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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 이야기

이집트(Egypt)

작성자管韻|작성시간20.01.25|조회수1,020 목록 댓글 0


이집트(Egypt)

 

 

 

 


 







 

한국에는 이집트라고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는 영어명이고, 이집트의 공용어인 아랍어로는 자국을 미스르(مصر, 표준 아랍어) 혹은 마스르(이집트 아랍어)라 한다. 셈어파 언어에서 이 어근 'm-ṣ-r''지협/해협', '구역', '대도시', '문명' 같은 의미를 가진다. 이 중 대도시나 문명의 뜻으로 쓰였다면, 아주 옛날 이집트가 독보적인 문명으로 보였을 인근 셈족의 인식을 반영한다고 풀이해볼 수 있겠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 한편, 다른 셈어파 언어인 히브리어에서는 쌍수형 '미쯔라임 מִצְרַיִם'의 형태로 쓰이는데 이것에 대해선 고대 이집트가 상이집트(나일강 상류), 하이집트(나일강 하류)로 나뉘어져 있던 것에 기인했으리라는 추정이 일반적이다.

 

고대 이집트 시대의 이집트어로는 검다는 뜻을 가진 'kem'의 여성형 명사 케메트(Kemet). 고대 이집트어의 직계 후손인 콥트어로는 케머(Ⲭⲏⲙⲓ /kʰeːmə/ 또는 Ⲕⲏⲙⲉ /keːmə/)라고 부른다. 이는 이집트에서 나일 강이 범람하게 되면 상류에서 기름진 토양이 쓸려내려왔는데 이 토양의 색이 검은색이었기 때문이다.

 

영어명인 '이집트'(Egypt, ˈiː.dʒɪpt)는 그리스어 명칭 Αγυπτος의 라틴어 표기인 'Aegyptus'가 중세 프랑스어 단어인 'Egypte'의 형태를 거쳐 영국으로 유입된 단어다. 그리스어 Αγυπτος의 유래는 '에게 해 아래'를 뜻하는 표현 '아이게우 휘프토스(Aἰγαίου πτίως)'가 한 단어로 축약된 것으로 이집트가 에게 해와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그리스 남쪽에 위치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앞의 라틴어 표기를 불가타 발음으로 읽으면 '에집투스'.

 

옛날 한글 가톨릭 성경에는 애급(埃及)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로마에서 이집트를 부르던 호칭인 아이깁투스의 한자 음차 표기이다. 출애급기의 애급은 애급, 즉 이집트에서 나간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것을 개신교에서 변형하여 애굽이라는 말이 되었다. 최근 가톨릭의 성경 번역본은 '이집트'로 번역을 했지만, 개신교에서는 여전히 애굽이라는 표현을 고수하고 있다. 한편 공동번역성경은 '에집트'로 번역하였다.

 

이집트의 정식 국호는 이집트 아랍 공화국. 공용어인 아랍어로 쓰면 جمهورية مصر العربية이며 이를 표준 아랍어로는 '줌후리야트 미스르 알아라비야', 이집트 아랍어로는 '굼후르리야트 마스르 엘아라베야'로 읽는다. '아랍'이 붙은 것은 과거 아랍 연합 공화국의 흔적이다. 이집트가 왕정을 뒤집어엎고 공화국이 된 1953년 당시에 제정된 국호는 평범하게 이집트 공화국(جمهورية مصر, 미스르 공화국)이었는데, 이집트 공화국을 세운 가말 압델 나세르는 강경한 아랍 민족주의자로 아랍 전역의 통합을 주장하여 그 일환으로 시리아와 합방해 아랍 연합 공화국이 되었다. 나중에 시리아가 떨어져나가면서 아랍 연합 공화국은 와해되지만 이집트는 계속 이 이름을 지켰고, 나세르가 죽은 뒤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다시 국호를 이집트로 환원했지만 나세르의 아랍 민족주의를 이어 국호를 이집트 아랍 공화국이라 하였다.

 

2.2. 국기

 

 

현 이집트의 국기는 1952년 왕정을 무너뜨린 이집트 자유 장교단이 제정한 국기를 기반으로 한다. 삼색기 형태의 국기로 국기 중앙에는 이집트 국장이 들어가 있다. 국기의 붉은색은 식민지배에 맞서싸운 이집트인들의 피를, 흰색은 이집트인의 순수한 마음을, 검은색은 어둠을 상징하는데 흰색에 아래에 위치해있어 어둠을 극복한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현재의 도안이 확정된 것은 1984년이며, 그 이전에는 국장이 조금씩 달랐던 이유로 현재의 국기와는 조금씩 다른 국기가 쓰였지만 붉은색-흰색-검은색 삼색기 조합은 1952년부터 쭉 불변이었다.

 

이집트 자유 장교단이 내세웠던 아랍 민족주의가 아랍 세계에서 엄청난 호응을 얻은 탓에 아랍 세계에서는 붉은색, 흰색, 검은색 조합을 가진 국기가 좀 있다. 오늘날 시리아, 이라크, 수단, 예멘 등이 그러하다.

 

 

아프리카에서 대표적인 군사 강국이다. 이집트가 나일 강의 수자원을 가장 많이 사용할 수 있는 원동력이 바로 강력한 군사력 때문이다. 나일 강 주변의 다른 나라들이 댐도 건설 못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정말 했다가는 이집트한테 얻어맞을게 뻔하니까. 이스라엘과의 계속된 전쟁은 물론, 수단이나 리비아와 국경 분쟁으로 국지전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2, 3차 중동전쟁 때와는 달리, 이집트군은 매번 리비아군을 박살냈다. 더불어 수단 공화국과도 국경 분쟁으로 사이가 안 좋다.

 

 

6. 자연

 

 

나일강 하류의 비옥한 농지를 자랑했지만 급격한 산업 성장과 홍수통제로 인해 나일강 연안의 농토는 날이 갈수록 척박해지고 있다. 1960년부터 1970년까지 아스완 댐 대공사를 통하여 반전을 노렸으나 결국 수자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한 대신 정기적인 홍수로 지력이 보충되는 이집트의 특징도 사라지고, 비료 사용량은 늘게 되고경제 성장에 공헌하긴 했지만 장기적으로 좋은 영향을 주지는 못할 것이라는 예견이 다수다. 중국의 싼샤 댐 반대론자들도 아스완 댐을 실패의 사례로 들며 싼샤 댐 건설에 반대 입장을 내놓고 있다. 물론 기후변화 탓도 있다. 사하라 사막이 고대로부터 꾸준히 확장해 오면서 이집트도 점점 사막화가 심해져 건조해지고 있다. 이미 고대 이집트 문명의 유적 상당수는 사막 한 가운데에 있을 정도이다.

 

나일강에서 거리가 먼 지역은 거의 다 사막이고 사람이 거의 살지 않고, 사람이 산다해도 대부분 오아시스 근처에 산다. 즉 이집트는 국토가 네모 모양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사람이 사는 곳만 따지면 나일강 유역을 따라서 긴 나일강 유역 부근에서나 인구가 밀집해 있는 국가인 것이다.

 

동물상의 경우 문명이 시작할 당시 하마나 사자, 심지어는 북아프리카코끼리같은 거대 동물이 많았지만 세월이 지나 현재는 사라진 상태다. 육식포유류로는 표범이나 줄무늬하이에나, 자칼, 늑대, 몽구스등이 있으며 날쥐나 곰쥐, 박쥐등 소형 포유류, 바바리양이나 가젤, 영양등 우제류가 서식하는 편이다. 새로는 이집트독수리나 대머리수리등 맹금류이 있으며 그 밖에도 펠리컨이나 각종 물새가 산다. 그 밖에도 코브라나 각종 도마뱀이 있으며 사막에는 전갈이나 각종 곤충들이 산다. 나일악어는 매체마다 이집트에 현재도 서식하는지 전멸했는지 말이 나뉘는데 정확히 아시는 분이 수정바람. 영문 위키피디아에서는 현재도 생존하는 것으로 보고있다.

 

카르카로돈토사우루스나 스피노사우루스, 아이깁토사우루스, 파랄리티탄, 만소우라사우루스 같은 공룡들이 이곳에서 출토되었기에 가끔 이집토마니아를 겸하는 공룡덕후들에게 엮이기도 한다. 이외에 사르코수쿠스, 아르시노이테리움, 모에리테리움 같은 신생대의 고대 포유동물들도 꽤 유명한 편이다.

 

공용어는 아랍어다. 그러나 이집트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아랍어는 교과서에서 배우는 표준 아랍어(푸스하)와는 좀 다르다. 아랍어를 많이 쓰는 나라라도 교과서에서 배우는 아랍어는 뉴스나 강의 등 공식적인 생활에서나 쓸 뿐이고 실제로는 아랍어에 현지 문법과 어휘가 많이 들어간 아랍어 방언-암미야를 쓰는데, 이집트 역시 그러하다. 이집트 아랍어는 표준 아랍어와 어순이 다른 경우도 있고 ج j 발음이 아닌 g 발음이 나는 등 차이가 크다. 고대 이집트 어순과 발음이 적용된 결과. 따라서 단순한 아랍어 방언이 아닌 중국의 광둥어처럼 '이집트어'로 분류되기도 한다.

 

여러 아랍어 방언 중 이집트 방언은 아랍인들이 비교적 잘 알아듣는 편인데, 이집트는 3억 정도 되는 아랍권 인구 중 1/3 가까이를 차지하고, 이집트인들이 아랍권 곳곳에서 노동자로 일하고 있으며, 또 중동에서 이집트 방송이 자주 방영되기 때문이다.

 

고대에는 고대 이집트어를 썼으며 이는 콥트어라는 언어로 이어지게 되었지만, 12세기부터 점차 아랍어 이집트 방언으로 대체되더니 18세기부터 실생활에서 쓰이지 않게 되었으며 현대에는 종교적이거나 학문적인 용도 정도로나 쓰이는 수준이다. 그리스어도 상당기간 쓰였던 적이 있었지만 일부 계층에서나 쓰이는 언어였고 이슬람 정복 이후로 12세기 무렵까지 학문용 언어로나 쓰이다가 점차 사라졌다. 다만 아랍어 이집트 방언에는 꽤나 영향을 끼쳐서 현재도 이집트 아랍어 방언에 콥트어나 그리스어 단어들이 나오기도 한다.

 

주요 외국어는 영어와 프랑스어이며, 중국어도 중국인 관광객의 급증으로 배우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리고 아르메니아어, 그리스어, 러시아어도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주요 해변 관광지인 후르가다와 샤름엘셰이크의 호텔에서는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하는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고 러시아어로 된 메뉴나 표지판도 별도로 존재한다. 비록 명목상이지만 이집트는 영국 보호시기인 1914년에 그동안 쓰던 '총독'(헤디브)호칭을 ''으로 바꿀때까지 오스만 제국을 종주국으로 했기 때문에 터키어의 영향이 많이 남아있으며 의외로 터키계 성씨를 쓰는 이집트인들도 많이 보인다.

 

이집트도 프랑스의 지배를 잠시 받은 적이 있었고, 이후에 영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영연방에 가입하지는 않았고 프랑코포니에 가입했다.

 

이슬람 아랍연맹 나라에선 그럭저럭 개방적인 편이다. 그래서 다른 이슬람 국가한테는 이웃 튀니지, 모로코와 함께 "아랍의 창녀"라는 비아냥도 듣고 있다.

 

사실 예전에는 여자들이 히잡이나 차도르 같은 것을 안 입고 다니는 경우가 더 많았는데, 이슬람 근본주의가 사회 저변으로 확대되면서 사회 분위기가 많이 바뀌어 무슬림 여성들은 대부분 히잡을 쓰고 니캅을 쓰는 경우도 많다. 그래도 일단 안 입을 수 있는 자유는 있고, 이집트가 워낙 더운 사막성 나라라는 걸 생각하면 히잡이나 차도르 등은 기능의류로서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사막성 기후에선 되려 이렇게 살을 가리는 게 많은 옷이 몸 수분을 덜 마르게 하여 더 오래 견딜 수 있으니까. 이집트에 오랫동안 여행하는 사람들은 누가 쓰라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히잡을 쓰고 터번을 두른다. '갈라베야'라는 남녀 공용의 긴 통짜옷도 굉장히 싸고, 얇고, 바람이 잘 통하기 때문에 사막 여행에 매우 효율적이다.

 

그리고 맥주의 기원이 된 나라답게 술도 마신다! 스텔라 맥주(벨기에산과 다른 라거 맥주)가 바로 이집트산 맥주. 이집트 사회는 이웃의 꽉 막힌 이슬람교 극보수주의 국가들인 수단과 리비아, 사우디아라비아, 이란은 물론 심지어 같은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국가인 모로코보다도 개방적이라는 평이다.

 

이러한 개방적인 사회는 무슬림 형제단이 집권한 2012년에 엎어질 뻔했다. 그러나 20131년 만에 광속으로 쿠데타 크리가 터지면서 무슬림 형제단이 나가리 되는 바람에 원상복구. 비록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보수적인 종교색은 없다시피 하다지만, 이집트의 악명 높은 독재와 인권 탄압은 여전해서 국제 인권단체들의 비난을 받고 있다. 특히 이집트의 경제난이 갈수록 심해지면서 사회 분위기가 굉장히 안 좋다.

 

교육 수준이 인구 수를 따라가지 못하고 예산도 부족하기 때문에 사교육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사교육 문제가 대단히 심각한 편이다.

 

24시간 영업하는 가게까지 있을 정도로 아프리카에서는 가장 치안이 훌륭하다. 그러나 2011년 아랍 혁명 이후에는 그렇지 못하다.

 

한때 치안이 좋았던 이유는 관광객 안전을 위하여 인정사정 없는 즉결처분을 내리기 때문이다. 범죄자가 거리 곳곳에 깔린 제복경찰이나, 사복형사들에게 적발되면 그 자리에서 때려서 반죽이거나, 불구로 만들려는 걸 생생하게 볼 수 있다고 한다. 이집트 여행자들 가운데 여성 일행이 치한짓을 당해서 소리쳤더니, 갑자기 나타난 제복경찰과 웬 사람들이 그 치한을 잡아 죽도록 패는 걸 목격한 이야기도 찾아볼 수 있다. 처음에는 외국 여성들이 잘한다고 응원하다가 피투성이가 되어 기절하는 치한을 보고 기겁을 하여 오히려 경찰을 뜯어말릴 지경이라고.

 

이집트 경찰의 이런 과도한 정의 구현(?)은 상부의 지시도 있거니와, 이런 치한은 대부분 가난한 서민들이라 별로 거슬릴 게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무바라크가 실각한 이후인 2011년부터는 바뀔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정치 불안이 계속되면서 치안에 신경쓸 행정력은 줄어든 상태에서 ISIL까지 등장하여 상황은... 그러다보니 이집트 정부도 무장단체들을 족치려고 애쓰지만 상황이 나아지질 않아 골머리를 않고 있다. 그러다보니 관광객들이 오면 국가에서 장갑차까지 동원해서 관광객을 지킬 정도다.

 

참고로 이 국가는 전설적인 특수부대인 777부대의 업적 덕분에 절대로 테러리스트 표적이 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지만 시나이 반도 지역에선 과거 테러로 수십명이 그냥 저세상으로 가버렸다. 이집트도 테러에 안심할 수 없는 국가이며 시나이 반도쪽은 특히 조심할 것. 수도 카이로도 조심해야 한다. 그래도 소문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닌지 인질극을 벌이지는 않고 있다. 심지어 테러리스트들이 이집트 외교관을 잡았을 때조차 인질로 삼지는 않았다. 그냥 죽였다.

 

19971117일 관광지로 유명한 룩소르에서 극단주의 테러리스트들이 관광객들에게 무차별로 사격을 가해 65명이 죽은 것도 이러한 테러 중 하나. 이 중 관광객만 58명이나 죽은 참극이라 이 일로 이집트 관광이 크게 타격을 받은 바 있다. 뭐 이 일로 관광지 치안이 더 엄격해지긴 했으나 역시 2011년 아랍의 봄 이후에는... 2013년 엘시시의 군사정변 이후에는 카이로 시내 곳곳에 무장경찰이 배치되어 상대적으로 안전해진 편이다.

 

2014217(한국 시간) 이스라엘과 맞닿은 국경지역인 타바 지역에서 버스 폭탄테러 사건이 일어나 버스에 타고 있던 진천 중앙장로교회 성지순례 관광객 35(한국인 33, 이집트인 2) 중 이집트인 운전사 1명과 한국인 3명이 사망하고 14명이 부상당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그리고 안사르 베이트 알마크디스가 자신들의 소행이라며 "이집트 경제와 관광 산업, 군사령관들을 대상으로 한 공격을 지속하겠다"고도 밝혔다. 테러가 발생한 이유는 종교적 갈등이 아닌 현 임시정부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기 위해서였으며 모함마드 이브라힘 내무장관을 대상으로 한 차량 폭탄 테러와 파이프라인 폭발 사건도 자신들의 소행이라 주장했다. 이번 테러로 인해 이집트는 여행제한지역이 되었다. 덕분에 안 그래도 관광업이 타격을 받은 이집트 경제는 더더욱 타격을 받고 있다.

 

2015612일 룩소르에서 또 테러 시도가 있었다. 다행히 경찰 2명과 상인 2명이 조금 다쳤을 뿐이고 범인 3명 중 1명은 자폭, 1명은 사살, 1명은 중상입은 채로 사로잡혔다. 하지만 이 일로 이집트 여행객이 뚝 줄어버렸다.

 

2015820일 기자 지역에 폭탄 테러가 있었다. 테러 당한 곳은 자그마치 이집트 국가보안부(!). 범인들은 폭탄을 설치해둔 건물 앞에 차량을 세우고 뒤따르던 오토바이를 타고 도망치면서 차량을 폭파시켰다고 한다. 이로인해 경찰관 6명을 포함해 29명이 부상을 당했다. 테러를 저지른 세력은 IS의 이집트지부를 자처하는 '시나이 지방' 이다.

 

2015824일 카이로에서 폭탄 테러가 있었다. 이집트 현지 경찰관들의 출근 버스가 폭발하여 경찰관들 중 2명이 사망하고 24명이 부상을 입었다.

 

201639일에도 이집트 기자에서 경찰 호송 차량을 공격한 폭탄테러가 발생해 3명이 부상당했다.

 

20161014일에도 시나이 반도에서 무장단체들의 습격으로 군인 12명시 사망하고 6명이 다쳤다. 물론 이집트군의 반격으로 공격한 테러리스트 15명은 전부 사살되었다.

 

20171124일 총격 폭탄 테러가 일어나 305명이 사망하고 100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201837일에 이집트 정부는 폭발물범죄처벌을 강화했고, 테러에 연루되면 사형에 처하기로 정했다. 그리고 호객행위를 금지하는 등 관광업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1년여만인 20181228일에 기자 피라미드 인근에서 폭탄테러가 발생되면서 베트남 관광객 등 4명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되었다.

 

201965일에 시나이 지역 북부검문소에서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검문소를 공격해서 최소 10명의 경찰이 사망했다.

 

 

이집트의 인구밀도 지도. 나일강 유역에만 인구밀도가 유달리 높고 대부분 인구가 가늘고 길게 집중되어 있어,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사막지역을 제외하면 일본이나 칠레처럼 길쭉한 나라나 마찬가지인 인구분포를 보인다. 경지면적당 인구밀도는 일본에 이어 2위이나 인구증가율이 정체, 감소세인 일본과 달리 이집트는 꾸준히 증가세를 유지하고 있어 조만간 일본을 제치게 될 것으로 보인다.

 

18세기에는 인구가 300만 명 정도에 불과했던게 19세기부터 급속히 증가하기 시작하여 20세기 들어 인구 1,000만명을 돌파하게 되었고 1950년에 2,000만명을 돌파했으며 1963년에 인구가 3,000만 명을 넘었다. 그리고 1975년에 인구 4,000만 명을 돌파한 시기때부터 식량 수출국 에서 식량 수입국으로 돌아섰고, 그 이후로도 꾸준히 인구가 증가하여 2014년 기준으로 8,600만 명을 기록하여 독일보다 인구수가 많아졌다. 이슬람 아랍 동맹에서도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반년만에 인구가 100만명이상을 넘겼다.

 

이집트 땅 크기는 남한 면적 10배가 넘으니 큰 걱정은 없어 보이지만, 문제는 이집트 땅 거의 전부(96% 이상)가 사람이 살기 불가능하거나 아주 힘든 무더운 사막이라는 것이다. 그 사막성 기후를 뺀 곳은 다 합쳐도 남한 면적보다 훨씬 작아 유럽의 소국인 오스트리아 땅 면적(8km²)과 비슷하다. 통계로만 1,000만명이 넘게 모여사는 카이로의 인구밀도는 서울보다도 높다! 사실 사막을 개간하려는 계획도 있기는 하고 진짜로 개간을 해서 녹지로 만들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림도 없는 수준이다. 그래도 그 인구수가 어디로 가는건 아니고 인프라도 나름대로 갖추어져 있어 아프리카 기준으로는 상당한 경제대국이다. 문제는 그 인프라가 경제난으로 갈수록 약화되고 있으니 아프리카의 경제대국이라는 것도 이제는 옛말이다.

 

이집트 제2의 도시이자 헬레니즘 제국까지 거슬러가는 오랜 고도이며, 북부 최고의 항구도시인 알렉산드리아에는 약 400만명이 거주한다.

 

이집트는 인구 포화상태에 직면해 온갖 오염과 여러 개발에 얽힌 문제가 많다. 그래서 인구조절하고자 콘돔을 무상으로 주는 정책을 취했다가 되려 종교적인 엄청난 비난 속에 전면 철폐하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기간동안 출산율이 괄목할 정도로 떨어져 2000년대 후반에는 3까지 내려갔지만 이때부터 베이비 붐이 일기 시작하면서 출산율이 3.5로 상승하고 다시 인구가 급증하고 있는 중이다. 이집트는 2030년이면 인구가 14천만 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고, 2017년에 이미 인구가 9800만을 넘어서 1억 인구가 될 날이 머지 않았다. 그리고 2019년에 이집트의 인구는 1억을 돌파했다. 카타르, 유럽 연합 등의 부자 나라로 인력이 수출되는 것은 기본이다. 이런 인구를 잘 이용하면 상당한 경제대국이 될 가능성이 있지만 개발도상국 입장에서 인구 많은 게 마냥 좋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 문제. 특히 이집트 경제는 여전히 빈곤하기만 해서 제아무리 인구가 많아봤자 국가에 큰 도움이 안되고 갈수록 부담만 되고 있다. 특히 인구증가로 인해 물과 식량의 부족이 심각해지고 있어 이집트의 미래를 갈수록 암울하게 만들고 있다.

 

카이로라든지 대도시들이 죄다 바닷가를 가까이 둔 지역이라 다수 지방의 개발이 아주 엉망인 것도 문제. 게다가 대도시들을 가보면 항상 짓다가 만 건물들이 가득하다. 폐건물? 단순히 계획만의 문제는 아니고, 건물 지붕에는 항상 벽돌이 가득 쌓여있는 게 자주 보이는데, 이게 건물을 다 지으면 세금이 나오기에 일부러 공사를 하는 척하여 저렇게 놔두는 게 많다고 한다. 과거 카이로 시장이 미관상 안 좋다고 이런 건물도 세금먹인다고 하려다가 엄청난 반발에 데꿀멍하여 없던 일로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지방 사람들이 도저히 살기 어려워서 대도시로 오면서 형성되는 빈민가 문제와 치안 문제도 심각해지고 있어 고민이라고 한다.

 

흔히 이집트의 종교라 하면 무엇보다 가장 먼저 이집트 신화와 파라오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특이하게도 현대에도 일부 신이교주의자들이나 흑인 우월주의자들 중 이집트 신화의 신앙을 믿는 사람들이 있는데, 자기들이야말로 기독교, 이슬람과는 무관한 순수한 이집트인들의 종교를 믿는다고 자부한다. 왜 뜬금없이 흑인 우월주의자들 중 이집트 전통 신앙을 믿는 이들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집트인 항목을 볼 것.

 

근데 사실 이들은 이집트인도 아닐 뿐더러 현대에 들어와서 갑자기 튀어나온 집단이다. 이집트에서 파라오 신앙은 아무리 늦어도 서기 395년에 이르러 동로마 제국 시대에 완전히 기독교화되어 절멸하기 때문.

 

더 과거로 들어가봐도 기원전 525년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에 정복당한 후 기독교화 되기까지만 해도 900년 넘는 세월 동안 마케도니아와 고대 로마의 지배하에 이집트 신앙 자체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영향을 받은 상태라서 이미 순수한 이집트 전통 신앙이 유지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현대 이집트 문화와 고대 이집트 문화가 생판 달라보여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는 소리. 물론 정작 신앙의 절멸은 기독교 시절이었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힘이 얼마나 강대했는지를 보여준다. 이어서 파티마 왕조 시대에 이르러 이집트인들이 기독교를 버리고 이슬람교로 개종했으나 기독교도들은 이집트 고유 신앙과 달리 아직도 살아있다.

 

공식적으로는 이슬람교를 국교로 명시해 놓았지만, 이슬람 신앙을 강요하지는 않으며 세속주의를 추구하여 실질적으로 세속국가에 속한다. 오히려 독재자였던 호스니 무바라크는 철저한 세속주의자라서 이슬람 강경파들에게 미움을 받던 인물. 이스라엘과 우호관계를 맺었던 점도 이가 갈릴 법하지만, 1992년 무니라(Mounira)라는 강경파들 소굴을 불바다로 만들어가면서까지 철저하게 강경파들을 뭉갰던 인물이다.

 

그럼에도 지난 1997년 룩소르에서 기어코 강경파들이 외국 관광객들에게 테러를 가해 60명이 넘는 외국인 관광객이 죽는 비극이 벌어졌다. 이 일로 외국인 관광객이 여행을 안 오면서 경제적으로 타격을 받게 되었기에 강경파들을 잡아 족치고 치안은 더 강화되었고 이후로 외국인 관광객 테러도 거의 일어나지 않고 있긴 했지만, 무바라크가 2011 이집트 혁명으로 쫓겨났으니 앞으로의 변화를 예측하기는 힘들다. 2013년에는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에 의해서 시나이 반도 버스 폭탄테러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공식 통계로 인구 9% 정도가 기독교인이며, 단순 인구 수로는 중동 최대의 기독교 국가이기도 하다. 이는 9,500만이 넘는 상당한 인구 대국 이집트를 생각하면 900만 명 정도로 적지 않지만, 콥트교인들은 이보다 많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합성론파 교회로 5세기 이후 칼케돈파와 분리되었다. 이후 이집트의 주요 종교로 자리잡았으나 이슬람의 지배와 십자군을 거치며 이슬람에게 인구를 역전당해 지금에 이른다. 하지만 이집트에서 대놓고 차별과 탄압을 받고 있으며, 다른 나라로 많은 신자들이 이주하다 보니 갈수록 교세가 줄어들고 있다. 이들에 대한 차별과 관련해서 이집트 현지에서는 이런 농담까지 있다.

 

무바라크가 셰이크와 콥트 정교회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가 비행기를 같이 탔다.

 

그런데, 비행기가 그만 고장이 나버렸다. 무바라크가 말하길

 

"지금 낙하산이 2개 뿐입니다. 아무래도, 두 분 가운데 한 분은 포기하셔야 하는데 문제를 내서 맞추신 분에게 낙하산을 드리겠습니다."

자신이 낙하산을 포기할 생각은 없는 건가? 조종사는?

 

 

두 사람이 수락하자, 먼저 셰이크에게 문제를 냈다.

 

"이집트가 승리한 4차 아랍전쟁에서 우리 이집트군 전사자 수는 얼마죠?"

 

", 3,541명입니다."

 

"좋습니다. 맞았습니다. 그럼 총대주교님에게도 문제를 내겠습니다. 저 전사자들 이름을 모두 말해보세요."

 

이런 쓴 우스개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콥트교인들은 제대로 직업도 구하기 어렵고 종종 테러를 당하기도 한단다. 하지만, 이래도 2천여년을 묵묵히 견뎌온 콥트교인들은 다른 나라에서 차별 많다고 안타까워하는 것도 안 좋게 본다. 물론 콥트교 항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다 그런 건 아니며, 한때나마 이런 악조건들을 이겨내고 성공한 이집트 내 콥트인 중산층들이 꽤 늘어나기도 했었다.

 

지금도 심심찮게 여러 다른 기독교 종파 선교사들이 가며, 현재 아랍 지역에서 가장 큰 개신교가 활발한 활동을 하는 등 여러 개신교 종파나 다른 기독교 종파 신자도 적지 않다. 2011년 혁명 때 타흐리르 광장에 위치한 최대 개신교 예배당에서 데모대에 의료 지원 등 적극적인 지원을 하면서 종교 간 화해의 분위기도 조성되었고, 이전과 달리 콥트 정교회와 개신교가 함께 모임도 여는 등 분위기의 변화가 감지된다.

 

그래도 다른 아랍 연맹 나라보단 좀 나은 편이긴 하다. 비록 콥트교를 차별하며 다른 기독교 종파 선교를 금지하는 게 문제이지만, 자국에서 히잡과 니캅, 아바야(차도르)를 강요하지 않으며 여성부까지 있는 나라다. 히잡만 해도 각양각색 색깔이나 디자인으로 패션쇼까지 한다. 이란이나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화려한 히잡이나 아바야를 금하며 죄다 검은색으로 통일시키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심지어 히잡조차 안 하고 서구적인 복장으로 하여도 전혀 문제가 없다. 여성 정치인들도 공식 석상에서 히잡 안 쓰고 서구식 복장으로 많이 나온다.

 

게다가, 아바야를 경찰이나 군이나 정부에서 싫어하는데 이유는 아바야가 테러나 범죄에 악용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2008년 카이로의 한 은행에선 아바야를 입은 여성 4명이 들어와 갑자기 총기를 난사하며 11억 이집트파운드나 되는 거액을 훔쳐갔다. 돈은 물론이오, 채권에서 여러 금융 관련 문서까지 흠쳐가서 나중에는 현금화하기 어려운 것들은 그냥 버리고 현찰만 챙겨갔다. 당시, 드러난 것은 그 여성들이 실은 남성들이었다는 사실. 목소리로 비로소 알게 되었지만 목소리만으로 범인을 잡을 수 없었다. 물론 아바야로 드러난 건 겨우 눈이기에 CCTV로 찍힌 이걸로는 범인을 잡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지금까지도 범인들은 안 잡혔다. 이집트 역사상 최대 피해라고 할 은행강도 사건이었고 거액이 입금된 사항이니 여러 모로 은행 정보에 아는 만큼, 은행 고위간부가 끼어들었다느니 뭐니 추측이 나와 간부들을 정밀 조사하고 퇴직 및 여러 전,현직 직원에 대해 칼같은 조사를 했음에도 끝내 잡지 못했다.

 

이 사건이 터지자 은행이라든지 금융 시설에선 이런 범죄를 대단히 우려했다. 그렇다고 아바야를 입은 여성들을 못 들어오게 할 수도 없으니고민 끝에 경찰은 아바야를 입은 여성은 은행같은 곳에선 얼굴을 드러내게 하는 법안까지 냈는데 이를 두고 수구꼴통적 성직자들이나 여론과 충돌도 벌어졌다

 

더불어 아잔 소리를 소음으로 규정하여 음량을 줄이고자 하는 움직임까지 벌였다. 하지만 이 또한 보수파들 반발이 워낙에 거셌기에, 결국 무아진들을 목소리 좋은 이들만 간추려 쓰게 하면서 다른 무아진들이 실업자 된다고 반발하면서 고민 중이라고 한다. 그만큼 아랍 연맹 소속이면서도 세속적 정책을 꽤 많이 취한다. 물론 위에서도 나온대로 독재자가 종교 광신을 막고자 하는 점도 크지만.

 

그러나 무바라크 사임 이후 무슬림 형제단과 무르시 정권이 들어서면서 강경 이슬람 국가로 변모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2013년에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여자가 징역 15, 그 자식들도 징역 5년을 선고받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코란소각으로 아랍권을 분노하게 만든 미국인 목사 테리 존스에게도 사형을 선고하기까지 했다. 물론 무르시 정권이 망하면서 취소되었지만. 게다가 무르시 정권도 경제에 대해서는 무능하여 물가는 계속 오르고 제대로 된 대책은 하지 못하면서 종교 극단 정책만 강화하며 무능한 종교인들이나 정부요직에 앉히는 꼴에 분노한 민중들이 "니들이나 무바라크나 차이가 뭐냐?"20131년여만에 무슬림 형제단의 무르시 정권을 국민들의 시위 + 군부 쿠데타로 뒤엎어버리면서 혼란에 휩싸이고 있다. 근데 무르시 정권의 기반인 무슬림 형제단에서 무르시 지지 시위를 하자 그걸 또 군부에서 강경진압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이집트는 더욱 혼란에 빠지게 되었으며, 미국과 유럽연합에서 이집트와의 관계를 재검토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물론 엘시시 정권은 광신으로 악명높은 무르시 정권과 달리 세속주의를 추구하여 이슬람 극단 정책을 폐지하였으며 극단주의자들을 단속한다. 특히 콥트 기독교인들을 이집트 국민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에 대한 차별과 탄압을 금지하여 콥트 기독교인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다. 미국과 유럽연합도 엘시시 정권이 더 낫다고 판단해 이집트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후 무슬림 형제단은 새 정부에 의해 테러집단으로 규정되고, 샤리아를 기반으로 한 헌법도 무효화되었으며, 시리아 내전, 리비아 내전을 틈탄 IS 등 극단주의 세력의 만행을 목도한 이집트 사람들의 인식도 매우 나빠져 재집권하기는 상당히 힘들어질 상황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집트 사람들의 종교성이 나날이 세지고 있다는 것. 특히 이집트 내에서 이슬람 극단주의가 심해져 종교와 관련된 테러와 범죄가 틈만 나면 발생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이집트 정부는 20158월에 반테러법안을 제정하여 이슬람 극단주의를 금지하고 이슬람 테러단체와 관련 있는 사람은 중형을 받도록 했다. 하지만 이럼에도 이집트의 공권력이 부패하여 이슬람 극단주의를 제대로 단속을 안하고 사법부조차 이슬람에 편향된 판결을 하기 일쑤라서 이집트 정부의 이슬람 극단주의 근절이 효과가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집트는 동성애가 금지되어 있지 않지만, 종교적으로 이슬람교와 콥트교 둘 다 동성애를 터부로 여기고 있고 2017년에는 콘서트에서 무지개 깃발을 든 성소수자 7명이 체포되는 등 성소수자에 대한 탄압이 이뤄지고 있다. 그리고 이집트의 한 TV토크쇼 진행자가 성소수자를 인터뷰했다는 이유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2018526일에 이집트 최고행정법원은 유튜브에 반이슬람 영화가 개재되어 있다는 이유로 유튜브를 한달 동안 차단하는 명령을 내렸다.

 

2018112일에 이집트에서는 콥트 교회를 대상으로 한 테러가 발생되었다. 그리고 이집트 정부는 콥트 교회를 대상으로 한 테러리스트 19명을 사살했다.

 

2018115일에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에 이어 이집트도 의회에서 니캅을 금지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하지만 이집트는 아직도 보수적인 편이라서 이집트의 유명 여배우가 노출이 심한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는 일이 일어났다. 2019210일에는 유튜브에 기독교를 비하한 동영상을 올린 남학생 4명이 체포되었다.

 

201932일에 이집트 알아즈하르 사원의 대이맘 셰이크 아흐메드 엘타예브가 이슬람에서 허용되는 일부다처제가 공평을 유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나라 꼴에 종교에 넌덜머리가 나서인지 젊은 층을 중심으로 무신론자들이 늘고 있다.

 

주말은 금요일, 토요일이다.

 

딸에게는 아들보다 적은 유산을 물려주도록 한 이슬람 관행을 깨고 남녀가 동등하게 재산을 상속해야 한다는 법원 판결이 이집트에서 나왔다.

 

9.4. 유목민 문제

 

이집트 다른 문제로 알려지지 않은 게 유목민들 처리문제이다.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유목민인 베두인들은 이집트 정부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마음껏 떠돌면서 살아간다. 이들은 시나이 반도가 이스라엘에게 넘어갈 때도 그랬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과 달리 건드리지 않고, 되려 이들을 치안 경찰같은 온갖 직장을 주고 시나이 지역에서 일하게 해주었기에 이들은 되려 이집트보다도 이스라엘에 대하여 우호적일 정도로 이스라엘 지배시절에는 별다른 갈등이 없었다고 한다!

 

특별히 이스라엘이 베두인족에 대해서 호감이 있다기 보다는 흔한 이스라엘판 이이제이전략의 일환이다. 이슬람 내에서 이단 취급 받는 소수종파, 비 아랍 계열 소수민족, 아랍 내 토종 기독교계 등 중동의 주류인 아랍민족이나 이슬람에게 적대시 되는 소수집단유대인 이야기?을 지원하고 우대하면서 손을 잡는 전략이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군은 유대인만 복무하는 것이 원칙이다. 무슬림은 언제 등 뒤에서 총을 쏠지 모르니까.. 하지만 이스라엘 국적이 있는 무슬림 계열 드루즈파와 러시아계 소수민족인 체르케스는 무슬림이라도 병역의무가 있고, 법이나 제도적으로 유대인에 준해서 취급해 준다. 베두인족도 병역의무는 없지만 자원복무를 신청하면 이스라엘 국적을 부여하고 받아 준다. 그래도 차별은 있지만 법적으로 차별은 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적의 적은 친구니까 싸울 이유가 없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시나이 지역을 이집트에게 돌려주면서 이집트는 그런 직장을 죄다 무효화하고 유목까지 막으면서 먹고 살 길이 없어진데다 이집트 내에서 극빈층으로 살고 있는 처지다. 그러다보니 베두인들은 이집트에 대한 반감이 커졌고 시나이 지역을 중심으로 이집트를 상대로 투쟁하고 있다. 단적인 예로 지난 2007년까지 시나이 지역에서 발생한 호텔 폭탄 테러 등 여러 테러의 범인들이 이런 유목민들.

 

이집트 정부는 미국과 이스라엘에게 이들이 알 카에다와 같은 골수 원리주의자들이라 주장했지만, 이들은 알 카에다와의 관련을 부정하며 그들의 지원도 거부하고 있고, 미국 정부도 이들을 테러리스트라고 볼 수 없다며 테러단체로 정하지 않고 이집트의 책임을 물었다. 실제로도 베두인들을 지나치게 차별하고 억압한 이집트의 책임이 크지만. 시나이 테러로 많은 관광객들이 희생된 이스라엘 정부는 애꿎은 자신들이 당한다며 이집트를 욕하고 있다. 결국덕분에 이들을 강압적으로 뭉개던 이집트 정부는 2007년 샤름 엘 세이흐 호텔 동시다발 폭탄 테러로 유태인만 해도 12명이 죽고 50여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이스라엘과 미국의 분노어린 항의에 한발 물러나서 테러 용의자라며 붙잡아두던 유목민들 200여명을 석방시키고 이동 자유를 허용하면서 이들을 시나이 지역 숙박업 직장을 주면서 이들이 행하던 테러를 줄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들을 고용하면서 종전 고용하던 이집트 국적 종사자들이 해고되는터라, 이들이 분노하는 게 또 문제다

 

게다가, 아직도 유목민들에 대한 차별이 크다. 2008년 엠네스티를 비롯한 국제 인권단체들의 발표에 의하면, 베두인들 가운데 여자와 아이들까지도 이집트 군경에게 잡혀가 수용소에 있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결국 유목민들은 다시 분노하여 2009년 시나이 지역 여러 호텔에서 연이은 폭탄 테러 공격이 다시 시작되면서 이집트 측의 고민은 쌓여만 간다.

 

이집트를 여행한 한국인 여성 여행자의 책에서도 언급된 바 있는데, 시나이 지역의 호텔에서 지내면서 별다른 문제없이 친하게 지낸 종업원들과 사진도 찍었다. 그런데 1년도 안가 그 호텔이 바로 유목민 과격단체 폭탄 공격에 휘말렸다. 깜짝 놀라 국제전화를 해도 그 호텔 측이 받지않아 메일이라도 보냈더니, 한참 시간이 지나 답장메일이 도착했는데 바로 종업원 가운데 한 사람이 보냈다고 한다. 다행히 사진을 찍고 친하게 지내던 종업원들은 하나도 죽지 않았으나, 몇몇은 눈 앞에서 폭발에 휘말려 끔살되어 토막난 이스라엘인 여행자의 시체를 보고 충격에 빠져 일을 그만두고 카이로로 돌아갔다면서 자신도 여기서 일하면 언제 죽을지 몰라 불안감에 빠져 그만둘까 고민중이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지금도 여기 치안은 굉장히 불안하다.

 

2012년 들어서도 여전하여 한국인 및 중국인이 납치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물론 한국인들은 이집트 정부와 베두인 무장단체의 협상으로 전원 석방되었다. 베두인 수감자들 석방을 요구하기 위한 인질인데, 이집트 측도 난감해하는 게 위에 나온 것처럼 베두인들은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테러리스트로 규정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무턱대고 무력을 쓸 수도 없거니와 안 그래도 무바라크 하야 이후 군부에 대한 반발 시위 및 여러 모로 불안정한 자국 사정에 이런 일이 생겼으니

 

201711월에 시나이 반도에서 최악의 테러가 발생하자 이집트의 베두인 부족의 족장들이 이례적으로 테러소탕에 이집트 정부군과 협력할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이건 당연하다. 극단주의 다에쉬같은 것들은 당연히 베두인도 이교자라고 죽이려고 할게 뻔하니....아무리 외면하던 이집트 정부라고 하지만 적어도 이들과 손잡고라도 협력하는게 옳은 판단이다.

 

이집트 요리는 중동-북아프리카 지방의 전통 요리와 함께 오스만 튀르크의 지배를 받는 과정에서 터키 요리 식의 요리법이 가미되었으며, 특히 이집트가 자랑하는 빵은 나일강의 축복을 받아 밀 곡창지대로 손꼽히던 고대부터 유명했다. 헤로도토스가 이집트인들에 대하여 언급할 때 빠지지 않은 게 바로 빵과 맥주를 먹는 점이었을 정도다.

 

추천할 만한 음식은 그곳 사투리로 '샤와르마(shawarma)'라고 부르는 케밥과 타메이야(tameiya)이라는 콩가루 반죽을 기름에 튀긴 것으로 이스라엘에서는 팔라펠(falafel)이라고 부른다. 코프타(qofta)라는 일종의 미트볼과 중동여행을 다녀온 사람들 사이에서 일명 걸레빵이라고 불리는 아에쉬(aesh) 빵이 추천할만하다. 이집트인들은 양의 뇌를 삶아서 빵에 발라먹는것도 좋아하지만 외국인들은 왠지 손을 대지 않게된다고 한다. 그리고 터키 지배를 받아서인지 이 동네 차이도 설탕물이다.() 더불어 바쓰부사라든지 여기에서 즐겨먹는 과자류는 무척 달기로 알아준다.

 

더불어 맛과는 무관하게 식료품 가격이 무척 싸기로 유명한 나라지만 관광객은 제외(). 더불어 지역에 따라 역시 차이가 있다.

 

2000년 초반 이집트를 여행한 여행가 함승모 씨 책에 의하면 사와라는 작은 도시에서 먹을 것을 사고자 먹을 거 파는 집을 한참 찾다가 겨우 영어로 브래드가 희미하게 쓰여있는 집을 발견했다. 들어가보니 역시 수공업 빵집. 그야말로 현대인에게는 웰빙인 빵, 장작을 지펴서 화학조미료나 방부제는 일절 없이 만드는 손맛이 가득한 빵을 굽더란다. 아랍어가 서툰 함씨, 반대로 영어를 거의 못하는 거기 빵집 주인, 그래서 한국 돈으로 당시 320원 정도 돈을 내주자 신문지로 방금 구운 꿀맛같은 빵을 20개가 넘게 싸주더란다! 더불어 주변에 순수 과일만 짜서 생과일 주스 파는 집을 찾아가 온갖 과일을 짠 단 주스를 마시며 빵을 먹었는데 주스값도 100원도 안했단다이는 독재자인 무바라크가 적어도 굶주리진 말자는 정책으로 밀같은 것을 수입하여 엄청나게 싼 값으로 팔거나 보급하면서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

 

그러나 지난 2008년 세계를 강타한 곡물 파동으로 밀값이 오르는 통에 이집트도 빵값이 몇배로 오르게 되었고 이 와중에 여러 물가까지 덩달아 오르면서 민심이 폭발하게 되었다. 그리고 선거에서도 이슬람 과격파 정당들이 대거 약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과거라면 어찌 억지로 해산시켜 막곤 했으나 민심을 눈치보니 그러지도 못한다. 게다가 무바라크도 민주화 혁명으로 무너졌기 때문에 불안한 정국에 따라 매우 유동적으로 변해버렸다.

 

아프리카 나라답게 축구가 가장 인기가 있다. 실력은 카메룬이나 나이지리아, 가나 등에 좀 묻혀서 그렇지 여기도 실력은 아프리카 최강급이며, 국가대표팀에 관한 내용은 이집트 축구 국가대표팀 항목을 참고 바란다.

 

아프리카 클럽 축구에서도 최강급이라 1964년 처음 시작하여 2012년까지 모두 48번 치뤄진 CAF(아프리카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CAF Champions League)에서 이집트 구단이 4강에 진출한 게 30번이나 되어 아프리카 최대 성적이다. 결승진출 18번 및 우승 13번 또한 아프리카 최다 기록(2위인 콩고 민주 공화국이 우승 5번이다)이며 2012년 대회 결승은 알 아흘리가 4년만에 결승에 진출해 2011년 대회를 우승한 튀니지의 에스페랑스와 격돌하여 2-1로 이겨 우승하면서 2012FIFA 클럽 월드컵에 진출했다. 2013년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올랜도 파이러츠 F.C.11무로 제치고 우승하며 2013년 클럽 월드컵에 참가자격을 얻었다. 비록 아시아 챔피언인 광저우 헝다에게 0-2로 패하고 5,6위전에선 북중미 챔피언 CF 몬테레이에게 1-5로 참패했지만.

 

2014년 아프리카 챔피언스리그 대회에서 전대회 우승팀인 이집트 알 아흘리는 예상을 뒤엎고 알 아흘리 SC(리비아)에게 0-1,2-3. 2경기를 다 지면서 토너먼트조차 올라가지 못했다. 그나마 이집트 자말렉이 토너먼트에 올라가 2009년 클럽 월드컵 준우승을 거두며 화제를 모은 콩고 TP 마젬베와 같은 조에서 겨루게 되었다. 그러나 결선 라운드 조예선에서 114패로 조꼴지로 탈락했고 2015년 대회에서도 결선 조예선 라운드에서 이집트 팀으로 홀로 올라온 스모하 SC도 똑같이 114패 조 꼴지로 일찌기 탈락했다.

 

2016년 챔피언스리그 대회에선 모처럼 자말렉이 결승까지 올랐으나 남아공의 마멜로디 선다운스에게 원정에서 0-3으로 패해 홈경기 1-0 승리와 상관없이 골득실로 밀려 준우승으로 그쳐야 했다. 2017년 챔피언스리그에선 알 아흘리가 4강에 올랐는데 튀니지의 에톨 드 드 사헬에게 원정경기를 1-2로 졌다. 1022일에 있을 홈경기 여부로 4년만에 결승에 올라갈지 가려지게 되었다.그리고 홈경기에서 무려 6-2 대승을 거두고 4년만에 결승에 올라갔으나 알 아흘리는 모로코 와이다드 카사블랑카에게 11패로 준우승했다

 

2018년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다시 오른 알 아흘리는 튀지니의 에스페란사 드 튀니스에게 홈에게 3-1로 이겼으나 원정을 0-3으로 패해 2년 연속 준우승해야했고 이집트 리그는 3년연속 콩라인을 기록했다. 2019(정확히는 201819 시즌으로 개편됨)에는 알 아흘리는 8강전에서 또 마멜로디 선다운스에게 덜미를 잡혀 일찍 탈락했는데 선다운스 원정에서 무려 0-5 대패를 당했다. 이로서 이집트 리그는 챔피언스리그에 6년 연속으로 우승 실패했다.

 

이렇게 프로리그인 프리미어 리그 인기가 좋은 건 좋은데, 너무 과열되어 문제. 90년대 후반 이집트 카이로에선 집단 싸움이 벌어졌던 일이 국내 외신보도로 나온 바 있다. 그 원인이... 대가족이 한 공동주택에 모여 살았는데, 아내와 남편이 응원하는 축구팀이 서로 다른 탓에 중계방송을 보다가 응원하던 팀이 지는 것에 화가 난 남편이 아내를 구타했고 이웃에 살던 처남이 누나의 비명을 듣고 와서 이걸 보곤 화내면서 이번에는 처남이 매형을 두들겨팼다. 그러자 근처에서 살던 남편 쪽 친척들도 와서는 남편을 도왔고 처남을 도우려고 처가 사람들도 합세해 집단싸움이 되었다는 웃을 수만은 없는 일이 벌어졌다.

 

201221일 알 아흘리와 알 바스라가 벌이던 리그 경기에서 관중들이 충돌하여 적어도 79명 정도가 죽고 1,000명 이상이 중상을 입는 참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다만, 칼을 숨겨가지고 경기장에 들어와서 벌어진 일이라는 점, 경찰이 개입 안 하고 멀뚱멀뚱 지켜본 점으로 일부러 자연스럽게 폭동이 되도록 기획된 일이 아닌가하는 음모론까지 나오고 있다. 물론 후반부에는 경찰들이 최루탄을 난사하며 진압.

 

2018년에는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의 본선 진출에 성공하였나, 리버풀 FC 소속의 모하메드 살라가 2017-2018 UEFA 챔스리그 결승전에서 팔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러시아전은 출전하지 못했다. 러시아, 우루과이, 사우디아라비아한테도 패하면서 3전 전패를 기록하여 순위도 31위에 그쳤다. 그나마도 32위 꼴지인 파나마는 사상 첫 월드컵 진출이라서 32위 꼴지 성적이 예상되던 게 많기라도 했다. 하지만 이집트는 월드컵 우승을 해 본 적이 있는 우루과이와 홈그라운드의 장본인인 러시아는 어려워도 사우디아라비아는 얼마든지 이겨 1승이라도 이길 전망이 많았지만 빗나간 셈. 1990년 월드컵에 처음 나와 21패를 거둬 역사상 월드컵 본선 1승이 없던 이집트에게 1승 기회였지만 허무하게 사우디전 2-1 역전패로 날렸다. 다만 모하메드 살라가 매 경기에 골을 기록한 점은 그나마 위안. 월드컵 최고령 선수인 에삼 엘 하다리가 이 나라 출신이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이나 영국 런던 박물관(또는 대영박물관),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러시아 에르미타주 박물관같은 세계 4대 박물관은 물론이요, 하다못해 터키 톱카프 황궁박물관에까지 이집트 유물들이 빼곡히 전시될 정도로 많기에 이집트 유물이라면 강대국이 죄다 약탈해먹은게 아닌가 싶어, 정작 '이집트 카이로 박물관에는 유물도 별로 없겠지?'라고 가볍게 둘러보다가 넘쳐나는 유물에 기겁할 정도라고 한다. 이집트에서 가장 크다는 카이로 박물관조차도 전시할 유물들이 너무나도 많아서 전시할 곳이 없어 계단이나 여기저기에 대충 두기까지 한다고. 그야말로 땅만 대충 파도 유적이 넘쳐난다. 실제로 카이로 박물관에 가 보면 4,5천년씩 묵은 조각상과 유물이 그 흔한 유리장 하나 없이 그냥 방치전시되어 있다. 그렇게까지 하는데도 박물관에 전시실이 모자라서 실제 전시되어 있는 유물보다 박물관 창고에서 먼지만 쌓이는 유물이 몇 배는 많고, 어쩔 수 없이 일정 주기로 전시하는 유물을 내부적으로 로테이션을 돌린다고 한다. 7500년 묵은 고대도시가 발굴됐지만 '경이롭다'가 아니라 '대단하지만 그럴법한 동네지'라는 평가가 있는 동네다(...).

 

오죽하면 유럽이나 미국같은 나라 고고학자들이 이렇게 두면 유물들이 훼손될텐데 안타까워하고 프랑스같은 경우엔 이렇게 방치하지 말고 루브르로 가져가서 잘 보관하겠다고 개념말아먹는 헛소리를 하다가 이집트에서 약탈해간 문화재부터 내놓고 그런 소리하라며 까였다. 그런데 참으로 얄궂은 게, 한 양심있는 프랑스인이 이집트 문화재 보호에 엄청나게 기여했다.

 

프랑수아 오귀스트 페르디낭 마리에트(François Auguste Ferdinand Mariette, 18211881)가 바로 그 사람인데, 그도 20대 시절만 해도, 이집트 문화재를 파내 프랑스로 가져가던 자였다. 그러나1858년 이집트로 가서 이집트 최초 근대 박물관을 세우면서 개심해 문화재 보호에 총력을 기울이고 문화재 국외 유출을 법으로까지 막게 하는데 했다.(당시 사이드 샤에게 며칠을 설득하면서 기어코 법으로 만들게 했단다.) 그걸로만 끝낸 게 아니라, 문화재를 단지 돈만 주면 팔던 이집트 사람들에게 문화재의 보호성을 일깨워주고자 교육시설도 만들고 이집트 사람들에게도 문화재 발굴에 관여시키면서 고고학 기술을 전수하게 하는 등 수많은 공로를 남겼다. 무함마드 알리의 아들이자 당시 이집트 왕국을 통치하던 무함마드 사이드 파샤(18221863)가 오벨리스크를 외국 왕족에게 선물로 마구 주는 걸 보고 분노하면서 가차없이 문화재의 소중함을 일갈하면서 꾸짖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당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 내외가 이집트로 와서 전시된 이집트 문화재들을 둘러봤다. 그러다가 황후가 그 가운데 몇몇 문화재에 눈독을 들여 황제에게 프랑스로 가져갈 수 없냐고 했다. 황제도 사이드에게 일단 정중히 부탁했다. 하지만 당시 강대국인 프랑스를 뒤로 한 사실상 협박이었다. 이에 사이드는 문화재 관련 문제는 죄다 마리에트에게 맡겨두었다고 자신은 물러났다. 황제는 프랑스인이라면 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줄 알고 이야기를 했지만 마리에트는 냉담하게 "이미 프랑스 루브르에도 그런 것들이 몇만점은 있는데 왜 또 멀쩡히 있는 것을 욕심내냐면서 위대한 프랑스 황제가 좀도둑같은 짓을 저질러야 되겠는가"라면서 대놓고 앞에서 깠다. 당연히 황제 내외는 분노하면서 그 자리에서 나가버렸고, 얼마 뒤 그는 프랑스 입국이 금지되었다. 하지만 그는 상관없다면서 신경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조수이던 이븐 하지 라우드(18521931, 바로 이 사람이 투탕카멘 유적이 발굴되자 영국으로 빼내려고 하던 걸 필사적으로 막던 당시 이집트 박물관장이다. 마리에트가 없었다면 투탕카멘 마스크는 영국에 가 있었을지도 모른다.)'선생님은 문화재 중 어느 게 가장 좋으세요?'라고 질문하자, 그는 그 즉시 "몽땅 다! 돌조각 하나라도 다 좋아. 함부로 버릴 수 없이 좋지."라고 대답했다. 늘그막에 '대체 왜 그리도 이집트 문화재를 아끼느냐?'며 지인이 질문하자, 그의 대답이, "이 위대한 문화재들이 세워질 때, 우리 프랑스인의 조상인 갈리아인들은 그야말로 야만인처럼 숲에서 짐승을 잡아먹으며 작은 마을 단위로 살아가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때 야만인이라던 우리 프랑스인이 어느새 으스대면서 이 문화재를 부숴가며 제 나라로 훔쳐가는 주제에 이집트인들을 야만인이라고 비웃는다. 그래서 나만이라도 위대한 문화재들을 그 자리에 놔둬야 한다고 마음먹은 것 뿐이다."이다. 문명과 야만의 구분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는 있지만, 찌질한 선민사상과 제국주의 사상에 젖어있던 유럽인들에게 이 사고방식은 그야말로 파격적인 것이었다. 현재 이집트에선 카이로 박물관 입구에 그의 동상을 세워 그를 기리고 있다. 그리고 이 카이로 박물관은 시설이 오래되어서 문화재 보관 및 관리가 어렵다는 의견이 나와서 해외 투자로 건물을 더 현대적으로 고치고 더 크게 만드는 기획에 들어가있다. 그만큼 여태껏 이 박물관 시설 상태가 그다지 안 좋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박물관이라도 미라를 관람하기 위해서는 돈을 내야 하는데 이집트에서는 왕과 왕비 뿐만 아니라 평민들도 시신을 미라로 만들었고 심지어 문자 그대로 개나 소나 다 미라로 만들었기 때문에 동물 미라까지 존재해 미라가 엄청나게 많이 있다고 한다. 문화재에 대한 관리가 본격적으로 이뤄지지 않은 과거에는 이걸 연료()로 쓰기도 했고 심지어 사람이 먹기도 했었다. 워낙 미라를 많이 만들다 보니까 재료가 부족했는지 근처에 굴러다니던 파피루스 뭉치를 대강 그냥 안에 넣고고대 이집트식 이면지 재활용(...) 봉합해버린 미라가 발견된 적이 있다. 여기서 반전은 그 파피루스 뭉치가 현대에는 실전되었던 이름만 전해지던 유명 희극이었다는 점.

 

이집트 벽화는 미술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고대 이집트 벽화를 보면 얼굴은 반드시 측면을 보고 있고, 눈은 정면에서 본 모습이며, 상반신 몸은 반드시 앞을 보아 양 어깨가 대칭에 가깝게 보이도록 그리며, 하반신은 또 측면으로 그려 두었다. 이는 당시 미술에서 사람에 대한 시각을 알려주는데,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람의 양팔, 양다리 전부 그려넣어야 '완성된 사람의 그림'으로 인식했다. 사실주의 그림에서 측면으로 선 사람의 한쪽 팔이 몸에 가리어 안보인다면, 고대 이집트인은 그를 한쪽 팔만 있는 사람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이집트 벽화 인물들은 전부 애꾸

 

2000년대에 여하튼 프랑스나 미국이나 여러 나라에 강압책을 써가면서 고대문화유산을 상당히 되돌려 받았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으로부터 도난당한 파라오시대 고분벽화 5점을 돌려받았으며.영국 런던 대학교가 보유하고 있던 석기시대 유물 등 25000, 미국이 갖고 있던 3000년된 목관 등등 유럽과 미국에게 3만점이 넘는 이집트 고대 유물을 돌려받았다. 이집트 문화재청장인 자히 하와스 박사가 이뤄낸 결과. 문젠 이 양반이 반유대주의적인 시각을 보이며 유대인을 역사적으로 노예민족이라고 비하하며 노예 주제에 팔레스타인에게 미쳐 날뛴다느니 이집트에게 터무니없는 10계 허구로 우쭐거린다든지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집트 고고학계에서 큰 손이라서 영향력이 쎄서 이집트 고대유물 연구에 그의 허락이 없으면 불가능하기에 미국이나 유럽, 캐나다 등 서방 선진국의 학자들도 마냥 대들지 못하고 있다.

 

중동, 북아프리카 아랍권, 이슬람권 세계에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국가인데도 불구하고 주변의 이웃한 나라들이나 몇몇 이슬람 국가들과는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 4차례씩이나 중동 전쟁을 벌였던 이스라엘은 말할 것도 없고, 종교도 같은 이슬람교를 믿고 언어도 아랍어를 쓰는 리비아, 수단 같은 주변 아랍국들과도 상당히 앙숙이다. 리비아와 관계는 고대 이집트 시기때부터 리비아가 이집트에게 일방적으로 침략과 약탈에 시달려온데다 1977년에 국경 지역에서 전쟁까지 벌어졌다. 수단과는 할라이브라는 항구 도시와 그 외곽 지역을 놓고 국경, 영토 분쟁이 진행중이다. 1902년 국경선이 조정되면서 할라이브가 수단으로 편입되었기 때문. 반면에 비르 타윌은 이집트로 편입되었으나 이집트도 수단도 영유권을 포기하여 사실상 무주지가 되었다.

 

거기다 같은 수니파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사우디아라비아나 이라크, 카타르, 터키 등하고도 사이가 원만하지 못하며, 이란과는 1979, 이란 혁명으로 축출된 팔레비 2세 전 국왕의 입국을 받아줬다는 이유로 현재까지 양국 수교가 단절된 상태이다.

 

원교근공의 논리가 예나 지금이나 적용되는지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나미비아, 탄자니아, 케냐, 모잠비크, 잠비아, 말라위, 마다가스카르, 나이지리아, 우간다,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등 몆몆 아프리카 먼 나라들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모잠비크의 경우 모잠비크가 1960, 70년대 포르투갈의 식민지였을 시절에 이집트가 포르투갈과 식민지 독립 전쟁을 벌이던 모잠비크를 지원한 적이 있어 양국관계가 대체로 좋은 편이다.

 

북한과는 1963년 일찍이 대사급 수교를 먼저하였고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과 교전중이라 이에 북한이 이스라엘의 적국이었던 이집트, 시리아 등에 군사적 지원을 하게 된 계기로 북한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왔다. 북한 역시 이집트를 중동, 아프리카 외교의 주요 거점으로 삼았고, 이런 영향으로 대한민국과의 수교관계는 1995년까지 영사급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가 1995년에 가서야 남북한 모두 대사급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이슬람 아랍 동맹이면서도 다른 아랍 나라들과 사이가 안 좋다. 아무래도 이스라엘과 외교관계를 맺은 점도 있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요르단도 마찬가지임에도 이집트만 유독 비난받는다. 이집트에서 아랍어 공부를 한 김동문 목사는 요르단 가서 아랍어를 하자 요르단 사람들이 "아랍어이긴 하지만, 당신 말투를 보니 이집트 쪽 아랍어를 배우셨군요"라면서 그다지 안 좋은 말투로 대하여 황당했다고 한다. 대놓고 "당신은 왜 우리 노예였던 사람들 말 쓰는가?"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그가 요르단에서 오래 살면서 느낀 게 아랍 지역 사람들이 은근히 이집트에 대하여 거부감도 있다고 한다. 아랍 여러 산유국에 운전사 등 고된 일을 하는 이들은 이집트인들이 꽤 많다 보니 아랍에서도 유달리 후진국 신세로 우습게 보인다는 것. 그렇지만 이집트 나라, 정부는 제법 돈이 많긴 하다.(위에 언급한대로 자원도 꽤 있고 관광으로는 이슬람 아랍 동맹에선 가장 유명한 나라) 즉 국민이 직업을 찾고자 다른 산유국으로 가서 일하다 보니 저런 인식이 자리잡힌 모양.

 

이를 이집트에서도 모를 리 없지만 우물이 급한 게 자기들이라 저런 아랍 동맹국들의 인식에 별다른 논쟁을 벌이지 않는데, 그래도 속은 타들어가서인지 이집트에서 만들어지는 연극이나 영화나 드라마로 은근히 아랍 동맹 다른 산유국을 까면서 작은 위안을 삼기도 한다. 1990년대에 만들어져서 인기를 모은 연극 "알라가 말하길"에선 다른 아랍 나라들 사람을 맡은 배우들을 등장시켜 풍자한 바 있다.다국적 아랍동맹 무슬림들이 하나씩 모여 지내는 숙소에서 한 아랍인이 납치당했다는 소식을 듣는다.이를 두고 각 아랍인들을 풍다한다. 이를테면 사우디아라비아인으로 나오는 배우는 아주 큰 재앙이 닥쳐도 와하비즘의 형님이라면서, 아무 일도 안하고 잘난 척하면서 아무런 답변도 못 내놓고 나서지도 않는다. 카타르 인으로 나오는 배우는 사우디 인에게 굽신거리는 예스맨으로 나오고 역시 지들도 잘났다라고 할 뿐. 똑같다. 쿠웨이트인은 옆에 이라크인이랑 걸프전쟁 때문에 욕하고 서로 싸우느냐 나설 상황도 아니다. 예멘인은 남북으로 나누어서 싸운다라고 역시 지들이 급하다고 하고 바레인인과 아랍에미리트인이 그나마 나서서 이러자고 하지만 모두가 서로 저렇게 따로국밥에서 나서지 않고 서로 싸우거나 잘난척만 하니 짜증내면서 늬들끼리 잘 해먹어라라고 포기한다. 결국 이집트인이 나와서 이렇게 일이 해결되었다고 할때 다들 따로 놀고 따로 이렇게 굴면서 이집트인은 어이를 날린 얼굴로 보고 노래하며 끝난다.

 

이렇듯 다른 아랍 동맹 사람들은 잘난 척하기만 하고 전혀 실속이 없다고 비웃고 풍자한다. 이 연극은 전회매진되면서 이집트 문화부 장관상, 최고 연극대상을 비롯한 상들도 휩쓸었는데 당연히 다른 아랍 나라들에선 엄청나게 비난했다. 물론 이집트 측은 개의치 않았으며, 독재자 무바라크도 3번을 연이어 보러갔다며 칭찬했다고. 이집트가 연극, 영화같은 미디어가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아랍국가에 비해 여성의 사회진출이 자유롭기 때문인데 가령 여성이 TV에 출연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사우디나 걸프 지역 국가들에서는 여성캐스터나 아나운서로 이집트 여성을 고용한다. 최근 이집트가 사우디와의 경제협정으로 아카바 만의 두 개섬을 사우디에 넘기면서 2개섬은 사우디의 영토가 되었다.

 

이탈리아는 이집트와의 외교 관계는 어느 정도 있다. 그리고 고대 시절 로마 제국의 일부였지만, 이탈리아 지역은 서로마 제국에 속하고 반대로 이집트 지역은 동로마 제국에 속하게 되었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 이탈리아 지역은 여러 게르만 왕조가 세워지거나 동로마 제국의 영토로 바뀐 반면, 이집트는 아랍 세력의 침입이전까지는 동로마 제국의 영토로 되었다고 아랍의 정복을 받고 아랍화되면서 이탈리아와는 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무역 파트너로 급부상할 정도로 이어졌으나, 그 후 2016년 초반이 되어야 유학생 관련 실종, 살해 사건을 일으켜서 외교 관계가 인도 못지 않은 악화 단계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EU의 무역 파트너로 삼고 있는 이집트는 결국 양국 주재 대사끼리 서로 초치당하게 되는 일이 있었고, 2차 세계 대전 당시 이탈리아가 이집트를 침공시켰던 이력이 있어 역사적으로는 그리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이탈리아 측에서 16개월 만에 대사를 다시 파견하기로 결정하면서 관계가 좋아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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