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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 이야기

서고트 왕국(Kingdom of the Visigoths, 412년∼720년)

작성자管韻|작성시간19.11.26|조회수832 목록 댓글 0


서고트 왕국(Kingdom of the Visigoths, 412720)

 

 




 

서고트 왕국의 시작은 일반적으로 알라리크의 뒤를 이어 서고트의 지도자가 된 아타울프가 서로마 제국 황제 호노리우스와 결혼 동맹(갈라 플라키디아와 결혼)을 맺고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서남부 갈리아(아키텐)의 지배권을 정치적으로 인정받은 418, 혹은 이베리아 반도에 자리를 잡은 451년으로 분류된다. 처음에는 게르만 언어를 썼지만 곧 로마인에게 동화되었고 라틴어를 쓰게 되었다.

 

서고트족은 한동안 갈리아 남부에 정착하면서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과 서로마가 맞붙은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서로마 측으로 참전하는 등 로마군에 포에데라티(Foederati)로서 복무했고 로마가 점차 쇠약해지자 에우리코 왕이 이끄는 서고트족이 수에비와 반달을 몰아내면서 갈리아 남부와 루시타니아를 제외한 이베리아 반도를 아우르는 강국을 건설했다.

 

하지만 얼마 안가 507년 부이에 전투에서 클로비스 1세의 프랑크 왕국에게 국왕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고 아키텐을 상실해 이후 내전에 휘말리는 동안 고토 수복을 외치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동로마 제국에게 히스파니아 남부 일대도 점령당한다. 툴루즈를 본진으로 했던 507년 이전을 톨로사 왕국, 에스파냐의 톨레도로 본진을 옮긴 507년 이후를 톨레도 왕국이라고 한다.

 

내전을 대강 수습하고 625년에 갈리아 일부, 히스파니아 전체, 북아프리카의 세우타를 아우르는 국가를 이룩했지만 고질적인 왕위 다툼은 끊이지 않았고 계속해서 악화되는 상태에서 711년 이븐 타리크 장군이 이끄는 우마이야 왕조의 공격에 의해 멸망당한다.

 

서고트족들이 콘스탄티노플처럼 지브롤터 일대를 요새화해 이슬람의 세력을 효과적으로 막아낼 방법은 있었지만 지방 귀족과 중앙 정부의 사이가 와해된 상태였고 설상가상으로 아프리카를 틀어막아 주던 세우타가 변절했다. 세우타의 동로마 총독 율리아노스(스페인어로 훌리안)는 견고한 요새와 자체 육성한 해군으로 이슬람의 끊임없는 침략에 적들을 여러 번 패퇴시켜 아랍군의 골칫거리로 군림하며 이베리아를 지키는 방패 역할을 톡톡히 했지만 톨레도 궁정에 정치적 연결망으로 보낸 딸이 서고트왕 힐데릭에게 강간당해 임신까지 하게 되자 복수를 위해 모로코의 이슬람군에게 배를 제공하고 서고트왕국의 지리, 정치, 군사 등을 꿰뚫어 이슬람군의 길잡이 역할을 톡톡히 했다. 율리아노스는 정치적으로 지방 성주들을 회유해서 항복시키거나 타리크가 도저히 점령하지 못하는 철벽 요새는 율리아노스 휘하 병력으로 기독교 지원군으로 위장해서 잠입 후 차지했다. 거기에 직접 분견대를 이끌어 수많은 도시를 함락시켰고 결국 서고트 왕국은 멸망으로 치닫게 된다.

 

1차로 7천 명의 베르베르인 병력이 지브롤터 땅을 밟았다. 그 다음에는 13천 명의 아랍인 병력과 7백 명의 흑인 병력이 도착했다. 그리고 훗날 후우마이야 왕조가 들어서자 친 아바스 왕조 지사들이 우마이야를 끌어내리려고 카롤루스 대제를 불러들였다가 통수 맞을 뻔하고 후우마이야 왕조가 분열되자 기독교 국가를 막겠다고 무라비트 왕조를 끌어들였다가 통수 맞는다.

 

수적으로는 서고트 왕국군이 약간이나마 앞섰지만 당시 내전으로 수많은 전투를 치르고 나서 바로 이슬람군과 싸우느라 과달키비르 전투에서 대패하는 동시에 왕 로데릭도 전사했다. 이때 서고트 군영 기병 부대가 전열을 이탈하여 이슬람에 붙어 버렸다. 당시까지 서고트계 게르만족들과 히스파노 로마인들은 문화적, 인종적으로 완전히 결합되지 않은 상태였다.

 

전성기 시절 서고트 왕국은 이베리아에 흩어져 있던 소수의 게르만족들을 복속시키고 반달족, 수에비족을 쫓아내거나 복속시켰다. 서고트 왕국의 복속 이전에 수많은 게르만족들이 히스파니아로 내려와서 눌러 앉아 살았는데 라틴-아랍인과의 혼혈로 인해 오늘날 그들의 흔적을 보기는 어려워졌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들의 영향인지 몰라도 금발벽안의 스페인 사람도 흔치는 않지만 가끔씩 보인다.

 

서고트의 문화적 수준은 여타 게르만계열 국가에 비해 굉장히 높은 면이 많았다. 서고트의 통치하에서 로마인들은 서고트에서 높은 대우를 받고 관직과 재산을 보호받을 수 있었고 그들의 기술과 문화를 서고트에게 온전히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톨레도에는 로마인으로 구성된 회의가 만들어져 왕국의 법을 제정할 수 있었고 동로마 이외의 지역에서 실전되어 버린 채색 유리 제조 기술이라던가 버트레스와 돔, 말굽 아치 등을 포함한 발전된 건축 양식, 산모를 제왕 절개해 아이를 꺼낼 수 있는 높은 의료 기술 등에 대한 기록과 유물이 지금까지 남아 있고 비스고트 건축물과 서적들이 무어인들에 의해 소멸되었다시피 할 정도였다는 걸 생각하면 실제 수준은 더 높을지도 모른다.

 

화폐의 경우 초기에는 로마의 솔리두스나 트레미스 등의 화폐를 쓰다가 이후에는 자체적으로 제조하기 시작했다. 781개 가량의 주조소에서 화폐를 발행할 정도였고 동유럽이나 반달과 지속적인 무역을 했다. 서고트의 합금과 유리, 도자기는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포도와 같은 비싼 작물을 기르는 법이나 비단과 같은 고급 옷감이나 이것을 이용해 만든 의복을 생산하는 법을 몰라 동로마로부터 수입해야 했다. 서고트는 로마의 문화를 상당 부분 수용했고 이슬람에 의해 파괴당하기 전까지 그 대부분을 보존하고 있었다.

 

명목상 모든 권력이 왕에게 집중되었지만 구체적인 왕위 상속법이 없었고     세력이 있는 서고트 귀족이라면 누구나 왕위에 도전할 수 있었다. 교회의 주도로 7세기 초에 통치자 선출의 절차 규정을 법문화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겨우 그 정도로 복잡한 후계 문제를 끝낼 수는 없었고 이슬람 제국의 침략을 받았을 때도 왕위 계승 문제로 서고트 왕국 내에서 분쟁이 있었을 정도였다. 멸망 직전에 이슬람 세력을 끌어들인 자들이 바로 서고트 왕국의 국왕에 반대해 들고 일어난 귀족들이었다.

 

가령 형제인 왈리아를 뒤통수 친 테오도릭 1세는 형제인 유릭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아 왕위를 빼앗겼고 장군이었던 킨다쉰트는 의회로부터 지지를 얻어 선왕인 투르가에게 쿠테타를 일으켜 왕위를 빼앗았다. 테우디우스는 미친 척 다가온 암살자에게 암살당했고 교회는 아리우스파와 가톨릭파로 갈라져서 각각 왕을 임명해 둘로 갈라진 고트는 100년 가까이 내전을 치뤘다.

 

빈번한 내전과 외부와의 전쟁은 인구 감소를 불러왔고 이러한 인구의 감소는 제일 먼저 군사에, 그 다음은 농업에 악영향을 미쳤다.  서고트는 일반적으로 식량이 부족해서 수입해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타울프부터 시작해 서고트의 통치자들은 대체로 로마 문화를 동경했고 로마법을 반영한 법전을 편찬했다. 물론 로마법을 그대로 고트족에게 적용할 수는 없어서 여러 차례의 수정을 거쳐 결국에는 게르만법과 로마법이 적절하게 섞인 포룸 루디쿰을 만들었다.

 

포룸 루디쿰은 동시대의 다른 국가나 로마와 비교해도 발전된 부분이 많았다. 여성의 상속권을 제한하는 등 여성 차별이 보였던 로마법이나 여성의 증언이 남성의 증언에 비해 절반의 효력만 있는 이슬람법(샤리아)과는 달리 여성의 권리를 나름 보장했고 가정 내에서의 폭력을 엄격히 처벌했다.

 

포룸 루디쿰은 법학자들과 의회에 의해 법을 사회에 맞게 수정하고 개정하고 성문화했다. 렉스 로마냐 비스고트룸에서부터 시작해 테오도시쿰, 렉스 고트룸 등의 개정을 거쳐 포룸 루디쿰까지 도달한 법전은 선민족 로마와 침략자 게르만의 가치를 융합하려 한 노력이 들어 있다. 이 노력들 덕에 일단 왕이 세워지면 서고트의 관료제는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었고 재정와 군대를 비롯한 국력 전반을 효율적으로 성장시키고 사용할 수 있었다.

 

중앙의 중대사는 의회에서 결정되었다. 이 의회의 정확한 명칭은 왕실 자문회로 7세기경 왕실 위원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자문회는 왕이 지방에 파견한 공작들과 그와 동등한 권한을 가진 관리만이 참석할 수 있었고 입법과 사법권을 행사했다.

 

한편 왕이 소집권을 행사하는 톨레도의 산 타 레오카디아 성당에서의 종교 회의 역시 적지 않은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이단문제 같은 단순한 종교적 문제뿐만 아니라 국왕의 선출과 폐위에 영향을 행사할 수 있어 내전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서고트 왕국 지방 행정의 중추는 여러 개로 나누어진 주와 그러한 주를 통치하는 중앙의 왕이 파견한 공작(dux)이었다. 이러한 공작 밑에는 작은 지역과 도시를 통치하는 백작(count)과 도시 참사회가 유지되었다.

 

한편 외부의 침략이 거세지고 왕국 내에서도 내전이 발생하면서 대토지 소유주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국왕의 선출과 형벌의 면제라는 특혜를 받았고 나중에는 자신이 소유한 토지를 자식에게 상속할 수 있는 특권까지 향유하게 된다.

 

참고로 초기의 유대인에 대한 처우는 로마의 법을 그대로 따랐다. 다시 말하면 차별은 있었지만 심각하진 않은 정도였지만 아리우스파와 가톨릭의 내전에서(반삼위일체론이라 유대인에게 호의적이였던) 아리우스파를 이긴 가톨릭파(유대인에게 적대적인)가 집권하면서 유대인을 심하게 차별하고 탄압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서고트 왕국에 대해 강한 적개감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이슬람 제국의 침공 당시 유대인들의 배반을 초래하게 되었다.

 

편제는 대개 서로마와 비슷했다. 잘 무장한 로마병과 서고트 병사간의 장비 차이는 거의 없었다. 기병을 육성했지만 수가 적었고  전술적인 부분도 어느 정도 서로마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역시 서로마와 비슷하게 주무장은 라멜라 갑옷, , 방패, 검이었다. 이 중 검과 갑옷은 패턴 웰딩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마보다 견고했거나 비슷했지만 창날은 무지하게 약했다.

 

해군은 규모가 작았지만 로마를 바다에서 공격했다는 기록 정도는 있다. 비스고트 문헌이나 유물은 없지만 동로마 기록에 우리 해군이 반달과 서고트의 연합군을 몰살시켰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어서 최소 수송을 위한 해군 정도는 갖춰져 있었다. 그러나 아랍 해적에 대한 대응은 못 한 걸로 봐서 이 패전 이후로 해군이 해체되었을 수도 있다.

 

이탈리아의 동고트 왕국과의 관계는 매우 돈독해서 동고트의 테오도리크 대왕(서고트의 테오도릭 1세나 2세와는 다른 인물이다.)은 서고트의 왕 알라릭 2세와 결혼 동맹을 맺었고 알라릭 2세가 프랑크 왕국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자 한동안 서고트 왕국의 섭정으로 서고트 왕국까지 통치하면서 프랑크 왕국의 침략을 막아내기도 했다.

 

서고트는 일단 명목상 서로마 황제의 수하로서 카탈라우눔 전투 에 종군하고 서로 중요한 무역 파트너였지만 서로마 제국이 군주들의 실정과 반달족, 프랑크족, 색슨족 등 다른 게르만족들의 압력으로 형식적인 상하 관계였다.

 

반달과의 관계는 초기에는 험악했지만 이후 공적이 된 동로마를 견제하기 위해 친밀해졌다.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한 수에비 왕국과 바스크족과는 끊임없이 전쟁을 치뤘고, 수에비 왕국은 레오비길드 왕에게 결국 정복되었지만 바스크족은 끝까지 독립을 유지했다.

 

동로마 제국과는 초기에는 소 닭 보듯 하는 관계였으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기 고토 수복 전쟁의 일환으로 서고트 왕국의 내전에 개입해 핍박받던 정통 기독교인의 지지에 힘입어 이베리아 반도 남부 일대를 점령하고 히스파니아 속주를 설치하면서 서로 전쟁을 치루게 된다.

 

프랑크 왕국의 경우 지리적인 이유로 딱히 외교관계가 없었지만 갈리아를 평정하고 다양한 분파로 나누어진 프랑크족을 통합한 클로비스 1세에게 부예 전투에서 알라리크 2세가 전사하는 수모까지 겪으며 국토의 절반인 아키텐, 셉티마니아 해안가 이외 갈리아 영역을 잃으면서 수세에 몰리게 된다.

 

서고트인들은 게르만어 동게르만어파의 고트어를 사용하였지만 곧 로마화되어 히스파니아 로마인들의 로망스어를 썼고 고트어는 7세기에 완전히 사멸했다. 그러나 현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에는 약간이나마 서고트어의 영향이 있어 현 에스파냐, 포르투갈의 지명, 인명에 알바로, 페르난도(프리데난드), 로드리고(로데릭), 로센도(루데신드), 아르기미로, 엘비라(겔로비라), 알폰소(아드폰스, 알폰스, 일데폰스), 곤살로(군디살브), 아돌포(아타울프, 아돌프), 라미로, 베르문도, 갈린도, 고메스(구마즈) 등 서고트족에서 유래된 이름이 상당수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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