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서양문화 이야기

01. 태평양전쟁 과달카날 해전(Naval Battle of Guadalcanal)

작성자관운|작성시간15.11.29|조회수252 목록 댓글 0


01. 태평양전쟁 과달카날 해전(Naval Battle of Guadalcanal)

 

 






 

 

과달카날 전투 당시 19421112일부터 14일까지 솔로몬 제도 과달카날 해역 등지에서 벌어진 미국과 일본 사이의 야간 해상전. 최종적으로 일본이 패배했다. 이 전투로 헨더슨 비행장을 공격하기는켜녕 오히려 순양전함 2척을 손실하고, 지상군용으로 딸려 보낸 수송물자를 죄다 잃어버린 일본은 과달카날 전투에서 승리할 마지막 기회를 놓친다.

 

 

과달카날 전투가 시작된 후로 핸더슨 비행장은 일본군에겐 말 그대로 눈엣가시였다. 미군이 비행장을 틀어쥐고 있는 바람에 과달카날 상공의 제공권은 미군에게 유리한 상황이었고, 제해권 역시 백중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핸더슨 비행장을 무력화 내지 탈환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집요하게 공격했지만, 지상 전투는 병력의 숫적,질적 열세로 인해 실패했고, 라바울에서 출격한 항공기에 의한 공격은 라바울과의 거리와 비행장 자체의 대공방어로 인해 역시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수상함대에 의한 포격만이 효과를 거두었지만, 이것은 전함급은 되어야 효과가 있었다.

 

일본군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중화기를 포함하여 이전보다 훨씬 많은 물자를 한 번에 보급하기로 결정했다. 이 보급이 성공하려면 수송함대를 위협하는 핸더슨 비행장을 확실하게 무력화시켜야 했으므로 공고급 순양전함 2척이 포함된 별도의 대함대를 비행장 포격차 투입시키기로 했다.

 

수송선 11척에 1만톤의 보급품을 싣고 11척의 구축함에 의한 근접 호위와 중순양함 2척을 포함한 5척의 외곽 호위를 붙였다. 비행장 타격에는 전함 히에이와 기리시마를 포함한 14척으로 구성된 11전대가 아베 히로아키 제독의 지휘하에 출격했다. 이 전함 부대의 후속타로 곤도 노부다케 제독의 중순양함 부대가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일본군의 이런 움직임을 감지한 미군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패배주의에 사로잡혀있던 곰리 중장이 해임된 뒤로, 루즈벨트 대통령까지 나서서 과달카날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이 이어졌지만, 그 전폭적인 지원이 제대로 결실을 이뤄서 미군이 공세로 나설 역량을 갖추기가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한편, 과달카날 현지의 미군들은 이미 10월에 일본 전함의 포격에 의해 비행장이 무력화 되었을 때 일본군의 증원과 역습에 한동안 고생한 바 있었다. 때문에 이번에도 핸더슨 비행장이 무력화되어서 일본군에게 기회를 주게된다면 공세로 나서기도 전에 승기를 놓칠 수도 있었다. 때문에, 일본군의 급습을 반드시 막아야 했다. 하지만, 앞선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피해를 입은 뒤 수리 했다가 복귀하던 항모와 고속전함은 때맞춰 오기가 힘들었다. 결국 일본함대를 1차로 막아야 하는 건 증원 부대를 호위하던 순양함 부대들이었다.

 

 

1차 과달카날 해전

 

1113일 새벽 첫번째 야간 해전이 일어났다. 일본의 11전대가 전함 키리시마와 히에이를 보유했던 반면, 인근에 배치된 미 해군 호위함대는 순양함 위주로 비교적 약체였기 때문에, 아베 제독은 미군이 정면으로 덤빌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한편, 이 일본전함부대를 막아야 하는 미군 순양함 부대의 경우, 원래 2개 부대였던 것을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해 급히 하나의 부대로 묶어서 편성한 것이었다. 이 통합부대의 지휘를 맡게 된 캘러헌 제독은 함대지휘 경험이 없었지만 실전 경험이 있는 스코트 제독보다 2주 먼저 진급된 짬밥으로 지휘권을 부여받은 상황이었다.

 

적과의 충돌을 고려하지 않은 공격부대와 경험이 부족한 지휘관이 이끄는 수비부대가 맞붙게 된 1차 과달카날 해전은 그야말로 우발적으로 시작되었고 이후의 경과는 문자 그대로 난장판, 개판 5분전의 혈투가 된다.

 

상대방을 먼저 발견한 건 미국함대였으나, 함대 지휘 경험이 일천했던 캘러헌 제독이 혼란에 빠져 시간을 허비한 동안 양측의 구축함들끼리 갑자기 마주치면서 놀란 미 구축함들이 변침하는 바람에 미 함대의 진형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이제 일본군도 미군의 존재를 눈치챘고 결국 일본군에 첫번째로 포착된 미군 경순양함 애틀란타가 사격을 시작함으로서 전투가 시작된다. 애틀란타가 일본군 구축함 아카츠키에 의해 곧바로 무력화 되는 동안 캴러헌 제독이 사격 명령을 내렸으나 그 명령이 심히 괴랄했고 그마저도 혼선이 거듭되는 바람에 미군 함대는 더욱 혼란에 빠졌다.

이리하여 전투는 서로가 뒤섞인 가운데 혼전,난타전 양상으로 전개되어 버렸다. 그 와중에 스코트 제독은 캘러헌 제독이 지휘하는 샌프란시스코의 팀킬로 전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캘러헌 제독도 히에이와의 난타전 끝에 전사해버렸다. 하지만 샌프란시스코가 계속 버티고 히에이의 어그로를 끄는 사이, 나머지 미 군함들은 (의도한 건 아니지만) 일본 함대 진형 사이를 무턱대고 비집고 들어가서는 정체와 위치가 확인된 히에이에 공격을 집중시켰다. 그 와중에 양측 함정이 마주치면 또 서로 쏴대는 식의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아베 제독은 이런 난장판의 상황에 기가 질린데다 자신이 승함한 히에이가 난타 당하는 와중에 참모장이 전사하고 그 자신도 부상을 입는 바람에 그만 전의를 잃고 말았다. 결국 전투 20분만에 비행장 포격을 포기하고 퇴각명령을 내렸다. 정작 실제 상황은 일본 함대가 압도적으로 유리했지만, 난전의 한복판에 휩쓸려 있던 아베 제독은 실제 전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이 시점에서 미 함대는 대부분의 함정이 피해를 입은 반면 일본함대는 전함 히에이, 구축함 유다치, 아카츠키를 뺀 나머지 함선들(전함 기리시마도 포함된)이 거의 건재했기 때문에 전투가 계속 이어졌다면 일본함대의 압승으로 끝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어찌되었건간에 일본 함대가 꼬리를 말고 물러남으로서 미군은 핸더슨 비행장을 지켜낼 수 있었다.

 

날이 밝아지면서 피해가 심해 전장을 이탈하지 못한 군함들끼리 마저 포격을 교환한 끝에 일부는 끝내 격침되고, 일부는 겨우 탈출했다. 일본측 기함 히에이는 근거리에서 받은 집중 공격에 상당한 피해를 입은 나머지 전투력과 항행능력을 대부분 잃어버렸다. 날이 밝으면서 핸더슨 비행장에서 출격한 미군기들의 타겟이 되어버렸고 끝내 항행능력을 완전히 잃게 된다. 이제 함을 살릴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아베 소장은 13일 오후 6시에 함을 자침시킨다.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뒤이어 진입하는 아군 함대의 안전을 위해 히에이를 그대로 둬서 미군의 시선을 좀 더 끌기를 바랬지만, 그의 명령이 도착한 건 자침을 시작한 뒤었다. 굳이 야마모토의 명령이 아니었어도 히에이는 13일 낮 동안 미군의 시선을 잡아두고 있었던터라 뒤에 오던 순양함 중심의 호위함대는 미군의 방해 없이 과달카날로 접근할 수 있었다.

 

 

2차 과달카날 해전

 

14일 새벽, 상륙부대를 호위하던 미카와 중장의 중순양함 부대만이 공격을 가했지만 중순양함의 8인치 함포로는 위력이 부족해서 약간의 피해를 입힐 뿐, 결정적인 타격은 입히지 못했다.

 

이와는 별도로 곤도 제독이 지휘하는 2함대가 헨더슨 비행장 포격을 위해 접근하고 있었다. 당시 이들을 저지할 수 있는 미 해군 병력은 USS 엔터프라이즈 중심의 제16임무부대 밖에 없었으므로 윌리스 A 리 소장에게 엔터프라이즈를 호위 중이던 미국의 신예전함 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 2번함 워싱턴과 사우스다코타급 전함 네임쉽 사우스다코타를 이끌고서 연료를 가장 넉넉하게 실은 4척의 구축함들과 함께 제64임무부대로 재편성하여 출동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한편 엔터프라이즈는 1114일 새벽 함재기를 발진시켜서 헨더슨 비행장을 폭격하고 귀환하던 미카와 제독의 함대에 공습을 가해서 중순양함 키누가사를 격침시켰으며, 과달카날로 접근중이던 수송함대를 발견하여 공습을 가했다. 여기에는 캑터스 항공부대까지 가세해서 6척의 수송함을 격침시키고 1척을 회항하게 만드는 쾌거를 올렸다. 간신히 살아남은 수송함 4척과 구축함 5척은 2함대와 합류하여 과달카날로 향했다.

 

그날 밤 리 제독이 이끄는 제64임무부대가 일본 함대에 접근했는데 일본 해군 정찰기가 미국의 전함을 못보던 함종의 중순양함으로 착각하는 바람에 곤도 제독이 미 해군의 전력을 얕보게 만들었다. 가장 먼저 미국 구축함들이 경순양함 2+ 구축함 9척으로 이뤄진 일본 수상함들에게 전멸당했지만 그 대신 위협적인 93식 어뢰를 거의 다 소모시킨 덕분에 전함들은 안심하고 전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사우스다코타의 함내 전원이 정비불량으로 나가버리는 바람에 사격통제장치가 꺼져서 샌드백이 되었...으나! 사우스다코타는 효율적인 구조와 중장갑을 두른 신형함이었으며, 일본은 헨더슨 비행장 포격을 상정해서 3식탄을 장전하고 있었고, 차탄부터는 91식 철갑탄으로 포격을 가했다. 하지만 사우스다코다의 주요 부분은 중파에 그쳤고, 전원이 복구되자 전선에서 이탈했다. 그때 리 제독이 탄 기함인 USS 워싱턴에서 레이더 조준으로 일제사격을 날려서 한창 사우스다코타를 신나게 포격하던 기리시마를 삼도천으로 보내버렸다. 이때 워싱턴은 기리사마를 포착하고 조준까지 끝낸 상태였지만 사우스다코타에 오인사격을 할까봐 쏘지 못하고 있었는데, 기리시마가 다른 함을 위해 사용한 전조등에 사우스다코다가 비치자 발포 첫발부터 협차에 3번째 일제사격으로 명중탄을 기록했다. 기리시마도 반격했지만 워싱턴이 7분동안 발사한 16인치 초중량탄 75발 중 9발에 그대로... 아타고와 타카오를 비롯한 잔존 일본 함정들이 반격을 가했지만 전함의 화력에 압도당하여 퇴각하고 말았다. 다음날에는 캑터스 항공부대와 엔터프라이즈 함재기가 합작으로 일본군 수송선단을 전멸시켰고 결국 일본군은 6천 명의 전사자와 함께 화포와 식량, 탄약 등을 포함한 보급품 1만톤 중에서 단 5톤만을 건지게 되었다('과달카날 해전/3차 솔로몬 해전' 두번째 날 전투).

 

 

결과

 

이를 기점으로 일본 해군은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하였으며, 일본 육군 역시 더 이상의 공세를 취하지 못하고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미군의 경우 고위 지휘관 2명을 한꺼번에 잃었지만, 일본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차전의 함대 지휘관이었던 아베 제독은 작전 실패의 책임을 물어서 본토로 소환되어 강제퇴역 당했고, 2차전의 지휘관이었던 곤도 제독은 이후 한직을 떠도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 해전에서 대파당한 뒤 잔존 아군 함선과 함께 전선에서 이탈 중이던 경순양함 주노가 일본 잠수함의 뇌격에 침몰했는데 이때 주노에 같이 타고 있던 설리번 5형제가 모두 전사하는 사건이 발생해 그 이후부터 미 해군에서는 형제들의 동일 함정 및 동일 부대 근무를 금지시켰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