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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 이야기

생트뵈브(Charles-Augustin Sainte-Beuve, 1804~1869)

작성자관운|작성시간15.05.21|조회수79 목록 댓글 0

 

생트뵈브(Charles-Augustin Sainte-Beuve, 1804~1869)

 

 


    

 

 

역사적 자료를 당대의 저술에 적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르네상스 시대부터 19세기에 이르는 프랑스 문학에 대한 연구는 자세한 정보를 집대성해 놓은 위대한 해설서이다

 

젊은시절과 낭만주의 시대

생트 뵈브, Barthelemy-Eugene Demarquay가 그린 유화

생트 뵈브는 세무 공무원의 외아들로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는 풍족한 어린시절을 보낸 뒤, 파리에서 고전을 중심으로 한 인문주의 교육을 마치고 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1년 뒤에 그만두었다. 재능은 있지만 별로 뛰어나지 못했던 그는 파리대학교와 부설기관들에 다니면서 나름대로 일반 교육을 계속 받았고, 1825년에 스승인 폴 뒤부아의 권유로 언론계에 들어갔다. 뒤부아는 새로 생긴 자유주의 잡지 글로브 Le Globe지의 편집장을 맡고 있었다. 생트 뵈브는 이 잡지에 빅토르 위고의 시에 대한 최초의 평론을 발표했고, 곧이어 낭만파 작가와 시인들로 이루어진 문학단체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첫번째 저서인 16세기 프랑스 시와 연극의 역사, 비평 개관 Tableau historique et critique de la poésie française et du théâtre français au ⅩⅥe siècle(1828)에서 위고를 비롯하여 그가 새로 사귄 여러 친구들의 문학이 르네상스 시대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발견했다. 1828년에 잠시 영국을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당시 유럽 대륙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윌리엄 워즈워스와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의 시에 대한 감상력을 기를 수 있었다. 그의 시집 조제프 들로름의 생애와 시 및 사상 Vie, poésies et pensées de Joseph Delorme(1829)· 위안 Les Consolations(1830)에 윌리엄 쿠퍼와 조지 크래브의 문체가 일부 나타나는 것도 영국 방문의 영향인 듯하다. 이 시집들은 출판되었을 때 약간의 주목을 받았는데, 위고나 시인 알프레드 드 비니의 웅장한 표현 양식과는 달리 의도적인 단조로움과 거친 외양이 이런 주목을 받는 데 상당히 기여했다.

 

한편 그는 사회 문제와 종교적 체험이라는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의 사회적 관심은 클로드 앙리 드 생 시몽 백작의 가르침을 따르는 개혁가들에 대한 일시적 애착으로 구체화되었다. 생 시몽의 제자들은 봉건 체제와 군대 제도는 기업 경영자들이 관리하는 체제로 바뀌어야 하고, 교회가 아니라 과학자들이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색인 : 생시몽주의). 이 집단이 1830년에 글로브지 경영권을 인수했을 때, 생트 뵈브는 2개의 선언문 내지 '신조 표명'의 초안을 쓰는 일을 맡았다. 그는 이 집단 지도자들의 지나친 감상주의와 무절제함에 대해 곧 불쾌감을 품게 되었지만, 인간의 우애를 바탕으로 과학자가 관리하는 사회를 세운다는 그들의 미래상에 대해서는 이후로도 30년 동안 계속적인 공감을 갖고 있었다. 거의 같은 무렵, 생트 뵈브는 종교 개혁가이자 논객인 펠리시테 로베르 드 라므네의 매력에 강하게 사로잡혀 한때는 라므네를 종교적 길잡이로 삼았다. 당시 라므네는 위고의 아내에게도 정신적 조언자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위고의 아내와 생트 뵈브는 1831년에 깊은 관계를 맺었다. 이 관계는 오랫동안 지속되었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순전히 정신적인 관계처럼 보였다. 어둠에 싸인 이 연애 사건의 자세한 내막은 생트 뵈브가 개인적으로 인쇄했던 서정시집 사랑의 책 Livre d'amour에 비교적 정확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이 시집은 생트 뵈브와 위고의 아내가 죽은 뒤에 발표되었다.

 

1830년대에 그는 동시대인들의 '초상'에서 살아 있는 유명 작가들의 정신적 태도를 이해하기 위해 그 작가를 여러 각도에서 포괄적으로 연구하고 상당히 면밀하게 조사하는 새로운 비평 방법을 개발하여 박수갈채를 받았다. 1832년에 생트 뵈브는 이미 파리의 유력한 문학 잡지에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었지만, 새로 수립된 루이 필리프 정권을 싫어했기 때문에 많은 방해를 받았다. 그가 루이 필리프 정권에 대해 분노를 느낀 이유는 1832년의 폭동을 잔혹하게 다루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난을 모면하게 해줄 교사 자리를 몇 군데 제의받았지만, 그로 인해 판단의 자유를 잃게 될까 두려워 이 제의를 모두 거절했다.

 

1834년에 그는 소설에도 솜씨를 발휘하여 육욕 Volupté을 발표했다. 이 소설은 좌절과 죄악, 종교적 분투, 육체와 악마에 대한 '거부'를 지극히 내성적으로 고통스럽게 탐구한 작품이었다. 그가 쓴 대부분의 글(·비평·소설)과 마찬가지로 육욕에서는 지나치게 화려한 그당시 취향과 단절을 선언했고, 따라서 이 작품의 오묘함을 알아보거나 아델 위고(빅토르 위고의 아내)에 대한 감정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것에 찬성한 그의 친구들, 이를테면 라므네, 소설가인 조르주 상드, 시인이자 극작가인 알프레드 드 뮈세 등에게서만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는 자신의 친구이거나 한때 친구였던 동시대 작가들의 지적 '초상' 문학적 비평과 초상 Critiques et portraits littéraires(1836~39)·동시대인들의 초상 Portraits contemporains(1846)을 연대기 형식으로 계속 집필하는 한편 유명한 살롱의 여주인인 레카미에 부인과 작가이자 정치가인 프랑수아 르네 드 샤토브리앙이 주재하는 문학 모임의 일원이 되었다. 생트 뵈브는 샤토브리앙의 회고록 출판을 열렬히 찬양했지만, 15년 뒤에는 그 자신이 좀더 포괄적이고 훨씬 더 공정한 연구서인 2제정 시대의 샤토브리앙과 그의 문학 모임 Chateaubriand et son groupe littéraire sous l'Empire을 썼다.

 

낭만주의와의 결별

 

루이 필리프 정권에 대한 생트 뵈브의 태도가 부드러워진 것은 1836년 당시 교육부 장관이던 프랑수아 기조가 생트 뵈브에게 프랑스의 문학유산을 연구하는 정부 위원회 간사를 1년 동안 맡아달라고 요청한 때였다. 그때 기조는 중요한 저서를 써서 학자로서 탁월함을 입증해 보일 것을 생트 뵈브에게 제안했고, 이 제안은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인 포르 루아얄 Port-Royal로 결실을 맺었다. 1837년 생트 뵈브는 스위스 로잔에서 1년 동안 포르 루아얄 강의의 객원 교수직을 수락했다. 포르 루아얄은 17세기 은총의 교리에 대하여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견해(대체로 얀센주의라고 지칭됨)를 내놓은 것으로 유명한 수도원이다. 그는 강의를 위해 포르 루아얄의 역사 초고를 썼으며, 그후 20년 동안 여러 차례 개정판을 냈다. 학식과 식견 및 역사적 통찰력이 결합된 이 기념비적 저서(이런 결합은 유례없는 것임)는 생트 뵈브가 지난 10년 동안 겪어온 다양한 지적 모험의 대부분을 반영하고 있다.

 

도서관 관장

 

생트 뵈브는 로잔에서 1년의 계약 기간을 마치고 곧 파리로 돌아왔다. 나폴리와 로마를 여행한 뒤, 1840년에 프랑스 국립 마자랭 도서관 관장으로 임명되어 1848년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그는 로잔에 있는 친구들에게 정기적으로 가십 기사를 보내어 익명으로 발표하도록 하는 한편 정기적으로 평론을 쓰는 일도 계속했다. 그가 1844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되었을 때는 포르 루아얄1·2권이 출판되어 있었으며 이미 낭만주의 작가들과 관계를 끊고, 낭만주의 운동 가운데 이제 그가 보기에 지나치게 무절제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비판하게 되었다. 1848년에 루이 필리프가 몰락한 뒤, 생트 뵈브는 그가 목격한 혁명적 민주주의에 별로 감명을 받지 못했다. 그가 아파트 벽난로를 수리하기 위해 정부의 비밀 자금을 받았다는 터무니없는 비난이 공화주의 신문에 실리자 홧김에 도서관 관장직을 그만두고 런던으로 이주할 생각까지 했지만, 결국 객원 교수로 1년 동안 리에주(벨기에)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그는 샤토브리앙과 낭만주의 문학의 탄생과정에 대한 결정적인 연구서를 썼고(미완성으로 남음), 중세 프랑스 문학을 연구했다.

 

월요 한담

 

1849년에 파리로 돌아온 그는 평론지 콩스티튀시오넬 Le Constitutionnel에 주간 평론을 쓰기로 계약을 맺었다. 이것이 그가 평론지의 발행일을 따서 월요 한담 Causeries du lundi이라고 이름지은 유명한 평론집의 시작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20년 뒤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거의 끊임없이 수많은 평론을 쓰고 연구를 계속했다. 월요 한담은 결정판인 제3판에서 15권을 채웠으며, 그뒤로 ()월요 한담 Nouveaux lundis13권이 더 출판되었다. 이 평론에서 그는 우선 문화에 대한 자신의 개념, 즉 강한 전통 의식과 안정 및 예의범절에 바탕을 둔 개념을 재정립하려 애썼다. 그가 보기에 가장 수준높은 프랑스 문화가 나타난 것은 프랑스 혁명 이전에는 데팡 부인의 살롱이었고, 그 자신의 시대에는 레카미에 부인의 살롱이었다. 그러나 그는 19세기에 들어와 좀더 넓어진 지평에 맞추어 조사 범위를 확대하여, 유럽의 다른 문화와 동양문화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나폴레옹 3세의 좀더 독재적이고 질서있는 체제가 등장한 것을 환영했고 그의 이러한 태도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라틴어 교수직에 임명되는 것으로 보답을 받았다. 라틴어 교수직은 보수는 상당히 좋았지만, 대체로 명목뿐인 자리였다. 그의 경우에는 그야말로 완전히 명목뿐인 자리가 되었던 것이, 처음 몇 번 강의에 들어갔지만, 과격 학생들의 시위로 번번이 강의가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강의의 의무와 봉급을 사절하고, 라틴어 교수라는 칭호만 유지했다. 그가 학생들에게 강의할 예정이었던 내용은 베르길리우스 연구서로 출판되었다. 1858년에 생트 뵈브는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임시로 문학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1848년에 연구한 내용을 토대로 중세 프랑스 문학을 강의했다. 그러나 그것을 제외하면, 말년을 모두 자유 기고가로서 평론을 쓰며 보낸 셈이었다.

 

2제정기의 평론

 

생트 뵈브가 죽은 뒤 1년이 되어 무너졌던 프랑스 제2제정기 동안, 그의 옛 친구들은 대부분 죽거나 은퇴하고, 생트 뵈브 곁에는 다른 작가들, 즉 귀스타브 플로베르, 에른스트 르낭, 공쿠르 형제, 프로스페르 메리메, 이반 투르게네프, 알렉상드르 뒤마, 매슈 아널드, 그밖에 수많은 학자와 역사가 및 예술원 회원들이 대신 모여들었다. 그는 황제의 사촌 누이인 마틸드 공주의 살롱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이 살롱은 어느 정도 문학의 중심지였고, 1848년까지 있던 레카미에 부인의 살롱보다는 격식을 덜 차리는 곳이었다. 그는 이따금 문학 친구들과 함께 마니 식당에서 시간을 보냈고, 1주일에 1번은 정기적으로 극장에 가고 옛 친구들도 계속 만났다. 아델 위고는 가끔 파리로 그를 찾아왔다. 월요일마다 3,000단어에 이르는 평론을 싣기 위해 자료를 조사하고 글을 쓰고 고치고 교정쇄를 읽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 과중한 일 때문에 사실상 생트 뵈브는 젊은 작가들이 계속 개발하고 있는 수많은 새로운 경향들을 젊은시절처럼 느긋하게 탐구할 수가 없었다. 종교문제에서 그는(그의 젊은 친구이자 숭배자인 르낭과 마찬가지로) 활기찬 감수성과 호기심을 유지했지만, 자신은 어떤 종교도 가지려 하지 않았다. 그는 진화에 대한 논쟁에도 무관심했다. 거의 수도승처럼 금욕적이고 안락한 독신생활을 하면서, 산업주의의 등장이나 제국의 경제논쟁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반면에 그의 사회 의식은 지극히 예민했다. 그는 옛 친구들이 새로운 궁정에서 영향력을 갖는 것을 환영했고, 사회적 낙오자에 대한 그의 동정심은 자선활동, 대중교육, 자립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치적으로 그는 황실의 후원자나 후견인 앞에서도 독자적인 태도를 확고하게 유지했다. 1865년에 그는 상원의원으로 임명되었지만, 1번을 제외하고는 상원의 공식 회의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 단 1번이란 것도 정부가 교회의 강력한 압력에 굴복하여 에른스트 르낭의 작품을 고결한 윤리와 종교를 해친다는 이유로 공공 도서관에서 추방하자, 이를 지적 자유에 대한 폭력이라고 맹렬히 비난하는 글을 준비하여 낭독하려 했을 때였다. 이런 행위는 마틸드 공주의 노여움을 샀고 많은 공무원과 친구들을 화나게 했지만, 생트 뵈브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간 평론의 발표 매체를 콩스티튀시오넬지에서 독자적인 평론지로 바꾸기까지 했다. 생트 뵈브는 1869년에 담석제거 수술을 받았으나 수술 실패로 죽었다. 인생의 마지막 해에 그는 상당한 고통에 시달렸지만 용감하게 견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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