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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 이야기

02. 잉카 제국(Inca Empire)

작성자管韻|작성시간22.03.07|조회수681 목록 댓글 0

02. 잉카 제국(Inca Empire)

 

 

 

 

 

Cusco - Inca Dance

 

 

국교로 인티(Inti)라는 태양신을 중심으로 하는 다신교 체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인티는 흔히 어린 소년의 모습으로 묘사되었으며, 빛을 내뿜는 얼굴이 그려진 황금 원반이 그의 상징이었다. 수도인 쿠스코에 이 인티를 모시는 대신전이 있었으며 이 신전을 코리칸차라고 불렀다. 코리칸차는 잉카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신전으로, 순금으로 만든 모형 옥수수들로 가득찬 황금 옥수수밭이 있는 등 극도로 호화로운 신전이었다.창조신과 최고신이 동일하지 않았는데, 창조신은 '비라코차'라고 해서 따로 있었다. 비라코차는 잉카 신화에서 만물의 창조주로, 티티카카 호에서 인간을 창조하고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친 후 사라졌다고 한다. 잉카인들은 처음에 하얀 백인들을 보고 비라코차의 재림이 아닌가 여겨 이들을 극진히 대했으나, 이 환상은 백인들의 만행과 가혹함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깨졌다고. 참고로 비라코차는 창조주였음에도 불구하고 인티에 비하면 대접이 좋지 않았다. 인티는 새해부터 연말까지 기리는 행사가 넘쳐났던 반면, 비라코차에게 봉헌된 주요 행사는 한 개도 없었으며 사제와 신전들의 수도 많지 않았다.

 

그 외에도 폭풍과 날씨의 신인 일라파가 있었다. 인티와 동일시되기도 한 이 신은 주로 번개가 상징이었으며, 비를 관장하면서 농업의 신이기도 했다. 사제들은 일라파를 주로 돌팔매를 들고 있는 건장한 남성으로 묘사했는데, 일라파가 돌팔매를 던질 때마다 천둥과 번개가 친다고 믿었다. 또한 달의 여신인 마마퀼라가 있었다. 인티와 비슷하게 빛을 내뿜는 얼굴이 그려진 은빛 원반의 모습으로 묘사되었으며, 태양신 인티의 아내였으며 달력을 관장하는 여신이었다. 여신이었기 때문에 마마퀼라를 모시는 사제들은 모두 여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한 풍요와 대지의 여신인 파차마마 여신도 있었고, 주로 풍작을 바라는 농부들이 파차마마를 많이 섬겼다. 호수와 강의 여신인 마마코카 여신도 인기가 있었으며, 각종 별자리들에도 신격이 부여되어서 잉카인들의 섬김을 받았다. 또한 잉카 종교의 특성 중 애니미즘과 비슷한 교리로 '후아카'라는 존재들이 있었는데, 즉 사람과 동물, 식물과 무생물 등 만물에 신성한 영(靈)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잉카인들은 그 사물의 크기가 곧 후아카들의 힘을 결정한다고 믿었는데, 때문에 산 같은 거대한 것들의 후아카에게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잉카 제국의 황제들은 자신을 태양신 인티의 화신이자 대리자로 포장해서 왕권을 강화하는 데에 유용하게 써먹었다. 때문에 잉카는 신정정치 사회로 분류되기도 한다. 황제, 즉 사파 잉카들은 스스로를 살아있는 신이라고 대내외적으로 알렸고, 제국민들도 이를 자연스레 받아들이면서 당대 황제의 권력과 권위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반면, 그만큼 사파 잉카를 얽매는 풍습도 많았다.

 

가령 사파 잉카는 태양과 동일시되었으므로, 모든 물건은 그의 손이 닿는 순간 버려졌다. 태양이 하루에 한 번 지면 다시 새로운 태양이 뜬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사파 잉카가 하루 입은 옷은 하루가 지나고 나면 불태워졌으며, 사파 잉카가 신던 신발도 역시 하루가 지나면 불태워졌다. 사파 잉카가 한 번 동침한 여자도 마찬가지로 하루가 지나면 그걸로 끝났다. 물론 죽이거나 한 건 아니고, '태양의 처녀'라는 일종의 궁녀 신분으로 만들어 평생 사파 잉카를 위해 이런저런 잡일을 했다. 사파 잉카는 너무나도 신성했기에 두 다리로 스스로 걸어서는 안 되었으며, 어딜 가든 황금가마를 타고 움직여야 했다. 그리고 누구든 사파 잉카에게 직접 말을 거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차스키(Chasqiy)라고 불린 파발꾼들은 사파 잉카에게 보고할 때 먼저 '대리인'에게 보고했고, 그 대리인이 사파 잉카에게 다시 보고하면, 사파 잉카가 이에 대한 조치사항을 대리인에게 지시하고, 그 대리인이 다시 차스키들에게 전달하는 식으로 의사소통이 이루어졌다. 아무리 고관이라 하더라도 사파 잉카의 얼굴을 직접 보는 행위 또한 금지되어 있었다. 사파 잉카를 알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허락이 필요했고, 그마저도 얇은 베일에 가린 사파 잉카의 얼굴을 겨우 알현하는 방식이었다.

 

사파 잉카의 특전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사파 잉카는 너무나도 신성했기에 함부로 한 올의 머리카락도 흘리고 다녀서는 안되었다. 때문에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던 시녀들이 만일 황제가 흘린 머리카락이 있다면 다른 사람이 만지기 전에 빠르게 직접 주워먹었고, 그 외의 체모도 떨어진 것을 먹고는 했다. 또한 황제가 침을 뱉고 싶어한다면 주변의 시녀를 불러 손을 내미라고 한 다음 그 손 위에 침을 뱉었고, 시녀는 이 것 역시 그대로 먹었다. 어떻게 보면 괴이할 정도로의 대접이지만, 당시 사파 잉카를 태양신 그자체라고 여겼던 잉카인들은 이 걸 실제로 했다. 또한 황제의 여인이라고 할지라도 함부로 사파 잉카의 몸에 손을 대는 일은 절대적으로 금지되었고, 오직 황제가 원할 때만, 그리고 원하는 여인만이 옥체를 만질 수 있었다. 또한 사파 잉카를 위해서는 매번 엄청나게 호화로운 식사가 준비되었는데, 사파 잉카의 신성을 보존하기 위해서 그가 먹고 남긴 음식들 역시 모조리 다 태워버렸다. 왕이 먹고 남긴 수라상을 궁녀들에게 넘겨준 조선과는 완전 반대인 셈.

 

사파 잉카들의 대접은 죽은 후에도 끝나지 않았다. 죽은 사파 잉카들은 미라로 만들어 코리칸차 신전의 황금 옥좌에 안치했고, 각종 행사가 있으면 끌어내어 생전과 똑같이 대우하였다. 미라를 불러들이고 생전의 황제에게 하듯이 각종 의식을 시행하고 제물을 바쳤으며 옷을 입히고 치차 맥주를 마시게 하는 등 호사스러운 축제를 벌이곤 하였다. 때문에 죽은 황제들에게 공경하느라 들어가는 국가 예산이 장난이 아니었다고 한다. 참고로 아타우알파의 이복형인 우아스카르는 이것을 탐탁치 않게 여겨 미라 숭배를 중단시키려다 사제 계급의 미움을 샀고, 내전에서 동생 아타우알파에게 패배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잉카인들은 죽은 황제가 사후세계에서도 충분히 자신들에게 소통할 수 있다고 믿었고, 때문에 예언자를 앞에 두고 죽은 황제의 미라들에게 조언을 구하거나 판결을 요청하기도 했다. 물론 그 판결이 진짜 황제의 것인지 예언자의 것인지는 스스로의 판단에 맡긴다. 스페인 군인들은 이미 죽어버린 시체에 대해 경배하는 잉카인들의 풍습을 굉장히 야만스럽게 여겼고, 결국 스페인이 잉카를 정복한 이후에는 코리칸차의 미라들을 끌어내어 리마의 한 병원에 처박아버렸다. 이후 미라들은 약 80여 년간 그 곳에 보관되어 있었으며, 이후의 행방은 불분명하다. 가장 유력한 설은 미라들을 꺼림칙하게 여긴 스페인 총독이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못하게 태워 묻어버렸다는 것.

 

그 밖에 스페인의 콘키스타도르들이 수녀로 잘못 안 여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아클라(Aclla)라고 한다. 이들은 예쁘거나 핏줄이 좋거나 해서 뽑혔다. 죽을 때까지 처녀로 한 곳에 모여 살면서 고급 직물을 짜고, 술을 빚고, 이런 저런 일을 해야 했다. 이 중 일부는 사파 잉카가 후궁으로 삼거나 쿠라카(잉카 제국의 유력자)들에게 역시 첩으로 선물하기도 했다. 하렘과는 좀 다른 것이 아클라들이 사는 수녀원(?) 같은 것이 곳곳에 있었고 잉카라도 마음대로 이 여자들을 건드릴 수는 없었다. 아클라를 건드리는 보통 남자는 사형에 처했고, 그 가족까지 모두 죽였다. 한 때 이를 중동의 하렘과 같은 것으로 인식하고 잉카가 여성을 매우 억압적으로 대했다는 근거로 보는 시각도 있었으나 현재는 사실이 아니라는 게 정설이다. 오히려 최근의 발굴 결과에 따르면 잉카 제국의 전신들 중 하나인 모치카 문명에서는 여왕들도 많았다.

 

바퀴를 쓰지 않았기에 수레가 없었고, 문명의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철도 쓰지 않아서 상대적으로 유라시아에 비해서 뒤떨어진 문명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잉카 제국은 이미 정밀한 태양력을 사용하는 고도의 천문학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땅심이 쉽게 빠지지 않는 계단식 밭이나 도시를 흐른 수도 시설, 면도칼 하나도 들어가기 힘들 만큼 정교하게 짜맞춘 바위벽 같은 것을 보면 상당히 발달한 기술력을 지닌 문명이었다. 물이 부족한 안데스의 기후 탓에 농사를 짓기 위해서 강에서 밭까지 물을 끌어오는 수로 시설과 관개 기술도 발전했고, 1년을 12달로 분류하고 태양의 주기에 맞추어서 하루를 더하거나 빼는 등 상대적으로 정교한 산술 계산도 가능했다.

 

잉카 제국 곳곳으로 곧게 뻗은 잉카의 도로 역시 유명하다. 마치 로마 제국의 도로들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차도 등으로 이용되는 로마의 도로처럼 잉카의 도로 역시 상당수가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물론 그 모두가 차도로 쓰인다는 것은 아니고 보통 보도로 쓰인다. 로마의 도로는 말, 혹은 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넓다랗게 설계되었지만, 교통수단으로서의 가축이 아메리카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잉카의 도로들은 산을 오르는 데 가장 효율적인 경사를 따라서 놓였고, 해발 4,000m이상의 고산지대에서 차를 끌고 다닐 일은 많지 않기에 상관없기는 하다. 잉카의 다리 제작 기술 또한 대단하였는데 식물섬유를 꼬아서 깊은 낭떠러지나 높은 계곡 사이에 구름다리를 만들수 있었다. 이들중 상당수가 19세기까지도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오늘날에도 험준한곳에 자리잡은 시골동네에서는 꽤 자주 보인다. 해마다 다리를 보수해야만 하는 문제가 있어 현대의 다리와 견주긴 뭣하지만 처음 이 다리를 본 스페인의 정복자들에겐 놀라운 건축 기술로 보였을 것이다. 천길만길 낭떠러지 사이에 어떻게 저런 걸 만들었나 싶었을지도. 무엇보다도 이 다리는 방어에도 효과적이었는데, 외부세력이 침략해올 경우 다리를 끊어버리게되면 상대측 입장에서는 이 마을로 진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리를 새로 구축하려 한다 하더라도 마을에서 견제가 가능할테고. 참고로 이 다리들은 썩어서 붕괴할 위험을 막기 위해서 매년 새롭게 만들어서 다시 놓았다.

 

참고로 잉카의 은 채취 기술은 스페인이 이 지역을 정복한 뒤로도 한참 동안 계속 쓰였고 특히 풍부한 은광이 있지만 산소가 희박한 고산 지대 포토시에서 각광받았다. 당시의 스페인식 기술로는 산소가 부족한 이 지역에서 고열을 일으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572년 획기적인 수은 아말감법이 개발되면서부터는 잉카의 재래식 은 채취법은 씨가 말라버린다. 참고로 회취법이라고도 하는 이 방법은 사실 잉카인들은 진작에 알고있던 기술이다. 이 방식이 은을 제련하는 방법으로는 전통 방식보다 더 효율적인 것도 알고 있었지만, 막상 잉카인들이 이 방법을 안 쓴 이유는 수은 중독을 우려해서였다. 그래서 이 기술이 대세가 된 뒤로는 잉카인이나 스페인인이나 모두 평등하게 수은 중독으로 죽어갔다.

 

문자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중앙아메리카 대륙과 다르게 안데스 일대에서는 발전된 형태의 문자가 쓰이지 않았고, 그래서 기록물들도 남은것이 없기 때문에 잉카 이전의 역사는 구전된 서사시나 설화, 신화나 고고학에 의존하는 비율이 높다. 본격적으로 잉카 역사에 대한 기록이 남기 시작한 시기는 스페인 정복자들이 들어온 시기 이후인데, 이때 스페인인들이 자신들의 식민화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잉카 고유의 역사를 깎아내리며 잉카 고대사 연구에 차질이 있기도 하다. 다만 '키푸(Quipu)'라 하여 매듭을 묶는 방식으로 숫자를 나타내는 방법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형형색색의 끈들을 사용했으며, 매듭을 묶은 방법과 매듭 사이의 간격 등으로 숫자를 표시했다. 4개의 길게 묶은 매듭은 40을 의미하고, 짧게 묶은 매듭 3개는 3을 의미하는 식으로.... 키푸카마욕이란 관리들이 키푸를 다루었는데 이 방법은 스페인의 정복 이후에도 조세를 위해서 한동안 쓰였고 키푸카마욕들은 지역 정보를 지닌 사람으로서 어느 정도 지위를 누린 듯하다. 돈 잘 벌어 무역선을 산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키푸카마욕들이 스페인인들이 키푸를 읽지 못하는 것을 이용해서 세금을 횡령하자, 스페인도 이를 눈치채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아라비아 숫자로 대체해버리고 키푸를 공식적으로 폐지했다. 때문에 당시 잉카 시대의 키푸 해독법은 현재 어느 정도 실전되어버린 상태다.

 

잉카는 멕시코와 북중미 지역의 아즈텍 제국이나 마야 문명처럼 대규모까진 아니었지만 어린아이를 제물로 바침으로써 국가에 닥치는 재난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으며, 매년 정기적으로 피지배민족들에게 받는 공물의 리스트에 지배층의 어린아이를 포함시켰다. 잉카는 항상 외부 부족들의 어린아이를 희생시켰다. 이것은 잉카의 지배력과 권위를 각인시키기 위한 방침이었고, 덕분에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아이를 바쳐야만 했던 지방 영주들에게 악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잉카 제국은 카파코차(capacocha)라고 해서 태양신 인티와 비라코차를 위해 희생시키는 아이들을 1년간 먹이고 재운 뒤 신에게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 산 위에서 몽둥이로 때려 죽이거나 얼어죽게 방치하는 방법이 대표적이었지만 동굴에 가둬 죽이는 방식도 사용하였다. 흔히 제물들을 현인신으로 여겨 잘 대우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것은 아즈텍 제국과 헷갈린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잉카가 어린아이들을 학대한 것은 아니었다. 발견된 미라의 내장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반년 이상은 감자를 먹으며 평민들처럼 평범한 생활을 하다가, 죽기 직전에 귀족들이나 먹는 라마 고기 등을 먹였다고 한다. 아마도 잉카가 산제물들을 잘 대접했다는 이야기는 여기서 와전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이들은 1년간 신전에서 집단 생활을 한 다음 각자 출신지로 돌아가 산 정상에서 교살당하거나 둔기로 맞아 사망하거나, 혹은 그냥 얼어 죽게 방치되었다. 또는 동굴에다 집어넣고 문을 폐쇄해 아사 시키는 방법도 썼다. 한 장소에서 2~3구의 미라가 동시에 발견되며, 이런 방식으로 대략 연간 수십명 정도의 어린이를 희생시켰다고 한다. 물론 국가적 재난이나 새 황제의 즉위식, 장례식 같은 특별한 시기에는 수백 단위로 어린이들을 바치곤 하였다.

 

축제 때 황제들의 미라를 꺼내 어린이들을 참수하고 그 피로 미라의 얼굴에 표식을 그리거나, 우상의 주변을 걷게 한 다음 죽이는 일도 있었다.

 

순장과 인주(人柱) 풍습이 매우 극심하여 주변 민족들의 반발을 샀다. 신전을 새로 지을 때마다 대량으로 어린이를 죽여 파묻었다. 쿠스코에 위치한 코리칸차 태양신전의 건공식에서 잘 차려입은 어린이들이 교살되어 신전 바닥에 묻혔다. 이 기록은 베르나르데 코보, 베탄소스, 몰리나, 감보아 등의 연대기 작가들의 기록에 공통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교차 검증도 가능하다.

 

파차쿠티 황제의 장례식에는 약 1천명의 어린이를 둔기로 때려 죽이고 시체를 파묻었다. 고대 중국의 왕조들과 마찬가지로 사후 세계에서 황제에게 봉사하라는 의도로 그렇게 하였다고 한다. 황제의 명으로 잉카 제국의 전역에서 500쌍의 남녀 어린이를 뽑은 다음 제물로 희생시켰다. 이 기록은 스페인 역사가인 베탄소스의 잉카 제국 연대기에 등장하는데, 베탄소스는 잉카 황실의 황녀와 결혼하여 잉카에 대해 우호적으로 묘사한 역사가이다. 그런데도 이런 기록이 등장했다는 것은 잉카 제국에서 순장이 드문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잉카 제국이 완전히 몰락한 뒤, 망코 잉카 황제와 그를 따르는 가신들이 스페인의 추격을 피해 도망쳐 세운 망명정권인 빌카밤바(에스피리투 팜파) 유적지에서도 어린이 인신공양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빌카밤바는 오래 전부터 잉카인들의 성소로 여겨졌고, 이 시기에 망코 잉카는 한가하게 인신공양이나 할 처지가 아니었기에 투팍 유판키 황제 시기에 인신공양된 어린이들의 유해로 추정된다. 물론 강제적인 순장만 있는 것은 아니었고, 아타우알파 황제가 처형되자 그의 처들도 황제를 저승에서 섬기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순사도 있었다고 한다.

 

잉카 제국의 몰락 원인은 여러모로 멕시코 지역에 있었던 아즈텍 제국과 흡사하다. 중앙정부의 잔인한 학살과 폭정으로 반감을 사고 있던 와중에 스페인인들이 들어와 반란 세력의 구심점이 되었고, 잉카 제국은 거기다 내전 문제까지 겹쳐 그야말로 망하기 딱 좋은 상태라고 할 수 있었다. 잉카 제국은 아즈텍 제국보다 인신공양을 적게 하였으므로 인신공양 풍습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으나, 대신 반란을 일으킨 지역에서 모든 남자들을 학살하거나 인구의 절반 이상을 쓸어버리는 등 잔인한 보복은 오히려 아즈텍보다 더 심했다. 다만 잉카 제국이 무작정 사람들을 죽여대는 살인 국가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잉카인들은 기본적으로 영토를 확장할 때에 평화로운 외교술을 선호했고, 언제나 친선 사절을 먼저 보내 복속 여부를 물었고 평화적으로 해결될 일이라면 그렇게 했다. 하지만 반란을 일으키거나 자신들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얄짤없이 잔혹하게 보복했다.

 

전염병과 내부 분열

 

아즈텍을 멸망시킨 전염병은 이미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들어오기 한참 전부터 잉카 제국의 국력을 깎아놓았다. 아즈텍 제국의 멸망보다도 잉카 제국의 멸망에서 전염병이 차지한 비중이 더욱 컸다. 왜냐면 중앙아메리카에서 서서히 남하 중이었던 천연두가 에콰도르에 도달했고, 마침 이 지방의 반란군을 진압중이었던 선대 황제인 우아이나 카팍을 감염시켜 그를 사망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아이나 카팍은 곧바로 죽은 것이 아니라 후계자를 지명하고 죽었으나, 이미 최고 존엄인 사파 잉카까지 감염될 정도로 천연두가 널리 퍼졌는데 다른 황족들이라고 무사할 리 없었다. 후계자로 지명된 장남 니난 쿠요치마저 사망하자, 잉카 제국은 우아스카르와 아타우알파라는 두 황태자 간의 피로 피를 씻는 내전을 맞이하게 된다. 이 내전이 사실 전염병 때문에 촉발된 것이 아니라 우린과 하난의 계승 의식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우아스카르와 아타우알파의 전쟁은 매우 치열하고 잔인했다. 같은 잉카인들끼리 서로의 가죽을 벗겨서 인간 북으로 만들거나 해골로 술잔을 만드는 일까지 벌어졌다.

 

처음엔 우아스카르가 유리했으나, 선대 황제인 우아이나 카팍을 따라다니며 군인으로서 두각을 드러낸 아타우알파가 이복형을 꺾고 최종 승리를 거며쥐었다. 아타우알파는 끌려온 이복형에게 매우 악랄한 보복을 했는데, 우아스카르를 처형하면서 그가 보는 눈 앞에서 측근들의 두개골을 박살내고 가죽을 벗겼으며, 아내를 한 명씩 죽여서 매달았다. 임신한 아내의 배를 갈라 태아를 끄집어내고 탯줄로 어머니의 발에 목을 매달아 놓는 인면수심의 짓거리까지 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잉카 제국은 피사로가 들어오기 바로 직전에 서로 내전을 하느라고 정예 병력들을 소모한 상태였다. 특히 잔인하고 오만한 성격이었던 아타우알파가 보복을 하겠답시고 형을 지지한 도시의 시민들을 마구잡이로 도륙하다보니 증오를 받아 민심이 등을 돌린 것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게다가 승리 때문에 한껏 거만해진 아타우알파는 자만심에 취해 스페인인들을 자신의 제국에 무혈 입성 시켜주었다. 한마디로 잉카 제국에 대한 주변 부족들의 반감이 최고조로 올라 있고, 황제 본인은 승리에 취해있으며, 제국은 내전으로 병력을 소진한 환상적인 타이밍에 스페인 군대들이 남아메리카 대륙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학살과 주변 부족들의 반감

 

아즈텍과 마찬가지로 잉카 제국과 주변 민족들의 사이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흔히 사람들은 프란시스코 피사로와 디에고 데 알마그로가 순수하게 스페인 콩키스타도르 병력의 힘만으로 잉카 제국을 정복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에르난 코르테스와 마찬가지로 원주민 동맹군들의 역할이 없었더라면 결코 수백의 병력으로 수백만의 인구를 지닌 제국을 정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스페인인들을 지원하는 주력군은 언제나 잉카를 적대하는 부족들이었다. 이중에서 가장 잉카인들을 적극적으로 배신한 민족은 에콰도르의 카나리족이었다. 이는 투팍 유판키 황제에게 정복당한 과거가 불과 몇십년 전의 일이었고, 피사로가 들어오기 얼마 전에는 투메밤바라는 도시가 아타우알파에 의해 잔인하게 학살당한 과거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때 황제인 아타우알파는 도시 시민 5만명 중 3만 8천 명을 처형할 것을 명령했다. 사실상 도시 인구의 80%을 한꺼번에 몰살할 것을 지시한 것이다.

 

그 밖에도 과거 잉카의 적수였으나 패배해서 정복된 창카족, 우앙카족, 아마존의 차차포야족이 스페인군을 지지하였다. 아마존 부족들은 잉카 황제가 과거 자신들의 족장의 껍질을 벗겨 북으로 만들어버린 원한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잉카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정복당한 치모르(치무)족들도 스페인군의 길잡이 역할을 하였고 잉카 내부의 사정을 소상하게 알려줘서 스페인이 잉카 제국을 무너뜨리는데 큰 기여를 했다.

 

잉카 제국은 단기간에 폭발적으로 성장한 탓에 주변 남미 원주민 부족들을 아우를 수 있는 능력이 조금 모자랐다. 특히 에콰도르 지방은 투팍 유판키-우아이나 카팍-아타우알파 3대에 걸쳐 끈질기게 잉카에 저항한 탓에 극심한 탄압을 당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피의 호수' 사건인데, 1520년 우아이나 카팍 황제가 카란키 반군을 진압한 다음 이 지방의 모든 남성들을 학살하고 호수에 던져 피가 새빨갛게 물들었다는 전설이다. 이때부터 이 호수의 이름이 Blood Lake라는 의미를 가진 야와르코차 호수로 바뀌었다. 이 학살로 대략 3만에서 5만명의 카란키족 남성들이 살해당했고 이 지방에서 잉카에 대한 악감정은 최고조로 치솟았다.

 

툼베스를 파괴한 것도 아타우알파에게 악재로 작용했다. 잉카 내전 시기 쿠스코로 가는 요충지에 위치한 툼베스 시는 아타우알파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나중에 피사로가 생존자 소년을 한 명 데려다가 스페인어를 가르치고 통역관으로 삼았는데, 이 아이의 세레명이 펠리피요였다. 펠리피요는 자신의 고향이 파괴된 복수로 아타우알파 황제를 죽이기 위해 일부러 거짓되게 통역했고, 결국 피사로는 아타우알파의 처형을 명령하는 오판을 저지르고 만다.

 

잉카를 적대하는 부족들로 구성된 약 3만 명의 원주민 지원군은 에르난도 피사로와 후안 피사로의 지휘를 받는 스페인 군대 200명이 쿠스코에 포위되어 있을 때 봉기한 망코 잉카의 10만의 잉카 대군에 맞서 싸웠다. 이 전투가 바로 쿠스코 공방전이다.

 

참고로 잉카 제국도 흉흉한 민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정복한 지방의 백성들을 일부 강제 이주시키고, 잉카에 충성스러운 지방 시민들을 채워넣는 방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잉카의 지배가 워낙 가혹했기에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결국 잉카는 정복한 지방을 또 정복하기 위해 출정하는 일이 상당히 잦았다고 한다. 이 강제 이주 정책은 아시리아나 이오시프 스탈린 집권 당시 소련의 정책과 굉장히 유사하다.

 

잔혹한 풍습

 

최근 아즈텍의 실체를 까발리는 여러 사실들이 알려지며 인터넷에서 아즈텍에 비교하며 잉카가 마치 잔인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듯이 미화하는 글이나 댓글이 많이 보이는데, 아즈텍이 워낙 규모가 큰데다 독보적으로 잔인해서 그렇지 잉카 역시 잔혹한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인간 북(루나 티냐)이다. 잉카 제국에선 사람의 가죽을 그대로 떠서 북으로 만드는 형벌이 있었다. 산 채로 가죽을 벗긴 다음, 그 안에 짚을 채우고 배 부분에 북을 집어넣어 멀리서 보면 뱃가죽이 부풀어오른 사람처럼 보였다고 한다. 바람이 불 때마다 팔다리가 마구 흔들려서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바람에 휘날리는 팔다리가 배부분을 때리도록 조정해놓아서 바람이 불면 스스로 북소리가 났다고 해서 인간 북이라고 불렸다. 이 형벌은 잉카 원주민 역사가인 펠리페 구아만 포마 데 아얄라나,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처럼 잉카에 대해 우호적으로 서술한 스페인 역사가들의 책에도 등장한다.

 

잉카는 인간 북을 주로 반란군 지도자나 정복지의 군주들을 처형할 때 만들었다. 에콰도르 카란키족 지도자들, 창카족 지도자, 아마존 부족장들이 이 형벌을 받았다. 나중에 아타우알파는 사로잡은 우아스카르 일당을 처리할때 이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 밖에도 죽은 이의 이빨을 뽑아 목걸이를 만들기도 했고, 인간의 갈빗대에 구멍을 뚫어 뼈 피리를 만들어 의식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스키타이나 불가리아 제1제국의 크룸과 동일하게 해골술잔을 만드는 풍습도 있었다. 파차쿠티 황제가 창카족 군주들의 해골로 술을 마셨고, 아타우알파의 경우 우아스카르의 최측근인 아토크 장군의 두개골을 도금하여 술을 마시는 모습이 목격되었다고 한다.

 

특히 잉카의 이런 잔혹행위는 주변 부족들이 모두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아즈텍과 달랐다. 예를 들어 인간 북의 경우 오직 잉카 제국에서만 개발된 특수한 처형법이었는데 인근 부족들 중에서 이런 풍습을 가진 민족이 존재하지 않았다. 해골 술잔, 뼈 피리, 이빨 목걸이 등도 잉카 제국 이외의 문명에선 흔한 것들이 아니었다.

 

이런 풍습들은 아시리아와 마찬가지로 정복당한 민족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기 위한 심리전의 일환으로 실행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위와 같은 잔인한 만행들에도 불구하고, 후세의 잉카 제국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나쁘지 않다. 소규모의 부족 중심 사회를 이루고 있던 남미 지방을 강력한 군사력으로 정벌하고 중앙집권적인 제국으로 묶어낸 것, 그리고 전국 곳곳에 널찍한 도로를 뚫고 수로들을 개수한 것, 뛰어난 건축 기술로 험준한 산악 지대에 아름다운 도시들을 세우고 문명을 꽃피운 것 등 대체적으로 좋은 것들이 현재 잉카 제국의 주된 이미지이다. 결정적인 이유는 잉카 제국을 멸망시키고 새롭게 등장한 스페인 제국이 이후 약 300여 년 동안 원주민들에게 한 짓들이 너무나도 악랄했기 때문에 잉카 제국의 악행들이 묻혔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남미 원주민들을 정신적으로 통합하는 매개체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페루의 독립운동가들은 '잉카의 후손'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스페인의 압제자들에 맞서 싸웠고, 몇 백여년에 걸친 탄압에도 잉카의 신년의식이나 전통들을 보존하면서 잉카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덕분에 잉카 제국에 대한 이미지가 상당히 희석될 수 있었고, 심지어 일부는 미화되기까지 하면서 현재 잉카 제국에 대한 평가는 원주민들이 세운 남미 최대의 대제국 정도로 어느 정도 좋은 편이다.

 

'잉카 제국의 적통'을 주장하는 페루에서는 당연히 잉카 제국을 자랑스러운 자신들의 역사로 생각하고 있다. 고대부터 전해내려오는 몇 천년에 걸친 문명의 발원지일 뿐만 아니라, 콜럼버스 이전의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강대했던 제국의 고향이라는 것에 굉장한 자부심을 품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제국이 멸망하고 약 200여 년이 지난 1700년대에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운동을 할 적에도 최후의 사파 잉카인 투팍 아마루의 혈족을 주장한 투팍 아마루 2세가 등장하여 잉카의 후예를 자칭하면서 사람들을 이끌었던 적도 있고, 이 '잉카의 후예'라는 타이틀로 몇 만명에 가까운 페루인들을 끌어모으는 데에 성공하기도 했다. 그만큼 당시 페루인들 사이에서 스페인 식민통치에 대한 반감이 심했을 뿐만 아니라, 잉카 시절의 영광에 대해서 어느 정도 향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페루 학계 측에서는 잉카의 수도인 쿠스코가 페루 영토 안에 있고, 자국민들 중 케추아족의 구성 비율이 50%가 넘는 것을 근거로 페루가 남미에서 가장 정통성 있는 잉카의 후계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칠레나 에콰도르, 아르헨티나 등 여타 남미 국가들은 잉카 제국이 단순히 페루 뿐만이 아니라 여러 국가와 민족들에 걸친 다민족 제국이었으므로 오직 페루만의 역사로 보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만큼 잉카 제국에 대한 세계인들의 시선이 상대적으로 괜찮은 것에는 제국이 멸망한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무굴 제국, 청나라, 조선 등 아시아 지역의 전통적인 국가들은 온갖 부정부패에 찌들은 채로 몇 십여년 간 외세에 잠식당하다가 결국 타국의 식민지가 되거나 이권의 각축장이 되어버리는 등 꽤나 추한 모습으로 역사에서 퇴장당했다. 그러나 잉카 제국은 아예 '완전히 새로운 문명과의 조우'라는 전대미문의 상황 속에서 멸망했고, 듣도보도 못한 신무기를 사용하는 적들에게 기술의 완벽한 열세, 그리고 구대륙에서 넘어온 전염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멸망의 길을 걸었다. 즉 멸망할 만한 충분한 변명거리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망해가는 국가들이 국가 멸망 테크를 시전하고 있을 때에 보통 황족들이나 귀족층들이 새로운 침략자들에 빌붙어 기생하는 것과는 달리, 잉카 제국의 황족들은 산속의 빌카밤바로 도망가면서까지 끝까지 스페인의 압제에 저항했으며 최후의 황제인 투팍 아마루 역시 당당한 태도로 마지막까지 스페인에 대항하다가 의연한 죽음을 맞았다. 이같은 태도는 훗날 페루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모범이 되어주었고, 몇 백년에 걸친 스페인의 식민통치 속에서도 잉카인들이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을 유지할 수 있는 바탕이었다.

 

현대 세계인들이 잉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보통, 안데스의 험준한 산맥에 도시를 지은 위대한 건축 문명, 혹은 황금이 넘쳐났던 미지의 풍요로운 국가 정도로 요약이 가능하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같은 선콜럼버스 시대의 문명인 마야 문명이나 아즈텍 제국과 혼동을 하는 경우가 많아서 정교한 달력을 제작했다거나 정글 속의 문명이라고 착각하기도 하는데, 잉카의 달력은 예상 외로 마야의 그것만큼 정확하지는 않았으며 잉카 제국 영토의 대부분은 정글이 아니라 안데스의 산악 지방이었다. 또한 황금에 관해서라면 분명 잉카 제국에는 한때 보물이 많았던 것은 맞다. 황제가 대놓고 방 2개를 가득 채울만한 황금을 바치겠다고 공언할 정도였으니.... 그러나 스페인의 식민통치기에 잉카 예술품들의 문화적 가치에는 관심이 없던 스페인 관리들이 눈을 뒤집고 제국 전역에 있는 금붙이란 금붙이는 모조리 쓸어가버렸고, 이를 모두 녹여버린 다음 금괴로 주조해 스페인 본국으로 보내버렸다. 이 덕분에 스페인에는 몇 만톤에 달하는 금과 은이 그대로 유입되었고, 스페인 제국은 아메리카 식민지의 고혈을 짜낸 덕분에 한시적으로는 유럽 최강대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 어찌되었든 이 시절에 잉카 제국의 황금 유물들이 대부분 소실된 덕에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금 유물들은 스페인에게 넘겨지지 않은 극소수의 유물이거나 후대에 발견된 것들이다.

 

다만 최근들어서는 아즈텍 제국과 함께 잉카 제국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이전처럼 무작정 백인 침략자에게 당한 무고한 제국이라는 환상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앞서 말했겠지만 잉카 제국 역시 굉장히 잔혹한 방식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인근 부족들에게 강한 반감을 샀고, 인간 북을 만들어 전시하는 등 매우 잔인한 국가였다. 잉카인들이 워낙 잔혹했고 복속된 부족들이 워낙 잉카에 대한 반감이 강했기에 몇 백명도 안되는 스페인인들이 이를 이용해서 거대한 제국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잉카인들이 무작정 쳐들어가서 모두 죽이고 노예로 삼았다는 것은 아니다. 잉카인들은 일단 군사적인 방법보다는 외교술을 선호했고, 평화적으로 끝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렇게 했다. 다만 자신들에게 반란을 일으키거나 반대하는 세력에게는 한없이 잔인해졌을 뿐이다. 그외에도 잉카인들은 어린이들을 산지의 추운 동굴로 끌고가 그대로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등 현대의 기준에서 굉장히 야만적인 풍습들도 그대로 유지했다. 또한 유라시아에서는 몇 백년 전에 사라진 인신공양 풍습도 있어서 황제의 장례식 등 중요한 행사들에 수많은 사람들을 순장해 바치는 등 좋은 풍습만 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잉카 제국이 현대의 대중문화에 등장한다면 그 이유는 백이면 백 잉카의 막대한 양의 황금과 보물 때문에 등장한다. 실제로 잉카인들은 스페인 병사들에게 황금을 빼앗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 몰래 산 속의 동굴 등에 보물들을 숨겨 놓았고, 스페인 사람들은 또 이 보물들을 찾아 일확천금을 누리겠다고 전 남미 대륙을 헤집고 다녔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랑가나티스의 보물'이다. 랑가나티스의 보물에 얽힌 이야기는 이렇다.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황제 아타우알파를 감금하자, 아타우알파는 방들을 가득 채울만큼의 엄청난 양의 황금과 은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피사로는 이를 받아들였고, 아타우알파는 곧바로 명을 내려 전역의 보물들을 피사로에게 가지고 오도록 시켰다. 그러나 아무리 보물들을 많이 갖다주어도 스페인 사람들은 만족을 모르고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그와중에 스페인 병사들 사이에서 잉카의 대군이 자신들을 죽이고 황제를 구출할 것이라는 헛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사실상 적진 한가운데에 갇혀있던 스페인 병사들은 히스테리 증세에 빠지고 만다. 병사들은 약속을 어겼다고 여긴 황제를 죽일 것을 요구했고, 피사로는 원치 않았지만 거센 여론에 밀려 결국 아타우알파를 처형하고야 만다. 여기서 문제는 황제가 죽은 그 시점에도 수많은 보물들이 여전히 스페인 군대의 주둔지로 운송되고 있었던 것이다.

 

황제가 살해당했음을 전해들은 수송 책임자 루미나후이 장군은 당연히 보물들을 그대로 스페인 군대에게 갖다 바치는 것을 거절했고, 곧바로 당시 750톤에 달하는 보물들을 에콰도르의 랑가나티스 산맥의 어딘가에 숨겨버렸다고 한다. 이후 루미나후이 장군은 스페인 군대에게 포로로 잡혀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보물들의 위치를 불지 않았고, 덕분에 스페인 군인들은 이 보물들을 찾는 것에 실패했다. 이후 스페인 탐험가와 도굴꾼들 사이에서 루미나후이 장군이 숨겨놓은 보물에 대한 소문이 일파만파 퍼져나갔고, 그때부터 이를 '랑가나티스의 보물'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 외에도 잉카인들의 잃어버린 보물들에 대한 이야기는 꽤나 많은 편이다. '파이티티'라고 부르는 잉카인들의 도피처이자 황금 도시에 관한 전설도 있고, 스페인의 약탈을 피해서 일부러 땅에 보물들을 파묻었다는 소문들이 심지어 현대까지도 페루의 각 지방에 전해져 내려오고는 한다.

 

남미에서 보통 숨겨진 보물이라고 하면 상당수가 잉카 제국과 연관이 있는 것들이다. 아즈텍 제국은 몬테수마 2세의 황금을 제외하면 딱히 내려오는 전설이 없고, 기본적으로 평화나 문화발전보다 전쟁을 좋아하는 호전적인 성향이었던 데다가 중앙집권적인 제국이 아니라 도시국가들의 연합체라서 잉카 제국보다 황금의 절대적인 양이 적었다. 또한 유럽인들이 도착하고 2년여 만에 폭삭 망했으니 보물을 숨길 시간 자체가 없어서 말 그대로 싸그리 털려나갔다. 게다가 마야 문명은 이미 유럽인들이 당도했을 때에 전성기였던 고전기가 다 지나가고 몰락해서 폐허가 된 돌더미와 도시 유적들 밖에 남지 않았던 상태였고, 결정적으로 제대로 된 야금술이 발달하지 않아 정교한 황금 유물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잉카 제국은 확실히 달랐다. 일단 100여 년에 걸친 확장 사업을 펼치면서 엄청난 양의 재물들을 꾸준하게 축적했고, 행정구조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었기에 사회도 아즈텍 등보다 훨씬 부유하고 안정적이어서 모아둔 보물들의 양이 굉장히 많은 편에 속했다. 또한 무려 40여 년 동안이나 유럽인들에게 끊임없이 저항하면서 필사적으로 보물과 영토, 그리고 주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기에 숨겨둘 수 있었던 보물들도 생각 외로 꽤 되었다. 스페인 탐험가들도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눈에 불을 켜고 잉카인들의 황금을 노리고 다녔고, 마추픽추를 발견한 것도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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