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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알프레드 레들 대령 간첩사건(1914년)

작성자管韻|작성시간20.07.08|조회수627 목록 댓글 0


오스트리아 알프레드 레들 대령 간첩사건(1914)

 







 

19134월에 한 편지가 빈의 플라이슈 마르크트(Fleischmarkt)의 중앙 우체국에 도착했는데, 이 편지는 수신인, Nikon Nizetas가 우체국에 와서 수령할 때까지 우체국에 보관하도록 된 것이었다 (poste-restante 라는 형식이다). 소인은 독일과 러시아와의 국경 지역인 독일의 Eydtkunen시에서 찍힌 것이었다.

 

poste-restante 에서 허용되는 최대 대기기간이 종료된 후, 편지는Eydtkunen시로 반송되었다가 베를린으로 보내졌는데, 이는 발신인에게 되돌려 보내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의 독일의 우편제도를 잘 모르겠으나 아마도 그런 경우 개봉을 하는 것이 절차였던 모양이다).

 

편지가 개봉되고 나서 관헌은 의심스러운 정황을 발견했다. 봉투 안에는 6000 오스트리아 크로넨의 상당한 금액의 현찰이 들어있던 것이다. 그 발송인은 제네바 주소를 기재했기에 더욱 더 수상해 보였다.

 

우체국은 이를 독일 정보부에 넘겼으며, 독일 정보국은 그 주소가 제네바에 거주하는 은퇴한 프랑스 장교의 주소이며, 그 장교는 현재도 정보업무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독일 정보부는 즉시 이 사실을 오스트리아 정보국에 통보했다. 빈에서는 군 방첩대장Max Ronge 소령이 이 사건을 조사하게 되었다. Max Ronge 소령은 방첩업무를 이관 받은 지 1년쯤 된 상태였고, 그 전임자는 현재는 프라하에 주둔한 8군단 참모부에 임시 파견을 나가있는 알프레드 레들 대령이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빈 -이 무렵 화가 지망생 아돌프도 빈의 멋진 모습에 크게 감복하였다. 링 슈트라세에 대해서는 천일야화에 나오는 것 같은 풍경이라고 찬탄하기도 했다. 그는 병역기피를 위해 1912년 빈을 탈출하여 독일 뮌헨으로 옮긴다. 1938년에 그는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다시 이 도시를 찾는다.

 

Ronge 소령은 일단 그 편지가 손상될 것을 우려하여 사본을 만들어서 그 사본을 빈 우체국에 보내서 스파이Nizetas가 수령할 수 있게 해 놓았다.

 

세 명의 경찰관이 우체국에 잠복하여 수신인이 나타나길 기다리게 했다. 첫 일주일 동안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이 보였다. 두 통의 새로운 편지가 도착한 것 빼고는.

 

그 편지들에도 각각 8000 크로네와 7000 크로네가 들어있음을 방첩대는 확인했다. 하나는Eydtkunen시에서 발송된 것이고, 하나는 베를린에서 발송된 편지들이었다. 그 편지들을 해독하며 방첩대는 이 편지들이 상트 페테르부르그에서 온 것이라는 심증을 굳혔다. 이 편지의 수신인인 간첩은 러시아와 프랑스 모두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였다. 두 통의 편지도 역시 간첩을 유인하기 위해 우체국에 계속 유치시켰다. 첫 편지는 일단 수거하였는데 사본이 너무 가짜인 것이 티가 나기 때문이었다.

 

1913524일에 마침내 간첩놈으로 보이는Nizetas가 우체국에 나타났다. 그자는 우체국 직원에 쪽지를 건네며, 자기가 수신인Nizetas라며 편지를 수령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자는 우체국 창구 직원인 19세의Betty Osterreicher 양과 계속 수다를 떨었는데, 그녀도 이미 경찰에게 전후 사정을 듣고 그 간첩이 나타나면 2층에 잠복중인 경찰들에게 벨을 울려 신호를 보내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그녀는 시간을 끌기 위해Nizetas에게 물었다 어머, 선생님 이름은 독일식 이름이 아니네요, 그렇죠?” Nizetas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우편물을 집어 들더니 서둘러 우체국 밖으로 나가, 대기 중이던 택시에 올라탔다. 경찰들은 뒤늦게 달려 나와 발을 구르다 마침 다가온 택시를 잡아타고 간첩이 탄 택시를 뒤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그 택시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다행히 그 간첩이 탄 택시 운전사를 찾아서 그 행선지와 인상착의를 파악할 수 있었는데, 그 간첩은 Klomser 호텔에 내린 것을 확인하였고 택시 안에서 그 간첩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봉투따는 칼을 발견했다.

 

이러한 발견의 성과로 그들은 호텔로 가서 프론트 직원에게 방금 숙박을 한 자의 인상착의, 호수 등의 정보를 알아낸 후, 그 숙박객이 체크 인하고는 어디로 다시 나갔다는 것을 듣고 입구 옆의 밀실에 잠복하였다. 프론트 직원은 그 숙박객이 방에 올라간 후 택시 기사가 나타나 봉투 따는 칼의 케이스를 프론트에 맡기고 갔음을 알려 주었다. 얼마 후 그 숙박객이 종이 쪼가리를 찢어 내던지며 호텔 안으로 들어왔다. 물론 경찰들이 그 종이 쪼가리들을 후에 수거했음은 물론이다.

 

프론트 직원에게서 그 케이스를 넘겨 받은 그 숙박객은 프론트 직원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신경이 곤두선 모습이었고,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 방은 11호실 이었다 ( 다 아시다시피 구미 관행으로는 1층은 사실 2층이고 로비가 있는 층은 ground floor이다). 경찰은 투숙객 명부의 이름을 확인했다. 사실 경찰관 중 하나는 아까 로비에서 본 자가Nizetas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숙박계에 있는 이름은 ……….. 알프레드 레들 대령이었다!!!!

 

경찰들은 간첩이 바로 레들 대령이라는 사실을 믿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수거한 종이 쪼가리에 쓰인 내용은 바로 그가 Nizetas으로 수신임을 확신시켜 주었다. 그 종이는 우체국에서 수신인이 우체국에서 우편물을 찾으며 받는 영수증이었고 그 곳에 Nizetas으로 한 서명의 필적은 숙박부에 적힌 레들 대령의 필체와 일치하는 것이 확연했다.!!!!

 

Ronge 소령과 그 상관Urbanski 대령은 결국 이 나쁜 소식을 제국군 참모장인 Conrad von Hotzendorf장군에게 보고했다. 장군은 그랜드 호텔에서 만찬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처음에 이 보고를 듣고 장군도 선 듯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어이 자네들 제정신인가?”하고 장군은Ronge 소령과 그 상관Urbanski 대령에게 반문했다. 사태의 진상을 파악한 장군은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래들 사건은 또다른 제국의 문제점을 폭로하는 사안이라고 볼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래들은 많은 장교들이 그러하듯이 한미한 출신이었다.

 

페르디난트 대공은 귀족들이 놀지 말고 특권과 지위에 맞게 독일에서의 귀족들이 그러하듯 군부의 중추로 활동해 주기를 바라고 그런 취지의 정책을 펴오고 있었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었고 여전히 군의 장교단은 한미한 출신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있는 귀족 출신 장교들은 무능의 극치를 보이고 있었다.

 

일부 사람들은 레들이 갈리치아 사람들을 선동하여 봉기를 일으킬 수 있다고 우려하기도 하였다 ( 레들은 갈리치아 오스트리아령 폴란드- 출신이다). 이 자가 범슬라브주의 추종세력의 괴수가 아닐까? 얼마나 많은 이런 무리들이 군부에 숨어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레들은 갈리시아 거주 독일인의 혈통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고는 이러한 우려는 수그러들었다.

 

그리고 그가 열성적인 카톨릭 교도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반유태주의 열풍에 미칠 영향은 없으리라는 사실은 군부를 약간 안도시켰다. 군부는 그가 유태인이라는 소문을 반기지 않았는데,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부에는 다른 유럽 국가들 보다 훨씬 높은 비율의 유태계 장교들이 복무하고 있기 때문에 황제는 유태인에 대한 보호정책을 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유태인이라는 소문은 상당한 지지자를 가지고 있던 모양으로 로마에 보고된 동향보고서에는 드레퓌스 사건과 마찬가지로 가공할 음모를 꾸미는 국제 유태인 조직의 준동은 경악스럽다는 문구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레들은 유태인이 아니었기에 조야는 곧 안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레들은 동성애자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가 조심스레 숨기면서도 동성애에 탐닉한 것은 이제 세상이 바뀌어 초보수적인 합스부르크 군주국에서도 성적인 개방 풍조가 도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예이기도 하다.

 

그의 자살은 당시 군부에서 불미스런 장교단의 범죄행위에 대한 관례로 자리잡고 있던 반강제적 자살의 전형이라고 할 것이다. Hofrichter 같이 레들을 처리하라는 명을 받은 장교들은 자신들이 직접 레들을 처치하는 것은 거부하고 압박을 가하여 자살케 하는 것을 선호했다.

 

사실 합스부르크 군대 내의 장교 자살률은 거의 세계최고 수준으로 높다는 것은 물의를 일으킨 자가 자살은 하는 것은 명예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던 오-헝 제국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면서 유능해지고 본래 책임감있게 행동하여 자살할 만한 소지를 적게하는 기풍은 끝내 정착되지 않았다)

 

사실 제국은 자살을 죄로 보는 카톨릭 신앙을 옹호하고 있었지만 열렬한 카톨릭 신자인 페르디난트 대공도 레들의 자살에 대해 칭찬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레들의 간첩행위를 증명해 주는 가장 좋은 증거는 1913년이 아닌 1914년에 밝혀지니, 레들의 배신행위는빈약한 그의 군대가1859년과 1866년에 프란츠 요제프가 이탈리아와 독일의 민족주의를 분쇄하려다 맞은 파국을 크게 능가하는 재앙을 당한 것이리라

 

그런데 한가지 아이러니는그가 매독으로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기껏해야 몇 년을 더 살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방첩부와 첩보국( 방첩부는 내부에 침투한 간첩을 잡는 것이고, 첩보국은 외국에서 정보활동을 벌이는 부서였다 )의 수장인 그는 재정적인 이유 때문에 정보를 제정 러시아 정보국에 팔아 넘겼다.

 

그의 부친은 철도 공무원으로 그래도 중산층에 속한다고 할 수 있었으나 레들은 13 남매의 7번째로 태어났다. (그리 식구가 많으니 살림이 여유가 있기 힘들리라 ) 래들은 지성과 창의력을 어려서부터 인정받았고, 아버지가 1875년에 사망하면서 연금과 특별교부금을 받을 수 있었기에, 군사학교에 입교할 수 있었다 ( 당시 오-헝에서는 군 장교의 위상은 매우 높았는데, 귀족 중에도 80개 가문의 최상층 귀족들과 황족들만 입궐할 수 있어 귀족들도 대부분 황궁에 입궐할 수 없었고 빈 시장도 입궐할 자격이 없었듯이 대부분의 관리들이 입궐할 자격이 없기도 했다. 반면, 장교는 출신 여하를 불문하고 누구든지 입궐할 자격이 있었다. 그러므로 출세길인 군장교가 되기를 그가 소망한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군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그는 그의 출중한 능력을 인정받아 순조로운 승진을 계속했고, 1900년경에는 초 엘리트 장교와 귀족 출신 장교들만 바라볼 수 있는 핵심 보직인 참모본부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그는 러시아에서 3년간 파견근무를 하면서 ( 1898-1891) 익힌 러시아어 실력과 첩보훈련은 그가 출세길에 접어들 수 있게 해 주었다.

 

한편 러시아 인들도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는데, 참모부 레벨의 동료 장교들은 대개 귀족이거나 집안이 좋아 생계에서 자유로웠고 군에서 주는 봉급은 그저 용돈으로 쓰는 상황인 반면, 그는 한미한 출신이다 보니 재정적으로 풍족하지 못하다는 것이 그를 금전으로 쉽게 포섭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었다.

 

1902년경에는 그가 러시아의 정보원으로 활동을 개시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주는 정보들은 값을 매길 수 없는 중한 것들이 대부분이고, 그가 방첩대와 첩보대의 핵심인사가 됨에 따라, 점점 더 고급정보가 러시아 측에 넘어갔다( 그는 러시아 제공하는 러시아 군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첩보라고 상부에 보고하여 오-헝 군이 러시아군에 대해 아주 잘못된 정보를 믿게 했으며, 러시아에 오-헝이 심어놓은 첩보망에 대한 정보를 팔아넘겨 러시아 내 오헝의 첩보망이 완전히 붕괴하게 만들었고, 오헝은 러시아 군에 대한 정보없이 1차 대전에 임해야 하는 기막힌 상황이 되었다).

 

레들은 그가 죽기까지 그의 성적인 성향과 그가 러시아의 첩자라는 사실을 성공적으로 숨겨왔다. 그는 마침내, Stefan Horinka (또는Hromodka) 중위와 열정적인 사랑에 빠졌고 중위를 재정적으로 돕느라 더 많은 돈이 필요해 더 열심히 정보를 팔았다. 중위는 레들의 러시아와의 결탁사실은 몰랐다고 보이고, 이 대령님의 지나친 사랑에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기에 그의 보호자가 그에게 품은 것 같은 깊은 감정은 없었던 듯 하다.

 

레들의 배신행위는 흔히 오스트리아-헝가리가 1차대전에서 참패를 거듭한 주요 원인으로 거론될 정도의 파급력을 가졌다. 레들을 통해서 적들은 오헝의 모든 작전계획을 미리 알고서 대비할 수 있었다.

 

레들 사건은 당시 독일어권에서 일어나던 동성애자 해방운동에도 타격이 되었는데, 동성애 반대세력이 레들 사건을 들먹여 대중의 반 동성애정서를 훌륭하게 조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사건은 1950년대 반공에 열심이던 미국에서도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었는데, 미국 연방상원의 위원회 보고서에 레들 사건을 언급하며 동성애자들을 중용하는 것은 안보상의 중대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결론이 들어갈 정도였다

 

레들의 배신동기는 아직 불분명한데, 그가 동성애자라는 것이 러시아 당국에 들켜서 그 사실을 폭로하겠다는 협박을 받았다는 설명이 있는데, 당시는 동성애를 정신병의 일종으로 보고 동성애자를 사람으로 안 보던 시대였기에 발각이 났다면 레들의 경력은 끝장이 났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르샤바에 본부를 두고 있던 러시아 군 정보국은 레들을 감시하던 중 이 사실을 1901년 경에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러시아인들은 협박만 한 것이 아니라 레들에게 매우 후한 보수를 지급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생활은 그의 수입으로 커버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뛰어넘는 호사스런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동료 장교들은 다들 집안이 좋아 극히 호사스런 생활을 했으므로 별로 눈에 띄지도 않은 듯 하다).

 

거기에 레들이 스릴과 서스펜스를 즐긴 것을 보여주는 자료들도 있는데, 1907년의 러시아 군 보고서에는 지적이고 재능이 있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거짓됨과 교활함이 그의 특징으로 위험에 처하는 것을 즐긴다고 언급하고 있다.

 

1903년부터 1913년 사이에 레들은 러시아의 가장 중요한 간첩으로 활동했다. 그는 러시아 측에 플랜3”을 넘겼는데, 이는 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 침공계획안으로 매우 상세한 것이었고, 러시아인들이 기꺼이 이 정보를 세르비아에 제공하였고 세르비아는 완전히 준비된 상태로 오스트리아의 모든 작전을 훤히 알고 대처할 수 있었다 ( 50만 오스트리아 헝가리군이 예비군, 민병대 까지 동원해서야 간신히 20만 내외의 세르비아군에게 철저히 패배했다.) 이 계획은 매우 세심하게 준비된 것으로 19136월부터 19147월 사이에 수정할 수 있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레들은 오스트리아의 모든 군사기밀과 작전계획을 러시아에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에 대한 완전히 잘못된 정보를 오스트리아 군부가 철썩 같이 믿게 만들었다.

 

레들은 역사상 최악의 배신자 중 하나로 언급되는데, 그의 공로(?)로 전쟁 첫해에 오스트리아 헝가리는 50만의 전사자를 내었기 때문이다 ( 1차 대전 전 기간의 오헝군 전사자는 120만 가량이다) 이는 전쟁 내내 오스트리아 헝가리군이 수세에 몰리는데 큰 기여를 했다.

 

레들은 러시아에 오스트리아의 주요 공격계획, 전쟁에서의 명령체계와 암호, 동원계획세부 등 한 없이 중대한 정보들을 넘긴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수비계획과 요새에 대한 정보도 전부 넘긴 것은 물론으로 러시아는 쉽게 갈리치아의 요새들과 카르파티아의 천험을 돌파할 수 있었다고 평가된다.

 

그는 또 러시아 내의 오스트리아 첩보망도 팔아 넘겼는데, 오스트리아는 오랜 공작 끝에 러시아 최고 참모부 내에도 간세를 심을 수 있었고, 그는 레들에게 직보하는 자였는데도 아무런 주저없이 그를 넘겼다. 그 결과 러시아 내 많은 오스트리아 간첩들이 처형당하거나 자살하고 대거 체포됨으로써 오스트리아 헝가리는 러시아에 대해 아무런 정보가 없는 형국이 되었다.

 

헝가리 신문보도

 

이 래들 사건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님이 틀림이 없다. 레들은 일개 장교가 아니라 시스템 그 자체인 자다. 모든 장병들이 고국을 사랑하도록 훈련받고 있는데이런 애국심의 결여는 불행한 군주국에서나 있을 수 있는 것으로 군의 사기를 저하시킬 것이다. ! 레들의 사건은 우리가 그동안 애써온 군의 훈육에 치명적인 재앙이다. 우리 오스트리아 헝가리 군인들은 고국에 대한 충성심은 없고 오직 war lord에 대한 개인적인 충성심만 기대할 수 있을 듯하다.”

 

전쟁의 개전과 함께,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50만 병력을 잃었다. 일반적으로 참모본부와 군 정보국 최고위 레벨에 속한 알프레드 레들 대령의 배신으로 수많은 군인이 사망한 것으로 평가된다. 오스트리아 측의 역사 기록이나 CIA의 덜레스 국장, 소련의 Mikhail Milstein 장군 등이 모두 역사상 대표적인 배신자로 레들을 꼽고 있다.

 

레들의 전설은 중유럽 사람들을 메혹시켜 왔고, 현재 Walker 사건(미국 해군 고위 장교로 1968년부터 1985년 사이에 소련의 간첩으로 활동했다)에 직면한 미국인들에게도 강한 인상을 주고 있다. Guy Burgess, Donald Maclean, Kim Philby ( 영국의 고관들로 대학시절 소련에 포섭되어 엄청난 정보들을 소련에 넘기다 발각되어 소련으로 망명한 자들) 등도 못한 수준의 엄청난 수준이라고 영국에서조차 평가받는 사건이다 .

 

레들은 모든 것을 군에서 수혜한 사람이다. 렘베르크의 철도 직원의 자녀인 그는 훌륭한 학생이었으며, 오스트리아 군사학교와 왕립 전쟁대학에 재학했으며, 독일어로 교육받았으나 우크라이나 계의 혈통도 흘렀기에, 우크라이나어, 폴란드어, 러시아 어도 완벽히 구사했고 이런 능력은 그가 정보국에서 러시아 관련업무에 두각을 나타낼 수 있게 해주었다.

 

그의 제국군에세의 경력은 휘황할 정도이다. 그는 직무적격성평가에서 최상위등급을 받았고, Iron Crown, Military Cross, Military Medal 등 주요 훈포장을 받았고, “Supreme Satisfaction” 훈장을 황제로부터 받았다.

 

아직 첩보관련 기술들이 보잘 것 없던 시대에 그는 위대한 선구자 중 하나였다. 아직 전자도청이 가능하기 이전인 그 시대에, 그는wax cylinders 장치를 이용해 대화를 비밀녹음하고, 비밀 카메라로 촬영을 한 선구적인 시도들을 했고, 우편물을 효율적으로 감시하는 시스템을 확립하였다.

 

발칸반도(Balkan Peninsula)

 

발칸반도(Balkan Peninsula)는 유럽의 남동부에 있는 반도이다. 아드리아해, 이오니아해, 에게해, 마르마라해, 흑해에 둘러싸였다. 유럽과 확실하게 구분짓는 지협이 없기 때문에 발칸반도의 범위와 지형적 경계를 정하는 기준이 언제나 일정하지는 않지만 북쪽 경계로 도나우강을 삼기도 한다. 보통 그리스, 알바니아, 불가리아, 터키의 유럽 부분, 그리고 유고슬라비아의 일부였던 나라들이 발칸반도에 포함된다. 루마니아가 포함되기도 한다.

 

고대부터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다양한 세력이 뒤섞이며 오늘날 민족, 언어, 종교, 문화, 정치적으로 복잡한 구성을 가지게 되었다.

 

발칸반도의 이름은 불가리아와 세르비아에 걸친 발칸산맥에서 유래하였다. 발칸은 ''을 뜻하는 터키어이며, 오스만 제국의 지배기 이후로 산맥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반도 전체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19세기 이후 확대되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1차 세계 대전 이래 '유럽의 화약고'라는 별칭을 가지게 되었고, 보다 최근에는 구유고슬라비아의 분열으로 발칸이라는 이름이 발칸화라는 용어를 낳았다. 이처럼 발칸이라는 용어는 부정적 의미를 함축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발칸반도라는 이름 대신 '동남유럽'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발칸반도는 도나우강, 사바강, 쿠파강을 경계로 하여 그 이남의 지역을 말한다. 이에 따르면 발칸반도는 그리스,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북마케도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코소보를 전부 포함하고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대부분을 포괄한다. 터키, 루마니아, 슬로베니아, 이탈리아의 일부도 여기에 속한다. 터키의 동트라키아 지방, 루마니아의 북도브루자 지방, 슬로베니아의 프리모르스카 지방,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과 고리치아가 발칸반도에 속하는 영역이다. 영토의 작은 부분만이 발칸반도에 속하기 때문에, 보통 루마니아, 슬로베니아, 이탈리아는 발칸 국가에서 제외된다.

 

그러나 유럽 대륙과 발칸반도를 구분하는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 정치적으로는 루마니아와 슬로베니아까지 포괄하여 발칸반도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이때 발칸반도의 범위는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우크라이나의 이남이 된다.

 

매우 드물게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와 우크라이나의 오데사를 잇는 직선의 이남으로 발칸반도를 정의하기도 한다.

 

남유럽을 이루는 세 반도 중 하나로서 아드리아해, 이오니아해, 에게해, 마르마라해, 흑해가 둘러싸고 있다.

 

발칸반도의 대부분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디나르알프스산맥이 발칸 반도의 7개 국(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코소보, 알바니아)을 지난다. 불가리아 중부와 세르비아 동부에 걸친 발칸산맥은 발칸반도라는 이름의 어원이 된 산맥이다. 발칸산맥 남쪽으로는 그리스에 인접한 로도피산맥이 있고, 북쪽으로는 루마니아를 가로지르는 트란실바니아알프스산맥이 있다. 발칸반도에서 루마니아를 제외하는 관점에서는 트란실바니아알프스산맥은 발칸반도에 포함되지 않는다. 산맥들은 주로 북서쪽에서 남동쪽을 향해 사선으로 뻗어 있다.

 

발칸반도 최대의 호수인 슈코더르호는 알바니아와 몬테네그로 사이에 있다. 람사르 협약이 지정한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이며, 유럽 최대의 조류 보호 구역이기도 하다.

 

발칸반도는 유럽과 아시아의 교차점으로 그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인해 역사적으로 다양한 세력의 지배를 받았다. 오늘날 유럽의 화약고라 불리는 발칸반도의 복잡한 민족, 문화, 영토 문제는 발칸반도의 역사에서 기인한다.

 

18세기 말에 발칸반도는 크게 세 개의 세력에 의해 분할된 상태였다. 오스만 제국이 발칸반도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가운데, 오스트리아는 슬로베니아를 계속 영유하였고, 베네치아 공화국은 달마티아 내부까지 영역을 확대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몬테네그로와 라구사 공화국 같은 작은 나라와 오스만 제국의 속령인 왈라키아 공국과 몰다비아 공국이 있었다.

 

나폴레옹의 정복활동은 발칸반도의 정세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데, 나폴레옹에 의해 베네치아 공화국(1797), 라구사 공화국(1808)이 멸망하고 오스트리아 제국도 발칸반도의 영토를 잃는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성립된 빈 체제에서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에게 상실했던 영토를 되찾았으며, 베네치아 공화국이 지배하던 영역과 라구사 등을 새로 장악함으로써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시르미아 등을 얻는다.

 

한편 오스만 제국은 1817년 세르비아가 자치권을 얻고 1821년 그리스가 독립하는 등 발칸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서서히 상실하고 있었고, 왈라키아 공국과 몰도바 공국도 1861년 하나의 나라로 통일되어 루마니아 공국이 된다. 이에 따라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발칸반도 지역은 독립 국가가 되거나 자치령으로 전환되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서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 통일 전쟁과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연달아 패배한 이후 발칸반도로 관심을 돌려 발칸반도에서 영토 확장을 시도하였고, 러시아도 범슬라브주의에 따라 발칸반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1877년 러시아는 러시아-튀르크 전쟁을 일으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승리한다. 그 결과(산스테파노 조약) 발칸반도에서 러시아의 세력이 강해져 루마니아 공국은 루마니아 왕국이 되어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도 완전 독립한다. 불가리아 역시 자치권을 얻어 오스만 제국은 발칸반도를 거의 상실하게 된다.

 

발칸반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을 경계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영국, 독일 등의 유럽 열강들은 1878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 주재로 베를린 회의를 열어 산스테파노 조약을 개정한다. 이 회의의 결과 발칸 지역에서의 거대 슬라브 국가의 출현이 방지되고, 오스만 제국은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 지방을 돌려 받음으로써 러시아의 영향력은 제약받는다. 중재의 대가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관할권을 얻고, 영국은 키프로스의 관할권을 얻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칸반도에서 오스만 제국의 쇠퇴는 계속되어, 1881년 오스만 제국은 그리스에게 테살리아를 양도한다.

 

1908년 불가리아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완전 독립하여 불가리아 왕국이 된다. 한편 같은 해 오스만 제국에서는 청년 튀르크당이 혁명을 일으켜 압뒬하미트 2세가 퇴위하고 미드하트 헌법이 부활한다. 이에 따라 청년 튀르크당은 오스만 제국의 서구화, 근대화를 추진하는데, 이 과정에서 튀르크 민족주의가 확산되면서 발칸반도의 다른 민족들의 반발이 심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이탈리아는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던 리비아를 얻기 위해 1911년 이탈리아-튀르크 전쟁을 일으킨다. 오스만 제국이 이 전쟁에서 대패함으로써 오스만 제국의 허약함이 드러났고, 이는 그리스 왕국, 세르비아 왕국, 몬테네그로 왕국, 불가리아 왕국 등 발칸 국가들이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선전포고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1912년 그리스,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불가리아는 발칸 동맹을 결성하고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오스만 제국에 제1차 발칸 전쟁을 일으킨다.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알바니아도 독립을 위해 발칸 동맹군 편에서 싸우게 된다.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때문에 오스만 제국의 주력군이 아프리카에 있었던 까닭에, 두 달만에 오스만 제국은 대패한다. 발칸 전쟁에서 패배한 오스만 제국은 수도 이스탄불을 제외한 발칸반도의 모든 영토를 상실했으며, 알바니아도 독립국이 된다. 오스만 제국이 할양한 남은 영토는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스 등이 나누어 가지게 되는데, 영토 분배 과정에서 발칸 동맹 국가 간 불화가 생기게 되면서 제2차 발칸 전쟁이 일어난다.

 

1차 발칸 전쟁의 결과 세르비아는 마케도니아의 일부를, 그리스는 크레타섬을, 불가리아는 남루멜리아와 동트라키아, 그리고 마케도니아의 남은 일부를 차지한다. 불가리아의 지나친 팽창에 불만을 품은 세르비아는 그리스, 몬테네그로, 루마니아와 함께 동맹을 맺어 불가리아에 맞섰다. 1913년 불가리아가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발발한 제2차 발칸 전쟁은 불가리아에 대항하여 알바니아를 제외한 발칸 반도의 모든 국가가 싸우는 양상이 되었다. 여기에 오스만 제국이 영토 회복을 위해 불가리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결국 불가리아는 항복을 하게 된다.

 

불가리아는 부쿠레슈티 조약을 맺어 제1차 발칸 전쟁으로 얻었던 모든 영토를 할양해야 했으며, 세르비아와 그리스, 루마니아는 영토를 확장한다. 오스만 제국도 조약을 통해 잃었던 영토를 일부 회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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