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차 십자군 전쟁(1217년∼1221년) 上
1. 프리드리히 2세의 성장
교황권을 위협하던 하인리히 6세가 1197년 죽고 나자 남은 것은 세살 바기 어린아이인 프리드리히와 어머니 콘스탄차 뿐이었다. 이 상황은 마침 교황좌에 오른 야심가 인노켄티우스 3세에게 아주 좋은 기회였다. 더구나 콘스탄차도 결국 인노켄티우스 3세와 손을 잡고 그를 섭정으로 임명한 후 다음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새 교황에게는 더 할 수 없이 좋은 기회가 열린 셈이었다.
사실 늑대냐 이리냐의 차이일 수 있지만 태후인 콘스탄차가 생각하기에 아들 프리드리히 2세의 제위에 더 위협적인 인물은 교황보단 하인리히 6세의 동생인 슈바벤 공작 필립 이었다. 적어도 교황은 신성로마 제국 황제 자리를 탐내지는 않겠지만 필립공은 무엇보다 그것을 탐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연유에서 프리드리히 2세는 1198년 시칠리아 왕위에 오르긴 하지만 독일 왕위 및 신성로마 제국 제위에 오르지 못했다. 교황은 의도적으로 한사람이 독일과 시칠리아를 장악하는 일을 막으려고 했는데 그랬다가는 남북으로 샌드위치처럼 사이에 끼어서 꽤 곤란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에 독일 왕위는 필립공과 벨프가의 라이벌 오토(하인리히 사자공의 아들) 사이에서 10년 이상 다툼을 벌이는 상태가 되고 어린 프리드리히는 시칠리아 왕국의 수도 팔레르모에서 부모 없이 교황의 감사하에서 자라게 되었다. 이 때 교황이 보낸 성직자가 바로 첸시오로 나중의 교황 호노리오 3세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 시기 프리드리히 2세를 눈에 가시처럼 본 쪽은 숙부인 필립이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오히려 자신이 섭정하는 프리드리히 2세가 없으면 곤란한 쪽이었다. 섭정으로 누리는 권력과 간섭이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반면 섭정 자격으로 사사건건 독일 황제 선출에 관여해서 훼방을 놓으려는 교황이 못마땅한 필립공은 독일 왕으로 선출 된 후 스스로가 섭정권을 주장하며 나폴리로 침공했다.
1200 년 제노바 함대의 도움으로 남부 이탈리아에 침공한 필립의 군대로 인해 어린 프리드리히 2세는 위기에 처하지만 어머니 시절 부터 시칠리아에 딱아둔 기반과 빌헬름(William of Capparone)의 능력을 바탕으로 간신히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빌헬름이란 독일인은 시칠리아의 섭정이었는데 1206 년에 발터(Walter of Palearia)로 교체된다.
아무튼 이렇게 위태 위태한 유년 시절을 보낸 프리드리히 2세는 세상에 대해 매우 염세적이면서도 현실적인 감각을 키우게 된다. 이와 같은 균형 잡힌 현실 감각은 나중에 십자군 전쟁에서도 나타나 된다.
프리드리히 2세의 유년 시절에 대해 또 다른 기록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바로 그가 엄청난 천재였다는 기록이다. 프리드리히 2세는 라틴어를 비롯 적어도 6개 국어를 할 줄 알았는데 이는 당시 남부 이탈리아 자체가 워낙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매우 유용한 재능이었다. 또한 뛰어난 지능으로 온갖 학문을 익히는 것도 모자라 승마, 창술 등 체력도 출중해 그야 말로 타고난 천재였다.
특히 그가 자란 팔레르모는 여러 인종과 다양한 정치, 종교 세력이 교차하는 지점으로 어렸을 때부터 프리히드리 2세는 중세인이라면 가지기 힘든 덕목인 다양성과 다른 문화를 존중할 줄 아는 지혜를 키우게 된다. 이것이 나중에 십자군 원정에서도 나타나게 된다.
1208년에 프리드리히에게 중요한 변화가 생긴다. 그것은 바로 그의 자리를 호시 탐탐 노리던 숙부인 필립이 암살당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독일 왕위가 바로 프리드리히 2세에게 돌아오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을 두려워한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1209년에 필립의 라이벌인 벨프가의 오토에게 황제 관을 씌워준 것이다.
교황의 의도는 물론 남 이탈리아에서 북독일에 이르는 단일 제국이 탄생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인노켄티우스 3세는 교령집인 ‘황제에 오르는 왕’을 발표해 제후들이 선출한 왕을 황제로 올리는 일이 교황의 책무임을 선언했다. 아무튼 이렇게 오토 4세가 벨프가의 일원으로 제위에 오르자 호엔 슈타우펜가의 지지 세력들은 제위 찬탈이라면서 강력하게 반발했다.
사실 상황은 이전보다 프리드리히 2세에게 유리해졌다. 이제 점점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섭정을 거부할 시기가 다가오자 숙부인 필립 2세가 죽어 친 호엔 슈타우펜 지지 세력이 프리드리히 2세를 지지 했던 것이다. 한편 이렇게 되자 신성 로마 제국은 오랜 반목을 해온 벨프가 세력과 호엔 슈타우펜 왕조 지지 세력이 갈려서 심각한 내분에 휩싸이게 된다.
오토 4세는 이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할 방법으로 결국 교황과 프리드리히 2세를 모두 처리하기 위해 이탈리아 침공을 진행했다. 강력한 황제가 등장하는 일을 어떻게든 막으려는 게 교황의 의도라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전의 독일 황제들이 그러했듯 로마를 장악하고 자신의 의도에 따를 허수아비 교황을 선출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 같았다.
오토 4세가 이탈리아를 침범하자 의도치 않게 허를 찔린 셈이 된 교황은 또 다시 오토 4세를 파문했다. 한편 오토 4세가 파문당하자 기회를 엿보던 친 호엔 슈타우펜 파 귀족들은 프리드리히 2세를 새로운 독일왕으로 선출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 했듯이 교황의 진정한 의도는 황제권을 분열시켜 교권을 수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둘 간의 대립은 불가피했다.
1212년 프리드리히 2세는 마인츠에서 독일 왕으로 대관식을 가졌다. 그러나 아직 독일내에서는 남부 지역만 프리드리히 2세를 지지 했으며 북부 독일 지역은 파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오토 4세를 지지했다. 결국 전쟁을 통해서만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는데 이 전쟁은 뜻밖에도 프리드리히 2세와 오토 4세 사이의 전쟁이 아니라 프랑스 영토에서 발생한 필립 2세(필리프 2세)와 영국, 플랑드르, 오토 4세의 연합군 사이의 전투였던 부빈 전투 (Battle of Bouvines)였다.
1214년의 부빈 전투는 프랑스의 카페왕조와 이에 반대하는 연합군인 영국의 실지왕 존, 플랑드르 백작, 그리고 오토 4세(그는 존왕의 조카였다)의 전투였다. 이 전투는 프랑스의 압승으로 끝났다. 이로써 프랑스는 자국 영토내 막대한 영국왕의 영지를 몰수하는데 성공했으며 이듭해 존왕은 마그나 카르타(대헌장)에 서명하게 된다. 오토 4세는 이 패배 이후 급속히 몰락했고 1218년 사망한 후에는 더 이상 벨프가는 예전같이 강력한 적수는 될 수 없었다.
더욱이 1216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죽고 이보다 덜 현실주의적 교황인 호노리오 3세가 즉위하자 신성 로마 제국을 재건하려는 프리드리히 2세의 노력에도 점차 서광이 빛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죽기 전에 실패한 4차 십자군의 실수를 만회하고자 성지를 향한 새로운 십자군 운동을 주장했다.
그 뒤를 이은 호노리오 3세는 카타리파의 새로운 반란 보다는 십자군에 더 관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프르드리히 2세는 사실 독일왕으로 즉위하기 전에 인노켄티우스 3세에게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기로 약속한 바가 있다. 그리고 1215년에도 십자군 원정에 참가하는 조건으로 교황의 지지를 받아가며 다시 독일왕에 선출된 바가 있다. 이 단계에서는 교황도 그냥 기정사실을 인정해 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더는 독일에 프리드리히 2세에 맞설 유력 군주가 없었다.
아무튼 프리드리히 2세에게 더 중요한 것은 신성로마 제국 재건이었지 저 멀리 있는 예루살렘 회복(사실 성공 가능성도 희박해 보였다)이 아니었다. 이런 배경에서 프리드리히 2세의 소극적 참여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사실 그는 5차 보단 6차 십자군에서 더 중요하다. 그러나 아예 병력을 전혀 보내지 않으면 대놓고 약속을 어기는 셈이 되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2세는 그 대신 성지로 갈 병력을 바바리아 공작 루드비히 1세(Duke Louis I of Bavaria )에게 지휘하도록 명령했다. 한편 두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와 호노리오 3세)는 프리드리히 2세 말고도 일단 유럽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소집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인 덕분에 다른 유력한 군주들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서유럽 기독교 사회에 큰 충격을 안긴 4차 십자군 이후 실추된 교회와 십자군의 명예와 성지 수복의 대의를 살리기 위해서 두 교황(인노켄티우스 3세와 호노리오 3세)는 백방으로 새로운 십자군을 모집하기 위해 노력했다.
5차 십자군의 최초 계획은 1208 년부터 있었다고 한다. 당대에는 상당히 현실주의적 정치인이었던 인노켄티우스 3세는 예루살렘 수복은 물론 아이유브 제국 해체를 염두에 두고 계획을 추진했다. 아이유브 제국이 건재 하는 한 예루살렘 수복은 설령 성공하더라도 유지는 불가능 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사실 3차 십자군 시절 사자심왕 리처드의 견해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리처드가 무리해서 예루살렘을 공격하지 않은 것도 그것을 유지할 가망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아이유브 제국의 심장부인 이집트를 점령하거나 적어도 아이유브 제국을 해체해야 했다.
1213년 교황 인노센트 3세는 새로운 교서인(Quia maior)를 발표해 5차 십자군의 모집을 선언했다. 그러나 십자군 모집은 지지부진했다. 왜냐면 당시 프랑스에서는 실지왕 존과 필립 2세가 대립하고 있었고 독일 역시 앞서 소개한 대로 오토 4세와 프리드리히 2세가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215년 11월 15일에 있었던 4차 란테란 공의회(Council of the Lateran, 아마도 중세에 열린 공의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공의회였다)의 시기에 즈음 하여 교황은 새로운 교황 교서인 Ad Liberandam 를 발표하고 새로운 십자군 모집을 다시 역설했다.
인노켄티우스 3세가 죽기 전 가장 역점을 둔 사업은 두말할 것 없이 자신과 교회의 실추된 권위를 다시 세워줄 십자군이었는데 이는 인노켄티우스 3세의 두 가지 모순된 측면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사실 인노켄티우스 3세는 누구보다 정치적인 교황으로 하느님의 나라보다 인간 세상에 더 큰 관심이 있었다. 성직자 치곤 극도로 현실주의적인 이 인물은 모든 일을 추진할 때 현실 감각을 가지고 일을 추진했고 이점은 십자군 원정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사실 그가 목표로한 아이유브 제국 해체와 예루살렘 수복은 전혀 현실적으로 가능한 목표가 아니었으며 그가 생각한 5차 십자군의 모습 도 현실적이지 못했다.
1차 십자군이 성공한 것은 사실 그저 당시 셀주크 투르크 제국이 자체적으로 와해된 덕분에 혼란한 틈을 적절히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역사가가 지적했듯이 이것은 이슬람 무정부 상태에 대한 프랑스 군주제의 승리에 지나지 않았고 이슬람 무정부 시기가 끝나면서 자연스럽게 붕괴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십자군 국가들은 사실 현지 이슬람교도들은 물론 토착 기독교도, 유태인들로부터도 지지를 못 얻을 만큼 종교적, 인종적으로 독단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노켄티우스 3세는 1차 십자군이 성공한 것이 각국의 왕이나 황제가 참가하지 않고 대신 성직자가 군대를 이끌었기 때문이라는 완전히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한 번도 십자군이 그런 형태의 군대였던 적은 없지만 인노켄티우스 3세는 종교적으로 성지 수복에 대의에 고양된 기사들과 병사들로 이루어진 군대가 성령으로 충만한 성직자에 의해 인도되고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따르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5차 십자군 역시 주요 국왕들에게 크게 의존할 수밖엔 없었다. 그리고 이들 국왕들은 물론 교황의 명령에 순순히 따라 줄 의도는 없었다. 다 나름의 다른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각 국의 5차 초기의 십자군 모집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프랑스
전통적으로 프랑스는 십자군의 가장 중요한 공급처였다. 이는 프랑스에서 특히 봉건제가 잘 발달하고 기사들이 많았던 것과도 관계가 있다. 하지만 5차 십자군에서는 원하는 만큼의 기사를 모집할 수 없었다. 그것은 다시 시작된 알비주아 십자군으로 인해 십자군에 가담할 기사와 병사들이 분산되었기 때문이었다.
교황은 앞서 이야기 한데로 교황권에 의한 지도를 받는 군대를 조직할 목적으로 새롭게 예루살렘의 라틴 교회의 주교(라틴 교회란 명칭은 예루살렘 현지에 동방 기독교 및 토착 교회와 구분하기 위한 단어다)로 메렝쿠르의 라울(Raoul of Merencourt)을 임명하고 프랑스에서 십자군을 조직하는 일에 착수했다. 또 교황은 4차 십자군의 교훈을 되새겨 베네치아와는 손을 잡지 않는다는 원칙도 세웠다. 마지막으로 교황은 십자군이 1216년 브린디시 항에서 출발한다는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웠지만 결국 교황의 죽음으로 이는 모두 실현되지 못했다.
프랑스에서는 5차 십자군 기간 동안 이전과 비슷하게 여러 차례 십자군 병력이 소집되어 성지로 향했지만 초기에 그 세력은 이전에 비해 미미했다. 알비주아 십자군 외에도 프랑스-영국간의 전쟁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헝가리
5차 십자군 초기에 가장 특이한 일은 바로 헝가리가 대규모 병력을 가지고 참전한 일이다. 헝가리의 엔드레 2세(Andrew II of Hungary)가 바로 원인이었는데 그는 이전에도 한번 언급한 벨라 3세의 아들로 그의 형인 에메릭과 그의 어린 아들을 살해한 후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단독 국왕 자리에 오른 야심가였다.
그는 남쪽으로 자신의 왕국을 확장시킬 야심을 품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큰 장애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역시 남쪽의 라틴제국 (이전의 비잔티움 제국의 파편)을 통합하려는 야심을 가진 2차 불가리아 제국 이었다. 앞서 4차 십자군에서 언급했듯이 본래 비잔티움 제국을 호시탐탐 노린 것은 2차 불가리아 제국이 먼저 였는데 십자군과 베네치아에게 새치기 당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앞서 라틴 제국을 위기로 몰고 간 차르 칼로얀은 죽었지만 그의 두 조카인 보릴(Boril, 1207년∼1218년)과 차르 이반 아센 2세 (Ivan Asen II, 1218년∼1241년)는 계속 정복 사업을 전개해 발칸 반도 통일을 목전에 둔 듯 했다.
여기에 위기를 느낀 라틴 제국과 헝가리 왕국은 자연스럽게 동맹을 맺었는데 1215 년에는 헝가리의 엔드레 2세가 라틴 제국의 2대 황제인 앙리 1세(라틴 제국 초대 황제 보두앵 1세의 동생. 참고로 이전 설명했듯이 보두앵 1세는 칼로얀에 의해 황제가 된지 1년만에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사망)의 조카인 욜란다 (Yolanda) 와 결혼했다.
그런데 때마침 1216년 앙리 1세가 후사 없이 죽자 역시 야심가인 안드레 2세는 자신이 제위에 오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주요 가신들이 이 의도를 알 수 없는 외국 군주 대신 인척 관계에 있는 피에르(Peter of Courtenay)를 새로운 황제로 옹립했다.
이와 같은 혼란한 시기에 그가 남쪽으로 십자군 원정을 계획했던 것은 아마도 라틴 제국 제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안드레 2세 역시 그냥 피에르를 시인하는 수 밖에 없었으며 아버지 벨라 3세때 행해진 십자군에 대한 맹세를 지키기 위한 목적 때문에 참전을 결심했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확실한 사실은 그가 5차 십자군에서 가장 많은 2만 명의 기병을 포함 3만 2천의 병력을 데리고 참전했으며 과거 베네치아가 4차 십자군에서 헝가리 왕국의 보호 하에 있던 자라 항을 공격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병력 수송의 필요성에 의해 베네치아와 손잡고 성지로 병력을 실어 나르기로 합의했다는 사실이다. 이미 여기에서부터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의도는 전혀 지켜지지 못했다.
독일
독일에서는 아직 황제의 관을 쓰지 못하고 단지 시칠리아 왕 및 독일왕(이전에 로마인의 왕이라고 했던)에 자리에 오른 프리드리히 2세가 십자군에 참전하기로 맹세한 상태였다. 신성로마 제국황제는 당대에는 왕위의 왕으로 생각되어 이런 왕위에 오른 후 다시 교황으로 부터 관을 받아 황제로 오르는 것이 관례였다.
아무튼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에게 참전을 약속했고 이 경우엔 교황도 참전을 꼭 바라고 있었다. 프랑스와는 달리 독일은 황제의 참여 없이 대규모 병력이 참여한 적이 없기도 하다. 그러나 사실 프리드리히 2세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다행히 교황이 1216년 승하하자 프리드리히 2세는 이 약속을 사실상 파기했으며 소수의 병력만을 보냈을 뿐이었다.
오히려 이시기 다시 병력을 대거 이끌고 참여한 독일의 유력 군주는 3차 십자군에서 사자심왕 리처드 1세를 구금했던 오스트리아 공작(Duke of Austria) 레오폴트 5세의 아들인 레오폴트 6세였다.
따라서 5차 십자군 초기에 병력의 대부분을 이룬 것은 특이하게도 헝가리 군대였다. 하지만 5차 십자군 역시 초기부터 각각의 군대는 전혀 통일성 없이 따로 움직였다. 사실 5차 십자군 자체가 유기적인 하나의 군사 행동 보다는 그냥 이시기 있었던 독립된 십자군 군대를 총칭하는 단어였다.
4. 엔드레 2세의 항해
엔드레 2세는 꽤 많은 병력을 지휘한 것 치고는 비교적 신속하게 병력을 큰 무리 없이 이동시켰다. 베네치아 덕에 해로를 통해 큰 트러블 없이 군대가 성지까지 도달할 수 있었는데 과거 성지까지 가는 것만도 만만치 않은 문제였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진보였다.
그것이 가능해 진 것은 물론 4차 십자군 이후로 베네치아가 그토록 원했던 아드리아 해에서 동지중해에 이르는 안전한 해상로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이는 4차 십자군의 전리품으로 크레타를 비롯 에게해의 여러 섬과 항구를 장악한 데다 다른 경쟁 도시 국가인 피사나 제노바의 힘을 베네치아가 압도한 데서도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엔드레 2세와 그의 군대가 베네치아 함대에 승선한 것은 1217년 8월 23일 스팔라토(Spalato - 중부 달마티아 지역의 도시로 현재의 크로이티아 해안도시)에서 였다고 한다. 그 후 매우 신속한 항해를 통해 10월 9일에는 키프로스 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서 엔드레 2세와 그의 대병력은 과거 3차 십자군 최대의 격전지였던 아크레 항으로 도달했다.
아크레 항에는 예루살렘 왕국의 왕으로 올라 있던 브리엔의 장 (장 드 브리엔, John of Brienne)과 안티오크 공국의 보에몽 4세가 그들을 기다렸다. 여기서 잠시 설명을 위해 시간을 다시 앞으로 돌려서 5차 십자군 직전까지 우트르메르의 상황에 대해서 알아보자.
5. 앙리 1세의 통치
3차 십자군이 종료된 1192 년의 평화 협상 이후 결과적으로 십자군 국가에 남은 것은 그 크기가 축소된 트리폴리 백국과 안티오크 공국, 그리고 해안가의 도시들을 포함하는 예루살렘 왕국의 잔재들뿐이었다. 사실 예루살렘 왕국과 에데사 백국을 비롯한 다른 십자군 국가들이 건재하던 시기에도 주변의 다수의 무슬림 국가들에 비해 십자군 국가들은 열세한 상황이었다. 그러던 것이 주변부가 대부분 함락된 이후에는 사실 유럽에서의 원조가 아니었더라면 이들 십자군 국가들의 잔존 세력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이 시기 예루살렘 왕국은 리처드 1세 시기 확보한 해안가의 좁은 교두보에 지나지 않았다. 현대의 이스라엘 및 레바논 해안선 수백 km에 걸친 이 띠모양의 왕국의 수도는 3차 십자군에서 특히 난공불락이자 금성탕지의 요새임을 입증해 보인 아크레였다. 기타 자파, 아르수프, 카이세리아, 티레, 시돈, 베이루트 등이 이 왕국에 속한 도시였다.
오락가락 하던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는 3차 십자군이 끝날 무렵 샹파뉴의 앙리(예루살렘 왕국 국왕으로는 앙리 1세이고 샹파뉴 백작으로는 앙리 2세)에게 돌아가 있었다. 그는 신규 부동산을 구매해 새로운 키프로스 왕국의 태조가 된 전 예루살렘 왕국 국왕인 뤼지냥의 기(Guy de Lusignan, 1160년∼1194년)와 자연스럽게 대립했다. 왜냐하면 기는 본래 예루살렘 왕국의 지배자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대립은 1194년 기(Guy)가 죽으면서 해결되었다. 이 인물은 앞서 이야기 했듯이 기가 막히게 운이 좋은 인물로 한 나라의 태조가 되었던 인물이었다. 후사 없이 죽은 기(Guy)의 뒤를 이은 것은 아말릭 1세(Amalric I)로 사실 그는 기(Guy)의 형이었다. 본래 그는 앙리 1세와 갈등 관계에 있었으나 신속하게 화해한 후 키프로스 섬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비잔티움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당대의 가장 강력한 군주였던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6세의 가신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동생보단 형이 더 뛰어나서 이와 같은 기민한 외교적 조치 및 민심 안정 조치로 아말릭 1세는 300년 키프로스 왕국의 기반을 다졌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우리식으로 말하면 태종과 같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이렇게 되서 1190년대에는 키프로스 왕국, 예루살렘 왕국과 트리폴리 백국, 안티오크 공국 등이 그럭저럭 살아남아 이슬람 국가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았다. 이들이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아이유브 제국의 상황과도 연관이 있었다.
전설적인 살라딘이 죽고 난 후 그의 영토는 형제와 아들들에게 분배되었다. 수도인 다마스쿠스는 아들인 알 아흐달(Al-Afdal ibn Salah ad-din)이 물려받았고 이집트는 차남인 알 아지즈 (Al-Malik Al-Aziz Osman bin Salahadin Yusuf)가 그리고 알레포는 아즈 자히르(Az-Zahir Ghazi)에게 상속되었다. 살라딘은 금욕적인 인물이라는 현대의 일반적인 인식과는 다소 다르게 당대의 다른 무슬림 군주들처럼 여러 아내를 거느려 아들이 무려 17명이나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자식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자식들에게 재산 분배하듯이 왕국을 분배한 건 잘못이었다. 이로 인해 형제들끼리 서로 싸움과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 시기 아이유브 제국을 서서히 장악한 인물은 바로 살라딘의 유능한 동생인 알 아딜(al-Malik al-Adil Sayf al-Din Abu-Bakr ibn Ayyub, 1145년∼1218년) 이었다. 3차 십자군에서도 등장한 알 아딜은 사실 형인 살라딘에 이어 아이유브 제국을 지배한 2대 술탄이었다.
그는 최초 다마스쿠스 총독으로 주변부를 지배했으며 알 아흐달이 1196년 죽은 이후 시리아를 알 아지즈가 1198년 죽은 후에는 이집트까지 넘보게 되면서 1200년에서 1218년 죽을 때까지 대략 20년 정도 이집트와 시리아의 지배자가 되었다. 살라딘은 아들은 많았지만 사실 동생인 알 아딜이 가장 유능했던 셈이다.
알 아딜은 현명한 지배자로 지금 해안선에 겨우 붙어 있는 십자군 국가들을 밀어 내려고 들면 다시 유럽에서 새로운 십자군이 조직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3차 십자군에서 십자군과 많은 협상을 해본 그답게 그는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즉 해안선의 십자군 국가들을 괜히 자극하지 않고 이를 오히려 대 서방 무역 창구로 삼아 서방과의 괜찮은 수익이 남는 우호 관계를 수립했던 것이다. 앙리 1세도 괜히 승리가 보이지 않는 전쟁을 피하려 했으므로 덕분에 한동안 평화가 유지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평화는 1197 년이 되자 깨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앞서 설명했듯이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6세가 남쪽으로 원정을 떠나면서 성지까지 원정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황제가 남 이탈리아의 반란을 정리하는 동안 다른 독일 군대가 성지에 도달하여 무슬림들에 대한 군사 공격에 나섰는데 이는 오히려 앙리 1세의 걱정만 키울 뿐이었다. 왜냐하면 고생해 이룩한 우호 관계가 깨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우려는 곧 현실이 되었다. 알 아딜은 병력을 소집 자파를 공략하기 위해 군대를 출정시켰다. 이에 앙리 1세 역시 군대를 모아 자파를 구원하려 했지만 뜻하지 않은 사고로 이를 성사시킬 수 없었다. 그것은 바로 앙리 1세가 사고로 인해 발코니 쪽으로 떨어지면서 추락사 한 것이었다. 31세의 젊은 왕치곤 너무 허무한 죽음이 아닐 수 없었다.
6. 아말릭 1세의 통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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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7년 뜻하지 않은 왕이 죽음으로 예루살렘 왕국은 다시 위기에 처했다. 벌써 3번째 미망인이 된 팔자가 꽤 센 여자인 이자벨라 왕비는(첫번째 남편은 험프리 4세, 두 번째는 몽페랏의 콘라드, 세번재는 앙리 1세. 이 중에서 험프리 4세와는 이혼하고 나머지는 남편이 일찍 죽은 경우) 다시 왕국의 존속을 위해 4번째 남편을 구해야 하는 상황에 청했다. 아마 본인은 더 이상 그러고 싶지도 않았겠지만 당시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재혼은 하기 싫어도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때 마침 키프로스 왕국의 아말릭 1세 역시 아내가 죽어서 홀아비가 되었다. 이에 독일측에서는 이 둘이 결합해서 아이유브 제국의 위협에 대처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사실 이 시점에서는 그게 가장 적절하긴 했지만 처음에 아말릭 1세는 이에 반대했다. 결국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와 키프로스 왕국의 왕위를 분리하기로 합의하면서 아말릭 1세는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예루살렘 왕국 국왕으로는 아말릭 2세) 자리에 올랐다. (아마도 이는 가망이 없어 보이는 예루살렘 왕국에 자신의 신생 왕국이 끌려 들어가는 사태를 막기 위한 고육지책(苦肉之策)이었을 것이다)
그는 우트르메르에서 꽤 오랜 경험이 있는 프랑스 귀족으로 이미 현지에 토착화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앞서 이야기 했듯이 훨씬 현실 감각이 뛰어나고 통치력이 우수했으므로 굳이 우세한 무슬림 세력과 싸우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따라서 1198년에 무슬림과의 휴전 협상을 5년 더 연장했다.
사실 양측에서 서로에 대한 군사 행동이 이 기간 전혀 없지는 않았다. 1197년 하인리히 6세가 뜻하지 않게 급사하면서 신성로마제국군은 돌아갔지만 양측에서 서로를 적대시 하는 세력들이 여전히 많았기 때문에 양측의 군사 충돌이 계속되었다. 특히 현지 사정에 어두운 소수의 십자군 병력이 우트르메르로 들어왔다가 패배해서 떠나는 일이 많았다. 다행이 이런 일들이 대세에 영향을 미치진 못했기 때문에 1204년에 아말릭 1세는 다시 휴전 협정을 6년 더 연장했다.
이렇게 해서 일단 위태위태하던 십자군 국가는 앙리 1세와 아말릭 1세라는 현실 감각이 뛰어난 지도자에 의해 앞으로 1291년 까지 버틸 수 있는 근간을 마련하게 되었다. 더욱이 현실적인 능력과 감각이 역시 뛰어난 알 아딜 역시 굳이 무리해서 이들을 쫓아내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큰 싸움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차라리 1204 년에 4차 십자군이 성지에 도달하지 않은 것이 더 다행으로 여겨질 정도였다.(다만 현지에서는 4차 십자군을 꽤 기대했었다고 한다. 이들 중 상당수가 성지 회복을 위해 우트르메르로 온 유럽인이었기 때문이다)
아말릭 1세는 1205년 아마도 이질에 걸려 사망했다. 이사벨라 왕비도 이번에는 아말릭 1세와 비슷한 시기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이번에는 5번째 결혼을 하지 않아도 됐다. 그의 사후 키프로스 왕위는 아들인 위그 1세에게, 그리고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는 아사벨라 왕비와 몽페랏의 콘라드 사이의 딸인 마리아(Maria of Jerusalem)에게 돌아갔다.
7. 장 드 브리엔의 즉위
아말릭 1세의 사후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는 마리 왕녀에게 돌아갔다. 그녀는 1192년 생으로 아버지는 이전에 언급했듯이 예루살렘 역대 국왕 중 최단 기간 재위 기간을 지닌 몽페랏의 콘라드였다. 그래서 그녀는 몽페랏의 마리(Maria of Montferrat)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아무튼 1205 년에 여왕으로 즉위 당시 나이는 불과 13세에 지나지 않아 불안한 십자군 왕국을 다스리기는 무리인 것으로 누구나 생각할 수 있었다. 따라서 다시 유럽에서 마리 여왕의 적합한 배우자를 물색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남편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던 많은 이들이 길지 못한 생애를 마쳤기 때문인지 대개 선뜻 나서는 후보가 없어 이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더구나 신랑감을 고르는 조건 역시 제법 까다로웠다. 신랑 후보는 풍부한 군사적 경험과 함께 많은 병력을 이끌고 현지로 올수 있으며 미혼이어야 했지만 이런 후보는 찾기 쉬운 게 아니었다.
결국 예루살렘 왕국에서 보낸 사절단이 2년에 걸쳐 찾은 후보는 장 드 브리엔(John of Brienne)이었다. 사실 장 드 브리엔은 좋은 신랑감이라곤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워낙 나서는 후보가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장 드 브리엔이 좋지 못한 신랑감인 이유는 여러 가지었다. 그는 샹파뉴 지역의 브리엔 백작의 차남으로 태어나 영지를 상속받는 대신 성직자로 나갈 것을 권유 받았으나 기사가 되고 싶어 전직한 인물로 용감한 인물이긴 했지만 딱히 아주 뛰어난 군사적 명성을 쌓은 인물도 아니었다. 그리고 물론 가지고 있는 병력도 얼마 없었다. 무엇보다 더 꺼려지는 일은 1155년 생으로 당시 나이가 이미 55세 정도 되었다는 사실이었다.(다른 기록에 의하면 나이가 60 이 넘었었다는 설도 있다. 1148년생이라는 주장도 있다. 다만 1237년 까지 살았던 점을 감안하면 1155년생 설이 약간 더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프랑스 국왕 필립 2세는 이 인물을 좋아했으며 - 자신의 아래 있던 귀족으로 예루살렘 왕국을 간접 영향권 아래 둘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 적지 않은 지원금을 주어 그를 밀어주었다. 예루살렘 왕궁은 이 지나친 호의를 결국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는데 물론 어쩔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른 대안도 없는데다 계속 처녀인 채로 여왕이 있어서는 평균 수명이 극히 짧은 당시를 생각해보면 예루살렘 왕국의 대가 끊길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1210년 마리와 결혼한 장 드 브리엔은 당시 관습에 따라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에 올랐다. 이렇게 참으로 끈질기게도 태조 고두프루아 드 부용부터 시작된 예루살렘 왕국은 어떻게든 유지 존속되었다.
예루살렘 왕국은 남자 후계자가 없거나 금방 죽어 모계로도 그 계통이 계속해서 이어졌고 여왕이나 왕비(사실 우리는 구별하지만 그냥 Queen)의 남편 자격으로 왕국을 통치한 예가 많았기 때문에 그 왕위 계승도가 꽤 복잡하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1210년부터는 장 드 브리엔의 치세가 시작된다. 그 역시 처음에는 현지 사정을 모르고 별 의미 없는 군사적 도발을 감행해 보지만 이내 그것이 어리석다는 사실을 깨닫고 1211년 술탄 알 아딜과 5년간의 평화 협정을 맺게 된다. 그러나 또 한편 새로운 십자군의 모집이 준비하고 있던 인노켄티우스 3세에게는 비밀 서신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적어도 대규모 십자군 병력을 지원 받지 못하면 승산이 없다는 것 정도는 깨달았던 것이다.
사실 장드 브리엔은 위대한 통치자의 반열에는 들기 힘들었지만 적어도 현명한 지도자에는 속할 수 있었다. 그 나이에 이르기 까지 걸출한 업적을 세운 적이 없는 인물이었지만 왕위에 오른 후에는 적어도 어리석은 짓은 저지르지 않을 지혜를 갖췄던 것이다. 아마도 그 때까지 아무 업적도 못 세운 이유는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뜻하지 않은 위기가 닥친다.
1212년 마리 여왕은 유일한 딸인 욜란다 (Yolande)를 출산한 직후 산욕열에 시달리다 세상을 뜨게 된다. 당시 의학 수준이라고 해봐야 별 볼일이 없었고 출산은 산모나 아기 모두에게 꽤 위험했다. 그런데 장 드 브리엔의 권력 기반이 마리였기 때문에 그녀가 죽고 나자 그의 입지는 다소 약화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장 드 브리엔은 동요하지 않고 딸인 욜란다(즉위후엔 이사벨라 2세)를 근거로 권력을 잡고 더 나아가 주변 기독교 국가와의 우호를 다지기 위해 아르메니아 왕국의 공주인 스테파니 (Stephanie)와 결혼했다. 그것은 물론 아르메니아 왕국의 레오 2세와의 동맹을 위함이었다.
장 드 브리엔은 현명하게 1217년 헝가리의 엔드레 2세가 대 병력을 이끌고 올 때 까지 참을 성 있게 기다렸다. 그리고 헝가리의 엔드레 2세가 도착한 시기에 그는 안티오크 공국의 보두앵 4세와 키프로스의 위그 1세(아말릭 1세의 아들)와 함께 동맹을 맺어 상당한 규모의 연합군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주력은 헝가리 군이었지만 장 드 브리엔 역시 나머지 십자군 국가의 병력 및 기사단 병력을 규합했다.
당시에 기사단은 이미 12세기부터 꽤 활약 중이었던 구호 기사단과 성전 기사단 외에 새로운 튜튼 기사단이 합류했다.
8. 튜튼 기사단(Teutonic Knights)
튜튼 기사단(Order of Brothers of the German House of Saint Mary in Jerusalem)은 흔히 독일 기사단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름 처럼 독일인이 중심이 된 기사단이다. 국내에서는 튜턴 기사단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십자군 시절 3대 기사단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설립된 시기는 1190 년으로 다른 구호 기사단과 성전 기사단 보다 이후이며 따라서 3차 십자군까지 이 기사단은 전혀 참전하지 않았다.
튜튼 기사단이 창건된 것은 12세기 말 아크레에서 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기엔 이미 새로운 기사단이 설만한 자리가 우트르메르에 마땅치 않았다. 3차 십자군의 결과로 예루살렘 왕국이 극도로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1211년 튜튼 기사단은 본부를 트랜실바니아로 이전하고 여기서 헝가리 왕국이 킵차크(Kipchaks : 투르크계 유목 민족으로 그 서부 부족을 쿠만 족이라도 불렀다.) 의 침공을 막는 것을 도왔다.
1225년 헝가리 국왕 대신 교황의 지휘를 받기로 주장한 후 기사단은 헝가리를 나와야 했지만 기사단장 헤르만 폰 살차(Hermann von Salza)의 지휘아래 프러시아 공략에 힘써 발트해 방면에 거대한 기사단령을 건설한다. 이후 이 영토는 프로이센과 독일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튜튼 기사단을 순식간에 유럽의 주요 기사단 중 하나로 만든 장본인은 바로 헤르만 살차 였다. 그는 4대 기사단장으로 1210 년 기사단장에 선출된 이후 뛰어난 지도력은 물론 기민한 외교적 능력으로 명성을 떨쳤다.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의 돈독한 관계는 물론 교황 호노리우스 3세와의 관계도 좋았는데 이를 적절히 활용하는 외교적 성과로 결국 튜튼 기사단이 3대 기사단에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프러시아 지역의 기독교화를 내건 정복 활동 역시 그의 작품이었다.
헤르만 폰 살차는 1197년의 독일 십자군 활동에도 물론 참여했으며 아말릭 1세의 대관식에도 참여했다. 이후 그는 1217 년의 5차 십자군에도 다른 구호 기사단 및 성전 기사단과 함께 본격 참여해서 정규 넘버링 십자군 사상 최초로 3대 기사단이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다만 이 시기에 튜튼 기사단이 다른 기사단 보다 더 규모가 큰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