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서양문화 이야기

십자군 전쟁(十字軍戰爭, Crusades, 1095년∼1291년)

작성자管韻|작성시간20.01.11|조회수799 목록 댓글 0


십자군 전쟁(十字軍戰爭, Crusades, 10951291)

 

 





 

1095년부터 1291년까지 간헐적으로 일어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레반트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일어난 전쟁을 말한다. 1071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로마노스 4세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제국의 술탄 알프 아르슬란에게 대패한 뒤 근동 일대에 대격변의 시기가 찾아오고, 결과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기존 핵심 지역이던 아나톨리아(현재 터키지역) 대부분을 잃게 되었다. 1081년 신황제 알렉시오스 1세가 즉위하여 이를 수습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고자 했지만, 남이탈리아의 노르만족, 북방의 페체네그족, 그리고 아나톨리아의 셀주크 제국 등 사방에 적들이 너무 많아 제국의 힘만으로는 부족했다. 때문에 제국은 전쟁으로 인한 군비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04.jpg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1200pixel, 세로 827pixel 가 팽창하는 1040년대를 전후하여 꾸준히 해오던 지원 요청을 보다 다급하게 해오고 있었다. 그러한 요청의 일환으로 10953월 피아젠차에서 열린 공의회에도 사절단을 파견했는데, 피아젠차에서 이들을 접견한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성스러운 교회를 수호할 수 있도록 이교도들에게 맞설 원군을 보내달라정도의 내용의 요청을 듣고는 본격적으로 십자군을 위한 여론 조성에 나섰다. 그렇게 109511월의 클레르몽 공의회를 기점으로 서유럽은 약 200년간 여러 차례에 걸쳐 십자군을 파견하게 된다.

 

Crusader states : 십자군 전쟁으로 세워진 나라들을 십자군 국가라고 부른다.

 

레반트 지역 : 기본적으로 1차 십자군에서 세워진 이 4개국을 십자군 국가라 부른다.

 

에데사 백국 : 훗날 예루살렘 왕국의 첫 왕으로 즉위하게 되는 보두앵 1세가 에데사 지역의 아르메니아인 군주 토로사의 후계자로 낙점되면서 건설되었다.

 

트리폴리 백국 : 1차 십자군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이자 남프랑스의 대귀족인 레몽 드 생질 백작이 건설했다.

 

안티오키아 공국 : 1차 십자군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이자 남이탈리아의 노르만 귀족인 보에몽이 건설했다.

 

예루살렘 왕국 : 예루살렘 공략 이후 하() 로렌의 공작인 고드프루아 드 부용이 사실상의 왕위인 성묘의 수호자 자리에 앉으면서 건설되었다.

 

예루살렘 왕국 속령

 

갈릴리 공국 : 보에몽의 조카인 탕크레드가 불과 수십 기의 기마병을 거느리고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던 이 지역을 점령하여 건설했다.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 : 현재 터키 남부의 킬리키아 지방에 아르메니아인들을 중심으로 건국된 왕국이다. 안티오키아 공국 등 십자군 국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 함께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키프로스 왕국 : 원래 키프로스는 동로마 제국령이었으나, 3차 십자군 전쟁기에 키프로스에서 반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한 이사키오스 콤니노스가 리처드 1세를 공격하다 역공당해 제압당한 이후 일시적으로 잉글랜드 왕국령이 되었다. 리처드가 예루살렘 왕위를 빼앗긴 뤼지냥의 기에게 키프로스의 지배권을 보상으로 내주게 되면서 십자군 왕국이 세워졌다. 이후 베네치아 공화국에게 1489년에 합병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튜튼 기사단과 리보니아 연맹 : 튜튼 기사단과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의 정복 활동으로 기사단령과 여러 주교령이 형성되었다. 튜튼 기사단은 1237년에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을 합병하였고, 1241년에 러시아로 진출하였으나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에게 패배하여 실패하였다. 이후 발트 해 지역의 무역을 독점하여 큰 돈을 벌었고, 한때 발트 해의 강국으로 부상하였으나, 1410년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기사단이 폴란드-리투아니아에게 패배한 후 몰락하였다. 1525년에 튜튼 기사단이 프로이센 공국으로 세속화하자,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은 리보니아 지방의 여러 세력들과 '리보니아 연맹'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도 1561년에 이르러 쿠를란트젬갈렌 공국으로 세속화하였다.

 

로마 제국 시기인 3세기경부터 레반트 일대는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대다수가 기독교도였다. 하지만 7세기 중반을 중심으로 일어난 이슬람 팽창으로 637년에 예루살렘도 이슬람 령이 되었고 기독교를 믿는 지역은 11세기까지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를 잃는 등 그 영역이 지속적으로 줄어왔다. 이슬람 군주들이 정권 차원에서 순례자들을 박해한 기록은 전무하지만, 이슬람의 세력권은 유목민(베르베르인 등)의 약탈이 일상화 된 지역이라 약탈당한 순례자들은 굉장히 많았으며, 여기에는 예루살렘에서 기독교 순례자가 이슬람 세력에게 박해를 받는다는 소문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소문들은 동로마 제국이 서방의 원군을 얻기 위한 지원 요청에 명분으로 써먹었고, 정치적 이유로 교황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이 과장한 부분도 있다. 정확히 따지자면 1009년에 파티마 왕조의 6대 칼리프 알 하킴이 기독교와 유대교를 대놓고 탄압하며 예루살렘 성묘 교회를 완전히 파괴하기는 했으나, 1040년대부터 동로마 제국에서 돈지랄 외교로 파티마 왕조와 타협, 기독교 신자들을 보호하며 성묘 교회를 복구한다. 어쨌거나 아랍인 왕조들은 성묘를 찾아오는 순례자들의 돈을 반겨서 순례자들을 대체로 보호해주었다. 문제는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기존 동로마파티마의 레반트 세계 질서를 파괴하고 예루살렘을 점령했던 셀주크 제국은 순례자들이 어떤 이익을 가져다주는지 감각이 아직 없어서 초반에 순례자들을 박해했던 것이다. 성지 순례자들은 분쟁지역을 지나면서 겪은 일과 튀르크인들에게 당한 불편들을 서유럽으로 돌아와 말해주었고, 정치인들은 자신의 지위를 위해 이를 적절히 과장했다. 이로 인해 상대적으로 광신적이고, 현지 사정을 모르는 서유럽인들은 분노로 끓어오르게 된다.

 

정책적으로 순례자들이 탄압당한 적이 없다는 근거를 들어 십자군 전쟁의 명분은 거짓된 것이라는 수정주의가 한때 크게 유행했으나, 순례자가 피해를 입은 것과 예루살렘이 기독교 입장에서 모욕당한 것은 모두 사실이다보니 수정주의자들의 극단적인 해석처럼 궁색한 주장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 시대의 성지는 순례하기에 위험한 분쟁지역이었다. 1070년대엔 말리크 샤가 통치하는 셀주크 제국의 에미르 아트시즈가 성지를 포함한 시리아 전체를 파티마 왕조에게서 빼앗았는데, 예루살렘의 저항을 모스크 안에서 수천 명을 학살하며 진압해버린다. 1079년엔 말리크 샤의 동생 투투쉬가 아트시즈를 처형하고 시리아를 통치하더니, 1086년엔 그 투투쉬가 형 말리크 샤에게 쫓겨난다. 말리크 샤가 1092년에 죽자 돌아온 투투쉬가 1094년에 시리아를 탈환하나 바로 다음 해에 전쟁에서 패하며 사망. 결국 1096년에 출발한 1차 십자군이 도달하기 직전인 1098년에 예루살렘은 파티마 왕조가 재정복한다. 이렇게 이슬람 세력 간에 성지를 차지하기 위한 분쟁이 계속 일어나고 있었으니, 전쟁에 휘말린 순례자들이 살해당하는 일은 적지 않았다.

 

서유럽의 인구 증가로 인한 식량 부족 해결과 인구감소 효과.

 

당시 서유럽은 농업기술 자체가 낙후되어 있었기 때문에 식량생산성이 형편없었으며, 지배자들은 인구를 획기적으로 감소시키는 방법이 전쟁임을 알고 있었다. 고로 전쟁을 통해 잉여인구를 처리하여 식량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는 것이 이 주장의 요지인데... 이에 대해서 토머스 매든 교수와 자크 르 고프 교수의 의견을 따르면, 서유럽은 카롤링거 르네상스와 수도원 운동에 힘입어 느리긴 하지만 식량 공급이 차츰 개선되고 있었으며, 전쟁 같은 대규모 학살을 통한 인구 감소 효과를 불러일으킬 이유가 없었다고 한다. 또한 이미 십자군 전쟁 이전에 서유럽은 지방 영주들의 끊임없는 소모전으로 서유럽의 인구가 유지되고 있었기에 십자군 전쟁을 통한 인구 감소는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지나친 전쟁으로 서유럽의 피해가 누적되어 이를 막기 위한 하느님의 평화운동과 하느님의 휴전운동이 벌어지고 있었고 그레고리오 7세는 차라리 해외에 나가서 싸우라고 하고 있었다. 이 개념을 이용하여 아예 성지를 탈환하자고 한 것이 우르바노 2세다.

 

당시 십자군 원정은 소요기간이 굉장히 길었으며, 어차피 돌아올 가능성도 낮을 거라고 예상한 교황과 사제들이 원정에 참여한 사람들의 재산을 위탁받으면 그냥 자기네 것이 될 거라고 계산했었다. 실제로 교황청이 원정에 참여한 사람들의 영지의 관리를 위탁받은 것은 사실이고, 당시 교황청은 서유럽에서 가장 발달한 관리 시스템이라서 교황청을 중심으로 한 수도원들은 영주들에 비해 효과적으로 땅을 관리하고 운영할 줄 알았다.

 

그런데 교황청에서 영주들의 영지에서 나오는 소득을 떼어갈 지언정, 영지 자체를 먹튀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우선 영주들은 원정 이전에 유사시에 자신이 사망할 경우를 대비하여 제2, 3, 4 상속권자까지 설정해 두었으며, 자신의 영지는 교황청이 신속하게 상속권자에게 양도할 것을 문서로서 약속해두었다. 또한 영주의 사망시 상속권자가 없을 경우에는 그냥 영주와 계약을 맺고 있는 상위의 영주에게 그 영지가 몰수되었다. 애초에 위탁만 했지 양도하겠다고는 안했으니.

 

교황청은 십자군을 권력 확대, 즉 세속 군주들에 대한 교황청의 위세 증진 겸 동방 교회를 누를 수 있는 기회라 판단했다.

 

흔히 동서 대분열로 말하는 기존 가톨릭-정교회간의 갈등이 해프닝에 가까웠던 1054년의 상호 파문으로 표면화, 쌍방의 총대주교(교황도 총대주교이므로)와 황제에게 파문을 날려대는 등 경쟁의식이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카노사의 굴욕으로 상징되는 교황-신성 로마 황제간의 갈등은 한창 진행중이어서, 교황입장에서는 황제로 대표되는 세속군주들의 권위를 누를만한 위업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마침 정교회권의 상황이 곤란해져서 동로마 제국이 종교적 명분을 들며 지원을 요청해오자, 교황은 이 상황을 세속 군주 및 동방 교회에 대한 영향력과 권위를 높일 기회로 판단했다.

 

이는 109511월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있던 교황의 연설에서 잘 드러나는데,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이전까지 잘 써먹지 않던 순교’, ‘대사령’, ‘구원등의 자극적인 단어를 쓰며 적극적으로 십자군 여론이라는 불씨에 기름을 부었다. 순례자들의 경험담과 동로마 황제의 지원 요청으로 불씨 자체는 존재하는 상황이었으니까. 이로 인해 동방 황제는 청한적도 없는 대규모 십자군 문제를 걱정하게 됨은 물론, 그 십자군 운동의 주체에서 객체로 밀려나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서방 황제를 비롯한 군주들도 십자군 문제를 중요시하게 되었으니, 이러한 교황의 권위 강화 시도는 대성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호전적인 기사들과 영주들을 유럽 밖으로 내보냄으로써 내적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당연히 권력공백을 노리고 빈집털이하려는 서유럽 안에서의 지방 영주 간의 다툼은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이에 따라 교회는 영지관리하며 돈 좀 만지며 재미보려던 차에 관리중인 영지에서 전쟁 하는게 거슬리는 게 당연했다. 그래서 따로 전쟁을 하면 안 되는 날까지 만들어서 공표할 정도였다. 결국 권력공백은 오히려 실력자들의 부재로 인한 왕권찬탈 음모가 성행하는 원인이 되었고, 각 왕조간의 대립이 성행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의 대립이다.

 

말 그대로 십자군 원정이 원정이 아니라 무장을 하고 성지순례를 한다는 개념인데, 카롤링거 왕조의 국왕들은 스스로 예루살렘 성지와 그곳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을 보호할 의무와 권리가 있음을 주장해 왔으며, 11세기 후반까지는 이슬람 칼리프들도 이를 인정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10세기부터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하자 순례자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호위병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는데, 10641066년에는 7천 명의 독일인들이 중무장을 한 상태에서 예루살렘을 여행하였다. 이것에 대한 근거로 “1차 십자군 원정이 예루살렘을 탈환한 뒤에 대부분의 원정군이 유럽으로 돌아가 버렸다.”를 꼽는다. 말 그대로 성지순례 왔습니다.” 하고 집에 가버렸다는 것이다. 그 이후에도 수많은 십자군들은 예루살렘을 찍고 돌아가는 일이 잦아서 예루살렘 왕국이나 여러 십자군 국가의 군주들은 십자군들을 성지에 말뚝 박게 하려고 온갖 수를 써댔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주는 대사(大赦, 사면)를 획득할 목적으로 참여했다. 성지 탈환의 성전에 참여하면 교황청에서 대사를 준다고 홍보했다. 그래서 1차 십자군의 경우 유달리 부랑자,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다. 우선적으로는 교황청의 선언에 열성적으로 반응한 수도자들이 이것을 자극했다. 특히 은자 피에르의 화려한 말빨에 의해서 우르바노 2세가 계획한 1차 십자군보다 몇 달 빠르게 민중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그 뒤에 교황청에서는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는 사람은 고해성사의 보속을 없애주는 '대사'를 행하겠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당시 유럽은 장자 상속제였으며, 차남 이하로는 권력이나 재산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영지를 얻기 위해 많은 기사들이 참여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현대의 중세 연구 결과에서는 대부분 부정되고 있는데, 당시 십자군에 참가했던 기사들의 목록을 면밀히 추적해보면 대개 당시에 세력깨나 있다는 영주들이었다. 당시 영주들은 바보가 아니었고 동로마 제국에 용병으로 고용되어 튀르크와 싸워본 적이 있던 사람들도 많았다. 얻을 것보다는 잃을 것이 많은 3km의 원정길을 땅 좀 얻자고 간다는 것은 설득력이 낮다. 당시 영주들은 자기 차남들에게 나눠줄 땅이 정 필요하면 그냥 옆동네의 기독교 영주들과 싸운 경우가 많았다.

 

성지와 성인들의 묘에 대한 환상이 지원 동기로 나타난 사람도 있었다. 지금으로 치자면 성배를 찾기 위한 원정을 떠나는 셈. 애초에 성배탐색이라는 모티브 자체가 십자군 원정에서 시작된 것이다. 십자군 원정에서 (진품 여부는 상관없이) 성십자가와 성창 등 대단히 귀중한 유물들이 발견되었고, 이를 당대 시인들과 신부들이 미화해 모험담으로 만들면서 성지순례+성유물 획득이라는 성배탐색의 모티브가 생겨난 것이다. 아서 왕 전설같은 대표적인 성배탐색 문학은 10세기11세기까지만 해도 성배탐색같은 요소가 없이 그냥 전쟁 무용담이었는데, 이후로 수많은 모험담들이 추가되면서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순수한 신앙으로 일어난 귀족들도 있었다. 주 동기의 1번인 성지 회복보다도 더 순수하게, 오로지 주를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행한 일이니 어떤 의미론 영광스러운 자들. 실제로 1차 십자군 원정에서 예루살렘 입성 때 수만이나 되었던 십자군 병력들은 예루살렘 탈환 후 성지에서 예배 좀 드리고 마지막 파티마의 공격까지 막고 나서는 그냥 집으로 돌아가서 수천 명 정도밖에 남지 않는다. 이것 때문에 남은 십자군 영주들은 사람이 너무 없어서 무진장 고생했을 정도. 이런 사람들은 가톨릭은 물론, 적인 이슬람도 칭송했다. 허나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십자군 전쟁을 위해 많은 토지와 재산을 헌납하거나 처분했기에, 전쟁 후에는 몰락해 버리기 일수였다. 한마디로 교황청에 가진 돈을 모두 털리고 사지로 내몰렸던 것이다.

 

십자군 전쟁은 오래 지속되었지만 9차까지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성지인 예루살렘 탈환에 실패함으로써 유럽권이 패배한 전쟁이 되었다. 전쟁이 교황의 예상과 달리 실패했기 때문에 교황권의 몰락과 신앙의 약화를 가져와 결과적으로 교회의 권위가 떨어졌다. 한편으로 기사와 영지를 기반으로 한 장원경제의 붕괴가 찾아왔고, 중앙집권적인 근대국가의 탄생이 이루어졌다. 동방으로 향하는 무역로를 새롭게 개척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도시경제와 화폐경제가 발달하게 되었다. 한편, 기존에 화폐 거래가 일반적이지 않던 서유럽이 동로마와 이슬람 권에서 화폐 거래를 채험하여 서유럽 세계가 자본주의와 시민 계급의 성장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는 평가도 있다.

 

그 외에 자세히 언급되지는 않지만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의 공국들은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키예프 공국 같은 러시아 공국들이 부흥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슬람 제국이 북아프리카를 장악하고 사라센 해적들이 판을 쳐 지중해 무역이 불가능하자 아예 흑해와 러시아 공국들을 지나 발트해로 가는 무역이 성행하였기 때문이다. 십자군 전쟁으로 이탈리아 상인들이 새로운 무역로를 개척하고 상권을 장악해 러시아를 지나는 물류의 양이 급감해버리자, 대부분의 수익을 교역에 의지하는 러시아 공국들은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4차 십자군 직후 몽골이 침공해오자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제외한 모든 러시아 공국들은 멸망당하거나 칸국의 봉신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이탈리아의 공화국들, 특히 베네치아 공화국과 제노바 공화국은 십자군을 통해 많은 이득을 얻었다. 베네치아는 직접 그리스의 상당 부분을 식민지로 만들었고, 제노바 역시 그에 못지않은 힘을 얻게 되었다. 이들의 경쟁 관계는 키오자 전쟁이 베네치아의 승리로 끝나기 전까지 지속된다.

 

하지만 이슬람권에서는 분열된 상황에서 갑자기 유럽이 쳐들어와 개박살을 냈기 때문에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몰아낸 유럽이 제국주의 시대에 다시 돌아와서 중동을 공격해 식민지로 만들고 유럽인들이 자신들을 제2의 십자군이라고 자화자찬하자, 이슬람은 십자군을 사악한 악의 화신이라고 여기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가 현대 중동의 시대정서를 형성하는데 이바지하였고 지금도 이슬람은 이스라엘과 미국을 제2의 십자군으로 여기게 되어 증오와 폭력을 더욱 증폭시키는 효과를 낳고 있다.

 

동로마 제국의 경우에는 초반에는 룸 술탄국에 빼앗겼던 아나톨리아 동부 해안 등을 대거 수복하는 등 어느 정도 이익을 보나... 싶었지만 십자군 깽판으로 경제적, 안보적 피해 역시 많이 입었고 무엇보다도 4차 십자군으로 수도가 털리면서 결국 강대국 대열에서 영원히 탈락하였으며 이후 이백 수십 년간의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실제로 이 전쟁 와중에 이슬람과 기독교는 종파와 이해관계로 사분오열되어 서로서로 싸우는 일이 빈번했다. 이슬람의 영웅이라던 살라흐 앗 딘조차도 다른 종파에서 고용한 자객들에게 죽을 뻔했다. 십자군이 헝가리로 쳐들어갔다가 되려 깨져버린 일이나, 알비주의 십자군처럼 내부의 충돌도 끊임없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이 서로 손을 잡고 적을 공격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에티오피아도 십자군 전쟁에 영향을 받았다. 이슬람권에 포위된 유일한 기독교 국가였던 에티오피아는 십자군 국가들과 연합하여 이슬람 국가들에 대항하려고 했고 실제로 소규모의 지원병을 보내기도 하였다. 살라딘이 예루살렘 왕국을 멸망시키고 순례자들에게 순례세금을 물리자 아예 랄리벨라라는 곳에 제2의 예루살렘을 건설한다고 여러 건축물을 건설하기도 하였다. 14세기에 이르러서는 교황에 사절을 보내 로마, 아비뇽, 스페인, 포르투갈을 둘러보고 프랑스와 같이 이집트를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이미 십자군 전쟁이 거의 끝을 보는 상황이었고, 또 대립교황과 교황이 서로 반목을 하는 등 유럽 교회도 혼란이 극심한 상황이었던지라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한편 몽골군이 1200년대 후반에 이슬람권을 공격하면서 유럽에 프레스터 존의 전설이 퍼졌다. 십자군 국가들은 일 칸국과 연합하여 이슬람 국가들에 대항을 꾀했고 네스토리우스교를 믿었던 몇몇 몽골군주와 그 아내의 영향으로 교황 및 프랑스왕과 서로 사신을 주고 받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후기에 이르러 일 칸국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맘루크 왕조의 맹활약으로 몽골군이 처발리자 그 연합도 점차 쇠퇴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십자군 전쟁의 여파는 그 당시 창궐하던 흑사병과 맞물려서 유럽 인구를 급격하게 줄이는 결과를 초래했고, 이는 자연적으로 농노들의 가치가 올라가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예루살렘을 기점으로한 실크로드를 결과적으로 확보하지 못함으로써, 향료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던 유럽인들은 실크로드를 대체하는 다른 길을 찾게 되었으며, 이는 대항해시대의 서막이 되었다. 이와 같은 여파는 십자군 전쟁으로 실추된 교황권에 맞물려서 유럽 구성원의 머릿속에 개인의 욕구, 권리등에 대한 인식들을 크게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르네상스의 발판이 되어 결과적으로 중세가 끝나는 결과를 초래했다.

 

전쟁이 끝난 후 19세기 전까지는 사실 이슬람이나 기독교나 이 전쟁에 큰 관심이 없었다. 무슬림들은 일단 자신들이 승리한 전쟁이고, 곧이어 터진 몽골 제국의 침략이 더 관심을 기울일 만한 큰 사건이었다. 기독교 측 또한 언급해서 좋을 게 없는 전쟁으로 여겼고 근대 계몽주의 학자들은 십자군 전쟁을 중세의 암울한 역사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19세기 이후 십자군 전쟁은 재조명받게 된다. 오스만 제국을 이긴 유럽 국가들이 중동 지역을 침략하기 시작하면서, 위에 '영향' 항목에 나온 대로 명분을 위해 자신들을 제2의 십자군이라 자화자찬한 것이다. 서구 국가들이 이렇게 중동 침략을 십자군 전쟁의 이미지로 차용하자 이슬람 측에서도 그에 맞서기 위해 살라흐 앗 딘 등 영웅을 재발굴해 대대적으로 홍보했고 십자군 전쟁은 순식간에 역사의 화두로 떠올랐다.

 

십자군 전쟁은 어마어마한 논란을 낳았는데, 세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종교전쟁이라 불리는 것, 정의의 전쟁이라 불린 것, 십자군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은(한참 뒤의 주장이고) 그 뒤에 악용해 먹으면서 더 큰 문제가 생겼났다.

 

둘째, 문명의 충돌이라는 말. 우리가 앞으로 토크멘터리 전쟁사를 하겠지만, 앞으로 나올 전쟁사의 절반은 중동이 끼어있다. 중동은 위치상 세계문명의 교차로 역할을 자임했다. 끊임없이 전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고, 십자군 전쟁 이후에도 십자군 전쟁의 패러다임이 계속 사용 되었다. 한쪽은 성전으로, 한쪽은 우리가 당했는데 또 당한다는 식으로. 그러다보니 분노는 재생산되고, 여기에 대한 악용과 반감에 골이 깊어졌다.

 

지금까지의 내용은 기독교 혹은 이슬람의 입장에서만 서술되었지만, 십자군 전쟁은 당시 유럽 각지에 살고 있던 수십만 명의 유대인들에게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종교적 광기로 이성을 상실한 병사들, 민중들이 게토로 쳐들어가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일은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 이후 12세기와 13세기 초까지 빈번히 일아 났다.

 

민중 십자군 때에는 주로 독일(쾰른, 마인츠 등지)에서 학살이 집중되었고 2차 십자군 때에는 프랑스와 독일, 3차 십자군 시에는 사자심왕 리처드 1세의 대관식이 겹친 잉글랜드의 요크, 런던 등지에서 수백 명이 화형을 당하였다. 유대인들은 무기를 들고 저항하기도 하였지만 결국 집단 자살로 소멸하는 경우가 많았다. 13세기 초, 5차와 6차 십자군 때에 재차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었지만 이번에는 그 주모자들이 처형당하는 벌을 받았다. 신성로마제국 황실은 기본적으로 유대인을 제국의 신민으로서 존중해 주었다.

 

이렇다보니, 현대 이스라엘이나 유태인들에게도 십자군이라는 이름은 달가운 이름이 아니다. 그래서 조지 워커 부시가 크루세이더라고 미군을 십자군인양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파병한 것을 이야기하자, 부시 측근 유태인 정치인들도 그런 명칭은 좀 삼가 해 달라고 충고하며 미국 내 유태인들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이름이라고 우려했을 정도였다.

 

대망의 첫번째 십자군. 하지만 행각이 흑역사 급이라서 잘 언급되진 않는다. 은자 피에르가 이끈 민중 십자군혹은 빈자의 십자군0차 십자군 원정으로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은자 피에르가 유명할 뿐이지 그가 민중 십자군의 확실한 지도자라고 할 수도 없고 온갖 종류의 잡다한 민중 십자군이 결성되어 어떻다 정의를 내리기도 어려우며 그냥 동유럽에서 약탈만 벌인 십자군들이 많았고 얼마 안 있어 십자군 본대가 출발한 턱에 존재감도 약해서 거의 언급이 안 되는 편이다. 민중 십자군, 군중 십자군, 농민 십자군, 빈자의 십자군 등의 표현이 쓰인다.

 

동로마 제국의 힘만으로는 사방에서 쳐들어오는 침략자들과 맞서 싸울 수 없다고 판단한 알렉시오스 1세는 서유럽의 힘을 빌리기로 하였다. 문제는 전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알렉시오스 1세에게 파문을 선고하면서 동로마 제국의 황제와 로마 교회의 관계는 악화되어 있었다는 것.

 

그러나 새로 교황으로 즉위한 복자 우르바노 2세가 알렉시오스 1세의 파문을 취소하고 동로마 제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 후, 알렉시오스 1세는 서방 교회와의 화해를 모색하면서 교황의 초청을 받아 10953월 피아젠차 공의회에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사절단은 제국의 어려움과 성지회복의 정당성을 역설하면서 종교적인 명분을 내세워 교황 우르바노 2세에게 투르크 인들에게 대적하기 위한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다.

 

우르바노 2세 역시 전전임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교황권의 신장을 꾀하면서 이를 공고히 할 필요성이 생겨나고,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4세와 노르만의 로베르 기스카르 사이에서 교황 자체의 무력적인 기반이 약화되자 동로마 제국과의 화합을 꾀하는 동시에 무력 원조를 통한 입지 강화 및 동방 교회에 대한 영향력 확보를 의도하였기 때문에, 이는 쉽게 수락되었고 나아가 알렉시오스 1세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발전하게 된다.

 

교황 우르바노 2세의 부름에 전 유럽에서 1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로마로 몰려들었다. 기사와 제후들뿐만 아니라 구원을 바라는 여자와 노인들의 수도 엄청났고 사제들도 몰려들었다. 교황은 병사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의 성지 순례 서약을 파기하고 사제들에게 교구에 남을 것을 명령했고 스페인 사람들에겐 고향을 지키라면서 십자군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한 것을 보면 많은 숫자이다.

 

엄청난 숫자의 십자군들의 결집에 유럽 전역에선 조만간 이교도들을 몰아내고 성지를 수복할 것이란 자신감이 퍼졌다. 이런 자신감의 중심에는 은자 피에르가 있었다. 당나귀를 타고 다니는 남루한 차림의 은수자 피에르는 병을 낫게 하고 마귀를 물리친다고 명성이 자자했는데, 그의 이름만 듣고도 많은 사람들이 십자군에 참여했다. 결국 은자 피에르는 1차 십자군 본대를 무시하고 민중들을 선동하여 자기들끼리 먼저 출정했다. 주로 프랑스 출신이었지만 쾰른에 들러서 많은 숫자의 독일인 십자군들을 보충했다. 프랑스의 귀족 고티에 상자부아를 비롯한 일부 제후와 기사들도 섞여 있었지만, 대부분은 집도 절도 없고 성지가 어딘지도 모르는 빈자들이 많아 민중 십자군, 빈자의 십자군이라 부른다.

 

이들은 수가 10만에 이를 정도로 엄청났다고 하는데, 이들의 예고없는 출정에 당연하지만 이들을 위한 식량이나 보급품이 준비되어 있을리가 없고 규율이 존재할 리는 더더욱 없었다. '무일푼' 월터가 지휘하는 민중 십자군 1대는 1096년 부활절에 출발하여 얌전하게 58일 헝가리에 도착했다. 놀랍게도 헝가리 왕 칼만의 입국 허가를 받은 이들은 얌전하게 헝가리를 통과하여 6월이 될 즈음에 동로마 제국 국경에 도달했다.

 

하지만 이때부터 민중 십자군의 기강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실제로 제후들이 이끄는 십자군 본대는 경제적 문제, 법적 문제, 군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랜 준비를 거쳤다. 민중 십자군을 본 베오그라드의 사령관 니케타스는 얼이 빠졌고 빨리 알렉시우스 황제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알렉시우스는 민중 십자군의 등장에 당연히 놀랐지만 이들을 잘 호위해서 콘스탄티노플로 데려올 것을 명령했다.

 

한편 굶주린 민중 십자군을 위해 따뜻한 식사와 숙소가 준비되어 있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었고, 준비도 자금도 없던 민중 십자군은 병참 부족에 시달렸다. 규율이라곤 없는 이들은 당연히 약탈을 자행했다. 하지만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월터의 1대 뒤로는 낙오된 수많은 민중 십자군들이 헝가리 왕국의 영내에서 떠돌고 있었는데 헝가리-동로마 국경도시인 셈린에서 이 민중 십자군들은 도둑질을 시도했다.

 

셈린 사람들은 도둑들을 잡아 무장해제시킨 다음에 벌거벗겨서 내쫓았다. 그런데 620일 피에르가 이끄는 2만명의 민중 십자군 본대가 도착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이들은 성벽에 걸린 월터의 낙오자들의 무기를 보고 분노했고 신발 가격을 흥정하는 과정에서 말다툼이 벌어졌는데 결국 이게 대규모 유혈사태로 번졌다. 민중 십자군은 셈린을 점령하고 4천명의 헝가리인들을 학살했다.

 

한바탕 학살을 저지른 민중 십자군은 헝가리인들의 보복이 있을 것이라 두려워하였고 허겁지겁 동로마 제국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626일 민중 십자군들이 동로마 제국으로 몰려들었다. 베오그라드 사령관 니케타스는 저번보다 더 많은 십자군의 출현에 그들을 막으려 했지만 민중 십자군은 자신들의 앞을 막는 동로마 제국군들을 학살하고 베오그라드를 불살랐다. 니케타스는 중과부적으로 니시로 퇴각했다.

 

사실 동로마의 농민들이 민중 십자군들에게 적대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신앙심 하나에 이 먼 곳까지 온 십자군들을 보고 많은 농민들이 감동했고 일부 동로마 농민들이 민중 십자군에 가담했다. 하지만 이 짧은 우호적인 분위기는 십자군들이 약탈을 벌이기 시작하면서 사라졌다. 십자군은 니시에서 큰 소동을 벌였고 니케타스와 동로마 제국의 인내심은 한계를 넘어버렸다.

 

마침내 동로마 제국군이 출동하여 민중 십자군을 살육했고 은자 피에르는 500명의 생존자들과 함께 허겁지겁 달아났다. 많은 십자군이 죽었고 포로가 된 십자군들은 동로마의 감옥에서 죽어갔다. 피에르는 매우 의기소침해졌지만 불과 다음날에 7천명의 생존자들이 합류하면서 매우 고무되었다. 생존자들이 자꾸 합류하면서 피에르는 다시 대군을 거느리게 되었다.

 

어쨌거나 동로마 제국군의 뜨거운 맛을 본 은자 피에르와 십자군은 의기소침하게 콘스탄티노플로 입성하여 먼저 도착해있던 월터와 합류했다. 피에르는 자신들이 벌인 소동 때문에 황제가 분노할 줄 알았지만 알렉시우스는 십자군을 환대해주었고 은수자 피에르는 감동받아 눈물을 흘렸다. 또한 시골에서 자란 이들은 콘스탄티노플의 화려함에 압도되었다.

 

한편 알렉시우스 황제는 이 민중 십자군들의 군기가 개판인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고 곧 이들이 행패를 부릴 것도 알고 있었다. 이들을 소아시아에 보내면 금방 살육될 것이 뻔했다. 하지만 이들의 원정 의지는 확고했고 또한 이들이 약탈을 자행하자 결국 알렉시우스 황제는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하여 이들을 소아시아로 보내버렸다. 알렉시우스는 이들에게 십자군 본대를 기다릴 것을 권고했지만 십자군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한편 룸 술탄국의 17세의 젊은 술탄, 킬리치 아르슬란이 이들 민중 십자군에 대해서 들은 것은 10967월 즈음이었다. 그간 서유럽인 용병들이 룸 술탄국을 거쳐 성지에 간 일이 하루이틀은 아니었지만 첩보에 따르면 그 수가 평소보다 훨씬 많았으며 아녀자와 노인들도 수천명이나 섞여 있다는 보고였다. 킬리치 아르슬란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이해하진 못했지만 첩자들을 보내 민중 십자군을 감시하게 했고 니케아의 방비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8월에 들어서 점차 많은 정보가 들어왔다. 은자 피에르란 이름도 보고가 되었고 이들이 무슬림을 멸망시키기 위해 왔다는 정보도 들어왔다. 또한 알렉시우스 황제가 보낸 해군과 용병들이 이들을 호위하고 있었다. 룸 술탄국은 경악했다. 하지만 십자군의 약탈 행위는 룸 술탄국 전체를 둘러볼 때 대단한 것은 아니었고 룸 술탄국은 십자군들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룸 술탄국에 도착한 민중 십자군들은 니코메디아 지역의 기독교도 주민들을 학살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이들은 시비토트 지역의 동로마 제국의 옛 군사기지들을 점거하여 보급 문제를 해결했다. 동로마 제국의 해상 보급도 가능했고 주변이 비옥한 지역이라 약탈로 식량을 확보할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 힘입어 독일과 프랑스 출신 십자군들의 행보는 날이 갈수록 대담해졌다. 마침내 프랑스 출신 십자군들은 룸 술탄국의 수도인 니케아를 공격하기로 했다. 이들은 니케아 자체에 공성전을 벌어진 않았지만 니케아 주변을 약탈했다. 십자군들이 아이들을 꼬치에 꿰어 불에 굽고 저항하는 주민들을 학살했다는 등의 소식을 접한 킬리지 아르슬란은 경악하여 기병대를 보냈지만 십자군들에게 격퇴되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부하들을 본 술탄은 흥분하여 보복하려 했지만 막료들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니케아를 공격한 프랑스 십자군들은 약탈한 재물을 동로마 상인들에게 팔아 짭짤한 수입을 얻었고 이에 눈이 뒤집힌 이탈리아 출신 레이날드가 지휘하는 6천명의 독일 십자군들이 2주 후에 제리고르돈 요새를 점령하고 그 인근을 약탈했다. 이 소식을 들은 킬리치 아르슬란은 929일 재빨리 군사들을 이끌고 제리고르돈으로 달려갔다. 투르크 병사들은 요새로 가는 수원을 끊었고 십자군들은 갈증에 미쳐 죽어갔다. 소변과 피도 사치스러운 음료였다. 결국 십자군들은 투르크 군대에게 포위되어 무참하게 섬멸되었다. 대부분의 십자군은 개종을 거부하고 장렬히 죽어갔지만 애초에 자업자득이었다. 하지만 레이날드는 항복하고 개종했다.(...) 킬리치 아르슬란은 레이날드가 개종은 물론이고 십자군 동료들에 맞서 싸우는 것도 마다하지 않자 매우 놀랐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시리아와 중앙아시아로 보내졌다.

 

한편 투르크 척후병들은 시비토트의 은자 피에르와 프랑스 십자군들에게 레이날드가 제리고르돈과 니케아를 점령하고 막대한 전리품을 얻었다고 헛소문을 퍼트렸다. 십자군들은 매우 흥분했고 당장이라도 니케아로 달려갈 기세였다. 그런데 제리고르돈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몇몇이 제리고르돈의 최후를 알렸다. 십자군들은 크게 놀랐지만 곧 순교자들의 복수를 해야 한다고 다시 흥분했고 2만명의 십자군들이 니케아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1021일에 이들은 매복해있던 킬리치 아르슬란의 투르크 군대와 조우하여 처참하게 박살났다. 노예로 팔 수 있는 젊은 남자들과 아름다운 여자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살육되었다. 23천의 생존자들이 근처의 성으로 탈출하여 농성했다. 킬리치 아르슬란은 동로마 해군을 두려워하여 무리하여 이 성을 공격하지 않았고 덕분에 이들은 살 수 있었다. 한 영웅적인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로 달려가 구원군을 요청했고 알렉시우스는 군대를 파견하여 이들을 구해주었다. 투르크 군대는 동로마 군대의 등장에 철수했다. 은자 피에르는 이 살아남은 극소수 생존자들 속에 있었단 기록과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마침 콘스탄티노플에 있었다는 기록이 공존한다. 킬리치 아르슬란은 수만명의 십자군을 섬멸하고 얻은 막대한 재물에 의기양양하여 니케아로 회군했다.

 

그리고 이들이 독일에 들렀을 때에 자발적으로 소규모 십자군들이 많이 구성되었는데 고트샬크, 폴크마르, 그리고 악명높은 라이징겐의 백작 에미코(에미히)의 십자군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미 은수자 피에르는 루앙에 들러서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십자군에 기부할 것을 권장했고 이후 고드프루아 드 부용의 십자군 본대가 출발하자 고드프루아가 유대인을 죽일 것이란 소문이 돌았고 이에 겁에 질린 유대인들은 먼저 고드프루아를 찾아가 많은 돈을 바치고 안전을 간청했다. 고드프루아는 그들의 돈을 받고 유대인들을 보호해주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독일 십자군들의 만행은 피에르와 고드프루아의 금전적 갈취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일찍이 유대인 보호령을 내린 바가 있었지만 이들 독일 십자군은 황제의 말도 무시했다.

 

109653일 스피어의 유대인 공동체가 에미코 백작에 의해 불타올랐다. 지방 주교가 재빨리 중재에 나섰지만 이미 12인의 유대인이 살해된 후였다. 주교는 살인자들을 잡아 처벌했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보름스에서 유대인들이 천주교도를 살해했단 소문이 퍼지자 독일 십자군들이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유대인들을 공격했다. 유대인들은 주교관저로 달아났지만 십자군들은 주교관저로 몰려와서 유대인들을 죽였다. 이어 마인츠가 공격당했다. 마인츠의 대주교 로타르트는 문을 닫고 에미코 백작을 받아주지 않았지만 반유대감정에 불타오르던 주민들이 문을 열어주었고 유대인들은 개종을 강요당했다. 많은 유대인들은 개종을 거부하고 죽었다. 이어 칼로니모스란 랍비가 대주교에게 보호를 요청했는데 대주교가 그저 개종할 것을 요구하자 분노한 그는 대주교를 죽이려고 칼을 휘둘렀고 반유대감정에 부채질을 한 격이 되었다. 이어 트리어, 쾰른, 메스에서도 유대인이 학살당했다. 많은 재물을 얻은 에미코의 부하들 상당수는 이때 집으로 갔고 에미코와 일부만이 동쪽으로 진군했다.

 

한편 폴크마르와 고트샬크의 군대는 에미코가 많은 돈을 벌었단 소식을 듣고 프라하의 유대인을 학살한 다음에 헝가리로 이동해서 같은 짓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헝가리의 왕 칼만은 자기 영토 내부에서 그런 행패를 묵인하지 않았고 폴크마르의 군대를 개발살냈다. 이어 고트샬크의 군대가 헝가리인 소년을 붙잡아 말뚝에 박아 죽이는 짓을 저지르자 고트샬크의 군대도 조져버렸다. 에미코 백작은 많은 부하들이 집에 갔음에도 고트샬크나 폴크마르보다도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칼만 왕은 에미코 백작이 아예 헝가리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지만 에미코 백작은 근성있게도 다리를 건설하여 헝가리에 진입했다. 에미코 백작은 바이셀부르크를 공격했고 거의 성공할 뻔했지만 바이셀부르크 사람들이 오히려 역으로 성문을 열고 반격에 나서자 놀란 에미코의 부대는 순식간에 박살났다. 에미코의 부하 대부분이 죽었지만 에미코는 기사들과 함께 살아남아 독일로 돌아갔다. 그 휘하의 프랑스 기사들은 계속 동쪽으로 진군했지만 좋은 꼴은 보지 못했다.

 

이들 말고도 별별 짝퉁 십자군들도 많았다. 양아치양치기 십자군이나 소년 십자군 등등. 여하튼 십자군 전쟁 와중에 별 유행같지도 않은 게 나돌았던 모양.

 

규모만 쓸데없이 컸을 뿐 말 그대로 빈자들로 구성된 오합지졸들이라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만 냈지 아무런 영향도 남긴 게 없다. 인명피해도 정작 때려잡으라고 보낸 무슬림 쪽에서는 몇 나오지도 않았고 대부분 같은 기독교도들만 엄청나게 피해를 봤다. 게다가 이들의 약탈행위 때문에 이후에 출발한 십자군 본대는 지역민들의 적대감과 겪지 않아도 될 보급 문제까지 겪어야 했다. 그래도 굳이 찾자면 헝가리인들의 십자군에 대한 경계를 키운 것과 이들을 손쉽게 섬멸한 룸 술탄국에서 십자군을 만만하게 보고 수도 니케아를 황당하게 내준 단초를 내준 것이랄까. 이슬람에게 개터지고 후퇴한 생존자들은 이후 동로마제국으로 귀환했다가 도착한 1차 십자군에 합류하기도 했지만, 이들을 정식 군대 취급해주지도 않았고, 싸울때는 싸우게 하고, 별다른 취급해주지도 않다가 안티오크 공성전 등 혹한기에 대다수의 탈주자들을 내는 등뒤로 가도 그다지 좋은 이야기는 없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