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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 이야기

만국 박람회(Exposition Universelle)

작성자管韻|작성시간20.07.04|조회수766 목록 댓글 0


만국 박람회(Exposition Universelle)

 







 

세계박람회의 효시는 1851년 영국에서 열린 런던 만국 산업박람회이다.

 

당시에는 총 25개국이 박람회에 참가했다. 영국이 박람회를 개최한 목적은 무역을 대대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였다.

 

세계 최초로 개최된 만국 박람회는 주최국 영국이 부의 절정에 올랐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상징이었다. 영국은 이 박람회를 통해 산업 최강국의 문명과 부유함을 전 세계에 과시했다.

 

당시의 전시장 건물은 전부 유리와 강철로 지어져 '수정궁'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건물 부지 면적은 19 에이커(1에이커는 약 4,047 sqm), 높이 20.7m, rlfdl 563m로 규모가 런던 성바오로 대성당의 4배에 달했다. 수천 명의 장인이 동원돼 22주간의 작업 끝에 완공됐으며, 건설비는 8만 파운드가 넘게 들었다. '수정궁'에 자사 제품을 전시한 업체의 수는 무려 14,000개에 이르렀다.

그중 절반정도는 영국산 제품이 차지했다. 당시 영국산 전시품은 거의 대부분 공산품이었다. 이에 반해 다른 참가국의 전시품은 대부분 농산품과 수공업 제품이었다. 홀입구에는 무게가 24톤에 달하는 커다란 석탄 덩어리가 진열돼 있어서 방문객들은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현대 산업의 거대한 위력을 실감했다. 영국관에는 자동 방적기, 방직기, 700마력짜리 선박엔진, 무게 31톤짜리 기관차, 하중이 1,144톤에 이르는 수압기뿐만 아니라 각종 기중기, 압력기, 스팀 해머, 선반, 터널, 교량 및 증기선의 모형,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증기 터빈 등이 진열돼 있었다.

 

이밖에도 성냥, 볼펜, 편지봉투 및 1840년에 영국이 세계 최초로 발행한 우표를 망라한 소비 제품도 볼 수 있었다. 박람회가 개최되자 빅토리아 여왕에서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영국 사회 전체는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빅토리아 여왕은 박람회 개막식 당일에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51일은 영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날이다. 오늘 유사 이래 가장 아름답고 장엄하면서도 민심을 울리는 경관이 펼쳐졌다. 이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앨버트(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의 성공이기도 하다. 오늘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하루이다. 지금 내 기분은 뭐라고 더 표현할 방법이 없다. 참으로 위대한 성공이 아닐 수 없다."

 

수천 수만 명의 영국인들은 두 눈에 눈물을 머금고 질서정연하게 줄을 지어 전시장에 입장했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 같이 기쁨과 자긍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유명한 소설가 샬롯 브론테는 다섯 번이나 박람회를 참관한 다음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고 있다.

 

박람회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은 특정한 물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전시품들이 한곳에 모여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박람회를 이루어냈습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인류가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산업적 성과를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곳은 마치 아라비아 신화에 나오는 신들이 만들어낸 커다란 장터를 방불케 합니다. 마법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세계 각지의 물건들을 전부 이곳에 가져다놓을 수 있겠습니까? 산업자본주의의 위력은 정말이지 대단합니다. 마치 자연을 넘어서는 한 쌍의 손처럼 이번 박람회 전시품들의 다채로운 매력을 사방에 발산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시카고박람회 참가국은 총 47개국이었는데 한국은 중국·일본과 함께 동등한 자격으로 참가하여 정식으로 한국관을 개설하고 출품하였다. 정경원(鄭敬源)은 출품사무대원(出品事務大員)으로 부임하여 그때까지 완공하지 못한 한국관을 완공하고 12명이 출품한 가마·관복·부채·짚신·화승포 등 21종의 16궤 물품을 전시하였다. 당시 미국에 있던 윤치호는 한국의 출품이 빈약하기 그지없고 부끄러울 정도라고 평가하였다. 정경원은 미국에서 약 6개월간 머물렀는데, 그때의 체험을 여러 형식의 글로 남겨놓았다.

 

한국인이 세계박람회에 참석한 것은 1883년 보빙사(報聘使)로 미국에 파견된 민영익(閔泳翊) 일행이었다. 하지만 이때의 참가는 단순한 관람자로서의 입장에 불과하였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고 이듬해 푸트(Lucius H. Foote) 공사가 부임하자 1883년 보빙사절로 미국에 파견된 민영익·홍영식(洪英植서광범(徐光範) 등이 93일부터 개최된 보스턴박람회를 견학하였다. 이때 민영익이 박람회장을 방문한 뒤 소지하고 있던 자기·화병·주전자 등을 내놓았다고 하지만, 이는 출품 대원 자격이 아닌 비공식적인 일이었다.

 

실록에 등장하는 미국박람회는 1893년 미국 시카고에서 개최되었던 콜럼버스 세계박람회(World’s Columbian Exposition, 이하 시카고박람회로 약칭)를 지칭하였다.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400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된 시카고박람회는 한국이 참석한 최초의 세계박람회였다. 시카고박람회 참가국은 47개국으로 한국은 중국·일본과 함께 동등한 자격으로 참가하고, 정식으로 한국관을 개설하고 출품하였다. 민영익의 보스턴박람회 참관이 단순한 관람국의 입장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시카고박람회를 계기로 한국은 세계박람회에 독립적인 참가국으로서의 자격을 갖게 된 것이었다.

 

고종은 1893312일에 출품사무대원으로 정경원을 임명하였다. 공식적인 박람회대표단은 행정사무원 최문현(崔文鉉)과 통역사 안기선(安琪善), 그리고 축하사절단인 국악단원 10명 등 모두 13명으로 구성되었다. 시카고 현지에서는 미국 유학생 박영규와 서병규가 통역으로 임명되어 통역에 익숙하지 않은 안기선의 업무를 대신하였다. 국악단원들은 51일 개막일에 클리블랜드 대통령이 조선전시관이 소재한 제품전시관을 지날 때 풍악을 올린 뒤, 경비 절약을 이유로 53일 귀국길에 올랐다.

 

박람회대표단 일행은 1893325일에 부산항을 출발하여 일본 시모노세키, 고베, 요코하마를 경유하여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428일 시카고 유니온역에 도착했다. 한국관은 히긴보담의 설계로 이채현 대리공사에 의하여 제품전시관 내 BC-D 20-23에 개설하였다. 정경원은 그때까지 완공되지 못한 한국관을 완공하고 12명이 출품한 가마·관복·부채·짚신·화승포 등 21종의 16궤 물품을 전시하였다. 이 중 5종은 박람회 당국으로부터 메달을 받을 정도로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정경원이 귀국한 뒤 고종과 행한 문답에 의하면, 5종의 물품은, 옷감·문발·자리·자개장·수를 놓아 만든 병풍이었다. 한국 물건들에 호기심과 관심을 가진 외국인 관람자들을 일일이 응대할 수 없어 물품명과 용도를 종이에 써서 물품에 붙여 놓았다고도 했다.

 

하지만 밴크로프트(Hubert Howe Bancroft)는 한국관을 둘러보고 장난감 같은 조선 전시관에 볼품없는 출품이었다는 감상평을 내놓았다. 당시 미국에 체재하고 있던 윤치호 또한 시카고박람회를 구경하고 다음과 같은 감상을 남겼는데, 관람자의 찬사를 받는 일본 전시관에 비하여 한국의 출품은 빈약하기 그지없고 부끄러울 지경이라고 평가하였다.

 

박람회에서 두 낮과 밤을 보냈다. 건물의 웅장함을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중국 전시관은 아주 형편이 없다. 상아조각 외에는 멋과 섬세함이 도저히 중국 기술이라고 볼 수 없다. 중국화에는 보잘것없는 무늬들뿐인데! 일본 전시관은 모두가 찬사를 보낸다. 일본 사람들이 자부심을 가질 것이다. 시암과 버마도 전시관을 내었다. 조선도 조선 기술, 세련되지 못하고 모자란 것들을 모아 작은 전시관을 내었다. 예술품이라고 내놓은 것이 빈약하기 짝이 없어 부끄러웠다. 반면 그곳에 있는 조선 국기가 나의 마음을 강렬하게 사로잡았다. ‘미드웨이 플레이상스(Midway Plaisance)’ 전시관은 실패이다. 이방 회교도들의 연극은 보잘 것이 없다. 각국 미인이 모인 콘그레스 뷰티(Congress Beauty)’관에는 여러 모양의 다양한 화장을 한 예쁜 여자들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중국 광동 지방 여성이 창피스럽게도 가장 추한 여성이 되었다(윤치오일기1893924).”

 

출품사무대원 정경원은 미국에서 약 6개월간 머물렀는데, 자신이 보고 듣고 직접 체험한 일상을 여러 형식의 글로 남겼다. 통칭 정경원문서로 불리는 이 자료들은 후손들이 소장해 오다가 1998년 역사가 이민식에 의하여 발굴되어 근대 한미 관계사(백산자료원, 2001)콜럼비아 세계박람회와 한국(백산자료원, 2006)으로 번역·수록되었다.

 

1900년 만국 박람회(Exposition Universelle)는 지난 세기를 기념하고 다음 세기를 향한 발전을 가속하자는 의미에서 1900414일부터 1112일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 박람회였다. 이 박람회에서 널리 선보였던 건축 양식이 바로 '아르누보'였다. 총 관람객수가 5000만 명에 달한 1900년 세계 박람회에서는 수많은 기계와 발명품, 그리고 건축물들이 전시됐는데 그 중에는 그랑드 루 드 파리 대관람차, 마트료시카 인형, 디젤 엔진, 유성영화, 에스컬레이터, 텔레그라폰 (최초의 자석식 녹음기) 등 지금도 널리 알려져 있는 것들도 등장했다.

 

프랑스는 1855년에도 만국 박람회를 개최한 전력이 있었는데 전쟁 후 국가의 자부심과 신념을 다시 세우고자 하는 욕구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1900년 박람회가 성공을 거둔 것도 전후 국가 부흥이라는 똑같은 주제에 따른 것이었다. 1900년 파리 세계 박람회가 개최되기 8년 전인 1892, 프랑스 정부는 새 세기의 도래를 환영하고 축하하는 박람회를 열 것이라고 발표했다.

 

프랑스는 전세계 각국에게 초청장을 보내 그 국가들이 이룬 것과 생활양식을 전시하도록 했다. 따라서 이 세계 박람회는 여러 가지 체험을 종합하여 익히도록 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외국인들에게 각 국가들 간의 유사성은 물론 그 사이의 독특한 다양성을 깨닫도록 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또 새로운 문화를 경험하고 각국이 전시해 놓은 자국의 가치들을 전반적으로 더욱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상호 이해의 환경이 전쟁 시대 이후 필요하다고 여겨졌던 문화적 관용을 늘리는데 한 몫 하도록 했다. 박람회 개최 소식이 발표되자 독일에서 처음으로 열린 국제 박람회에 쏠렸던 관심은 풀리고 박람회 개최에 대한 호응이 어마어마하게 쏟아졌다. 박람회에 대한 지지도 대단해서 각국에서는 즉시 자국 전시관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열의에도 불구하고 1900년 세계 박람회는 참관한 관객 수가 예상치의 3분의 2에 불과하여 재정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세계 박람회가 예상보다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일반 대중들이 박람회에 참여할 자금이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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