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
제철 공업의 발전
영국은 15~17세기에 이미 해상 강국으로써 이름을 떨치고 있었고, 그 대가로 배를 만들기 위해 어마어마한 나무를 소모해서 16세기 즈음에는 전 브리튼 섬의 산림이 소실될 지경이었다. 덕분에 연료로 쓸 나무도 부족해져 다른 나라에서 나무를 수입해와야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17세기 말, 에이브러햄 다비 1세가 화학의 발전으로 영국에서 풍부했던 역청탄을 코크스로 정련하는 것이 가능해지자 이전까지 용광로에서 사용했던 연료인 숯을 대신해서 코크스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코크스는 심지어 숯에 비해 높은 온도로 오랫동안 연소했기에, 주철의 생산량을 급속도로 높일 수 있었다.
하지만 기존과 같은 고로(高爐)에서 생산되는 주철은 탄소 함량이 지나치게 높아 유연성이 떨어져 쉽게 부서져, 강철 혹은 연철의 생산을 위해서는 기존처럼 주철을 다시 망치로 두드리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헨리 코트가 철과 연료가 분리된 용광로를 사용, 철을 완전히 녹임으로써 불순물을 분리하고 녹은 철을 산소에 노출시켜 탄소를 제거하는 기술인 교련법을 개발, 또 녹은 철을 판 형태로 가공하는 압연 기술을 개발해 연철 생산량이 급격하게 증가한다.
코크스와 새로운 제철기술은 영국의 철 생산량을 급격하게 증가시켜 이후 산업 혁명의 전개에 필요한 막대한 철을 공급할 수 있었다.
1788~1796년 사이에 영국의 철 생산량이 2배 증가했고, 이후 8년 동안 다시 2배 증가한다. 특히 1779년에는 영국 세번 강에 세계 최초의 철교가 건설됨으로써 영국의 제철 공업의 발전을 증명하는 이정표가 된다.
산업의 성장
산업이 왕성히 성장하였고, 이에 따라 공업과 상업의 중심지 도시도 성장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도시인구도 역시 성장하게 되는데, 도시거주민들은 스스로 식량을 생산하기보다는 구매하거나 공급받는 측이었고, 이들의 인구가 늘수록 농업부양인구가 늘어나면서 나폴레옹 전쟁 무렵 영국은 식량수출국에서 식량수입국이 되었고 식량 수입대금은 무역흑자로 축적된 무역수지로 지불하는 양상이었다. 그런데 점차 늘어나는 면화 수요량이나 수출대금으로 내야할 식량의 수입량에 비해서 면화 생산량이 지지부진하거나 감당못할 수준이 되자, 대서양 건너편의 미국에서는 1800년대에 대규모 면화 플랜테이션을 조성하였다. 이곳의 노동자는 아프리카 노예였다.
거기에 때마침 아메리카에서 기존의 수작업 대비 50배의 효율을 지닌 조면기가 발명되어 퍼진터라 아메리카의 면화 플랜테이션에서는 대량의 면화를 값싸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아프리카의 노예 → 영국이 수입 → 아메리카 면화 플랜트에 노예 공급 → 아메리카 면화 플랜트들이 노예들이 생산한 값싼 면화를 영국으로 공급 → 생산된 면직물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 수출하는 삼각무역이 완성되었다.
특히, 영국에 의해 면직물 산업이 일찌감찌 붕괴하고 만 인도에 대한 수출이 엄청나게 활발해 20년 만에 수출 규모는 10배 증가했다.
면직 산업에 이어 철강 산업이 활기를 띄면서 워털루 전투 이후, 영국 주도의 철도 건설이 시작되어 영국의 호황은 절정에 이른다.
인클로저 운동의 결과 농지들이 지주나 차지농들에 의해 통합되어 가기 시작했다. 애초에 여타 국가들은 상속시에 토지를 자손의 수에 맞게 분배해 주다 땅크기가 점점 줄어 들었으나 영국은 장자 상속제를 이어오고 있었으므로 대규모 농지를 가진 농장주들이 많이 남아 있었던 것도 대토지소유에 한몫했다. 대토지소유자들의 대두로 그들과의 시장경쟁에서 도태된 농민들이 등장하면서 농민층은 부농과 빈농으로 나뉘었고 빈농으로 전락한 농민들은 자기 땅의 경작을 포기하고 차지농인(Yeoman)밑에서 임금을 받고 일을 하게 되면서 노동자 계급(프롤레타리아)이 탄생했다.
도시에서는 일찍이 도제제도가 상공업을 기반으로 하여 근로계약이 정립되었다.
이 초기 산업 혁명은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문제시되었던 것은 가혹한 노동 환경이다. 위에서 서술되었듯 기계가 노동력을 대체하는 데 비해, 당시 영아 사망률이 조금씩 줄어감에 따라 인구는 매년 급속히 증가하기 시작했고 거기에 더해 인클로저 운동으로 농촌으로부터 수많은 인력들이 도시로 상경함과 동시에 도시화가 가속화되면서 노동 공급은 급속하게 증가하였다. 이로써 부르주아들이 일방적으로 노동자들을 손쉽게 착취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면서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환경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에는 노동자들의 참정권이 없었고 자유주의적 정책 기조로 정부와 의회는 부르주아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에만 바빠 관련 법 제정이 미비했기에, 제대로 된 근로시간도 정해지지 않아 많은 노동자들이 과로에 시달렸다. 특히 노약자 계층에서의 노동이 크게 늘어났는데, 어린이들도 만 7세부터 면직 산업에 동원되어 학대를 받으며 일하다 요절하는 경우도 많았다.
다만 이러한 가혹한 노동조건은 전근대 농촌 사회로부터 이어졌다는 맥락을 이해할 필요는 있다. 전통 사회에서는 막 걸음거리를 뗄 만한 어린 나이부터 일에 동원되는 것이 다반사였다. 또한 16시간에 달하는 가혹한 노동 시간도, 전근대 사회에서 해 뜰 때 일어나서 해 질 때까지 일하는게 당연했던 점에서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임금 역시 후대에 보면야 최소한의 생활 수준만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은 낮은 수준으로 보이지만, 바로 이전의 농촌 사회와 비교했을 때는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초기 직물 공장은 여성 성인 노동자가 대다수였는데, 남성 직물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일하길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초기 공장들은 남성 수준의 임금을 제시해서 여성 노동자들을 끌어들였는데, 이 시대 런던의 남성 노동자들의 임금은 북프랑스에 비해서 2배, 밀라노와 비교해서 4배에 달했다. 산업화가 시작되지 못한 유럽 타 지역에 비해서 거의 4배에 달하는 임금을 받은 것. 식량 유통을 기준으로 가늠해도 비슷한 결과가 나오는데, 이 시대 영국은 타 지역에서 일방적으로 식량을 빨아들였고 런던은 그 영국에서도 식량을 빨아들이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즉, 당시 기준으론 그 공장 노동자들의 구매력과 임금이 영국 및 유럽의 타 지역 사람들보다는 확실하게 높았다는 것이다. 당대 런던 노동자들의 임금이 먹고 살 여력이 없을 정도로 낮은 수준이었다면 런던의 인구성장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위의 내용은 사회의 변화를 감안하지 않은 내용이기도 하다. 또한 산업혁명 시기에는 기존의 관습법이 사라진 시기여서 더욱 큰 문제가 일어났다. 기존에는 관습법으로 인해 노동자들에게 최소한의 하한선이 존재했지만, 관습법이 무시되면서 평균적인 노동자들의 삶은 관습법이 정해주었던 하한선보다 더욱 낮은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또한 어린이 노동 같은 경우에도, 농촌과 같은 시간을 일했다고는 하지만 농촌의 경우 모든 사람이 오랜시간동안 면식이 있던 사이다 보니 위아래간 서로 간의 편의를 봐주는등의 여유가 있었지만, 공장에서는 사방에서 온 사람들이 모인 만큼 이런 편의가 거의 없었고, 공장의 노동 강도는 당시 농촌의 노동 강도보다 훨씬 심했다.
1810년대에 러다이트 운동으로 열악한 노동조건에 대한 항의가 전국적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했고, 당시 영국 정부에서 이를 탄압했지만 더이상 늘어나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아예 안 받아들일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이를 무마하는 차원에서 규제하는 법률은 1833년에 제정되었으나, 이후 30~40년에 걸쳐 지속되었다.
미성년 노동자들은 탄광이나 공장에서 하루에 1시간도 쉬지 못하고, 매일 10시간씩 건강을 해쳐 가면서 일을 해야 했다. 일을 하다 다치거나 쓰러지면 과정은 상관없이 무조건 본인 과실 취급이었고 급여 또한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실상 노예노동이었다. 심하면 탄광에서 주 6일 동안 하루 12시간을 일하는 경우도 있었다. 다른 산업 혁명을 겪은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여서 19세기 후반 유럽 노동자들이 저 힘든 중노동을 주당 평균 50~60시간 했어야 했다.
1760~1830년대 1인당 GDP의 성장률은 상당히 느렸기에 실제 경제성장은 상당히 미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경제학에 따르면 임금은 대체로 노동의 한계생산만큼 증가하기 마련인데, 이 노동의 한계생산은 노동에 들어가는 자본이 많을수록 올라간다. 1760~1830년대 영국의 자본투자는 나폴레옹 전쟁이나 주식투자 규제 등으로 상당히 미진한 상태였고 따라서 근로자들의 임금이 별로 높지는 않았다고 한다. 즉 임금이 적기 때문에 저런 중노동을 통해서만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돈을 벌 수 있었다는 이야기.
유럽권의 산업 혁명뿐 아니라 사실 각국의 산업화/근대화에선 독재정권,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이런 노동자의 고통이 거의 예외 없이 동반되었다. 소련의 스탈린 개발독재는 워낙 유명하며, 아시아에서도 일본의 메이지 유신, 한국의 제3공화국 등으로 근대화가 진행될 때는 국민들은 항상 힘들었다. 유럽의 근대화에서도 사람들이 고통받고 죽어나갔고, 일본은 근대화와 경제발전 시기에 환경오염과 산업재해가 빈번히 일어나서 미나마타병, 이타이이타이병 같은 질병이 만연했고 한국의 경우에도 한강과 낙동강 등 주요 하천이 오염되면서 그냥 먹을 수 없는 수준이 되었고 정부와 기업이 수출 제일주의라는 구호 아래에서 노동 착취를 방조하면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연간 3,000시간 이상의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이는 현재 중국에서도 반복되고 있는 문제점으로 스모그도 이런 성장제일주의의 결과물이라는 지적이 많다. 올리버 트위스트나 플랜더스의 개가 산업혁명 당시의 유럽의 사회상을 반영한 소설이었고, 카를 마르크스가 왜 떴는지 알 만한 시대였다는 것이다. 동시대 인물인 허버트 조지 웰즈가 SF 소설인 타임머신(소설)에서 '엘로이'와 '몰록'의 설정을 각각 지배층과 하층 노동 계급의 후손으로 설정한 것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그 처참한 격차 수준을 볼 때, 이 상태가 계속 지속된다면 언젠가는 같은 인류라고 보기도 힘들 지경이 될 수 있다는 우려는 전혀 무리가 아니었을 정도였다.
다행히도 19세기 중반에 들자 사회주의적 이념이 형성되어 일부 지식인과 정치인, 그리고 소수의 깨어있는 자본가들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복지제도와 사회보험제도들을 도입하고 규제를 시작하면서 최소한 사람이 생존할 수 있는 꼬락서니는 갖추기 시작했다. 이 상태로 계속 놔둔다면 건강이 나빠져서 조기사망은 물론이고 극단적 양극화로 인해 노동자들의 구매력이 없어지기 때문에 생산물을 구매할 수요자층도 줄어 없어지게 되면 결국 공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표적으로 12세 이하의 아이는 몇 시간 이상 노동 금지 같은 규제를 시작했는데, 당시 시장경제 자유주의자들은 "아이들의 일할 권리와 자유를 빼앗지 말라!"는 논리로 이에 반대했다. 아이들이 행복한 유년기를 보낼 권리와 자유가 먼저 아닌가?
노동 조건 개선
일단 1차 산업 혁명기는 임금은 유지 혹은 약간 상승이지만 노동시간은 30% 이상 증가해서 뜨악한 시대가 맞다. 대략 노동시간이 연 2,400시간 평균에서 3,500시간 평균으로 산업혁명 기간에 노동 시간이 늘어났다는 게 통설이다. 얼마나 늘었는지에 관해 그 레퍼런스는 당시 재판기록을 이용한 추정으로서 최근에 이루어졌는데 범죄는 아무 때나 일어나므로 범죄 발생일과 그 전날 용의자와 증인의 기상 출근 식사 퇴근 취침 등의 행적으로 노동시간을 유추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성인 남성의 노동시간은 대폭 증가했다. 1750년 런던에서 연간 2,631시간, 1800년 3,538시간, 1760년 잉글랜드에서 2,576시간, 1800년 3,328시간, 1830년 3,356시간. 그렇다면 노동생산성 증가 추계는 하향 조정돼야 할 것이다. 여가를 고려할 때 생활수준은 그만큼 낮아졌다. 산업노동 공급은 양적이라기보다는 질적인 문제,즉 노동의 본질적 변화라는 면을 봐야 한다. 주 6일제 50주 근로라고 대충 땡치면 11.5시간 정도가 나온다.
허나 이런 상황은 19세기의 2차 산업혁명기를 거치며 대부분 나라에서 자연스럽게 완화된다. 이유는 크게 3가지를 꼽을 수 있다.
인구펌핑도가 줄어들기 시작: 1차 산업혁명 절정기에 그냥 닥치는 대로 낳자 모든 동네들이 절정을 지나면서 출산율이 줄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서 무한의 노동공급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
투표권의 점진적 확대: 구미권의 경우는 다수 국가에서 투표권은 점진적으로 확대되었다.물론 아닌 나라도 있지만 패스하고 근데 여기서 투표권이 확대되면 돈지랄 갑부도 1표, 거지급도 1표인 세상으로 바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게 노골적으로 나타난 곳이 사민주의가 나온 독일인데 독일의 베른슈타인은 이 상황을 보고 혁명이 아닌 현실정치로 변화가 가능하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숙련공의 니즈: 산업이 어느 정도 고도화가 되면서 숙련공이 필요해지는데. 이 케이스에서 가장 유명한 건 헨리 포드의 급여 인상일 것이다. 다른 나라도 그런 현상이 있었지만 예를 들기에는 헨리 포드가 제일 적절할 것이다. 헨리 포드는 일급을 2배 이상 인상시켜서 5달러로 만들었는데, 경제신문 관련 출판사 책들에선 헨리 포드의 도덕성을 거론하는데 천만의 소리. 미국의 공장은 19세기 기준 이론상 2년만 일하면 서부에서 땅을 살 수가 있었고 전간기는 흑인의 북부 이동이나 서부개척 거의 완료로 노동시장이 변했지만 여전히 공장은 반알바였다. 즉 "몇년 일하고 때려치면 되지 뭐." 딱 그 마음가짐이다. 그래서 이민자들이 뺑이 좀 굴리고 바이바이 하니 공장에서 오래 유지가 안 돼서 고급여 복지 정책이 나온 것이고, 그로 인하여 숙련공부터 대우가 올라갔다. 이 현상은 독일제국도 숙련공 부족으로 인하여 대우 상승, 급여 상승 효과가 일어났다.
왜 영국에서 일어났는가?
일단 중국을 보면 14세기 왕정농서에 이미 축력,수력으로 돌아가는 방적기가 있다. 또 북송 때 이미 35,000톤의 원광과 42,000톤의 석탄이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18세기 산업혁명기의 영국과 비등한 수준이다 심지어 아편 전쟁 이후 중국에 많은 영국산 기계제 면포가 들어왔으나 중국에서 손수 생산된 토포에 밀렸다. 당시 청나라 시대 농촌은 과잉인구 때문에 농업뿐 아니라 가내수공업도 겸했는데, 여기서 나오는 면직물의 양이 어마어마해서 오히려 영국산 기계제 면포를 압도한 것이다. 당시 청나라의 연간 면포 생산량이 6억 필 정도. 그리고 영국이 이 물량을 따라잡는 데 약 20년이 걸렸다. 이렇게 중국의 경우와 비교했을 때 일반적인 설명은 중국은 인력 공급이 너무 많아서 기술적 혁신이 일어날 동인이 없었다는 것이 보통. 막말로 사람을 쓰는 게 비용이 더 싸서 기계를 안 만들었다는 것이다. 반면 유럽 지역은 전반적으로 동아시아에 비해서 임금이 높았는데, 특히 영국은 서유럽 지방에서 두 번째로 도시 임노동자 임금이 비쌌던 프랑스 북부에 비해서도 2배 가까이나 임금이 높았다. 이탈리아 밀라노와 비교하면 런던의 임노동자 임금은 4배에 달했다. 영국이 전세계 곳곳에 만든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해 해군과 육군으로 수많은 인구를 징집해갔기 때문에 인구 유출이 심했기 때문. 그래서 위에 서술했듯 광산의 물을 퍼내는 펌프가 적자가 날 지경으로 비싸도 임노동비보다 싸다는 이유로 증기기관을 사용했고, 그것은 우연히도 제임스 와트에 의해 개량된다.
도시 생산물과 농업 생산물의 상대 가치를 통한 설명도 존재한다. 마르크스가 영국의 산업 혁명을 설명한 도식 이래로, 일반적인 통념으로는 <농업 생산물이 증가하고 인구가 증가한다 → 잉여 인구는 도시로 몰려 도시의 공업 생산물이 증가한다 → 반복>의 과정을 거쳐 국가의 경제력이 증가하고 산업혁명에 도달한다. 하지만 명/청대 중국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게 마르크스 말처럼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관찰됐다. 증가한 농촌 인구가 도시로 몰려 도시 노동자가 되는 과정은 존재했으나, 도시 노동자 수가 많아지면 임금이 내려가고 공업 생산물이 많아져 공업 생산물 가치는 내려가는 반면, 농업 생산물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올라가 도시민들의 삶의 질이 하락한다. 그렇게 되면 도시가 다시 해체되고 경제가 침체된다. 중국사에서 정권이 붕괴될 때 반란을 주도하는 민중들은 저런 과정에서 생긴 잉여인력이라는 점도 확인됐다. 덤으로, 마르크스가 위 도식을 설명할 때 예로 든 인클로저 운동도 실제론 농촌 인구가 도시로 몰려들게 하진 못했다는 것도 최근의 중론이다. 즉 멜서스 트랩은 생각 이상으로 빠져나오기 힘든 함정인 것이다. 이 역시 인구론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설명이 된다.
이 인구론적 문제는 서구가 천연자원 및 식량 자원을 수입해올 막대한 해외 시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극복할 수 있었다. 영국은 당시 아메리카와 유럽과 아시아를 아우르는 막대한 시장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업 생산물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하락하는 과정이나, 식량가가 상대적으로 폭등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고 안정적으로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단순히 도식화하면, 중국과 달리 영국은 면포를 비싸게 쳐주는 먼 곳 아메리카나 아프리카에 팔 수 있었고, 식량 역시 싸게 사올 수 있었는데 중국은 자국 내에서만 유통되다 보니 경제 순환의 함정에 빠졌다는 것.
개인의 권리 인정과 보호, 주식과 채권 등 금융업의 발달, 자연과학의 학문으로서의 독립과 체계화, 특허권 같은 지적 재산권 인정 등 사상의 발전 등도 중요한 요인으로 꼽히는데,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는 이 점이 매우 미비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유럽은 중세부터 도시 및 농촌이 자치적으로 재판관을 뽑아 판결을 내릴 수 있는 권리가 마련되었다. 중세 유럽의 도시 규모는 잘해야 10만을 좀 넘어서 동시대 중국, 아랍의 대도시보다 작아보이지만, 군사적/정치적 목적을 위해 도시의 규모가 거대해진 타 문명과 달리 유럽의 도시는 상업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규모는 작아도 그 수가 매우 많았다. 이런 자치도시들은 상업적 이유로 설립되었다보니 상업적 권리의 충돌에 관한 판결이 매우 중요했다. 때문에 공증과 회사, 길드 등 경제적 권익 보호를 위한 제도와 조직이 특히 발전했다.
동아시아의 중국 관료제와 비교하면, 동아시아는 개인과 개인간의 충돌을 다루는 사법의 발전 자체가 매우 미약했다. 더 정확히는 죄를 지은 사람을 처벌하는 형법만 극히 발전해있고, 관료들이 주된 관심을 가지는 재판도 거의 형사 재판이었다. 유럽에서는 10세기부터 발달한 공증제도 조차 중국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은 상업거래에 있어 매우 중요한 신용 자체가 공적으로 보증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지방 행정에 하위 관료가 따로 존재하지 않고, 중앙에서 달랑 하나 파견한 관료가 혼자서 사법,행정,군사를 전부 도맡아하다보니 만성적으로 업무가 지체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청조에는 앙쯔강 하류에 상업 발전으로 자체적으로 발달한 중소도시가 무수히 들어섰으나, 행정구역으로 새로 개편하지 않아 현실을 반영하지 못해 관료 파견조차 안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또한 유교 특유의 상업 멸시 때문에, 중국 명청 시대에 상인들의 기록을 보면 큰 재산을 가져 관료와 결탁한게 아닌 이상 제도적으로 보호받을 수 없다는 것을 당연시 하고 있다. 일례로 대운하에서 부두 노동자들이 물건을 빼돌리거나 사기를 치거나 태업하는 등 잦은 문제를 일으켜도 관료들은 아무 대응조차 해주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영국과 네덜란드의 권력의 견제 역시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멀리 갈 것 없이 유럽에서조차, 왕에게 권력이 집중된 절대왕정 때문에 경제적으로 파토가 나거나 상인들의 재산권이 침해되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 프랑스, 스페인, 독일 등에서는 징세청부업자에게 온 나라의 수조권을 맡겼다가 왕이 파산을 겪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왕이 돈을 떼먹어서 은행이 망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상업 자본 발전에 핵심적인 신용이 발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영국은 의회의 견제로 인해 왕이 징세권을 남발할 수 없었고, 네덜란드 공화국에서는 오라녜 공작이 간섭할 수 없는 은행이 설립되었다. 영국 의회는 조세 법정 주의의 뿌리가 되었고, 네덜란드 은행은 네덜란드를 유럽 금융의 중심으로 올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특허 제도는 산업혁명 뿐 아니라 군사 분야에서 일찍이 유럽과 다른 지역과의 격차를 벌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다. 전근대에는 혁신이나 발명이 사회 전체의 노력으로 여겨졌지 개인의 성과로 여겨지지 않아, 혁신과 발명에 대해서 개인의 이윤이 거의 남지 않았기 때문에, 무언가 혁신을 일으킨 개인이 나타났다면 타인보다 앞서기 위해 그 혁신을 비밀로 하는 것이 중요했다. 아니면 도제식으로 소수의 제자들에게만 자신의 비법을 전수하던가. 레벤후크의 현미경, 갈릴레이의 망원경, 티코 브라헤의 천문 관측 자료 등도 그들이 죽을 때까지 타인에게 공개하지 않아 유실될뻔했다. 이렇게 기술 중 많은 것이 기술의 개발자가 비결을 죽을때까지 숨기는 바람에 유실되었는데, 영국은 특허 제도 덕분에 발명가들이 자신의 이득을 보전할 수 있다고 여겨서 그 비법을 국가를 통해 공개했고 많은 기술이 보전될 수 있었다. 특히 국가를 통해 공개한 것은 국가가 망하지 않는 한 원본이 보전될 수 있단 점에서 자연적인 전파 이상으로 혁신에 기여했다.
다만, 실제로는 특허 제도는 '발명가의 이윤과 권리를 보장한다'는 이상을 별로 잘 실현하지는 못했다. 상기하였듯 사람들이 특허를 어떻게든 우회하거나 표절하고, 심지어 새 발명품 때문에 자기들이 망했다고 발명가를 습격해서 발명가가 쫄딱 망하는 일이 부지기수였으나, 어쨌건 발명가들에겐 보호 받는다는 느낌(?)을 줬고 그 덕에 죽 쒀서 국가를 위해 헌납 기술이 유실되지 않고 공개된 것은 사회 전체의 혁신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발명가의 권리가 보호받는 느낌이 전부는 절대 아니였다. 맥심 기관총을 만든 맥심은 돈방석에 앉았고, 심지어 미국이 스프링필드 M1903과 .30-06 스프링필드 탄을 적국인 독일의 게베어 1898과 7.92×57mm 마우저 탄의 스핏저형 총알을 만들면서 배꼈다고 전후 특허료를 보상하기도 했다. 또한 수많은 특허자료가 현대시대까지 발명가의 이름이 정확히 남아있는 등 특허법은 분명히 작동하고 있었고 실제로 증기기관의 초기 발전은 과학자들 보다는 발명가들의 영향이 컷다.
계속적인 발명과 기술혁신은 종전의 농업적인 사회와는 전혀 다른 산업사회를 출현시키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했다. 이전의 어느 시대보다 비약적으로 발전한 생산력이 인류에게 풍요를 가져다주고, 빈곤을 극복할 수 있는 수단과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인류의 발전이 점진적이고 선형적으로 이뤄졌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전근대 사회는 발전과 쇠퇴를 반복했기 때문에 유의미한 경제 성장이 전혀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농사의 풍흉만으로도 국가에 심대한 위기가 닥치는 것이 일상적이었다. 고조선 시대나 1700년의 영국이나 1년에 옷 한벌 해입으면 그럭저럭 중산층인 생활 수준이 유지되었다. 대부분의 서민은 만성적인 기아에 시달렸다. 철물은 대장장이가 한창을 두들겨서 몇날 몇주가 걸려야 겨우 하나를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은 산업의 생산성을 조금이라도 높히고 싶어했으나 사람들의 수요에 비해 공급은 항상 모자랐다.
하지만 산업 혁명 이후에는 빼곡한 상점마다 물건이 가득 쌓여 소비자를 기다리며, 과잉생산으로 인해 가격이 폭락하여 생산비용보다 아래로 떨어지고 가격조정을 위해 일부러 물건을 폐기하는 사건이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인류 역사상 겪은바 없는 풍요를 누리고 있다. 풍년은 역사적으로 식량이 풍부해지는 행운이었으나, 산업혁명 이후로는 공급량 조절을 위해 식량을 폐기처분해야하는 모순까지 나타나고 있다. 기업이나 국가는 과잉 생산된 물건을 판매하기 위해 마케팅 활동을 하거나 새로운 시장 수요를 개척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이러한 시장 수요 창출의 노력이 국가적 규모로, 그것도 부정적인 면모로 나타난 것이 바로 해외 식민지 설립이다. 바로 아래에서 설명하는 산업혁명으로 인한 제국주의의 대두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도 나타나는 것.
산업 혁명 이전에는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 식량과 재화의 생산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났으므로 인구가 늘어날수록 재화의 가격이 상승하여 인구증가를 억제하였다. 이것에 대한 이론이 바로 맬서스 트랩이다. 그러나 산업 혁명 후 인구와 함께 물자의 생산력도 기하급수적으로 늘게 되면서 인구가 증가하면서도 물가는 안정적이었다. 사실 맬서스 트랩 문서에 서술되었듯이 맬서스가 처음부터 전제조건을 잘못 잡아둔 점도 없지 않았지만, 멜서스가 살고 겪었던 17~18세기는 실제로 기술적으론 정체되었는데 인구는 지속적으로 늘어서 생활 수준, 특히 서민의 평균 영양섭취 수준은 중세보다 떨어지기도 할 정도로 만성적인 가난을 겪던 시대였다.
전 세계에 자본주의의 열풍을 불러 일으킨 이 사건은 귀족과 평민, 지주와 농민이 아닌 산업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으로의 계급 전환을 불러 일으켰다. 공장의 출현으로 수공업자들이 밥그릇을 잃게 되었고 굶어죽지 않기 위해 공장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영국을 본떠 농업 → 산업 중심의 경제라는 테크 트리를 타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유럽에서 특히 과학, 기술의 급속한 발달이 촉진되었다. 한편 인구의 도시 집중현상이 나타났고, 노동 계급의 대두로 인해 노동 계급의 권리 신장을 위한 투쟁 및 사회주의 운동이 발발하였고, 칼 마르크스를 필두로 해 공산주의가 생겨나는 등 정치체제에도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앞서도 얘기했듯 산업혁명은 본격적인 제국주의 시대를 불러왔다. 18세기 산업혁명이 서양이 비서양을 압도하는 경제력을 가지게 됐다는 것은 거의 모든 역사가들이 동의하는 사안이다. 산업혁명을 거쳐 기계화된 문물을 갖춘 서양의 군대는 산업화되지 않은 군대에 비해, 그야말로 밸런스 붕괴 수준의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이전까지 유럽의 여러 열강은 대항해시대부터 성장한 우수한 군사력을 이용해 다수의 식민지를 갖추고 이미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멀리 떨어진 다른 문명권에 대해 주도권을 갖고 우위에 설 수는 있어도 일방적으로 정복할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분열된 유럽에 비해 비서구 제국들은 통일된 시스템을 유지하여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질적인 열세를 양적 우위로 보상할 수 있었으나, 나중엔 인구빨로도 극복이 안 될 정도로 질적 격차가 벌어지자 결국 유럽 국가들의 각축장으로 전락하였다. 유럽은 다른 모든 문명권을 제압하였음은 물론이고 아프리카 밀림부터 시베리아의 원시림에 남태평양의 작은 섬들까지 정복하고 심지어 북극과 남극까지 깃발을 꽂아 말 그대로 지구 전체를 정복하였다.
기존의 비유럽 제국들은 유럽 열강들에게 야만족으로 멸시되었으며, 유럽에게 정복된 수많은 문명들은 생존과 독립을 위해 자신들의 체계를 서유럽 기준으로 근대화하였다. 20세기 중반 이후 제국주의가 해체되어 식민지들은 독립했으나, 여전히 '어느 정도 서구의 기준(민주주의, 자본주의, 인권 수준)에 맞춘 나라가 되느냐' 가 곧 국가의 선진성으로 판단된다. 산업혁명은 그 탄생으로부터 불과 200여 년만에 서구문명을 바탕으로 세계 인류의 보편문명을 만드는데 성공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