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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 이야기

기사단의 탄생(6세기∼14세기)

작성자管韻|작성시간20.01.11|조회수291 목록 댓글 0


기사단의 탄생(6세기14세기)

 






 

기사단이라 함은 기사들로 이루어진 단체 및 군대를 뜻한다. 그러나 실제 역사상 이름 있는 기사단 중 절대 다수가 기사수도회이므로 사실상 기사수도회의 줄임말이 기사단이라 봐도 무방하다. 기사수도회는 십자군 전쟁 이후로 탄생한 특수한 형태의 가톨릭 수도회로, 일반적인 수도회와 달리 이교도(무슬림)로부터 그리스도교 왕국을 수호할 군사적 임무와 수도자로서의 의무를 함께 서약했다.

 

영어로는 결사, 집단 등을 뜻하는 ‘Order’나 기사 모임을 뜻하는 ‘Knights’라 한다. 흔히 ‘Order’라고 하는데, 이 말은 본래 결사나 집단 등을 뜻하는 일반 명사지만, 기사수도회는 기본적으로 수도회(Religious order)이므로, ‘order’가 기사단을 뜻하는 말로 굳어졌다. 반면 기사로 구성된 집단이라는 개념을 강조하기 위해 ‘knights’라고 쓰기도 했다.

 

대중문화에서 기사단은 가톨릭 수도자로서의 이미지 보다는 기사로서의 이미지가 더 강하지만, 사실 이들은 기사이기 이전에 수도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사단 내에서 기사들이 연애놀음을 한다거나 하는 일은 당연히 없었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중세 시대 내내 각국에 국가 기사단이 실존했던 것처럼 알고 있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기사는 자기 영지(장원)을 갖고 평시에는 자기 장원에 매여 있는 농노들의 노동을 감독하면서 무술을 연마하거나 사냥 등으로 소일하다가 왕이나 영주의 명에 따라 소집되어 싸우는 지방 영주의 형태이기 때문에 영주들로 이루어진 기사단이라는 개념은 불가능했다.

 

귀족의 성이나 왕의 궁정에 거주하며 직접 호위하는 기사들도 있었지만 딱히 이들을 기사단이라 부르지는 않았고, 그런 호위하는 기사들도 일부는 40일간의 봉건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궁성으로 와서 일하다가 자기집으로 다시 내려가는 기사들, 일부는 하우스홀드 기사(House-hold knight)라 부르는 반영구적으로 봉신이 되는 대신 기사위를 수여받아 왕실/영주 직영지에 거주하거나 직영지에서 장원을 받은 기사, 또는 장원을 아직 못받은 기사들로 구성된 느슨한 경호대였다. 왕도 기사단을 평시에 유지하기 보다는 실력있는 용병을 장기 고용하는 쪽을 더 선호했다고 한다.

 

물론 특정 국가에 소속된 기사들을 묶어서 그 나라의 기사단이라고 부를 수는 있으나,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흡사 상비군스러운 그런 기사단은 없었다. 그래서 전투에서 봉건기사를 모아 부대로 운용할 때 기사단이 아니라 기사대로 표기한다. 기사단과 기사대의 구분이 당연한 것이, 기사단은 처음부터 평소에도 함께 활동을 같이 하는 하나의 집단을 의미하지만, 기사대는 보병대나 궁병대처럼 평소에는 따로 지내던 여러 지역의 봉건기사들을 모아서 임시적으로 부대를 편성한 것이니 말이다. 기사단은 원래부터 하나의 조직이라 자신들만의 명령체계가 있지만, 기사단이 아닌 봉건기사들로 이루어진 기사대는 각지의 일반 농민들을 모아 보병대를 꾸리는 것처럼, 각지의 붕건기사들을 모아 부대를 꾸린 거라 그 때마다 지휘체계를 만들어야 해서, 기사단과 기사대의 운용법이 상당히 다르다.

 

십자군 전쟁 시기

 

그러나 십자군 전쟁이 벌어지자 장기적으로 팔레스타인에 군대를 주둔시켜야 했고, 조직적으로 통제가 가능한 기사들의 단체가 필요해졌다. 하지만 기사들은 본래 봉건 영주들이므로, 이러한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유럽인들은 수도자들을 무장시키자는 발상을 하게 되고, 이는 매우 혁신적인 개념이었다. 왜냐하면 수도회는 여러 명이 동거하며 공동생활을 하는 곳이므로, 기사단으로 쓰기에 너무나 적합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수도자들은 엄격하고 체계적인 교육이 가능했으며, 사유재산을 포기하였거나 매우 제한적인 형태로만 인정받는 사람들이므로 세속적인 이해관계로부터도 비교적 자유로웠다. 심지어 종교적 계율로 무장했기에, 기존의 무력집단과 비교하면 도덕성에 있어서도 상대적으론 좋은 평가를 받았다. 여기에 더해 가톨릭 수도회이므로 십자군 전쟁에서 당연히 사기도 높았다. 따라서 이 시기에 성전기사단이나 구호기사단, 튜튼기사단 등 많은 기사수도회들이 조직되었다. 사실상 성지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종교적인 목적이 없었다면 기사단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특히 가장 높은 활약을 한 것은 가장 유명한 3대 기사단이 아닌 이베리아 반도, 즉 에스파냐의 기사수도회들이다. 무슬림의 점거가 이루어졌던 이베리아 반도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무슬림은 저어어기 멀리 중동에 있는 적들이 아니라, 바로 코앞에 존재하는 강력하고 현실적인 침략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본거지가 전장이랑 가까우니 전투에 필요한 인력이나 물자를 훨씬 쉽고 빠르게 충원할 수 있다는 장점까지 가졌다. 그렇기에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일찍이 기사수도회들이 발달하였다. 칼라트라바(Calatrava) 기사수도회를 비롯한 레온(León) 의 알칸타라(Alcántara) 기사수도회, 포르투갈의 오비쉬(Oviz) 수도회, 아라곤(Aragón)의 몬테사(Montesa) 수도회 등 수많은 기사수도회들이 발달하였다. 이베리아 반도의 기사들은 역시 가톨릭이라는 종교적 구심점으로 적(무슬림)과 자신들을 구분하긴 했으나, 그때부터 이미 카스티야, 아라곤에 대한 민족적 국가적 충성심으로 결속하는 역할도 하였다. 또한 이베리아 반도의 기사수도회는 결과적으로 이베리아 반도의 탈환이라는 목적을 완전하게 이루었으므로, ‘예루살렘 탈환에 실패한 다른 기사수도회와 비교할때 넘사벽으로 큰 실적을 남겼다 할 수 있다.

 

십자군 시기 기사단 중 일부는 나중에 성지 탈환을 위한 전비 확충을 빌미로 무역을 독점했으며, 성전기사단은 그렇게 모은 부가 화근이 되어 교황과 프랑스 왕의 협공으로 이단으로 낙인찍히고 개박살이 났다. 물론 그들이 모았던 재화는 프랑스 왕과 교황이 나눠 먹었어야 했는데, 다 나눠 먹지는 못하고 상당수의 재산이 생존자들에 의해 빼돌려졌다고 하며, 이런 재산과 성전기사단의 생존자들이 나중에 온갖 비밀결사처럼 관련성 있는 떡밥이 되었다.

 

기사(Knight, 騎士, 6세기14세기)

 

중세 서유럽에서의 무장한 기병을 뜻한다. 현대 영문권의 '기사(騎士)'는 거의 다 이런 명칭으로 불린다. 국가마다 캐벌리어(Cavalier), 리터(Ritter), 슈발리에(Cheval‎ier), 까바예로(Caballero) 등으로 불렀다. 영어의 나이트는 독일어에 뿌리를 둔 고대 영어 cniht에서 유래된 말로, 소년 혹은 시동을 의미했다. 그 시동의 뜻이 점점 더 확대 해석되어 왕의 부관들을 이르는 말이 되었다. 그리고 아래의 역사 항목에 후술되겠지만, 왕의 부관으로서 역할이 더 세분화되면서 왕을 따르는 중기병 특권 계층을 이르는 말이 되었다.

 

영어의 knight(영주에게 군역을 치르는 존재로서의) 봉신을 뜻하는 단어다. 영어로 기사도를 뜻하는 Chivalry 혹은 Code of chivalry 역시 말을 타는 자들의 규칙이라는 뜻이다. 대부분의 문명은 농경을 주로 했기 때문에 말과 말 먹이가 어마어마하게 비싼데다가, 자신의 장비는 자신이 직접 챙겨 와야 했던 경우가 많았으므로 귀족 정도가 되지 않으면 기병이 되는 것이 힘이 들었기 때문에 기사는 귀족이라는 공식이 생긴 것이다. 마초와 마사, 훈련장을 위해 농작물과 농경지라는 기회비용을 포기해야 했다.

 

한자로는 말 타고 싸우는 무사(武士)이고, 유럽에서도 영어를 제외한 거의 모든 언어는 말을 탄(타는) 라는 뜻이다. 로마 제국 후기 (3/4세기)부터 게르만/페르시아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기병대가 중요시되고 전신을 비늘 갑옷으로 무장하기 시작한 것에서 비롯되었는데, 게르만 족의 유입과 노르만 침공 이후 중세 유럽의 지배 계급이 되었다. 하지만 14세기부터 중국의 화약 무기가 몽골 제국을 통해 유입되며 기사 계급은 쇠퇴하였고 16세기 들어 용병과 근대적인 국민 군대가 생성되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굳이 기병뿐만이 아니라 다른 하급 귀족에게도 기사 작위를 주는 경우가 생겼고, 결국 현대에는 영국 등 일부 왕정제 국가에서 주는 명예직으로만 남게 됐다. 후대에 들어서면서 흔히 기사도를 마땅히 지켜야 하는 정의로운 존재로 묘사되는 경우가 잦지만 실제로는 꽤 달랐다. 기사도를 지켜야 기사라면, 기사는 한 명도 없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문서 참조.

 

동유럽에서는 서유럽의 기사에 대응되는 봉건 지배층인 보야르가 있었다.

 

로마 제국 후기 (3/4세기)부터 게르만/페르시아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기병대가 중요시 되고 전신을 비늘 갑옷으로 무장하기 시작한 것에서 비롯되었으나, 귀족 계급으로서의 기사는 중세 초기 (610세기)에 생성되었다. 일반적으로 프랑크 왕국에서 사라센 기병에 대항하기 위해 전사들에게 토지를 나눠주고 그 땅에서 말 좀 키워서 전쟁 때 타고 나와라.”고 한 게 중세 기사의 효시가 되었다는 게 고전적인 중세기사론이다.

 

그 후에는 사라센 기병은 소수였고, 그나마도 프랑크족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상태다. 여기에 덧붙여 봉토를 받은 기병의 양성은 등자가 8세기 초엽 서유럽으로 전래되면서부터 군사적인 이용가치가 늘어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1950년대 이래로 유력하게 떠올랐다.

 

그러나 또 최근에는 서유럽의 등자가 본격적으로 사용되는 시기는 9세기 이후이고, 봉토 분배 이전에도 프랑크에는 다수의 승마전사들을 운영했음을 이유로 등자가 기사계급 등장의 절대적인 요인을 부정하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이 설에 따르면 기사 계급의 등장은 등자보다는 89세기 이후의 농업생산력 증대, 샤를마뉴의 친 귀족정책 및 확장 정책에 따른 약탈로 인한 경제적 부흥, ‘마자르족의 침입과 바이킹의 약탈에 대한 빠른 대응의 필요성, 그리고 각 지역의 고립으로 인한 인구급감으로 대규모 중보병대보다는 소수정예의 필요성에 의해 말을 탄 기사 계층 및 기병 위주의 전술이 대두되었고, 이후 중세 농업혁명과 등자 및 카우치드 랜스의 등장으로 기사의 초기형태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 하나의 이유만이라기보다 여러 가지 복합적 이유 때문에 고대의 대규모 중보병대에서 중세의 소규모 중기병대로 편제가 변화한 것이고, 여기에 등자와 랜스가 중기병대의 효율성을 극대화시켜주면서 이러한 경향이 고착화 되었다는 것으로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중세 기사의 시초는 프랑크 왕국의 샤를 마르텔부터 시작이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그전까지 프랑크 왕국의 병사들은 자유민 보병이었다는 증거가 많다. 이게 점차 비용이 많이 드는 중장갑 기병으로 넘어가면서 기병들에게 봉토를 내리고 이것이 봉건제로 발전해 나갔다는 설이 주류.

 

중세 초에는 무기와 갑옷과 말을 지니고 무사에게 요구되는 수준의 높은 훈련을 거친 인물이라면 누구든지 기사가 될 수 있었다. 갑옷과 무기가 비싸니까 땅을 소유하고 돈이 많은 귀족이 기사가 되기 편한 게 당연하지만, 장비와 실력만 있다면 누구든지 기사가 될 수 있었으며 사실상 기사란 직업의 일종이었다. 12세기 정도까지는 기사가 되는데 딱히 고귀한 태생일 필요가 없었고, 딱히 귀족이나 왕이 기사 직위를 하사해야만 되는 것은 아니었다. 봉토를 하사받아 왕을 섬기는 기사가 될 수도 있지만,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 독학으로 무술을 익히고, 열심히 쇠고리 뜨개질을 해서 자작 체인메일을 만들어 입고, 야생마 한 마리 길들여서 올라타곤 나는 기사요.”라고 자칭해도 그는 기사일 수 있었다. 물론 홀로서기는 힘드니까 대체로 마스터(스승 기사)를 모시면서 무술을 배우고 충분히 장비를 장만한 다음, 마스터가 너도 이제 당당한 기사다.”라면서 죽빵을 갈기면 기사가 만들어지는 방식으로, 기사가 기사를 키우는 전통을 따랐다. 중세 초의 기사는 말탄 고급 군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중세 초기의 기사들은 보통 다들 투잡을 뛰었다. 원래 농장을 운영하다가 전시가 되면 상급 영주의 호출에 따라 전장에 나서고, 40일간 복무하다가 돌아와서 다시 생업에 종사하는 식이었다. 따라서 봉급을 받는 전문적인 군인이라기보다 훈련된 부농이라든지 작은 장원의 영주라든지 하는 경우가 많아서 전시에 생업을 관리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에 따라 점차 주종관계를 맺은 주군이 가신의 생계를 책임지게 되고, 쌍무적 계약관계가 성립되기 시작하면서 기사는 오로지 전문적인 군인으로 남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때를 기점으로 점점 순수하게 전투에 집중해 일상을 단련으로 보내는 중세의 인간흉기들이 양성되며 다양한 검술과 무기들이 발전한다.

 

이후로 중세 중기부터 기사가 가문이나 혈통에 주어지는 계승 직위가 되기 시작하면서, 기사라는 것이 준귀족화 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기사는 기사로 태어나는 것, 또는 군주가 하사하는 것이 된다. 군주는 기사의 직위를 준귀족의 개념으로도 하사하기 시작하며, 귀족도 자신의 가신에게 반영구적 봉신이 되는 조건으로 기사위를 부여하여 하우스홀드 나이트를 만들기 시작했고, 기사의 자식으로 태어난 자는 아버지의 기사 직위를 물려받아 기사가 되었다. 즉 기사 가문이라는 개념이 성립하게 된다. 때문에 출신만 된다면 기사로서 훈련을 쌓지 않아도 명목상 기사로 불릴 수는 있었다. 장자상속에 따라 작위를 얻지 못한 귀족의 차남 등등은 대신에 기사를 타이틀로 얻는 일도 빈번했다.

 

반면 귀족이나 기사 가문 출신이 아니라면 기사가 되기가 매우 힘들었다. 평범한 병사가 전장에서 용맹을 보이고 왕의 눈에 들어 기사가 되는 일도 존재는 했으나, 이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물론 위에 언급된 기사들은 모두 궁보병과 화약 무기의 활용이 전문화 되는 14세기 후반16세기 전반에 걸쳐 몰락하게 된다. 먼저 백년전쟁의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스 기사들은 평민 출신의 잉글랜드 장궁병들에게 괴멸당하였다. 동시에 동유럽에선 독일 기사들이 활과 화약 무기를 갖춘 오스만 제국의 예니체리에게 니코폴리스 전투와 바르나 전투에서 연이어 괴멸되었으며 후스 전쟁에서는 교황과 황제와 기사들의 십자군이, 조잡한 화약 무기와 농기구를 사용하는 농민군에게 완벽하게 패배하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탈리아 전쟁의 분수령이 된 1525년의 파비아 전투에서 또 다시 프랑스 기사들이 화승총병에게 괴멸되며 기사 시대의 종언을 알렸다. 이후 점차 평민 출신의 직업 군인, 즉 용병대의 활용도가 높아지게 된다.

 

사실 화약무기 도입 초창기에 갑옷이 화약무기에 대항해 두꺼워지고, 투구와 흉갑만 두툼하게 만드는 식으로 나름대로 대항해가다가 어느 순간 무너졌듯이, 기사 역시 화약 무기 도입 초기에도 여전히 마지막 전성기를 누렸고, 총포를 다룰 줄 아는 기사도 있었을 정도로 어느 정도까지는 공존했다. 기사가 무너진 것은 총화기의 도입과 함께 군사 편제가 진화해나가며 결국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국민병 제도로 이행해나가는 과정에서 기사제도가 사회, 군사적 변화를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기사하면 떠오르는 무기는 검과 랜스다. 특히 검은 기사의 상징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기사 서임할 때나 맹세할 때를 비롯한 기사의 의례용품으로도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특히 중세에 그리스도교가 정착되면서, 십자가의 형태와 비슷한 디자인의 장검은 상징적으로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전투를 앞두고 십자가를 대신해 검신에 키스하는 등의 관습은 유럽에서 흔한 일이었다.

 

기사의 검은 롱소드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롱소드라는 단어를 한손검으로 생각하는 데에서 나온 잘못된 인식이다. 도검사에서 롱소드는 한손반-양손검을 말하는 것이고, 전통적인 기사의 부무장인 검은 한손검인 아밍 소드다. 그래서 아밍 소드를 나이틀리 소드(기사검)라고 부르기도 한다. 판금갑옷의 대두로 양손무기가 주력이 되면서 롱소드의 비중이 높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마상 사용과 지상 사용, 일상의 무장과 전쟁용 무장 모두를 겸할 수 있는 한손검인 아밍 소드와 그 후계 도검은 중세와 르네상스를 통틀어 꾸준히 애용되어 왔다.

 

검은 중장갑에 비효율적이라 실제 전장에선 도끼나 메이스 같은 둔기가 더 중요한 역할을 했을 거라는 일부의 편견이 있지만, 기사의 무장과 전투방식을 묘사한 당대의 군사 관련 기록들이나 유물 연구에서 얻은 자료를 종합한 결과 전장에서도 검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검의 장점은 무게중심이 손잡이 부분에 있어서 다루기가 쉽고, 적은 힘으로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으며, 그에 비해 공격거리 역시 긴 편이라는 점이다. 둔기는 헤드에 무게를 집중시키느라 무게 효율이 좋지 않아서 같은 무게의 검에 비해 리치가 짧다.

 

또한 칼집과 소드벨트를 이용해 패용하기 때문에 주무장으로 사용을 안 할 때에도 다른 무장의 유무에 관계없이 항상 부무장으로 휴대하기도 좋았다. 게다가 검을 사용하는 기술을 익히거나 갑옷이나 방패와 함께 사용하면 폴암 같은 장병기에 대해서도 충분히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주무장으로도 손색이 없으며, 한손반 그립을 가진 장검계열은 방패를 버리고 양손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사용 기법을 충분히 익히면 거의 모든 상황에서 대처 가능하다는 장점까지 있었다.

 

중세 검술에서는 맨몸의 상대를 대적하는 평복 검술과 갑옷을 입은 상대를 대적하는 갑주 검술의 기법이 서로 달랐는데, 갑주 전투 시에는 칼끝으로 갑옷의 틈새를 찌르거나, 폼멜이나 가드를 망치처럼 휘둘러 둔격으로 쓰러트리거나, 혹은 전투 레슬링을 걸어서 쓰러트리고는 미저리코드와 런들 대거 같은 갑옷의 빈 틈을 찌르는 데 특화된 송곳형 단검을 갑옷의 틈새에 쑤셔넣었다. 이 때문에 당시 기사의 부무장으로 런들 대거 타입의 단검이 널리 쓰였다.

 

이 시기의 검 역시 그런 용법을 부응하기 위해 뻣뻣하고 뾰죽한 찌르기에 적합한 검 형태가 유행했다. , 한국 양판소처럼 풀 플레이트 입은 기사를 검으로 베거나 '몽둥이 같이 두꺼운 칼날로 갑옷째 뭉개'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 판금갑옷은 양판소 작가나 독자들의 생각보다 굉장히 튼튼하다. 판금 갑옷이 총기의 등장과 함께 사라져 갔다는 건 역으로 그 이하의 파괴력으로 플레이트를 뚫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실제로도 이 문제로 총기가 나올 때까지 파이크 같은 창류에 속하는 무장들은 철퇴나 플레일같은 둔기는 물론 할버드, 폴액스같은 폴암이나 롱소드 같은 도검류들에게 밀려 잘 쓰이지 않았다.

 

16세기 이베리아인 기사 돈 후안 퀴사다는 백병전에 돌입하면 첫 번째로 에스터크를 뽑아 들어야 하며, 즉시 적의 약점인 얼굴이나 겨드랑이, 사타구니의 갑옷 연결부를 찌르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버렸든 놓쳤든 부러졌든) 에스터크를 잃어버릴 경우 아밍소드를 들고 싸우며, 아밍소드마저 잃어버린 기사는 워해머와 단검으로 싸운다.

 

기사들끼리 죽이기는 힘들었지만, 이는 기사들에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왜냐면 중세 기사들은 사로잡은 다음 몸값을 주고받는 것이 일상화 되어 있었기 때문에 굳이 죽일 필요 없이 무기를 날리고 항복을 받은 다음 구속하여 몸값을 받는 걸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고로 몸값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평민 병사나 중장병은 무자비하게 죽였다. 맨앳암즈로 불리는 중세 중후기의 중장병들은 무장으로만 보면 기사나 다름없었으며 잡히면 살해당하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보통 기사 이상으로 치열하게 저항하는 일이 빈번했고 때문에 기사들은 갑주 입은 상대를 끝장내는 기법을 잘 알아야 했다.

 

그리고 기사들끼리 서로 죽이지 않는 것도 관례가 그렇다는 것일 뿐, 실제론 케이스 바이 케이스였다. 아래에도 얘기가 나올 기사가 강도로 전업하는 도둑기사나, 산적단으로 변한 프리 컴퍼니 같은 경우에는 몸값 잡고 그런 것도 없었으니 예의 차리고 몸값 받아낼 수 없는 상황에서는 무자비하게 죽이는 일이 빈번했다. 백년전쟁 당시 크레시에서도 전황이 극히 불리하다 판단한 영국군이 포로로 잡은 기사와 귀족을 참살했고, 그 때문에 후대 푸아티에 전투 등에서 부모나 친척을 잃은 프랑스 기사들이 복수하겠다며 길길이 날뛰었었다. 그러나 또 털렸지.

 

중세 후기에 장창대열이 생기고 나서는 투핸디드 소드(츠바이핸더) 같은 양손으로만 쓸 수 있는 거대한 검을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거대한 검은 장창을 쳐내고 파고들기에 좋았다. 물론 이쯤되면 []와 마찬가지로 폴암과 검 사이에 경계선에 있는 수준일 정도의 무기가 되어버린다.

 

마상창으로 잘 알려진 랜스는 형태상 크게 보병창이나 별 다름 없는 라이트 랜스와, 흔히 기사의 거창 하면 생각나는 둥근 손보호대가 달린 헤비 랜스로 나뉜다. 물론 창의 길이나, 무게추 등으로 다양하게 바리에이션이 있다. 기마 중에 투창을 하는 경우도 있었고, 카우치드 랜스가 대세먹은 이후에도 스페인에서는 기마 투창질이 꽤나 애용됐다.

 

또한 랜스의 사용법도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발전하는데, 투창 하듯이 어깨 위에 들고 가다가 내리찍는 방식과, 허리 쯤 아래에 한 손으로 들고 찌르는 방식, 양손으로 창을 잡고 휘두르는 방식, 그리고 중세 기사 하면 딱 대표되는 겨드랑이에 끼는 방식이 있었다. 이 방식을 카우치드 랜스 기법이라 한다.

 

각 기법마다 다양한 장단점이 있으나, 기수가 어지간한 충격을 받아도 낙마하지 않게 해 주는 등자와 전투용 안장, 그리고 창의 리치를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카우치드 랜스 기법이 한데 뭉치면 말의 운동에너지를 최대한 활용하여 냉병기로서는 어마어마한 공격 거리에서 극대화된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므로, 이 콤보가 중세 중기부터 유럽의 대세가 되었다. 중무장한 기사가 밀집대형으로 랜스 차징을 하면 그 자체가 보병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동양에서도 유목민족 기병들이 비슷하게 운용한 기록이 있으며, 말과 말을 쇠사슬로 연결하기도 하였다. 운좋게 옆으로 뛰어 말을 피하더라도 쇠사슬이(...). 다만 이렇게 연결하는 경우에는 집단 돌격시의 템포를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랜스 차징은 대열을 맞추어서 일사분란하게 동시에 들이박는 조직력 중시 방식과, 대충 각개 돌격으로 최고 속력을 중시하는 방식으로 나뉘는데 두 방식 공히 동서양에 모두 혼재했다.

 

십자군 전쟁 때 기사들을 상대한 아랍측의 기록으로는 돌격하는 기사들을 쏘아진 화살과 같다라고 평했으며 장창이 등장하기 전까진 정면에서 막는 게 거의 불가능하였다. 기사의 랜스 차징 자체는 매우 강력했지만 랜스는 대부분 1회용이라 차징이 끝나면 부러지거나 해서 재사용이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돌격이 끝나면 랜스를 버리고 검이나 보조무기를 꺼내들고 싸우거나, 본진으로 회군하여 여분의 랜스를 다시 장비하기도 하였다. 때문에 전쟁사 기록을 살펴보면, 랜스 차징은 상대 진형이 무너질 때까지 수차례, 낮에 시작해서 해질 때까지 반복했다는 이야기가 흔히 나온다.

 

이러한 기사들의 랜스차징을 막기 위해 잉글랜드의 궁병들은 말뚝을 들고 다니다가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말뚝을 적 방향으로 박아넣기도 하였고, 스코틀랜드는 기마돌격에 부적합한 험한 지역에서 게릴라전을 하거나, 윌리엄 월레스는 보병대가 팔랑크스와 흡사한 장창의 벽 쉴트론(schiltron)을 만들어 돌격을 저지하게 하기도 하였다. 특히 장창 전술은 중세 말에 보병의 기본 전술이 되었다.

 

근데, 기병이 특히 발달한 동유럽에선 그럼 장창보다 더 긴 랜스를 쓰면 되겠네?’라면서 후사르에게 엄청나게 긴 랜스를 주어 장창병을 돌격으로 밀어버리는 위엄도 보여주었다. 그리고 총이 나오면서 장창진으로 보호받는 총병대가 원거리에서 사격을 가하는 파이크 앤 샷 전술이 장창전술의 후계를 잇고, 랜스만으로 안 된다는 것을 느낀 기병들이 이제 권총 들고 마상총질하는 카라콜 전법을 쓰다가, 결국 권총보다 강한 머스킷의 화력에 밀려 중장기병의 시대가 저물고 엽병 같은 식으로 변화하게 된다. 물론 앞서 말했듯 가장 중요한 원인은 봉건 체제에서 변화해나가면서 생긴 전장 변화다.

 

토너먼트 경기에서 쓰는 랜스는 끝이 뭉툭하고 더욱 잘 부러지게 개조한 토너먼트 전용 랜스이다. 기사 윌리엄 같은 영화에서 묘사된 토너먼트 경기를 보면 랜스가 스치기만 해도 와자작 부서지는 이유가 그 때문. 이 때문에 토너먼트 경기에서 주인공을 쓰러뜨리려는 악역들은 랜스 끝을 뾰족하게 하고 잘 안 부러지는 재질로 만들기도 한다.

 

그 외에 지역에 따라 다양한 무기를 사용하였고, 폴액스나 할버드 같은 폴암류부터 마상창, 단검, 한손검, 양손검, 도끼, 철퇴, 레슬링, 갑옷, 방패, 기마술 등 사실상 보편적인 무기는 두루 다 다룰 줄 알았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격 무기는 잘 사용하지 않았다. 대체로 중세 기사들은 사격 무기를 천시하거나 비겁한 무기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주로 징집된 평민이나 용기병들이 사격무기를 담당하였다.

 

하지만 이것 역시 어디까지나 관념적인 얘기로, 급하면 아무 무기나 쓰게 되어 있다. 사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 궁술은 이것 하나에만 매진하는 다년간의 단련이 필요한 전문분야이고, 쇠뇌는 그것 자체로도 엄청나게 비싼 전문무기이기 때문에 전쟁터에서는 전문 용병을 고용하는 것이 유리하다. 유럽의 중장기병들은 보통 기마돌격과 근접전을 담당하기 때문에 궁술을 뽐낼 장면은 그다지 없었고, 그런 것은 전문 궁병에게 맡기는 편이 합리적이었다.

 

그리고 기사 중에도 궁술을 아는 자는 드물지 않았을 것이다. 중세의 그림을 보면 맨앳암즈나 기사가 사격 무기를 사용하는 장면도 곧잘 등장하고, 중세 무술서적에서는 말을 타고 달아나면서 등 뒤로 쇠뇌를 쏘는 파르티안 샷을 가르치는 장면이 나온다. 게다가 기사들이 평시에 심심하면 하던 스포츠가 사냥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활 다루는 것의 기본기 정도는 하는 기사가 많았을 것이다.

 

단지, 기사 말고도 활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있는데 많은 기회비용을 주고 키워서 근접전을 담당해야 하는 기사가 궁술에 매달릴 필요가 없었을 따름이다. 전쟁은 상대에게 얼마나 피해를 주는가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얼마나 적은 피해를 입는가 역시 중요한데 본인의 역할이 다른 부대의 피해를 감소시키기 위한 근접 전투임에도 전장에서 원거리 무기에 의존하는 방식을 고집한다면 전장에서의 자기 역할을 하지 못한 즉 권리만 받아 챙기고 의무는 행사하지 않는 비겁자 취급을 받을 여지가 충분하며 따라서 이 때문에 '원거리 무기=비겁자' 인식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말에 타고 돌격하는 중기병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말타고 싸우기 힘든 상황이라면 말에서 내려 중보병으로 싸우는 일도 많았다.

 

한자로는 말 타고 싸우는 무사이고, 유럽에서도 영어를 제외한 거의 모든 언어는 '말을 탄(타는) '라는 뜻이다. 대부분의 문명은 농경을 주로 했기 때문에 말과 말 먹이가 어마어마하게 비싼 데다가, 자신의 장비는 자신이 직접 챙겨 와야 했던 경우가 많았으므로 귀족 정도가 되지 않으면 기병이 되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에 기사는 귀족이라는 공식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굳이 기병 뿐만이 아니라 다른 하급 귀족에게도 기사 작위를 주는 경우가 생겼고, 현대에는 영국 등 일부 왕정제 국가에서 주는 명예직으로만 남아있다.

 

후대에 들어서면서 흔히 기사도를 마땅히 지켜야하는 정의로운 존재로 묘사되는 경우가 잦지만 실제로는 꽤 달랐다. 기사도를 지켜야 기사라면, 기사는 한 명도 없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문서 참조.

 

동유럽에서는 서유럽의 기사에 대응되는 봉건 지배층인 보야르가 있었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일단 기사 = 귀족은 올바른 등식은 아니다. 기사는 작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서구의 봉건제에서 평민과 구분되는 귀족은 분봉을 받아 해당 영지를 다스리고 그 산출물을 관리/분배 할 권력과, 그러한 권력을 가문에 세습할 수 있게 권리를 인정받게 되는데 이러한 신분을 통칭 '귀족'이라고 하며, 그 귀족의 등급은 (동양의 오등작위의 명칭을 차용하여) 대개 공작(duke/prince), 후작(marquis), 백작(earl/count), 남작(baron) 등으로 번역된다. 이러한 귀족위는 세습작위(hereditary title)라고 부르며, 이에 해당하는 신분이 곧 세습귀족이다.

 

그런데, ‘기사(knight/cheval‎ier)’는 원래 이 세습작위의 일부가 아니다. 기사는 혈통에 따른 사회적 신분제의 일부가 아니라 종사하는 직업과 (, 군무와) 관련되어 있는 칭호다. 예컨대, 귀족으로서 분봉받은 하나의 봉지에 대해 두 개의 다른 작위를 동시에 가질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노섬브리아 백작인 사람은 동시에 노섬브리아 남작일 수는 없다. 이미 해당 봉토의 백작위를 받은 이상 노섬브리아는 백작령이지 남작령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노섬브리아 공작인 동시에 기사일 수는 있다. “기사는 봉토와 관련된 세습작위가 아니라 직무이기 때문이다.

 

, 기사는 작위가 아니며 또한 세습되지 않는다. 따라서, 아주 엄밀한 의미에서는 아래 항목에서 사용 된 "기사작위"라는 말도 사실은 잘못된 말이다. '작위' 자체가 세습적 지위를 내포하고 있는 용어이기 때문. ‘서임되는 기사는 작위가 아니라 사실은 직위. 그리고 기사직은 세습되지 않는다.

 

물론, 이와 같은 엄밀한 구분은 중세사회가 전성기에 들어가는 1213세기 무렵이 되면 정작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도 꽤 선이 흐려져 '아무래도 좋은' 상태가 된다. 이미 신분질서가 확립되었기 때문에 대체로 기사 서임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귀족신분으로 제한이 되기 때문에 으레 기사는 곧 귀족과 동일시되었다. 게다가, 르네상스와 근세사회로 들어가게 되면 이미 전적으로 귀족들만 고급의 기병을 이루던 시대는 지나가고 처음에는 용병으로서, 후에는 대규모로 확충되기 시작한 상비군의 일부로서 평민들도 기병이 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군무에 대대로 종사하는 평민들 중 일부도 전통적인 세습귀족은 아니지만 신진 세력으로 두각을 나타내면서 기사라는 중세적 직명을 사용하는 경우가 점차 줄어들고, 종국에는 그냥 기병(cavalry)’이 되어갔다. 결국, 근대 영국에 들어와 기사라는 직위는 귀족들을 고까와하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특별한 신분적 인정을 갈망한 실력있고 부유한 부르주아들에게 일종의 포상으로 수여되기 시작하면서 완전히 명예직이 된다.

 

오늘날 영국에서는 기사 작위를 받은 사람이라고 해도 여전히 귀족신분은 아니다. 오늘날 영국에서도 전통적 의미에서 귀족은 과거 세습귀족위를 갖고 있는 사람들과 왕실로만 제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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