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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 이야기

존 왕(John, King of England, 1166년∼1216년)

작성자管韻|작성시간20.01.22|조회수553 목록 댓글 0


존 왕(John, King of England, 11661216)

 








 

 

잉글랜드의 왕으로 그 유명한 사자심왕 리처드 1세의 남동생이자 헨리 2세의 막내아들이다. 별명인 랙랜드(Lackland)는 원래 어렸을 때 봉토를 받지 못하여 붙은 것으로 결지왕(缺地王)’이라 해야겠지만, 프랑스 쪽의 영토를 대폭 잃은 일이 사람들의 기억에 강렬히 새겨졌기에 실지왕(失地王)이라는 표현으로 많이 쓰이는 듯하다. 결지왕이라는 별명이 좀 낯설어서 무영토왕(無領土王)’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그나마 그가 남긴 유산이라면 귀족들의 협박에 마그나카르타를 남겼다는 것이다.

 

영국의 많은 왕들 중 사후 그의 이름을 가진 왕이 없는 왕이다. 그렇기 때문에 존 1세로 불리지 않는다. 스티븐 왕, 빅토리아 여왕과 비슷한데, 빅토리아 여왕은 여왕이 드물다 보니 같은 이름을 가진 여왕이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은 것에 불과하지만, 존 왕은 영국 정부 행사에서조차 무능한 왕으로 소개되고 있어서 앞으로도 존이라는 이름의 왕은 나오지 않을 테니 아마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존 왕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것 같다(스티븐 왕도 사촌에게 돌아갈 왕위를 빼앗으려다 내전으로 번진 과오 때문에 피휘되는 이름이 되었다.).

 

원래 부왕 헨리 2세의 다섯 아들 중, 가장 총애하는 막내아들이었다. 헨리 2세는 존에게 알짜 영지인 아키텐 지방을 물려주려고 무지 애를 썼다. 심지어 4남 제프리의 상속분을 없애서라도 아키텐을 물려주려 하자, 세 아들 헨리, 리처드, 제프리와 아내 엘레오노르가 결사반대하며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반란은 결국 헨리 2세에게 진압되지만 결국 아키텐의 상속은 포기해야 했으며 글로스터 백작의 상속녀와 결혼시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이렇게 아버지가 총애한 존은 정작 형 리처드 1세가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원래는 헨리 2세에 붙었지만 전황이 리처드 쪽으로 기울자 아버지를 배신하고 형에게 붙었다. 참고로 이 일로 헨리 2세가 엄청나게 실망해 사망의 원인이 되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이후, 리처드 1세가 십자군 원정에 나가 있는 동안, 자신이 리처드 1세의 후계자이자 실질적으로 왕조의 지배자임을 내세워 왕이 되려고 이리저리 꼼수를 부리고 필리프 2세에게 붙어, 형을 배신하고 반역질을 시도했지만 실패한다. 여담으로 이때 리처드가 돌아온다는 말을 들은 필리프 2세가 존 왕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 가관인데 그대의 몸을 돌보시오. 악마가 풀려났소.(Look to yourself. the devil is loose)” 1194, 잉글랜드로 돌아온 리처드는 엘레오노르의 간곡한 설득에 당시 존이 27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사악한 신하에게 휘둘린 어린애였을 뿐이라면서 존을 용서했다.

 

1199년 리처드 1세 사후에, 넷째 형인 제프리의 아들이자 브르타뉴 공작이던 아서와 왕위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 프랑스 왕인 필리프 2세는 처음에는 아서를 지지했지만, 존에게 거액의 뇌물과 벡쌍, 에브휴 두 영지 그리고, 왕세자 루이의 결혼 상대 카스티야의 블랑슈의 막대한 지참금을 받고, 존 지지로 입장을 바꿔 존이 즉위하게 된다.

 

한편 1200년 첫 번째 부인인 글로스터의 이사벨과 이혼하고, 이미 루지냥의 위그 9세와 약혼한 앙굴렘의 이사벨과 재혼한다. 사실 보상만 잘 해줬다면 별 문제없이 넘어갈 수도 있었던 일이었건만 존 왕은 그럴 깜냥이 못되었다. 이에 루지냥가() 전체가 존 왕에게 반기를 들으나 실패하고 주군이던 필리프 2세에게 제소하여 필리프 2세는 존을 프랑스의 법정에 소환했다. 원칙적으로 잉글랜드의 프랑스령은 프랑스 국왕에게서 봉토를 수여받은 형태여서 프랑스령에 한정해서는 필리프가 주군이 되고 존은 봉건 가신의 입장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존은 프랑스의 법정에 갈 마음은 전혀 없었고, 출두 기일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필리프는 이를 기회로 존 왕이 가지고 있던 잉글랜드령을 몰수하고 이 영지를 아서에게 내렸다. 물론 몰수령을 내린다고 호락호락 영토를 내놓을 리는 없으니 이는 어디까지나 명분이었고, 실제로는 필리프의 존에 대한 선전포고라고 할 수 있다.

 

1203, 아서는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를 사로잡기 위해 공격하지만, 존 왕은 신속히 역공을 가해 오히려 아서를 포로로 잡는데 성공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존 왕의 강력한 동맹이던 앙주 영주를 무시하는 행동을 했고, 거기다 포로로 잡은 귀족들을 가혹하게 취급했는데, 태양빛 한 점 안 들고 침수되서 썩은 물이 바닥에 흥건한 지하감옥에 가둬두어 굶기고 22명이나 옥사하게 만든다. 3차 십자군 때 활약했던 리처드 1세의 부하들도 이때 포로로 붙잡혀서 아사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당대 관념에서 전쟁 포로 귀족 22명을 죽이는 것이 아주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있을 수 없는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죽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에 더해 아서가 포로로 잡힌 상태에서 행방이 묘연해지자 잉글랜드와 프랑스에는 존이 아서를 죽였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마감(Margam) 수도원에는 존 왕이 아서를 붙잡고 술에 취해 직접 목을 졸라 죽여 버리고는 센느 강에 무거운 돌을 달아 던져버렸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 그냥 음모론이 아니라 현대의 역사학자들도 직접 죽였건 명령을 내렸건 존 왕이 아서를 죽였을 거라는 점에는 대부분 동의한다. 이 때문에 전투에서 이겼음에도 브르타뉴와 앙주의 영주들이 전부 프랑스 편으로 돌아서게 된다.

 

한편 필리프는 노르망디를 착실하게 하나씩 공략했다. 존은 이런 필리프를 상대하기 위해 노르망디의 가야르 성을 공성 중인 필리프군을 공격했는데 수군까지 동원해 필리프를 양면에서 공격하는 입체적인 작전이었다고 한다. 문제는 이론적으로는 좋아 보이는데 실제 수행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작전이라 실패했고 필리프 왕의 프랑스군은 노르망디 전체를 유린하였다. 그 결과 존 왕은 노르망디마저 상실해 아키텐을 제외한 프랑스령 전체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1205년에는 캔터베리 대주교 임명 문제로 교황 인노첸시오 3세와 대립해 1207년에는 잉글랜드 전체에 성무 정지, 1209년에는 존 왕에 대해 파문 선언까지 내려왔다. 이에 분노한 존 왕이 1209년부터 1211년까지 성직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교회의 소득을 국가에 귀속하기도 했는데, 1213년에는 교황이 아예 필리프 2세의 잉글랜드 침공을 지지하고 나서자, 결국 잉글랜드 전체를 교황에게 봉헌하는 형태로 간신히 용서를 받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지만 프랑스령 상실과 파문 소동 등으로 잉글랜드의 귀족과 평민 모두는 존 왕에게 정나미가 떨어졌다.

 

한편 존 왕은 프랑스령을 빼앗긴 것이 두고두고 억울했던지 1214년 잉글랜드 북부 귀족들의 높은 원성에도 불구하고 대대적으로 세금을 거두고 신성 로마 제국의 오토 4세와 플랑드르 영주 등을 끌어들여 프랑스령을 침공했다. 이론적으로는 존 왕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아키텐에서 프랑스 남부를 공격해 필리프의 발을 묶어두는 사이에 오토 4세의 신성 로마 제국군이 프랑스를 북부에서 공격하는 완벽한 작전인 듯했다. 그러나 프랑스 왕자 루이가 존 왕의 군대를 격퇴하여 아키텐으로 후퇴했고 신성로마제국-기타 영주 연합군이 진격이 늦어지자 필리프 2세가 북쪽 연합군을 요격에 나서 릴의 외곽 부빈에서 회전이 벌어졌다. 이 회전에서 연합군은 유리한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가뜩이나 인기가 없었는데 부빈에서의 패배는 막대한 세금을 낭비하고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 존 왕에게 결정타였다. 잉글랜드로 돌아온 존 왕에게 귀족들은 더 이상 세금을 못 내겠다고 반기를 들었고 그 결과가 바로 1215년에 맺은 마그나카르타였다.

 

재위 마지막에는 억지로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한 후 교황에게 호소해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을 파문하는 등 반격을 하였다. 이에 귀족들은 당시 프랑스 왕세자였던 루이 8세를 초빙해 잉글랜드 왕위에 앉히려 하였다. 그러나 1216년 존 왕이 급서하고 어린 헨리 3세가 즉위하여 반란은 흐지부지 되었다.

 

사인은 다름 아닌 과식이었는데, 정확히 말하면 이질이었다. 속이 좋지 않았는데 그걸 치료한답시고 익힌 고기와 과실주를 많이 먹는 돌팔이 처방을 자신에게 내렸다가 급체로 사망했다. 이래저래 막장. 리처드의 경우에는 일단 살해당한 거고, 부하가 병크를 터뜨려서 죽은 것이었다. 게다가 죽은 뒤에는 늑대인간이라는 소문이 퍼져서 사람들이 무덤을 파헤치고 배를 갈라보는 시체 훼손을 벌였다고 한다.

 

영국에서의 평가는 두말할 필요 없는 최악의 막장왕이지만, 전투 능력은 무딘칼 존이라는 조롱 어린 후세의 평가와는 달리 아주 무능하지는 않았던 걸로 보인다. 존은 직위 초기 내치나 행정 부분에서는 꽤 능력을 발휘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해군의 육성, 리버풀의 건설, 스코틀랜드, 웨일스에서의 지배 확립 등에는 일정 부분 업적이 있다고도 여겨진다.

 

일선에서의 지휘 능력은 상당히 뛰어난 수준이었다는 말도 존재한다. 왕자 시절 어머니가 미라쥬 성(프랑스 아키텐 소재)에서 프랑스군에 의하여 포위되었을 때 수백 기사들만을 이끌고 이틀 만에 130km를 주파, 기습하여 역으로 포위군의 지휘부를 제압한 일이나,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몽토방(프랑스 미디피레네 소재) 성채를 공성하여 함락시킨 전과가 있다. 따라서 야전 지휘능력은 최소 평균 이상은 되었으며, 의회에 의해 마그나 카르타가 성립되자 영국 남부로 피난하여 교황의 지지와 용병의 고용이 완료된 후 런던으로 진격하자 의기양양하던 귀족들 중 아무도 그의 군사를 막기 위해 선뜻 나서는 자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어찌어찌 중요한 길목의 요새 로체스터 성채에서 막기는 했지만.

 

그러나 최일선 군사 지휘관으로서는 그럭저럭 평균 이상일지도 모르나 노르망디에서의 공격 실패나 1214년의 실패 등으로 미루어 보면 최고 군사 지휘자로서의 전략적 판단에는 분명 적지 않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뭔가 작전을 세울 때는 양면공격 등 화려하고 멋져 보이는데, 작전이란 건 단순할수록 실행하기 쉽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단순하지만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작전을 세우는 형 리처드 1세나 전투보다는 모략에 능했던 군주였지만, 군사적 능력도 우수했던 필리프 2세와 다른 점이다.

 

또한 정치, 외교적으로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필리프와 전쟁 초기만 해도 잉글랜드의 프랑스령의 영주들은 존 왕을 따랐지만, 자신을 도와주던 영주를 무시한다든지 포로를 죽게 내버려 둔다든지 해서 얼마든지 제 편으로 삼을 수 있는 봉신들을 모조리 적으로 돌려버렸다. 리처드 1세는 자신을 열받게 하면 사정없이 밟아버리는 인간이었지만, 그 못지않게 이성적이라 쓸데없는 적을 만들지 않았다. 그는 치명상을 입고 죽어가는 중 그 상처를 입힌 병사를 용서해 주는 등,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관용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다.

 

리처드 1세가 벌여놓은 일들의 여파로 잉글랜드의 막장스런 내정사태를 감당할 수 없었다며 옹호하는 의견도 있는데 애초에 필리프가 지배한 영토는 존 왕이 지배한 영토의 반도 안 되었고 세금 수입도 그만큼 적었다. 게다가 존 왕이 세금을 적게 거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존 왕이 영지를 잃어버린 건 재정이 궁핍해 군대를 유지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프랑스령의 봉신들이 전부 필리프 2세에게 붙었기 때문인데 이것은 존 왕 개인의 인격적인 결함이 문제이지 잉글랜드의 내정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다.

 

그의 인기는 형 리처드 1세에 반비례하여 형편없이 낮으며 이미지도 상당히 좋지 않다. 대표적으로 아이반호나 로빈 후드 이야기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멜 브룩스의 못말리는 로빈 후드라는 코미디 영화에는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온 리처드 1세가 이제부터는 영국의 화장실을 존(john)이라고 불러라는 포고령을 내린다. 실제로 소문자로 시작하는 존(john)은 화장실이라는 속어다.

 

이미지가 하도 개판이라 이후 영국의 왕은 존(John)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게 되었다. 거기다 스코틀랜드도 존 베일리얼(John Balliol)이라는 왕이 잠시나마 잉글랜드의 괴뢰로 옹립된 일이 있어서 왕의 이름으로 존이라는 이름을 싫어했다는 일화도 존재한다. 그래서인지 스튜어트 왕조의 로버트 3세는 왕자 시절에는 이름이 존이었지만 이걸 꺼려서 로버트로 이름을 갈았다. 다만 이후의 플랜태저넷 왕조에 존이라는 이름의 왕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리처드 1세는 십자군 활동을 위해 잉글랜드에 막대한 세금을 부과했는데 그로 인한 민중의 궁핍까지 전부 존의 책임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다만 리처드 1세가 예루살렘으로 가다가 회군해야 했던 이유가 존의 반란 때문이라서 고생하고 성과 없이 돌아오게 만든 원흉인지라 책임이 있는 건 맞다. 거기다 이 사람도 막대한 세금을 거둔 건 마찬가지다. 다만 형이 거둔 세금까지 악평이 더해졌다는 것 정도. 의심이 많은데다가 귀족들과 싸우면서 찌질 하고 비겁한 이미지만 남게 되었다. 게다가 전쟁하면 맨날 져서 영토는 계속 줄어들고(...).

 

어쨌든 그의 성격에 심각한 결함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 화나면 두렵지만 굉장히 쿨했던 친형 리처드와는 다르게 매우 오만하였으며, 무엇보다 패자나 약자를 관용하는 정신이 전무했다. 이는 그의 온갖 무능과 패착이 겹쳐져 후세의 오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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