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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역사(Egypt History)

작성자管韻|작성시간20.01.25|조회수600 목록 댓글 0


이집트 역사(Egypt History)

 

 

 

 




 












 

세계에서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함께 가장 오래된 역사.

 

고대 이집트 문명이 하필 거기서 발달한 데에는 나일 강의 특성이 크게 기인했는데, 정기적으로 범람한다는 것이다. 강이 가끔 범람한다는 것이야 비가 많이 오면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나일강은 '정기적'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범람의 이유는 청나일강 상류 에티오피아 고원지대에 5월경에 내리는 계절성 폭우 때문인데, 이런 범람은 910월쯤에 나일강 하류 이집트에 도달해 영양소가 풍부한 부엽토, 부식토를 하류 이집트에 가득 옮겨주고 홍수에 잠겼다가 11월쯤부터 다시 드러난 땅은 지력이 매우 높아진다. 이처럼 나일강의 범람시기는 예측이 가능하므로 사람이 사는 곳은 물이 많아져도 닿지 않는 안전한 곳에 만들고, 강물로 인해 잠겨있던 땅에 농사를 지으면 작물이 잘 자라게 된다. 7월에 작물을 수확하면 10월에 다시 홍수가 와서 지력을 보충해주었다. 이처럼 고대 이집트는 농경사회를 이어나가기에 좋았던 환경에서 시작되었다.

 

언제부터 고대 이집트의 역사가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약 6,000년 정도 전(B.C. 4,000, 기원전 40세기)부터 상이집트, 하이집트로 나뉜 국가가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의 역사가 얼마나 유구한지를 언급할 때 바로 이 시대가 인용된다. 즉 아직 북구 끝자락에 매머드가 남아있을 때, 이집트에서는 파라오가 등장하였다. 최근에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7,300년 전, , 기원전 5316년 시기의 도시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기사 참고

 

B.C. 3100년경에 처음으로 통일된 이집트가 되었다. 기원전 3세기의 이집트 역사가 마네토가 쓴 기록에 의하면 "메네스"가 제1왕조를 창시하면서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를 통일하였다. 다만 유적 발굴조사에 의하면, 이집트 제1왕조의 초대 파라오는 나르메르란 인물인데 이 인물이 메네스와 동일인물인지는 확실치 않다.(혹은 나르메르의 아들이란 설도 있다.) 여하간 이집트 사람들이 단군처럼 믿고 있는 것은 메네스이다. 이후 널리 알려진 이집트 문명이 발달하여 당시의 기술력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토목기술과 의학, 예술 등이 발달하였고, 세계에서 처음으로 발효된 빵과 오븐을 만들었으며, 히에로글리프도 이때 만들어졌다. 피라미드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정말이지, 유구한 역사로 인류 역사에서 최강의 자리를 가장 오래 차지하고 있던 나라.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 성립 이후부터 역사를 계산할 경우 이집트가 인류 최강의 문명집단이었던 시간이 그렇지 않았던 시기보다 더 길다.

 

고대 이집트의 통일 왕조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누는데, 처음 통일된 시기부터 왕국이 혼란에 빠지는 B.C. 2200년경까지의 고왕국 시대, 혼란이 수습된 이후부터 힉소스인에 의해 정복당할 때까지의 중왕국 시대, 그리고 힉소스로부터 독립한 후 아시리아에 정복당할 때까지의 신왕국 시대이다. 이게 얼마나 기냐면 각각의 기간과 간극은 대략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보다도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런데도 기원전이 안 끝난다.

 

참고로 고대 이집트와 현재 이집트 주민이 유전적으로 다르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집트에서 발굴된 미라에서 검출한 DNA를 현재 사람들의 DNA와 비교해 보면 레반트 지역 주민들과 유사하다고 한다. 다만 현재의 기준으로는 레반트 지역이나 이집트나 아랍인이 거주하는 지역이긴 하다. 현재 이집트인의 DNA를 고대 미라의 것과 비교해 보면 현대 이집트인의 DNA에는 알렉산드로스나 로마의 침입을 거치면서도 고대 미라들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영향이 1525% 정도 나타난다고 한다. 크라우스 박사팀에 의하면 이는 나일 강 유역에서 노예 무역을 포함한 교역의 증가에 인한 상호 교류의 결과이거나, 중세에 이슬람이 사하라 남쪽으로 확산되면서 사하라 이남 지역과의 접촉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

 

2.1. 선사시대통일 이전

 

선사시대에 이르면서 급격히 오른 기온에 따라 오늘날 사하라 사막 지방의 기후는 변하기 시작했다. 빙하기 때까지 사막이었던 사하라 일대는 BC 10000년 즈음부터 풀과 키 작은 관목으로 뒤덮히기 시작했고, 인간이 살기에 적합한 기후가 되면서 북아프리카의 생활 영역이 넓어졌다. 그러나 사하라 사바나는 지구 자전축 등의 변화와 BC 60005000년 전 있었던 급격한 기온 하강으로 다시 사막화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 사막화의 피난자들이 이집트와 오리엔트 문명의 건설자라는 설이 20세기 후반 이후 꽤 지지를 받고 있다.

 

이미 기원전 4400년경부터 나일계곡에서는 초기 문명의 유물들이 발견된다. 가령 대규모 원정이 시행되었음을 암시하는 정복자의 기념물이라든가, 귀족의 것으로 보이는 화장용 파레트, 무기 등이 그것이다. 이 시기의 문화는 '나카다 문화(Naqada culture)' 라고 부르는데, 4기까지 이르는 나카다 문화 끄트머리에서 이미 이집트 상형문자의 전신으로 보이는 원시적인 기호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게르제 문화(Gerzean), 나카다 제2- 기원전 3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2016년에는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약 450km 거리의 소하그 지방 나일강 유역에서 기원전 5316년쯤 선왕조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도시와 고분을 발견했다고 했다.

 

이집트 땅에는 통일 직전에는 크게 상, 하 이집트의 두 왕국이 존재했으며 왕국 안에는 30여 개의 도시국가들이 저마다 성벽을 두르며 사실상의 자치를 누리며 살았다. 그러던 것을 통합한 것이 나르메르 혹은 메네스라는 인물로 그가 이집트를 통합함으로써 비로소 이집트 왕조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런데 그게 기원전 3100년경의 일이다.

 

2.2. 고왕국 시대 (기원전 3222세기/16왕조)

 

통일 이후 약 천 년간을 고왕국 시대라고 하며, 피라미드가 등장하지 않는 전기 500년의 제1, 2왕조는 초기왕조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이집트를 통일하고 고왕국을 세운 것은 나르메르 혹은 메네스인데, 전갈모양 표식 외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왕의 아들이라는 말이 있다. 나르메르와 메네스는 오늘날 이집트 역사가들에게 동일 인물로 거의 확정받고 있으나 나르메르와 메네스가 부자지간이었다는 설도 있다. 즉 스콜피온 킹(혹은 카) - 나르메르 - 메네스(=호르아하) 이런 식의 계보가 이어지는 순, 혹은 스콜피온 킹 - 나르메르(=메네스) 이런 식의 계보가 이어지는 순인데 현대 이집트 역사가들은 후자 쪽을 더 신뢰하고 있다. 이후 1왕조의 마지막 왕인 제트(Djet)가 구리 확보를 위해 시나이반도로 원정을 떠나는 등 왕국의 체계를 갖춘다. 고왕국 시대에는 수도는 멤피스였으며, 상하 이집트를 모두 다스리는 왕은 신으로서의 절대적인 권위를 누리며 여러 거대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건설했다. 이는 제3왕조 때 시작해 제4왕조에서 정점을 기록했다. 행정이나 예술 등의 면에서도 큰 발전이 있었으며, 누비아 등에 군사원정을 벌이기도 했다. 이 시기의 역사유적으로 유명한 것이 피라미드로, 가장 유명한 쿠푸왕의 피라미드가 기원전 2550년쯤에 지어졌다고 추측하고 있다. 이 시기 동아시아는 아직 청동기시대에조차 진입하지 못하였다.

 

2.3. 1중간기 (기원전 2221세기/710왕조)

 

6왕조 시기에 이집트는 페피 1세와 페피 2세의 지나친 장수에 따라 후계구도와 왕의 권위가 무너지고 각 지방의 총독들이 할거하며 내전을 벌이는 급격한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유력한 설명 중 하나는 갑작스러운 가뭄으로 나일강의 수위가 낮아지면서 기근이 닥쳤다는 것이다. 이 시기를 제1중간기라고 부른다. 로마의 군인황제시대 저리가라로, 70일간 70명의 파라오, 146년간 27명의 파라오가 설쳤다. 9, 10왕조는 헤라클레오폴리스를 중심으로 그 주변만을 지배했다.

 

2.4. 중왕국 시대 (기원전 2118세기/1112왕조)

 

140년간의 제1중간기의 혼란이 수습된 것은 제11왕조 시기로, 멘투호테프 2세의 통일 성공 이후 이때부터를 중왕국으로 분류한다. 중왕국 시기의 수도는 멤피스보다 상당히 상류에 있는 테베(오늘날 룩소르Luxor), 이 시기에는 파라오는 아메넴헤트 1세 이후로는 세누스레트(Senusret)라는 이름을 물려 사용했으며(13), 고왕국 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간에 가까워졌으며 아몬라(아몬 + ) 신앙을 바탕으로 사제 계급의 힘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도 누비아나 시리아, 리비아 등에 대한 군사원정이 이루어졌으며, 또한 아시아와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기도 했다. 미리 후계자를 파라오로 승격시켜 재위가 겹치는 공동통치를 구사한 것도 이 시대의 특징이다.

 

이 시대의 유물로는 어떤 남자와 그의 영혼의 대화, 대표적인 문학 저서는 '아메넴히트의 대화' 가 있다. 중왕국 시대의 파라오였던 아메넴히트가 암살된 후 아들 세소스트리트1세에게 영혼으로 나와 인간에 대한 불신과 견제에 대해 이야기한 내용이다.

 

2.5. 2중간기 (기원전 1816세기/1317왕조)

 

기원전 17세기경 전차 기술을 가진 힉소스인들에게 이집트가 정복되었는데 이 시기를 제2중간기라고 부른다.

 

비록 나일 하류의 삼각주(델타)가 정복당했다고 하더라도 각 지역의 실력자들은 건재했으며, 이들은 힉소스 지배층에게 때로는 협조하고 때로는 반항하면서 공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들 힉소스인은 파라오를 자칭하였다. 그래서 힉소스도 100여 년 정도 존속한 15왕조로 인정된다. 15왕조는 테베에 있던 16왕조에 이어 17왕조와 혼인을 맺기도 하였는데, 때문에 15, 16왕조의 둘, 혹은 넓게 잡아 17왕조까지의 셋을 힉소스계열로 구분하는 시각도 있다고 했는데 애초에 1617왕조는 테베계열 출신이다(중왕국 자체가 테베지방 정권에서 시작한것이다.) 결국 상이집트의 맹주 테베의 아흐모세가 힉소스인의 정권을 1세기 정도만에 이집트에서 몰아내고 신왕국을 건설했다고 하지만 정확히는 아흐모세의 아버지와 형이 일으킨 정복 사업이 가문대대로 이어지다 성공한 것이다. 그래서 제2중간기는 정복당한 시기이지만 동시에 아시아에서 수레, 청동기 등의 다양한 문물이 들어온 시기이기도 했다.

 

 

2.6. 신왕국 시대 (기원전 1611세기/1820왕조)

 

기원전 15세기경 이집트의 강역. 북쪽으로는 유프라테스 강, 남쪽으로는 하르툼에 이르는 거대한 강역을 자랑했다.

 

고대 이집트 역사 최고의 전성기.

 

이후 17왕조의 대를 이은 제18왕조의 하트셉수트는 소말리아와의 무역로를 열었으며, 투트모세 3세는 메깃도 전투에서 아시아 각국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아시아(중동)의 시리아, 레바논 지역 등을 점령하여 신왕국의 전성기를 열었다. 18왕조는 270년을 존속했으며, 특히 말기의 아멘호테프 4(아케나톤)는 아톤신이라는 유일신을 믿는 종교개혁을 시도했으나 그의 죽음과 함께 이는 실패로 돌아간다. 투탕카멘이 바로 아케나톤의 후계자. 그 이후 110년간 이어진 제19왕조의 람세스 2세 때를 최전성기로 오리엔트의 양대강자로 히타이트와 투닥거리기도 했지만, 자연재해를 비롯한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멸망하고 만다.

 

한편 람세스 3세 시기에는 인류 역사상 기록으로 남아 있는 최초의 '파업'이 일어나기도 했다. 람세스 3세의 장례신전을 짓는 공사 도중 노동자들에게 지급할 예정이던 봉급을 주지 않자, 노동자들은 봉급을 주기 전에는 일을 할 수 없다며 파업을 벌였다. 이 파업은 성공했으며 노동자들은 밀린 봉급을 정상적으로 받았다.

 

2.7. 3중간기와 고대 이집트의 종말(기원전 11세기4세기, 2131왕조)

 

바다 민족 사태 종결 직후 이집트는 제21-22왕조의 하 이집트와 제23왕조의 상 이집트로 분열되었다. 이 혼란기에는 결국 바다 민족의 리비아와 누비아의 이민족 왕조가 들어섰다. 리비아 출신의 소센크 1(22왕조, 기원전 945기원전 924년 재위)와 누비아 출신의 피예(25왕조, 기원전 747기원전 716 재위), 사바코(기원전 716기원전 702년 재위)가 대표적 인물로 각각 하이집트와 상이집트 중심의 패권체제(+이집트 내의 주변 도시국가의 조공체제)를 일시적으로나마 유지시켰다.

 

누비아 흑인 출신의 쿠시왕조는 아시리아와 유대 지역의 패권 다툼에 나섰으나, 에사르핫돈 왕의 침공으로 수도 멤피스와 하이집트 전역이 지배당했다. 그러나 아시리아가 원한 건 직할이 아닌 이집트 도시 소국들의 조공이었으므로 얼마 안 가 영향력에서 벗어났다. 쿠시 왕조는 멤피스의 회복을 꾀했으나 다시 빼앗기고 누비아의 나파타로 천도했고 이후 점차 영향력을 상실했다.

 

이후 기원전 7세기(664)부터 말기왕조인 제26왕조(사이스 조, 상인왕조)로 약 140년간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아시리아의 입김은 사라지지 않았고, 아시리아가 사라진 직후 기원전 525년부터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에 완전히 복속(직할 통치)되었다. 이때 벌어진 그리스의 지원을 받은 반란도 실패로 돌아갔다. 페르시아에는 캄비세스 2세 같은 망나니도 있었고, 다리우스 대제와 크세르크세스 1세 휘하에서는 주요 영토로 여겨지지 않았지만 대체로 이집트는 영토와 종교가 존중받았다. 그래서 이집트의 제27왕조와 31왕조는 아케메네스 왕가다.

 

이집트는 그리스의 성장과 페르시아의 쇠퇴에 따라 기원전 404344년 아미르타이우스와 제2830왕조가 짧은 독립기를 누리긴 했지만, 넥타네보 2세를 마지막으로 재병합 당했고, 그나마도 26년 뒤 다리우스 3세가 깡패 알렉산드로스 3세한테 망하면서 정복되어 헬레니즘 제국의 일부를 거쳐 마케도니아계인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로 넘어갔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기존 이집트와의 연속성을 주장하며 32왕조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이때부터 이집트는 전혀 다른 국가가 되기 시작한다.

 

 

헬레니즘 시대(프톨레마이오스 왕조, 기원전 332기원전 30)

 

 

그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32왕조) 이집트와 그 수도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로 영화를 누렸다. 이때 이집트는 그리스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분명 마케도니아인의 외부 왕조였으나 토착종교를 존중하고, 개방적인 문화를 관대하게 받아들였다. 왕의 후원 아래 성기를 주제로 삼은 축제도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의 이집트는 상업이 활발하고, 여성의 상속권이 인정되며, 파로스 등대와 세계 최고의 박물관/도서관이 있는 당대 최고의 선진문명이었다. 헤론의 초보적 증기기관도 알렉산드리아에서 발명되었다.(단 이는 서기 80, 로마 제국 시대의 일이다.)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 4세 시대에는 세계 최초의 항공모함으로 여겨지는 포티를 건조하는 위엄을 보였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어디까지나 무력으로 이집트를 점령한 외국인 왕조였고, 그들의 통치력의 근간은 강력한 군사력에 있었다. 이 점에서 그리스-마케도니아인들은 이후의 정복자들(로마인들, 아랍인들, 튀르크인들)에 비해 훨씬 덜 성공적이었다. 톨레미 파라오들은 이집트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이집트 밖에서 자주 전쟁을 벌였는데, 그 주적인 셀레우코스 왕조 역시 소수 그리스-마케도니아인들의 왕조였으므로 서로 제살 깎아먹기식 전쟁을 반복하게 되었다. 결국 BC 2세기쯤 되어 군사력 유지에 한계가 찾아오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그 후 자신의 생존을 동맹국 로마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그 상태로 로마의 그늘 아래서 번영하던 이집트는 결국 카이사르 사후 로마 내전에서 줄을 잘못 섰다가(...) 그대로 아우구스투스에게 점령당한다. 수 천년동안 이어져 온 파라오 제도는 폐지되었고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로 편입된다.

 

로마 제국 시대(기원후 641년까지)

 

로마 편입 이후에도 이집트는 동방의 중심지이자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속주로서 중대한 위치를 유지했다. 로마의 수도 로마는 밀을 대부분 속주에서 공급받았는데 3대 곡창 중 한 곳이 이집트였기 때문에 이집트는 로마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했다. 몇 차례의 알렉산드리아 방화와 폭동, 디오클레티아누스 말년까지 빈번하게 이뤄진 기독교 박해, 기독교 국교화 이후의 '이교도' 탄압 박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때의 이집트는 헬레니즘 시대처럼 그리스 문화와 토착 문화, 기독교가 한데 섞인 매우 독특한 문화가 번영했다. 이집트는 언제나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고, 동로마 제국 시대까지도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기독교 공인 이후부터 이슬람 발흥 이전까지의 알렉산드리아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안티오키아, 예루살렘과 더불어 5대 총대주교좌 중의 하나로서 특히 아프리카 대륙 기독교 세계의 중심지였다.

 

마르코 복음서의 저자이자 초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라고 전해지는 복음사가 성 마르코가 처음으로 이집트에 와서 선교 활동을 할 때 총독까지 개종했을 정도였으니... 성 마르코는 기원 65년에 이집트는 물론 로마 제국 최초의 기독교 학교인 알렉산드리아 교리 학교를 설립했다. 로마 제국이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수도를 천도한 이후로 이집트는 제국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이 큰 지방이었으나, 그 때문에 계속 분리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그 분출구는 바로 종교였다. 흔히 알려진 삼위일체를 완전히 정립시킨 공로가 있는 지방이 이집트였으나, 이들은 자신들의 신학을 더욱 밀고나가 합성론이라고 하는 독자적 신학 노선을 밀었다. 5세기에 등장한 합성론은 그때부터 이집트와 시리아의 주된 신학 사상으로 자리잡았으며, 아직까지도 콥트 교회라는 이름으로 유지되고 있다.

 

이집트의 이런 번영+위세 덕에 알렉산드리아는 항상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중앙 정부와 반목하는 거대 파벌의 지배하에 있었다. 거기에 더해서, 앞서 말했듯 콥트교 교세가 가장 강했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슬람의 고작 4천 군사가 침입해 오자 오히려 쌍수를 들며 별다른 저항 없이(...) 손쉽게 넘어갔다. 동로마 입장에서 이집트 영토는 사산조 페르시아에 이미 빼앗겨 있었으나, 이슬람의 흥기로 사산조가 흔들리니 이집트를 되찾고자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제대로 얻어맞고 말았다. 여하간 같은 아프리카라도 무려 10(?!) 대군으로 저항했던 키레나이카(오늘날의 리비아 중 지중해 연안), 카르타고, 튀니지와는 사뭇 달랐던 게 이집트의 함락이었다.

 

4. 이슬람 시대(6411798)

 

이슬람의 도래로 이집트는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이로 인해 기존의 이집트 문화에 로마, 그리스, 기독교, 이슬람 문화가 뒤섞이며 현재 이집트 문화의 뿌리를 다지게 된다. 다만 변하지 않은 사실은 여전히 이집트는 해당 지역에서 가장 번영하고, 강성하며, 알토란 같은 핵심 지역이며 각 왕조 아래서 번영을 지속하였다는 점이다.

 

4.1. 우마이야 왕조와 아바스 왕조 시대

 

이슬람 발흥 이후 640년경 아랍인의 침공을 받아 자진해서 아랍 치하에 들어서게 된다. 당시 곡물을 착취받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부와 매우 사이가 나빴던 이집트였기에, 아랍에 자진해서 항복할 기미를 보이자 동로마 제국도 아랍인들에게 무조건 양도했다.

 

이집트인들은 이로써 자신들의 독립 행보가 이어질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때부터 이집트인의 아랍·이슬람화가 시작된다. 신학적 견해가 다르더라도 같은 기독교를 믿는 동로마 제국 정부와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 정부가 같을 리 없었다. 실제로 지배 초기에 아랍인들은 인두세만 받는 선에서 기독교도들에 대한 유화정책을 시행하였으나, 이슬람 통치가 확고히 자리잡은 이후로부터는 관용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딱히 기독교도들에 대한 장기적이고 정책적인 박해가 이루어진 것도 아니어서, 아랍의 지배 초기에는 이집트의 이슬람화가 아주 천천히 진행되었고, 콥트어를 금지하는 법령도 시행되지 않았기에 꽤나 오랜기간 동안 콥트어가 제2언어로 잘 쓰여왔다. 이집트가 이슬람 치하에 떨어진 것이 7세기 중엽인데, 이집트의 무슬림 인구가 기독교도 인구를 앞지르기 시작한 것은 적어도 12세기 이후의 일이었다.

 

우선 물로 둘러싸여 제국과의 연결이 어려운 알렉산드리아 대신 멤피스 군교에 푸스타트라는 신도시가 세워져 이집트의 행정, 군사수도가 되었고(642년 건설), 이후 이슬람 제국의 우마이야 왕조(661750), 아바스 왕조(투르크계 노예 출신 반독립왕조 툴룬 왕조(868905) 포함, 750963) 시대를 거쳤다. 이 시대의 주요 건축물로는 이븐 툴룬 모스크가 있다.

 

4.2. 파티마 왕조(9631169)와 아이유브 왕조(11691252), 그리고 십자군 전쟁

 

그 후 이집트는 10세기 초(963) 튀니지에서 일어난 시아파 파티마 왕조의 통치기에 들어간다. 그 원인은 이크쉬드 조(총독)를 쇠퇴하게 한 대기근이었다. 이집트를 점령한 뒤 신도시 카이로(-카히라)를 수도(초기엔 궁성 겸 요새수도)로 번영을 누리던 파티마 왕조는 십자군 전쟁으로 쇠퇴하였다. 이 시대의 건축물로는 지금까지 남아있는 알-아즈하르 모스크와 그 휘하의 알-아즈하르 대학(972년 건립, 982년 설립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고등교육 시설)이다.)이 있다. 직역하면 "가장 꽃이 만발한"이란 의미이다.

 

십자군 전쟁기 푸스타트와 카이로는 청야작전으로 잿더미가 되었고, 전쟁을 기점으로 이집트의 이슬람 군주들은 기독교도들을 처형하거나 강제추방하였는 등 박해하며, 이도 저도 아니면 노예로 삼았다. 유럽 기독교도들과 내통한다고 의심받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구는 황폐화되었고 이때부터 이집트의 기독교도의 수가 무슬림보다 적어지면서 이집트의 이슬람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그 후 십자군 전쟁에서 대활약한 재상 출신의 술탄 살라흐 앗 딘이 창건한 아이유브 왕조(11691252)의 땅이 되었다. 이로써 이집트의 시아파 시대는 끝나고 순니파 시대가 돌아왔다. 십자군과의 전쟁은 아이유브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여러 차례의 휴전와 개전을 거치며 진행되었다.

 

4.3. 맘루크 왕조(12501517)

 

그러다가 다시 1250년부터는 맘루크들의 쿠데타로 인해 맘루크 왕조(노예왕조, 12501517)가 들어섰다. 술탄 알 사히르의 후궁이었던 여성 명군인 샤자르 알-두르와 황태자 투란샤의 정쟁이 결국 맘루크의 부상을 불렀던 것이다. 샤자르 알-두르는 80일간 재위한 뒤 잇자 알-딘 아이벡과 결혼하고 아이벡이 술탄이 되었다.

 

아랍인들의 많은 반란에도 불구하고, 맘루크 왕조는 아인 잘루트 전투(1260)에서 몽골의 훌라구의 일 칸국을 물리치고 다음 해 바그다드의 아바스 칼리파를 복원하며 세력을 떨쳤다. 맘루크의 분투로 이슬람 세계는 사라질 수 있는 대위기에서 구해진 것이다. 이후 맘루크 왕조는 실질적 이슬람의 종주국으로서 지중해 상권을 장악하며 큰 번영을 누렸다.

 

맘루크는 1300년을 전후해 이슬람으로 개종한 일 칸국과 시리아, 팔레스타인(특히 다마스커스 공성)을 놓고 여러 차례 대결했으나 결국 맘루크가 승리했으며, 이를 기점으로 더욱 강성해지면서 오스만에 대항해 동로마 제국을 보호하기도 하였다. 순니 세력이 들어오면서 쇠퇴했던 알 아즈하르도 다시 순니의 학문적, 문화적 중심지로 번영을 누리게 되었고 카이로는 바그다드를 제치고 이슬람 최고의 도시가 되었다. 십자군 잔당 역시 1291년을 기해 완전히 사라졌다.

 

1382년 투르크족 중심의 바흐리 맘루크 조가 서카시아 인과 그리스계의 주축인 부르지 맘루크 족으로 왕족이 대체되었다. 그러나 맘루크 왕조는 티무르의 강성함에 다마스커스를 잃었으며, 티무르가 중국 원정을 기획하면서 점령만 면했다. 그러나 티무르 제국이 멸망하면서 맘루크는 다시 세력을 되찾았다. 맘루크는 멸망 직전까지 인도양과 지중해 전반에서 강성한 해군력을 자랑했다.

 

4.4. 오스만 제국 치하의 이집트

 

번영했던 맘루크 왕조도 15세기 초 포르투갈이 인도로 가는 항로를 발견하면서 중개무역에 크리티컬을 맞고 쇠약해졌고, 1517년 갓 동유럽과 페르시아를 정벌하고 돌아온 오스만 제국의 셀림 1세에게 정복당했다. 이미 동로마 제국의 숨통을 끊은 무기인 대포와 머스킷 소총으로 무장한 오스만군에 기병 중심의 맘루크는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오스만 제국의 잘나가는 속주였던 이집트도 오스만 제국의 지배도 시간이 갈수록 약해지면서 군벌(사라지지 않았던 맘루크)들이 득세하였고, 알리 '베이'(군사 지도자) 때는 독립을 선언하기도 하였다(1770). 그러다가 17986,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 걸려 군벌들과 친오스만 총독들이 함께 박살나면서 아주 잠깐 프랑스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프랑스군은 1801년 철수했지만, 그 과정에서 1799년 로제타 석이 발견되면서 이집트 문화는 다시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5. 근대 이집트

 

이집트가 독립하게 된 것은 1805년 오스만 제국에서 내려온 무함마드 알리가 이집트 총독 자리에 오르면서였다. 무함마드 알리는 이집트의 맘루크 세력을 숙청하고 군 활동의 재량권을 얻은 뒤, 서방과 적극적인 접촉을 가지며 근대화를 추진하여 군사력을 길렀다. 그리고 1832년에는 레반트와 헤자즈를 정복해버림으로써 오스만 제국과 완전히 갈라섰으며, 1839년 시리아 반란을 빌미로 침공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영국의 중재로 시리아를 반환하고 1841년 독립하게 되었다.

 

정확히는 "독립"까지는 어폐가 있는 것이, 1922년 이전까지 이집트의 세속군주의 호칭은 '헤디브'(khedive)였다. 뜻은 옛 터키어로 '대리인', '총독'이라는 의미. 공식적으로 (사실상 독립상태지만) 이집트는 여전히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었으며 적어도 '총독' 무함마드 알리까지는 꾸준히 이집트의 수입 중 일부를 이스탄불의 술탄에게 보냈다. 이집트에 대한 오스만의 권리가 공식적으로 사라진 것은 1922년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이끄는 터키공화국 대국민의회와 영국간에 체결된 로잔조약에서 터키가 이집트와 키프로스, 이라크 등 옛 오스만 제국 영토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면서부터다.

 

이후의 이집트는 근대화를 통해 산업적으로 크게 발전하였고, 남북전쟁 기간 동안 면화가격 폭등으로 엄청난 이득을 보았으나 미국의 면화가 본격적으로 쏟아져 나오면서 재정적인 어려움에 빠져 결국 1882년 내부 반란을 영국군이 대신 진압해준 뒤로 영국의 보호령으로 취급되기 시작하였다.

 

1882년 당시 이집트 국기. 현 튀니지 국기와 비슷하며 오스만 제국-현재 터키의 월성기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14, 영국은 이집트를 완전히 왕령식민지로 병합하려 하였으나 이집트인의 격렬한 반대로 무산되고 대신 완전한 영국의 보호령이 된다. 그러나 전 세계에 불어닥치던 민족자결주의 열풍과 함께 자유주의 정당인 와프트당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1919년 이집트 혁명)이 격렬해져 1922년 이집트 왕국으로 독립했다. 1936년 푸아드 1세가 그해 죽고 아들인 파루크가 제위했지만 겨우 16살 나이였고 영국의 영향력이 워낙 막강해서 수에즈 운하에 주둔한 영국군이 계속 있었으며, 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에는 영국에 계속 끌려다녔기 때문에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는 거의 누릴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이스라엘 건국전쟁에서 패전하면서 나라가 시끄러워져 1952년 가말 압델 나세르(19181971)와 무함마드 나기브(19011984)를 중심으로 한 군 장교들의 쿠데타로 인해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되었다. 하지만 축출당한 파루크 1세는 머리를 써서 엄청난 거액을 술상자에 넣고 술로 위장하여 한가득 챙겨서 여유롭게 다른 나라로 망명했다.

 

이후 나세르가 권력을 잡고 나기브를 축출한 다음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자 영국+프랑스+이스라엘이 저 못돼먹은 놈 하면서 대대적으로 공격해 들어왔다(2차 중동전쟁, 혹은 수에즈 사태). 워낙 군사력이 부족해 패배를 눈앞에 뒀으나, 당시 제3세계의 지지를 얻고자 했던 소련이 영국+프랑스에 무력 사용을 불사하겠다며 겁을 주고 미국도 영국과 프랑스에게 냉담하게 대하자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이스라엘은 수에즈 운하에서 철수해 결과적으로 이집트가 승리하게 되었다. 이로서 영국의 영향력이 이집트에서 완전히 사라졌으며, 이에 따라 이집트와 나세르의 주가가 엄청나게 치솟아 인도와 함께 제3세계의 수장노릇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선 거의 싸우는 족족 처발렸고, 한때 시리아와 함께 통일된 아랍 연합 공화국을 만들어 전 이슬람 아랍세계의 통일을 꾀했고 한때 그 꿈이 가까워 보였으나 시리아의 삽질로 다시 쪼개져 이집트 공화국으로 원상복귀했다.

 

6.2. 안와르 사다트(19711981)와 호스니 무바라크의 시대(19812011)

 

나세르의 후계자로 안와르 사다트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탈중앙집중화와 족벌경제의 완화, 독재정치의 완화를 내걸었지만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그나마 1973년에 각오 단단히 하고 소련 지원 속에 제대로 훈련하면서 이를 갈아오며 벌인 제4차 중동전쟁, 또는 10월 전쟁으로 부르는 전쟁으로 이스라엘에게 장난 아닌 타격을 주었다. 이스라엘군 공식적 전사자만 해도 2500명이 넘는다. 6일 전쟁(3차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군 전사자가 총 2백 명 수준이었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차이.

 

초반 전투에서 생긴 이 정도 전사자 수는 이스라엘을 아주 충공깽으로 몰아가고도 남았다. 물론 전쟁 자체는 이스라엘이 대반격전을 펼치는 바람에 수에즈 운하 방어선이 뚫리면서 대위기를 맞이하다가 종전되었으나, 일단 이스라엘에게 더 이상의 양면전쟁은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주었기 때문에 평화협정을 미끼로 하여 이스라엘이 빼앗아간 시나이 반도를 협상으로 되찾고 이스라엘을 인정하게 된다. 역사적인 이스라엘 방문을 실현한 사다트는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수상과 공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으며, 아랍세계에서는 최초로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맺었다. 서방세계에서 그의 인기는 올라갔으나 국내에서는 반대여론에 대한 탄압 등으로 인기가 추락했고, 그 후 중동평화회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81년 이스라엘과의 평화를 추진하던 안와르 엘 사다트가 공식 행사 도중 이슬람 과격파에게 암살당한 뒤, 부통령이던 무바라크가 대통령직에 올라 2011년까지 대통령직을 맡았다. 무바라크는 30년간 독재정치를 펴며 자식까지 세습하려는 계획에도 골몰했고 가장 탄탄한 독재체제를 유지하는 것으로 보였는데...

 

6.3. 이집트 혁명, 그리고 현재

 

그러나 2011년 튀니지에서 혁명으로 벤 알리 대통령이 쫓겨나면서(재스민 혁명) 아랍의 봄이 시작되었고, 이집트에도 불씨가 튀어 민중혁명이 발생하였다. 이슬람권의 높은 출산율로 인구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20대 이하의 젊은 층들이 혁명의 주축이 되었고, 인터넷의 보급으로 대규모 시위가 가능해진 것이 아랍권에 혁명 열풍이 불어오는 원인으로 분석되고 있다. 실제로 이집트 정부는 시위가 시작된 후 트위터를 차단했지만 이미 네티즌들의 결집을 막을 수 없었다. 정부는 강경진압을 계속하였으나 타오르는 혁명의 불길을 막을 수는 없었고, 무바라크는 끝까지 꼼수를 쓰며 자리보전을 노렸으나 결국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201112월 하원 선거에서 70% 가까이를 이슬람 보수파가 차지하면서 비상이 걸렸다. 미국과 이스라엘, 그리고 군부까지도 비상이 걸렸으나 이걸 막을 명분이 없어 구경만 해야할 판국이다. 독재자를 몰아낸 민중혁명으로 이뤄진 선거를 막을 수도 없기에 군부는 부정선거의혹을 저질러 민중들의 분노를 이끌어 유혈사태를 만들고 있다. 하지만 군부도 무력으로만 막을 수 없는데 리비아처럼 내전으로 벌어질 가능성도 있기 때문.

 

이집트는 인구가 9천만이 넘어가고 4대 문명의 발상지인 데다 그 후에도 역사적 문화적 위치,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영토를 걸치고 있는 유일한 나라이며, 수에즈 운하를 소유하는 등 여러 모로 아랍동맹에서 중요한 위치다. 통계에 의하면 아랍 미디어의 90% 이상이 이집트에 의존하고 있다고 한다.(드라마, 뉴스 등) 튀니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폭발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집트 혁명의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심지어 사우디아라비아 왕가도 위험하다는 분석도 나왔었다.

 

20126월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무슬림 형제단의 무함마드 무르시가 당선되었다. 1952년 파루크 왕을 몰아낸 뒤로 군부 정권이 60년 동안 독식한 뒤로 첫 민주 정권이지만 군부는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헌법재판소도 인정하지 않는 와중에 여론이 군부와 한패인 헌법재판소의 수작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무바라크의 부하였던 샤피크 후보를 지지하던 미국과 이스라엘은 똥씹은 반응.

 

결국 여론에 밀려서 무르시가 공식적으로 대통령이 되었으나 무르시가 추진하는 새 헌법이 말썽을 일으키고 있다. 1122일 사법기관의 의회 해산권을 제한하고 샤리아와 이슬람 근본주의 색채를 지나치게 반영했으며, 대통령령과 선언문이 최종 효력을 갖는다는 내용을 담은 새 헌법 선언문을 발표해 논란을 일으켰다. 이는 일명 파라오 헌법 파동이라고 불린다.

 

이를 두고 "네가 무슨 파라오냐? 이건 뭐 무바라크랑 차이가 뭔데?" 분노어린 반발을 받고 있고 2012125일에는 카이로 한복판에서 무르시 반대파들과 지지자들이 충돌하여 6명이 목숨을 잃었다. 야당에서 결사반대하고 있으며 군부도 야당과 손잡겠다면서 으름장을 놓는 중이라 15일로 기획된 헌법 국민투표를 연기하고 해산권 제한을 없애기로 하며 대통령 권한을 의회랑 반반으로 하겠다고 물러서면서 다독이는 중이다.

 

그러나 계속되는 경제난과 증가하는 실업률, 그리고 무르시 대통령의 무슬림 형제단 중심의 인사는 많은 국민들의 반발을 일으켰고 결국 무르시 대통령의 취임 1주년인 2013630일에는 카이로, 알렉산드리아를 비롯한 이집트 전역에서 100만 명 이상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총기까지 동원한 친정부파와 반정부파 간의 유혈 충돌이 거듭되고 사회 혼란이 극심해지는 가운데, 72일 군부가 대통령을 압박하여 조속한 결단을 촉구하며 최후통첩을 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마침내 201373, 군부가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무르시 대통령을 사실상 축출하고 과도정부를 세웠다. 이로써 무바라크 축출 이후 일시적으로 정국을 장악한 군부가 물러나고 불과 1년 만에 다시 군부가 권력을 잡게 되었다. 무르시 대통령의 이슬람주의 성향을 꺼리던 미국은 군부의 쿠데타를 대놓고 환영하진 못해도 상당히 기꺼워 하는 상황.

 

무슬림 형제단과 친하게 지내면서 마찬가지로 이슬람주의 정책을 쓰던 터키 에르도안 정권의 경우 처음에는 반발했지만 민중들 반발을 우려해서인지 나중에는 물러서면서 환영했다.

 

그러나 무슬림 형제단이 무르시 축출에 반발해 시위를 일으키면서 다시금 이집트는 유혈의 폭풍속으로 치달았다. 급기야 군부는 실탄 사격까지 하면서 무르시 찬성 시위대를 해산시키려했고 결국 600여 명이 사망하는 최악의 유혈사태가 일어나고 말았다. 이집트 군부를 제어하지 못한 미국에게 비난이 쏟아졌고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은 이집트에 대한 원조 중단을 경고하고 나섰다. 무르시가 분명 파라오 헌법 등으로 민주주의 원칙을 저버린 것은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군부를 다시 나서게 한 것도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많은 상황.

 

2013819일에는 3일 동안 시위로 1300여 명에 육박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전해졌다. 이쯤 되면 리비아나 시리아 테크를 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무슬림 형제단 자체가 법적으로 해체되기 직전이며, 국민들도 외면하는 편인지라 사실상 무슬림형제단의 참패로 끝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결국 무르시 정권의 기반이었던 이슬람 극단주의 정당 무슬림 형제단은 2013109일 과도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해체당했다. 나아가 군부 주도의 과도정부는 무슬림 형제단을 테러조직이라고 규정하고 정당 핵심 인물들과 관련자들의 자산을 몰수하는 조치를 취했다.

 

과도정부는 무르시 전 대통령 시기의 지나친 이슬람 과격 정책들을 약화시키고 군부의 절대적 권한을 강화한 새 헌법을 통과시켰다.쿠데타의 주역인 압델 파타 엘 시시 원수가 과도정부를 이을 차기 선거의 대권주자로 유력시되었고 결국 이집트 새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혁명 3주년 기념일을 전후로 무슬림 형제단 지지 시위대와 친군부 시위대가 충돌해 수백 명이 죽고 다치는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그 외에도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에 의한 테러도 일어나곤 했지만 지금은 재집권한 군부의 권위주의적인 통치 아래서 그럭저럭 안정을 찾은 듯하다. 하지만 이집트의 경제난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으며 테러 또한 계속 일어나고 있어 불안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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