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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 이야기

영국 런던 수정궁(The Crystal Palace)

작성자管韻|작성시간20.07.04|조회수421 목록 댓글 0


영국 런던 수정궁(The Crystal Palace)

 






 

1851년 영국 런던의 하이드 파크에서 일반적으로 세계 첫 박람회로 인정하는 1851 런던 엑스포를 위해 규격화된 주철 구조물과 유리만으로 만들어진 대규모 건물로, 철골 구조를 대중에게 널리 각인시켰다. 철제나 목제 골조와 유리를 중심으로 하는 온실 설계로 명성을 얻은 영국의 건축가 조셉 팩스턴 경(Sir J. Paxton)의 설계를 기초로, 개최연도에 맞춰 좌우 1,851피트(564m) 길이의 건물로, 석재나 벽돌을 전혀 쓰지 않고 유리와 철제 빔만으로 지어진 당시 최신 건축기술의 표본과도 같은 건물이었다.

 

건설 배경을 살펴보면, 1849년 왕립예술협회의 헨리 콜이 파리 박람회에 다녀오고 열폭해서, “프랑스만 박람회 여는 줄 알아? 우리도 박람회 열 수 있어!”를 외치고 다른 고위층들을 설득해서 박람회 개최를 전격 결정했다. 수정궁은 박람회를 열기 위한 거대한 박람회장으로 기획되었다.

 

애초에 프로젝트 일정이 빡빡하기 그지 없었다. 본 건물을 기획하면서, 총 공사기간을 16개월 정도로 잡아 사실상 성공 여부가 불투명했다. 그러나 신예 건축가 조셉 팩스턴의 설계가 너무나 뛰어나, 일정내에 건설되는 것은 물론, 실제 공사기간을 5개월로 줄일 수 있었다.

 

사실 팩스턴은 전문적인 건축 설계자는 아니었다. 정원, 공원 설계에서 젊은 나이에 인정을 받기 시작한 조경업자에 가깝다고 하는 것이 적절한 설명이다. 조경업자로서 자신에게 익숙한 철제/목제 골조와 유리를 중심으로 하는 온실에서 영감을 얻어 2주 동안 초안을 작성하고, 그 초안은 결국 다른 200여개의 제안을 물리치고 채택된다.

 

이와 같은 건설은 이전 기술 수준으로 불가능했던 유리의 대량생산 문제가 해결되는 시점에 이루어져 가능했다. 판유리의 경제적인 생산법 - 냉각이 빠르고 광택을 내기가 쉬운 - 이 보편화되어 판재 유리를 대량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그에 더해 사회적, 제도적 변화가 수정궁의 건설에 큰 역할을 하였다. 창문세와 유리세가 폐지되어 사회적으로 유리 수요가 증가하고 이에 따라 생산시설이 증가하고 유리판의 값은 떨어졌다. 세금이 폐지된 이후 팩스턴의 설계가 나왔을 때는, 이전 판유리에 비해 절반으로 값이 떨어져 유리궁전의 건설을 가능하게 했다.

 

박람회 폐회 후에는 일시적으로 해체되어 1854년에 원래 위치에서 시드넘으로 옮겨 더 큰 규모로 개축되었고, 온실, 콘서트홀, 박물관, 미술관이 갖추어진 복합문화공간으로 많은 관람객을 끌어모으는 런던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건축 양식이 시간이 지나면서 식상해지게 되어 1909년에 이르면 운영업체가 파산하고 말았고, 이후에는 영국 정부가 직접 매입하여 운영하다가 19361130일 화재로 전소되었다. 화재 소식을 들은 윈스턴 처칠은 "한 시대의 끝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며, 이후 재건되지는 못했다. 화재 이후 해당 부지는 공원화되었고, 불에 타지 않은 석재 기단부 및 계단 등이 남아 있다.

 

수정궁은 유리와 철을 사용한 혁신적인 건물이었음에도 건물의 짧은 기둥간의 간격 등은 짧아 여전히 구시대적이란 인상이 남아있지만, 1869년에 지어진 세인트 판크라스 역은 기둥간의 거리를 73m로 늘려 영국 건축의 위상을 한층 더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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