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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 이야기

샤를 드골(Charles André Joseph Marie de Gaulle, 1890년∼1970년)

작성자管韻|작성시간20.09.28|조회수572 목록 댓글 0

샤를 드골(Charles André Joseph Marie de Gaulle, 1890년∼1970년)

 

 

 

 

 

 

 

프랑스의 군인, 정치가, 문필가.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로서 대독 저항 운동을 지휘했으며, 전후 프랑스 총리와 대통령을 역임했다.

 

드골은 프랑스 북부 공업지대의 중심도시인 릴의 가톨릭계 고등학교 교사 앙리 드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드골의 출생지인 릴은 벨기에와 프랑스의 접경 도시로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벨기에-네덜란드의 개신교 문화의 세가 커 다소 금욕적이고 노동 중시적인 도시였다. 이 탓에 드골은 다수 프랑스인들과의 문화적 거리감이 있었지만, 1870년 보불전쟁의 패배의 굴욕을 되갚기 위해 군인의 길을 선택하는 등 강경 프랑스 민족주의자로 성장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드골은 1909년 생시르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자부심이 강한 성격과 큰 키 때문에 동기들에게 ‘꺽다리 황제’, ‘아스파라거스’ 등으로 불리며 놀림 받았다. 이런 동기들 중에서 가장 친했던 이들이 훗날 자유 프랑스의 주요 지휘관이 되는 앙투안 베투아르(Antoine Béthouart)와 알퐁스 쥐앵(Alphonse Juin)이다.

 

1912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보병 소위로 임관한 드골은 훗날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으로 부상하는 필리프 페탱 보병 대령의 지휘하의 아라스 제33보병연대에 배치된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 때 대위로 베르됭 전투에 참가했으나, 부상을 입고 32개월 동안 독일군의 포로로 잡혀 있었다. 이때 5번의 탈출을 시도했으나, 196cm의 장신 탓에 변장할 옷을 구할 수 없는 등 잡다한 문제로 모두 실패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포로에 대한 대우는 신사적이어서, 잦은 탈출 시도에도 불구하고 독방형으로 끝났다.

 

또한 이때 제정 러시아 육군 장교로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힌 미하일 투하쳅스키와 친구가 되었다. 또 다른 인물로는 조르주 카트루(Georges Catroux)가 있는데, 당시 육군 중령이던 카트루는 드골의 군사적 식견과 사상에 감명을 받았고, 훗날 자유 프랑스에 가담해 드골보다 상급자임에도 드골을 충실히 따랐다.

 

종전 직후 육군 원수가 된 페탱의 부관으로 복무했고, 후에는 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의 교관을 맡았다. 그러나 자부심이 강하다 못해 오만하다고도 평가받는 성격 탓에 근무고과가 나빠 10년 이상을 대위에 머물러 퇴역 위기에 몰렸었으나, 페탱의 천거로 소령으로 진급하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페탱과 드골의 관계는 우호적이었으나, 1938년 드골이 페탱의 원고를 무단 수정해 자신의 이름으로 저서를 발간한 일로 관계는 단절된다.

 

그럼에도 미운 정은 남아있는지 훗날 페탱이 나치의 괴뢰정부 비시 정부 수립의 주동자로서 재판을 받을 때 페탱에게 “한때 저의 상관이자 모범이었던 각하. 그런 각하는 어디로 사라지셨습니까?”라며 한탄하고, 구명운동을 벌여 사형이 아닌 무기징역으로 낮춰 페탱의 목숨을 구했다.

 

여하튼 이런 드골의 행동에 페탱 원수를 숭상하던 당시 프랑스 육군의 상층부에 미움을 사 대령 진급이 2번이나 누락되거나, 드골이 맡은 기갑부대인 507 부대를 당시 메츠 군관구 사령관인 앙리 지로 훈련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뛰어난 성적에도 불구하고 부대를 해체시켜 버리는 등 전방위적인 견제를 받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드골은 전차를 집단 운용하는 기갑사단 4개, 기계화 보병으로 구성된 정찰여단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는 포병과 근접항공지원의 원활화를 위해 통신/보급 능력을 갖춘 독자적 활동이 가능한 최대 10만 명 규모의 기동군을 최고사령부 직할 전략예비대로 활용해야 한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그러나 마지노선을 맹신하던 군 보수파들은 물론 기동전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다시피 한 군 수뇌부에 의해 무시된다. 결국 기갑사단은 드골과 소수의 소장파 장교들의 발악에 가까운 노력으로 프랑스 침공 직전 간신히 창설된다.

 

1940년 5월 프랑스 침공이 시작되자 약식으로 준장으로 진급한 드골은 편성시작 단계의 제4기갑사단을 지휘해 분투했다. 대표적 활약상으로는 다음의 사례가 있다. 드골의 제4기갑사단은 종심 깊숙이 진격 하느라 측방이 위험해진 하인츠 구데리안 장군의 제19기갑군단의 후방으로 기동했고, 구데리안의 사령부에서 2km 앞까지 파고 드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를 알아챈 19군단 군수참모 요한 폰 킬만스에크 육군대위의 대처로 드골의 공세는 좌절된다. 훗날 독일 연방군의 육군 대장겸 NATO 중부유럽군 사령관이 된 킬만스에크 장군은 당시 드골의 공세를 “시간적, 공간적으로 완벽한 역습.”이라 극찬했다.

 

그러나 이런 분투에도 불구하고 1940년 6월 프랑스 정부는 나치 독일에게 항복을 선언했다. 이에 드골은 불복하여 몇몇 동지들과 함께 영국으로 망명, 이후 에밀 뮈즐리에 제독 등이 합류하여 망명 정부 자유 프랑스를 조직했다. 하지만 1940년 프랑스군 주력은 페탱이 이끄는 비시 정부에게 장악되었었고, 식민지 역시 다수가 비시 프랑스를 지지해 드골의 자유 프랑스는 실질적 영향력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오로지 윈스턴 처칠 총리가 이끄는 영국 정부만이 자유 프랑스를 지원했을 뿐이다. 게다가 1941년 처칠의 지원으로 드골이 주도한 다카르 상륙작전의 실패와 전황 악화로 인해 드골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졌고, 여기에 드골 특유의 오만한 성격 탓에 같은 연합국 지도자들인 처칠과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전쟁 내내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그나마 처칠과는 상호 존중 관계였지만, 루스벨트의 경우에는 1945년까지 드골을 프랑스 지도자로 인정하길 거부하다가 마지못해 드골을 워싱턴 D.C.에 초청하며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1942년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루스벨트는 프랑스군의 영웅이자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의 민간, 군사 분야 총사령관인 앙리 지로 장군을 드골과 동석시켜 지로를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로 옹립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런 미국 측의 속보이는 드골 견제로 인한 반대 감정과 지로의 정치능력 부재로 인해 지로는 드골에게 밀려났다. 거기다 프랑스령 북서아프리카의 최고 선임자였던 해군 원수 프랑수아 다를랑 제독이 암살되어 더 이상 자유 프랑스에 드골을 대체할 만한 인물은 없었고, 1943년 이후 북아프리카의 식민지들이 차례로 드골의 자유 프랑스 지지로 선회하면서 드골의 입지는 확고해져갔다. 그리고 1943년 6월 드골은 프랑스령 알제리의 수도 알제에서 프랑스 국가자유위원회(CFLN)를 출범시켜 자유 프랑스를 연합국의 일원으로 공식적으로 편입시켰다.

 

“파리는 상처 받았습니다. 파리는 파괴되었습니다. 파리는 고문받았습니다. 그러나 파리는 해방되었습니다.” -파리 해방 후의 연설에서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하고 파리 해방이 목전으로 다가오자 전후 프랑스 주도권을 위해 미군, 비 드골계 우익 레지스탕스, 공산당과 파리 해방을 놓고 경쟁을 벌였다. 결국 드골의 자유 프랑스 육군 2개 사단이 파리 내의 레지스탕스와 시민들의 협조를 받아 파리를 해방시키고, 드골과 자유 프랑스군이 수십만 파리 시민의 열렬한 환호 속에 개선 행진을 하며 해방자 드골의 신화가 만들어진다. 당시 파리 해방에 대한 표현 중 하나가 이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제 드골은 프랑스 전체를 손에 쥐었다.” 이때부터 비로소 프랑스의 통치자로 다른 연합국에게 인정받고 평생 그의 정치적 자산이 된다. 이 과정을 그린 영화가 1966년 르네 클레망이 감독한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미국은 원래 자유 프랑스를 제대로 된 강대국으로 보지 않아서 얄타 회담을 비롯한 전후 세계질서 재편을 위한 중요 회담에서 결국 프랑스를 제외했다. 그러나 이 사건 덕분에 마지막에는 프랑스 정국을 장악한 드골을 인정하고 프랑스를 연합국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니 프랑스 전체를 위해서도 자유 프랑스가 파리를 선점한 것은 득이 된 셈이다.

 

1945년 11월 헌법제정의회에 의해 내각 수반으로 임명된 드골은 대(對)독일 저항운동의 주역이었던 프랑스 공산당(PCF)을 내각에서 제외시키고 우파만의 정부를 세웠으나, 국민 다수의 지지를 얻는 좌파와 중도파를 권력에서 배제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으며 1946년 6월 총선에서 드골의 정당인 대중공화운동이 원내 제1당에 등극하긴 했지만 개헌저지선조차 넘기지 못한 상태였고 결국 다시 치러진 1946년 11월 총선에서 공산당이 제1당으로 올라서면서 그해 말 정계에서 은퇴를 선언한다.

 

1950년대 중반까지 전쟁 회고록 집필 등으로 소일하며 칩거하던 드골은 1956년 수에즈 전쟁에서의 패퇴. 1958년 알제리 전쟁과 이로 인한 군부 쿠데타위협으로 사회당 정권이 붕괴될 위기에 몰리자 “프랑스의 알제리”를 주장하며 우파와 중도파의 압도적 지지속에 제4공화정을 무너뜨리고 제5공화정을 수립, 프랑스의 대통령이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영국이 전후 대부분의 식민지를 독립시킨 것과는 달리 프랑스는 좌ㆍ우파 가릴 것 없이 식민지 유지에 강한 집착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남아에선 막대한 군사비를 쓰고도 1954년 베트남 디엔비엔푸 전투로 개털리면서 강제로 쫓겨났다. 아프리카 전체의 1/4인 광대한 프랑스 식민지 전역에서 독립요구가 분출했고, 특히 알제리는 알제리 민족 해방 전선의 독립전쟁, 일명 알제리 전쟁으로 엉망진창이었다.

 

결국 현실과 타협해서 알제리 독립을 시사하는 중도파 내각에 반발해서 극우세력과 군부는 공공연히 쿠데타 위협을 가하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알제리 주둔군이 파리 공항에 공수부대를 투입하고 기갑부대를 동원 의회를 점령한다는 식의 구체적인 쿠데타 시나리오가 공공연히 거론될 정도였다. 2차 세계대전의 피해와 베트남, 알제리 독립전쟁에 따른 막대한 군사비로 경제는 엉망진창이었고, 외환보유고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결국 정부의 알제리 독립 세력과의 협상 시도에 분노한 프랑스 극우파들이 총궐기하여 알제리에서 대대적인 폭동을 일으키고 공수사단 등을 동원하여 코르시카 섬을 점령하고 남프랑스를 통해 파리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드골이 자신들의 편이라 생각하여 드골에게 권좌에 앉을 것을 촉구했다.

 

궁지에 몰린 제4공화국은 사실상 와해되었고 중도우파 플림맹 정부를 수립하여 드골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드골은 거부하고 오히려 4공화국과의 협력 없이 독자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육군 정복을 입고 한 지상파 TV연설 한 번으로 정권을 무너뜨리고 의회 해산과 헌법 개정, 그리고 임시정부 수반 자리를 쟁취했다. 이에 프랑스의 좌파들은 총궐기하여 드골은 박물관에나 들어가라고 반(反)드골 시위를 벌였지만 만약 드골의 집권이 저지된다면 프랑스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할 것이란 예상을 한 프랑스 사회당이나 급진공화당을 비롯한 여타 제도권 좌파와 중도세력들은 동요하였다. 이들은 결국 ‘드골의 집권은 작은 불행이나 공산당의 집권은 큰 불행’이란 결론을 내리고 드골의 정권 장악을 용인하였다.

 

그리고 권력을 쟁취한 드골은 우파와 중도파의 기대를 무너뜨리고 알제리 독립을 승인, 긴 전쟁의 끝을 맺는다. 이외에도 집권 후 현실을 직시하고 식민지 독립을 승인했으며 1960년에 모든 아프리카 식민지가 독립하고 대신 프랑스연합이라는 국제기구를 결성했다. 이로 인해 격노한 군부와 정면으로 대치하였고, 1962년 8월 공군 중령 장마리 바스티앵티리(Jean-Marie Bastien-Thiry)의 드골 암살 시도 등 군부는 쿠데타와 드골 살해 음모를 벌였지만 샤를 드골은 이를 헤쳐나가며 정권을 강고히 한다. 프레더릭 포사이드의 소설과 영화로 유명한 ❮자칼의 날(The Day of the Jackal)❯이 바로 알제리 독립 직후 군내 극우파 결사인 OAS(비밀군사조직. Organisation de l’armée secrète)와 드골 정권 간의 암투를 다룬 것이다.

 

1963년 단체 내 자국 대표단의 발언권 보호를 위하여 영국의 유럽 경제 공동체(EEC)가맹에 두 차례 거부권을 발동했으며, 독자적인 핵무장, 사실상 미국의 지휘 아래에 있는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에서의 탈퇴 등 ‘위대한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민족주의의 부흥을 위한 주체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를 크게 개선하도록 노력했다. 이 유럽 민족주의의 부흥을 위해서 프랑스 혼자서는 한계가 있음을 드골도 알고 있었고, 프랑스와 협력할 만한 국가가 필요했다. 하지만 양차 대전의 동맹국이던 영국은 이 부분에선 명백히 프랑스와 거리를 두었고, 남은 국가는 서독뿐이었다. 마침 서독 또한 프랑스와 협력해서 기존의 프로이센식 독자 노선이 아닌 서유럽 세계로의 완전한 편입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양국이 협력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63년에는 서독의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와 회담하여 프랑스와 독일의 오랜 갈등관계를 종식하고 경제와 외교분야에서 협력하는 ‘독일ㆍ프랑스 화해협력조약’을 맺었고 이는 뒷날 유럽연합(EU)로 발전되는 유럽 경제 공동체(EEC)의 창설로 연결되었다.

 

1965년에는 대선이 치뤄졌는데 당시 드골의 인기가 워낙 대단했기 때문에 좌파진영에선 반포기 상태였지만 이때 상대후보가 좌파의 단일화를 주장하며 2차 결선투표까지 진출했다. 비록 드골의 연임을 막지는 못했지만 나름 45% 정도로 득표하며 나름 의미있는 성적을 거두었는데, 그 상대가 바로 훗날 프랑스 사회당이 배출한 첫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이다.

 

1967년에는 당시 분리독립 문제로 내부 갈등이 심각하던 캐나다 퀘벡을 방문하여 공식 연설 중에 외교적 관례를 무시하고 “자유 퀘백 만세”를 외치면서 분리독립에 반대하는 캐나다인들을 격분시키기도 했다. 덕분에 영국 및 캐나다 정부는 스팀을 좀 받았다. 아이러니한 건 2차 세계대전 도중 대다수의 퀘벡인은 드골이 아니라 비시 정부를 지원했다는 것이다.

 

드골의 통치는 상당히 권위주의적이었으나, 유럽 국가답게 신 대통령제가 행해진 다른 국가들보다는 유연한 면도 많았다. 이는 언론 통제 정책만 봐도 알 수 있다. 신문, 잡지 등 활자 언론에 꽤 관대했으나 방송은 친정부 논조로 철저하게 통제했다. 그래서 68운동 와중에는 공영방송국(당시 명칭은 ORTF) 직원들이 편집의 독립성을 요구하며 대대적으로 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신문과 다르게 방송은 당연히 정부의 목소리를 전달해야 한다는 당시 정부 관리들의 구태의연한 인식과 함께 신문에 불신감을 가진 샤를 드골이 방송에 적극적으로 통제를 가했기 때문이다.

 

드골 시절에도 제5공화정의 대통령 권력집중은 유럽 현대 정치사에서 유례가 없는 것이었고 후일 한국의 10월 유신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뢰벤슈타인은 이러한 드골의 통치를 38년간 계엄령을 유지한 장제스 치하의 대만, 한국의 이승만 정부, 박정희 정부처럼 대통령이 의회와 법원을 압도하는 신 대통령제로 분류하였다. 드골은 현재의 프랑스 대통령의 권한과 달리 지자체의 권한을 제한하는 여러 차례의 국민투표를 통해서 사실상 독재적 권한을 행사했다. 드골의 정치방식은 강력한 경찰력과 정보기관에 의존하는 비민주적 독재는 아니지만 개인적인 인기에 의존하여 정국이 난관에 부딪칠 때마다 국민투표를 통해 강력한 권력을 확인받는다는 점에서 정치학적으로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에 해당한다.

 

당시 브레튼우즈 체제의 해체를 시도하던 미국에 반대하면서 금본위제의 강화를 주장한 드골의 대외 금융정책은 미국과 주변국의 강력한 견제를 받았다. 결국 1971년 당시 미국 대통령인 리처드 닉슨이 달러의 금태환 정지를 선언하면서 1944년 이후 지속된 브레튼 우즈 체제가 붕괴되었다. 이것은 전후 케인스주의의 종말과 통화주의 체제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결국 1967년 총선에서 드골계 우파는 부진을 거두며 겨우 과반수를 확보하면서 싸늘해진 민심을 확인하였고 이어 1968년 프랑스의 경제성장률이 집권 이후 최저인 4.4%로 하락하면서 경기가 악화되었고, 드골 체제의 경직된 권위주의에 반발하는 전후세대와 이에 합세한 노동자들이 주도한 68운동(이른바 ‘5월 위기’)이 발생한다. 이 당시 드골 정권이 직면했던 위기 자체는 ‘정권이 붕괴 직전이었다.’라는 평가까지 받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전후세대 학생과 이에 합세한 노동자들의 시위는 대략 5월 초부터 시작되어 점차 격화되면서 5월 22일 무렵부터는 전국 각지에서 경찰과 전투라고 불릴 정도의 대규모 충돌이 산발적으로 일어났고, 그 결과 25일 무렵에 이르면 (영국의 언론인이자 역사가인 로널드 프레이저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부는 몇몇 주요 도시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

 

프랑스 남부의 주요 도시 리옹의 경우를 보더라도, 22일∼25일 사이 격화된 시위대가 사실상 도시 전체를 장악한 상태에서 지방 경찰 병력 전부가 정부의 마지막 거점인 도청을 방어하기 위해 집결했을 정도였으며, 수도 파리에서도 시위대가 프랑스 경찰의 시위 진압 전문 기동대인 CRS와 충돌하면서 도시 곳곳을 점거할 정도였다. 결국 25일∼27일 사이, 정부는 당시 총리였던 조르주 퐁피두를 내세워 시위대와의 협상을 시도하지만 이 역시 결렬되었고, 시위는 더욱 격화되면서 당시 내각회의에서는 시위대가 대통령궁이나 의회를 점거하는 상황까지 우려하게 되었을 정도. 그리고 29일, 반 드골 구호를 외치는 시위대가 대통령궁 앞을 행진했을 때... 드골은 대통령궁을 비운 상태였다. 시위대는 이 상황을 드골이 도망쳤다! 고 받아들이고 승리감에 젖었다고 하나... 드골은 도망친 게 아니고, 당시 서독에 주둔해 있던 프랑스 육군 정예부대의 지지를 확인하기 위해 독일에 간 것이었다. 시위대의 정치적 오판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전시 군사 지도자 출신으로써 군대의 위력과 위험성을 잘 알 수밖에 없는 드골 같은 인물이 심각한 위기 상황에서 군대에 대한 통제력 확보를 우선시해야 한다고 판단할 만큼 심각한 위기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정치적 위기를 맞고 총리직을 야당에게 내줄 위기에 처하지만 이 직후(6월 셋째주)에 치뤄진 총선에서는 예상과는 전혀 달리 드골파가 압승, 그것도 개헌선(394/485)을 넘어가는 초압승을 거두면서(득표율은 58.1%) 국면이 전환되었다.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를 따져보면, 당시 드골 정권을 붕괴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68운동 세력의 주축은 학생들이었고, 당연히 이들은 투표권이 없었다.

 

그리고 운동의 격화로 정권 붕괴는 둘째치더라도 정부의 국가 장악력 자체가 위험한 상황이 되자(즉, 프랑스 대혁명 이후 계속 일어났던 몇 번의 혁명 혹은 파리 코뮌에 근접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보수파가 결집하였다. 즉, 기존의 드골 지지자뿐 아니라 운동의 급진성과 과격성에 위협을 느낀 보수파 및 중도파 전반, 그리고 일부 온건 진보세력까지 (68운동의 반대항인) 드골 지지로 집결한 것.

 

반면, 반 드골 노선의 운동세력에게는 선거에서 승리할만한 정치적 조직과 구심력이 없었다. 즉, 운동세력 자체는 거대했지만 이들을 대변할 정치조직이 없고, 이들을 대표할 후보자도 없었다. 이건 어떻게 해결할 방법도 없는 문제인 것이, ‘대의제 민주주의적 제도 자체가 일부 정치 기득권층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형태로 변질되었다고 여기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써 대중의 직접적 정치 참여를 요구하는 목소리’와 ‘기존의 경직된 정치 조직에 대한 반감으로 조직화되지 않은 대중의 정치적 참여를 요구하는 목소리’ 자체가 운동의 중요한 원동력이었던 것. 즉, 선거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고 여긴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온 것이니 당연히 선거를 위한 정치적 조직이 갖춰질 리 없고, 어디에 속한 사람이라도 좋고, 아무데도 속하지 않은 사람도 좋으니 누구든지 다 오라고 사람을 모았으니 모인 사람들 전체를 아우를 조직이 없는 것 역시 당연하다는 것.

 

결국, 이러한 정치적 상황 덕분에 드골 정권은 총선에서 압승,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드골을 반대하는 대중운동이 정권 전복 위협 직전까지 격화되었을 정도로 드골의 통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은 상황 자체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고, 그에 더해 5월 위기 자체가 드골의 리더십에 입힌 타격 역시 상당했다. 결국 드골은 1969년 4월‘지방행정과 상원의회 개편을 위한 국민투표’에서 47%대 53%로 부결되자 4월 28일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이후 콜롱베의 사저에 칩거하다가 회고록을 출판한 직후인 1970년 11월 9일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드골은 “내 장례식은 콜롱베에서 치르고, 가족과 마을 주민만이 참석하도록 해 달라. 정치인과 정부 관리는 오지 않았으면 한다. 내 묘비에는 단지 내 이름과 출생 연도와 사망 연도만 기록하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에 따라 드골의 묘비엔 그의 생애처럼 명료하게 “샤를 드골(1890∼1970)”만 새겨졌다. 이 묘지는 자신보다 앞서 죽은 둘째 딸이 묻힌 장소였으며, 7년 후에 타계한 아내 이본 여사도 같은 장소에 묻혔다.

 

많은 프랑스인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그를 ‘나치의 압제에서 프랑스를 해방시킨 영웅’이자 전후 프랑스의 재건을 주도한 인물로 높이 평가하며, 그가 프랑스 제5공화국을 설립시키는 과정에서 나치 세력을 철저히 배제했다는 점에서 존경을 받는다. 20세기 프랑스에서 가장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는 듯. 현재 프랑스 해군은 최신예 항공모함에 그의 이름을 붙여서 샤를 드골급 항공모함으로 명명하고 파리 샤를 드골 국제공항은 현재 프랑스 최대 규모의 공항이자 유럽의 대표 관문으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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