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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 이야기

08. 작은 나라 네덜란드

작성자管韻|작성시간22.11.11|조회수62 목록 댓글 0

08. 작은 나라 네덜란드

 

 

 

 

네덜란드는 중심이 되는 중앙 국가 또는 특정 거점이 주변을 병합하면서 성장하는 것으로 정립되는 다른 국가의 역사보다는 특정 지역의 처지와 정서가 비슷한 도시들이 따로 살았다가 외부의 위협에 직면하자 도시들끼리 뭉쳐서 국가를 만든 것에 가깝다.

마그나카르타가 실질적으로 적용된 명예혁명 이후의 영국이나 프랑스 혁명 이후의 프랑스보다 더 빠르게 민주적인 사회에 다가간 국가기도 했는데 공화제와 민주제가 혼합된 정치 체제였고 정부와 주 대표와 통치자들도 상업 가문 출신이었고 실질적인 권력도 상인들과 지식인이 장악했다. 그래서 종파주의가 강한 당대 유럽에서 상대적으로는 종교적으로 관용적이었고 정치가 경제보다 우선적으로 설명되는 다른 국가들보다는 경제가 정치를 많이 결정해서 최초의 주식회사였던 동인도 회사를 세웠고 17세기에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를 세울 수 있었다.

네덜란드의 상권 장악의 시작은 북해의 청어잡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이웃 국가들도 청어잡이에 나서 쉽지 않았으나 1358년에 빌럼 뵈컬스존(Willem Beukelszoon)이라는 어부가 갓 잡은 청어의 이리를 제외한 내장과 가시를 단칼에 베어낼 수 있는 작은 칼을 만들고 소금물에 절여 통에 보관하는 통절임 방법을 고안해 경쟁 국가들의 청어 상품들을 밀어내고 네덜란드가 많은 부를 얻게 된다. 선상에서 바로 염장된 청어는 1년간 보관이 가능해졌는데 냉장고가 없었던 당시엔 획기적인 물품이었다.

청어잡이 산업이 자금원이 된 이유는 당대 유럽인들의 주요 단백질 공급원이었기 때문이다. 곡물 생산력과 목축 관련 기술이 열악했던 중근세 유럽의 현실상 양질의 단백질을 대규모로 공급할 수 있는 것은 바다에서 나는 생선, 그것도 어획량이 가장 많았던 청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종교적으로도 당시의 가톨릭은 육고기를 먹는 행위에 제약을 많이 뒀기 때문에 수도원 내에 양식장을 두고 생선을 키울 정도였다. 결국, 청어잡이 산업이 네덜란드 국가 경제의 캐시카우가 된 건 자연환경의 변화와 당대의 사회상, 인간의 식욕에 기반한 노력이 더해져서 시너지를 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후 북서유럽, 남유럽, 아프리카에 화물 무역을 하면서 상업 규모가 확대되었을 때 중앙유럽에 있는 라인강 하구의 지리적 이점과 간척 사업을 해서 해상 경로를 구축한 교통과 순수하게 운송을 위한 새로운 선박 개발과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운송 물자에는 손을 대지 않는 철저한 상도덕으로 유럽 각국의 신뢰를 받아 네덜란드의 해상 무역 규모가 성장해 한때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상선을 보유했다. 네덜란드 국적의 상선대는 최전성기에 이르렀을 때 당시 전 세계의 바다를 누비는 모든 상선의 절반 가까이나 되어 ‘네덜란드=바다의 마부’로 통할 정도였다.

자금이 많아진 상인들은 도시의 기존 관리자였던 귀족들에게서 자치권을 사들인 다음 법을 제정해 귀족의 간섭을 막고 도시의 정치 체제를 시민 자치제로 전환시켰다. 이때까지의 네덜란드는 사업에 충실한 도시 국가들이 어쩌다 보니 그 지역에 여럿 모인 것에 가까웠다.

네덜란드는 15세기 전까지는 국가라기보다는 신성 로마 제국 치하의 여러 제후국과 주교령들의 모임에 가까웠다. 14세기에는 비텔스바흐 가문이 이 중 홀란트·질란트·에노 백작을 겸했다. 그런데 14세기 프랑스의 왕 장 2세의 아들로서 부르고뉴 공국을 받은 대담공 필리프가 플랑드르의 마르그리트와 결혼하고 플랑드르 땅을 획득하면서 부르고뉴 공국에 의한 저지대 통일 사업이 시작된다. 15세기에는 대담공의 손자인 선량공 필리프가 이 지역의 제후국을 결혼 상속이나 정복으로 획득하고 비텔스바흐 가문의 재클린을 무찔러 그의 영지를 모두 빼앗았고 필리프의 손자 용담공 샤를도 정복을 계속해 지금의 베네룩스 일대와 프랑스 동부 지역을 아우르는 큰 국가로 만들었다. 이 부르고뉴 공국령의 일부로서의 저지대를 부르고뉴 네덜란드라 하고 베네룩스가 국가 형태를 갖춘 것은 이 발루아-부르고뉴 공작들의 공로가 컸다.

샤를은 명목상 존재했던 프랑스와의 주종 관계도 청산하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3세로부터 왕국의 국왕으로 임명받는 대관식을 열기로 했으나 황제가 대관식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고 부르고뉴 본토와 저지대를 연결하려는 시도는 샤를 본인이 로렌 공략 도중 전사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문제는 샤를이 워낙 갑자기 죽는 바람에 적법한 남자 계승자가 없다는 점이었다. 샤를의 유일한 자식은 딸 마리 드 부르고뉴 하나 뿐이었는데 마리의 결혼 상태도 아직 정하지 못한 터라 샤를의 전사 소식을 전해들은 프랑스 왕 루이 11세는 즉각 부르고뉴를 침공해 마리를 헨트 성에 유폐시킨 후 자신의 아들인 샤를 8세와 강제로 결혼을 시키려 했지만 마리가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인 막시밀리안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막시밀리안은 자금을 빌리고 사비까지 털어서 부르고뉴 원정에 참여하고 헨트에 입성해 마리와 결혼하였다. 분노한 루이 11세는 막시밀리안과 전쟁을 벌였으나 패배해 결국 프랑슈콩테를 제외한 부르고뉴 지방과 저지대의 피카르디는 프랑스가 차지하고 프랑슈콩테와 저지대 지역은 딸 마리가 물려받게 되었다.

이후 부르고뉴 저지대는 막시밀리안과 마리의 장남인 펠리페 1세(필립)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물려받으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필립이 카스티야의 왕 자리를 물려받고 필립의 아들 카를 5세가 스페인의 왕에 오르고 난 이후부터는 스페인의 지배 하에 있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카를 5세의 경우에는 네덜란드의 지배자가 스페인의 왕을 겸했다고 볼 수도 있다. 카를은 이후 물려받은 저지대 영지의 확장에 나서 추가로 투르네, 아르투아, 위트레흐트, 흐로닝언, 헬러 등을 확보해 저지대 지역의 17개 작위를 보유했고 1549년에는 황제 조칙을 발표해 저지대의 17개 작위를 사실상 단일 작위로서 한 명에게 상속할 것을 선언했다. 이 때부터 저지대의 17개 영지를 하나로 통합한 영토가 공식적으로 생겨났고 카를이 이렇게 만들어진 저지대를 물려주기로 결정한 대상은 카를의 장남 펠리페 2세였다.

1556년 카를이 모든 자리에서 물러나고 은퇴를 선언한 이후 합스부르크 네덜란드는 카를의 장남이자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에게 상속되었다.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얻은 펠리페 2세는 중앙 집권화에 대해 강한 의욕을 가지고 있었지만 네덜란드 지역 사회와 심각한 갈등을 빚으면서 마침내 독립 전쟁이 일어났다.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우선 자신의 이복 누이인 마르게리타(Margherita di Parma, 1522~1586)를 네덜란드 섭정에 임명했고 성직자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고 주교의 숫자를 늘리는 등 네덜란드 가톨릭 교회에 대한 일련의 개혁을 시도한다. 문제는 이것이 도시 시민들 입장에서는 고유한 자치권에 대한 침해고 귀족들의 입장에서도 사제에게 높은 자질이 요구되는 등 '왕의 폭정'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알바 공과 같은 스페인 파견 총독들의 실정과 전쟁으로 인한 부채를 해결하려고 높은 세금을 거두었고 거기에 네덜란드에 주둔한 스페인 군대의 약탈 등으로 반발이 거세진다. 빌럼 판오라녀를 위시로 한 귀족들은 처우 개선과 세금 감면 등을 요구했으나 펠리페 2세는 거부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합스부르크 충성파였던 빌럼은 1559년 홀란트, 제일란트, 위트레흐트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나, 계속되는 푸대접에 펠리페 2세를 향한 반감을 키우게 된다.

1566년 결국 참다못한 홀란트, 제일란트, 위트레흐트를 비롯한 북부 주들에서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지역의 성당과 성상 등을 파괴하는 성상 파괴 운동을 벌였고 반역으로 간주한 스페인은 대군을 파견해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강경 진압에 항의하는 에흐몬트, 호르너 같은 네덜란드의 유명 귀족들까지 체포되어 사형당하자 빌럼 판오라녀는 아내의 친정인 작센으로 도망쳤다가 1568년 군대를 이끌고 네덜란드로 귀환했다. 스페인의 강경 진압에 분노한 네덜란드인들은 빌럼의 지휘하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헤일리허를레 전투에서 처음으로 스페인군에게 승리를 거두면서 빌럼은 네덜란드의 영웅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홀란트와 제일란트 일대는 사실상 스페인의 지배가 무력화된 상황이었다.

1572년 네덜란드에서는 다시 한 번 반란이 일어났고 홀란트, 제일란트, 위트레흐트, 프리슬란트의 4개 주는 연합해 스페인에 맞서 싸우기로 결정했다. 여러 방면의 전선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데다 1575년 파산으로 인해 전쟁을 수행할 돈이 없던 스페인은 진압군에게 지불할 급료를 충당하기 위해 네덜란드에 높은 세금을 부과하고 네덜란드 각지를 약탈하면서 스페인에게 충성하던 주민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쌓이게 되자 1576년 양측은 헨트에서 평화 조약을 체결하면서 주민들은 펠리페 2세에게 충성하는 조건으로 종교적인 관용을 보장받게 되었다. 하지만 신대륙에서 들어온 금은으로 곧바로 재정을 확충한 펠리페 2세는 이것을 취소하고 독실한 가톨릭교도이자 강경 진압파였던 알레산드로 파르네세를 사령관으로 한 진압군으로 파견했고 에노, 아르투아 등 남부의 가톨릭 주들은 1579년 헨트 평화 조약을 파기한 후 아라스 동맹을 결성해 스페인에 충성할 것을 결의했다. 아라스 동맹에 대항해 홀란트, 제일란트, 위트레흐트, 흐로닝언의 4개 주는 위트레흐트에서 위트레흐트 동맹을 결성해 스페인과 아라스 동맹에 대항할 것을 결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브라반트, 플란데런 등 6개 주가 추가로 동맹에 참가해 총 10개 주가 스페인에 대항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일부 사례를 제외하면 어느 국가든 왕을 세우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고 위트레흐트 동맹의 네덜란드 역시 그랬다. 처음에는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에게 나라를 맡기고자 했으나 엘리자베스는 회의적이었고 엘리자베스의 대안으로 네덜란드는 앙주 공작 프랑수아를 국왕으로 추대했다. 프랑수아는 국왕 추대를 수락하는 조건으로 네덜란드가 스페인에게서 완전 독립을 선언할 것을 요구했고 어차피 스페인에 충성할 생각이 없던 네덜란드는 1581년 7월 26일 헤이그에서 국가 원수(Stadtholder) 빌럼 판오라녀가 주축이 되어 네덜란드 지역의 종교적 자유를 선언하고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가톨릭 신자인 프랑수아를 국왕으로 추대한다는 것에 반대의 움직임이 거셌던 데다가 스페인군 사령관 알레산드로 파르네세의 맹공으로 인해 네덜란드 측이 크게 밀려서 플란데런과 브라반트 절반을 빼앗기고 수도였던 안트베르펜까지 함락당하자 국왕 프랑수아는 네덜란드를 떠났고 지도자였던 빌럼은 1584년 가톨릭 신자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위기에 몰린 네덜란드는 다시 한 번 엘리자베스를 국왕으로 추대하려 했지만 엘리자베스는 네덜란드 측을 지원만 해줬을 뿐 거절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네덜란드는 국왕이 존재하는 왕국이 아니라 국가 원수가 다스리는 공화국 체제가 되었다. 1587년 빌럼의 둘째 아들 마우리츠 판 나사우가 20세의 나이로 군사령관 직책에 올라 네덜란드의 지도자가 되면서 네덜란드 공화국(네덜란드 7개주 연방 공화국, Republiek der Zeven Verenigde Nederlanden)이 출범하게 된다. 그러나 실상은 말로만 공화국이지 빌럼 가문이 지속적으로 국가 원수직을 겸하고 주마다 세습직 관리자가 존재했다.

마우리츠가 지도자가 될 당시의 네덜란드는 스페인 군의 공세로 고작 홀란트, 제일란트, 위트레흐트, 프리슬란트의 4개 주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마우리츠는 스페인이 영국과 프랑스와의 전쟁에 정신이 팔려 네덜란드에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하는 사이, 차근차근 영토를 되찾기 시작했다. 마우리츠의 노력으로 네덜란드는 스페인에게 빼앗긴 헬러, 흐로닝언, 오버레이설의 3개 주와 브라반트의 절반을 되찾았다.

이때 오랜 전쟁으로 인해 안트베르펜을 중심으로 한 플란데런 일대에 비해서, 암스테르담을 중심으로 한 홀란트 지역의 산업이 번성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지배하에 남아 있는 남부 지역을 되찾아야 하는가에 대해 회의감을 가지게 되었고, 1600년 플란데런을 마지막으로 공격해 본 후 남부 지역에 대한 공세를 사실상 포기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네덜란드는 림뷔르흐 일대를 제외하면 현재의 국경과 대략 일치하는 국경을 가지게 되었다.

계속되는 전쟁에 스페인은 자금 부담이 막중했고 네덜란드 역시 전쟁에 지쳤기는 마찬가지라 1609년 안트베르펜에서 양국은 12년 동안 휴전 조약을 체결했다. 네덜란드 지역은 스페인령 지역에 비해서 인구가 많이 늘어나서 이 당시였던 1609년에 네덜란드 지역의 인구는 1,500,000명이었고 스페인령 지역의 인구는 1,600,000명으로 비슷한 수준이 되었다. 같은 시기였던 1609년 네덜란드의 실질적인 수도였던 암스테르담의 인구는 70,000명으로 크게 증가해서 저지대 전체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도시가 되었다.

12년의 평화 기간 동안 네덜란드는 전 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하는 등 빠르게 발전했다. 12년의 휴전이 끝난 1621년 양국은 다시 전쟁을 재개했으나 스페인과 대조적으로 네덜란드의 산업은 발전하고 있었고 스페인은 30년 전쟁으로 인해 위그노 전쟁의 혼란을 끝내고 부활을 선언한 프랑스와도 전쟁을 치뤄야 할 상황이었다. 결국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북부 7개 주와 브라반트의 절반은 네덜란드 공화국으로서 공식적으로 독립을 인정받았다. 합쳐서 80년 동안 강력한 국가였던 스페인 제국과의 전쟁 끝에 얻어낸 독립이었다. 하지만 네덜란드 공화국은 남부 네덜란드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해야 했고 이것을 계기로 독립국을 세운 북부(네덜란드)와 스페인의 지배가 유지된 남부(벨기에 + 룩셈부르크)로 나뉘게 되었다.

한편 종교적으로 불관용적이었던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각지에서 살던 유대인과 이슬람 계열의 주민들이 종교 재판소 등에 의해 이교도로 몰려 재산을 빼앗기고 학살당하는 등 핍박을 당하자 그나마 자유로운 분위기의 네덜란드로 이주했는데 이들에게는 네덜란드인들이 종파주의를 한 발 물러나게 할 정도의 기술과 역량이 있었다. 특히 유대인들은 오랜 기간 대부업을 해 귀금속 가공 기술과 금융업에 대한 역량이 높았고 이것이 네덜란드의 해운업 발전과 맞물려 무역업을 크게 발전시켰다.

다만 이런 네덜란드도 독립 이후에는 종교적으로 굉장히 억압적이었다. 종교의 자유란 개신교 신자의 자유일 뿐이었고 가톨릭 신자에게는 종교의 자유가 없었다. 가톨릭은 1581년에 공식적으로 금지되었고 1848년에서야 네덜란드 헌법에는 근대적 의미의 종교적 자유가 명시되어 가톨릭이 해금된 것은 1853년부터다. 물론 가톨릭 신자들이 다수이던 시절에도 네덜란드는 개신교에 비교적 관대한 지역이었고 따라서 장기간에 걸쳐 개신교화가 진행된 이후에도 비록 완벽하게 개인 단위로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지는 않았지만 네덜란드 사회에는 ‘가톨릭 공동체’와 ‘유대교 공동체’ 등의 존재가 사회적으로는 묵인되어 있어 당대 유럽의 종파주의 국가들보다는 그나마 관대한 지역이었다고는 할 수 있다.

16세기 네덜란드에서는 압도적으로 가톨릭 교세가 강했다. 다만 네덜란드를 비롯한 저지대와 한자 동맹의 도시들은 상대적으로 종교에 관대한 편이여서 타 유럽 지역에 비해서는 개신교의 교세가 그나마 강한 편이였다. 그래도 개신교 신자들은 ‘허용 받는 소수’에 불과했다. 네덜란드의 독립은 중세 때부터 끊임없이 반복되는 ‘군주와 코뮌(도시 공동체)의 갈등’으로 일어난 것이다. 네덜란드 코뮌(Commune, 정치적 공동체)들의 입장에서는 펠리페 2세가 지역의 종교 문제에 관여하는 것 자체가 폭정의 표출이었고 이것은 가톨릭이냐 개신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성상 파괴 운동도 독립과는 거리가 멀다. 칼뱅파는 성상을 파괴해도 합스부르크 통치의 상징물들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리고 네덜란드의 인구 대다수를 차지한 가톨릭 신자들은 물론이고 성상 파괴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던 루터파 신자 등 대다수의 네덜란드인들은 성상 파괴에 분노했고 오히려 합스부르크에 대한 지지만 강해지게 만들었다. 네덜란드 시민들이 단결해 봉기에 나선 것은 알바 공의 가혹한 통치와 스페인군의 약탈 이후에 생긴 일이다.

1570년대부터 네덜란드 봉기의 지도자가 된 오라녀 공 빌럼은 이 전쟁을 ‘가톨릭에 대항하는 전쟁’이 아니라 ‘스페인의 지배에 대항하는 네덜란드인 모두의 투쟁’으로 보이기를 원했다. 빌럼은 본래 루터파 신자였고 개인적으로는 칼뱅파식 성상 파괴를 매우 혐오했다. 독립에 대한 열망이 가장 강한 것은 칼뱅파였고 이들은 비록 소수였지만 가장 전투적이면서도 단결도 잘 되어 있어서 네덜란드 독립 운동에서 칼뱅파의 공헌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구 다수를 차지하던 개신교 신자들’이 ‘가톨릭’에 반발해 독립을 하지는 않았다. 네덜란드가 개신교화된 것은 독립 이후 장기간에 걸쳐 천천히 진행되어 온 결과다.

독립은 했지만 영토, 인구, 자원 모두 크게 열세였고 세금 문제 이외의 문제는 합의하지 못해서 구조가 허술한 데다 스페인과의 관계도 악화되어서 네덜란드 선박의 스페인 입항이 금지당해 스페인과 무역을 할 수 없어 네덜란드의 산업이 막대한 타격을 입을 위기에 처하자 1602년 투자금 650만 길더로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고 주식을 발행해 자금을 더 끌어모은 다음 대양으로 나섰다. 동인도 회사에 최초로 자본을 모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선주였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에서 탈출한 세파르드 유대인이었다.

또한 동인도 주식회사 이외에 1609년에 암스테르담에서 세계 최초의 증권 거래소를 설립해 영국과의 국채 거래로만 매년 2500만 길더 이상의 수익을 얻었고, 은행을 만들어 다른 사업을 펼치기도 했다. 네덜란드의 금융업은 발전하기 시작했고 네덜란드에서는 불과 3%에 불과한 이자율로 돈을 빌릴 수 있었다.

네덜란드로 모여든 조선 기술자들은 제조비용은 저렴하고 짐칸은 크면서 선원은 적게 필요한 플루이트 선을 개발해 네덜란드의 해운 산업 경쟁력이 높아진다. 플루이트선의 제조비용은 영국의 배가 1300파운드일 때 800파운드에 불과했고 최종적인 운송비용은 영국과 몇 배까지 벌어졌다. 특히 네덜란드에서 건조한 플루이트 선은 네덜란드가 북해 무역의 주도권을 쥐게 해줬는데 덴마크가 셸란 해협을 지나는 상선에 세금을 부과하는 기준이었던 상갑판 면적을 좁히는 대신 중갑판과 하갑판을 넓게 설계해서 건조하는 방법으로 다른 국가의 배보다 동일 수송량 대비 적은 세금을 부과 받았다. 이렇게 엄청난 발전에 힘입어 1700년에는 해양 패권을 차지한 암스테르담의 인구도 200,000명으로 계속 증가해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여러 가지 혁신적인 체계로 네덜란드는 아메리카, 아프리카, 인도, 중국 등과의 상품 무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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