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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 이야기

셀주크 투르크 왕조(Seljuq Terk, 1040년∼1157년)

작성자管韻|작성시간19.12.26|조회수1,089 목록 댓글 0


셀주크 투르크 왕조(Seljuq Terk, 10401157)

   

   










 


셀주크투르크 왕조의 기원은 오우즈(우즈) 부족에서 찾을 수 있다. 오우즈는 오늘날 남러시아와 카자흐스탄 일대에 거주하는 유목 집단이었으며, 잡다한 소규모 부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서기 10세기 말, 오우즈 집단 중 일부가 셀주크라는 부족장 아래에 트란스옥시아나의 변경지역(정확히는 시르다리야 강변의 키질 오르다)으로 이동했다. 이들의 이동 동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기후변화, 인구증가 등등의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셀주크는 오우즈 부족의 키니크 씨족의 부족장이었으며, 그를 따라 시르다리야 강변으로 이동한 투르크 유목민들은 점차 자신들의 고유 신앙을 버리고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

 

셀주크와 그의 오우즈족 집단들이 트란스옥시아나로 이동했을 당시 트란스옥시아나(오늘날 우즈베키스탄 일대)에서는 투르크계 카라한 왕조와 페르시아계 사만 왕조가 끊임없는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셀주크의 투르크 집단은 이 중 사만 왕조와 손을 잡고 카라한 왕조와 전쟁을 벌였다. 하지만 사만 왕조는 서기 10세기 후반 카라한 왕조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발흥한 가즈니 왕조의 침략을 받고 멸망하였고, 이제 트란스옥시아나 지방은 가즈니 왕조와 카라한 왕조의 각축장으로 변했다. 가즈니 왕조와 카라한 왕조라는 두 거대 왕조의 틈바구니에 낀 셀주크의 부족은 카라한 왕조의 군주였던 알리 티긴과 손을 잡았다(이때 셀주크는 이미 사망한 후였고, 셀주크 부족의 지도자는 그의 아들 아르슬란 이스라일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당시 가즈니 왕조의 군주였던 마흐무드는 알리 티긴과 사이가 나빴던 그의 동생과 연합하여 카라한 왕조로 쳐들어갔고, 알리 티긴의 카라한 군대와 아르슬란 이스라일의 셀주크 군대는 철저하게 격파당했다. 알리 티긴은 트란스옥시아나 대부분을 잃은 채 스텝으로 도주했고, 아르슬란 이스라일은 마흐무드에게 사로잡혀 인도의 한 요새에 감금당한 채 그곳에서 사망했다.

 

이렇게 트란스옥시아나는 완전히 가즈니 왕조의 손에 들어온 것 처럼 보였으나, 당시 마흐무드는 중앙아시아보다도 부유한 북인도 지역을 약탈하는데 몰두해 있었고(인도 약탈에서 마흐무드는 수많은 힌두교도들을 노예로 만들거나 살해하고 그들로부터 약탈한 보물로 엄청난 부를 쌓았다), 마흐무드가 인도에 군대를 집중한 틈을 타 알리 티긴은 트란스옥시아나를 다시 되찾는데 성공하였다. 한편 셀주크 부족의 지도자인 아르슬란 이스라일이 가즈니 왕조에 포로로 끌려가자 그의 조카였던 투그릴과 차그리가 셀주크 부족을 이끌게 되었다. 투그릴과 차그리의 셀주크 부족은 계속 알리 티긴에게 충성을 다했으나, 알리 티긴이 사망하자 카라한 왕조를 버린 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편을 바꾸었다. 서기 1035, 투그릴과 차그리의 셀주크 부족은 가즈니 왕조의 새 군주 마수드 1세에게 가즈니 왕조의 영토에서 살게 해 줄 것을 청원했다. 이들을 불길하게 여긴 마수드 1세가 이를 가볍게 씹어버리자 셀주크 부족은 가즈니 왕조의 군대를 격파한 후 그곳에 눌러앉아 버렸다. 가즈니 왕조의 영토에 강제로 눌러앉은 셀주크 부족은 점차 가즈니 왕조령 호라산 지역을 야금야금 정복해갔고, 급기야 서기 1037/1038년에는 호라산의 중심 도시 니샤푸르를 점령하기에 이르렀다(당시 니샤푸르는 인구가 10만이 넘었으며, 중동 이슬람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다).

 

가증스러운 셀주크 유목집단에게 호라산의 영토가 잠식당하는 걸 볼 수만 없게 된 마수드 1세는 셀주크 유목집단을 가즈니 왕조의 영토에서 완전히 쫓아내기로 마음먹었고, 서기 1040년에는 5만명에 달하는 대군과 수십마리의 전투코끼리를 모아 셀주크 부족을 공격하였다. 메르프 근처의 단다나칸이라는 지역에서 벌어진 이 역사적인 전투의 승리는 셀주크 부족에게 돌아갔고, 이 전투의 승리로 인해 투그릴과 차그리의 셀주크 부족은 호라산 지방 대부분을 거의 아무런 저항 없이 정복할 수 있었다. 반대로 이 전투의 패배로 인해 강력했던 가즈니 왕조는 중앙아시아의 영토 대부분을 상실한 채 아프가니스탄과 인도의 본거지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호라산을 정복한 후 투그릴의 셀주크 군대는 빠른 속도로 이란 동부지역과 북부의 타바리스탄, 고르간 지역을 장악했으며, 1050년대에는 페르시아 서부를 공격하게 되었다.

 

트란스옥시아나, 호라산, 콰레즘(화레즘)의 지도. 오늘날 이란 동부, 아프가니스탄 북부,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동부에 해당하는 지역이며 중세 이슬람 시기에는 주요 도시들과 부유한 경작지가 밀집해 있는 문명화된 지역이었다.

 

11C 초 중동과 중앙아시아의 형세. 중앙아시아에서는 카라한 왕조와 가즈니 왕조가 대립을 벌이고 있었으며, 카스피해와 아랄해 사이에는 오우즈 부족들이 유목하고 있었다.

 

당시 페르시아 서부와 이라크 지역은 부와이흐(부이/부와이)왕조라는 페르시아계 국가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다행히도 이들은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중앙아시아에서 수많은 전투로 다져진 셀주크 부족에게는 상대가 되지 못했고, 서기 1051년에 투그릴은 이란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인 이스파한에 입성한 후 그곳을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그런데 이렇게 셀주크 부족이 부와이흐 왕조를 신나게 두들겨 패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가장 환호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바그다드의 칼리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부와이흐 왕조의 샤한샤들은 오랫동안 바그다드를 점령하며 칼리프 옆에 군림한 채 칼리프를 꼭두각시 취급하고 있었고, 칼리프는 이것에 진저리가 나 있었다. 당시 칼리프였던 알 카임은 투그릴에게 부디 바그다드로 와달라고 간청했고, 이를 받아들인 투그릴은 단숨에 이라크로 진격하여 이라크 전역과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부와이흐 왕조의 마지막 군주였던 호스로우 피루즈 울 라힘을 폐위시켰다.

 

자신들을 오랫동안 개 취급하던 가증스러운 부와이흐 왕조가 멸망당하자 기뻐한 칼리프 알 카임은 서기 1058년 투그릴에게 동방과 서방의 왕이라는 칭호를 부여했으며 사실상 이슬람 세계의 실권자이자 수호자라는 명예를 수여했다. 보잘것없던 일개 투르크 부족 집단의 부족장이 무려 이슬람 세계의 수호자가 된 것이었다. 투그릴은 서기 1063년에 자식을 남기지 않은 채 사망했고, 그가 건설한 거대한 셀주크투르크 제국의 왕위는 공석이 되었다. 당시 셀주크 투르크 제국의 술탄 자리를 노리고 있던 자들은 차그리의 아들인 알프 아르슬란과 그의 삼촌인 쿠타미쉬와 쿠타미쉬의 아들인 쉴레이만 이었다. 이 둘은 셀주크의 술탄 자리를 얻기 위해 내전을 벌였고, 담간 전투에서 알프 아르슬란이 승리함으로써 셀주크의 왕위는 끝내 알프 아르슬란에게 넘어갔다(이때 포로로 잡힌 쉴레이만은 이후 타우루스의 변경지역으로 이동하여 셀주크 왕조에 반항적인 튀르크멘 세력을 이끌었다). 알프 아르슬란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무척 호전적이고 용맹한 군주였다. 그는 치세 초반기부터 비잔티움 제국의 변경이었던 아르메니아 지방을 공격했으며, 1064년에는 비잔티움령 아르메니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던 아니 시를 점령한 후 대학살을 저지르기도 했다(사실 비잔티움 제국은 몇 십 년 전에 아르메니아를 막 합병한 상태였는데, 아르메니아 합병은 궁극적으로 셀주크 제국과 비잔티움 사이에 완충작용을 했던 아르메니아를 없애버리게 되었다). 또한 그는 비잔티움과의 전쟁뿐만 아니라 파티마 왕조와의 전쟁에도 힘을 쏟아 부었다.

 

당시 이집트, 시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파티마 왕조는 시아파의 보스 급이었으며, 그러므로 수니 이슬람의 보호자였던 셀주크 술탄 입장에서는 꼭 쳐부숴야 하는 가증스러운 존재였다. 그는 파티마 왕조에 맞서 여러 차례 시리아로 원정을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1071, 비잔티움의 황제 로마누스 4세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도전해오자 알프 아르슬란은 이들을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비잔티움의 군대는 약 4만명에서 7만명에 이르렀고, 알프 아르슬란의 셀주크 군대는 이보다 적은 23만명 정도였지만 비잔티움 측의 내분과 음모로 셀주크군은 대승을 거두었고, 황제 로마누스 4세가 사로잡히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나톨리아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알프 아르슬란은 로마누스 4세를 풀어주었으며, 별다른 조건을 요구하지도 않은 채 이동하였다. 이듬 해 알프 아르슬란은 카라한 왕조의 지배를 받고 있던 중앙아시아 지역을 정복하기 위한 원정을 떠났으나, 제대로 된 전쟁을 시작해보기도 전에 암살당했다. 셀주크 왕조의 왕위는 그의 아들 말리크샤 1세가 물려받았다. 말리크샤 1세 시기는 전반적으로 셀주크 투르크 왕조의 최전성기라고 일컬어진다. 당시 셀주크 왕조는 중근동의 패자였으며, 비잔티움 제국과 파티마 왕조 모두 셀주크 왕조에게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또한 말리크샤 1세는 즉위 초와 즉위 후반에 카라한 왕조에 대한 두 차례의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이를 통해 카라한 왕조를 반속국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말리크샤 1세 시기는 문화와 통치, 행정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말리크샤 1세는 아버지 알프 아르슬란 때 재상이었던 니잠 알 물크를 계속 채용하였으며, 덕분에 제국의 행정 통치에 정주적 요소들을 도입하는데 부분적으로 성공했다. 또한 그의 통치기에 셀주크 왕조의 학문, 건축, 예술은 뛰어난 발전을 이루었으며, 셀주크 왕조의 후원 아래 수많은 훌륭한 학자들이 배출되고 제국 각지에 화려한 궁전, 마드라사, 모스크들이 건설되었다.

 

말리크샤 1세의 꿈은 셀주크 왕조를 유목적 성격을 가진 국가에서 아랍-페르시아의 정주민식 통치 제도와 구조를 7갖춘 정주국가로 변모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위해 여러가지 제도들을 실시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이크타 제도였다. 이크타 제도는 간단히 말해 무크티 라고 불리는 자들에게 특정 지역의 수조권을 부여하여 세금을 징수한 후 중앙으로 보내게 하는 제도였다. 니잠 알 물크는 원칙적으로 무크티들은 자신의 관할 지역의 신민들에 대한 수조권만 가질 뿐 그 외 통치권은 가질 수 없으며, 무크티들은 한 지역을 오래 담당할 수 없고 23년마다 교체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이 원칙이 항상 지켜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무크티들 중 몇몇은 실제로 휘하 구역의 백성들에 대한 실질적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었고, 그 지역의 관리 임명권을 쥐기도 했다. 또한 이크타들은 때로는 군사적인 성격을 띄기도 하고, 때로는 행정적인 성격을 가지기도 하였으며 군사적 성격의 이크타의 경우 제국의 서부 일부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셀주크 왕조의 통치 구조는 여전히 유목적 성격을 짙게 띄고 있었다. 가령 셀주크 왕조의 영토는 초원의 유목민들이 그랬던 것처럼 술탄의 여러 친족들에게 분봉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말리크샤의 치세에는 술탄의 친족들에 의한 반란이 자주 일어났다(동생 테케쉬의 반란, 삼촌 카우르드의 반란 등). 또한 셀주크 왕조 건설에 주축이 된 오우즈 유목민들은 정주적 생활방식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았으며, 페르시아의 농경민들에 대한 약탈 역시 잦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말리크샤 1세가 택한 방법은 반항적인 오우즈 유목민 집단들을 단순히 다른 곳으로 보내버리는 것이었다. 그 주요 목적지는 다름 아닌 비잔티움령 아나톨리아였다. 당시 비잔티움 제국은 허약할대로 허약해져 있었고 끔찍한 내분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니케포루스 보타네이아테스의 반란에 직면하고 있던 황제 미카일 7세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타우루스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쉴레이만의 튀르크멘 세력에 도움을 요청했다(이들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알프 아르슬란과의 왕위 경쟁에서 패배한 후 도주하여 이곳에 터를 잡았으며, 셀주크 왕조에 대해 반항적이었다). 이를 받아들인 쉴레이만의 튀르크멘 부족들은 아나톨리아 내륙부로 이동했는데, 니케포루스 보타네이아테스의 반란군이 오히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자 미카일 7세를 배신하고 니케포루스를 도왔다. 쉴레이만의 도움 덕분에 니케포루스 보타네이아테스는 니케포루스 3세로 즉위할 수 있었고, 즉위를 도운 대가로 쉴레이만의 튀르크멘 부족들이 아나톨리아 내륙부에 정착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이렇게 그리스 정주민들의 고향이었던 비잔티움령 아나톨리아에는 뜬금없이 쉴레이만의 튀르크계 유목 부족들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마침 셀주크 투르크 제국을 정주화 시키고 싶어했던 말리크샤 1세는 여기에 걸림돌이 되는 오우즈/튀르크멘 유목민들을 대거 아나톨리아로 이동시켜 버렸고, 결국 서기 1080년대에 이르러 아나톨리아는 셀주크 투르크제국에서 이동해온 투르크계 유목민들의 놀이터가 되고 말았다. 사태가 이렇게 되었던 것은 첫 번째로 당시 비잔티움 제국의 지방 통치력과 군사력이 졸렬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즉 당시 비잔티움 제국은 밀려오는 튀르크계 부족들의 대이동을 막아낼 힘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 또한 두 번째로 아나톨리아 내륙부는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와 환경이 무척 유사하였고, 이 때문에 셀주크 제국 내의 많은 유목 부족들은 아나톨리아로 이동하는 것에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물론 말리크샤 1세 입장에서도 이는 환영할 일이었다). 이렇게 아나톨리아로 이동한 튀르크계 부족들은 아나톨리아를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며 현지 그리스계 정주민들을 마음껏 약탈해댔고, 아나톨리아 내륙부는 셀주크 투르크 왕조의 방치와 비잔티움 제국의 무능력 속에서 점차 투르크화 되었다. 이는 사실상 오늘날 터키의 시작이 되었다.

 

말리크샤 1세는 또한 시리아 지역에도 튀르크 부족들을 이동시켜 셀주크 왕조의 세력을 넓히고 동시에 자신의 본거지인 페르시아를 유목민의 약탈로부터 보호하고자 했다. 그는 동생인 투투쉬 1세를 시리아로 보내 파티마 왕조의 영토였던 시리아를 정복하게 했으며, 그에게 다마스쿠스와 주변 지역을 영지로 하사했고 알레포와 북시리아 일대는 다른 튀르크계 부족장들에게 영지로 분배해 주었다. 이렇게 아나톨리아와 마찬가지로 시리아 역시 셀주크 중앙정부로부터 사실상 독립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나톨리아와는 달리 시리아에는 튀르크계 부족들이 대규모로 이동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시리아는 아나톨리아와는 달리 투르크화를 면할 수 있었다.

 

결국 말리크샤 1세 시기 셀주크 왕조의 힘은 겉보기에는 강력했으나, 실제로 셀주크 왕조는 분열되고 있었다. 아나톨리아 내륙부는 셀주크 왕조의 통치가 거의 미치지 않는 무법상태나 다름없었고(게다가 셀주크 왕조에 적대적인 쉴레이만의 세력이 자리잡고 있었으니), 시리아는 투투쉬 1세를 비롯한 다양한 튀르크 영주들에게 분배된 상태였다. 오직 이라크와 페르시아 지역만이 말리크샤 1세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고 있었으며, 이 지역들은 말리크샤 1세와 그의 유능한 재상 니잠 알 물크에 의해 아랍-페르시아 정주민식으로 다스려졌다. 하지만 그마저도 통합이 완전하지는 못했다. 말리크샤는 비록 페르시아 지역에 대해 아랍-페르시아의 정주민 통치방식을 도입하는데 성공했으나, 셀주크 왕조의 고질적인 문제인 지배가문 내부의 분열과 혼란을 해결하지는 못했다. 이것은 몽골제국을 비롯한 대다수 유목제국들에서 나타나는 문제이며, 특히 위대한 지배자가 사망한 후 그 아들들이 후계 자리를 놓고 다투거나 정복지의 분배를 놓고 싸우는 식의 분열이 자주 일어났다. 셀주크 제국도 여기로부터 예외는 아니었다(이것은 셀주크 왕조가 말리크샤 1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유목적인 성격을 떨쳐내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서기 1092년 위대한 통치자 말리크샤 1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바르키야루크가 새 술탄으로 즉위하자 셀주크 왕조는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바르키야루크의 친형제와 친족들은 그의 즉위 직후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바르키야루크는 서기 1105년에 사망할 때까지 치세의 대부분을 이 반란들을 진압하고 반란 진압을 위한 비용을 마련하는데 보내야 했다. 그의 치세 때 셀주크 왕조는 공식적으로 소아시아 셀주크(훗날 룸 술탄국)/시리아 셀주크/페르시아와 이라크의 셀주크 세 세력으로 분열되었다. 바르키야루크의 사망 후 셀주크 왕조의 통치권은 그의 형제였던 무함마드 1세 시기에도 각종 반란과 혼란은 가중되었으며, 특히 이 시기부터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와 셀주크 술탄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서기 1118년 무함마드 1세가 사망한 후 셀주크의 술탄 자리는 마흐무드 2(제위 11181133)와 기야스 웃딘 마수드(제위 11331152)가 물려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명목상으로는 이라크, 페르시아, 중앙아시아를 아우르는 대 셀주크 왕조의 술탄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이라크와 페르시아 서부 일대만 간신히 지배할 수 있었다. 이 두 술탄의 제위시기에 셀주크 왕조를 실질적으로 이끈 자는 바로 페르시아 동부,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강력한 패권을 확립했던 술탄 아흐메드 산자르였다(그는 1118년 무함마드 1세의 사망 후 마흐무드 2세와 공동 술탄이 되었다).

 

아흐메드 산자르는 한마디로 "마지막 위대한 셀주크인" 이었으며, 그는 무너져가던 제국을 되살리기 위해 애썼다. 그는 말리크샤의 막내아들로써, 말리크샤가 사망하자 셀주크 제국 동부의 메르프와 호라산 일대를 영지로 수여받았다. 하지만 그 지역은 카라한 왕조와 접해 있었기에 그들로부터 끊임없는 위협을 받고 있었고, 산자르는 자신의 영지를 지키기 위해 이들과 끊임없는 전쟁을 벌였다. 그는 카라한 왕조와의 전쟁 끝에 그들의 군주 카디르 칸 지브라일을 테르메즈 근처에서 죽이는데 성공했으며, 궁극적으로 카라한 왕조를 복속시키고 트란스옥시아나 일대를 자신의 실질적 영향권 아래에 넣었다. 또한 산자르는 당시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의 산악지대에 자리잡고 있던 가즈니 왕조의 왕자들의 싸움에 개입하였으며, 1117년에는 가즈니 왕조의 아르슬란 샤를 패배시킨 후 가즈니 왕조의 실질적 통치자로 군림했다. 하지만 이렇게 잘나가던 그에게 치명적인 적이 다가왔으니, 그들은 바로 카라 키타이(서요)의 거란족들이었다. 카라 키타이는 요나라의 멸망 후 요나라 귀족인 야율대석을 중심으로 거란족 난민들이 세운 국가이며, 이들은 금나라를 피해 서쪽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이동하였고, 이동하다보니 어느 새 트란스옥시아나를 차지하고 있던 산자르의 셀주크 세력과 맞닥뜨리게 되었던 것이다.

 

거란족들은 1130년대 후반에 이르러 트란스옥시아나 일대를 약탈하기 시작했고, 산자르는 이를 막기 위해 대군을 출정시켰다. 야율대석의 거란족, 그들의 카를루크족 동맹군과 510만명에 이르는 산자르의 셀주크 군은 서기 1141년 사마르칸트 근처의 카트완이라는 곳에서 대격돌을 벌였다. 전투는 산자르의 참패로 끝났고, 그는 목숨만 겨우 건진 채 달아나야 했다. 승리한 거란족들은 사마르칸트에 무혈 입성했으며, 사실상 트란스옥시아나 전역을 차지하였다. 반대로 산자르는 공들여 장악해온 트란스옥시아나 전역과 수만명의 군대를 잃었으며, 추가로 야트시즈 등의 가신들의 반란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산자르는 기적적으로 재기하여 반란들을 하나하나 진압한 후 국력을 회복시키려 애썼다. 이러던 그에게 서기 1153년 최종적인 치명타가 가해졌으니, 바로 오우즈 부족장들이 그에게 반란을 일으켜 그를 감금했던 것이었다. 앞서 말했던 말리크샤와 비슷하게 아흐메드 산자르는 자신의 영역에 아랍-페르시아식 정주민 통치를 이식시키려 했으며, 이는 이 지역에 거주하던 오우즈 유목부족들의 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이러한 오우즈 부족들의 불만은 1153년 폭발하였고, 산자르는 그들에게 감금당했으며 오우즈 부족들은 산자르가 애써 가꾸어 놓은 호라산의 경작지와 도시들을 약탈하였다. 산자르는 1156년이 되어서야 감금 상태에서 풀려났고, 이듬해인 1157년에 숨을 거두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오우즈 부족들에 의해 파괴된 옛 셀주크의 수도 메르프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후, 이로 인해 사망한 것이었다고 한다.

 

아흐메드 산자르의 죽음으로 이란 동부와 중앙아시아에 셀주크인의 견고한 제국을 만들려 한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으며, 오우즈/튀르크멘 유목민들에게 아랍-페르시아식 정주민 통치를 적용하는 것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페르시아, 이라크에 남아있던 셀주크 왕조는 1194년 마지막 술탄 토그릴 3세가 살해당하면서 종말을 맞이했고,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의 패권은 호라즘 샤 왕조가 쥐게 되었다. 또한 시리아의 셀주크투르크 세력은 훗날 장기 왕조로 연결되어 12세기 후반까지 생존하였고(장기 왕조는 살라딘의 아유브 왕조에 흡수된다), 아나톨리아의 오우즈/튀르크멘 세력은 12세기 후반에 이르러 룸 술탄국 아래로 통합된 후 13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했으며, 1240년 몽골에 의해 패배한 후에도 살아남아 14세기 초반까지 명맥을 이어갔다.

 

이슬람제국은 발흥 당시에는 아라비아 반도 전체만 보유한 보잘것없는 세력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 로마제국의 기독교 세력은 발칸, 아나톨리아, 시리아, 이집트,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일부분을 거느리고 있는 거대 세력이었으며, 사산조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 세력 역시 이라크,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랍 군대들이 침략할 당시 이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사산조 페르시아와 로마제국은 아랍 침략 직전에 서로 피터지는 전쟁으로 국력을 모두 소진한 상태였으며, 특히 로마제국은 아나톨리아, 시리아, 이집트를 페르시아로부터 막 탈환한 상태였다. 여기에 로마제국은 단성론 논쟁으로 종교적으로도 분열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와 페르시아는 할리드라는 명장과 광신적인 신앙심을 가지고 있던 아랍인들의 밥이 되고 말았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사망한 후 초대 칼리프로 즉위한 아부 바크르는 아라비아 반도 전체를 통일한 후 대외정복을 실시했다. 첫번째 타겟은 바로 사산조 페르시아였다. 전설적인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가 이끄는 아랍군은 사산조의 심장부인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했고, 이들은 사산조의 군대를 거듭 격파한 후 메소포타미아 대부분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칼리프 아부 바크르는 로마령 시리아에도 공격을 가했는데, 여기에 보내진 아랍 부대들은 로마 황제 헤라클리우스의 반격으로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다. 그러자 메소포타미아에 있던 할리드는 사막을 가로질러 시리아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로마군을 격파하고 아랍군을 구원했다. 그는 다마스쿠스를 포함한 여러 도시들을 점령했으나, 칼리프 아부 바크르가 사망하고 우마르가 2대 칼리프로 즉위하면서 해임당했다. 새로운 총사령관으로는 아부 우바이다가 임명되었으나, 그는 여전히 할리드를 기병대의 사령관으로 삼고 할리드를 중요한 조언자로 삼았다. 칼리프 우마르의 아랍군은 서기 634년부터 새로운 공세를 가하여 로마군을 수차례 격파했으며 시리아를 야금야금 정복해갔다. 하지만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그동안 아랍군에 맞서기 위한 대군을 모으고 있었고, 안티오키아에 충분한 군대가 모이자 시리아를 재탈환하기 위해 남하했다. 헤라클리우스의 대군이 몰려오자 아랍인들은 시리아에서 철수한 후 팔레스타인의 야르무크에 집결했고, 이곳에서 역사를 바꿀 결정적인 전투를 벌였다.

 

야르무크 전투에서 로마군의 병력은 8만에서 10만 정도였고 할리드의 아랍군은 24만명 정도였으나, 놀랍게도 무슬림들은 로마군을 완파하는데 성공했다. 야르무크의 대패로 반격 능력을 상실한 로마군은 쭉 밀렸고, 결국 638년경에는 사실상 시리아 전역이 이슬람교도들의 손에 떨어졌다. 같은 시기에 이슬람제국은 사산조 페르시아의 메소포타미아를 재침공했는데, 야르무크 전투와 같은 해인 636년에 아랍군은 알 카디시야 전투에서 사산조 페르시아군을 완파했고 이로써 사산조 페르시아는 메소포타미아를 지킬 능력을 잃게 되었다. 아랍인들은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도시들을 점령한 후 637년 페르시아의 수도 크테시폰마저 점령했다. 이로써 서기 636638년 사이에 아랍인들은 페르시아와 로마로부터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를 영구히 빼앗게 되었다. 한편 야르무크 전투의 패배로 시리아 전역을 상실하게 되자 절망한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하였고, 그곳에서 끔찍한 질병에 시달린 채 몇 년 후 숨을 거두었다. 그는 사산조 페르시아로부터 로마제국을 구원했지만 아랍인들까지는 막아내지 못한 것이었다.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한 후 아랍인들은 정복을 지속할지를 놓고 지속적인 논쟁을 벌였다. 이들 중 상당수는 부유한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를 정복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며, 더 이상의 정복은 무의미하고 불가능하다 판단했다. 심지어 칼리프 우마르마저도 처음에는 이러한 입장을 취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랍인들의 정복은 궁극적으로 계속되었다. 시리아가 정복된 후 아랍인들의 다음 타겟이 된 것은 로마령 이집트였다. 이집트를 정복한 아므르 빈 알 아스 장군은 서기 639년에 겨우 4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를 공격했다(칼리프 우마르는 이를 말렸지만, 아므르 빈 알 아스는 칼리프의 명령을 무시하고 진격했다). 아므르의 아랍군은 이집트의 펠루시움 요새와 빌바이스 요새를 정복한 후 카이로 근처의 바빌론 요새를 포위했으나, 견고한 성벽과 로마 수비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도시를 점령하지 못했다. 이 무렵 칼리프 우마르가 보낸 지원군이 도착한 덕분에 아므르의 병력은1215천명으로 불어났고, 아므르는 로마군을 상대로 과감한 야전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이들은 헬리오폴리스에서 로마군 2만명을 격파했고, 이로써 이집트의 로마 야전군 대부분을 전멸시켰다. 이후 아랍군은 다시 바빌론 요새로 향했고, 이번에는 요새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바빌론 요새를 정복한 아랍군은 로마령 이집트의 주도인 알렉산드리아를 정복함으로써 전쟁을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서기 641년 아므르의 아랍군은 알렉산드리아에 대한 포위공격을 개시했다. 당시 로마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이집트의 실질적인 주도인 알렉산드리아가 함락될 경우 제국에게 치명타가 될 것이 뻔했기에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도시를 구원하기 위한 원군을 소집했으나,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헤라클리우스의 사망으로 원군 소집은 무산되었고, 절망에 빠진 알렉산드리아 시는 결국 아랍군에게 항복했다. 이로써 시리아에 이어 이집트마저 이슬람제국에게 정복당했다.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함으로써 이집트 전역을 정복한 아므르는 이집트 남부의 누비아를 정복했고, 서기 642년부터 643년까지는 오늘날 리비아 북부에 해당하는 키레나이카와 트리폴리타니아 지역까지 정복했다.

 

이제 로마제국은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방인 이집트와 시리아를 상실했고, 제국의 나머지 지방들마저 무슬림들에게 빼앗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정통 칼리프왕조의 급격한 팽창은 4대 칼리프 알리의 즉위 후 이슬람 세계 내에서 대규모 내전이 발발하면서(1차 피트나, 656661) 잠시 중단되었다. 이후 칼리프 알리가 암살당하고 알리의 아들 하산과의 전쟁에서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가 승리하면서 우마이야 왕조가 시작되었고, 이슬람과 기독교의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우마이야 왕조는 국력의 상당 부분을 주적인 로마제국과의 전쟁에 쏟아 부었고, 실제로 아나톨리아 내륙지역과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여러 차례 쳐들어가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렇게 막대한 국력을 쏟아 붓고도 끝내 로마제국을 정복하거나 아나톨리아를 빼앗는 데는 실패했다. 이렇게 아나톨리아 방면에서는 진전이 없었던 반면 서쪽으로는 로마령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의 서고트 왕국을 정복하는데에는 성공했고, 여세를 몰아 프랑스 남부까지 공격하기도 했다.

 

성상파괴운동(聖像破壞運動, iconoclasm)89세기 동방 정교회에서 성화상(이콘) 공경이 금지되고 성상을 파괴한 운동이다. 이는 비잔티움 제국을 양분시켜 내전을 초래하였으며 로마 교황청은 이를 비난하고 성상파괴논쟁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비잔티움 황제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교황청에 좋은 명분을 제공하였으며, 다른 요인들과 함께 결국 동서 교회의 분열, 즉 기독교가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으로 서로 갈라서는 최초의 교회 분열로 이어졌다.

 

16세기 스위스 취리히에서도 츠빙글리에 의하여 성상 파괴 운동이 시작되고 취리히 종교개혁이 완성되었다.

 

730년 시리아 출신의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레오 3세는 성화상 파괴운동(iconoclasm, 성상금지령)을 발하였다. 이에는 구약의 모세의 십계명에 열거되어 있는 우상을 짓지 말라가 근거로서 원용되었다. 그러나 이 칙령은 제국의 소아시아 부분과 일부의 성직자, 지식인에게는 지지를 받았으나 고대 그리스 문화의 전통이 남아 있는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제국의 유럽 부분은 제국민들의 반발이 심하여 문화적, 정치적인 문제도 수반되어 제국을 2분시키는 대논쟁이 되었다. 제국의 유럽 부분에서는 반란도 일어났다. 이 대립은 원래 오리엔트 종교였던 기독교가 그리스화해 가는 중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레오 3세가 이 시기에 성상금지령을 발한 이유는 확실하지는 않다. 성상에 대한 공경이 부활한 후 성상파괴파의 저작 등은 이단 문서라는 이유로 파괴되었고 현대에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레오 3세의 시대보다 이전으로부터 성상공경에 대한 의문과 비판은 나왔는데 그 외에도 화산의 분화 등과 같은 천재지변, 우상을 부정하는 이슬람교로부터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 등이 요인으로서 들어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 정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레온 3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는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가차없이 탄압, 처형하였으나 논쟁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한편 성상을 게르만족에 대한 포교에 이용한 서로마 교회가 이 결정을 비난함과 동시에 그때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보내던 세금의 납부를 중지했고, 이로 인해 동서교회의 대립이 결정적으로 되었다. 서로마교회 입장에서는 게르만족에게 지금까지 포교 활동의 경험상 무언가를 보여주며 전도하지 않고서는 게르만족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무언가를 보여줘야 했고, 그것이 성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로마 교회의 반대는 단순히 게르만족에 대한 포교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 문제는 명분에 지나지 않았으며, 실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서로마교회는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한 이래 기독교의 정통은 로마에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로마는 로마 제국의 발상지로서 오랫동안 중심지이기도 했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 1세가 수도를 옮긴 후 비잔티움 제국은 게르만족에게 유린당한 로마보다 정치적으로 우위에 있었으며, 그들의 보호를 자처하면서 로마를 게르만족으로부터 보호해준다는 이유로 지속적으로 간섭하고 규제하고 있었다. 서로마교회는 이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비잔티움 제국 황제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나, 특별한 명분과 실질적으로 자신들을 후원해줄 후원자가 없었다. 레오 3세의 성상파괴령은 그들에겐 명분을 제공해주었던 것이다. 새로운 후원자는 메로빙거 왕조를 무너뜨린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가 프랑크 왕국의 왕위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새로운 후원자가 되었던 것이다.

 

결국 787년에 콘스탄티누스 5세의 아들 레온 4세의 황후이자 비잔티움의 여제 이레네가 주재한 제2차 니케아 공의회에 의하여 성상공경의 정통성이 재확인되었다.

 

그 후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815년에도 다시 제2차 성상금지령이 발해져서 843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미 소아시아 측에서도 성상파괴에로의 지지는 저하하여 큰 운동은 되지 못하고 결국 성상공경이라는 신앙전통이 부활하였다.

 

하지만 가장 큰 결과는 교회가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으로 분리되는 최초의 분열로 두 조각이 났다는 것이다.

 

812년 비잔티움 황제가 된 레오 5세는 다시 한 번 성상파괴를 명한다. 이때의 성상파괴는 레오 3세의 제1차 성상파괴령과는 달리 매우 현실적인 이유에서 일어났다. 제국에 모처럼만에 평화가 찾아오자 불만을 품은 전직군인들과 군대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고 이들은 대체로 성상파괴주의자들이었다. 8146월 레오 5세는 특별 위원회를 구성하였고 이 위원회는 6개월간의 치밀하고 비밀스러운 연구 끝에 성상숭배의 근거가 없음을 밝혔다. 레오는 성상을 옹호하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니케포로스를 불러 성상숭배의 근거가 없음을 말하며 그를 사실상 해임하고 성상파괴령을 발동하였다. 이로써 제국은 폭동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두 번째 성상금지령은 황제의 종교적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어서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성상에 대한 최초의 반대자요 폭행자는 8세기의 콘스탄티노플 황제 레오 이사우리안이다. 그는 이슬람교도들과 유대인들의 개종을 가장하여 절대적 군주가 되고자 하는 야심으로 교회를 자신의 권위에 굴복시키려 성상 공경자들을 박해하였다. 그는 군대에 의한 폭력도 주저하지 않았으며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를 교체하여 그의 동의를 얻어 730년 성화상 파괴에 대한 칙령을 발표하였다. 이 사건으로 성화상 논쟁이 일어났고 비잔틴 왕국을 멸망 직전에 이르게 했으며 843년까지 계속 되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성화상들이 파괴되었고 성화성 공경자들은 박해를 당하였으며 수많은 이들이 그로 인해 순교까지 당해야 했다.

 

레오는 예수 성화와 성인들의 성화를 성당 벽면에서 철거하여 불사르라 명하고 성당에서든 집에서든 성화와 성물을 강탈하고, , , , 철제 성상을 깨뜨려 자기 초상을 새긴 화폐를 만들게 하였다. 헨리 8세와 크롬웰처럼 겉으로는 신앙의 순결을 외치면서 이면의 동기는 탐욕으로 가득 찬 것이었다. 레오 황제는 황궁도서관 학자들에게 그 성상 파괴 칙령에 대한 찬사를 쓰라고 명하였으나 정의의 양심을 지닌 그들은 거절하였다. 레오는 몹시 화가 나 그들을 도서관에 가두고 불질러 버렸다. 삼만 권의 책과 귀중한 그림들을 지닌 도서관은 그 안에 감금된 석학들과 함께 모두 불에 타버렸다.

 

다음 황제 콘스탄티누스 코프로니무스도 부친 레오의 만행을 계속하였다. 그는 754년 히에레야(Hiereia)에서 성화상 공경을 반대하는 주교들 338명을 모아놓고 공의회라고 명명하였다. 그러나 총대주교는 아무도 참석하지 않아 공의회라고 할 수 없었다. 이 회의에서 황제는 자기의 원칙에 따라 성화상 파괴를 재가하였고 성화상 공경은 사탄의 행위요, 새로운 우상숭배라고 선언하였으며 성화상 공경의 옹호자들을 파문하였다. 이러한 황제의 조처는 점점 공의회의 결정을 넘어 형상 및 성물, 성인공경, 마리아 공경까지 금기시켰다. 이후로 제국의 모든 주교들은 이에 동의를 해야 했으며 성화상은 모든 교회에서 제거되었고 벽화와 모자이크에는 석회칠을 했고 그 자리는 세속적인 풍경화로 대치되었다. 이러한 조치에 용감히 반대하는 것은 주로 수도자들이었다. 그로 인해 761년 이래 수도자들은 무자비한 박해를 받아 많은 이들이 순교하였고 또 많은 수도원들은 재산이 몰수되고 무기고 등으로 바뀌었다.

 

이와 관련된 일화들 중 하나를 소개하겠다.

 

당시 용감한 수도자 스테파노는, 황제의 초상을 새긴 동전 한 닢을 내밀며 폐화, 이것은 누구의 초상입니까?”라고 묻고는 짐의 초상이다.”라는 황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것을 내던지고 짓밟았다. 수사는 즉각 사형선고를 받았다. 형장에서 그는 황제에게 , 내가 한 국왕의 모습을 모욕하여 사형을 당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성상을 태워 없앤 악당들은 어떠한 형벌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냐!” 라고 하였다.

 

성상 파괴의 독성 행위는 16세기의 소위 종교 개혁자들도 저질렀다. 특히 영국, 독일, 네덜란드에서 성화와 성상을 난폭하게 파멸하는 독성행위를 감행하였다. 그들은 우상 숭배 방지를 이유로 내세웠지만, 8세기의 성상 파괴자들이 성상의 금은을 욕심냈듯이, 16세기의 성상 파괴자들도 성상과 성화를 없애고는 성전을 온통 점유해 버렸다. 영국과 유럽 대륙의 수많은 개신교 예배당 중에는 점거한 가톨릭 성당 그대로의 것도 많다. 유명한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성당이 그 좋은 예이다. 오늘날까지도 이런 교회의 벽면에는 파손된 성상들이 남아 있다.

 

이런 만행은 다만 극도의 독성죄(瀆聖罪, sacrilegium)가 될 뿐만 아니라 예술에 대한 모독이기도 하다. 만일 이러한 만행이 남부 유럽에까지 침범하였더라면,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불후의 대작들도 흔적조차 남지 않았을 것이다.

 

787년에 개최된 제2차 니체아 공의회, 트렌트 공의회에서는 성상 성화에 대하여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하느님의 감도를 받은 우리 교부들의 지도와 가톨릭 신자인 우리는 (성령이 이 안에 기묘히 계심을 아노니) 성전(聖傳)을 따라 상본(성화)... 즉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상본과 흠 없으신 하느님의 모친과 공경하올 천사들과 성인 성녀들의 상본을 성당이나 가정에 적당하게 모심은 확실히 거룩하고 좋은 일임을 선언하는 바다. 성화 성상의 공경은 그 표상하는 원존재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니, 바로 그로써 표상하는 이를 공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히 열교인을 따라 달리 생각하거나, 달리 가르쳐 교회의 성전을 경천(輕賤)히 여기거나, 새 교리를 주창하거나 하여 가톨릭에서 존중히 여기는 복음 성서, 십자가, 상본, 순교자의 유해 등을 모욕하는 자가 있다면, 그가 성직자인 경우에는 파면 당할 것이요, 수도자나 평신도인 경우에는 통공(通功)에서 제외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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