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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 이야기

이븐 시나(Ibn sina, 980년∼1037년)

작성자管韻|작성시간19.12.26|조회수327 목록 댓글 0


이븐 시나(Ibn sina, 9801037)

   







아랍인들은 9세기에 그리스철학과 과학에 접하고 그 후 부터 유럽의 르네상스, 과학혁명, 계몽시대에 맞먹는 문화적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이들 이슬람 철학자들은 지구와 우주를 다스리는 법칙에 따라 이성적 삶을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고 처음엔 자연과학에 집중하다가 그리스 형이상학으로 옮겨가고 이들 원리를 이슬람에 적용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이들은 초기에 이성주의가 종교의 가장 발달된 형태라고 믿고 개인적 신앙차원의 하나님(personal God)을 더 높은 개념으로 승화시키려 시도했다.

 

이슬람철학자들은 그 출발점이 그리스철학이긴 했으나 문제는 그리스철학자들(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토니스 등)이 생각하던 하나님은 성경이나 코란에서 말하는 하나님과는 매우 달랐다는 것이다. 그리스 철학자들의 하나님은 인간의 일상사에 개입하지 않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고 세상을 창조하지도, 심판의 날에 세상을 파괴하지도 않는 극히 무관심한하나님이었다. 이들의 하나님은 어떻게 보면 근대에 들어와 생긴 범신론(pantheism) 또는 유신론(theism)의 전통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범신론자였던 아인슈타인의 다음 발언을 음미해 보면 범신론이 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개인신앙 차원의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세상의 오묘한 구조에 경외심을 갖고 그런 아름다운 우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의 한계를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한편 지금의 터키에서 태어난 4세기 기독교신학자 베이질(330379)은 케리그마(kerygma)와 도그마(dogma)를 구분하고 이 두가지 접근법이 모두 종교훈련에 중요하다고 말했던 바 있다. 여기서 케리그마란 교회에서 성경에 근거해 공적으로 행하는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고 도그마란 그보다 더 깊이가 있는 신학연구를 가리킨다. 베이질 이후의 신학자들은 도그마는 상징적인 형태로만 표현되고 이해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와 유사하게 이슬람신학자들 또한 일반신도들이 이해할 수 있는 코란의 가르침과 특수한 방식으로 코란을 읽어서 거기에서 숨은 진리를 찾아내는 접근방법(tawil)을 구분했다.

 

킨디에서 시작해서 10세기 알파라비 등으로 이어지지만 이븐시나(9801037)때 와서 집대성된다. 이븐시나는 서양철학자들에게는 아비센느(Avicenna)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는 신의 존재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법에 근거해 논리적으로 입증했고 이는 이후 중세시대 이슬람 및 유태교학자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븐시나를 포함한 모든 이슬람철학자들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일체의 의심을 갖지 않았고 인간의 이성이 신의 존재에 대한 궁극적 이해에 도달하는데 최선의 방법이라는데 대해서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븐시나는 지적 능력이 충분치 못한 보통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해 주는 것이 지식인들의 의무라고 생각했고 그래야 몽매한 대중들이 미신을 믿고 하나님의 인격화를 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

 

이븐시나보다 23세대 늦게 태어난 알가잘리(10581111)는 젊은 나이에 바그다드의 니자미야 모스크교수 책임자가 되어 이슬람철학 원리에 대해 깊이 있게 연구하는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몇 년이 가지 못해 그는 깊은 우울증에 빠지게 되고 결국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을 그만 두고 수피교단에 가입하게 된다. 나중에 그는 교수직에 복귀했지만 수피생활 경험을 떨치지 못하고 후세 이슬람추종자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결론을 내린다. 즉 하나님의 존재는 과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 입증할 대상이 아니고 영적으로 신비론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게 그의 결론이었다.

 

보통 알가잘리 이후 이슬람철학은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다고 생각하지만 스페인 코르도바의 이븐루시드(유럽식 이름은 아베로스 Averroes, 11261298)는 팔사파흐 전통을 부활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울레마들은 항상 철학자들의 신() 개념에 대해 의심에 찬 눈으로 바라봤으나 이븐루시드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신의 개념과 보다 전통적인 신개념을 통합시키는데 성공했다.?그는 종교와 이성간에는 어떠한 모순도 없다. 두 방법 모두 같은 진리를 표현하는 다른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븐루시드는 이슬람전통에서는 부차적인 인물에 지나지 않고 오히려 서구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공헌을 한 학자로 칭송을 받게 된다. 실제로 생존시에도 자신의 철학관 때문에 몇 년에 걸쳐 귀양살이를 하고 사망직전 복권되긴 했으나 그의 저서는 사후에도 계속 금서로 취급받았다.

 

이슬람에서 가장 유명하고 많은 영향을 끼친 철학자이자 과학자이며 의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연구에 기여한 업적으로 유명하다. 철학과 과학의 방대한 백과사전인 치료의 서() Kitāb ash-shifā⁾》와 의학사에서 가장 저명한 저작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평생 동안 페르시아의 동부와 중부지방에서 생활한 이븐 시나는 이스마일파(신플라톤주의의 대중화된 형태에서 기원한 신학을 바탕으로 종교적·정치적 운동을 전개한 이슬람의 분파)인 아버지의 지도로 부하라에서 첫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이븐 시나 자신은 이스마일파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아버지의 집이 학식 있는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였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이븐 시나는 당대의 뛰어난 학자들과 교제하는 혜택을 입었다. 평생 동안 특출한 기억력을 발휘했던 그는 10세 때 이미 코란과 많은 아랍의 시를 암송했다. 그 후 선생들로부터 논리학과 형이상학을 배웠지만 곧 그들을 능가했고 그 후 18세가 될 때까지 독학하며 몇 해를 보냈다. 열심히 독서하면서 이슬람의 법학과 의학, 마지막으로 형이상학을 통달했다. 사만 왕조(아랍인의 정복 이후 최초로 페르시아에서 흥기한 위대한 토착 왕조)의 왕자 누흐 이븐 만수르를 치료하여 낫게 한 결과 장서가 풍부한 사만 왕조의 왕립도서관 출입자격을 얻은 것이 그의 지적 발전에 특별히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21세 때 이미 모든 정식 학문 분야에서 공부를 마쳤고 탁월한 의사로서 대단한 명성을 얻고 있었다. 행정관으로 일해 달라는 요청도 받았고 잠시 동안 정부에 들어가 사무관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그러나 갑자기 그의 모든 생활양식이 변화했다. 아버지가 사망했고 사만 왕조가 가즈나의 마흐무드에게 패배했다. 투르크인 지도자이자 전설적인 영웅인 마흐무드는 호라산(북동부 이란과 지금의 서부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가즈나 왕조를 창건했다. 이때부터 이븐 시나의 방랑과 혼란이 시작되었다. 그는 몇 번 드물게 평온한 시간들을 보낸 것을 제외하고 죽을 때까지 이러한 생활을 계속했다. 운명은 그를 페르시아 역사의 한 소란한 시기 속에 몰아넣었다. 이 당시는 새로운 투르크적 요소들이 중앙아시아에서 페르시아의 지배를 대신하여 자리잡아가고 있었고 지방의 군소 페르시아 왕조들은 바그다드(지금의 이라크에 있음)의 아바스 왕조 칼리프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얻으려고 노력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집중력과 지적 용감성을 가진 이븐 시나는 외부세계의 소란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채 놀라운 일관성과 지속성을 가지고 지적 작업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븐 시나는 호라산의 여러 도시를 돌아다닌 다음 중앙 페르시아를 다스리고 있던 부이 왕조의 번국(藩國)들을 찾아갔다. 처음에는 라이(지금의 테헤란 근처)로 갔다가 다시 카즈윈으로 가서 여느 때처럼 의사로서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나 이들 도시의 어디에서도 그는 사회적·경제적 지원도 충분히 받지 못했고 연구를 계속하는 데 필요한 평온과 안식도 누릴 수 없었다. 그래서 또 다른 부이 왕조의 번주(藩主)인 샴스 앗 다울라가 통치하는 중서부 페르시아의 하마단으로 갔다. 이제야 비로소 이븐 시나의 생애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는 궁정의원이 되었고 2번이나 재상으로 임명될 정도로 군주의 총애를 받았다. 당시의 세태가 그러했듯이 그도 또한 정치적 반격과 음모로 고통을 겪었고 한동안 피신생활을 했으며 한때 투옥되기도 했다.

 

그가 가장 유명한 2권의 저서를 저술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치료의 서는 한 사람이 쓴 이런 종류의 책 중에서는 가장 방대한 저술일 것이다. 이 책은 논리학·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심리학, 4(四科대수·기하·천문·음악) 및 형이상학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윤리학과 정치학은 완전히 빠져 있다. 이 책에 나타난 이븐 시나의 사상은 상당 부분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았을 뿐 아니라 다른 그리스인들의 영향과 신플라톤주의의 경향도 보인다. 그의 사상체계는 필요한 현존자로서의 신이라는 개념에 의존한다. 신 속에서만 유일하게 본질 즉 그를 규정하고 있는 것과 현존 즉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그가 일치한다. 존재하는 것들은 자신들의 자각의 결과로서 신으로부터 영원한 유출을 통해 점차로 증가한다는 것이다. 의학정전(醫學正傳)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의학사상 단행본으로서 가장 유명한 것이다. 체계적인 백과사전인 이 책은 내용의 대부분을 로마 제국 시대의 그리스 의학자의 업적과 아랍의 다른 의학서에 의존했고 그 자신의 경험에 따른 것은 그보다 약간 적었다(그의 임상 기록들은 여행중에 분실됨). 낮에는 의사이자 관리로서 궁정에서 직무에 종사했고 돌아와서는 거의 매일 밤을 이용해 제자들과 함께 이 책과 기타 저서를 저술했으며 이와 관련하여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토론을 했다. 이러한 수업은 가끔 음악 연주와 함께 유쾌하게 진행되었고 밤이 깊도록 끝날 줄을 몰랐다. 피신생활과 투옥 속에서도 그는 저술을 계속했다. 훌륭한 체력을 가진 이븐 시나는 허약한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작업을 해냈다.

 

이븐 시나의 생애 마지막 시기는 에스파한(테헤란 남쪽 약 400지점)으로 이주하면서 시작되었다. 1022년 샴스 앗 다울라가 죽고 이븐 시나는 옥고를 포함한 어려움을 겪은 후 얼마 안 되는 측근들과 함께 에스파한으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생애 말기의 14년 동안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보냈다. 그는 에스파한의 통치자 알라 앗 다울라와 그의 궁정에서 높은 존경을 받았다. 이때 하마단에서 착수한 2권의 주요저서를 끝마쳤고 거의 200편에 달하는 논문의 대부분을 썼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관한 페르시아어로 된 첫 작품을 저술했고 치유의 서(治癒)에 대한 훌륭한 요약집인 구원의 서(Kitāb an-najāt)도 만들었다. 이 책의 일부는 그가 알라 앗 다울라를 전쟁터까지 수행해야 했던 군사원정 동안에 씌어졌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주요철학저서이자 그의 사상에 있어 가장 개인적인 성서라고 할 수 있는 지시와 주의의 서() Kitāb al-ishārāt wa at-tanbῑhāt도 이 시기에 저술했다. 이 책에서 그는 신앙의 출발에서부터 직접 방해받지 않고 신을 보게 되는 마지막 단계까지의 신비로운 영혼의 여행을 묘사했다. 그리고 에스파한에서 한 아랍 언어학의 대가로부터 언어학에 정통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자 그는 3년 동안 언어학을 공부하여 아랍어 Lisān al-arab라는 방대한 책을 저술했다. 이것은 그가 죽을 때까지 초고 상태로 남아 있었다. 알라 앗 다울라를 수행한 전쟁에서 이븐 시나는 병에 걸렸다. 자가치료를 하려고 노력했지만 복통과 심한 탈진으로 끝내 죽었다.

 

이븐 시나는 이슬람 세계의 아리스토텔레스 학문의 대가로서 활약하면서 말년에 동양 철학(al-ḥikmat al-mashriqῑyah)’의 체계를 세우려고 노력했다. 이것과 직접 관련된 그의 저술은 대부분 유실되었지만 그가 추구한 방향을 암시해주는 몇몇 다른 저작들 속에 충분히 남아 있다. 그는 신비주의적 신지학(神智學)으로 가는 첫발을 내디뎠다. 이것은 그 후 이슬람 철학이 특히 페르시아와 기타 이슬람의 동부 세계에서 취한 방향이었다.

 

이븐 시나는 비록 위대한 스페인-아랍 철학자 이븐 루슈드의 경우처럼 라틴 이븐 시나주의학파를 따로 형성시킬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서구세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12세기에 치료의 서가 부분적으로 라틴어로 번역되었으며 의학 정전의 완역서도 나왔다. 이러한 번역서와 그의 다른 저서들을 통해 이븐 시나의 사상이 서양에 널리 전파되었다.

 

그의 사상은 그리스도교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과 혼합되어 많은 중세 스콜라 철학자(특히 프란체스코 학파)의 사상에서 기본적인 요소로서 자리를 잡았다. 의학계에서는 의학 정전이 수세기 동안 의술의 권위서로 통했고 이븐 시나는 고대 그리스의 의학자 히포크라테스나 갈레노스에 필적되는 유일한 인물로서 확고부동한 명성을 누렸다. 동양에서 의학과 철학, 신학에서의 그의 압도적인 영향력은 시대를 뛰어넘어 지속되었고 현재까지도 이슬람의 사상계에 살아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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