(전 10권 10책)을 국문 필사하였다. 이 소설은 필사 시기가 알려진 소설 가운데 최고로 오래된 필사소설이며, 의빈이 필사한 부분의 하단에는 '의빈 글시'라고 표기되어 있다.

 

두 번째 승은 거절 후 승낙

황윤석의 《이재난고》에 의하면 1780년(정조 4년) 12월에 의빈 성씨로 추정되는 나인이 임신한 지 여러 달 되었고 1781년(정조 5년) 7월에는 의빈 성씨가 임신 중이었다. 반면에 정조의 《어제의빈묘지명》에서는 합궁한 달에 바로 문효세자를 임신했다. 즉, 원빈 홍씨와 화빈 윤씨가 간택되고 나서 1781년(정조 5년)에 정조가 다시 승은을 내리자 의빈 성씨는 거듭 사양했다. 이에 정조가 의빈의 하인을 꾸짖고 벌을 내리자 정조의 승은을 받아들였다.

 

후궁 봉작

“하교하신 대로 소용궁(昭容宮)에게 올릴 빈호(嬪號)에 대한 일로 좌의정 이복원, 우의정 김익에게 가서 물으니, ‘철(哲) 자, 태(泰) 자, 유(裕) 자, 흥(興) 자, 수(綏) 자가 좋을 듯하나 감히 하나로 적시하여 대답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하여, 하교하기를,

 

“의(宜) 자로 하라.”

 

하였다.

1782년(정조 6년) 8월 26일 전에 상의(정5품)가 되었고 문효세자가 태어난 당일에 소용(정3품) 봉작을 받았다. 12월에 작호(爵號)를 올리는 일을 도목정사(관리의 치적을 심사하여 면직하거나 승진 시킴)에서 거행했고 1783년(정조 7년)에 의빈(정1품)으로 진봉했다. 정조는 좌의정 이복원(李福源)과 우의정 김익(金熤)에게 빈호를 의논해서 정하라고 했으나 직접 '의(宜)'자로 정했다.

 

문효세자와 옹주 출생

왕자(王子)가 탄생하였다. 임금이 승지와 각신(閣臣)들을 불러 보고 하교하기를,

"궁인(宮人) 성씨(成氏)가 태중(胎中)이더니 오늘 새벽에 분만하였다. 종실이 이제부터 번창하게 되었다. 내 한 사람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머지않아 이 나라의 경사가 계속 이어지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으므로 더욱더 기대가 커진다.‘후궁은 임신을 한 뒤에 관작을 봉하라.’는 수교(受敎)가 이미 있었으니, 성씨를 소용(昭容)으로 삼는다."

 

하니, 신하들이 경사를 기뻐하는 마음을 아뢰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를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하였다. 또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을 불러 보았는데, 모두가 말하기를,

 

"하늘에 계신 조종께서 우리 나라를 돌보시어서 남아가 태어난 경사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 달은 우리 선대왕께서 탄생하신 달이고 우리 전하께서 탄생하신 달인데다가 왕자께서 또 이 달에 탄생하셨으니, 경사에 대한 기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대신이 뜨락에서 문안을 올리려고 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인데, 명호(名號)를 정하기 전에 뜨락에서 문안을 드리는 것은 근거할 만한 전례가 없다. 더구나 을묘년에도 이러한 예가 없었으니, 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1782년(정조 6년) 8월 26일에 공조판서 서유경(徐有慶)을 권초관(捲草官)으로 삼았다. 9월 7일에 호산청이 설치되었고 인시(새벽3시~5시)에 창덕궁 연화당에서 문효세자를 낳았다. 연화당은 선정전 동쪽에 있고 청기와 등을 사용한 인경궁의 전각들을 옮겨놓은 건물 중 하나여서 매우 웅장하고 화려했다. 이날 혜경궁은 본가에서 데려온 유모 아지와 몸종 복례를 호산청으로 보내서 해산을 돕게 했다. 정조는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을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많고 많은 일 중에 이보다 더 기쁜 일은 없었다."라고 심경을 밝혔다. 호산청 의관 강명길(康命吉), 변관해(卞觀海), 탕약서원 신정희(申正希), 범경문(范慶文), 의녀 설매(雪梅), 일애(日愛)에게 벼슬을 임명했고 9월 13일에 호산청을 철수했다.

 

내가 이르기를,

“조금 전에 순산(順産)하여 딸을 얻었다. 아들이 있는 데다가 또 딸이 생겼으니, 내가 참으로 기쁘다.”

하니, 김사목이 아뢰기를,

“신들도 이루 말할 수 없이 경사스럽고 기쁘게 생각합니다.”

 

하였다.

1784년(정조 8년) 윤 3월 20일 묘시(새벽 5시~아침 7시)에는 옹주를 낳았다. 잠깐 사이에 의빈이 옹주를 낳은 까닭에 호산청은 옹주가 태어나고 나서 설치했다.

 

문효세자 책봉

문효세자는 태어난 지 100일이 안 된 1782년(정조 6년) 11월에 원자로 책봉 되었다. 1784년(정조 8년) 7월에는 왕세자로 책봉 되었고 8월에 정조가 문효세자를 위해 지은 창덕궁 중희당에서 왕세자 책봉 예식을 거행했다.

 

자녀 요절

옹주는 1784년(정조 8년) 5월에 궁궐 밖으로 피우(避寓) 했는데 5월 12일 신시(오후 3~5시)에 경기(驚氣)로 갑자기 사망했다. 이날 정조가 “나는 잊겠다. 어찌 슬픔을 이길 수 없겠는가. 다만 자궁(慈宮, 혜경궁)께 슬픔을 끼친 것이 매우 걱정스럽다."라고 말한 것을 볼 때 혜경궁 홍씨가 손녀의 죽음을 무척 슬퍼한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옹주를 잃은 슬픔으로 5월 13일에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옹주의 장례는 당시 정조의 총애를 받고 있는 무관 임율(任嵂)이 주관했다.

 

문효세자는 1786년(정조 10년) 5월 3일에 홍역을 앓아서 의약청을 설치했다. 증상이 호전되어서 5월 6일에 의약청을 철수하고 정조는 고유제, 사면령, 과거 실시, 조세 탕감을 지시하고 의약청에 상을 내렸다. 그러나 5월 10일부터 증세가 심해졌고 다음 날인 5월 11일 미시(오후 1~3시)에 창경궁 자경전 동쪽 행각에서 사망했다.

 

5년 동안 외척이었던 본가

의빈 성씨의 본가 창녕 성씨는 한때 외척이었지만 두각을 드러낸 인물이 없고 의빈과 문효세자가 1786년(정조 10년)에 사망해서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아버지 성윤우(成胤祐)는 1769년(영조 45년), 첫째 오빠 성담(成湛)은 1783년(정조 7년)에 사망했다. 넷째 오빠 성숙(成淑)은 정조의 《어제의빈묘지명》에서 의빈 성씨에게 오빠가 두 명 있다고 한 점으로 보아 일찍이 사망했다. 백부 성윤조(成胤祚)는 1728년(영조 4년)에 훈련주부(종6품)로 임명된 이후 공식적인 기록이 없고 숙부 성연지(成淵祉), 사촌 성호(成灝), 성연(成淵) 또한 뚜렷한 행적을 찾을 수 없다.

 

1782년(정조 6년)에 문효세자가 태어난 지 일주일이 지나자 셋째 오빠 성식(成湜)은 정조로부터 "지금으로서는 외인(外人)과 내통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어영청 군교 직위에서 파면당하고 호조서리가 되었다. 외척이 된 성식을 왕을 호위하는 군영인 어영청에 두는 대신, 호조에 두는 것이 알맞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1789년(정조 13년)에 부사용(종9품)이 되었고 그해 11월 이후에 성완(成浣)으로 개명했다.

 

1784년(정조 8년)에 문효세자가 왕세자로 책봉되자 둘째 오빠 성협(成浹)과 성식(成湜)은 동궁의 내례(승정원, 액정서에 속한 하인)가 되었다. 성협은 훗날 절충장군(정3품)이 되었다. 같은 해에 막냇동생 성흡(成洽)이 무과에 합격했다. 1798년(정조 22년)에 교련관이 되었고 1801년(순조 1년)에는 만호(종4품)의 자리에 올랐다.

 

고모 창녕 성씨는 공조판서 정방(鄭枋)의 첩, 언니 창녕 성씨는 홍낙성(洪樂性)의 첩이어서 의빈 성씨와 정방, 홍낙성은 인척 관계였다. 정방은 1784년(정조 8년)부터 부총관, 한성 좌윤, 참판, 판의금부사 등 짧은 기간 동안 여러 직위를 거쳐 1786년(정조 10년)에 공조판서(정2품)가 되었다. 정방의 조카 정복환(鄭福煥)은 1786년(정조 10년)에 부안 현감(종6품)이 되었고 1787년(정조 11년)에 홍문관 교리(정5품)가 되었다. 당대 사람들은 정방과 정복환이 의빈과 인척 관계여서 각각 공조판서와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고 웃었다. 홍낙성은 영조부터 정조 재위 기간 동안 각별한 신임을 받았고 1783년(정조 7년)에 좌의정(정1품)이 되었다.

 

1786년(정조 10년)에 의빈의 조카 윤동철(尹東喆)이 의빈묘전감(宜嬪墓典監)에 선발되었다. 1799년(정조 23년)부터는 윤동철의 아버지 윤광은(尹光殷)이 직임을 맡았다. 그런데 1806년(순조 6년)에 묘소의 남쪽 길가에 줄지어 심어 둔 큰 버드나무 10그루를 함부로 찍어 내다 팔아버렸다. 윤광은은 처벌받았고 1807년(순조 7년)에 사망했다. 1808년(순조 8년)에는 윤동철의 아들 윤인석(尹仁錫)이 의빈 성씨의 친속인데 아직 은택을 입지 못하고 있다며 격쟁 원정(擊錚原情, 일반 백성이 호소하는 문서를 직접 국왕에게 제출)을 냈다. 순조는 원정(原情)을 시행하지 않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 지었다.

 

1874년(고종 11년)에는 무과 천거제에서 삭제되었던 의빈의 본가가 숙빈 최씨, 영빈 이씨의 본가와 함께 복구되었다. 무과에 합격한 성윤우의 5대손 성원진(成元鎭), 성영준(成永俊), 6대손 성낙소(成樂韶), 성낙호(成樂頀)은 음관으로 벼슬이 더 올랐다.

 

본가 증직

1784년(정조 8년)에 형조 판서 조시준(趙時俊), 영의정 서명선(徐命善)이 문효세자 사친의 본가를 증직해야 된다고 했으나 《속대전》에 왕세자의 사친 3대를 추증한 사례가 없어서 보류되었다. 1785년(정조 9년)에 좌의정 홍낙성이 다시 추진하자 정조는 왕세자 사친의 부친을 추증하는 것이 근거할 만한 문적은 있지만 알 수 없는 점이 많고, 선조가 내렸던 하교는 일시적이었을 것이라며 보류했다. 이외에도 홍봉한의 경우는 어디에 추증해야 하는지, 문효세자는 효의왕후의 아들로 삼았으니 세자 사친의 부친에 대한 추증은 중요한 관계가 없다는 등의 이유로 매번 허락하지 않았다. 12월에 홍낙성이 또 아뢰자 정조는 급한 것이 아니니 내년 봄을 기다려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재차 미루었다. 1786년(정조 10년)에 문효세자가 사망하고 나서 좌의정 이복원(李福源)이 왕세자의 사친 본가를 증직하는 것은 법전에 나와 있고, 곧 《선원보략》을 수정하니 문효세자의 사친 본가를 추증해야 된다고 하자 그제야 정조가 승낙했다. 이후 증조부 성근립은 이조참판(종2품), 증조모 충주 유씨는 정부인, 조부 성수산은 이조판서(정2품), 증조모 김해 김씨, 창원 황씨는 정부인에 증직 되었다. 아버지 성윤우는 좌찬성(종1품), 어머니 부안 임씨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다만 의빈의 전어머니 장흥 마씨와 새어머니 단양 지씨가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화빈 윤씨와의 관계

화빈 윤씨는 정조가 1780년(정조 4년)에 후궁 간택을 주저하는 시기에 삼간택을 거쳐 자경전(慈慶殿)에서 가례를 올리고 입궁했다. 1780년(정조 4년)에 임신을 해서 1781년(정조 5년)에 산실청을 설치했지만 끝내 아무 소식이 없었다. 1782년(정조 6년)에 의빈 성씨가 문효세자를 낳자 화빈 윤씨의 인척 서명선(徐命善)은 정조에게 문효세자의 원자 정호를 주청했다. 1784년(정조 8년)에 의빈 성씨가 옹주를 낳고 문효세자가 왕세자로 책봉되자 화빈의 입지는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의빈 성씨는 왕세자의 생모지만 정1품 빈이라서 무품 빈인 화빈 윤씨보다 우위에 설 수 없었다.

 

그런데 문효세자가 태어나고 원자로 책봉된 후에도 화빈의 산실청은 유지되고 있었다. 대사간 신응현(申應顯)이 이에 대해 상소를 올리자 정조는 "나라에 큰 경사가 있으니 신하들은 기뻐하고 다행스러워하는 마음만 있어야 하는데 어린 원자를 농락하고 알 수 없는 말을 하여 조정을 의혹 시킨다.”는 이유로 벼슬 명부에서 삭제했다. 이후 1787년(정조 11년)에 이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 산실청이 30개월 동안 유지되었다는 영의정 김치인의 말을 근거로 보면 화빈의 산실청은 1781년(정조 5년) 1월부터 1783년(정조 7년) 7월까지 존속되었다. 정조는 1782년(정조 6년) 때와는 다르게 신하들의 주청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화빈의 고모부 조시위(趙時偉)는 1780년(정조 4년) 이후로 임금의 외척을 자칭하면서 조정 일을 제멋대로 좌지우지하고, 문효세자의 출생 때는 "호칭 정하는 일을 그렇게 서두를 것 없다."라는 발언, 화빈의 산실청 문제 등으로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다.

 

그 외 당시에 의빈 성씨가 방중술을 써서 문효세자를 낳았다, 화빈 윤씨는 목이 쉬도록 울면서 의빈을 원망하고 효의왕후를 시기한 죄로 가두고 궁호(宮號)를 강등할지 의논했다는 소문이 돌아다녔다. 1786년(정조 10년)에는 자현(子懸, 임신 중에 태기가 고르지 못하고 위로 치밀어 답답하고 숨이 차는 증상)을 앓는 의빈이 화빈에게 독살 당했고 화빈은 그 죄로 내쳐졌다는 소문마저 퍼졌다.

 

이를 토대로 의빈 성씨와 화빈 윤씨는 서로 우호적인 관계가 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사망

의빈은 마음이 약해서 칠정(七情, 마음의 병) 증세가 있는데 문효세자 사망 이후 중병에 걸렸고 본궁으로 피접을 떠났다가 조금 나아지자 다시 돌아왔다. 정조는 매일 의빈이 씻는 모습을 보고, 약을 제조하고 달일 때는 항상 검열했으며 약봉지와 약그릇은 모두 침실 안에 보관하고 쓰는 등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1786년 9월 14일 미시(오후 1시~3시)에 창덕궁 중희당에서 임신 9개월의 몸으로 사망했다.

 

사인 추정

《어제의빈묘지명》과 《이재난고》에 기록된 의빈의 증세는 대부분 임신중독증의 증상(해산할 달에 기력이 가라앉음, 정신 혼미, 사지가 뻣뻣해짐, 명치 부위의 통증 등)과 일치한다. 임신중독증의 원인 중 하나가 노산인데 의빈 성씨는 당시로서는 매우 늦은 나이인 34세에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임신중독증은 치명적인 경우 사망에 이를 수 있는데, 의빈 성씨 역시 결국 졸서했다.

 

독살설

1786년(정조 10년) 11월 20일에 상계군(常溪君)이 의문사 하고 12월 1일에 정순왕후는 의빈과 문효세자는 온갖 증세가 처음부터 괴이 했는데 이는 은언군이 아들 상계군을 왕으로 세우려고 독살 했다고 주장하며 진상이 밝혀지기 전까지 식음을 전폐하겠다는 언문 교지를 내렸다. 이후 구선복(具善復)이 상계군(常溪君)을 추대 하려 했던 사실이 드러나면서 구선복은 능지처사 되고 은언군(恩彦君)은 강화도로 유배 되었다. 12월 27일에 손용득(孫龍得)은 내관 이윤묵(李允默)이 의빈을 독살했다는 의혹스러운 소문이 파다하다고 했다. 정조는 의빈의 약을 조제하고 달일 때 반드시 직접 검열했기 때문에 근거 없는 말이라고 했다. 이에 손용득은 유배형을 받았고 이윤묵은 당시 이미 유배 중이었다. 또한 민간에서는 화빈 윤씨가 독을 썼다는 소문도 있었다.

 

"의빈(宜嬪) 성씨(成氏)가 졸(卒)하였다. 하교하기를,

“의빈의 상례(喪禮)는 갑신년의 예에 따라 후정(後庭)의 1등의 예로 거행하라.”

 

하였다. 처음에 의빈이 임신하였을 때 약방 도제조 홍낙성이 호산청(護産廳)을 설치하자고 청하자, 출산할 달을 기다려 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병에 걸려 졸(卒)한 것이다. 임금이 매우 기대하고 있다가 그지없이 애석해 하고 슬퍼하였으며, 조정과 민간에서는 너나없이 나라의 근본을 걱정하였다. 홍낙성이 아뢰기를,

 

“5월 이후로 온 나라의 소망이 오직 여기에 달려 있었는데 또 이런 변을 당하였으니, 진실로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제부터 국사를 의탁할 데가 더욱 없게 되었다.”

 

하였다. 이는 대체로 의빈의 병 증세가 심상치 않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무슨 빌미가 있는가 의심하였다고 하였다."

정조는 김치인(金致仁), 김상철(金尙喆), 서명선(徐命善), 홍낙성(洪樂性) 등이 있는 자리에서 "의빈의 죽음이 참으로 몹시 슬프고, 잘 자고 잘 먹어도 마음은 놀랄만한 변화가 없어서 걱정된다."라고 심경을 밝혔다. 정조는 의빈의 상례(喪禮)를 영빈 이씨의 전례대로 후궁 1등의 예로 거행하라고 했지만, 그 해에 흉년이 들었고 문효세자를 예장할 때와 칙명을 전달하는 사신의 행차 때 많은 돈을 써서 나랏돈에 손을 댈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더군다나 호조 재력마저 탕진되어서 도감(都監)을 세우지 못하고 모든 비용을 절감하여 호조와 전의감에 특별히 따로 설치하여 예장을 거행하되 절차는 영빈 이씨의 규례를 따랐다. 9월 16일 묘시(오전 5시~7시)에 의빈을 입관하고 안현(安峴)의 본궁(本宮)에 빈소를 마련했다. 11월에 궁(宮)과 묘(墓)의 제향이 정해지고 11월 20일에 효창원(孝昌園) 왼쪽 언덕 임좌(壬坐)의 자리에 장사 지냈다. 예장 때 박명원(朴明源), 서유녕(徐有寧), 서용보(徐龍輔), 김사목(金思穆), 서유방(徐有防) 등 정조의 신임을 받는 신하들이 대거 참여했고 이복원(李福源), 조경(趙璥), 김종수(金鍾秀), 김재찬(金載瓚) 등이 만사(挽詞)를 지었다.

 

묘소

의빈 성씨는 문효세자와 사적으로는 모자지간이나, 종법으로는 문효세자가 효의왕후의 양자여서 사친에 불과했다. 하지만 정조는 의빈의 바람대로 1786년(정조 10년) 9월에 의빈의 묘산(墓山)을 효창묘 왼쪽 산등성이로 정했고, 11월에 효창묘(孝昌墓)와 백 걸음 떨어진 곳에 의빈묘(宜嬪墓)를 조성했다. 이후 효창원과 의빈묘 소속이 소란을 피우는 문제가 생기자 정조는 "달리 소중히 여기는 것을 안다면 그들이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한단 말인가. 이후로는 경계를 나누지 말고 효창묘의 소속으로 하여금 의빈묘를 겸관하게 하라."라고 했다. 숙종이 숙빈 최씨의 묫자리를 명선공주와 명혜공주의 묘 근처로 정한 내관(內官) 장후재(張厚載)를 파직 시키고 다시 정하라고 했던 일과 비교하면 이례적이었다. 본래 효창원(孝昌園) 영역은 지금의 효창동, 청파동, 공덕동 일대로 묘역이 굉장히 넓고 송림이 울창했고 의빈묘(宜嬪墓)는 곡장이 삼면으로 둘러져 있고 혼유석, 명등석, 망주석 한쌍, 문인석 한쌍, 묘상표석, 비각, 제각이 있었다.

 

정조는 1787년(정조 11년)부터 1790년(정조 14년) 5월까지 의빈의 무덤 및 사당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하지만 1790년(정조 14년) 7월에 순조가 태어난 이후로는 더 이상 방문하지 않았다. 문효세자의 무덤과 사당도 마찬가지였는데 순조의 후계 정통성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829년(순조 29년)에 효창묘에서 동쪽으로 99보 떨어진 곳에 영온옹주의 묘가 마련되었고, 1854년(철종 5년)에 영온옹주의 생모 숙의 박씨의 묘가 효창묘 내에 조성되었다. 1870년(고종 7년)에는 효창묘가 효창원(孝昌園)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38년에 숙의 박씨의 묘가 서삼릉 후궁묘역으로 이장되고 1939년에 영온옹주의 묘가 서삼릉 왕자·왕녀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뒤이어 1940년에 의빈묘(宜嬪墓)는 서삼릉 후궁 묘역으로, 1944년에 효창원(孝昌園)은 의령원(懿寧園) 앞으로 이장되었다.

 

의빈묘(宜嬪廟)

1786년(정조 10년)에 창덕궁과 가까운 한성부 북부 안국방(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사당 의빈묘(宜嬪廟)가 세워졌다. 정조는 인정을 헤아려 사도세자(장조)의 사당 경모궁(景慕宮) 남쪽 담장 밖에 있는 문효세자의 사당 문희묘(文禧廟)를 의빈묘 서쪽 담장 밖으로 옮겼고, 1789년(정조 13년)에 모자의 사당이 한 곳에 있게 되었다. 1870년(고종 7년)에 대수가 다 되어 문희묘는 정조의 동복형 의소세손의 사당 의소묘(懿昭廟)로 이봉 되었다.

 

의빈궁(宜嬪宮)

1786년(정조 10년)에 의빈 성씨의 궁(宮)과 묘(墓)의 제향은 영빈 이씨의 전례를 따랐다. 다만 정조가 공식적으로 의빈에게 궁호를 내린 기록은 없으나 1787년(정조 11년)에 정조가 의빈궁(宜嬪宮)이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했다. 또한 당시 유우량(劉佑良)은 의빈궁의 청지기였으니 1787년(정조 11년)부터 의빈의 제궁(祭宮)은 의빈궁(宜嬪宮)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의빈에 대한 궁(宮)의 확립된 호칭이 없어서인지 의빈방(宜嬪房), 의빈묘(宜嬪廟), 의빈궁(宜嬪宮)을 혼용했다. 1790년(정조 14년)에 간행한 《문희묘영건청등록》의 <정당이하제처 도설(正堂以下諸處 圖說)>에는 의빈의 사당을 의빈묘(宜嬪廟)로 기록했고 간혹 의빈궁(宜嬪宮)이라고 지칭했다.

 

의빈궁(宜嬪宮)이 공식적으로 기록된 문서는 1797년(정조 21년) 이후에 완성한 《제물등록》이다. 의빈궁은 명일(명절, 국경일 총칭)에 육상궁(숙빈 최씨), 선희궁(영빈 이씨)와 작헌례(사당·능원에 술잔을 올리는 예식)를 같은 예법으로 지냈다. 숙빈 최씨는 영조의 사친이고 영빈 이씨는 정조의 생부가 되는 사도세자의 사친이나 의빈 성씨는 문효세자의 생모였다. 당시에는 유빈 박씨가 낳은 순조가 원자(元子)로 있어서 의빈은 후사 없이 사망한 후궁일 뿐인데 삼궁(三宮)에 속해서 제사를 지낸 일은 이례적이었다. 1799년(정조 23년)에 편찬한《사전사례편고》에는 의빈궁묘가 덕흥궁묘(덕흥대원군), 대빈궁묘(희빈 장씨), 선희궁묘(영빈 이씨)와 사궁(私宮)에 속해 있다고 기록했다. 1816년(고종 6년)의 《평안도내각읍소재각궁방각사전답급이생환기사결성책(平安道內各邑所在各宮房各司田畓及泥生環起査結成冊)》, 1865년(고종 2년)에 편찬한 조선시대 마지막 법전 《대전회통》과 1867년(고종 4년)에 완성한 《육전조례》등에 기록되었다.

 

따라서 1787년(정조 10년)에 의빈(宜嬪)이라는 호칭 자체로 사당을 의빈궁(宜嬪宮)으로 정하고 1797년(정조 21년) 이후에 정립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정조 이후에도 의빈궁(宜嬪宮), 의빈묘(宜嬪廟), 의빈방(宜嬪房)이라는 명칭을 두루 사용했다. 비슷한 예로 희빈 장씨(옥산부대빈)은 대빈(大嬪)이라는 호칭 자체로 사당을 대빈궁(大嬪宮)으로 정했는데 희빈궁(禧嬪宮), 희빈묘(禧嬪廟), 대빈방(大嬪房)이라고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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