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스페인 내전(Spanish Civil War, 1936년~1939년)
게다가 외부적, 도의적 관점은 일단 재껴 놓고 보면 소련 입장에서 스페인은 어쨋든 국제 프롤레타리아의 정신적 조국으로서 대놓고 방관할순 없는데, 막상 현지 정치판엔 비코민테른 계열 독립 공산주의자,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독일 공산당을 통해 '사회적 파시스트'라 실컷 욕하던 '개량주의' 사회민주주의자, 러시아 혁명 초기부터 서로 사이좋게 폭탄 주고받던 아나키스트들이 득실거리던 막상 급한 불만 꺼지면 돌아설 게 뻔한 (코민테른의 관점에선) '이단'들이 장악할 가능성이 높은 전형적인 계륵이었다. 심지어 지리적으로도 어디 대충 소련 자체에서 낡은 물자, 예비 부대 몇개 파견하기 쉬운 가까운 나라도 아니다.
물론 이 시점에도 반혁명 5열이 산재해있다는 편집증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는 것은 별개의 얘기다. 거기에 더해 소련은 사실 러시아 혁명 때도 우크라이나에서 네스토르 마흐노의 아나키스트들과도 교전했던 적이 있었다. 내전 초 아나키스트의 정치적 본거지인 바르셀로나로 파견된 어느 코민테른 요원은 눈치없이 아나키스트들을 상찬했다가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숙청되기도 했다. 공화진영에 파견된 소련 고문, 요원들은 대외적으로는 공화파 내 제5열 숙청에 열을 올렸고 온화한 스페인 땅에서 편히 지내면서 나름 꿀을 빨았지만 사실 이들조차도 대숙청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다. 아니, 뭐 사실 자유롭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당시 주스페인 소련 대사이자 소련의 군사 지원 밑 국제여단 모집, 인민전선 내 비공산당 좌파 숙청을 주도한 볼셰비키 원로 블라디미르 안토노프옵세옌코부터 시작해서 많은 NKVD, 붉은 군대 간부들이 스페인에선 다른 비공산주의 좌파를 숙청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본국 송환되더니 본인들도 영문도 모르게 사형 or 굴라크행이 되어 버린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이런 기구하고도 비극적인 운명은 비단 소련인 참전용사 본인들뿐만 아니라 소련으로 망명간 공산당계 국제여단원, 스페인 망명객들도 상당수는 마찬가지로 해당됐다. 스페인 내전이 끝나고 몇 달 되지도 않아 갑작스럽게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으면서 어제만 해도 아주 열심히 외쳐대던 반파시스트 선전도 한동안 안 하게 되고 소련이 지금까지 스페인 공화국에게 퍼주었던 지원도 갑작스럽게 정치적 부담요소로 떨어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런 우여곡절에서 무탈하게 소련으로 복귀한 스페인 내전 경험자들은 훗날 할힌골 전투와 대조국전쟁에서 남들보다 일찍 경험한 현대 총력전의 경험을 보여주면서 전차, 전투기 에이스로 활약했다. 이 외에도 이런 스페인계 고급인력들은 냉전 시대에 소련의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외교전략에 요긴하게 쓰였다.
국가적 차원에서 진짜 '순수한' 의미로 이데올로기적 동지들을 돕자는 의도로 원조를 보낸 나라는 멕시코 혁명을 겪고 대통령 라사로 카르데나스를 필두로 한 전직 혁명가들이 집권했던 멕시코밖에 없었다. 반란 발발 직후에 멕시코가 보내준 소총 2만 정과 탄약은 정말 모든 게 부족하던 시기에 도착해서 아주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중립주의를 강경하게 밀어붙인 미국의 압력과 방해 공작, 그리고 멕시코 자체의 거리와 열강에 비하면 현저히 부족한 지원 능력 때문에 판을 엎을 만큼의 힘은 못 되었다. 그래도 멕시코는 소련처럼 장사를 하려고 들지도 않았고 내란이 끝난 뒤에 피난처도 제공해 주었다. 공화파 출신 난민들을 대거 받아 주고 이들이 사회적으로 정착할 길도 정부 차원에서 지원해 주었으며 망명 세대로 대표되는 스페인 문화와 예술이 나머지 서방세계로 퍼지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결국 1939년에 득의양양해진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제2차 세계 대전을 터뜨리기 직전에야 루스벨트와 처칠은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고 공화국을 도왔어야 했다고 이전에 보였던 두 국가의 행적을 후회하는 발언을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으며 결국 이 두 국가는 그 파시스트 세력들을 직접 맞서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으로 이전에 공화국을 돕지 않은 대가를 치뤘다.
하지만 나머지 유럽과 미국이 스페인을 그냥 버린 것은 아니었다. 정부 차원의 참가는 없었지만 개인 차원의 의용병은 다수였고 이들은 국제여단을 결성하여 국민군에 맞서 싸웠다. 국제여단군의 구성은 대부분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등의 좌파나 유대인, 미국의 경우 흑인 등이 포함된 반파시스트 운동가들이이나 단순히 스릴을 찾는 모험주의적인 동기로 참여한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폴란드, 헝가리 등 자국이 이미 파시스트들이나 우익 독재정에 넘어간 사람들은 스페인을 자국에서 싸우던 파시즘과의 전쟁의 연속으로 보았고 스페인마저 넘어가면 진짜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굉장히 치열한 투지와 사기를 보여주었다.
위 수치는 공화파 정부에 의해 정식적으로 집계된 공화파 정부 휘하에서 싸운 국제 여단원들만 친 것이고 공화파 측에서 싸우되 공화파 정부 휘하가 아니라 독립적으로 지휘 체계를 형성하여 싸운 POUM, CNT 등의 무장 노조 소속으로 싸운 아나키스트, 트로츠키주의자, 비 소련 계열 사회주의 의용군 또한 대략 5,000명 전후 쯤 된다고 보고 있다. 이 중에서 대표적인 사람이 영국 독립 노동당 소속 의용군으로 POUM 소속으로 싸웠던 조지 오웰과 아나키스트 CNT 산하 국제 의용병 부대였던 세바스티엥 퓌레 부대에 속했던 시몬 베이유.
안그래도 격렬했던 20세기 초중반의 복판에 자원해서 뛰어들어간 사람들이니 국제 여단은 종전 이후에도 전 세계 좌익 운동 사이에서 일종의 역사적 성역으로 찬양받았는데 뒷 배경이 이렇게 파란만장하니 그 운명도 기구했고 이런저런 의미 있는 일화도 많았다. 예를 들어 미국 출신 의용군으로 구성된 에이브러햄 링컨 대대의 지휘관은 하라마 전투에서 전사한 뉴욕 출신의 흑인이었던 올리버 로였는데 이 사람은 정식 미군의 역사는 아니지만 독립 국가 형성 이후 미국의 전쟁사상 최초로 유색인종이 백인 부대를 지휘한 경우로 역사에 남았다.
훗날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의 독재자가 되는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빨치산과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지도자였던 요시프 브로즈 티토, 이쪽은 사실 악명에 가까운 경우지만 슈타지의 수장이었던 에리히 밀케를 포함한 2차 대전 이후 동독의 국가 지도자 다수 등 냉전 초기 동구권의 지도자들이 본격 국제 좌파의 간판들로 명성을 쌓은 무대도 국제 여단이었다. 특히 독일 출신의 의용군으로 구성된 에른스트 텔만 대대는 훗날 나치를 청산하고 새로운 일종의 건국 이데올로기를 형성할 필요가 있었던 동독 당국에 의해 '공산주의 독일의 역사적 원류'로 격상되어 대접받았다. 폴란드에서도 국제 여단에 참여했던 이들의 상당수가 제2차 세계 대전 독일의 폴란드 점령기에 대독 투쟁에 나섰고 이들은 이후 들어선 폴란드 인민 공화국에 의해 영웅시되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위에서 보여주듯이 스페인 내전 참전 용사들에 대한 대접과 처우는 대전기 이후 냉전 시대의 지정학적 논리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일단 포츠담, 얄타 회담 이후 스탈린의 나와바리로 떨어져서 막상 현지 인민들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공산 정권이 소련군과 함께 '설립 당한' 동구권 국가에선 그나마 같은 공산주의자들끼리 때려죽이는게 허다했던 스탈린 시대 이후에는 정권 원로이자 혁명의 선구자로 존경받았으나 동구권 몰락 이후에는 폴란드, 우크라이나 등지에선 소련과 관련된 과거사 전반을 청산하는 과정에서 스페인 내전 참전 용사들도 '적폐'로 분류당해 공산정권 시절 세워진 이들과 관련된 기념비 등이 철거 논란에 휩싸이는 경우가 많다.
반면 전후 반공주의가 강하게 자리잡은 영미권 출신 스페인 내전 참전자들은 상당한 고초를 겪었다. 막상 2차대전 중에는 OSS, MI5 같은 정보기관원들도 이들의 경험과 연줄을 높게 사 한동안 특수 작전에 중용하기도 했지만 장교 진급은 일괄적으로 막으려고 했고 특히 미국의 경우 전후 매카시즘으로 인하여 취업, 주택, 여권 발급 등 각종 공민권에서 제약을 받는 등 적잖은 핍박을 겪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미국인 국제여단원들은 전후 미국 흑인 민권 운동,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 혁명 이후 쿠바 정권에 대한 봉쇄 반대, 로널드 레이건 정권 시기 산디니스타에 대한 지원 등 미국 사회 내 굵직한 반체제 시민운동 등에 뛰어들면서 그나마 냉전 시기 반공주의도 한풀 누그러진 시절까지 살아 있었던 사람들은 사회운동계 원로로 대접받게 되었다. 그나마 전후 냉전 시기에 진영 자체로는 서방권으로 들어갔지만 국내 정치에선 항상 좌익의 영향력이 막강했고 무엇보다 스페인 내전 자체와 대전기 레지스탕스 활동 와중 스페인 공화파에게 빚을 지게 된 프랑스, 이탈리아에선 스페인 참전장병들에 대한 공식적, 준공식적 대우나 사회적 입지나 성공적으로 정착한 편에 속한다.
아일랜드인 참가자가 300명 정도였는데 처음에는 아무래도 지리적+언어적 편의성 때문에 영어 화자들이 중심인 제11국제여단 영국인 대대에 편성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십몇 년 전 아일랜드 독립 전쟁 당시 IRA 소속으로 싸웠던 베테랑 혁명가들이 당시 반대편 영국군의 대민 공포 전략으로 악명 높았던 Blacks and Tans 특수부대 출신자들을 만나 버렸던 것이다! 당연히 "저런 천하의 원수들과 손잡으라고!?" 라며 노발대발했던 부대원들의 반발로 인해 아일랜드인들은 1916년 부활절 봉기의 지도자 중 하나이자 아일랜드 사회주의의 시조부쯤 되는 인물인 제임스 코놀리의 이름을 딴 코놀리 전열(Connolly Column)이란 미국계 링컨 대대 소속 독립 부대로 재편성되었다.
이 외에도 필리핀, 헝가리나 미국, 호주 국적자들이 국민파 진영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터키 국적자들이나 나라 없는 난민 신세였던 백계 러시아인들의 국민파 가담도 확인된다. 루마니아의 철위대도 군단을 보내어 국민파를 지원했다.
아일랜드의 경우 깨알 같은 에피소드가 꽤 있다. 일단 국민파에 자원한 600명은 극우파/파시즘적인 아일랜드 의용대였다. 이들은 아일랜드 공화국 성립 당시부터 정치집회당시 푸른색 셔츠를 착용했는데, 이것은 훗날 "청색 셔츠단"이라는 이름으로 길이길이 남게 된다. 물론 스페인 내전에도 같은 방식의 복장을 입고 참전했다. 그런데 전선이 꼬여서 아군의 오인사격을 한번 받더니 놀라서 그냥 본국으로 철수해 버렸다.
이탈리아 왕국군의 경우 이탈리아 지원병 군단이라는 이름으로 완편 군단 수준의 지상군을 전개하고 750대가 넘는 각종 항공기를 배치했다. 거기에다가 해군함들까지 적극적으로 투입해 국민파의 해상 작전을 지원하기도 했다. 적어도 양적으로는 단순한 간섭 전쟁 수준이 아니라 아예 전장의 일각을 당담해도 될 만큼의 파격적인 투자를 한 셈. 규모만 놓고 보면 또 다른 중요 지원국이었던 나치 독일은 그냥 단순히 발만 걸친 수준이다. 기갑차량 140대와 270문의 야포, 62대의 항공기의 지원을 받는 이탈리아군 35,000명과 모로코 레굴라레 15,000명이 45문의 야포와 70대의 기갑차량을 가지고 있었고 80대의 항공기의 지원을 받던 공화파 군대 20,000명과 격돌한 1937년 과달라하라 전역의 전과를 보면 알 수 있듯 전투력이 그렇게 높지 않았다는 건 증명되긴 했다. 대신 이탈리아는 자기네 앞마당인 지중해에서 잠수함으로 공화국으로 향하는 선박들을 격침하거나 아니면 발레아레스 제도를 기지로 삼아 바르셀로나를 포함한 스페인 동쪽 핵심지역을 공중폭격하여 공화파의 물자난을 유발하고 바르셀로나 시민들의 사기를 꺾게 하는 점에서 군사적인 기여를 했다.
이와 같은 쌍방의 개입으로 인해 이 전쟁은 각국에게 신병기와 군사전술의 실험장이 되어 버렸고 서유럽에서의 제2차 세계 대전의 막을 연 전쟁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사례가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으로 유명해진 게르니카다.
의외라면 의외지만 일본은 국민파에게 어떤 지원도 하지 않았다. 중일전쟁으로 인한 국제적 고립을 타파하기 위해 방공협정을 그 지렛대로 삼고자 하는 중이면서도 지원을 꺼렸다. 심지어 1938년 3월 5일에 순양함 발레아레스 호를 상실한 국민파 측에서 해군 전력을 보충하기 위해 일본에서 군함을 사고 싶다고 요청했을 때도 "새로 배를 건조해 달라면 해 줄 수 있지만 현재 보유한 현역 함선을 양도하기는 어렵다"는 등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끝내 팔지 않았다. 러일전쟁 시기에도 이미 구식이었던 31년식 속사포긴 하지만 오히려 공화파에 소량의 무기나마 수출하던 입장이었던 게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다.
다만 정치적으로는 일본은 확실히 국민파 편이었고 국민파도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계속 보였다.
게르니카는 바스크 지방의 도시로, 독일군 파견대인 콘도르 군단의 공습으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폐허가 되었다. 바스크 공식통계에 따르면 민간인 1,654명이 사망했다. 이 폭격을 게르니카 폭격이라고 하는데 폭격의 책임자는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이었다.
의도적인 학살이 아니라고 보는 주장
게르니카 지역은 공화군이 후퇴하는 길목에 있던 중요한 교통의 요지로서 상당수의 공화군이 방어를 위해 포진하고 있었고 폭격 목표는 민간인이 아니라 퇴각로에 있는 다리였다. 문제는 아직 기술이 부족했던 독일 공군 선도기들이 다리를 못 맞히고 주변에만 폭탄을 떨어뜨렸다는 점과 그 때문에 발생한 흙먼지 때문에 후속 폭격기들이 목표를 제대로 못 잡고 '교량이 있을 예상 위치'에 마구 폭격을 해 댔다는 점이다. 즉 의도적으로 민간인 지역을 폭격한 게 아니라 오폭이었다는 것이다.
정황을 보더라도 당시 공화군의 후퇴를 차단하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었던 만큼 후퇴로의 다리를 놓아 두고 민간인 지역을 공격해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공화군의 후퇴를 차단하는 것은 결국 실패했다.
물론 민간인 공격 자체를 의도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민간인들이 사는 도시에 피해가 발생할 것을 무시하고 함부로 폭격한 것은 사실이며 이러한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참고
의도적인 학살이라고 보는 주장
위와 같은 주장은 조금 더 보완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이 항목에서 많이 참고한 것으로 보이는 앤터니 비버의 '스페인 내전'의 해당 사건 서술을 보면
1. 다리가 목표였는데 오폭한 것이라고 주장한 이들은 콘도르 군단 전역자들이며 기상상태에 대한 그들의 증언도 틀린데다가 최초의 폭탄은 도시 중심가에 투하.
2. 다양한 종류의 폭탄 사용.(소이탄과 대인탄이 돌다리 부수는 데 필요한가?)
3. 국민파의 분리주의자들(카탈루냐, 바스크 등)에 대한 당시의 행태를 생각해 보았을 때 시범케이스로 찍었을 가능성 농후.
4. 인구 7천의 소도시에서 나오기엔 많은 사상자 수치라고 했으나 비버의 저술에 따르면 타지에서 온 피난민이 몰려 있었던 상황
으로 언급되어 있다. 물론 해당 서적에서 인용한 리히트호펜의 당시 기록에는 공화군의 후퇴 저지, 교란이 주 목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폭격으로 인한 피해나 영향 자체는 게르니카 폭격보다는 전쟁 후반기에 있었던 이탈리아 공군의 바르셀로나 폭격 쪽이 더 심했다. 하지만 독일과 달리 이탈리아는 서방세계의 인종차별적인 경향 때문에 관심을 못 받은 감이 있다.
공화파가 제대로 된 지원도 못 받고 그나마 받은 지원도 뻘짓으로 날려 간혹 자기네들끼리 싸우는 것에 반해서 프랑코는 앞서 언급했듯이 느리기는 했지만 목표지점을 결정하고 공세를 시작하면 성공했기 때문에 공화군이 장악한 지역을 하나씩 박살냈으며 1938년 2월 공화군의 결정적인 뻘짓인 테루엘 공세에 힘입어 아라곤을 점령하고 지중해까지 도달하면서 카탈루냐가 고립되어 버렸다. 공화국은 고립된 카탈루냐를 구원하기 위해 동년 7월 마지막 여력을 쥐어짜낸 에브로 공세로 최후의 도박을 벌였으나 이것 역시 처참한 실패로 끝났고 1939년 2월 버티다 못한 카탈루냐마저 함락되면서 프랑코는 마드리드와 발렌시아를 중심으로 한 남동부를 제외한 스페인 전 지역을 수중에 넣었다.
결국 공화정부 지도부는 프랑스로 도망갔고 이 시점을 기해 공화파는 사실상 붕괴되었다. 당장 소련을 등에 업은 공산주의자들이 동료들을 숙청하는 꼴을 보다 못한 공화정부 내 중도파들과 숙청으로 가장 피해를 본 아나키스트 등이 손을 잡고 프랑스에 있던 공화정부에 맞서 국내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새 쿠데타 세력은 프랑코와 평화 협상을 시도했으나 이미 승리가 확실했던 프랑코가 협상 따위에 제대로 응할 리는 없었고 결국 두 세력 다 똑같이 갈려나갔다. 따라서 더 이상 저항이 불가능했던 공화파는 프랑코에게 항복하였고 1939년 3월 28일 국민군은 수도 마드리드에 입성하였다. 그리고 4월 1일 프랑코가 대국민 라디오 연설로 내전 종결을 선언하면서 내전은 국민파의 승리와 제2공화국의 패망으로 끝을 맺었다.
내전 자체는 이렇게 프랑코의 승리로 종결되었으나 일부 공화군은 프랑스로 망명하여 계속해서 저항을 이어나갔다. 이들 망명 공화군을 가리켜 '마키(Maquis)'라고 하는데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당하자 마키는 대거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가담하였고 프랑스가 해방된 이후 이들은 다시 스페인 해방을 목표로 프랑코 정부군에 맞서 게릴라전을 벌였다. 그러나 냉전이 고착화되고 이들 게릴라를 지원해 주던 소련과 스페인 공산당이 이들을 팽하면서 고립된 이들은 195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프랑코 정부군의 진압에 의해 거의 와해되었다. 일부는 60년대까지도 살아남았다고 한다.
전쟁 자체가 스페인의 좌익과 자유주의자들의 도전에 대한 우익 보수 세력의 반동으로 시작된 만큼 쿠데타 직후부터 국민파는 끔찍하게 많은 피를 뿌렸다. 이 전쟁에서 수많은 스페인 국민들이 좌익에 가담했다는 명목으로 목숨을 잃었다. 대강 소개하자면 내전에서의 공화파 전사자가 11만, 국민파 전사자가 9만, 부상자 100만, 공습으로 인한 사망자 1만, 영양실조에 의한 사망 2만 5천, 후방 지역에서 암살이나 처형당한 상대 진영 지지자 18만 이상.
내전 이후의 처형은 확실한 수가 남아 있지 않으나 확실한 건 1975년에 프랑코가 죽는 날까지 정치적인 이유의 사형 선고는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내전 내내 국민파는 자신들이 한 지역을 장악하면 그 지방의 자유주의자, 노조 가맹원, 정치적 성향이 다른 지식인들, 공화파 진영에 친지를 둔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 싸그리 처형부터 하고 보았으며, 이러한 행위는 교회와 우익 매체에 의해 "스페인 내부의 병적 요소들의 척결과 정화"라는 축복을 받아 자행되었다. 당장 무솔리니의 사위이자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의 고위 인사였던 갈레아초 치아노 백작은 내전 종결 직후인 1939년에 스페인을 방문해 "세비야에서 80명가량, 바르셀로나에서 150명가량, 마드리드에서 200명 이상이 매일 총살 당하고 있다"고 충격을 표했으며 1940년에 스페인을 방문한 나치 독일의 한 고위 관료도 그 잔인함에 충격을 금치 못했는데 그 고위 관료가 다름 아닌 슈츠슈타펠 전국지도자 하인리히 힘러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스페인 내전이 끝나자마자 2차 대전이 터져 살아남은 자들의 운명도 파란만장했다. 내전 이후 살아남은 이들 중 많은 수가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망명했는데 그 수는 약 50만으로 추산되며 절반만이 결국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이들 중 많은 수는 프랑스에서 요주의 인물로 찍혀 수배범 신세로 근근히 살아가다가 검거되어 강제수용소에 끌려갔고 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으로 프랑스 제3공화국이 무너지고 나서 프랑코와 히틀러의 협정에 따라 스페인으로 반송되어 총살당하거나 비시 프랑스와 나치 독일 치하에서 강제수용소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에게 검거되지 않은 채 나치의 침공 속에서도 붙잡히지 않고 살아남은 망명자들은 이후 10여 년 이상 스페인의 파시스트 정부에 대한 게릴라전을 벌였다. 이 중에서 1만 3천명 가량이 비시 프랑스에 맞서는 레지스탕스에 가담해 싸웠으며 샤를 드골의 자유 프랑스 군단에도 3천명 가량이 입대하였다. 이 중에서도 자유 프랑스군 제2기갑사단 산하의 9중대(La Nueve)는 대부분 망명한 스페인 공화파 출신 병사들로 구성되었는데 1944년 파리 해방 당시 파리에 가장 먼저 입성하여 당시 해방군을 맞이하러 나온 파리 시민들은 해방군이 "에보로", "테루엘", "게르니카", "바르셀로나 1936년 7월" 등의 이름이 도장된 전차들 위에서 공화파식 주먹 쥔 경례를 한 채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면서 파리에 들어오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Los españoles antifascistas saludan a las fuerzas libertadoras 반파시스트 스페인인들이 해방군에게 경의를 표한다" 1945년 여름,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 해방 당시 수감된 공화파 스페인인들이 내건 현수막.
스페인 공화파 망명객들이 프랑스 3공 시절의 냉랭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레지스탕스 및 자유 프랑스군과 연대하여 피 흘리며 싸워 준 은혜를 잊지 않았는지 종전 이후에도 프랑스는 서방에서도 프랑코 혐오증을 상당히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샤를 드골도 개인적으로는 프랑코와 더 가까운 우익 인사였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 잔류한 망명객들을 후하게 대했고 프랑코 정권을 피하여 도망 나오는 난민들을 적극 받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남아서 활동하는 반프랑코 레지스탕스와 후일 부상한 ETA의 활동을 묵인해 주는 등 스페인 공화파와 긴밀한 사이를 유지했다. 현재까지도 매년 대통령이 직접 참가하여 치루어지는 파리 해방 기념 행사에서는 꼬박꼬박 프랑스 삼색기와 더불어 스페인 공화파의 공헌을 기리는 공화국 삼색기가 같이 진열된다.
파리 해방 기념일 행사에서 2차대전 당시 자유 프랑스군 군기들과 나란히 걸린 스페인 공화국 삼색기를 사열하는 당시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 사실 프랑스-이탈리아 좌파 정치권에선 당장 파리 시장 안 이달고부터 스페인 공화파 망명 정치인의 손녀일 만큼 스페인 내전과 역사적 연고가 이리저리 깊다.
멕시코나 아르헨티나, 과테말라, 파나마, 페루, 에콰도르 등 다른 중남미의 스페인어권 국가로 망명한 공화파 인사들은 망명정부와 망명단체를 수립하여 1975년에 프랑코가 죽고 왕정이 복고되어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이 민주화 개혁을 시행할 때까지 저항했으며 중남미 각지의 현지 좌파들에게 정치적, 전술적 교육을 해 주어 훗날 냉전 시기 중남미 좌파 운동의 부상에 숨겨진 공로자가 되었다. 단적인 예로 체 게바라가 유년기 정치적 의식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게 아버지가 매일같이 집에 불러 같이 놀던 공화파 망명객들이었다고 회고했다. 원래는 군인도 아니고 각각 의사, 변호사였던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를 비롯한 쿠바 혁명가들을 군인으로 훈련시켜 준 것도 스페인 내전 당시 실패한 공화국의 발레아레스 제도 탈환작전을 지휘했으며, 원래 본인 출신지도 독립 이전 쿠바 도독부 시절 카마궤이가 고향이었던 군인 알베르토 바요였다.
거기에다가 공화파 고위 인사 1,000명 가량은 전쟁 말기 소련으로 탈출하여 그 중에서 수백 명이 붉은 군대에 입대해서 독소전쟁에서까지 싸운 경력도 있다. 내전 당시 공화파의 가장 유명하고 명망 높았던 장군 중 하나인 엔리케 리스테르가 그러한 경우인데, 이 사람은 레닌그라드 공방전에도 참가하고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과도 협력하여 결국 스페인, 소련, 유고슬라비아라는 3개국의 군대에서 장군 계급을 딴 진귀한 기록을 새우게 되는 등 공화파 잔당의 운명은 시대의 격조와 함께 이리저리 파란만장했다. 사실 공화진영에서 고생은 비공산당계나 비네그린계가 주로 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종전 시점에서 정부 요직을 차지했던 공산당원들은 주로 타이밍 맞게 배 타고 소련으로 망명할 수 있었다. 중도 자유주의 정치인들도 소련만큼 노골적인 빽은 없지만 전쟁 이전부터 쌓아 온 커넥션도 많고 무엇보다 전후 서방의 냉전기 반공주의에서 그나마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에 주로 서방으로 많이 망명 가 적지 않은 수가 특히 학계, 문화계 중심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
가장 독박을 심하게 쓴 건 비스탈린계, 특히 아예 러시아 혁명 시절부터 공산당과 이를 갈아 오던 아나키스트와 독립공산주의 계열은 대부분 국내에서 죽든가, 프랑스로 육로로 망명했다 2차대전 발발 후 노르웨이에서 외인부대 소속으로 죽거나, 프랑스 점령 후 마우트하우젠에 끌려가거나, 비시 프랑스 정권 아래 북아프리카 수용소에서 강제노역 중 죽거나, 돌봐 주는 열강 빽 없이 사지로 몰렸다. 내전 이전엔 아나키즘과 사회노동당 좌파, 즉 비코민테른 계열 독립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던 스페인의 진보 좌파 정치지형은 이런 프랑코 정권기의 탄압과 정파별 상황에 따라 이후 나머지 프랑스, 이탈리아와 비슷하게 망명 중 처음엔 스탈린의 지령을 따르다가 유럽공산주의를 받아들인 공산당과 서방에 망명 가 있었던 사민주의 정치인, 그리고 인근 카톨릭 교회의 문화적 영향력 아래 세력을 보존할 수 있었던 카탈루냐, 바스크 지역주의자들이 대신 주류가 되었다.
프랑코는 자신의 카리스마로 군부와 정치권을 점점 장악하여 결국 독재자가 되어 1975년에 늙어 죽을 때까지 스페인을 지배했다. 프랑코 독재 치하 스페인 또한 냉전 당시 현지 좌파와 정치적 반대파 탄압에 중남미 현지의 우익 군사 독재자들에게 군사 밑 안보 고문을 파견하여 협력했으니 어찌 보면 스페인 내전은 본토에서 끝나니 냉전 시기에 옛날 식민지였던 중남미에서 이어졌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당시 국민군 주력부대 중 하나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스페인령 모로코 지역에서 징집된 병사들이었는데 이들 식민지군 병사들에 의해 자행된 살인, 강간, 약탈 등은 공화파와 관련된 민간인에 대한 의도적인 테러였다. 내전 내내 국민파와 프랑코가 전쟁과 학살을 정당화하는 명분이 중세기의 레콩키스타를 본딴 '국제 유대-볼셰비키-프리메이슨 세력으로부터 스페인을 정화하는 것'이었는데 막상 북아프리카 아랍인 병사들을 데리고 와 스페인 민간인들을 강간하고 쳐죽인 건 본인들이니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일례로 국민군에서는 붙잡은 공화정부 진영 여자들을 무어인 병사들에게 노리개로 던져주는 게 당연한 일이었고 이런 행위를 외국 기자들에게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공화파 측의 잔혹 행위도 그 규모 면에서 국민진영에 미치지는 않아도 역시 심각했다. 가장 피해를 본 집단은 가톨릭 교회였다. 근본적으로 이 당시 스페인에서 교회는 우익 지주들과 뿌리깊게 결합한 반동적 세력으로 인식 되어 좌익의 맹렬한 증오의 대상이었고 내전 이전부터 과격 혁명 세력에 의한 교회 방화 사건 등은 심심찮게 터지곤 하였다. 쿠데타가 터지자 자연히 가톨릭 교회는 국민파 편으로 서서 국민파 점령지에서 자행되는 동지들의 학살을 한치의 꺼리낌 없이 축성했고 이에 분개한 CNT, UGT, POUM 등의 혁명 세력은 눈에 보이는 교회란 교회는 속을 발랑 까 뒤집어 태워 먹고 신부들을 학살하며 감옥으로 쳐들어가 우익 인사들을 학살하는 것으로 회답했다. 조지 오웰은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마드리드에서 파괴되지 않은 교회를 겨우 2개 봤으며 그나마도 모두 개신교 교회였다면서 공화파를 빤답시고 공화파가 교회를 박해하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해서 pitiful lie라고 경멸을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