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뮤얼 크롬프턴(Samuel Crompton, 1753년∼1827년) 뮬 방적기
새뮤얼 크럼프턴(Samuel Crompton, 1753년∼1827년)은 영국의 발명가이다. 방적을 직업으로 하고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16세에 하그리브스 방적기를 배우고 그것의 개량에 힘썼다. 1779년 제니 방적기와 수력 방적기의 원리를 합쳐 뮬 방적기를 발명하였다. 이 방적기는 성능이 좋아 널리 보급되었으나, 특허를 얻지 못하여 큰돈을 벌지 못하였다. 그리고 제임스 와트에 가려지는 바람에 이름도 그다지 뜨지는 않았다
제니 방적기와 수력 방적기의 발명으로 영국은 캘리코 면직물(30∼40번의 면사를 사용함) 부분에서 인도산 면직물을 추월하게 되었으나, 그보다 훨씬 가는 실을 요구하는 머슬린 부분에서는 여전히 뒤쳐졌습니다. 이는 1779년 크럼프턴에 의해 발명된 뮬 방적기에 의해 해결되었습니다. 뮬 방적기는 제니 방적기를 조금 개량해 롤러 드래프팅으로 실을 끌어올리는 기술을 추가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초기에 뮬 방적기는 소규모였고, 농촌 가내수공업에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1790년대에 뮬 방적기에 증기기관을 이용하게 되면서 점차 대규모 공장에서 쓰이게 되었습니 다. 뮬 방적기에 증기기관을 달게 되면서 생산량은 급증했고, 1789년에 5만 추에 불과했던 뮬 방적기는 1812년에는 420만추로 급증했습니다. 뮬 방적기 덕에 19세기 초 영국의 면직물은 가격 경쟁력에서 인도산을 압도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18세기 영국의 면직물 생산량이 급증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과학기술의 발달이 아니었습니다. 동시기 프랑스도 이러한 방적기들을 개발시킬 기술 정도는 보유하고 있었고(증기기관을 빼면), 제니 방적기는 프랑스에도 전파되었습니다. 하지만 제니 방적기 등의 방직기계들은 18세기 영국에서는 광범위하게 이용된 반면 프랑스에서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가령 1790년 영국에는 20,000대의 제니 방적기가 있었지만 프랑스에는 고작 900대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영국의 비싼 노동자 임금이었습니다. 프랑스 노동자들의 임금은 비교적 낮은 편이었기에, 굳이 신기술을 도입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프랑스에서 제니 방적기 한대의 가격은 280 리브르였는데, 노동자의 일당은 3/4 리브르였습니다. 때문에 방적기 한대의 가격이 노동자의 373일치 임금과 맞먹었습니다. 반면 영국에서 제니 방적기 한대의 가격은 140 실링이었고, 노동자의 일당은 1 실링이었습니다. 방적기 한대의 가격이 노동자의 140일치 임금과 맞먹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영국에서는 더 많은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 보다 방직기를 사들이는 것이 싸게 먹힌 셈입니다. 이런 이유로 18세기 영국에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방적기계들이 개발되었고, 이것들이 광범위하게 이용될 수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다른 지역보다 훨씬 높은 영국의 노동자 임금은 방직기술의 개발을 촉진시켰고, 다양한 기계들의 발명으로 인해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