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년∼1919년)
철강왕으로 알려진 미국의 기업인이자 존 데이비슨 록펠러와 함께 19세기 미국 산업계를 대표했던 양대 재벌로 아메리칸 드림의 아이콘. 포브스에 따르면 그의 전성기 때의 재산을 현재로 환산하면 3720억 달러로, 원으로 환산하면 약 450조 원이며, 전성기의 빌 게이츠(1100억 달러) 회장보다도 훨씬 많은 수치이고, 록펠러 회장과 말리 제국의 황제 만사 무사에 이은 인류 역사상 3번째로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던 부자 사업가이다.
1835년 11월 25일 스코틀랜드 던펌린의 파이프 지방의 던펌린에서 출생, 1919년 8월 11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레녹스의 섀도브룩에서 사망.
스코틀랜드계 미국인. 기차역에서 심부름 하던 소년에서 초대형 철강회사의 CEO까지 그저 근성으로 올라간 인물. 아메리칸 드림의 대표주자.
세계적인 거부, 잔혹한 사업가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그 개인 자체는 평생 근검절약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철강산업이 너무 매력적인 분야였기에 록펠러가 광산과 제철소를 세워서 그를 압박했으나 그가 요청해서 록펠러의 제철사업부를 인수했다.
1901년에는 카네기 스틸을 J. P. 모건에 매각하고 자선사업을 하며 노후를 보냈다. 그런데 이 자선사업 분야의 일부가 현재 미국 은행 자산순위 20위권에 들어가는 TIAA 은행이 됐다.
카네기가 어린 시절 엄마를 따라 식료품 가게에 가게 되었다. 엄마가 물건을 사는 동안 그는 가만히 서서 체리 파는 할아버지 앞에 놓인 체리상자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주인 할아버지가 “먹고 싶으면 한 줌 집어 먹으렴”이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는 말없이 가만히 할아버지만 바라볼 뿐이었다. 카네기의 어머니도 “할아버지가 허락하셨으니 한 줌 집어도 돼.” 라고 말했지만 그는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체리를 한 움큼 집어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그때서야 고맙다고 말하며 두 손으로 체리를 받았다. 집으로 돌아가며 어머니는 카네기에게 왜 할아버지가 집어주기 전까지 가만히 있었는지 물어보았다. “할아버지 손이 저보다 훨씬 크니까요”
카네기가 태어날 무렵엔 산업 혁명으로 기계가 서서히 보급되면서 가내수공업이 설 자리가 좁아졌고, 아버지인 윌리엄 카네기(William Carnegie) 역시 점차 사업이 힘들어졌다. 그 때문에 카네기 역시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일을 조금씩 도와야 했고 이 과정에서 점차 근성을 키우게 되었다. 또한 이웃에 사는 삼촌인 조지 로더(George Lauder)로부터 로버트 번스(Robert Burns)의 글과 스코틀랜드의 영웅들 이야기(윌리엄 월레스 등)를 듣고 꿈을 키웠다. 카네기네 집은 이웃집 위버네 가족과 공동으로 살 정도였지만 1층짜리 원룸이었다. 즉, 큰 방 하나에서 작업하고 먹고 잤다는 말. 이때 친구들과 함께 토끼를 키우자고 했는데 여기서 그는 사람을 다루는데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했다. 풀을 뜯어오면 토끼에게 뜯어온 친구의 이름을 붙인다는 조건을 제시한 것 이다.
이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가 로더 삼촌이 “나중에 돈을 많이 번다고? 그럼 (창 밖에) 보이는 고성을 사서 시에 기증하면 어떨까?”라고 지나가는 투로 얘기했는데, 말년에 카네기는 정말로 그 고성을 사서 던펌린 시에 기증했다.
엄은 친척의 편지를 받고 미국으로 갈 생각을 품게 되었고, 결국 일가족 전체가 펜실베이니아 주의 피츠버그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에도 카네기는 동생 톰과 함께 아버지를 도왔다. 이후 용광로에 석탄을 넣는 화부 역할을 하다가 성실성을 인정받아서 전보배달부가 되었다.
또한 글재주도 있었는지, 동네의 한 유지가 개인 도서관을 열자 편지를 보내서 자신들도 출입 가능하게 해달라고 했고 결국 승낙을 받았다. 도서관을 열 때 조건이 “일하는 소년들을 위해서”였는데 전보배달부는 취급이 아르바이트급이라 다들 우린 안 될 거라고 포기하고 있었다. 이에 카네기가 “우리는 직장 없이 일하는 소년들입니다”라고 써서 보낸 덕에 가능해진 것이다.
이후 전보배달부에서 모스 부호를 써서 전보를 보내는 전신기사로 승진했고, 결국 1853년에 펜실베이니아 철도 회사에 토머스 A. 스콧(Thomas A. Scott)의 비서 겸 전신기사 자격으로 취직했다.
장거리 노선에 침대차를 도입하여 큰 성공을 이루던 도중, 얼마 후 구입한 농장에서 막대한 석유가 터져 벼락부자가 된다. 공업의 기초가 철강 산업임을 예견하고, 석유로 축적한 재산을 바탕으로 철강업에 투신, ‘카네기 제철’을 세워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다. 석탄 채광부터 운송과 생산까지 수직계열화에 성공해 업계 지배력이 대단했다.
물론 당시 다른 거부들과 마찬가지로 축재의 방법은 공정경쟁으로 돈을 번 것이 아니라 독점과 노동탄압이었다. 록펠러, JP 모건 등 당시 부자들처럼 공통점은 미국 남북전쟁 때 미 연방정부에 자본, 물자, 철도, 석유 등을 대면서 엄청난 떼돈을 벌었다는 데 있다.
1881년 카네기는 석탄왕 헨리 클레이 프릭(Henry Clay Frick)을 카네기 스틸의 회장으로 임명한다. 프릭은 석탄왕이라고 불리며 경영능력이 높다고 평가받던 인물이었지만 돈을 위해서라면 불법도 서슴없이 저지르는 사람이었다. 미국 역사상 악명높은 CEO를 이야기 할 때 항상 상위권에 든다는 인물이다.
프릭은 회사의 임금을 삭감했다. 1892년 6월에 카네기의 소유인 홈스테드 제강소에서 임금협상 중 프릭은 공장폐쇄를 강행했다. 이에 반발한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자 프릭은 공장을 탈환하기 위해서 용역깡패 ‘핑커톤 전미탐정사무소’의 용병 300명을 고용했다. 용병단은 공장을 점거한 노동자들과 총격전을 벌여서 10여 명이 사망하는 참극이 벌어졌고 이 사건은 ‘홈스테드(Homestead Works)학살 사건’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용병단으로는 부족하다라고 생각한 프릭은 펜실베니아에 군대를 요청했고 8천명의 군인들이 공장을 지키면서 노동자들은 일을 해야 했다. 결국 군대의 개입으로 홈스테드 사태는 종결됐으나 이 사건은 대중에게 확산되면서 노동인권에 대한 새로운 불꽃을 일으켰고, 급기야 이 사건으로 스코틀랜드에 머물던 카네기는 장기 체류를 하며 언론의 불꽃이 잦아들기를 기다렸으나...
설상가상으로 7월 23일 홈스테드 학살사건에 분개한 무정부주의자 청년 알렉산더 버크만(Alexander Berkman)이 프릭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치는 사건이 터지면서 카네기는 회사를 지키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프릭은 버크만이 쏜 두발의 권총탄이 귀와 목을 스치는 부상을 입으면서도 맨손으로 버크만을 제압하고 두들겨 패 거의 죽일 뻔 했다.
이에 대해서 카네기는 이 사태가 프릭이 일방적으로 저지른 짓이라고 주장했으며, 이에 대한 증거로 자신이 프릭에게 남긴 편지를 들었다. 그러나 카네기가 미국을 떠나기 전에도 카네기 스틸의 파업은 이미 어느 정도 예고된 상황이었고, 실제로 사건이 일어난 후에도 카네기는 실질적으로 프릭을 제지하기 위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이는 당시의 여론을 의식한 변명에 불과했으며, 이전부터 CEO인 프릭에게 악마 역할을 맡기고 자신이 천사 역할을 맡아 노동자들의 불만을 잠재우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실제로는 카네기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착취하고 사원들의 복지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인물이었고, 언론을 이용해 자신을 미화했으며 노동자들에게 지급한 임금을 부풀려서 홍보하는 등 전형적인 악덕 기업주였다.
홈스테드 노동자 총격전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카네기는 정직한 기업가이며 노동자의 벗이라는 평가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에서 수수방관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이미지가 악화됐다. 이 사태를 기점으로 카네기를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대중매체가 생겨났다. 웃기게도 프릭은 버크만의 암살미수 때문에 동정적인 여론을 받게 되었다. 게다가 자신의 동의 없이 욕받이 역할을 떠맡은 프릭은 카네기와 갈등을 빚었으며, J. P. 모건에게 카네기 스틸을 매각한 이후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을 정도로 사이가 나빠졌다.
말년에 교육과 자선사업을 굉장히 많이 했지만 누구처럼 더럽게 번 돈으로 생색낸다며 욕도 많이 먹었다. 악독한 방법을 말하자면, 먼저 국회의원을 매수해 누군가 자신의 사업에 뛰어들면 세금을 왕창먹도록 했다. 처음에는 싸게 팔아 경쟁자를 몰락시킨 다음 그 후에는 값을 두 배 이상 받는 이른바 매점매석을 이용한 기업을 트러스트 기업이라고 했는데, 록펠러와 카네기가 이런 트러스트 기업의 대표적인 소유주였다. 사실 본인도 겉으로는 복지에 관심이 있는 척해도 속으로는 복지와 빈자를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그의 자서전(Autobiography, 1920)에는 이런 말이 있다.
이른바 자선행위에 쓰는 1000달러 가운데 950달러는 차라리 바다에 버리는 게 낫다. 자선으로 먹여 살리는 주정뱅이 부랑자 또는 무익한 게으름뱅이 하나하나가 이웃을 부도덕하게 감염시킨다. 열심히 일하는 근면한 사람에게 그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더 쉬운 길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감정은 적을수록 좋다. 자선 행위로는 개인이든 인류든 나아질 수가 없다. 드문 예외를 제외하면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오히려 도움을 요구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귀한 사람은 결코 그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실제로 같은 시대의 악덕 재벌이었던 록펠러나 밴더빌트, 모건과 달리 그가 이미지가 좋은 이유는 기부 문제도 있지만 카네기 자신이 평소 본인의 이미지 메이킹에 많은 신경을 썼고 노후에 반독점법에 걸려서 욕먹었던 록펠러와 달리 그의 사업을 물려줄 아들이 없었기에 일찍 사업을 정리해서 말년이 깔끔했던 덕이 크다. 게다가 이 사람은 흑인 및 소수인종 교육에도 좀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전후 남부에서는 극딜을 당했지만, 오히려 이게 후대에 모범적인 사례가 되어서 욕을 덜 먹었다.
국내에는 카네기의 아들들에 대한 일화가 일부 퍼져 있는데 그에게는 아들이 없다. 일부 그를 미화하는 서적의 내용들과는 달리 카네기는 정직한 인물도 아니었으며 자신에 관한 미담을 부풀리고 단점을 축소해서 말하기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본인이나 작가들에 의해서 미화된 것이 많기 때문에 가려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래도 평화주의자에 기부는 많이 했으니 마냥 욕하기도 어려운 복잡한 인물이다.
“통장에 많은 돈을 남기고 죽는 사람처럼 치욕적인 인생은 없다.”
“부자로 죽는 것은 불명예스러운 일이다.”
그가 지독하고 악랄한 사업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이유는, 그가 스스로 부의 사회 환원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카네기는 JP모건에 철강회사를 매각한 대금으로 재단을 설립했고, 본격적으로 사회사업을 시작했다. 특히 교육 분야에 기여한 바가 큰데, 1902년부터 시작된 카네기의 도서관 건립 계획을 통해 미국 전역에 2500여개의 공공 도서관을 건립했고, 모두 사회에 헌납했다. 피츠버그의 카네기 멜런 대학교도 카네기의 기부금으로 설립된 학교이며, 세계적인 명문 대학으로 성장했다.
당시 카네기가 카네기 홀, 카네기 교육진흥재단, 각종 대학 등에 기부한 액수는 3억 달러 이상이었다고 한다. 당시 아시아에서 유일 제국주의로 발돋움하던 신흥국인 일본의 1년 국가예산이 1억 3천만 달러였음을 감안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액수. 그가 사망했을 때 남은 그의 재산은 당시 돈으로 3천만 달러 정도였다고 한다.
평화주의에 기울어져서, 대통령과 독대해서 스페인과 하려는 전쟁을 막기도 했다. 이때 한 말이 “전쟁이 벌어지면 미국에서 가장 이득을 보는 것은 저겠지만, 그래도 전쟁은 막아야 합니다.”그래서인지 오늘날 미국의 외교안보 싱크탱크 가운데 온건, 진보 성향이 강한 ‘카네기 국제평화재단(Carnegie Endowment for International Peace)’의 설립에도 기여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세워진 국제사법재판소의 건물(통칭 ‘평화궁’)도 그가 기탁한 돈으로 지어진 것이다.
표트르 차이콥스키가 미국 여행 중에 카네기를 만난 적이 있으며 카네기홀 개장식 때 축하연주회 지휘를 했다.
나폴레온 힐(1883년∼1970년)과의 일화가 있다. 당시 기자였던 나폴레온 힐은 운 좋게 카네기와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나서 힐의 포부를 들은 카네기는 그에게 자신이 아는 부자 507명과 연을 대줄테니 그들과 인터뷰를 해보라고 했다. 대신 보수는 0. 힐은 잠시 망설이다가 승낙했고 20년간 무보수로 거부들과 뼈빠지게 인터뷰를 하고 자료를 모았다. 그리고 20년 후 그 자료를 모아서 성공학에 관한 책을 집필해 전설이 되었다. 이후 나폴레온 힐 재단을 설립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성공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가르치고 있다.
한 가구점 직원이 비를 맞고 있는 그의 할머니를 자기 가구점에서 비를 피하도록 도와준 덕분에 나중에 그의 사무실에 있는 가구를 주문받는 혜택을 받은 이야기가 있다.
결혼을 굉장히 늦게 했다. 52세에(재혼도 아닌 첫 결혼) 30세 연하의 여성과 결혼했으니, 평균수명이 짧았던 당시 기준으로는 거의 할아버지가 되어서 결혼한 셈이다. 평균수명이 길어지고 만혼이 잦아진 현대 기준으로도 충분히 늦은 결혼인데, 현대로 치면 70대나 80대에 결혼한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인간관계론을 만든 데일 카네기와 이름이 비슷해서 이 카네기가 인간관계론을 만든 걸로 착각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이 부분은 데일 카네기도 노린 점이며, 앤드류 카네기도 저런 착각이 나쁘지만은 않았는지 별다른 대응을 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우스갯소리로 카네기가 직원들을 불러놓고 너무 근무를 많이 했으니 이제 휴가를 가져야겠다고 말하자 직원 가운데 한명이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와 신난다, 마귀가 없는 동안 낮잠을 실컷 잘 수 있겠네!”
카네기의 삶에서 읽는 성공 메시지
1. 시련을 당하면 웃어 넘겨라 : 명랑한 성격은 재산보다 귀하다. 젊은이들은 성격도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으며, 신체와 마찬가지로 정신도 음지에서 양지로 나올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시련을 당하면 가능한 한 웃어 넘겨라.
2. 인간을 알기 위해 노력하라 : 사실 내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무엇을 알거나 나 스스로 무언가를 해서가 아니라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을 뽑아 쓸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누구나 알아두어야 할 귀한 지식이다. 나는 증기식 기계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한 구조물인 인간을 알기 위해 노력했다. “여기, 자신보다 더 우수한 사람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알았던 사람이 누워 있다.”(카네기 묘비에 있는 글 中)
3. 기회 앞에서 절박하라 : 모든 것을 사소한 일로 여기는 사람들은 지나치게 대범한 사람들이다. 누군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사소한 일쯤은 무시하라는 충고에 사소한 일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한 사람이 있었다. 젊은이들은 사소한 일에 신이 주시는 가장 훌륭한 선물이 담겨 있음을 알아야 한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이를 붙잡지 못하는 것은 큰 실수이다. 일자리가 주어졌을 때 머뭇머뭇하다가는 무슨 일이 생겨 일을 못하게 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일자리를 빼앗길 수도 있다. 나는 일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바로 일을 시작하겠다고 제안했다.
4. 배움을 탐하라 : 나의 토굴에 창문이 열리고 지식의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매일 일에 지치고 장시간 야근을 해도 책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가벼워졌다. 나는 늘 책을 가지고 다니며 일할 때에도 틈나는 대로 독서를 했다. 토요일에 새 책을 빌려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5. 기회는 만들어 가는 것 : 전보 배달부 소년들은 아침에 기술실 청소를 해야 했기 때문에 전신 기사들이 출근하기 전에 전신 기기들을 만져볼 수 있었다. 내게 이것은 새로운 기회였다. 나는 곧 키를 조작하여 나와 같은 목적으로 기계를 만지는 다른 전신국 소년들과 통신할 수 있었다. 사람이 무언가를 배우면 오래지 않아 그 지식을 활용할 기회가 오는 법이다.
6. 상사의 마음을 훔쳐라 : 젊은이가 높은 사람과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게 되면 이미 인생의 싸움에서 반은 승리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모든 소년은 자신이 하는 일의 범위를 넘어서 윗사람의 주목을 받을 만한 일을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7. 능력을 보여주지 못할 자리란 없다 : 유능하고, 자발적인 젊은이가 자신이 성실하고 유능하다는 것과 성공을 향한 불굴의 의지를 가졌음을 증명하지 못할 정도로 단순하거나 낮은 일자리란 결코 없다.
8. 우정을 지켜라 : 서로 생각이 달라서 친구와 다퉜다면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편이 현명하다. 끝까지 화해의 손길을 거부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친구를 잃는다는 것은 크나큰 손실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 친구와의 관계가 전보다는 서먹해졌다고 하더라도 화해하는 편이 친구를 완전히 잃는 것보다는 낫다.
9. 작은 인간이여, 왜 그렇게 화가 났나요? : 에머슨은 노예제에 반대하는 연설을 하다가 군중의 야유를 받고 연단에서 끌려 내려왔다. 그는 몹시 화가 나서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정원 문을 열고 키 큰 느릅나무를 올려다보는 순간 나뭇가지 사이로 별이 빛나는 것이 보였다. 별은 그에게 ‘작은 인간이여, 왜 그렇게 화가 났나요?’ 하고 묻는 듯했다.
10. 마음의 상처는 오직 자신만이 입힐 수 있다 : “그렇다면 자네는 작다고 해서 자네의 명예를 짓밟고 모욕하는 자를 그냥 내버려두겠다는 건가?” / “각하, 저 자신 이외의 그 누구도 제 명예를 짓밟을 수 없습니다. 명예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본인만이 가능한 일이니까요.”
11. 여행으로 마음을 넓혀라 : 할 수만 있다면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누구나 세계 일주를 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계를 돌아본 후에야 보아야 할 모든 것을 보았다는 느낌이 든다. 부분이 모여 조화로운 전체를 이루는 것, 그리고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하나의 분명한 목적을 위해 각자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2. 부자인 채로 죽는 것은 부끄러운 일 : 《부의 복음(The gospel of wealth)》을 출간한 이후로 나는 부를 축적하려는 노력을 그만두고 이 책의 가르침에 따라 살기로 했다. 부의 현명한 분배라는 훨씬 더 중요하고 어려운 과제에 뛰어든 것이다.
카네기 자서전 중에서
어린 시절 내게 큰 즐거움을 가져다준 일 중의 하나는 비둘기와 토끼를 기르는 것이었다. … 내 생애 최초의 사업은 이때 이루어졌다. 새끼가 태어나면 그들의 이름을 붙일 수 있게 해준다는 조건으로 친구들에게 토끼 먹이를 모아 오게 한 일이다. 수업이 없는 토요일이면 우리는 토끼가 먹을 풀을 뜯으러 다녔다. 어린 친구들이 한 철 내내 나와 함께 민들레와 클로버를 따면서 아주 적은 보상에 만족했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양심에 가책이 되는 일이다. … 이 일은 나의 조직력을 보여준 최초의 사건이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조직력은 훗날 내게 물질적 성공을 가져다준 주요 요인이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무엇을 알거나 나 스스로 무언가를 해서가 아니라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을 뽑아 쓸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얼레 공장의 지하실에서 작은 증기기관을 가동시켜 보일러를 때는 그 일이 나에게는 너무 벅찼다. 나는 매일 밤 제대로 눈도 붙이지 못한 채 증기기관의 계기판을 들여다보아야 했다. 그렇지만 이런 얘기를 부모님께 말씀드릴 수는 없었다. 부모님에게도 나름대로의 근심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남자답게 이 일을 견뎌내야 했다. 나는 포부를 크게 갖고 날마다 어떤 변화가 찾아오기를 고대하였다. 어떤 종류의 변화일지는 모르지만 성실하게 일하다 보면 틀림없이 무슨 변화가 생기리라 믿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결코 포기할 없다는 것이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우리가 겪는 고난의 대부분은 상상의 소산으로, 웃어넘길 수 있는 것들이다. 강을 만나기도 전에 다리를 건너고 악마를 만나기도 전에 지레 겁을 먹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다. 재앙이 우리를 강타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안전하며 또한 실제로 재앙이 닥쳤다 해도 열에 아홉은 생각했던 것만큼 나쁘지는 않다. 현명한 사람들은 대개 낙관론자이다.
나는 사업을 해오는 동안 노동쟁의가 임금문제에서 비롯되는 것만은 아님을 입증하는 사례를 수도 없이 보아왔다. 쟁의를 예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종업원들의 수고를 인정해주고 진심으로 그들의 복지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나는 늘 기쁜 마음으로 공원들을 만나왔으며 그들을 알면 알수록 더 좋아하게 되었다. 이것은 거짓 없는 나의 고백이다. 공원들은 일반적으로 고용주들에 비해 배 이상의 미덕을 지니고 있고, 분명 서로에게 보다 너그럽다. 노동자는 대개 자본에 대해 무력하다. 만약 고용주가 회사 문을 닫기로 결정하면 공원들은 생계를 위협받게 된다. 위안이 되어줄 만한 것은 거의 없고 가족의 건강을 돌볼 형편이 안 되어 아이가 아파도 제대로 치료조차 받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보호해야 할 것은 자본이 아니라 힘없는 노동자들이다.
내 머릿속에는 늘 ‘내가 이 모든 축복을 받을 만큼 잘한 일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하는 질문이 떠나지 않았다. 개인연금의 수혜자 명단에 적힌 소중한 친구들의 이름은 이 질문에 대한 만족스런 해답을 주었다. 나는 내 몫 이상으로 많은 것을 받아왔기에 신에게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주의 법칙 속에서 말없이 고개 숙여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아무것도 구하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이 세상이나 저 세상에서의 보상을 바라지 않아야 한다. 과연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복되다. 만약 입장이 서로 바뀐다면 이 소중한 친구들은 내가 그들에게 해준 것과 똑같이 나와 내 가족에게 해주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