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금주법(美國 禁酒法, the prohibition law 1919~1933)
미국의 금주법(禁酒法)은 1919년 1월 16일 미국 의회에서 미국 헌법 수정 제18조 수정안을 비준하여 제정한 법이다. 주류의 양조·판매·운반·수출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였다. 하원의원이었던 짐 볼스테드가 제정했다고 알려져 있다.
알코올 중독이나 범죄를 줄이기 위한다는 것이 법의 제정 명분 및 목적이었으나, 실제로는 양조업에 종사하는 독일 이민자들에 대한 견제를 위한 것이었다. 이는 독일 잠수함의 미국 여객선 격침 사건인 루시타니아호 사건과 미국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으로 인해 미국에서 독일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금주법을 통해 독일 이민자들이 양조업을 함으로써 부를 쌓는 일을 견제하려고 한 데에서 비롯한다.
신학적 이유
1920년대 미국의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를 퇴폐적인 것으로 생각한 보수적 복음주의 또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영향력 행사도 금주법 제정의 한 배경이다. 보수적 복음주의 또는 기독교 근본주의는 죄를 인종, 성, 종교 등에 따른 차별, 생태계 훼손, 자본가의 노동자 착취, 폭력 등의 구조적인 악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음주, 흡연, 성적인 문란 등의 개인적인 문제에 한정짓는다. 청교도의 나라였던 점도 원인으로 생각되고 있다.
부작용
금주법은 알카포네가 대표적인 조직폭력배의 주류 밀거래, 무허가 술집 개업, 주류 사업 이익을 노린 폭력조직간의 살인사건 등의 부작용을 낳았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메틸알코올로 인해서 죽기도 했다. 결국 1933년 미국 서민의 환영 속에 금주법은 미국 헌법 수정 제21조에 의해 폐지되었다.
금주법(영어: the prohibition law)은 1919년 1월 16일 미국 의회에서 미국 헌법 18차 수정안을 비준하여 제정한 법이다. 주류의 양조·판매·운반·수출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였다.
알코올 중독이나 범죄를 줄이기 위한다는 것이 법의 제정 명분 및 목적이었으나, 실제로는 양조에 종사하는 독일 이민에 대한 견제를 위한 것이었다. 독일 잠수함의 미국 여객선 침몰 사건인 루시타니아호 사건과 제1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미국의 독일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금주법을 통해 독일 이민이 양조업을 통해서 부를 쌓는 일을 견제하려고 한 것이었다. 또한 1920년대 미국의 자유로운 사회분위기를 퇴폐적인 것으로 생각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영향력 행사도 금주법 제정의 한 배경이다.
1880년에서 1910년까지 미국의 양조산업은 Anheuser Busch, Schlitz, Pabst 등 전국적인 브랜드의 등장과 함께 규모는 커지면서 양조설비는 개선에 개선을 거듭하던 시기였습니다. 영세한 양조가들은 몰락하고 그리고 합병에 의해 덩치가 커지면서 전국적인 판매망과 운송시스템을 갖추어 전국을 석권하여 National brand가 되고자 하는 기업가가 핑크빛 무드에 젖어있던 그 시기에 아무도 생각치 못했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禁酒에 관한 막연한 필요성의 인식이라고나 할까요....
양조의 역사를 대략 6000년으로 생각한다면 禁酒가 필요하다고 느낀 것도 아마 양조의 역사만큼이나 오랠겝니다. 각 교회의 독립자치를 주장하던 조합교회(Congregational Church)가 앞장서서 금주모임을 만든 것이 1808년의 일이고, 1826년 보스톤에서 결성된 全美 금주협회의 회원이 3년뒤인 1829년 십만명을 넘었다 하니 금주가 필요하다고 느낀 사람들도 꽤나 많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겠습니다.
금주운동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주류판매 양조의 금지" 로서 New England 州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846년과 1855년 사이에는 Maine州를 필두로 해서 13개주가 금주를 시행하여 보았으나 결국 남북전쟁후인 1865년, 1866년에 모두 폐기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던 중 1910년 새로이 금주운동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더니 1912년에는 9개주, 그리고 4년후인 1916년 23개주가 금주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급기야는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인에 대한 히스테리가 금주를 법의 힘으로 금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1914년 시작된 1차 세계대전 초기에 미국은 중립을 지켰습니다. 그러던 중 미국의 정기항로船 Lusitania號가 독일 U-보트의 야만적인 공격으로 침몰당하면서 미국은 참전하게 되는데 1917년 4월 6일의 일입니다. 참전 나흘후인 4월 10일 "식량통제에 관한 법률"이 통과되고 그때부터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식량을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우선 위스키와 같은 증류주의 제조가 중단되었으며 맥주를 만들던 양조가와 포도주 사업자에게는 엄격한 제제가 따랐습니다. 전시 식량통제권을 부여받은 Woodrow Wilson 대통령은 그해 12월 맥주의 알콜 도수를 2.75 w/w%까지 낮추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어쨌거나 전범 독일인에 대한 증오심은 엉뚱하게 禁酒운동가를 자극하게 되어 금주 운동은 더욱 격렬하게 번지게 되고, 전시의 식량절약, 작업능률의 향상 그리고 맥주 산업을 손에 넣고 흔들고 있는 독일인에 대한 반감 등이 얽혀 금주운동을 전국화하자는 요구가 드세어졌읍니다. 급기야 미국의 양조기업에 주식을 가지고 있던 대부분의 독일출신 미국인 양조사업가들도 어쩔수 없이 찬성의 뜻을 표하고 말았습니다.
윌슨대통령의 비토에도 불구하고 발안자인 Volstead의 18차 수정안이 의회를 통과한 것이 1919년 일이었읍니다. 독일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시작된 독일인에 대한 증오심이 금주운동가들에게는 승리를, 그리고 전쟁과는 별로 관련없던 양조가에게는 파산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1919년 1월 16일 "주류판매 및 양조금지"를 주 내용으로 하는 금주법(Prohibition) 18차 수정안이 비준되었고, 1년후인 1920년 1월 19일 효력을 발생하게 되는데 법률안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미국 본토와 미국 재판권이 미치는 모든 지역에서 주류의 제조, 판매, 운반이 금지되며 상기지역으로의 수입과 동지역으로부터의 수출도 금지한다는 내용입니다.
1920년 1월20일 효력을 발휘한 금주법은 결과적으로 보기 드문 악법이었습니다. 이 법률 때문에 술을 밀수, 밀송, 밀매하는 갱조직이 날뛰게 되었으며 문자 그대로 광란의 1920년대였습니다. 금주법시대의 미국은 28대 하딩대통령의 정부하에 있었는데 잇달아 오직 사건이 터지는 등 정치적으로 대단히 부패하였고 금주법을 비웃기라도 하듯 대도시에는 무허가술집이 많이 생겼습니다. 영화 대부(代父)의 사회적 배경도 이 시대였습니다.
한편 이런 암흑기 속에서도 27년 C.A.린드버그의 대서양 횡단 단독비행은 이 시대의 청량제와도 같았으며 스포츠계에서는 홈런왕 베이브루드, 루 게릭, 잭 뎀프시와 같은 유명선수가 출현하였습니다. 문학에서는 E. 헤밍웨이, F. S. K. 피츠제럴드와 같은 대작가가 등장하고 자동차가 보급된 것도 이 시대, 주식과 여자의 스컷트가 올라가기만 한다는 말이 생겨난 것도 이 시대입니다.
금주법은 1933년 수정안 제21조에 의해 폐지되었지만, 1922년 금주법의 발안자인 Volstead가 의회선거에서 패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하더니,1929년의 대공황이 몰고 온 월(Wall)가의 대폭락으로 사실상 끝이 났습니다.
금주법은 왜 사회∙정치적 재앙이 되었나?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의회가 발의한 수정헌법 18조는 미국 내에서 ‘술의 제조, 판매, 운송’을 금지하는 법안이었다. 맥주, 와인, 증류주의 수출입도 금지되었다. 1919년 1월. 그 법안은 네브래스카가 비준에 찬성함으로 헌법에 추가되었다. 그 1년 뒤 의회는 불스테드법을 제정하여 미국 전역에서 시행했다.
허버트 후버 대통령에게 그것은 ‘숭고한 동기와 원대한 목적을 지닌 위대한 사회∙경제적 실험’이었다.
금주법(prohibition) 정신은 식민지 시대 이래 미국에 늘 살아있었다. 그러다 19세기 들어 특히 서부에서 음주와 부도덕이 불가분의 관계를 갖게 되면서 금주법 정신은 크게 부활했다.
남북전쟁 이후 금주 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난 곳은 중서부와 서부의 주들이었다. 알코올 중독으로 야기된 사회, 경제적 폐해의 직접적 피해자였던 여성들은 소몰이꾼 시대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술집 밖 거리에서 기도 불침번을 섰고 그것이 후일 풀뿌리 운동으로 발전해간 것이다. 1874년에는 기독교여성금주회(WCTU)가 알코올과의 전쟁을 선언하며 발족하여 미국 최초의 전국적인 여성조직으로 자리잡았다.
19세기 말 기독교여성금주회 회원들은 투쟁적인 캐리 네이션(1846~1911)의 지휘 아래 마침내 들고 일었다. 그들은 도끼를 들고 ‘때려부수자”를 연호하며 캔자스의 술집들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갔다. 네이션과 기독교 여성금주회 회원들은 술병, 유리잔, 거울, 테이블 등 발에 걸리는 것은 모조리 박살을 냈다.
금주법은 제정이 되긴 했지만 집행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주류 밀매’ ‘주류 밀수입자’ ‘밀조 위스키’ 같은 용어들이 새로 등장했다. 부자들은 개인 클럽처럼 꾸며놓고 암호명을 가진 사람만 입장시키는 ‘무허가 술집’을 드나들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밀조 진이 있었다. 약사들은 ‘의약용’ 알코올을 조제하기에 바빴다.
금주법에도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회사 연구자들이 있다. 그들은 알코올 중독율이 감소했고 그로인해 알코올 관련 사망률도 줄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것은 상황을 잘못 보고 하는 말이다. ‘밀조 진’에 소독용 알코올을 사용하는데서는 치사율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조직 범죄는 금주법 이전에도 존재했다. 하지만 밀주의 배급권과 밀수권의 대부분을 장악하여 조직 범죄가 힘을 더욱 증대시키는 것은 금주법 이후이다. 때는 바야흐로 시카고의 알 카포네(1898~1947) 전성시대였던 것이다.
알 카포네(왼쪽 사진)는 뺨에 흉터가 있어 스카페이스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는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으로 금주법이 발효되자 시카고에서 밀주, 밀수, 도박, 매음 등으로 돈을 벌었으며 이탈리아 마피아의 두목으로 암흑가에 군림했다.
술 마시고 싶은 욕구가 억제당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금주법은 무너진 도덕성을 회복시키려한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그 반대의 효과를 만들어냈는지도 모른다. 공직자 부패는 조직 범죄자들이 정부 관리들에게 뿌리는 수백만 달러의 뇌물과 함께 치솟아 올랐다.
지방 무허가 술집을 눈감아주는 대가로 상납 받는 담당 구역 경찰로부터 상원의원, 판사, 시장, 주지사에 이르기까지 범죄로 더럽혀진 돈을 받지 않는 관리가 없었다.
대도시들은 금주법 아래 스콧 피츠제럴드의 ‘재즈 시대’로 진입하고 있었다. 그것은 광란의 1920년대였고 밀주 진이 가득한 포켓 위스키 병의 시대였다. (결국, 금주법을 만든 수정헌법 18조는 1933년 수정헌법 21조로 폐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