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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 이야기

아일랜드(Ireland)에 대해서 알아보자

작성자김인선|작성시간13.10.07|조회수389 목록 댓글 0

아일랜드(Ireland)

 

 

 

 

 

 

북대서양 북동부에 위치한 아일랜드섬은 외부로부터의 잦은 침입을 막아내고 1921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그러나 32개 군 중에서 26개 군만이 아일랜드의 영토가 되었으며, 1937년 7월 1일 제정되고 1949년 개정된 헌법에 의하여 아일랜드공화국으로 개칭되었다.

 

정식명칭은 아일랜드공화국(Republic of Ireland)이다.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인 아일랜드섬은 대서양과 아이리시해(海) 사이에 있으며, 영국 본토 그레이트브리튼섬과는 얕은 대륙붕으로 연결되어 있다. 8세기말 침입한 노르웨이족을 1014년에 격퇴한 후, 12세기부터 700년간 이어져온 영국민의 지배에 저항한 결과 1921년 12월 6일 독립하였다. 영국-아일랜드 전쟁에서 당시 아일랜드섬의 32개 중에서 6개 군은 영국령 북아일랜드로, 26개 군은 아일랜드자유국으로 분할되었다. 북아일랜드는 카톨릭교도가 많아 한동안 종교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아일랜드'는 아일랜드 전설 속 여신인 'Ériu(현대어로 에이레 Éire)'에 'land'가 합친 것이다. 행정구역은 26개 카운티(county)로 되어 있다.

 

 

아일랜드의 자연

 

아일랜드는 자연지리 측면에서 그레이트브리튼섬과 아주 흡사하다. 지체(地體) 구조 상으로는 수직적인 기복(起伏)이 적어 가장 높은 캐런투힐산(1,041m)을 제외하면 1,000m를 넘는 산이 거의 없다. 섬 전체가 노후한 암석에 의한 연속된 구릉성 고원이 전개되는 경관이다. 홍적세(世) 빙하로 덮여 있었기 때문에 각지에 수많은 호소(湖沼)와 이탄지(泥炭地), 그리고 나무가 없는 풀밭이 많다. 너무 완만하여 기복변화가 적은 지형적 특성과 산성(酸性)을 띤 지력(地力) 때문에 농업 생산 수준이 낮다. 이 때문에 옛날부터 인구의 유출(流出)이 많은 섬으로 널리 알려져 왔다. 경작가능지는 16.82%이지만 농경지는 전체 국토의 0.03%이고 나머지는 초원 및 기타 83.15%(2005년 기준)이다. 해양성기후이지만 편서풍의 영향을 많이 받고 대서양 연안에서는 멕시코만류(灣流)의 영향이 강해 고위도에 위치하지만 비교적 따뜻하고 겨울에도 거의 눈을 볼 수 없다. 강우량은 그레이트브리튼섬보다 많지만 1년 내내 맑은 날보다 흐린 날이 많아 겨울에는 흐리거나 비가 내리는 날이 많다.

 

아일랜드의 주민

 

아일랜드소년고대 켈트인과 9세기의 노르만인의 침입으로 민족융합이 이루어졌다.

 

B.C. 9세기 경부터 유럽에서 이주해온 켈트족이 아일랜드 민족을 형성한 후 계속된 외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전통을 유지하였다. 켈트족의 이러한 전통이 너무 강하여 주민의 과반수는 고립 주택이나 소수의 농가가 산재하는 작은 마을에 거주하면서 비교적 폐쇄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문화적으로도 켈트계의 오랜 인종적 풍습과 함께 언어, 종교 등에 그 독자성을 나타내고 있다. 아일랜드어와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지만, 아일랜드어를 사용하는 주민은 소수이다.

 

종교는 아일랜드공화국에는 가톨릭교도가 88.4%이며. 그밖에 아일랜드교(3%), 기타 8.6%(2002년)이다. 여러 차례 유럽을 휩쓴 개혁의 물결도 아일랜드에는 미치지 못하여 ‘옛 유럽’이 오랫동안 보존되어 왔다. 인구분포는 북동부에 가장 조밀하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갈수록 희박해진다.

 

 

아일랜드의 역사

 

게일인의 십자가고대 아일랜드 게일인의 유적지로 먼스터주의 캐슐에 소재한 성당의 십자가, 가운데 원이 있는 독특한 형태이다.

 

아일랜드섬의 선주민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BC 8000년경부터 이미 거주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BC 900~BC 150년 사이에 켈트계 종족이 세 차례에 걸쳐 대륙에서 건너와 여러 개의 부족국가를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첫 번째로는 BC 9세기경 고이델족이란 이름으로 청동기시대의 문화를, 두 번째로는 BC 4세기경 군대적 조직을 가진 브리튼족으로 철기시대의 라틴문화를, 세 번째로는 BC 1세기경의 벨가에족으로 이경문화(犁耕文化)를 전파하였다. 그후 A.D. 8세기부터 노르만족, 이른바 바이킹족의 아일랜드 침입이 계속된 후 1014년까지 이들이 연안 일대에 정주하면서 켈트인과 융합·동화되어 아일랜드인의 조족(祖族)을 형성하였다.

 

5세기에 성(聖)패트릭이 전한 가톨릭교가 급속히 전파되고, 아울러 신학(神學)을 비롯한 학문 연구가 활발해졌다. 그러나 12세기 후반 헨리 2세 시대 이래 영국인의 침입이 이루어져 아일랜드인은 점차 영국에 예속화되어 갔다. 하지만 영국의 국교가 이 섬의 주민에게 강요되자 아일랜드 민중은 반항하기 시작하였다. 엘리자베스 여왕, 제임스 1세 등 영국 왕실은 이들의 반항을 철저하게 무력으로 억압하는 동시에, 완강하게 저항하는 북부 얼스터 지방에서는 토지를 몰수하여 본토로부터의 영국인 이주와 정착을 강행하였다.

 

영국 본토에서의 구교와 신교의 내분 과정에서 청교도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한 크롬웰은 구교도인 아일랜드인을 철저하게 진압해서 토지를 몰수하여 영국인에게 분배하였다. 그리하여 영국인 지주 아래 아일랜드인은 비참한 소작농(小作農)으로 전락되어 유명한 ‘아일랜드의 빈곤’이 시작되었다. 이때문에 영국의 지배에 대한 아일랜드인의 민족주의적 저항은 19세기에 들어와서 갑자기 고조되어 아일랜드 분쟁은 영국을 괴롭히는 큰 문제의 하나가 되었다.

 

이미 1801년에는 영국과의 합병이 실현되어 영국 의회에 아일랜드 의원(議員)이 참가하고, 1829년에는 구교도 해방법이 성립되어 구교도에 대한 차별 대우가 없어졌지만, 민족운동은 자치권과 토지문제 해결을 요구하면서 D.오코늘의 청년아일랜드당(黨)과 아일랜드 민족주의 비밀결사인 페니언단(團) 등의 등장과 활약으로 이어졌다.

 

한편, 영국 의회는 1886년과 1893년에 아일랜드 자치법안을 상정(上程)하였으나 성립시키지 못하고 1914년에 와서야 통과시켰다. 그렇지만 이미 정착의 역사가 오래된 영국계 신교도가 많은 아일랜드의 얼스터지방 주민은 이에 반대하여 자치가 실현되지 못한 채 제1차 세계대전을 맞이하였다. 마침내 1916년 4월 신페인당(黨) 등을 주축으로 한 더블린의 무장봉기(부활절봉기)가 대대적으로 발생하고 무력으로 진압되었지만 이는 독립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아일랜드 문제가 재연되었으나 영국 본국이 제안한 얼스터지방의 분리, 아일랜드 자치령이라는 타협안이 승인되어 1921년 12월 아일랜드 자유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자치령이라고는 하지만 외교, 군사, 경제 등의 실권을 영국 본국 정부가 장악하였기 때문에 1932년 총리가 된 데 발레라는 완전독립을 위해서 영국 본국 정부와 항쟁을 계속한 끝에 1937년 신헌법을 제정하고 국호(國號)를 '에이레'로 정하여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영국 본국도 제2차 세계대전 전야(前夜)의 절박한 국제정세 때문에 사실상 이것을 인정하였다. 그후에도 형식상으로는 여전히 영국연방에 속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8년 헌법을 개정하고 다음 해인 1949년 부활절봉기 33주년을 기념해서 국명을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개칭하고 연방에서 이탈하여 완전독립을 이루었다.

 

영국 본국의 일부인 얼스터지방에는 신교도와 구교도 간의 무혈투쟁과 테러가 계속되었으나 정치적 타협으로 안정되어 가고 있다. 2006년에는 1998년에 승인된 굿플라이데이 협정에 의거한 영국과의 북아일랜드 해결을 위한 앤드류협약이 실현되었다.

 

 

아일랜드의 정치

 

아일랜드 대통령 집무실

 

아일랜드의 정체는 1937년 제정된 헌법에 따라 공화제이며 정부형태는 대통령제(임기 7년, 연임 가능)가 가미된 의원내각제이다. 국회는 상원·하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원의 의원은 임기 5년이며, 총60석 중 11명은 총리 지명, 49명은 직능분야와 대학교수 중에서 선출한다. 하원은 166석이며 임기는 5년이다. 정권은 독립 이래 공화당이 장악하여왔으나, 1982년 11월의 총선에서 공화당이 하원 의석의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하여 통일아일랜드당(黨)이 노동당과 연립정부를 수립하였다. 1997년부터는 공화당과 진보민주당간 연립내각이 구성되었다. 대통령은 1997년 11월 선출된 메리 매컬리스(Mary Mcaleese)이며 재선(2004.11. 재선) 에 성공하였다. 총리는 2007년 선거 이후 버티 아헌(Bertie Ahern)이 지명되었다. 상원의 의석 분포는 공화당(Fianna Fail) 30석, 통일아일랜드당 (Fine Gael) 15석, 노동당 5석, 진보민주당 4석, 독립당 및 기타 6석이며, 하원의 의석 분포는 공화당 78석, 통일아일랜드당(Fine Gael) 51석, 노동당 20석, 신페인당(Sinn Fein) 4석, 녹색당 6석, 진보민주당 2석, 기타 5석 등이다.

공화당과 아일랜드는 북아일랜드의 6주(州:영국령)를 국가 영토에 포함할 것을 헌법으로 규정짓고 있으며, 6주의 귀속을 둘러싸고 지금도 영국과 분쟁을 계속하고 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외교정책은 평화적 수단으로 전(全)아일랜드의 정치적 통합을 달성하는 것이다. 1998년 4월 관련 정당들이 평화합의에 합의함으로써 1999년 12월 27년 만에 자치정부(북아일랜드 의회 집행위원회)가 발족했다. 그러나 그후 과격파조직의 무장 해제문제를 둘러싸고 신교도와 구교도간 대립이 다시 발생하여 2001년 7월 적극적 평화추진자인 자치정부 총리 트린불이 사임했다. 10월 이후 IRA(가톨릭계 과격파 무장조직)가 무장 해제에 우호적인 자세를 나타내어 2001년 11월 트린불이 총리에 재선되었다.

 

1955년에 UN(United Nations:국제연합)에는 가입했고 1973년에 덴마크, 영국과 함께 유럽연합에 가입하였다. 병역은 지원제이고 군사비 지출은 GPP의 0.9% (2005년 추산)이다.

 

 

아일랜드의 경제

 

아일랜드의 최근 경제 발전은 괄목할 만하다. 1995년부터 2006년의 지난 10년 간 평균 6%의 경제 성장률을 보여 작은 국가이지만 현대화된 대외무역 위주의 경제로 도약하였다. 과거 근대공업이 발전한 서유럽 제국과 비교하여 보면 유럽의 서쪽 변두리라는 불리한 지리적 조건, 다년간의 영국 지배, 전통산업인 농업의 척박한 토지 및 부재지주 제도 등으로 말미암아 후진적 처지가 당연시되었지만 1960년대부터 과감한 외자도입, 무역 의존적인 산업 정책으로의 전환에 힘입어 눈부신 성과를 이루어내었다.

 

유럽 내에서는 룩셈부르크 다음으로 소득수준이 높은데, 이는 지난 십여년간 물가와 임금 상승을 억제하고 정부 지출을 줄이며 노동력을 숙련시키는 한편 외국 투자를 유치한 결과이다. 2002년 유럽연합의 11개국과 함께 유로화를 채택하였다. 아일랜드는 유로 원가맹국으로 1993년 후반부터 경제가 매우 호조를 보였으며, 재정수지도 1997년에 흑자로 변했다. 이미 소득수준도 1996년에 영국을 추월하고 2000년에는 EU(유럽연합) 평균치의 115%에 달하였다.

 

대외무역은 산업구조의 변화에 따라 바뀌어, 가축과 낙농제품의 수출총액은 감소하고 공업제품이 증가하는 추세이다. 주요 수입품은 기계, 각종 기기, 컴퓨터, 화학품 등이다. 2006년 수출 국가별 비중은 미국 18.8%, 영국 17.4%, 벨기에 15.9%, 독일 7.5%, 프랑스 5.6%, 이탈리아 4.1% 등이며 주요 수출품은 기계 및 장비, 컴퓨터, 화학제품, 의료제품 등이다. 수입국 비율은 영국 37.3%, 미국 11.6%, 독일 9.5%, 네덜란드 4.6% 등으로 주요 수입품이 자료 처리 장비, 기타 기계류, 석유화학제품,섬유, 의류 등이다.

 

 

아일랜드의 산업

 

아일랜드의 증기트랙터내연기관이 발명되기 전에는 증기트랙터가 소나 말 대신에 농사일을 하였다.

 

지난 30년 간의 경제 발전에 의하여 아일랜드의 산업별 GDP 구성 비율(2002년 추산)은 농업 5%, 공업 46%, 서비스 49%로서 공업의 비중이 앞도적으로 높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곡물의 산출은 대체로 부진하고 귀리, 밀, 보리, 감자, 사탕무 등의 주요 작물 중에서 밀은 비교적 비옥한 동부지방에 국한되어 있다. 보리는 맥주, 위스키 공업의 원료로서, 사탕무는 사료 및 설탕의 원료로서 중요하다. 목축은 지금도 가장 중요한 산업 중의 하나이며 소, 양, 돼지 등의 사육이 성하다. 공업은 산업 발전에 따라 전자, 컴퓨터, 기계, 금속, 조선, 화학의 비중이 높아졌으며 전통적인 농산물의 가공공업인 맥주, 위스키 등의 주조업, 버터, 베이컨, 연유 등의 식품공업, 기타 모직물공업, 피혁공업 등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아일랜드의 교통

 

오코넬 다리O'Connell bridge 1880에 지어진 다리. 더블린 도시를 남북으로 가르는 liffey river에 있다. 오른쪽은 더블린 중하층이 사는 북쪽, 왼쪽이 잘사는 사람들의 거주지인 남쪽이다.

 

아일랜드의 육로 교통은 국토의 동단에 위치한 수도 더블린을 중심으로 철도와 도로가 방사상으로 뻗어 있다. 그랜드 운하와 로열 운하가 더블린을 중심으로 하여 서쪽 방향으로 뻗어 있으며, 운하에 의하여 내륙평원은 사방으로 연결된다. 더블린은 아일랜드의 현관으로 항만과 공항시설이 우수하다. 1990년대 중반 이후 경제의 고도성장과 더불어 차량이 증가하고 인구 이동이 빠른 속도로 높아졌으나 도로망이나 대중교통수단의 확충이 뒤따르지 못해 교통사정은 상당히 열악한 편이다. 2006년 공항은 36개소이며, 철도 총연장은 3,237 km로서 이중 협궤가 1,365km, 광궤가 1,872 km이다. 도로 96,602 km는 포장되어 있는데 고속도로는 200km에 불과하다. 콜크, 더블린, 뉴로스, 워터포드 등은 항만으로 양호하며 다소의 선박을 보유하고 있다. 인터넷호스트수는 238,191개 (2006년)이며 사용자수는 206만명(2005년)이른다. 전체 인구의 90%에 해당되는 421만명이 휴대폰 사용인구이다.

 

아일랜드의 사회

 

아일랜드 국민은 90% 이상이 로마가톨릭교도로 종교가 주민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히 크다. 대체로 국민성은 보수적이지만 쾌활하고 친절하며 별로 형식을 따지지 않아 쉽게 사귈 수 있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음식물에 대해서는 완고함과 보수성을 지니고 있다. 지난 700년 동안의 영국 지배 영향이 현재도 뚜렷하게 남아 있으나 국민들은 영국인에 대한 석연치 않은 감정을 마음 한구석에 품고 있으며, 경제를 포함한 모든 면에서 영국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바라고 있다. 이때문에 아일랜드 국민들은 인권이나 난민 등 범세계적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 각종 비정부간 기구(NGO) 활동에 직접, 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중앙집권적 전통이 남아 있고 계층과 지역간의 소득차이가 크며 종교축제, 휴일 등을 철저히 지킨다. 교육제도는 6세부터 15세까지(초등학교와 중학교에 해당) 의무교육이 실시되고 있으며 15개의 종합학교와 24개의 지역학교가 있다. 일반학교와 병행하여 245개의 직업학교가 있고 그외에 8개도에 지역기술학교가 있다. 종합대학으로는 1908년에 설립된 아일랜드 국립대학교(4개의 종합대학교로 구성)와 1591년에 설립된 트리니티 칼리지 이외에 리메릭대학교, 더즐린 시립대학교가 있다.그외 전국에 14개의 기술대학(Institute of Technology)이 있다.

 

 

아일랜드의 문화

 

앰버서더 극장1784년에 지어졌다. 더블린의 공연의 메카이다.

 

예이츠(W.B.Yeats), 버나드쇼(George Bernard Shaw), 베케트(Samuel Beckett)가 노벨상을 수상한 이후 아일랜드는 두번째 문화부흥기를 누리고 있다. 아일랜드의 가장 저명한 시인이자 얼스터 지방의 서정시로 유명한 시무스 히니(Seamus Heaney)가 199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제임스 죠이스 및 시머스 딘도 널리 알려져 있다. 아일랜드에는 션 노스(sean nos)라는 민요가 있는데 아일랜드 민속위원회에 의해 많은 수의 곡이 수집되었다. 대중 음악 분야는 컨트리음악과 록 음악이 성행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팝 음악가로는 유투(U2), 밴 모리슨(Van Morrison), 엔야(Enya), 시네이드 오코너(Sinead O'Connor), 크랜베리스(the Cranberries), 보이존(Boyzone) 등이 있다.

 

아일랜드에서는 축구, 럭비의 열기가 강하여 도시별로 클럽이 운영되고 있다. 축구의 경우 1990년 월드컵축구대회에서 8강에 진출하였으며 1998년 16세 이하 유럽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였다. 육상분야에서는 초기 올림픽에서 많은 메달을 획득하였으며 여러 개의 세계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유명한 올림픽 우승자로는 팻 오캘러헌(Pat O'Callaghan), 보브 티스덜(Bob Tisdall), 로니 딜레이니(Ronnie Delany) 등이 있다. 국민들은 국제적 스포츠는 아니지만 아일랜드의 고유한 스포츠인 아일랜드식 하키 헐링(Hurling), 겔릭축구(Gaelic football), 여성이 하는 헐링인 카모기(camogie) 등을 널리 즐긴다. 한편, 아일랜드 정부 차원에서 아일랜드 고유의 언어(Gaelic)와 문화의 보급 및 확대를 위해 적극 노력하고 있으나 효과는 크지 않다

 

 

아일랜드의 대한관계

아일랜드는 1955년 UN(United Nations:국제연합)에 가입한 이래 UN에서 영국과 공동보조를 취하여 한국을 지지하여 왔으며, 한국은 1961년 8월 유럽 친선사절단이 아일랜드를 방문함으로써 아일랜드와 첫 외교 접촉을 가졌다. 이어 한국은 1967년 11월 1일 아일랜드 정부가 재한(在韓) 아일랜드 국민에 대한 영사보호업무를 영국대사관에서 대행하도록 하여달라는 요청을 수락한 바 있으며, 양국의 국교는 뒤늦게 1983년 10월 7일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그후 1987년 7월 10일에는 주아일랜드 한국대사관을, 1989년 9월 2일에는 주한국 아일랜드대사관을 설치하였다.

양국의 주요 인사교류를 보면 아일랜드에서 1997년 4월 하원의장 신 트레시, 2000년 총리 버티 아헌이 한국을 방문하였다. 한국에서는 1990년 국무총리 강영훈, 1991년 국회의장 박준규, 상공장관 이봉서, 2001년 국회부의장 김종호, 서울시장 고건, 2003년 성경륭 귝가균형발전위원장 등이 아일랜드를 방문하였다. 양국은 1989년 비자면제협정, 1990년 이중과세방지협정, 1994년 경제·산업·과학·기술협력협정, 1999년 운전면허상호인정 서신 교환 등을 체결하였다.

 

2003년 대한(對韓)수입은 6억 4600만 달러, 대한수출은 6억 6400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반도체 등 전자부품, 제약원료 및 의약, 통신기기 등이며, 수입품은 컴퓨터부품 등 전자부품, 자동차, 기계류, 화학공업제품 등이다. 2006년 11월 기준 아일랜드 거주 재외국민수는 약 1,000여명이며, 현지 교민은 많지 않고, 단기간의 어학 연수생 및 유학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 기업은 금융업, 항공기 리스업, 비디오테이프생산 등의 업종이 진출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일랜드의 대한관계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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