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하그리브스(James Hargreaves, 1720년∼1778년) 제니의 방적기
하그리브스는 랭커셔주에서 출생하여 20세 때까지 방적업이 성한 랭커셔 가까이에서 목수 일과 베 짜는 일을 하다가 방적기의 개량을 위해 연구를 한다. 그 무렵, 영국의 방적기는 소를 몰아 움직였으며, 한 대의 기계에 방추(가락)가 하나뿐이었다. 하그리브스는 처음으로 동력을 사용하여 8개의 방추가 달린 기계를 만들었으며, 후에 80본이나 짤 수 있는 기계를 발명하여 ‘제니 방적기’라 이름지었다. 이 발명으로 영국의 산업 혁명이 촉진되었다.
면직물업의 기계화 과정을 일별하면 방직(紡織·옷감 짜기)과 방적(紡績·실잣기) 부문에서 교대로 혁신이 일어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방직이 너무 발전해서 실이 모자라게 되면 곧 방적 분야에서 큰 발전이 일어나고, 그러면 다시 방직 부문에서 돌파가 이루어지는 식이었다. 중요한 첫 발명은 1733년 존 케이의 플라잉셔틀(‘날아다니는 북’이라는 뜻, 한자어로 비사(飛梭)라고도 한다)이었다. 이로 인해 직조 속도가 급격하게 빨라지면서 미처 실을 충분하게 대지 못해 병목 현상이 생겨났다.
이 문제를 푼 사람은 제임스 하그리브스라는 목수 출신의 발명가였다. 그가 1765년에 개발한 제니방적기는 수동으로 조작하는 크랭크를 이용해서 여러 개의 물레 가락을 한 번에 작동시키는 기계였다. 이 기계 하나로 한 사람이 무려 30∼40명에 해당하는 일을 하게 되자 일자리를 빼앗긴 여인들이 하그리브스의 작업장에 쳐들어가서 기계를 부수는 일까지 벌어졌다. 문제는 이 기계가 아주 단순해서 누구나 쉽게 모방해서 만들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하그리브스는 특허 소송에 몰두했으나 끝내 큰 수익을 얻지 못하고 죽었다.
리처드 아크라이트는 이 기계를 더욱 개량하여 수력을 이용해서 크랭크를 돌림으로써 이제 손을 쓸 필요도 없는 수력방적기를 만들어냈다. 1779년 아크라이트는 2000개의 물레 가락을 갖춘 대형 방적공장을 세웠다. 그에게도 역시 마찬가지 일이 일어났다. 일자리를 잃은 여공들이 달려들어서 공장에 불을 지르고 기계를 파괴했고, 특허 소송에서도 토머스 하이즈라는 인물이 자신이 먼저 기계를 발명했다는 주장을 편 데 대해 반증을 제시하지 못해 패소했다. 그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이후 그의 발명품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이로 인해 방적기가 영국 전역에 확산되었다. 다시 1779년에는 새뮤얼 크럼프턴이라는 기계기술자가 제니방적기와 수력방적기의 장점을 섞은 뮬(mule, 암말과 수나귀 사이에 태어난 노새를 뜻하는 말로 결국 두 종류의 기계를 합쳤다는 의미이다) 방적기를 만들었다. 이제 실은 충분히 공급되는데, 방직 부문에서 병목현상이 일어났다.
뮬 방적기에 돌파구를 마련한 사람은 성직자 출신인 에드먼드 카트라이트로서 그는 1784년에 증기기관을 이용한 자동방직기를 만들었다. 이번에도 역시 직공들이 달려들어 불을 지르며 항의했지만, 기계화는 어쩔 수 없는 시대의 대세였다. 18세기 말에는 이런 기계들 덕택에 영국이 인도를 제치고 세계 최고의 면직물 생산 및 수출국이 되었다. 1775년만 해도 영국에서 생산된 캘리코는 5만야드, 수입은 211만야드였는데, 1783년이 되자 생산량은 2358만야드에 달했으나 수입은 78만야드에 불과했다. 수천 년 동안 인도가 지켜온 세계 면직물 왕국의 수도 자리가 순식간에 영국에 넘어가고 만 것이다.
현대의 면화 수확기계 그러나 산업화는 결코 당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공장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은 차마 믿기 힘들 정도였다. 노동자들은 극빈자로 전락했고, 여성과 아동이 비참한 지경에서 일을 해야 했다. 아이들을 책임지고 있는 교구 성당은 고작 4∼5세의 아이들을 주저 없이 공장으로 보냈다. 아이들은 하루에 12시간, 심지어 16시간씩 7년 동안 일하는 조건의 견습 계약에 얽매여 있었다. 1787년 조사위원회가 밝힌 아동 노동 실태는 가히 충격적이다. 10살도 안 된 소녀가 강간을 당하기도 하고, 사소한 실수를 저지른 아이를 몇 시간이고 가동 중인 기계 위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바디가 왔다 갔다 할 때마다 몸을 들어올려 피하도록 만들었다.
구대륙의 산업화는 신대륙의 노예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지만 여전히 옛 모국에 면화를 공급했다. 아직 기계화가 안 된 면화 재배와 수확 및 가공 부문에는 수많은 흑인 노예들이 동원되었다. 봄이 지나고 여름으로 넘어갈 때면 광활한 미국 남부 지역에는 흰 목화 꽃이 만발한다. 이 꽃이 분홍색으로 변하다가 노란색이나 붉은색으로 변한 다음 꽃잎이 떨어진다. 그러면 꼬투리같이 생긴 열매가 열리는데, 이 열매를 열면 솜털에 싸인 씨앗들이 나온다. 바로 여기에서 중요한 섬유를 얻는 것이다. 수확기가 되면 수많은 인력이 동원되어 1헥타르에 약 400만개씩 열리는 이 꼬투리를 하나하나 따서 마대에 담는다. 그리고는 이것들을 모두 일일이 손으로 까는 지겨운 일을 해야 했다. 노예 노동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렇게 원료를 확보하여 맨체스터의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된 직물은 전세계로 수출되었다. 그 중요한 수입국 중에는 인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왕년의 세계 최고 직물 수출국 인도는 이제 ‘해가 지지 않는 제국’ 영국에 가려 항상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어두침침한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인도의 농촌 인력은 고작 면화 재배와 수확에 동원되었다. 영국 상품의 수출 확대를 위해 인도에서는 직조 행위가 금지됐다. 이를 위반한 방직공은 남녀 불문하고 오른손을 절단당했다. 마하트마 간디가 감옥에서 직접 물레를 돌리는 퍼포먼스를 한 것은 폭압적인 서구 산업주의의 폐해에서 벗어나 예전의 단순하고 경건한 가난의 삶으로 되돌아가자는 취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