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자동차 기술을 크게 진보시킨 휘발유자동차
1886년 고트리프 다임러와 칼 벤츠가 각각 휘발유자동차를 발명하면서, 자동차 기술은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 휘발유자동차는 무겁고 느린 증기자동차에 비해 빠른 엔진 멋진 스타일, 가벼운 차체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밖에도 1895년 앙드레 미쉐린이 자동차용 공기타아어를 발명하고 헨리 포드는 처음으로 2기통 자동차를 만드는 등 자동차 기술은 발전을 거듭했다.
1803년 광산 기술자인 영국의 리처드 트레비딕(Richard Trevithick)은 제임스 와트의 증기엔진과 머독이 만든 증기 자동차를 본후 사람들이 타고 다닐 수 있는 승용자동차를 만들기로 결심하고,4년간의 연구끝에 지름 3.3m의 거대한 구동바퀴를 갖춘 3륜차를 완성하여 런던 시내에서 8명의 장정을 태우고 13km/h의 속도로 주행 하는데 성공 하였다.
그는 그해 크리스마스 전날 본격적인 로드테스트를 하기 위해 친구3명을 태우고 가던중 작은 시냇물에서 높은 차체로 인한 롤링을 감당하지 못하고 작은 바위를 들이받고 핸들이 부르지며 전복되고 말았다. 사람들을 불러 차를 일으켜 세우는데는 성공 했으나, 그가 선술집에서 잠깐 위스키로 몸을 녹이는 사이 보일러에 남아 있던 불씨가 나무로 만든 차체에 옮겨 붙어 타 버리고 말았다.
1805년 올리버 에반스(Oliver Evans)는 미국에서 파워보트와 육로 수송수단에 얹혀지는 스팀엔진에 대한 특허를 받고 대대적인 판매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1805년 20톤 무게의 스팀엔진을 얹은 육로수송 자동차(Oruktor Amphibolis)로 필라델피아에서 시운전을 하였다.
1807년 스위스에서 아이삭 리바츠(Issac Rivaz)는 원시적인 가스엔진으로 움직이는 손수레를 만들어 특허를 얻었다. 이 엔진은 수소와 산소의 혼합기를 사용한 최초의 내연기관 이었다. 그러나 배기밸브를 수동으로 조작해야 했기 때문에 운전이 어려웠다.
1824년 영국의 사무엘 브라운(Samuel Brown)은 석탄가스를 매개체로 하는 2기통 4마력의 가스기관을 완성해 차에 설치 하였으나 열효율이 낮아 상업적으로는 실패하고 말았다.
1825년 토마스 브랜차드(Thomas Blanchard)는 미국 메사추세츠에서 증기자동차를 만들었다. 이 차는 후진도 가능했다.
1826∼1836년 W.핸목이 만든 10대의 증기자동차(버스)가 런던시내와 첼트넘간에서 정기 운행하여 사상 최초의 실용화된 자동차가 되었다. 이 정기버스는 22인승에 평균 속도는 16∼22km/h였다.
1827년 프랑스의 O.페쿠르는 차동기어장치를 개발하였다.
1829년 영국인 W.H.제임스는 마차에 보일러를 실은 증기자동차를 만들어 도심을 활보 했다.
1829년 골드워시 거네이(Goldworthy Gurney)는 증기자동차로 런던에서 베스(Bath)까지 여행했다. 여행기간동안 이 자동차는 몇 번의 고장을 일으켰으나, 최초로 가장 먼 거리를 달린 자동차로 기록 되었다.
1832년 영국인 W.H.제임스는 속력에 있어 중요한 3단 변속기어도 고안해 냈다.
1837년 토마스 다벤포트(Thomas Davenport)가 전기모터에 대한 특허를 받았다.
미국의 찰스 굿이어는 1839년 유황처리법의 특허권을 매입하여 그 연구를 추진한 결과, 장기간을 사용해도 탄력성을 잃지 않는 딱딱한 고무를 만드는데 성공 하였다.
1843년 미국의 자동차 산업을 조직화하여 자동차 생산으로 전환시킨 앨버트 A.포드가 탄생 하였다.
1844년 미국 뉴욕의 스튜어트 페리(Stuart Perry)가 테레빈유를 연료로 사용하는 내연기관을 만들어 1844년과 1846년에 특허를 얻었다. 이것은 2행정 방식이었다.
1845년 R.W.톰프스는 공기타이어를 발명하였다.
1851년 미국에서 증기자동차회사가 뉴욕에 세워졌지만 사업은 얼마가지 못했다.
1853년 이탈리아의 에우제니오 발산티(Eugenio Barsanti)와 펠리체 마테우치(Felice Matteucci)가 최초로 가스엔진에 대한 특허를 받았다. 그러나 실제적인 설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1859년 벨기에의 에치엔느 르노와르(Lenoir)는 석탄 가스와 공기의 혼합 기체가 수평 실린더의 양끝에서 교대로 공급되어 밧데리의 전기 불꽃이 그 연료를 점화한, 그 결과로 발생하는 폭발이 피스톤을 좌우로 움직여 스퍼크가 붙은 큰 플라이휠을 수직으로 회전시키는 2행정 엔진을 제작 하였다. 이 엔진은 18리터에 2마력의 출력을 내었다.
1862년 프랑스의 A.B.로사가 사이클 기관의 원리를 발견 하였다.
1865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최초의 자동차 법규인 "적기조례(붉은 깃발법,Red Flag Act)"를 선포 하였다.
이의 내용으로는
① 1대의 자동차에 3인의 운전수를 태운다. 그중 한명은 낮에는 붉은 깃발,밤에는 붉은등을 가지고 55m 앞을 달리면서 자동차가 온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② 최고속도를 6.4km/h 이하로 하고,시가지에서는 3.2km/h로 한다
③ 2톤 단위로 세금을 물고 시경계나 주경계를 넘을 때는 도로세를 내도록 한다
④ 밤에는 촛불이나 가스불을 달고 운행해야 한다.
등으로 되어 있었으며. 이 칙령은 1896년까지 존속하였다.
당시 최고 시속 40km로 달리던 자동차를 6.4km/h의 속도로 제한하므로서 영국의 자동차 산업을 얼어 붙게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1986년 이 법이 폐지되기는 했으나. 이 때는 이미 프랑스등 다른 국가들의 자동차 산업이 본 궤도에 오른 후였다.
1866년 독일의 니콜라스 어거스트 오토(Nikolaus August Otto)가 피스톤 엔진에 대한 특허를 얻었다.
1868년 조셉 라벨(Joseph Ravel)이 페트로늄(석유,가솔린)을 이용해서 보일러를 가열시키는 최초의 증기자동차를 만들었다.
1972년 니콜라스 어거스트 오토(Nikolaus August Otto)는 엔지니어 에우겐 랑겐(Eugen Langen)과 함께 독일가스 엔진공장을 세우고 피스톤 엔진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당시 공장 매니저는 다임러를 세운 고트리브 다임러(Gottlieb Daimler)였다.
1873년 영국의 로버트 데이비스 존은 납과 아연을 이용한 축전지의 사용하여 전기 4륜 트럭을 개발하였다.
1874년 가을, 오스트리아에서 유대인인 지그프리드 말커스 (Siegfried Marcus)가 4년간의 연구끝에 벤젠을 연료로한 엔진 출력 0.75마력의 자동차를 개발 하였다. 이차는 평균 시속이 6.4km였으며, 스프링,클러치,브레이크까지 장착 했지만 불행히도 배기파이프와 소음기를 발명하지 못해 소음이 심했다.
1876년 프랑스의 기술자 마르크스는 처음으로 젯트 캬브레타를 개발하여 가솔린을 연료로 하는 4행정 가솔린 엔진을 개발 하였다.
1876 독일 니콜라우스 어거스트 오토(Nikolaus August Otto), 4행정 내연기관 발명 : 1866년 니콜라스 어거스트 오토가 피스톤 엔진에 대한 특허를 얻었다. 1872년 니콜라스 어거스트 오토는 엔지니어 에우겐 랑켄(Eugen Langen)과 함께 독일가스 엔진공장을 세우고 피스톤 엔진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당시 공장 매니저는 다임러를 세운 고트리브 다임러(Gotieb Daimler)였다. 1876년에 니콜라우스 오토(Nikolaus August Otto)는 4행정 내연기관을 발명하였다. 4행정 사이클은 프랑스의 공학자 알퐁스 보드 로샤가 1862년에 특허를 냈지만, 오토가 이 원리를 바탕으로 하여 처음으로 기관을 만들었기 때문에 보통 ‘오토 사이클’로 알려져 있다. 신뢰성과 효율이 높고 비교적 조용했기 때문에 오토가 만든 기관은 즉시 성공했다. 그 뒤 10년 동안 3만 대 이상의 기관을 만들었지만, 1886년에 프랑스의 보드 로샤의 특허가 우선권을 인정받자 오토의 특허는 취소되었다.
1880 프랑스 카뮈 폴, 전기자동차 제작
1883 독일 고틀리프 다임러(Gottieb Daimler), 4사이클 가솔린 엔진 제작
1883년 프랑스의 알베르드 디옹은 주르주 뷔통과 함께 최고 60km/h의 속도를 낼 수 있는 증기자동차를 제작
1884 프랑스 들라마르 드부트빌과 레옹 말랑댕, 가솔린 자동차 시작(試作)
1885 독일 고틀리프 다임러(Gottieb Daimler) 1기통, 250cc, 0.4마력, 최고시속 12km의 가솔린엔진 오토바이 제작
1885 4스트로크 엔진에 적용되는 코일점화방식 개발
1885년 독일의 로버트 보쉬사 설립되어 자석식 점화장치 생산
1886 독일 칼 벤츠(Karl Benz), 3륜 휘발유 자동차 발명 : 칼 벤츠의 자동차는 최초의 휘발유 자동차로 기록되는데, 이는 다임러와 벤츠와 거의 같은 시기에 가솔린 자동차를 완성하였으나 벤츠가 1897년 이미 가솔린 엔진을 제작한 바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칼 벤츠(Karl Benz)의 자동차를 최초의 휘발유 자동차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1885년 독일의 칼 벤츠(Karl Benz)는 가솔린 3륜 자동차를 발명하고 민하임에서 시운전을 하였으며, 그 다음해인 1886년 특허를 획득하였다. 이 차는 무게 250kg의 자전거타입 삼륜차로 200rpm에서 0.85마력의 힘을 내는 1기통 4엔진을 얹고 최고 시속 16km를 냈다. 첫해에 만든 두 대중 한 대는 뮌헨의 도이치 박물관에 아직도 달릴 수 있는 상태로 보관되어 있다.
최초의 로드 테스트
1888년 8월 칼 벤츠가 독일 뮌헨에서 열렸던 산업박람회을 구경하기 위해 집을 비운 사이, 부인 베르타 링게(자동차의 어머니라 불리움)는 그의 두 아들의 간청에 못 이겨 자동차를 몰고 100km나 떨어진 외가로 향했다. 험한 시골길을 달리는 동안 자동차는 여기저기 부서져 나갔고, 베르타 링게는 이를 고쳐가며 하루 종일 차를 몰아 기름과 먼지투성이가 된채 외가에 도착 했다. 이튿날, 전보로 이 소식을 전해들은 칼 벤츠는 자동차가 다 망가졌으리라는 생각에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처가로 달려 갔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자동차는 크게 부서지지는 않았으며.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장거리 로드 테스트를 연약한 여자와 아이들이 해냈다는 사실, 그리고 자동차가 치명적인 고장 없이 그 먼거리를 끝까지 달려 주었다는 사실에 용기를 얻었다.
프랑스 변호사이자 사업가였던 에드워드 사라쟁의 미망인인 루이스 사라쟁 부인은 고트리브 다임러에게서 다임러의 엔진을 얹은 자동차를 파리 및 벨기에에서 만들어서 팔 수 있도록 제조판매권을 취득하고, 신형차 한 대를 선물로 받아 600km나 되는 거리를 직접 운전해 파리로 돌아왔다. 그녀는 남편의 친구이자 사업가였던 에밀 르바소(Emile Levassor)와 합작하여 1889년 세계 최초의 자동차 메이커인 파나르 르바소(Panhard Levassor)社를 설립 하고, 에밀과 재혼 하였다. 1903년경 1,500명의 종업원을 거느리며 연간 1,000대 이상의 자동차를 생산하는 세계최대의 회사로 성장 했으나, 2차대전후 경영 악화로 프랑스 시트로엥에 흡수 되었다.
1886 독일 고틀리프 다임러(Gottieb Daimler), 4륜 휘발유 자동차 발명 : 독일의 고틀리프 다임러는 250cc 0.8마력의 가솔린엔진을 마차에 장착한 4륜 자동차를 발명하여 아내 엠마의 43번째 생일인 4월 26일에 이를 선물하였다. 생일날 아침 세계 최초의 휘발유자동차를 선물로 받은 엠마의 기쁨과 놀라움은 말할 것도 없었다. 감격어린 눈물을 흘리며 남편에게 수없이 키스를 했다. 엠마야 말로 자동차를 선물로 받은 세계 최초의 여인이었다. 이 차의 앞쪽에는 핸들이 달린 차축, 뒤쪽에는 엔진과 벨트로 연결된 구동축, 의자밑에는 작은 자동차 엔진을 장착했다. 이때 이 자동차의 최고속도는 시속 16km였다. 굴뚝에서 연기를 뿜으며 달리는 증기자동차는 많이 보아왔지만 석탄을 때는 보일러도 굴뚝도 없는 마차가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빠르게 달려가는 모습은 괴변이 아닐 수가 없었다. 스프링, 냉각기, 클러치, 2단변속기, 차동기어 등 당시 감히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던 현대식 주행장치들을 원시적이지만 거의 다 갖춘 이 조그만 차야말로 앞으로 교통혁명을 일으킬 새 시대의 주인공이었다.
1888년 영국 존 던롭(John Dunlop), 자전거용 공기타이어 발명 : 1888년 2월 존 보이드 던롭은 미국의 찰스 굿이어가 1885년 발견한 라텍스와 유황혼합물에 의한 고무 생성원리를 이용 벨로시페드의 안장을 개발했으며 “던롭(Dunlop)”이라는 상표로 세상에 발표했다. 또한 같은 해 공기타이어 특허를 얻게 되었다. 1년 뒤인 1889년 아일랜드 W. 흄(Hume)은 국제자전거 휴머틱 박람회에서 최초로 공기 타이어가 장착된 벨로시페드 모델을 선보였고, 던롭은 더블린에 공기타이어 공장을 설립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던롭이라는 브랜드의 공기 타이어가 생산에 박차를 가하면서 평범한 수의사에서 세계적인 기업의 대표가 되었다. 1890년, 던롭의 공기 타이어 이용권을 따낸 주요 생산공장에서 “자전거(Bicycle)"란 명칭을 최초로 쓰기 시작했다.
1889년 프랑스, 세계 최초의 자동차회사 파나르 르바소(Panhard Levassor)社 설립 : 1889년 프랑스의 르네 파나르(Rene Panhard, 1841∼1908)와 에밀 르바소(Emile Levassor, 1843∼1897)가 함께 설립한 자동차 회사 '파나르 르바소(Panhard Levassor)'는 최초의 자동차 회사명이다. 당시 미망인이었던 르네 파나르는 죽은 남편의 유언에 따라 자동차 사업을 성취하고자 하였는데, 1889년 세계 최초의 가솔린엔진을 발명한 독일의 고트리브 다임러(Gottlieb Daimler)로부터 다임러 엔진을 얹은 자동차를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제작/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였다.
어린 시절 중앙예술제조학교에서 만난 적이 있는 남편 친구이자 공구 제조업자였던 에밀 르바소와 힘을 합쳐 자동차 사업을 한 르네 파나르는 1889년 프랑스 파리에 자동차 공장 '파나르 르바소'를 설립하였고, 그러한 인연을 계기로 1889년 5월 동업자인 르바소와 재혼을 하였다.
1891년 르바소는 가솔린차를 대량 생산하기 위해 '시스템 파나르'라는 구동설계를 1894년에 선보이게 되었다. 이것은 오늘날 소비자의 편의성과 유행을 따르는 자동차 마케팅 기법의 시초가 되고 있다.
1891년 다임러 엔진을 중앙에 장착한 모터 스포츠카를 개발한 '파나르 르바소'는 1895년 최초의 자동차 경주인 파리∼보르도 왕복 경주에서 우승하는 등 그 명성을 쌓았으나, 1896년 파리∼마르세이유 경주에 참가해 큰 사고를 당하게 되었고, 그 때문에 부상을 입은 ‘에밀 르바소’는 1897년 4월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파나르 르바소’는 1903년 연간 1,000대 이상의 자동차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으며, 1,500여명에 이르는 직원을 거느린 큰 기업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 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었고, 이후 경영악화로 인해 1967년 프랑스의 ‘시트로엥’에 흡수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세계최초의 자동차회사 ‘파나르 르바소’는 현대 자동차의 모태라 할 수 있는 슬리브와 포핏식 밸브, 싱크로 매쉬 변속기, 유압브레이크, 독립 현가장치, 각종 특정 차, 공냉식 엔진 등을 개발하고 적용해 자동차 기술이 발전하는데 큰 업적을 남겼다.
1889년 프랑스 아르망 푸조(Armand Peugeot, 1849년∼1915년), 푸조社 설립 : 푸조의 역사는 푸조 가문이 1810년 철강 공장을 설립하면서 시작된다. 푸조 가문의 계승자였던 아르망 푸조는 1849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1871년부터 자전거를 제작했다. 그 후, 아르망 푸조는 자전거를 제작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1896년 푸조 자동차 회사를 설립한다. 아르망 푸조는 자동차에 대한 열정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당시로는 혁신적인 기술들을 선보였다. 엔진을 앞쪽에 장착한 새로운 디자인의 자동차를 개발하였고, 1892년에는 휘발유 엔진을 장착하고 4개의 바퀴에 최초로 고무 타이어를 장착한 모델을 개발하기도 했다. 1912년에는 오늘날 가장 많이 사용되는 DOHC 엔진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였다. 아르망 푸조는 자동차의 기술뿐만 아니라 사업적인 성공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푸조의 우수한 성능을 널리 알리기 위해 자동차 경주에도 활발히 참여했다. 자동차 경주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푸조 자동차는 많은 사람들에게 성능과 품질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하면서 조국을 위해 전사하게 된다.
1890년 고틀리프 다임러(Gottieb Daimler, 1830년∼1900년), 다임러(Daimler Motoren Gesellschaft)社 설립 : 다임러는 슈트트가르트에서 기술교육을 받았으며, 그 뒤 독일의 여러 엔지니어링 회사에서 일하면서 기관에 대한 경험을 쌓았다. 1872년 4행정 내연기관을 발명한 니콜라우스 오토의 회사에서 기술감독관이 되었으며, 1882년 동료 빌헬름 마이바흐와 함께 오토의 회사를 떠나 자신들의 기관제작소를 차렸다. 1885년 최초의 성공한 고속 내연기관 가운데 1개를 특허냈고, 가솔린을 연료로 사용하는 기화기를 개발했다. 1885년 그들이 초기에 개발한 가솔린 기관은 자전거에 달아 사용했으며(세계 최초의 오토바이), 1886년 원래 말이 끌던 4륜마차를 1기통 기관으로 구동시켰고, 1887년에는 작은 배에 달아 사용했다. 1889년 처음부터 자동차로 설계한 4륜차에서 이들의 노력은 절정에 달했다. 상업성이 있는 이 차는 가벼운 관으로 이루어진 뼈대와 뒷부분에 장착된 기관, 벨트 구동 바퀴, 그리고 4단변속으로 구성되었다. 1890년 칸슈타트에 다임러자동차회사가 설립되었으며, 1899년에는 이 회사에서 메르세데스 자동차가 최초로 제작되었다.
1891년 프랑스 앙드레 미슐렝(Andre Michelin), 공기를 넣은 자동차용 타이어 제작 : 1859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형인 앙드레(Andre,1853년∼1931년)와 함께 1888년 미쉐린타이어 회사를 설립하였다. 1894년 가을 자전거용 바퀴의 타이어를 만들어 판매하던 앙드레 미쉐린에게 한 영국인 청년이 공기식 고무 타이어를 고치게 되었다. 이때 미쉐린은 이것을 자동차에 응용하기로 착안하고 자전거 타이어를 본떠 탈착이 가능한 자동차 바퀴용 고무 타이어를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1948년 자동차 타이어의 개척자인 미쉐린 타이어 회사가 지금 대중화 된 래디얼 타이어를 개발하게 되어 이를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1891년 프랑스 에밀 르바소르(Emile Levassor,1841∼1908), 엔진을 좌석의 아래쪽에서 앞으로 옮기고 클러치⋅변속기와 세로 일직선으로 배치한 근대적인 배치의 파나르에 르바소르(Panhard-Levassor)社 차를 제작
1892년 독일 루돌프 디젤(Rudolf Diesel, 1858년∼1913년), 압축점화의 디젤엔진 특허 취득 : 디젤은 독일 출신으로 파리에서 피혁 가공업체를 운영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파리와 영국에서 생활하다 12세 때 독일 아우구스부르크에 사는 백부의 양자가 되어 뮌헨고등공예학교를 졸업했다. 졸업후 암모니아 냉동기의 발명가로 알려진 린데 박사가 파리에 세운 냉동기회사 지사장으로 취업했다. 1884년 무렵 디젤은 '증기기관의 증기 대신 가열한 암모니아 증기를 쓰면 열효율을 높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암모니아는 냄새가 심하고 금속을 부식시키므로 공기를 이용하는 방법을 쓰기로 했다. 디젤이 고안한 엔진의 특징은 압축된 공기에 연료를 뿌리면 자연 착화가 일어난다는 것. 그러나 당시 기술로는 저절로 불이 붙을 만큼 공기를 압축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다.1893년 디젤은 팜플렛을 만들어 옆구리에 끼고 연구비를 지원해줄 큰 회사를 찾아다닌 끝에 아우구스부르크 기계제작소(나중에 MAN사에 합병)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실용화에 성공할 경우 판매권을 양도한다는 조건이었다.
휘발유를 쓴 첫 시험은 폭발음과 함께 실패로 끝났고, 이후 두통과 불면증에 시달려 가면서 연구에 매달려 1894년 2월 드디어 엔진을 개발하였으며,1895년 시운전에 성공하였다. 그는 이 열 엔진에 대한 특허를 얻었고, 그의 아내의 권유에 따라 엔진이름을 "디젤엔진"이라고 하였다. 이 엔진의 연료는 등유였으며 배기가스도 없고 연비도 휘발유보다 2배나 좋았다. 이 무렵 디젤은 MAN사의 계약을 깨고 다른 회사에도 자신의 기술을 쓰도록 허락했다.이 때문에 1898년 뮌헨 만국박람회장에는 4개 회사가 디젤엔진을 전시됐다. 디젤엔진은 에너지 효율이 높은 경제형 엔진으로 알려지면서 유럽과 미국 사업가들이 몰려 광산공장, 선박, 기차, 건설장비, 트랙터용 엔진으로 날개 돋친 듯 팔렸고, 루돌프 디젤은 백만장자가 되었다.
그러나 가솔린엔진과 증기엔진 제조업자들 간의 시기와 모함 중상모략 등이 심해졌으며, 회사 내 간부들의 재산을 둘러싼 암투, 부정, 부패 등으로 정신 착란증이 심해졌다. 그는 1913년 9월에 영국에 세워진 디젤엔진 공장의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기선을 타고 도버해협을 건너던 중 밤중에 실종되었고, 그로부터 2주후 핀란드의 작은 어선이 북해에 떠 있는 루돌프 디젤의 시체를 발견하게 되었다.디젤 엔진의 주인공인 디젤은 신기술이 활짝 꽃피는 것도 못보고 55세의 나이로 비명횡사 했지만, 그의 죽음은 타살인지, 자살인지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고 한다.
일설에는 당시 군비확장에 여념이 없던 독일정부가 해전용 잠수함 U보트에 이 엔진을 쓸 계획이었기 때문에 적대국가인 영국에 기술이 넘어가는 것을 반대하였고 이에 개의치 않았던 디젤을 비밀경찰로 하여금 암살했다는 얘기와 특허권 시비에 휘말려 괴로워하다 자살했다는 설 등이 전해질 뿐이다. 기술을 공개한 것에 대해서도 '돈벌이에 집착하지 않고 누구나 자신의 기술을 이용할 수 있게 한 참된 엔지니어'로 칭송되었다. 디젤엔진은 자동차용으로는 벤츠가 1922년 트럭에, 1936년 승용차(벤츠 260D)에 각각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1893년 독일 다임러(Daimler Motoren Gesellschaft)사, 벤투리와 노즐을 짝지운 근대적인 기화기 개발
1893년 독일 벤츠(Mercedes:Benz)사, 고무타이어를 장착한 빅토리아(Victoria)호 발매
1894년 세계 최초의 자동차 경주 개최(파리-루앙) : 최초의 자동차 경주대회 1894년 7월 세계 최초의 자동차 경주대회가 프랑스의 『프티 주르날』신문사의 주최로 파리-루앙(126km)에서 개최되었다. 총 102대 신청자중 두 번의 예선에서 81대가 탈락하고 21대만이 본선에 진출 했다. 7월22일 일요일 아침 8시 정각부터 30초 간격으로 파리의 포트마이요가를 출발하여 세느강변을 따라 루앙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예상 했던 것처럼 출발에서부터 해프닝이 벌어 졌는데, 어떤 프랑스의 증기차는 공원 블럭을 모조리 부수고 핸들이 고장나 잔디밭으로 들어가는가 하면, 어떤 차는 인도위에 진열된 식탁들을 넘어뜨리고 레스토랑 안으로, 어떤 차는 바퀴가 빠져 길가 던 마차를 들어 받는 등 전 코스의 4분의1도 못가서 도중하차하는 차들이 속출했다. 이 경주에서는 드디옹 백작이 운전한 드디옹-부통 증기자동차가 출발한 지 10시간47분만에 평균시속 11km 속도로 1착을 하였다. 그러나 뒤에 트레일러를 달고 달렸다는 이유로 대회 규칙을 위반했다고 해서 실격되고 말았다. 결국 다임러기관을 탑재하고, 2등으로 골인한 푸조와 파나르 르바소 차가 공동우승을 차지하며 5천 프랑을 나눠 가지게 되었다.
1895년 프랑스에서 파리(Paris)-보르도(Bordeaux)간 세계 최초의 공식 자동차 경주(왕복 1200km) 개최되었다. 미국 최초의 자동차 레이스 개최(78km). 영국최초의 가솔린 자동차 부레마 등장. 프랑스의 미뤠린 형제는 파리-보르도간 레이스에서 자동차용 공기압 타이어(비드 타이어 내층부에 끈을 사용한 카커스 코드를 사용)를 시험.
1895년 미국 볼티모어에서 전기 자동차 시운전
1896년 영국정부는 적기조례를 폐지. 프랑스는 미니자동차이며 최초의 공기 주입 타이어를 장착한 보아추레트를 생산. 독일의 다이믈러와 바이마하가 가솔린 엔진을 사용한 최초의 트럭을 생산.
1897년 미국 랜섬 올즈(Rensom E. Olds), 올즈모빌社 설립
1897년 독일 마이바하가 파이프 라디에이터 개발. 독일의 루돌프 디젤이 최초의 디젤엔진 개발
1897년 미국 스탠리 형제, 스랜리(Stanley) 증기자동차회사 설립 : 1920년대 초까지 미국에서 증기자동차가 돌아다녔다. 포드의 기록에 도전한 것이 당시 한창 인기를 끌었던 미국의 증기차였다. 스텐리 증기차 메이커인 로코모빌회사는 스텐리 로켓(Stanley Rocket)이라는 120짜리 보트형 증기차로 데이토나비치에서 시속 195.6km를 기록하여 200km에 육박했지만 주차길이가 규정치보다 짧아 공식 기록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스텐리 로켓의 드라이버인 마리오는 시속 260km에도 도전하기 위해서 첫 기록을 수립했던 1906년 가을 역시 데이토나비치에서 도전하다가 작은 바위를 들여받고 공중으로 튀어올랐다 떨어지면서 산산히 부서져 끝나고 말았다. 이것이 증기차 도전의 마지막이었다.
1897년 독일 보슈, 전기점화용 고압자석발전기(高壓磁石發電機) 개발에 성공
1898년 드 뒤옹 븨통사는 3륜 및 4륜 자동차를 개발하여 유럽의 자동차 열풍을 일으키는데 기여. 장트의 전기 자동차가 63.18km/h를 기록
1898 프랑스 르노 형제, 르노(Renault)社 설립, 루이 르노 프로펠러 샤프트와 베벨 기어식 차동 기어를 가진 근대적인 동력 전달 시스템 제작
1899년 프랑스 까뮈 제나찌(Camille Jenatgy), 세계 최초로 시속 100km 돌파 : 4월 벨기에의 자동차 매니아였던 까뮈 제나찌(Camille Jenatgy)는 로켓모양의 전기 자동차(일명 라자메곤단트)를 완성하고 파리 교외의 앗세루 공터에서 당시 초고 시속 64km를 자랑하던 영국 귀족 사세로프 루바경의 전기 자동차와 스피드 대결을 벌였다. 루바경의 기록은 69kmduTsmsep 까뮈는 3km의 자갈길 코스에서 최고속도 103km를 기록하였다. 이것은 세계 최초의 100km 돌파 기록이었다. 라자메곤단트란 카뮈가 그의 차에 붙인 별명인데 “결코 만족하지 않는 자동차”라는 뜻이라고 한다.
1899년 미국 헨리 포드(Henry Ford, 1863년∼1947년), 디트로이트 자동차회사 설립 : 1903년 헨리 포드(Henry Ford)와 그밖의 11명이 공동으로 출자하여 미시간주(州) 디트로이트에 설립하였다. 포드⋅재규어⋅링컨⋅볼보⋅애스턴마틴⋅머큐리⋅선더버드⋅팰콘⋅머스탱⋅매버릭 등의 브랜드로 유명하며, 포드 토러스(Ford Taurus)와 F시리즈 픽업(F-Series pickup)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외에 트랙터나 전자제품, 미사일 부품 따위의 군수물자도 생산하고 있다.
포드는 1913년 대량생산을 위해 포드시스템을 도입하여 1일 1,000대의 자동차 생산을 가능하게 하였고, 1919년에는 법인으로 등록하였다. 1923년에는 연간 생산대수 167만 대로 미국 자동차의 반을 생산, 절정에 달하였으며, 1924년까지 총 1,500만 대를 생산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말에 들어오면서, 제너럴모터스(GM), 1937년에는 다시 크라이슬러(Chrysler Corporation:지금의 다임러크라이슬러)에 뒤져 제3위로 처졌으며, 국유화설까지 나돌 정도로 경영이 악화되었다. 하지만 1945년 사장으로 취임한 헨리 포드의 손자 포드 2세가 1979년까지 활약하면서 적극적인 경영전략을 펼쳐 사세를 만회하였다. 마쓰다자동차의 지배주주이기도 하며, BMW의 랜드로버(Land Rover) 사업부문을 인수하였다.
헨리 포드는 미시간주(州) 웨인 출생. 자동차 왕으로 불리는 세계적인 자동차 제작회사 포드의 창설자이다. 근대적 대량생산방식에 의하여 자동차를 대중화하였고 자동차시대를 개척하였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소년시절부터 기계에 흥미를 가져, 학업을 중단하고 15세 때 기계공이 되어 자동차 제작에 몰두하였다. 1899년까지 디트로이트에 있는 에디슨회사에서 기술책임자로 임하였으며, 경주용차 제작을 위해 회사를 그만두고 1903년 동업자와 함께 자본금 10만 달러로 포드자동차 회사를 설립, 1908년 세계 최초의 양산(量産)대중차 T형 포드의 제작을 개시하였다.
1913년 조립 라인 방식에 의한 양산체제인 포드시스템을 확립하였으며 그 밖에 수많은 기술상의 새로운 토대와 계획⋅조직⋅관리에 있어서 합리적 경영방식을 도입하였다. 1914년에는 최저임금 일급(日給) 5달러, 1일 8시간 노동이라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노동정책을 폈다. 그의 산업철학은 제품가격의 인하로 판매량을 확대하고, 생산효율을 높이고 생산을 증대하여 가격을 더욱 낮춘다는 단순한 것이었다.
포드 자동차회사는 T형 포드로 미국 최대의 자동차 제조업체가 되어, 1924년에는 시장의 거의 반을 차지하였으나, 강하고 편협한 그의 개성 탓으로 말년에는 경영에 파탄을 가져왔다. 1920년대 말에는 경쟁사인 제너럴모터스사(GM)에 수위를 빼앗기고, 노동조합운동에 반대를 계속하였으므로 경영이 악화되었다.
1899년 이탈리아 지오바니 아넬리(Giovanni Agnelli), 피아트(Fiat)社 설립 : 피아트 (Fabbrica Italiana Automobili Torino)는 피에몬테 주의 토리노에 기반을 둔 이탈리아의 자동차 제조업체, 엔진 제조업체, 금융, 산업 그룹이다. 피아트는 지오반니 아그넬리 (Giovanni Agnelli)를 포함하는 투자자들의 무리에 의해 1899년에 설립되었다.
이탈리아 최대의 가족 소유 회사이다. 본사는 토리노에 있다. 이 회사는 토리노의 숙련 노동자들과 지방기술학교 덕분에 다른 경쟁사들에 비해 일찍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다. 오늘날 피아트사의 성공은 주로 두 사람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 창설자인 지오반니 아그넬리가 그중 한 사람인데, 그의 가족이 아직까지도 많은 양의 회사 주식을 보유하고 있으며 회사 발전에 주역을 담당했다. 지오반니는 지적인 사회주의자로서 자동차 산업을 근로자에게 직업을 마련해주는 수단이며, 대중에게 운송수단을 제공하는 방편이라고 생각했다.그의 사회주의와 산업주의의 특이한 결합은 이탈리아 자동차 산업의 초석이 되었다.
1910년경 피아트사는 이탈리아 최대의 회사로 성장했으며, 그 후로도 이러한 지위를 계속 유지했다. 이 회사의 발전에 있어서 또 한 사람의 중요한 인물이 바로 비토리오 발레타인데, 그는 대단히 유능한 경영자로서 회사의 일상적인 활동에 대한 전반적인 관리를 담당했다. 1979년 이 회사는 다양한 개별사업을 영위하고 있던 많은 자회사의 주식을 모회사의 주주들에게 배분함으로써 지주회사로 전환했다.
1986년 피아트사는 이탈리아의 스포츠카 제조회사로 재정난을 겪고 있던 알파로메오사를 인수했다. 오늘날 피아트사는 유럽과 해외 여러 나라에 조립공장과 특허를 보유하고 있는 거대한 다국적 기업이다. 이 회사의 대표적인 자동차 상품명에는 페라리와 란치아가 있다. 그밖에도 농사용구, 토목기계, 공작기계, 자동차, 항공 엔진 및 부품, 철도장비 등을 제조하며, 핵에너지와 생체공학분야에도 출자하고 있다. 피아트사는 세계 전역에서 자사제품을 판매하고 있으며, 특히 라틴아메리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 2009년 기준으로, 피아트는 이탈리아의 가장 큰 자동차업체일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6번째로 큰 자동차업체이다.
1899 미국, 로코모빌(Locomobile) 증기자동차회사 설립 : 로코모빌은 1899년 스탠리 형제의 증기자동차를 기본으로 설립된 미국의 자동차 회사다. 로모모빌의 설립자는 당시 코스모폴리탄 잡지 발행인이었던 존 브리스벤 워커(John Brisben Walker)로 그는 1899년 스탠리 형제의 증기자동차 회사를 25만 달러에 사들였다. 1902년까지 브리지포트에서 약4,000대의 증기자동차를 생산했다. 증기자동차는 물을 채우고 한번에 약 32km를 운행할 수 있었고, 스피어링 휠은 자전거 혹은 경운기와 비슷한 방식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증기자동차중에서 가장 우아했지만 다른 증기자동차와 마찬가지로 내구성에 문제가 있어 크게 환영 받지 못했다.
증기자동차시대가 끝나고 있음을 직감한 로코모빌은 1902년부터 휘발유 엔진 개발에 나섰다. 1889년 설립되어 미국 최고의 전기 자동차 회사로 성장한 리커사의 앤드류 로렌스 리커가 첫 번재 로코모빌의 휘발유 엔진 자동차를 개발했다. 1902년 여름 로코모빌은 2실린더와 4실린더 휘발유 엔진 모델을 생산했다. 엔진 케이스와 기어 케이스는 망간과 구리 합금으로 만들었고 섀시는 철로 만들어 내구성이 좋고 속도도 빨라 로코모빌의 이미지를 높이는데 이바지했다. 수제작으로 만들어 하루 4대 이상을 생산하지 않는 것이 로코모빌의 규칙일 정도로 뛰어난 품질을 고수했기 때문에 로코모빌의 차들은 값이 비싼편이었다. 직렬 4기통 16마력 휘발유 엔진을 얹고 1904년 등장한 5인승 토너우는 값이 4,500달러였고 1908년 선보인 60마력 엔진 2인승 40 런어바우트(40Runabout)는 4,750달러 였다. 지금 기준으로 비교할 때 약 10만 달러 이상의 높은 값이다. 로코모빌은 비싼 가격과 하루에 4대 이상 만들지 않는다는 전통 때문에 생산량이 한정되어 상업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반면 포드에서 대량생산되는 모델 T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몰랐다. 결국, 1922년 듀란트 모터스에 흡수되어 최고급 브랜드로 활약하다가 1929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899년 벨기에인인 까뮈 제나지가 프랑스에서 전기 자동차로 105.88km/h의 속도를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