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형요새(星形要塞, Star Fort / Bastion Fort / Trace Italienne)
성형 요새(星形要塞, Star Fort / Bastion Fort / Trace Italienne)는 르네상스 시대 유럽에서 화약을 사용하는 화포와 공성포가 전장을 지배하게 되면서, 이를 이용한 공격을 방어하고자 축성되었던 요새의 한 양식이다. 포탄을 효율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성곽의 배치가 별 모양을 닮았기 때문에 '성(星)' 형 요새라고 부른다. 이러한 형태의 요새는 근대 이후 19세기까지도 활발히 건축되었으며, 그 가운데 몇몇은 오늘날까지도 제한적 용도로 관리되고 있다.
성형 요새의 공통적인 설계는 오각형, 혹은 육각형의 건축물에 돌출지점마다 포루(bastion, 배스천) 또는 능보(稜堡)라고도 불리는 성채가 설치된 형상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포루에 적의 포병을 상대할 화포를 배치하고 궁수들이나 총병들을 배치하여 적의 공격을 효율적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
흔히 보방(Vauban)식 요새로도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이러한 형식의 요새는 15세기 중반 이탈리아 전쟁을 거치면서 탄생했으며, 세바스티앙 르 프레스트르 드 보방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이탈리아에 존재했다. 본고장 유럽에서도 프랑스 정도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오히려 학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명칭은 'Trace Italienne'다. 영미권 역사서에서도 이 명칭을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다.
영문 명칭은 'star fort' 혹은 'bastion fort'이며 한국의 명칭은 일본에서 한자어로 '성형 요새'라 직역한 것을 중역한 것이다. 'bastion'도 요새로 해석되기 때문에 'Bastion Fort'는 번역하기 어렵고, 굳이 이걸 번역하겠다면 능보 요새 정도로 번역할 수는 있는데 능보라는 표현이 그렇게 흔한 표현도 아니라서 성형 요새보다는 좀 덜 매끄럽다. 중역했더라도 성형 요새보다 적합한 표현이 없다. 별꼴 요새라고 할 것도 아니고.
성형 요새 이전에 지어진 유럽의 성채들은 대부분 성벽이 비교적 얇고 높았다. 당시 화약무기는 흔치 않거나 없었기 때문에 수성전의 주력은 궁병대였고 높은 성벽은 더 먼 사거리를 확보해주고 상대 궁병대로부터 아군을 지켜주고 적 부대가 성벽을 타넘기 힘들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성곽의 형태 자체도 위협적인 공성병기가 딱히 없었던 만큼 원형 또는 원기둥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러한 성곽은 15세기 중반부터 대포가 빠르게 발달하면서 무력화된다. 성벽이 높으면 그만큼 맞히기도 쉽고 무너뜨리기도 쉬웠기 때문이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당시 오스만 제국은 난공불락이라 일컬어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삼중 성벽을 공략하는 데 대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비슷한 시기 유럽에서도 대포가 점차 널리 활용되고 있었다. 특히 100년 전쟁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이었던 프랑스가 대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프랑스인들은 야전은 물론 공성전에서도 대포가 유용함을 입증해 나가고 있었다.
대포의 발달은 당시 한창 문화적 부흥기를 구가하고 있던 당대 이탈리아 여러 국가들에게 위협적인 것이었다. 당대 이탈리아 각국은 동로마 제국과 밀접한 애증관계를 맺고 있었고, 더 나아가서는 베네치아와 제노바를 중심으로 수많은 이탈리아인들이 직간접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기존 성채가 대포 앞에 무력화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이탈리아인들에게 큰 충격과 함께 고민거리를 안겨줬다. 시간이 좀 더 흘러 1494년에는 프랑스 왕국이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하면서 이제 이탈리아인들은 대포의 위력을 몸소 체험하는 처지가 됐다. 이후로 거의 1세기 가까이 이탈리아 반도 전체가 전란에 휩싸였고 각국은 필사적으로 대포에 대응할 수 있는 축성 방식을 고안해내야 했다.
때 마침 이탈리아에서는 르네상스 문화의 사조 덕택에 이를 실현시킬 수 있는 유능한 기술자, 건축가 및 학자들이 이미 각국에 초빙되어 후원을 받거나 고용되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곧 이탈리아에서 성형 요새가 탄생하게 된 인적 배경이 됐다. 아래 전적 문단 참조.
새로운 축성 방식과 성채가 효용성을 보이면서 이탈리아 너머 유럽 각국에서도 기술자들의 수요가 폭발했다. 이후로 이탈리아에서 처음 출현한 성형 요새는 각지로 퍼져나게 됐다.
이렇게 되자 오래된 성채에도 일부나마 성형 요새의 구조를 도입하는 시도도 했다. 사진은 파리 성과 바스티유 요새.
성형 요새는 모서리마다 있는 다각형 모양의 포루가 상호 간 엄호해줄 수 있도록 설계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겹의 참호와 둔덕으로 보호되었기 때문에 직사포밖에 없었던 당시로서는 포병이 직접적으로 성벽을 때리는 것 자체부터 어려웠다. 타격했다 치더라도 성벽의 형태 자체가 낮고 두꺼웠던 데다 성벽 뒤에 흙을 쌓아올려 포탄의 충격을 흡수했기 때문에 방어력이 막강했다. 더군다나 성형 요새 자체에도 요새포가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적 포병에 대한 반격도 가능했다.
물론 포격에 대비하기 위해 낮아진 성벽은 그만큼 적 보병의 육박 강습에는 취약해졌다. 이는 해자를 더 넓게 파는 것과, 해자를 파내며 나온 토사로 둔덕을 쌓는 것으로 해결하게 된다. 또한 후술 되듯이 성형 요새는 정면 전체가 사각이 없어 보루마다 교차사격을 가할 수 있다. 따라서 보병이 요새에 강습을 가할 만한 지점은 죄다 전사자 다발지역이나 다름 없다. 벽을 넘는 난이도를 낮춘 이상으로 적병력을 죽이는 위력을 높인 구조인 셈이다.
Glacis라고 쓰여있는 부분이 성벽 앞 제방이다. 이 제방이 성벽 하단부를 완벽하게 가려주기 때문에 당시 쓰이던 직사포로 타격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상단부 뿐인데 상단부만 때려서야 보병이 진입할 틈을 만들 수 없다. 게다가 보병들이 여기를 기어올랐을 경우 산탄으로 쓸어버리기 딱 좋은 높이라서 공격측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애먹는 구조물이었다.
이외에도 성벽 밖에 다리를 걸쳐두고 별도의 작은 요새를 그 앞에 둔다거나 각종 시설물들이 옵션으로 붙어 있었다. 결국 포병대가 유의미한 타격을 주기 어려워지면서 다시금 중세 시대마냥 보병들이 성벽을 기어오르는 사태가 발생했는데 당연히도 그 피해는 엄청났다.
이 시대의 성벽의 특징을 더 하나 꼽자면 완전히 벽돌로 지어졌다는 점일 것이다. 돌로 된 성벽은 포탄에 하나가 깨어지면 그대로 성벽이 붕괴될 위험성이 있었다. 그러나 벽돌로 지은 성벽의 경우 포탄이 착탄한 부분의 벽돌만 깨질 뿐 나머지 벽돌은 온전하기 때문에 성벽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다. 이는 조선까지 전해져 수원화성을 축조하는 데에 적용되었다.별처럼 쌓지는 않았지만. 조선, 더 나아가 한반도는 벽돌이 흔히 쓰이던 곳은 아니었기 때문에 돌을 깎아서 벽돌처럼 만들어 쌓았다.
다만 내탁외축 방식의 성곽은 무려 진한시대 만리장성부터 있던 축성술이고 한국 성곽사에서도 보편적인 형태였다. 게다가 조선시대에 돌벽과 흙을 채운 벽을 상대로 포격 실험까지 한 기록이 있는걸로 보아선 자체적인 발상으로 보인다. 수원화성의 포루 또한 축조 백년전의 실학자 유형원에서 부터 시작되는, 길게 잡으면 왜란 때의 유성룡부터 시작된 조선의 자체적인 발상으로 서구의 성형요새와의 기술적 연관관계는 검증이 필요해 보인다. 성형요새의 특징은 단순히 벽돌이나 흙을 활용한 구조에만 그치는것이 아니라 발전하는 건축공학과 탄도학등의 공학과 수학적인 발전과 연구가 설계에 반영된것이며 성형요새의 특징인 별처럼 디자인된 성곽 또한 그러한 설계가 적용된것으로 이러한 특징적인 부분이나 공학적인 설계 사상이 반영되지 않았다면 기술적 연원의 상관성을 증명하는것은 어려워 보인다. 벽돌로서 성을 쌓는건 중국식 성곽의 특징이기도 하였으며 수원화성 전체를 벽돌식으로 쌓으려 했던 정약용은 벽돌 사용의 근거를 중국에서 찾았다.
베트남 응우옌 왕조 또한 수도 사이공성을 필두로 서구식 보방요새를 도입해 축조했는데 사이공성은 제1차 베트남-프랑스 전쟁때 프랑스군의 공격에 함락당했으며 프랑스군은 이를 폭약을 이용해 폭파 시켰다. 일본 또한 성형요새인 고료카쿠와 다쓰오카성을 축조했으며 고료카쿠는 보신전쟁의 최후의 격전지로 유명하다.
포루가 원형인 경우 바로 앞에 바짝 붙은 적을 걷어낼 수 없는 반면에 각진 형태라면 사각이 없다. 사각 없는 교차사격이 보병에게 날아드는 것이다. 즉, 보병이 강습해볼만한 요새 정면 전체가 전사자 다발지역으로 공격자 측에 막대한 인명 손실을 강요할 수 있다. 물론 축성이 제대로 됐다는 전제하에.
결국 공성측 역시 무작정 하는 돌격을 자제하고, 성벽과의 각도를 재어 참호를 파 들어가며 공격에 들어가게 된다. 이 작업은 공략에는 확실하지만 시간과 예산과 물자가 국가예산이 휘청일 만큼 끝도 없이 소모된다.
반면 강습은 기습적으로 성공만시킨다면 비교도 안 되게 적은 대가로 공략을 성공시킬 수 있기 때문에, 성형 요새를 공략하는 지휘관들은 기습을 통한 보병 강습으로 요새를 점령하고 싶은 유혹에 항시 시달리곤 했다. 특히 겨울철이 다가온다거나, 방어 측 구원군 또는 동맹의 참전 징후 등 시간의 압박을 받아서 어쩔 수 없이 피해를 감수하고 강습을 감행하게 된 사례도 많다.
성형 요새 공략에는 특히 공성용 박격포(지상전), 박격포함대(해전 및 상륙전)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공자측이 여러 난관을 헤쳐나가며 보루 정면에 가까운 지점까지 참호를 파는 데 성공하면 공성포를 배치할 수 있게 된다. 박격포의 경우는 직사가 아니라 곡사화기인지라, 성벽 너머 요새 내부의 시설 및 수비군과 주민들을 직접 타격하는 것이 가능했다. 대신 박격포의 사거리가 길지 않기 때문에 엄청난 노력을 들여서 수비 측의 요새포를 침묵시키고 참호를 구축해 나가야 됐다. 어찌됐든 일단 공성포가 배치되고 나면 사실상 함락까지 카운트 다운에 들어간거나 마찬가지였다. 수비측은 요새에 틀어박혀있다가 성벽 너머로 날아오는 포격을 맞으며 산산조각이 나든지, 항복하든지 그것도 아니면, 적 포대를 제거할 방법을 강구하든지 해야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성형 요새의 공략 방법을 수학적, 공학적으로 정교한 체계로 고안해내고 성공적으로 실행한 사람이 다름 아닌 요새 축조의 대가로 명성이 높은 보방 자신이다.
성형요새를 공략하는 방법. 전통적 형태의 공성전략을 이용해 봤자 막대한 손실을 당할 뿐이고 강력하고 정교해진 적의 화력과 화망을 피해 대규모의 참호 건설과 맞 포격을 위한 포격진지 건설을 통해 포위망을 형성해 공성을 했다. 타 문화권을 압도해 나가는 수준으로 발전해 나가던 서구권의 대포의 위력 앞의 고육지책이었으며 공성 전술의 변화가 강제 될 수밖에 없었다. 나폴레옹 또한 자신의 커리어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툴롱 포위전에서 저런 식으로 포진지를 축성해가며 공성을 했다.
성형 요새는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전반까지 이어진 프랑스의 이탈리아 침공 시기에 본격적으로 발달하였다. 미켈란젤로가 피렌체 공화국의 수도 피렌체 성벽에 성형 요새 형식을 도입하였고 이후에 페루치와 스카모치에 의해 개수된다. 이 설계는 1530년대부터 40년대까지 이탈리아 전 지방으로 퍼지게 된다.
1500년 피사가 프랑스와 피렌체 연합군의 공격을 받았을 당시 포병의 공격을 받아 취약해진 성벽에 토사로 방벽을 쌓은 것이 포병의 공격에 효과가 있음이 밝혀진 것이 처음으로 성형 요새의 가능성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이후 1509년 베네치아 공화국은 성벽의 높이를 절반으로 낮추고 인근에 둔덕과 해자를 둘러쳤으며 포병이 무력화된 프랑스군은 엄청난 희생을 치러가며 보병으로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뛰어난 방어력이 검증된 성형 요새는 이후 나폴레옹 전쟁 시기 까지도 그 위력을 발휘한다. 무려 3세기 조금 넘도록 그 방어력을 입증해 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형 요새도 결국 곡사포와 고폭탄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게 된다. 몇몇 성채는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이 방어진지로 사용하기도 했으나, 연합군에 곡사포와 고폭탄뿐만 아니라 공군의 폭격까지 나오자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21세기 들어 프랑스군이 아프리카 지역에 성형 요새를 다시 건설하여 거점으로 활용하는 모습이 나타나 부활했다. 현대적인 공군과 포병을 대규모로 보유하지 못한 나라에서는 성형 요새가 아직까지도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는 성형 요새의 개념을 약간만 따와 참호시설로 어레인지한 중대전술기지만 해도 악랄한 위력을 발휘했던 것에서 증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