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마린 스핏파이어(The Vickers Supermarine Spitfire) MK-1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이 개발한 유명한 전투기이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프롭기'라는 별명이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이 기종을 모는 공군 조종사들은 공군 정복 맨 윗단추를 잠그지 않고 다녀도 되는 암묵적인 특혜(?)를 누릴 수 있었다.
영국의 항공기 제조사인 슈퍼마린사가 슈나이더컵 대회에서 슈나이더컵을 영국으로 가져온 자사의 경주용 항공기들을 기초로 개발한 전투기다. 스핏파이어 개발 당시 영국 공군의 전투기들은 구식인 캔버스와 나무 소재가 많이 들어간 복엽기뿐이었는데 1930년대 중반 등장한 독일과 이탈리아 공군의 전금속제 단엽전투기들에 대항하기 위해 RAF(영국 공군)에서 내놓은 차기 전투기 계획에 맞춰 등장했다.
설계 주임인 레지날드 미첼은 이미 1933년 암 진단을 받아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도 무리하게 개발을 강행, 1936년에 시제기를 띄우는 데 성공하지만 그 1년 후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한다. 이름인 스핏파이어는 불똥 말고도 수다쟁이란 의미도 있어서 개발자인 미첼은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개량을 주도한 건 조셉 스미스이다.
비슷한 시기 다른 항공기 제조사 호커에서도 자사의 허리케인을 내놓았는데 성능은 스핏파이어가 우세했으나, 슈퍼마린 사의 제조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 또 구식 항공기의 개념이 남아 있는 허리케인의 특성이 영국의 상황을 고려할 때 생산성과 정비성이 더 나은 것을 감안하여 두 항공기 모두 영국 공군의 주력기로 선정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는 최고의 선택이 되었는데, 만일 두 기체 중 어느 한 쪽만 선택되었다면 이후의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심각한 문제가 됐을 수 있다. 여담으로 동시대 경쟁기로는 브리스톨의 타입 146이 있었지만 스핏파이어와 허리케인에 비해서 성능이 영 아니올시다한 관계로 슬그머니 잊혀졌다(...)그리고 브리스톨은 열심히 보파이터를 생산했다
파생형들이 워낙 많지만, 간단하게 정리하면 Mk.1과 Mk.2에서 엔진을 교체하고 Mk.3에서 얻은 기술을 적용해서 Mk.5가 되고 여기서 고고도용으로 Mk.6과 Mk.7이 개발되고 여기서 중고도용으로 나온게 Mk.8이다. 그리고 Mk.8이 나올 때까지 땜빵식으로 Mk.5에서 엔진을 바꾼 게 Mk.9인데 Mk.8보다 더 많이 생산되었다. Mk.9에 미국에서 라이센스 생산한 멀린 엔진이 달린 게 Mk.16이다.
그리폰 계통은 Mk.3에 그리폰 엔진을 달아서 테스트한 것이 Mk.4이고 이건 나중에 Mk.21~24로 이어지는 스핏파이어 최후기형이 된다. Mk.5의 설계에 그리폰 엔진을 탑재한 것이 Mk.12고 Mk.8에 그리폰 엔진을 탑재한 게 Mk.14이고 이걸 개량한 것이 Mk.18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초반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공군도 프랑스 전선에 투입되었으나 영국 공군 전투기 부대 사령관 휴 다우딩은 보다 고성능인 스핏파이어를 수량 부족과 영국 방공망 확충을 이유로 프랑스 출전을 금지하고 허리케인과 경폭격기만을 보냈다. 이에 윈스턴 처칠은 프랑스에 전력을 투입할 것을 주장했으나, 다우딩이 결사반대했다. 이때 프랑스로 날아간 허리케인과 다른 항공기들은 프랑스가 점령되면서 타격을 입게 된다. 또한 본토 항공전이 시작되기에 앞서 됭케르크에 고립된 영국군을 구하기 위해 스핏파이어를 투입하였는데 지상군을 위해 싸우다 보니 고공에서 기다리는 Bf109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게 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영국, 독일 양국의 조종사들은 서로의 기체가 무시무시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채 잠시 휴식을 가지며 본격적인 전면전을 기다리게 된다.
프랑스의 항복으로 유럽에서 독일을 저지할 마지막 국가는 영국이 되었다. 독일 공군은 바다사자 작전을 실행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영국 상공에 전투기와 폭격기들을 출격시킨다. 이에 맞서 영국 공군은 Bf109를 비롯한 전투기들에게는 스핏파이어를, 보다 느리고 둔한 폭격기에 대해서는 고공에서 대기하고 있는 허리케인을 투입시키고, 독일이 잠시 미적거리는 동안 설치한 홈체인(레이더) 시설과 방공 시스템을 총동원하여 요격에 나선다. 전쟁이 계획대로 되는 것은 아니어서 전투기를 상대로 허리케인이 출격하거나 폭격기 사냥에 스핏파이어가 투입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이 전투에서 스핏파이어는 독일 공군 Bf 109를 상대로 대등한 성능을 과시하며 영국 상공을 지켜내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의 양 전투기의 성능을 비교하면 아래와 같다.
수평 이동 속도 및 선회력 - 스핏파이어가 우세
수평 이동 속력은 Mk.1의 경우에는 대등하지만, Mk.2는 15km/h정도 더 빨랐다. 선회력의 경우 전반적인 선회력은 스핏파이어가 우세하나, 낮은 엔진 출력으로 인해 지속 선회시 튕겨나가는 '사이드 슬립'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한편 Bf109는 전반적인 선회력은 열세이나, 수동 플랩을 잘 이용할 경우 우수한 저속 순간 선회력 덕분에 스핏파이어와 선회전을 나름 걸어볼만한 수준은 되므로 스핏파이어가 약간 우세하기는 하지만 큰 차이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이것은 일정 속력이 붙은 상태에서 선회력을 얘기하는 것이지 지속 선회전에서는 스핏파이어가 낫다.
강하능력 - Bf109 우세
당시 스핏파이어와 허리케인의 엔진인 초기형 멀린은 급강하 시 연료 공급이 단절되어 엔진이 정지하는 문제가 있었다. 이는 멀린 뿐만 아니라 독일의 유모 엔진이나 DB 600 엔진을 제외한,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모든 항공기 엔진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문제였다. 연료 유입이 단절될 정도로 고가속 급강하를 할 수 있는 전금속제 단엽기라는 개념이 이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 당시 일반적인 항공기용 연료 계통은 예전의 자동차용 가솔린 엔진과 마찬가지로 연료가 중력의 힘을 받아 카뷰레터를 통해 공급되는 방식이었는데, 급강하 중에는 연료 입장에서는 무중력 상태가 되므로 연료가 엔진으로 제대로 흘러들어가지 않다 보니 연료 유입이 단절되고 급강하 중 엔진이 꺼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정확히 말한다면 소위 "제로G 다이브"라고 불리는 최속 급강하 돌입 방식의 경우에 나타나는 문제다. 고도를 유지하다가 급강하에 들어가는 경우 보통은 조종간을 밀어 기수를 낮추게 된다. 누구나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이 경우 관성에 의해 항공기에 작용하는 중력 가속도가 1 미만으로 내려가게 되는데 ('바이킹' 계통 놀이기구에서 하강하는 순간을 생각하면 된다), 정상적인 1G에서 작동하던 카뷰레터에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1G 아래로 내려가는 순간 바로 멈춰버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급작스러운 관성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살살 기수를 내리면 정상 작동한다. 문제는, 애초에 급강하는 공격을 위해서든 도주를 위해서든 위치 에너지를 속도 에너지로 전환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동이며, 몇 종류의 급강하 방식 중에서도 조종간을 밀어 중력 가속도를 "0"으로 유지하며 낙하하는 소위 "제로G 다이브"는 순식간에 한계 속도에 근접할 정도로 엄청난 가속을 하는 급강하 방식이다. 즉, 눈 앞에서 쫓던 109 전투기가 급강하에 들어가면 스핏파이어 파일럿은 매우 천천히 기수를 낮추든, 아니면 기체를 180도 뒤집어 +G를 받는 상태에서 하강하는 방식을 취하게 되는데 후자의 경우 숙련된 조종사라면 따라가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았으나 Bf109에 비해서 훨씬 불리한 건 변함이 없다. 이 때문에 급강하 시에도 원활한 연료 공급이 가능하도록 별도의 연료 펌프를 가진 DB 600 엔진을 탑재한 Bf109만이 대전초기 급강하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었다.
사실 대전 직전 Bf109의 연료 펌프 샘플이 부다페스트에서 비밀리에 영국 항공 기술자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연료 펌프를 받은 기술자는 이것의 중요성을 깨닫고 즉시 영국 대사관을 통해 영국으로 보냈다. 그런데 이걸 받아든 영국 대사관이 연료 펌프의 중요성을 간과, 일반 우편으로 영국에 보내는 바람에 중간에 분실, 결국 영국에 도착하지 못했다.
결국 이 문제는 1941년 3월 무렵에는 여성 항공 엔지니어였던 베아트리스 실링에 의해 개발된 '미스 실링의 오르피스'라는 간단한 장치를 멀린 엔진에 추가하며 임시로 해결되었고, 이후 개량형에서는 아예 압력식 기화기를 채용하며 완전히 끝을 보게 되었다.
상승력 - Bf109 우세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의 스핏파이어보다 루프트바페의 Bf 109 E-3의 상승력이 조금 더 우수했다. Bf 109 문서 참조.
화력 - Bf109 우세
독일 공군이 전투기 주무장으로 20mm 기관포를 사용한데 반해 영국 공군은 7.7mm 기관총을 여러 정 다는 것을 선택했다. 영국 해군에서 그랬던 것과 비슷하게 영국 공군은 20mm 기관포를 장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7.7mm 여러 정을 장착했기 때문. 그러나 BOB에서 독일의 전투기, 폭격기를 잡는데 7.7mm 탄환은 종종 관통력이 부족한 모습을 보였고 경우에 따라서는 적기의 동체를 뚫지 못하고 튕겨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기총의 숫자가 많으므로 어느 정도 보완은 가능했으니 이 부분은 Bf109의 근소한 우세라고 볼 수있다. 이후 영국 공군기들도 주무장을 HS.404 기관포로 교체하고 7.7mm 기관총은 보조 무기가 되거나 아예 사용하지 않기도 했다(이 때 7.7mm 대신 사용된 것이 12.7mm 기관총이다. 둘 다 존 브라우닝의 개발품이다.).
시계(示界) - 스핏파이어 우세
Bf109는 초기형 좌석에 달린 방탄판이 후방 시계를 방해했던데 반해 스핏파이어의 말콤형 캐노피는 당시 전투기 중 상당히 우수한 시야를 조종사에게 제공했다(이 말콤형 캐노피의 우수한 시야 제공 능력은 미군에게도 호평받아서 P-51 머스탱, F4U 콜세어 등의 미국제 전투기에도 일부 채용된다.). 또한 Bf 109의 방탄판뿐 아니라 사각 형태의 캐노피는 정면 정가운데 부분을 제외하면 좌우 측면과 상부 시야각이 상당히 좁을 뿐 아니라 심각하게 왜곡하는 단점이 있다. 8분 55초부터 9분 2초까지 Bf109의 조종석 시야가 좁은 것이 보인다.
종합하자면 양 기체는 일장일단으로 거의 대등한 성능을 보였고, 따라서 양 전투기끼리의 싸움은 누가 더 우수한 파일럿인가, 그리고 누가 먼저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는가가 관건인 한끝 차이의 승부였다. 그런데 앞서 보았듯이 전투기의 성능과 파일럿의 기량은 영국 공군이나 독일 공군이나 종합적으로 큰 차이가 없었고, 결국 홈그라운드의 조기 경보 & 방공 관제의 이점을 가진 영국 공군이 폭격기 호위라는 페널티를 떠안은 독일 공군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영국이 마냥 이점만 가진 건 아니어서 숫자가 부족하고, 그로 인해서 본진이 신나게 얻어 터지기는 했다. 그러나 런던 대공습으로 이런 영국의 페널티는 감소한 반면에 항속거리가 짧았던 Bf109E형은 귀환을 위해 영국 상공에서 전투를 오래 끌 수 없다는 불리함과 조종사의 심리적 불안감이 추가된다.
결국 영국 본토 항공전은 피해를 견디지 못한 데다가 소련 침공을 계획하고 있던 독일이 먼저 떨어져나가면서 끝났고, 스핏파이어는 '영국을 구한 전투기'로 불리며 영국 국민의 사랑과 칭송을 받게 된다. 적군 항공기 파괴 숫자는 상대적으로 만만한 폭격기를 요격한 허리케인 쪽이 좀 더 많았지만, 적 전투기와 혈투를 벌인 스핏파이어가 없다면 허리케인이 폭격기를 상대하기도 전에 독일 전투기에게 당할 확률이 높았으므로 스핏파이어에 대한 고평가는 당연했다. 이 기간동안 영국은 403대의 스핏파이어를 상실했고 독일은 610기의 Bf109를 상실했다. 모든 Bf109가 스핏파이어에게 격추된 건 아니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기는 하다. 8월까지의 손실 비는 스핏파이어 219대를 상실하는 동안 Bf109는 180대를 상실했으므로 Bf109가 교환비에서 1.2:1로 약간 우세한 모습을 보인다. 한편 허리케인은 272기가 격추되는 동안 Bf109는 153대를 손실해서 1.8:1로 확실한 열세를 보였다. 그러므로 스핏파이어가 없었다면 Bf109는 여유롭게 허리케인을 학살하고 기지는 기지대로 폭격을 맞는 재앙이 벌어졌을 것인만큼 스핏파이어의 역할은 중요했다고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후반
이후 이스파노-수이자의 HS.404 20 mm 기관포를 도입하여 화력을 강화하고 여러가지 세부적인 문제점을 개선한 Mk.V형이 등장했다. Mk.V 이전에도 기관포 탑재 모델은 있었으나 초기에는 기관포의 신뢰성이 부족하여 소수 생산에 그쳤고, Mk.V도 7.7mm기관총을 주무장으로 하는 모델이 있었으나 MK.V를 기점으로 기관포를 주무장으로 하는 것이 대세가 되었다. 이렇게 개량된 Mk.V는 스핏파이어 중 최다 생산 모델이 되었다.
이 모델은 영국과 아프리카, 몰타 섬 방위 등에 투입되었고 일부는 오스트레일리아까지 배치되어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이는 신참 조종사들의 실력과 후술할 엔진 트러블이 겹쳤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당시 배치된 기체들은 아프리카 전선용으로 대형 필터를 장착한 기체였는지라 원 모델보다 비행 성능이 저하되고 습한 태평양 전선에서는 맞지 않았던 탓도 컸다. 게다가 스핏파이어 Mk.V가 배치된 시기는 스핏파이어가 최대의 위기를 맞은 시기이기도 했다. 일단 Mk.V가 배치된 이후 기존 독일기를 상대로 어느정도 우위를 잡았지만 5개월도 지나지 않은 1941년 7월부터 Fw190 A-1 형이 배치되기 시작했고, Bf109는 E형에서 진보한 F형이 배치되기 시작했다. Fw190은 비행성능상 큰 우위를 지니고 있어서 스핏파이어 Mk.V를 일방적으로 발라버리는 결과를 냈다. 그나마 Bf109F형 경우에는 F-1, 2에게는 장단점이 있는 수준이고 이후 F형에게도 어찌되었든 해볼만한 수준은 되었지만 진짜 위협은 Fw190이었다. Fw190으로 인한 피해가 워낙 커서 한동안 유럽에서 주간 작전을 중단했을 정도였으니 그 위험성에 대해서는 더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영국은 이에 대항하여, Mk.V의 동체에 신형 엔진을 탑재하는 등, 급히 개량한 Mk.IX을 1942년 7월부터 배치된다. 그러나 급조 모델임에도 불구하고 Mk.IX은 Fw190, Bf109 G-2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성능도 안정적이어서 Mk.V에 이은 두 번째 생산 대수를 자랑하는 모델이 된다. 스핏파이어의 기체 설계가 원래 빼어난 탓에, 다른 곳은 크게 손대지 않고 엔진 업그레이드만으로도 충분히 타국 주력 전투기들과 맞설 수 있었다. 그리고 후기형부터는 시계(示界, 보이는 범위)가 개선된 "눈물방울형 캐노피(tear drop canopy)"가 사용되는데, 이 캐노피는 미 육군 항공대의 P-47 썬더볼트와 P-51 머스탱에도 채용된다. 이렇게 완성된 Mk.IX는 기존에 배치된 전투기만이 아니라 그 개량형에 대해서도 성능상의 우세를 가지고 있었는데 Bf109G-6에게도 여전히 속력과 상승력에서 거의 모든 고도에서 우세를 유지했다. 이후 Bf109의 최후기형이 나오기 이전까지 스핏파이어의 우세가 유지된다.
1943년부터는 2000마력급의 롤스로이스 그리폰 엔진을 장착한 '그리폰 스핏파이어'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Mk.XII로 1943년 2월부터 배치되었으나 기존의 Mk.IX에 비해 성능상의 이점이 없어서 100여 대만 생산되었고 저공에서의 성능이 우수하다는 점을 이용하여 V1 요격에도 투입되었으나 1944년 9월 무렵에 전부 퇴역한다. 이후 고고도 성능을 개선하기 위하여 Mk.VIII를 기초로 2단 과급기가 달린 그리폰 엔진을 장착한 Mk.XIV가 1944년 1월부터 배치되기 시작하였다. Mk.XIV의 최고 속도는 722km/h을 기록하였다. Mk.XIV는 초기 생산분은 말콤 후드를 사용하였으나 후기 생산분은 버블 캐노피를 도입하여 조종사의 시야를 한층 더 개선하였다. 이 버전 또한 V1요격에 활약하여 300발 이상의 V1을 격추시켰으며 Me262를 격추한 기록도 있는데 이는 역사상 최초의 제트전투기 격추 기록이다. 이를 좀 더 개량한 것은 Mk.XVIII이며 연료 탑재량이 증가하고 기체 강도가 증가한 것 외에는 큰 차이가 없다. Mk.XIV는 이후 스핏풀로 이어진다. Mk.21~24의 경우 Mk.IV의 직계라고 할 수 있으나 개발이 지연되면서 1945년에 가서야 배치되기 시작하여 큰 활약은 없었다.
중, 후기형 모델들은 뛰어난 비행성능을 바탕으로 정찰 임무에도 투입되었다. 후방 동체에 카메라를 매립한 형태로 개조되었으며 처음에는 완전 비무장형 기체인 PR 사양을 투입했으나 이후 무장을 그대로 살려둔 FR 사양이 투입되었다. 몇몇 PR 사양은 불필요한 무장을 덜어낸 덕에 600mph(시속 963킬로미터)를 넘기기도 했는데, 이는 2차대전 전투기 중 Me163 다음으로 빠른 것이다. 당연한 소리지만 수평 비행이 아닌 급강하 중이었고, 프로펠러가 찢겨나가고 날개가 휘는 등 심한 손상을 입으면서 도달한 것이기 때문에 정상적인 비행 중에 달성한 기록이라 볼 순 없다.
스핏파이어는 대략 40종에 달하는 개조/개량 모델이 있으며, 쓸만한 함재 전투기가 부족했던 영국 해군은 스핏파이어를 함재기형으로 개조하여 항공모함에서 운용했는데 이를 시파이어(Seafire)라 불렀다. 초기형부터 후기형에 이르는 전 모델들마다 이러한 함상용 버전이 있었다. 그러나 본래 육상기가 기반이었던 기체를 개조한 형태라 초기형 시파이어들은 함재기 특유의 거친 운용 조건에서 내구성이 저하되는 문제가 있었는데다가 성능도 딱히 뛰어나다고 하기가 어렵다는 점, 그리고 거의 공대공으로만 사용이 가능하다는 점까지 겹쳐서 영국 해군은 F4F 와일드캣을 '마틀렛'으로 도입한 데 이어서 미국제 함재기들을 주력으로 사용하였다.(덕분에 영국 태평양 함대의 함재기 구성은 미국제 함재기가 영국제 함재기보다 더 많은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제일 많은 건 F4U 콜세어와 TBF 어벤저였고, 그 외에도 미국제 함재기가 훨씬 많았다. 심지어 대서양 전역의 호위 항모 함재기들도 대다수가 와일드캣과 어벤저로 채워졌다.) 미국의 F4F 와일드캣도 폭장은 없다시피하기는 하였으나 미국의 항공모함들은 영국과는 달리 함재기 수용량이 훨씬 많았고 헬캣이 나온 이후로는 헬캣에게 자리를 넘겨줬다.
스핏파이어도 무기대여법에 따라 소련에 약 1,000대 가량이 지원되었으며 주로 Mk.IX가 지원되었다. 소련의 Yak-1이나 Yak-9과 같은 전투기들도 선회력이 우수했으나, 고공에서 성능이 나오지 않는 엔진과, 쉽게 에너지를 상실하게 되는 특성때문에 스핏파이어의 우수한 선회력과 고공 비행성능에 높은 평가를 줬다고 한다. 단, 좁은 랜딩 기어간의 거리탓에 어려운 착륙과, 소련의 험악한 환경을 이기지 못한다는 점 탓에 하계용, 정예용, 고고도용으로 운용되었다. 겨울철에 엔진 예열이 안 되는 건 기본이고, 대충 평탄화하고 잔디만 깔은 급조 활주로가 대다수인 전장 특성상 제대로 이륙하지 못하고 뱅글뱅글 돌다가 대공포 같은 주변 지물에 들이박거나 아예 꼬리날개로 지상요원을 쳐 날려 버리곤 했다. 콘크리트 부어서 제대로 된 비행장을 만들자니 전선이 휙휙 바뀌어서 완공될 때쯤엔 쓸모 없어진다. 독일 기체들도 바퀴가 커지는 등 시간이 지나면서 험지에 적응하는 방향으로 개량된다. 하지만 스핏파이어에게 이런 환경은 딱 교범에 나온 전형적인 운용 불가 상황이다. 게다가 스핏파이어의 명성은 소련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저런 추태를 보이니 더욱 실망스러운 것. 하지만 소련은 호커 허리케인과 함께 영국제 렌드리스 전투기를 애지중지하며 썼는데, 왜냐하면 소련제 전투기는 MiG-3를 제외하면 고고도로 올라갈 수도 없었으며 또한 렌드리스로 온 미제 전투기인 P-39 에어라코브라와 P-40 워호크(키티호크)는 그놈의 엘리슨 엔진의 문제로 소련제보다는 높게 올라갈 수 있으나 그마저도 Bf109G와 비교하면 그저 보기좋은 표적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소련에선 CAS를 위한 저공전투가 중심이라 어찌저찌 싸우기는 했지만 고도 열세는 기본으로 깔고 들어가는지라 수적으로 압도하면서도 몇 배는 더 큰 피해를 입는 게 일상이었고, 고고도로 침투하는 독일 정찰기, 폭격기를 상대로는 렌드리스로 받아온 스핏파이어 말고는 딱히 요격할 수단이 없었다.
독일군 노획 스핏파이어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독일군은 13기의 스핏파이어를 노획했다. 대부분은 루프트바페 조종사들의 훈련용으로 사용되었으며 몇몇은 독일제 엔진을 장착하는 등의 개조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1940년 6월 1일 다이나모 작전 도중 됭케르크 상공에서 영국 공군 제 222 비행대대는 루프트바페 I./JG26 소속 Bf 109, I./JG1 소속Bf 110과 공중전을 벌이게 되었다. 제 222 비행대대의 조종사 휴 에드워드 랜스 팔커스트(Hugh Edward Lance Falkust)의 스핏파이어는 전투기나 대공포로 추측되는 것에 엔진을 맞아 프랑스 라 투케(La Touquet)에 있는 독일군이 점령한 비행장에 착륙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포로수용소로 보내져 종전 때까지 포로 신분으로 있었고, 그의 스핏파이어는 독일군이 노획해 루프트바페 도색으로 칠해지게 된다.
1940년 8월 15일 제234비행대대 소속 조종사 리차드 하드니(Richard Hardney)와 그의 스핏파이어 Mk.Ia AZ-H N9277는 루프트바페 JG53 소속 Bf 109들의 공격으로 인해 손상을 입어 어쩔 수 없이 프랑스 셰르부르(Cherbourg)에 착륙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포로로 잡히게 되고 그의 스핏파이어은 수리된 뒤 독일로 보내졌으며, 엔진을 다임러-벤츠의 것으로 교체되는 개조를 거치고 전후 행방불명되었다고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에도 스핏파이어는 2선급 전투기로 독일이나 홍콩, 기타 식민지 등에 위치한 영국군 기지에서 한동안 운용되었고 한국전쟁 때에도 함재기 버전인 FR.47 시파이어가 영국 해군 항공모함에 실려 한반도 상공에서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다. 손실은 2대, 그것도 비전투 손실로 끝났다.
중동전쟁 초기에는 이집트 등의 중동국가들이 사용하였고 이 스핏파이어에 대항하던 이스라엘의 전투기 역시 스핏파이어였다. 이스라엘군의 스핏파이어의 동료는 아이러니하게도 숙적인 Bf109의 체코 아비아제 라이센스 버전이었다.
이외에도 인도를 비롯하여 과거 영국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던 신생국들의 주력 공군기로 쓰였다.
1942년 영국 본토 항공전이 한창일 때, 슈퍼마린사는 스핏파이어에 대한 개량을 진행하고 있는데 기존의 스핏파이어의 단점을 보완한 신형 스핏파이어를 만들기로 했다. 일단 보완해야 했던 첫번째 단점은 고속에서 불리한 타원형 날개와 고속 미군 전투기에 비해 느린 속도였다. 그래서 스핏파이어 Mk XIV를 기반으로 층류익을 적용하면서 스핏파이어의 상징인 타원형 날개 끝을 자르고 신형 5엽 프로펠러를 달고 당시에 개발 중이던 그리폰 엔진을 장착하기로 했다. 화력 강화를 위해 M2 브라우닝+히스파노 혼용인 기존의 스핏파이어 Mk IX와는 다르게 올 히스파노로 무장을 통일했다. 그러나 상술했듯 그리폰 엔진의 개발이 자잘한 문제 때문에 늦어지고 1944년에 첫 비행을 했지만 그리폰 스핏파이어와 다른 게 거의 없다(...)는 아주 큰 문제가 생겼고 19대만 만들고 끝이 났다. 원래는 스파잇풀로 스핏파이어를 대체하려 했고 초도 생산분 수백 대를 생산할 생각이었지만, 전쟁이 이미 끝난 거나 다름없는 시점이라 양산 계획이 취소되었다.
굳이 비슷한 시기에 나온 최후기형인 스핏파이어 XXIV보다 나은 점을 찾아보자면 주익 설계를 바꿔서 XXIV보다 고속에서 저항이 적은 날개를 가지고 있으며, 롤 성능도 뛰어났고 순수 요격기 성향이라 후기형도 폭장이 적었던 스핏파이어와 달리 본격적인 전폭기로 운용할 수 있었다. 나름 Ta152의 진정한 맞수이자 스핏파이어의 완성형이라고도 볼 수 있는 기종이었다.그러나 제트기라는 다크호스의 탄생으로 스핏파이어 XXIV보다 생산 단가는 비싸면서 1.n배 강한 스파잇풀은 굉장히 애매해질 수 밖에 없었다.
슈퍼마린사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함재기 채택을 목적으로 이중 반전 프로펠러와 강화된 랜딩기어, 테일후크를 적용한 함재기 버전인 시팽(Seafang)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양산되었다면 Ki-94-II나 신덴과 맞붙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기 전에 일본과의 전쟁마저 끝나 버린 데다 생산 단가가 훨씬 싼 시파이어 XXXXVII와 비싸도 충분히 고스펙의 제트 함재기가 있는데 굳이 애매한 시팽으로 바꿀 필요가 없다는 이유로 호커 시퓨리에 밀려나고 결국 시팽도 18대만 만들어졌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 극한의 슈퍼 프롭기인 슈퍼마린 타입 391 슈퍼 시팽도 개발되었지만, 설계 단계에서 끝나 페이퍼 플랜으로 남았다.
이 이후, 시팽을 기반으로 제트 전투기인 슈퍼마린 어태커가 만들어지고 영국 해군의 차기 함재기로 채택된다.
각 버전별로 비행 성능이 판이하게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유럽 전선에서는 최고 속도나 상승력, 선회율 면에서 최고 수준을 달렸다. 동시기 미군 전투기들은 최고 속도는 좋지만 선회율이나 상승력은 좀 뒤처지는 편이었다. 그러나 롤(Roll : 기체를 좌, 우로 뒤집는 것) 속도가 동시기 다른 전투기들 보다 좀 둔했는데, 이 때문에 상당히 무거운 기체지만 롤은 빨랐던 미군의 P-47에게 모의 교전시 선회전에서 꼬리를 잡히기도 했다. 스핏파이어가 롤 속도가 좀 느리다고 해도 동시기 전투기들 중에 그런 수준이란 것이지 이것이 치명적인 단점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P-47이 괴악하게 롤이 빠른 게 문제... 그래서 나중에는 날개 끝 부분을 약간 잘라낸 모델을 내놓아 이 상대적으로 느린 롤 문제를 해결했다. 다만 이럴 경우 날개 면적이 줄어드는 꼴이 되어 고고도 비행성능은 좀 떨어지게 되었다. 반대로 날개 끝을 본래 형상보다 더 길고 뾰족하게 연장한 고고도 전투용 모델도 등장하였다.
스핏파이어는 아무래도 본토 방공용으로 개발된 전투기이다 보니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로는 좀 할 일이 뜸해졌다.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한 이후 독일 내의 주요 비행장이 공습받는 상황이었고 스핏파이어는 방공에 초점이 맞춰진 제공전투기라 먼 거리까지 비행하기에는 연료 탑재량이 부족하였다. 거기다 영국 공군의 폭격기 부대는 야간 폭격으로 전술을 전환했기 때문에 독일군 전투기를 상대할 일이 많이 없었다. 노르망디 상륙 이후 연합군 지상군이 필요한 것은 자신들의 머리 위를 지켜줄 방공 전투기가 아니라 눈 앞의 독일 지상군을 공격해줄 전폭기들이었는데 스핏파이어는 제공전투기라 기체 자체가 작다 보니 폭탄이나 로켓 탑재량이 적고 수랭식 엔진이라 대공포화에 비교적 쉽게 무력화되는 특징이 있었다. 그래서 이런 지상공격 임무에는 호커 타이푼이나 호커 템페스트가 활약했으며 후에 P-51 머스탱이라는 준수한 호위 전투기가 나타난 후로 머스탱에게 장거리 임무를 전담시키게 된다.
스핏파이어는 이착륙에는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했으며 이로 인해 적지 않은 조종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착륙 직전에 기수를 지면에 처박는다던가, 랜딩 기어를 지면에 처박아 파손되기도 하고 크게 바운드하여 화재 사고를 일으키거나, 앞의 특성 때문에 시파이어는 착함 갈고리를 놓치기도 했고, 택싱 조작이 아주 힘들었기 때문에 이륙 전에 기체가 뒤집히는 등 지상에서의 트러블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스핏파이어만 그런 건 아니고 랜딩이 힘들었던 점은 Bf 109가 더욱 유명하다.
또, 정비도 힘들어서 태평양 지역의 벽지에서는 관리도 힘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상에서의 트러블을 극복해도 고온 다습한 태평양 전장에서 기체를 습하고 더운 저공에서 저온의 고공으로 급상승시키면 엔진 냉각계통을 비롯한 기체의 여러 부분이 얼어붙어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지곤 했다는 문제가 있었다. 특히 기관포가 얼어서 발사가 안 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1942년 일본군의 오스트레일리아 다윈 공습 당시 A6M 상대로 38기를 손실하며 일본군 전투기 5기를 격추하는 졸전을 치른 적도 있다. 실제 격추된 건 7기 남짓이고 나머지는 연료 부족이나 부품 부족으로 인한 엔진 트러블 등의 비전투 손실이긴 하다. 거기다가 조종사들의 숙련도 문제도 크게 작용했다. 무엇보다도 당시 스핏파이어는 북아프리카 사막에서 가져온 보크스 필터 장착형이라 비행 성능이 매우 좋지 않았다.
위와 같은 사소한 문제들과 더불어 생산성 문제 때문에 마냥 좋은 전투기라고 하기에는 힘든 면도 있다. 초기에는 1기 생산에 15,000인시나 요구되었고 전쟁 후반에도 크게 개선되지 않아 13,000인시나 요구했다. 이 정도면 포드 시스템을 도입하지 않은 이탈리아의 전투기들이나 쓸데없이 정밀해서 생산성이 나쁘다고 평가받은 A6M과 동급이며, 포드 시스템의 원조인 미국 전투기들과는 비교할 수준조차 되지 못한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이러한 문제는 스핏파이어만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 있다. 웰링턴, 모스키토, 허리케인과 같은 고전적 설계의 전투기들도 동급 미국, 독일 기체들에 비해 생산성이 확연히 나빴다. 생산성만 나빴던 것도 아니고 가격도 전체적으로 더 비쌌다. 영국산 기체들의 이러한 문제로 인해 영국은 대전 중반까지도 미국산 수입 기체를 주력으로 운용해야 했다. 폭장 능력이 제한적이라는 단점도 있다.
영국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영연방 국가에서 사용했고, 미국도 P-47, P-51이 대량으로 배치되기 전에 상당수 사용했다. 그리고 소련에도 공여되어 사용했다. 전장 특성이 서유럽과 다른 소련은 스핏파이어에 대해서 좀 실망했다고 한다. 스핏파이어는 소련의 거친 환경에서는 영국에서만큼의 성능이 나오지 않았던 데다가, 소련의 옥탄가가 낮은 연료 탓에 엔진 성능 역시 영국에서 쓸 때보다 뒤처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반면 서유럽에서 쓸모 없다던 P-39에는 만족스러워 했다. 이건 핀란드에서도 마찬가지로 핀란드군은 스핏파이어는 얼어붙어 움직이지 않는다고 여름용 전투기라고 혹평한 반면 항상 작동하는 버팔로는 매우 고평가했다. 하지만 공여받은 스핏파이어를 제외하면 고공에서 싸울 수 있는 기체가 없었기에 고고도 요격기로는 잘 써먹었다. 한편 스핏파이어를 몰던 미국 조종사들 중 P-47을 지급받은 사람들의 반응은 "이딴 맥주통을 타라고? 안 타! 배째!"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국 무기가 다 그렇지만 여러 버전이 있다.(슈퍼마린 시파이어까지) 그 외에도 시제품에서 끝나기는 했지만 수상기 버전도 계획되었고 5대의 시제기가 존재했었는데 Mk. IX를 개조한 버전은 호커 허리케인보다 빨랐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수상기를 양산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 따라 취소되었고 개조된 IX형은 다시 육상기로 환원되었다.
영국인의 전설
영국인들에게는 말 그대로 나라를 구한 전투기다.
영국인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살아남은 사람들이나 군사 전문가들도 이 전투기가 없었으면 영국은 독일한테 함락당했을 것이고 제2차 세계 대전의 흐름이 엄청 달라졌을 거라고 말했고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에선 6.25 전쟁때 참전했던 F-86 세이버, 구 소련권에서는 공격기인 Il-2가 이 포지션에 있다.
전쟁 초반에 자기들 바로 머리 위로 쇄도하는 적국의 폭격기들과 전투기들을 비집고 다니며 이를 필사적으로 저지하고 그 와중에 희생까지 치렀던 모습은 당시 영국인들의 뇌리에 단단히 각인되었다.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부터 "역사를 통틀어 이토록 적은 사람(RAF 파일럿)들에게 이토록 많은 사람(영국 시민)들이 이토록 큰 도움을 받은 적은 없었다."라고 했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처칠의 칭송을 들은 영국 공군의 혹자는 "저 양반이 드디어 우리 월급을 올려주려나 보군."이라고 했다.
이러한 드라마틱한 활약에다 스핏파이어 특유의 미려한 외형 덕에 영국 파일럿들에 관한 당시 선전물에는 단골로 다루어졌다. 그 덕분에 전후 영국인들에게 스핏파이어는 단순한 전투기 이상의 존재가 되다시피했으며, 아래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영국의 대중매체에서 스핏파이어를 다루는 태도는 그야말로 각별하다.
이런 영국인들의 사랑 때문인지 오버워치 리그 런던 연고팀은 런던 스핏파이어로 지어졌다.하지만 영국인 없는 영국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약 50여년 뒤 영국을 포함하여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주요 당사국이었던 독일, 이탈리아와 스페인이 한데 모여서 함께 만든 유로파이터 타이푼을 두고 영국이 초기에 제안했던 이름 중 하나가 '스핏파이어 II' 였는데 독일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무산되었다. 타이푼도 독일에서 거부감을 가지기는 했는데 어찌저찌 타이푼이 채택되기는 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이 유로파이터 타이푼이 보이는 추태를 보면 스핏파이어라는 이름을 붙였으면 위대한 선대의 이름에 먹칠을 했을테니 안 된게 다행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