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뮤얼 핀리 브리즈 모스(Samuel Finley Breese Morse, 1791년∼1872년)
새뮤얼 핀리 브리즈 모스(Samuel Finley Breese Morse, 1791년 4월 27일∼1872년 4월 2일)는 미국의 화가 겸 발명가이다.
매사추세츠주에서 출생하여, 예일 대학교를 졸업한 뒤, 화가가 되기 위하여 1811년 영국으로 건너가 그림 공부를 하였다. 1815년 귀국하여 열심히 그림을 그렸으나 크게 성공하지 못하였다.
1825년 고향을 떠나 워싱턴D.C에서 미국 독립전쟁의 영웅 프랑스 라파예트 후작의 모습을 그릴 때 말을 타고 급히 달려온 메신저가 ‘아내가 아프다’는 내용의 아버지가 쓴 편지를 전해줬다. 모스는 즉시 뉴헤이븐의 집으로 돌아갔지만 아내는 세상을 떠났고 장례식까지 끝난 뒤였다. 아내의 임종을 하지 못한데 자책감을 느낀 모스는 ‘어떻게 하면 소식을 빠르게, 멀리까지 전달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골몰한 끝에 1837년 모스 전신기를 만들었다. 1844년 5월 24일은 워싱턴 D.C와 볼티모어간에 세계 최초로 전신이 공식 개통한 날이다. 그의 전신 방식과 모스 부호는 세계적으로 채택되었으며 해저 전신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838년 1월 6일은 당시로는 획기적인 전신연락 시스템인 모르스 부호(Morse Code)가 샤무엘 모르스(Samuel Morse)에 의해 뉴저지 모리스타운의 스피드웰 제철소에서 사상 처음으로 시연된 날이다. 전기신호를 전선에 전송하는 데 사용되는 전신(電信, telegraph)은 결국 장거리 통신에 혁명을 일으켜 1920년대와 1930년대에 큰 인기를 얻었으며, 장거리 통신의 기린아로 등장하게 됩니다. 이 모스부호가 전신연락용으로 사용된 것은 1844년 발명자인 모스에 의해서 워싱턴과 볼티모어 사이의 전신연락에 사용된 것이 최초이다.
모스부호는, 1832년 샤무엘 모스가 유럽 여행에서 귀국하는 뉴욕행 기선(汽船) 슈리호 선상에서 전신기에 대한 착상과 고안을 했고, 그 때 그는 전보문 전송은 숫자에 의해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그 숫자는 점의 수와 점과 점 사이의 간격으로 표시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모스는 숫자로 전문을 전송하기 위하여 일정한 숫자를 각 단어 및 간단한 문장에 맞추어 은어표(隱語表)를 생각해 내었다. 이 은어표는 91페이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페이지에는 단어와 상용문구를 91개씩 기입하고 페이지와 행(行)을 지시함으로써 약 8,000어 정도의 어구(語句)를 전송할 수 있게 조립해 놓았다.
샤뮤엘 모스(1791년∼1871년)는 예일대학에서 예술과 전기공학에 관심을 가졌으며, 졸업 후 화가가 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모스가 모스 부호를 처음으로 만든 것은 맞지만, 독창적 아이디어는 아니었고, 사실은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을 가로챈 것이었다. 전신을 실제로 발명한 사람은 프린스턴 대학의 조셉 헨리(Joseph Henry) 교수로 1831년에 발명했다. 그는 ‘전선을 통한 암호화된 전기 자극으로 의사소통을 한다.’라는, 전신의 기초적 개념을 고안했고 장치 실용화에 필요한 필수적 구조를 다 설계했다. 그러나 그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특허를 신청할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 대신 우리가 아는 모스가 그것을 가로채 자신의 이름으로 특허를 받았다. 모스는 헨리의 논문 대부분을 표절했으며 여의치 않을 때에는 아무 거리낌 없이 헨리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헨리는 수년 동안 그를 격려하고 도움을 줬지만 훗날 모스가 전신으로 엄청난 부자가 되고 명예를 쌓은 이후에는 자신의 멘토에게 진 빚을 전혀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모스는 안 좋은 인격으로도 유명했었는데, 지나치게 보수적이었고 노예제를 전폭적으로 지지한데다 당시 사람들에게서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조부가 프린스턴 대학 학장이라 뒷배경도 빵빵하고 이름이 잘 알려진 성공한 화가이자 영국왕립학회 회원이었던 그가 왜 자신의 생업을 관두고 전신에 뛰어들었는지는 미스터리다. 거기에다 파리 방문 당시 사진술을 발명한 루이 다게르(Louis Daguerre)를 찾아가 새로 발명한 사진 촬영술을 보여달라고 설득한 뒤 미국에 돌아와 그 방식대로 사진을 찍고 판매하는 짓을 저지르는가 하면, 한가할 때 연구하려고 루이 브레게(Louis Breguet)가 발명한 장거리 통신에 중요한 자석을 훔치기도 했다. 이 정도면 뇌물에 깡패까지 동원했던 에디슨을 뛰어넘는 수준이다.
그렇게 모스는 5년 동안 꾸준히 악행을 해서 워싱턴에서 볼티모어까지 약 64km 구간에 대한 전신 가설비용으로 3만 달러의 예산을 얻어냈고, 1844년 5월 24일 전신선이 완공됐다. 모스와 지지자들은 국회의사당의 구 대법원 판사실에 모여 모스가 모스부호를 사용해 처음으로 전신 메시지를 전송하는 것을 지켜보았는데 모스는 특허청장의 딸인 일곱 살 어린이에게 최초의 메시지를 부탁했고 그 어린이는 민수기 23장 23절의 구절 “하느님께서 이렇듯이 큰일을 하셨구나(what hath God wrought)”를 선택했다.
모스는 남북전쟁 때도 열렬히 남부를 지지했기에 남북전쟁이 끝나고 정치적으로 매장되었지만 그동안 벌어들인 막대한 돈으로 편히 살다가 천수를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