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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 이야기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사회

작성자管韻|작성시간20.09.19|조회수1,354 목록 댓글 0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사회

 





 

19183월에 동부 전선의 안정을 전제로 독일이 서부 전선에 총공략을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에 의해 강화된 전력으로 연합군측은 도리어 독일에 대하여 총공세를 펼쳤고, 또 이때 헤이그가 이끄는 영국군은 이 총공세에서 탱크전으로 독일을 퇴각시켰다. 1111일 드디어 연합군 측은, 비록 독일 땅에서는 아니지만, 독일의 항복을 받아 냈다.

 

이렇게 해서 독일은 국내적으로는 정권의 붕괴를 가져왔고, 대외적으로는 동맹군인 오스트리아, 터키, 불가리아도 독일과 같이 연합군측에 항복했다.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의 공격을 받기 전에 전쟁이 끝나서 다른 나라보다 피해량이 적었을 뿐만 아니라, 프 연합군이 발칸 지역을 통해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있어서 이득을 보고 있었다. 19세기부터 붕괴되기 시작하던 터키 제국은 이제 완전히 그 세력을 잃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요인들을 꼽으면 징병 제도를 통해 처음으로 국민 다수를 동원해서 총력전을 펼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8천척의 원양 항해선 중 5천 척이 독일의 잠수함에 의해 파괴 되었지만, 1917년 이후에는 수뢰로 잠수함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구축함이 호위하는 수송단을 편성하여 군수 물자를 원활히 공급하고 독일의 중요 해군 기지인 벨기에 기지를 봉쇄할 수 있었던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또한 전시 중에 모든 영연방 자치령들이 영국과 합세해서 40억 파운드란 전시 소득세가 쉽게 거두어진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이것은 전쟁 비용의 확보란 면도 있지만, 무산 시민을 가리지 않고 세금이 평등하게 분배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데 의의가 있다.

 

11월의 평화 조약을 근거로 영국 의회는 독일에게 전쟁 피해에 대한 배상뿐만 아니라, 전시 연금 재원까지 계산한 방대한 양의 배상금과 전범의 처벌도 요구했다. 그러나 의회는 프랑스가 주장하는 라인 강을 국경으로 하는 안건은 거절했고, 비록 비준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상호 동맹 조약 체결 조건은 수락했다.

 

한편 이탈리아는 연합군에 참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적의에 가까운 냉대를 받았고, 독일도 가혹한 조약들 때문에 절망에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때부터 이 두 국가들은 또다시 새로운 전쟁을 일으킬 불씨를 잉태하고 있었다.

 

1919년에는 빈 회의에서 무시되었던 민족주의 세력이 각성하였고, 국제적경제적인 국경이 무시된 반면에, 인종에 의한 국경이 존중됨으로써 세계 경제 공황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들이 생겨났다. 러시아는 공산화되었고, 이탈리아는 독재국화 했으며, 또 영국은 전후 복구 차원에서 자신의 해결 방법을 찾았지만 정치적인 면과 경제적인 면에서의 변화에 대해 고민한 것은 사실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전쟁관련 인구와 산업생산설비를 정상으로재배치해야 하는 문제가 생겼다. 하지만 전쟁 동안에 물가불안이 심각해지고, 경제활동에 대한 정부개입이 커지면서 경제가 여러 면에서 경직되었다. 종전 후 맺어진 조약(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각국의 영토가 분할되었다. 그런데 경제적 고려를 무시한 채 민족자결원칙에 입각하여 국경이 정해졌기 때문에 기존의 경제, 국제적 분업관계가 단절되고 새로운 무역장벽이 조성되었다.

 

전쟁 동안 교전국들이 농산물 생산을 중단하고 수입에 의존하면서, 미주 대륙과 호주 등 신세계에서 곡물농업, 목축의 생산과 수출이 급증했다. 전쟁이 끝나고 유럽이 농산물 생산을 재개하자 전 세계적으로 농산물이 과잉 생산됨에 따라 농산물 가격이 폭락했다. 전후 미국에서는 경제가 잠시 활황이었으나 이때조차 농업은 침체했고 농업지역의 은행들이 부실해졌다. 이를 겪는 농민의 어려움은 1920년대 미국에서도 사회문제가 되었다.

 

사회혼란도 전후의 주요 문제였다. 러시아 혁명(1917)의 여파와 함께, 전쟁 동안 참호 속의 생활을 함께 경험하고 난 노동계급의 조직, , 단결력이 커져 전후 노동계급의 투쟁과 저항이 강력해졌다. 그리하여 국가마다 대응양식에 따라 사회민주주의 또는 파시즘 독재로 혼란을 겪었다. 어느 체제하에서건 노동시장의 경직성이 커졌으며 대부분 고임금과 실업으로 빠져드는 경향이 있었다.

 

전후문제 처리를 위해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때 복수심에 불탄 연합국은 패전국 독일에 엄청난 규모의 배상금을 부과했다. 이것은 국제적으로 정치적 대립과 경제적 불화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유달리 배상금에 집착한 나라는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미국과 영국에 대한 프랑스의 채무상환이 독일에 부과한 배상금과 연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프랑스의 주장은 서로 모순되었다. 만일 목표가 유럽경제 재건을 위한 국제연대라면, 협력이 성공하기 위해 교전국 모두가 그 부담을 분담해야 마땅하다. 목표가 정의라면 전쟁 채무는 채무국의 개별 책임으로 해야 한다. 채무를 배상금과 연계시킬 이유가 없었다.

 

케인즈(John M. Keynes, 18831946)는 이 조약이 체결된 1919년에 평화의 경제적 귀결(EconomicConsequences of the Peace)이란 글에서 배상금 규모를 맹비난했다. 케인즈에 따르면, 1914년 이전에 유럽의 번영은 대부분 독일의 경제성장에 의존했으므로 독일을 경제적 장애자로 만드는 것은 현명한 처사가 아니었다. ‘독일에 천문학적 규모의 전쟁배상금을 부과한 조항이 경제대국인 독일의 경제를 몰락시키고 결국 주변 나라를 모두 가난에 빠뜨릴 것이기 때문에 이 조약은 어리석은 것이었다.

 

여하튼 베르사유 조약에서 연합국이 독일에 부과한 배상금 조항과 이후 책정된 액수는 케인즈가 지적한대로, 너무 커서 이행하기 어려웠다. 프랑스는 독일이 이를 고의적으로 이행하지 않는다고 단정하고 철, 석탄 등의 지하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된 독일의 루르지방을 점령했다. 독일 정부는 루르 지역 주민의 애국심을 자극하면서 소극적 저항을 하도록 주문했다. 프랑스는 그 지방을 점령했지만 배상금을 받아내지도 못하고 단지 독일의 경제만 마비시켜 버렸다.

 

전후 문제 처리에서 유럽 각국들은 근시안적이었다. 미국의 태도도 문제였다. 1차 세계대전의 전세가 연합국 쪽에 유리하게 된 데는 미국의 전쟁 개입이 결정적이었다. 그래서 미국의 정치적 비중은 상당히 컸다. 또한 무엇보다도 미국은 이후 세계의 지배적인 금융중심국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은 새로이 획득한 세계 지도국 지위에 걸맞은 책임을 적절히 지려 하지 않았다. 당시 미국지도자들은 자국의 장기적 이익에 부합하는 바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통찰력이 부족했다. 반면 영국은 국제적 최종대부자로서의 능력을 상실했는데도 자꾸 그 역할을 하려들어 국내외적으로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독일 인플레이션 독일의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가치가 폭락한 지폐가 벽지로 쓰이고 있다. 인플레이션도 문제였다. 예를 들어, 전쟁이 그렇게 길어질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각국은 전쟁 물자를 세금만으로 충당할 수 없어 돈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가격상한제, 물가통제 등도 실시했다. 결국 동구권, 독일, 오스트리아 등을 중심으로 초인플레이션이 진행되었다.

 

특히 독일의 인플레이션이 가장 심했다. 19228월부터 월 335%의 천문학적 비율로 도매물가가 올라 192311월에 절정에 이르렀다. 경상수지적자 때문에 마르크화 가치가 떨어졌고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통화를 증발할 수밖에 없어 결국 잠재되어 있던 인플레이션이 폭발했던 것이다. 1913년 물가수준을 100으로 할 때 1923년의 물가수준이 1,000,000,000,000이었다.

 

금융자산 형태의 부가 소멸했다. 사회 안정을 유지하던 독일 중산층의 월급과 저축이 사라졌다. 이들의 근검, 절약 가치관은 조롱당했다.

 

이들은 연합국 정부, 독일 정부, 대기업, 유태인, 노동자, 공산주의자를 자신들을 불행하게 한 장본인으로 지목하기 시작했다. 인플레이션은 1920년대 바이마르 민주주의를 붕괴시키고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가 이끄는 국가사회주의(NAZI)가 출현하는 배경이 되었다.

 

독일의 유명한 작가 귄터 그라스(Günter Grass, 19272015)양철북에서 주인공 오스카는 나는 일곱 살에 머무르겠다. 더 이상 성장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것은 성장하는 모든 것을 두려워하고 거부하는 발언이었다. 오스카의 이러한 발언과 다짐, 성장을 멈춘 인생을 살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행동은 엄청난 초인플레이션을 경험한 당시 독일인들의 불안감을 극명하게 표현한 것으로서, 그라스는 이 작품으로 199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고전적 금본위제는 이미 전쟁 초기에 희생되었다. 거의 모든 유럽의 중앙은행들이 일방적으로 금 지불을 중지했다. 대신 강대국들은 연합국간 대부를 근간으로 고유의 지불체계를 발전시켰다. 영국은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 등의 연합국에게 자금을 빌려 주었다. 그것만으로는 모자라, 이후에는 미국이 이들에게 전시 대부를 제공했다.

 

이들 사이에서 환율은 (경제적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용인되는 수준에서 고정되었다. 필요한 물자는 대부분 채권국의 국내시장에서 조달되었다. 이러한 전시대적체계는 교전국 공통의 목표 달성을 위해 필요한 군수품 수입 수준을 유지하는 방안으로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처럼 1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발생하는 외채(전시대부)가 주로 미국에서 영국을 거쳐 프랑스와 벨기에 등에 공급되다가, 전쟁이 끝나자 이 협력은 즉각 단절되었다.

 

이러한 연합국 간 대부체계의 단절도 국제경제에 큰 충격이었다. 미국의 금융지원이 중단되자 채무국들의 경제재건이 어려워졌다. 특히 프랑스가 전후복구와 전시채무 상환을 위해 독일에서 전쟁배상금을 받아내려 애썼다. 결국 이와 같은 대대적인 국제적 채권채무 관계는 미국이 대부를 다시 시작함으로써 일단 미봉되었으나 전후 국제경제 질서에 큰 불안요소였다. 2000년대의 글로벌 불균형(경상수지 흑자와 적자가 조정되지 않고 계속 누적되는 상황)도 이와 유사한 문제를 안고 있다. 미국은 50년 만에 세계 최대 채권국에서 최대 채무국으로 되었다.

 

한편, 1차 세계대전 후 경제 불황은 심각했다. 첫째, 전쟁이 끝나자 갑자기 제대한 많은 병사들이 그동안 여성들이 주도하던 경제 조직 속으로 비집고 들어갈 틈이 적었던 사실과, 둘째 전쟁 때문에 이루어진 괄목할만한 기계의 발전은 노동력의 수요를 축소시켰다. 셋째로, 전시에 발행되었던 막대한 국채로 인해 국가 예산에 문제가 발생했다.

 

구체적으로는, 1920년부터 1931년 사이를 예로 들어 영국은 경제적으로 유럽 대륙 내 국가들보다 약해진 듯이 보였다. , 영국 산업계의 기본 시설들이 새롭게 시작하는 독일이나 신세력으로 부상하는 미국보다 낙후했고, 임금마저도 대륙보다 비쌌으며, 대외 무역에 있어서도 불황으로 모든 국가가 자급 자족하기에 급급하여 소비 시장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또한 영국 경제의 특징인 자유 무역에 관한 내용과 시장 판로가 없어져서 영국 해운계는 휴업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또 달러에 밀리면서도 파운드화의 가치를 유지하려다 보니 자연 파운드의 절상으로 인해 수출이 잘 되지 않아서 현실적으로 실업자 수를 증가시키게 되었다.

 

19세기 산업 혁명 당시만 하더라도 남부에서 북부로 이동하던 노동 인구가 전후에는 남부, 특히 런던 지방으로 다시 집결되었다. 그 이유는 전기와 가솔린 엔진의 보급 때문인데, 궁극적으로 전후 점차 2차 산업에서 3차 산업으로 노동 인구가 이동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북쪽에서 열심히 일하던 탄광 노동자들은 가솔린과 폴란드에서 생산되는 값싼 석탄이 들어옴으로써 실업자가 되었는데 당시 150만 명 정도나 되었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문제를 풀겠다고 제2차 맥도널드 노동당 내각(19291931)이 나섰다. 그러나 1929년 미국에서 터진 금융 대공황의 여파로 그는 이 문제를 풀지 못하고 보수 쪽의 스탠리 볼드윈과 합류하며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거국적 연립 내각(19311935)을 결성했다. 이 내각은 국민들의 협조로 경제를 회복시켜 나갔다.

 

당시 재무상이던 체임벌린(Chamberlain, Neville)은 실업의 근본 문제였던 파운드화의 금본위제를 폐지하고, 영국의 대표적인 경제 정책인 자유 무역을 포기함으로써 주변국들에게 관세를 부과하는 보호 무역으로 돌아섰다. 뿐만 아니라 과감한 세출 억제와 새로운 세금 부과로 예산상의 균형을 회복했다. 그의 이러한 보호 무역 정책으로의 전환은 위로부터의 일방적인 조처로 된 것이 아니라 일종의 국민들과의 타협에서 이루어졌다.

 

또 경제적으로 회생하기 위해 1931년에 발표된 제2 웨스트민스터 조례(Statute of Westminster)를 통해서 영연방과의 결속도 다져 나갔다. 이는 일단 영국이 정치적 권한을 영연방들에 많이 이양해 주면서 한층 결속 관계를 강화했던 보호 무역적 법령이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영국 의회는 자치령 법률을 제정할 수 없고, 또 자치령에 국한된 전쟁과 평화에 관한 결정권과 조약의 체결권만 있으며, 자치령의 수상은 국왕에게 직속된다는 것 등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1925년을 전후하여 여러 나라의 통화제도가, 전시와 전후 인플레이션 기간에 포기되었던 금본위제로 복귀한다. 하지만 일단 통화안정이 달성되자 다른 문제들이 나타났다. , 금본위제로 돌아가면서 각국은 자국의 통화가치를 정할 때 상호조정 없이 독자적으로 결정했는데, 이 때문에 각국의 통화가치가 상대적으로 과대, 혹은 과소평가되는 문제가 발생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통화를 상대적으로 과대평가한 나라는 통화가치 유지를 위해 긴축정책을 써야 했다. 영국이 대표적 예다. 영국은 지난 시절(19세기) 화려했던 국제적 위신만을 생각하여 경제적 근거도 없이 파운드화 가치를 전쟁 이전 수준으로 높여 금본위제에 복귀했다. 고평가된 통화가치를 유지하려면 긴축정책을 써야 한다.

 

영국은 수출에 큰 타격을 입었고, 이자율은 치솟고, 공장들은 문을 닫았다. 그리하여 영국은 대공황이 발생하기 전부터 이미 실업이 엄청나게 늘었다. 금본위제에 복귀한 나라들이 채무국일 경우, 이들의 채무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배상금과 전시채무로 19241930년에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의 누적된 채무규모는 국민경제에 비해 엄청나게 컸다.

 

1920년대 미국은 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호황이었다. 라디오, 포드T형 자동차 등이 대량생산으로 널리 보급되고 할리우드 영화산업1)도 급성장했다. 미국은 센세이셔널한 문화 충격에 점점 민감해져 갔다. 들뜬 분위기에서 토지와 주식투기 열풍도 일었다. 1920년대 말 미국에서 주식시장 붐이 일면서 미국에서 유럽으로 유입되는 자본 규모도 감소했다.

 

시장과열을 우려한 중앙은행(FRB)이 긴축통화정책을 추진했다. 미국이 이자율을 급격히 인상하자 해외대부 유인이 더욱 줄었다. 이 때문인지, 자발적 자금도피 때문인지, 오스트리아, 독일 등 유럽 나라들의 은행이 예금인출과 파산으로 고통을 겪었다.

유럽의 위기와 동시에 1930년 미국도 경기침체에 들어간다. 19281929년 미국의 긴축적 통화정책이 공황발발의 큰 요인이었다.긴축정책과 함께 경기가 냉각되고 주식자금 신용대출이 격감했으며 전반적 기대가 하락하여 192910월 주가가 폭락하였다.

 

그러나 1929년의 주식시장 붕괴가 대공황과 직결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주식가치 하락으로 보유자산, 즉 부의 실질가치가 하락하여 소비지출 수요가 줄고 소비자의 부채자산 비율이 높아졌으며, 소비자의 장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가중된 면을 생각할 수는 있다.

 

하지만 통계수치를 보면 부의 감소효과는 10% 미만이었고 주식가격과 배당수익의 비율(P/E)은 불변이었다. 주가는 소득의 변동에 따라 등락하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1987년 주가폭락을 보면 낙폭이 그 당시와 정확하게 같다. 요즘 같은 정보통신 시대의 위력을 감안할 때 1987년 사건의 충격이 오히려 더 클 수도 있었겠지만 이것이 세계적인 금융위기로 전파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대공황 초기의 주식시장 와해는 심리적 효과 이외의 별 의미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아직 진행 중인 논의이기는 하지만 1930년의 은행위기가 대공황을 촉발시켰다고 보기도 한다.(통화설) 은행위기는 어떤 메커니즘으로 공황을 초래할 수 있는가? 첫째, 은행들이 보수적으로 경영하고 은행을 믿지 못하는 소비자는 현금을 선호한다. 그래서 금융제도의 신용창조 기능이 떨어지고 통화량이 감소하고 금리가 높아져서 기업들이 피해를 본다는 것이다. 둘째, 전반적인 비관론이 만연할 경우다. 셋째, 금융 중개비용이 증대하여 경색현상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당시 물가수준으로 나눈 실질통화량은 줄지 않았으며, 또한 통화량 감소의 지표라고 볼 수 있는 이자율도 상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11월과 12월의 은행파산들은 테네시 주의 콜드웰(Caldwell) 은행과 뉴욕시의 뱅크 오브 유에스(Bank of US), 이 두 은행이 부실채권으로 파산했기 때문인데 이들의 부실채권을 두 달 간의 총 은행부채에서 빼면, 1930년 말 은행위기는 1931년 여름과 가을의 은행위기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작다는 것이다.

 

1931, 1933년의 은행위기는 대공황의 원인이 아니라 과정이었다. 그렇다면 1929년 주식시장 붕괴와 1930년 은행위기는 대공황의 원인이었다기보다는 초기 징후였다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전후 구조적 문제에 대처하는 데 소홀한 채 각국이 너나 할 것 없이 긴축기조를 유지한 것이 대공황을 몰고 온 것이다.

 

위의 셋째 요인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중부유럽 은행시스템의 붕괴는 1차 세계대전의 전후문제처리 과정에서 경제적 산업기반은 고려하지 않고 민족주의에 따라 국경을 분할한 부정적 효과의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그 붕괴는 1929년 오스트리아 2위 은행 보덴크레디트안쉬탈트(Bodencreditanstalt)의 파산과 함께 시작되었다. 1920년대에 비엔나의 은행들은 본래 그들의 공업거래처인 체코슬로바키아와 완전히 단절되었다. 그래서 은행경영에 필요한 건전한 기반은 사라진 상태였다.

 

그런데도 오스트리아의 최대은행인 로스차일드의 크레디트안쉬탈트(Creditanstalt)는 마치 합스부르크 제국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기라도 한 듯 방만한 경영을 지속하면서 수익성 없는 산업에만 집착하고 있었다. 게다가 부실한 보덴크레디트안쉬탈트를 정부압력을 받고 인수하기까지 했다.

 

결국 크레디트안쉬탈트도 파산했다.(19315) 이 은행의 파산은 많은 국내외 다른 은행들에 대한 인출 쇄도, 오스트리아 쉴링에 대한 공격으로 파급되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헛되이 금본위제를 지키고자 순식간에 외환준비금을 모두 소진하고 뒤늦게야 외환통제를 실시했다.

 

19317월 독일 금융위기의 원인은 독일 내부에 있었다. 독일의 위기는 여러 면에서 1997년 아시아 위기와 유사한 쌍둥이 위기였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재정 문제가 통화 문제를 초래하고 이것이 은행의 문제를 초래했다. 1931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재정은 심각한 불균형 상태로 미국, 프랑스에서의 차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런데 독일 수상 브뤼닝(Heinrich Brüning, 18851970)이 오스트리아와의 관세동맹에 관한 옹호 발언을 하자 1차 세계대전 이후 잔존해온 국가 간 긴장이 다시 고조되었다. 독일로 들어오는 대부자금이 끊어지고 제국은행의 금준비가 급감했다. 독일의 정세불안을 우려한 국내자본의 해외도피도 이를 부추겼다.

 

파산한 어느 대기업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했던 다나트 은행(Danat Bank) , 은행들은 제국은행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은행들의 준비금을 화폐로 찍어낼 제국은행 자산은 바닥이 났다. 차입도 불가능했다. 제국은행은 베를린 은행들의 어음을 더 이상 매입할 수 없었다.

 

제국은행은 국제차입을 시도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미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대해 서로 엇갈린 태도만 취했다. , 1930년대는  국제적 협력이 전혀 없었고 헤게모니적 지위를 가진 국제 최종대부자도 전혀 없었음이 명백히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독일은 결국 금본위제를 사실상 포기했다.(19317) 그런데도 브뤼닝은 독일이 여전히 금본위제에 묶여있기라도 한 듯, 긴축정책을 계속 유지했다. 브뤼닝은 독일이 배상금 지불능력이 없음을 확실히 보여주고자 독일 경제를 황폐화시켰다. 독일의 민주주의도 파괴시켰다.

 

독일의 모라토리엄에 따라 독일내 외국인 자산이 동결되었다. 이를 깨달은 다른 나라도 외국인 자산을 동결하면서 많은 유럽 나라가 고통을 겪기 시작했다. 헝가리, 루마니아 등은 은행이 오스트리아 은행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어 고통이 특히 심했다.

 

프랑스의 은행들은 1920년대 말에 전반적으로 금융적 지위가 괜찮았지만 1931년 후반에는 상태가 악화되었다. 영국의 상업은행들은 지점구조가 튼튼했고 전통적으로 산업자본과의 연계에 신중했기 때문에 이 위기에서 별로 피해를 입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이 곧 파운드(스털링) 가치의 안정성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독일이 외환통제로 돌아서자 영국 파운드는 압박을 받아 7월 이후 파운드 매각이 꾸준히 증가했다. 독일에 대한 파운드 자산이 동결된 후에 영국의 문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영국은 1차 세계대전 비용 마련을 위해 금과 외화를 소진했는데도 전전 평가로 금본위제에 복귀했기 때문에 통화가 과대평가 되었다. 또한 개발도상국에 대한 장기적 자본 수출국 역할을 유지하려 들어 영국경제의 취약성은 가중되었다. 자산에 비해 단기부채가 엄청나게 높아져 신인도가 하락하자 파운드 평가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렸다.

 

영국은 7, 8월에 프랑스와 미국에서 준비금을 차입한 이후 결국 금본위제를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19319) 이러한 유럽의 금융위기는 다시 미국의 2, 3차 은행공황(1931)을 불러 일으켜 악순환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금본위제가 유지되려면 특히 적자국에서 경기부양이 필요할 때 팽창정책을 쓰지 못하고 긴축기조를 지켜야 한다. 금본위제를 포기하든지, 팽창정책을 포기하든지, 양자택일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국내에서 경제정책을 제대로 펼치기 위해서는 고정환율제의 족쇄에서 벗어나야 했다. 당시 대공황에서 회복되려면 금본위제를 포기하고 평가절하를 해야 했다. 그래야 팽창정책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찍이 1931년에 평가절하를 단행한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영국, 일본, 호주는 회복속도가 가장 빨랐고 1936년까지 금본위제를 고집한 프랑스, 벨기에, 폴란드는 매우 늦었다. 외환통제를 실시한 독일 등은 그 중간에 위치했다.

 

미국도 1933년 루즈벨트가 집권한 이후 회복이 시작된다. 이는 공공사업 등 뉴딜정책이 효과를 내어서가 아니라 금태환 정지와 평가절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평가절하는 미국내 가격을 올리고 당시 미국인구의 절반인 농민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1920년대의 자본 순이동은 1914년 이전의 해외대부와 비슷했다. 대부분 부유한 채권국에서 채무국으로 향했다. 그런데 1931년부터 급변했다. 막대한 규모의 자본이 저개발국에서 예전의 채권국으로, 국제수지 적자국에서 흑자국으로 갔다. 이 새로운 자본이동은 주로 채무국들의 압도적 규모의 채무상환이거나, 빠르게 움직이며 투기적 요인과 정치적 위협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 대규모 단기자금 이동이었다.

 

핫머니가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급격히 이동하도록 자극한 요인으로는 1930, 1931년의 금융위기, 여러 나라 경제의 안정성에 대한 신뢰 상실과 통화가치 상실 등을 꼽을 수 있다. 자산보유자들은 단순히 자기네 투자가치를 보호할 목적에서 엄청난 금액을 인출했다. 그러자 많은 나라가 금과 외환준비금을 방어하기 위해 외환통제를 단행하기 시작했다.

 

외환통제는 더욱더 많은 자금인출을 야기했다. 탈출구가 봉쇄되기 전에 자금이 이탈하려 했기 때문이다. 독일은 1931년에 계정상 10억 달러 이상의 자본 순유출이 있었다. 비상조치로서의 외환통제가 결국 전체주의적 제도로 변모하였다. 모든 경상거래와 자본거래를 엄격히 통제하는 체제가 성립되었다.

 

외환통제가 늘고 장기대부가 줄자 금융시장이 통합되지 못하고 나라별로 분리되기 시작했다. 전쟁 이전에는 세계 곳곳의 이자율 패턴이 유사(혹은 수렴)했었다. 국제자본이 존재했다는 뜻이다. 이처럼 국제자본이 존재하면 적자국이나 후진국의 경제성장에 필요한 기반시설을 만드는 데 선진국의 저축을 끌어 올 수 있다. 그런데 1930년대는 이와 같은 국제적 자본시장통합이 사라졌다. , 이자율이 수렴하지 못하고 유용한 자본흐름이 고갈되었다.

 

대공황시대는 보통 때라면 생각하기 어려운 온갖 실험이 다방면에서 시도, 혹은 자행된, 그야말로 극단의 시대였다. 산업생산이 지속적으로 감소하여 1929년의 절반수준으로 떨어진 1933년은 대공황이 정말로 세계의 숨통을 끊을 것 같았다.

 

서방세계에서 가장 극단적 정치 실험이 시도된 것이 바로 이 시점이다. 또한 이때는 대중의 힘이 확인된 시기이기도 하다. 대중은 금본위제를 유지하려는 엘리트 정치세력을 투표방식으로 붕괴시키고 히틀러나 루즈벨트를 선택했다.

 

미국의 경기회복은 루즈벨트 취임 직후, 금본위제에서 이탈하고 달러화를 평가절하하면서 이루어졌다. 달러 값이 떨어지자 달러 사려는 사람이 늘고, 또한 유럽의 정치 불안 때문에 금과 외화가 미국으로 유입되어, 적극적인 공개시장매입이 없었는데도 통화량이 늘었다. 이에 따라 이자율이 떨어지고 투자와 내구소비재 지출이 늘어 경기가 호전되었다.

 

군비증강은 1930년대 말까지는 없었다. 미국의 경기회복이 케인즈 모델은 아니다. 당시 재정은 약간 적자였다. 정부가 경기부양을 위해 의도적인 적자재정운영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경기가 나빠 세금이 덜 걷혔기 때문이다. 새로운 정책체제는 강력했고 더 이상의 세계적 경기침체를 저지했다. 물가가 오르고 생산이 증대되며 실업도 줄기 시작했다.

 

뉴딜정책은 1930년대 세계를 강타한 대공황기에 미국 정부가 경기회복과 사회적 재분배를 목표로 금융, 산업, 농업과 임금결정에 직접 개입한 여러 조치를 말한다. 뉴딜은 실험적, 임기응변적이고 실로 일관성과 논리가 결여되었으나 구호와 개혁을 목표로 루즈벨트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2차 대전 발발 때까지 추진되었다.

 

뉴딜의 여러 금융개혁조치 가운데 19336월 글라스스티걸(Glass-Steagall) 은행법이 주목거리다. 이 법의 주요 내용 가운데 하나는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분리한다는 것이다. 은행의 산업투자 활동을 막을 목적으로 은행이 증권업, 보험업 등을 할 수 없게 했다.

 

이에 따라 공황이 발생하기 이전에 대규모 은행들이 취한 관례였던 증권업, 보험업 겸무가 금지되었다. 그래야 은행 신뢰도를 높여 은행위기를 방지하고 금융안정을 이루리라는 믿음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때문에 이 분리원칙이 이후 66년 동안이나 지켜졌다.

 

이 때문에 각 은행은 포트폴리오 분산을 통한 위험감소책을 쓰지 못했다. 정부는 정부대로 전업투자은행을 규제하기가 힘들어 부작용만 나았다. 상업은행과 투자은행 분리는 기업의 장기투자를 위한 외부자금 조달비용도 높였다. 그동안 은행지주회사법(1956, 1970), 은행지주회사 규제세칙(Regulation Y 수정, 19801986),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지침(19871989, 19961997) 등을 통해 차츰 글라스스티걸 법을 우회하는 행위가 허용되어 왔다. 사실상 사문화(死文化)된 이 법은 결국 1999년에 폐기되었다.

 

1933년 은행법은 연방준비제도에 가입한 은행들에게 예금보험을 제공할 것도 규정했다. 이에 따라 예금보험공사(FDIC)1935년에 출범한다. 본래 미국은 1913년까지 중앙은행 없이 주법은행과 국법은행이 서로 경쟁했다. 그 만큼 미국 금융은 분산되어 있었다. 대기업과 대금융을 의심하는 지방자치적 미국식 민주주의 정서에서 지점설치가 금지되었다.

 

이에 따른 독특한 단점은행제도(unit banking system)는 미국의 은행산업에서 규모의 경제가 실현되는 것을 가로 막고, 소형 은행이 난립하게 하였다. 지리적 다각화와 은행 간 협조도 저해했다. 그래서 미국의 단점은행들은 지역적 충격에 따른 은행위기에 특히 취약했다.

 

이러한 단점은행제도로 인한 은행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차원의 중앙집중적(中央集中的) 예금보험제도가 뉴딜의 일환으로 도입된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뉴딜의 각종 경쟁제한 조치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그러나 예금보험제도는 수차례 파탄을 겪으면서도 깊이 뿌리내렸다.

 

이처럼 미국의 특수한 역사적 환경에서 비롯되어 많은 손실을 야기한 예금보험이 다른 나라로 널리 확산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명시적 예금보험을 채택한 국가의 수는 1980년에 20개국, 2003년에 87개국에 달한다.

 

이후 이 제도는 예금보험 대상기관들의 로비활동을 통해 더욱 확대되어 비은행 금융기관까지도 보험대상에 포함되었다. 보험대상기관의 재무 및 경영상태의 연례공시, 위험연동보험료 차등화 등으로 제도의 문제점이 보완되기는 했으나, 예금보험제도란 은행파산이나 도덕적 해이에 드는 비용을 결국 건전한 은행과 조세부담자가 지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갖는 분배적 함의는 매우 크다.

 

예금보험제도는 은행파산을 막는다기보다는 오히려 조장했다. 남북전쟁 이전과 1907년의 은행공황 직후에도 미국 주정부들의 예금보험제도 실험이 있었다. 이들이 거의 실패했기 때문에 연방차원의 예금보험제도 도입에 대한 거부감은 FDIC가 만들어질 당시에도 매우 컸다.

 

그런데도 FDIC에 관한 법안이 통과된 것은 지점망을 가진 대형은행보다 숫자상 절대 다수인 소규모 단점은행들의 로비 탓이었다. 물론 이 법안은 금융효율을 저해했다. 자본의 효율적 배분을 보장할 금융시장의 규율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연구결과들은 예금보험제도가 금융안정에 필요하다는 주장에 회의적이다. 물론 금융개혁 조치 가운데는 바람직한 것도 많았다. 예를 들어 증권법(19335), 증권거래법(19346)은 신주 발행과 상장 주식의 등록 및 공개, 상장회사의 재무제표 보고 등을 의무화 하여 주식시장을 투명하고 효율적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뉴딜정책의 기조 가운데 하나가 공황극복을 위해 경제운행과 자원배분을 시장에 맡기지 않고 필요하면 정부가 이에 개입한다는 것이다. 산업부흥법(NIRA)과 농업조정법(AAA)이 그 대표적 예다.

 

산업부흥법(NIRA)NIRA(19336)는 국가적 긴급 상황을 이유로 독점금지법을 2년간 정지시켰다. 이에 따라 산업의 대표들이 생산설비, 가동시간, 생산량 등을 제한하는 규정을 만들어 대통령의 인가를 받으면 법적 효력이 발생했다.

 

독일과 비슷하게 카르텔을 아예 법으로 허용한 것이다. 이 산업부흥법을 환영한 쪽은 경제사정이 별로 좋지 않았던 산업들(오래된 대기업, 과잉설비에 시달리던 섬유, 철강, 석유업 등)이었다.

 

NIRA 규정을 경제단체들이 고안한 경우도 많았으며 이들의 정치력도 커졌다. 항공, 화학, 엔지니어링 등 장래성 있는 신산업, 중소기업 쪽은 여기에서 소외되었다. , NIRA는 당시 민간기업의 투자의욕을 저해했고 구조조정이나 산업합리화를 거쳐 산업이 부흥할 기회를 정치적으로 제약했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상품시장, 노동시장도 왜곡했다. 이 조치로 생산이 제한되고 가격이 상승했다. 이 때문에 미국이 달러화를 평가절하하여 금이 미국에 유입됨으로써 생기는 생산증가 효과가 많이 상쇄되었다. NIRA에 따른 노사합의 조건은 대체로 노동시간을 단축시켜 고용을 늘리고 임금을 인상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질임금이 상승하여 이것이 오히려 실업을 부추겼다. NIRA가 연간 GNP611% 감소시켰다는 평가도 있다. NIRA를 통해 생산을 통제하려는 정부의 시도는 정치적으로도 실패했으며, 경제적으로도 공황이 회복되는 데 역효과를 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NIRA 가운데는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을 보장하는 규정이 있다. 기업이윤을 보장하는 동시에 노동자의 소득을 지지한다는 취지였다. 훗날 NIRA가 연방대법원의 위헌판결을 받은 이후에도 이 규정만은 와그너법(1935)으로 확대 계승되었다. 이것이 노동자 단체를 보호하는 데 전기를 마련했고 이후 노동자의 조합가입률이나 조직적인 활동이 급신장했다.

 

고용주는 최대 노동시간, 최저임금 등의 규제를 받아들여야 했다. NIRA에만 국한시켜 보면 이 법은 루스벨트 대통령과 재계 간 이해관계의 우호와 갈등, 노동단체의 지지에 힘입은 재선전략 등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노동경제적 측면에서 NIRA의 효과를 논하자면, 당시 단체교섭의 관행이 뿌리내리면서 노동시장의 성격이 크게 변했다. , 실업이 별로 줄지 않는 가운데 임금과 노동조건이 개선되었다. 실질임금이 상승하면서 노동생산성 또한 증가했다.

 

농업조정법(AAA)미국 정부는 1920년대부터 누적된 농업공황을 해결하기 위해 농업생산을 통제하는 AAA 조치를 시행했다. 정부가 생산량을 제한하여 농산물 가격을 지지한다는 것이 목표였다. 이에 따라 경작지 제한에 협조한 농가에 휴경지 지대를 지불하거나 상품신용공사를 통해 저리자금을 지원했다.

 

그 결과 루스벨트의 첫 임기 동안 농산물 가격이 50%나 올랐다. 대규모 농가는 이 조치의 혜택을 크게 받았다. 임금노동을 고용하는 자영농지 규모도 커졌다. 노동시장 구조가 변화하여 수확기 노동공급이 쉬워지고 대규모 생산방식과 함께 기계화가 도입되는 전기가 마련된 측면도 있었다.

 

하지만 소작농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 조치가 경작지를 제한했기 때문에 소작농은 농지에서 축출되었다. 땅을 잃은 소작농은 임금노동자가 되어 다시 도시의 노동시장을 압박했다.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 19021968)의 유명한 소설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는 이처럼 농업불황으로 땅에서 쫓겨나 멀리 떠나야만 했던 농민의 어려움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스타인벡 역시 노벨상을 받았다.(1962)

 

정부는 AAA 시행에 필요한 자금을 농산물 가공업체에 부과한 이윤세로 조달했다. 미 연방 대법원은 이것을 위헌이라고 판결했으나, 이후에도 농업부문에 대한 정부개입은 이를테면 토양보존이라든가 하는 형식으로 지속되었다. 경작지 제한으로 총생산이 줄었나 하면 그렇지 않았다. 그보다는 단위면적당 산출을 늘린 면이 더 컸다.

 

그 결과 정부수매 농산물 재고가 누적되었다. AAANIRA보다 여론과 정치의 검증에 대응하기에 다소 나아 보인 면은 있었다. 그러나 순전히 경제효율과 복지 측면에서만 접근한다면, 뉴딜의 생산통제는 그보다 더 나은 다른 대안을 모색했어야 했을 조치였다.

 

2차 뉴딜이 시행된 것은, 달러의 금태환(金兌換, 화폐를 금으로 교환하는 것) 정지와 평가절하가 자리 잡고, 해외에서 미국으로 자본이 유입되어 이자율이 하락하며, 이에 힘입어 투자 및 내구소비재 지출증가와 경기회복이 시작된 이후다. , 재정지출의 팽창이 경기회복을 불러 온 것이 아니다.

 

구호정책은 뉴딜 가운데 가장 큰 업적으로 꼽힌다. 공황에서 회복하고 이에 따른 소득증가의 혜택을 골고루 나눈다는 의도에 하층민 유권자를 의식한 정치적 전략이 맞물린 것이었다. 의도, 전략이야 어떻든 간에 이 정책은 소득과 부의 재분배에 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전기를 마련했다.

 

구호정책이 추진된 방식은 ‘2차 뉴딜에서 연방정부가 실업자, 빈민 등에게 저리대부를 제공하거나 공공근로를 통한 대규모 공익사업(도로, 병원, 학교, 운동장 건설, 자연보존활동)을 벌이는 것이었다. 재원은 세수를 늘려 충당했다. 국민소득에 대한 정부예산의 비중은 뉴딜이 시작될 당시 12% 정도에서 20% 이상으로 터무니없이 급증했다. 그중 절반 이상이 구호사업에 쓰였다.

 

만일 재정운용에 문제가 있었다면 그렇게 막대한 재정지출을 증가시키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재정은 약간 적자였다. 정부가 경기부양을 위해 의도적으로 적자재정 정책을 펴서가 아니라, 불황이라서 세금이 덜 걷혔기 때문이었다.

 

공공근로 사업과 실업보조는 실상 생산효과나 고용유발효과가 극히 낮은 부문에 대한 투자였다. 그래서 경제효율은 떨어졌다. 그것은 재분배를 위한 이전지출의 성격이 컸다. 구호수혜의 규모는 총 실업자의 2030% 정도로, 공공지출의 배분에서 형평성 문제도 발생했다.

 

실업자는 구호정책이 가장 활발했을 때조차 700만 명에 달했다(1937). 1933년의 1500만 명보다는 다소 호전되었으나, 1938년에 다시 1000만 명으로 늘었다. 구호활동이 소득을 지지하는 수준도 낮아, 3인 이상 가족의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했다. 주로 건축 종사자, 미숙련 생산직 노동자가 우선 구호대상자였다.

 

실업률이 높은 연령층(청소년, 노인)은 구호대상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차별을 받았다. 대규모 공공지출의 지역별 배분에서 어떤 일관된 원칙은 보이지 않는다. , 구호사업에 경제적 변수보다 대통령의 재선승리를 위한 정치적 요인이 고려되었다는 혐의를 받을 만했다.

 

이러한 뉴딜의 조치들이 실업치유라는 애초 목표 달성에는 실패했다 하더라도 미국경제에 다른 전기를 마련한 측면은 있다. NIRA(The National Industrial Recovery Act)는 노동자의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을 보장하여 장기적으로 노동조건 개선에 기여했다. 와그너 노사관계법은 NIRA의 노동권 조항을 이어받아 노조의 활동이 1950년경까지 성장했다. AAA 조치도 달리 보면 일종의 농업 구조조정이었다. 대대적인 구호정책은 대중에게 국가가 일자리를 곧 마련해주리라는 희망을 주었다. 오늘날 미국의 소셜 시큐리티(Social Security)’ 제도도 이 구호정책의 노령보험에서 발전한 것이다.

 

이렇듯 순전히 경제적 측면에서만 본다면, 뉴딜의 산업통제와 구호정책은 공황에서의 회복을 오히려 더디게 했고, 실업문제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채 비용만 컸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뉴딜은, 정부가 당시로서는 대중에게 아주 새롭게 받아들여졌을 정책을 통해 앞날에 대한 기대, 희망, 용기를 주었다. 경제정책의 변화에 대해 사람들이 믿었고 낙관적 기대를 하게 되었다. 사람들의 기대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에 회복이 이루어 질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뉴딜은 경기회복에 부분적인 의미를 갖는다.

 

독일의 나치정권 출범(1933)도 극단적 정치실험의 대표적 예다. 그것은 서방세계에서 19세기 자유주의의 몰락을 확실히 알리는 새로운 정책체제였다. 나치는 쿠데타 아닌 합헌방식으로 대중의 지지를 얻어 등장했다. 일단 권력을 장악한 후, 19세기 이래 발전해 온 자유주의 가치관과 이것이 반영된 제도를 제거했다.

 

나치는 모스크바에 적대적이면서도 공산주의 5개년계획을 추종했다. 나치계획의 세부사항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밝혀진 적도, 명확히 서술된 적도 없다. 하지만 정책방향 만큼은 분명했다. 디플레이션(DISinflation, 물가상승률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현상) 정책을 비판하고 완전고용을 이룩하겠다는 것이었다.

 

나치의 새 정책체제에는 내적 일관성도 없었다. 금본위제에 반대 입장을 밝혔으나 대안은 없었다. 위기에 처해 정치적 편의상 만들어졌을 뿐이다. 그것은 정책들 간에 서로 모순되기도 하는, 비자유주의적 자본주의경제체제였다.

 

나치는 실업 감소를 위해 노조를 파괴하고 임금교섭업무를 정부가 직접 담당하며, 병역의무와 강제노동제도를 도입하고, 여성고용 감소를 부추겨 노동수요를 증대시키는 등의 방법을 썼다. 43.8%(1932)까지 올랐던 제조업 실업률이 12%(1936), 7%(1937), 3%(1938)로 줄었다. 디플레이션, 균형재정운영 등으로 4년째 방치되던 경제가 나치 출현이후 결정적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나치는 외환통제를 실시하면서 이 보호막 안에서 팽창정책으로 돌아섰다. 은행국유화는 실행하지 않았으나, 민간은행은 경기회복과정에서 배제되었다. 나치의 경기팽창은 국민에게 직접 경제적 이익을 준다는 소비자 중심의 정책이었다. 막대한 정부지출이 초기에는 일자리 창출, 주택, 도로건설, 자동차 부문에 쏟아 부어지면서 경기팽창의 주요원천이 되었다.

 

계획을 실행할 자금은 정부가 비금융 기업에 재정증권 또는 세금증서(Steuergutscheine)를 직접 매각하거나 정부채로 정규자본시장을 독점하는 방식으로 조달했다. 강제저축 동원과 또 일종의 분식회계 방식을 사용했다. 또한 우대금리를 적용해 기업에 대부하고 감세와 보조금 지급으로 민간투자를 촉진했으며 내부자금 조달을 권장했다. 투자도 인허가 제도, 원료 직접배분 등의 방식으로 행정적으로 관리했다.

 

나치가 군비지출증강을 시작한 것은 회복이 본궤도에 오른 이후다.(19351936) 군수생산의 비중이 커지면서 통제가 더 강화되었다. 나치는 루즈벨트와 반대로 저임금정책을 썼다. 이것이 고용정책과 결합되면서 실업률이 1938년에 3%까지 떨어졌다. 경기팽창을 위한 자극이 가장 강력했던 나라가 독일이다. 이를 케인즈모델이라 할 수는 없다. 단지 기존의 정통적 재정운영과 자유방임시장으로 인한 혼란에서 벗어나고자 계획화와 관리를 택한 것이다.

 

나치독일은 사유재산을 폐지하지는 않았으나 관리자들에게 당근과 채찍을 주어 생산을 통제했다. 나치당 강령들은 잘 따져 보면 미국의 뉴딜이 그랬듯이 서로 간에 모순된 내용들로 가득했다. 그런데도 히틀러가 집권한 후 급격한 회복이 시작되었다. 통계상의 신뢰문제가 제기되기는 하나, 여하튼 실업 문제도 해결되었다. 이것 역시 정책변화를 모든 사람이 인식하기 시작한 기대변화 덕분이었다. 정책내용보다는 정책변화자체가 경기부양의 원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히틀러는 히틀러가 초래하지 않은 대공황의 산물이었다. 이 사실은 경제사적으로 의미심장하다. 나치정권하에서 공식적으로 실업은 해결되고 노동력 부족사태까지 낳았다. 정말 그랬다고 해도 경제학자로서는 이에 대해 뭐라 할 말이 없다. 1차 세계대전 후 베르사유조약을 체결할 때, 서방세계의 주요 산업국인 독일을 가난에 빠뜨릴, 천문학적 액수의 전쟁배상조항이 끼어들지 말았어야 했다.

 

또한 일단 경기침체가 시작될 때 세계 주요국 정부들이 디플레이션 정책으로 4년간이나 경제를 방치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 이외에는‥‥그토록 가공할 테러를 써서 추진된 계획경제가 나치 독일 말고는 서방세계에 없었다. 그런 체제는 스탈린의 계획경제 즉, 대공황과는 무관했으면서도 더욱 끔찍한 테러방식으로 운영된 공산주의 계획경제에나 비할 것이었다.

 

1933년 독일의 재무장관 히틀러가 유럽에서 강력한 위치에 오르면서 독일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베르사유 문제가 다시 거론되었다. 그러나 영국의 정책 입안자들은 독일에 대해 자신들의 무능력함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1936년 라인란트는 비무장화되었고, 독일의 도움으로 스페인 민족주의 혁명가들에 의해 내란(19361938)이 일어났다. 19383월에 오스트리아는 독일에 합병되었으며, 9월에는 체코의 서쪽 국경이 독일의 수중에 들어갈 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독일과의 총력전은 피하려고 했다.

 

한편, 영국은 에티오피아에 침입한 이탈리아의 파시스트에 의해 지중해지역에서 충돌하게 되었고, 팔레스타인 내 아랍의 혁명을 모른 체할 수도 없었다. 거기에다 중일 전쟁은 영국의 위치를 더욱 난처하게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이 약화된 자신의 처지에서 비롯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옆에서 구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9393월 독일과 폴란드 간의 충돌과 루마니아의 위협이 전해졌고, 그 후 이 문제에 프랑스와 러시아가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스탈린은 국내 문제를 이유로 히틀러와 협상하며 폴란드를 침공하는 독일을 방치했다. 그러나 프랑스나 영국은 이 문제를 그냥 넘길 수가 없었기 때문에 193993일 전쟁을 선포했다.

 

국내에서는 1935년 조지 5세가 금혼식(金婚式)을 올리고 그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이후 왕위를 이어받은 에드워드 8세는 미국의 심프슨(Simpson, Ernest) 부인과 염문을 뿌리면서 왕위를 동생인 조지 6(19361952)에게 넘겨주었다. 에드워드 8세의 이러한 행동이 영국민들에게 과연 상징적인 왕마저 필요한가 하는 문제를 줄곧 제기하게 했다.

 

그러나 당시 세계적인 위기 속에서 의회 제도만으로는 부족하고, 영국의 위신을 세우는 구심점으로서의 왕을 필요로 했던 일반 국민들의 지지와 영연방을 다스리는 데 유리하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에 조지 6세의 왕권은 다시 회복세로 돌아서게 되었다. 그리고 그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해 나갔다. 이는 영국이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를 수도 있었고 승전국이 될 수도 있는 디딤돌이 엿보이는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영국은 독일과 미국의 패턴에 따르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 후 영국은 세계적 규모의 회복을 주도하는 데 필요한 국제협조를 창출할 능력(헤게모니)을 잃었다. 파운드화가 고평가 되어 이미 대공황 이전부터 높은 실업에 시달리며 총파업을 겪었다. 결국 금본위제를 포기해야했고, 파운드화를 평가 절하했다. 일반관세를 도입하면서(1932) 85년간 이어진 자유무역기조를 중단했다. 이후 영국은 수출, 내수가 함께 증가했다.

 

노동당정부 이후, 보수당이 우세한 제휴정부도 정통재정론(균형 재정)을 추구했다. 영국은 1930년대 내내 이러한 거국일치내각을 유지했다. 정부가 차입으로 자금을 마련해 대규모 공공근로계획을 채택해야한다는 논의는 영국에서 가장 왕성했다. 케인즈도 이를 강조했다. 그러나 재무성, 금융계, 기업 등에서 적자재정지출에 대한 반대가 뿌리 깊어 시행하지 못했다.

 

구산업(석탄, 직물, 철강, 조선)에 실업이 극히 편중된 구조적 취약성 때문에 재정팽창이 효과가 있었을지도 의문이다. 영국 정부가 이자율을 낮추자(1932) 이 과정에서 통합장기공채와 저당증권 사이의 이자율 차이로 인해 자금이 건설업계로 유입되었다. 주택건설호황이 회복에 기여하기 시작했다. 실업급여가 지나치게 높아 회복속도를 늦췄는지는 아직 논란거리다.

 

영국경제는 대공황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이미 많이 침체했기 때문에, 대공황이 다른 공업국들만큼 그렇게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따라서 회복도 그렇게 눈에 띌 정도가 아니었다. 영국정부는 공업에 제약을 가하기는 했지만 나치나 볼세비키처럼 통제하지는 않았다.

 

영국은 19191922년 사이 비록 완전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미국과 함께 군사력을 강화시켜 나갔을 뿐만 아니라 미국과의 채무 관계도 안정시켰다. 그러나 지리적인 역학 관계 속에서 캐나다, 미국, 일본과 함께 영국은 4개국과 태평양 조약을 맺기 원했다.

 

여기서 영미간의 해군 확장 정책은 군축 쪽으로 기울어지면서 워싱턴에서 위의 조약을 맺기 위한 기초석이 놓였고, 이것이 1930년대에 확대되어 1936년에는 성공적인 조약으로 런던에서 맺어졌다.

 

한편, 양대 강국의 지속적인 군축 정책이 독일 경제의 부활이라는 부산물을 만들어 냈다. 이에 프랑스가 독일의 부활을 두려워하자, 영국은 프랑스와 독일 간에 로카르노 조약을 맺어 독일과 벨기에 간의 국경이 확실하게 설정되도록 했다. 당시 이러한 영국의 행동은 다시 유럽 외교의 주역이 되고자 하는 그들의 의도를 역력히 드러내었다.

 

뿐만 아니라 국제 연맹에 의해 공동 안전이란 환상 속에 독단적인 자신의 모습을 가면으로 덮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영국의 군축 외교는 여러 가지 부작용도 낳았다. 먼저 이전에 독프 사이에 맺어진 베르사유 조약들에 대한 간섭과 중재력이 약해져서 프랑스를 도와줄 수 있는 입장이 못 되었고, 동시에 영국 자신의 군사력도 약해졌다.

 

1931년 세계적인 경제 공황으로 군비의 지출 감소는 더욱 커졌다. 이러한 영국의 군사력 약화가 아시아에서 그 결과를 드러냈다. 일본은 군사력으로 만주 지역을 직접 간섭하였고, 또 이 문제가 태평양권에서 영국의 역할에 대한 문제로 제기되었다.

 

당시 국제 연맹은 힘이 없었고, 미국도 이 상황에서 자신의 힘을 행사하겠다고 했지만 그것은 말뿐이었다. 결국 영국은 극동에서 자신의 나약한 위치를 확인했고, 싱가포르 기지까지 위협받게 되는 등 이후 8여 년 동안 그 상황이 지속되면서 유럽에서마저 나약해졌다.

 

프랑스도 독일과 미국의 패턴에 따르지 않았다. 프랑스는 상대적으로 덜 공업화되어 1930년대에도 농업비중이 여전히 큰 나라로, 세계경제에서 고립된 면이 있었다. 그래서 대공황 전파가 늦었으나 일단 대공황이 프랑스를 강타하자 회복이 매우 더뎠다.

 

금을 많이 보유한 프랑스는 아주 늦도록 금본위제에 머물렀다. 프랑스와 금블록에 남아 있는 회원국들은 늦게까지 금본위제를 고수하느라 불황을 완화하는 데는 속수무책이었다. 1920년대에 프랑화의 과소평가 상황이 프랑스에게는 좋았다. 하지만 이는 세계를 불안정하게 한 요인이 되었다.

 

1920년대 말 프랑화가 과소평가되고 스털링(Pound Sterling, 영국화폐)이 취약한 상황에서 프랑스는 금과 외환준비금을 크게 증가시키고 해외대부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정부의 채무불이행을 겪은 후 프랑스 사람들은 해외대부를 꺼려했기 때문에, 총 대부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나라들이 금본위제를 떠나면 과소평가된 프랑이 과대평가된다는 점을 프랑스는 인식하지 못한 것 같다. 1930년대에 프랑화 과대평가로 인한 고통은 이제 프랑스 혼자 짊어지게 되었다.

 

영국이 속수무책으로 금본위제를 이탈하고 파운드를 평가절하 한 1931년부터 프랑은 힘을 잃었다. 프랑스와 금블록 회원들이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외환통제와 평가절하 가운데 선택해야 했다. 이들은 후자를 선택했다. 평가절하의 혜택이 프랑스에서는 물가상승으로 크게 잠식되었다.

 

스웨덴은 중립국이어서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 전쟁 후 각 나라들이 금본위제에 돌아가려 할 때 스웨덴에서도 건전통화와 고정환율(固定換率制, fixed exchange rate)에 대한 집념이 커, 과거 평가대로 금본위제에 복귀했으며(1922) 그 때문에 치른 산업부문의 희생은 컸다. 1차 세계대전 후 다수당이 된 스웨덴의 사회민주당은 노동자, 농민을 위한 사회개혁 입법들을 통과시키며 유연하고 비혁명적인 사회주의를 독자적으로 개발했다. 케인즈식 적자재정지출을 실제로 시행(19331935)한 나라가 스웨덴이다. 그러나 규모가 작아 효과가 크지는 않았다. 실업이 감소한 것은 금본위제에서 일찍 이탈하여(1931) 그 후 시행한 팽창적 통화정책 덕분이었다.

 

대공황 이전에 등장한 이탈리아 파시스트정권 역시 1차 세계대전 이후 서방세계 정치 불안의 표현이자, 대공황기에 이르러서는 극단의 정치적 실험사례를 제공한다. 무솔리니는 사회당과의 경쟁에서 패한 후, 그들을 격렬히 공격하는 발언으로 사회당을 두려워하는 층의 지지를 확보했다.

 

무솔리니의 권력 장악 의도는 처음에는 불분명했으나, 자유당을 싫어한 왕이 무솔리니에게 새 내각 구성을 요청했다. 무솔리니 역시 합법적으로’, 혹은 구체제의 묵인하에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그는 의회주의, 소련식 혁명 등을 거절하고 영토팽창, 노동자, 농민을 위한 혜택, 토지개혁 등을 공언했다. 이후 독재를 강화하면서 노조를 통제하고 토지개혁은 하지 않았다. 대대적인 정치숙청보다는 구보수층과 타협했다.

 

세계무역이 스털링지역, 나치무역지역, 금블록 등으로 파편화하면서 국제무역이 급감하는 가운데, 이태리는 금블록 회원국이었으면서도 무역패턴과 경제회복과정은 독일을 닮아 갔다. 국가지상주의를 외친 무솔리니는 강력한 리라화가 국가적 긍지를 준다고 생각하여 매우 큰 폭으로 평가절상을 단행한다.

 

고평가된 통화를 벌충하기 위해 임금과 봉급을 동결하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실질임금이 높아졌던 것이다. 따라서 금 유출을 막기 위해 외환통제를 실시하고 청산협정도 도입했다. 리라화는 마르크화처럼 외환통제, 관세, 할당제, 청산 등의 방어기제를 쓰면서 형식적으로만 금블럭Golden Block)에 머물렀다.

 

식량자급을 목표로 증산을 위해 농산물가격을 높게 유지했다. 회복은 무솔리니의 아비시니아 침공결정(1935)과 함께 시작되었다. 군비에 대한 적자재정 지출로 총고용, 제조업부문 노동시간 모두 급증했다.

 

일본도 1차 세계대전 기간에 금본위제를 중단했다가 전 과정 평가(life-cycle assessment)로 금본위제에 복귀했다. 이런 정책방향은 1920년대에 디플레이션 지속으로 귀결되었다. 이 정책기조는 1923년의 관동대지진과 1927년 대만은행 발 경제위기 때문에 중단되었다. 그랬다가 미국과 유럽에서 대공황이 시작된 후인 19301월에 드디어 일본도 금본위제로 복귀했다. 기막히게 가장 나쁜 시기를 골라잡은 것이다.

 

193112월에 일본은 다시 신속하게 금본위제를 포기하고 엔화를 큰 폭으로 평가절하 했다. 이러한 재빠른 정책전환 덕분에 일본은 아예 금본위제에 복귀하지 않은 스페인과 마찬가지로 최악의 불황은 피할 수 있었다. 일본의 공업생산은 서방 세계의 그 어느 주요 나라보다 더욱 급속히 성장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신속하게 금본위에서 이탈한 결과였다. 또 한편으로 회복이 신속하게 이루어진 것은 공업을 지지하기 위해 적자재정 방식으로 팽창적인 재정정책을 쓴 덕분이다. 그것은 케인즈식 방식이었다기보다는 파행적 군비지출이었다. 군국주의 군대의 지속적인 자원수요증가가 수요팽창의 자극제가 된 것이다.

 

원래는 1932년 오타와에서 열린 영국 제국경제회의에서 처음 사용된 용어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관계가 깊은 여러 국가가 결집하여 그들끼리의 경제교류를 촉진하는 반면, 그 외 국가들에 대해서는 차별대우를 취함으로써 폐쇄적이고도 유리한 경제관계를 맺는 경제나 지역 범위를 뜻한다. , 본국과 그 속령 사이의 특수한 관계를 의미하며 영국블록, () 미국블록, 프랑스블록 등으로 불려졌다.

 

국제경제 무대에 경제 블록화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30년대의 대공황 때부터이다. 19291024일 뉴욕증시의 대폭락에서 발단된 불황으로 전 세계의 소비는 크게 위축됐다. 이에 따라 각국의 생산은 급속히 감소하고 실업도 급증했다. 이처럼 내수기반이 붕괴되자 미국이나 유럽의 기업들은 수입품 규제에 눈을 돌렸다.

 

각국 업계와 의회는 수입제한을 위해 높은 관세를 매기도록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그 첫 조치로 미국에서는 스무트와 홀리 의원이 주도해 스무트-홀리 관세법을 제정, 관세율을 대폭 인상했다. 미국의 이와 같은 조치는 유럽 국가들을 자극, 영국과 프랑스 등이 경쟁적으로 수입품에 대해 높은 관세 장벽을 쌓기 시작했다. 이것이 경제블록화라는 용어의 탄생배경이다.

 

당시 미국과 유럽기업들은 경제블록화에 따라 일시적으로나마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각국의 경쟁적인 관세인상은 세계무역을 위축시켜 결국은 모두에게 불행한 결과를 초래했다. 실제로 세계 75개 주요국가의 총수입규모는 대공황이 발생하기 전인 192912998백만 달러에서 대공황이 절정에 달한 19333월에는 992백만 달러로 축소됐다.

 

때문에 경제학자 중에는 미국에서 발생한 불황이 세계적 대공황으로 발전한 원인이 경제블록화에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이에 비해 90년대에 나타난 경제블록화는 대공황기의 블록화와 상당히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우선 대공황 때의 블록화가 개별 국가차원의 현상이었던데 비해 90년대의 블록화는 지역협정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또 대공황기의 블록화와 달리 90년대의 블록화는 역외국가에 대한 차별적 폐쇄적 성격이 한결 덜하다. 오히려 역외 국가와의 무역협상 창구가 단일화가 됨으로써 국제무역이나 투자활성화에 기여한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측면에도 불구하고 한국처럼 아무런 경제블록에도 속하지 못한 나라의 입장에서는 블록화 현상이 확산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1933년부터, 늦어도 1936년부터 유럽 국가들의 경제가 회복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대문 바깥에는 바이마르 민주주의와 경제가 붕괴된 후 정권을 잡은 히틀러의 나치(Nazi Germany)가 포진해 있었다. 대공황 기간 동안 강대국들이 수입을 억제하고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교역장벽은 높아만 갔다. 1930년 미국의 스무트홀리 관세(Smoot-HawleyTariff)1932년 영국의 일반관세를 비롯하여 여러 나라들이 보복관세와 비관세 장벽을 경쟁적으로 도입했다.

 

, 당시 세계경제는 스털링 지역, 금블록, ‘중부유럽을 구상하는 나치 무역지역, 먼로주의를 표방하는 미국(먼로주의는 불간섭주의라기보다는 남미는 미국의 영역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1904년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18581919) 대통령의 확대해석으로 구체화되었다.), 일본의 대동아 공영권 등으로 분열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아비시니아 침공(1936)을 연합국이 수수방관하는 것을 보면서 히틀러가 용기를 내는 순간, 경제장벽의 불길이 군사장벽 쪽으로 옮겨 붙었다. 결국 세계경제가 정상적인 경기회복을 마무리할 기회를 놓친 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야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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