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기원전 100~44)
청년 시절
도주했던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오는 대신 군 입대를 택하여, 아시아 속주에서는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테르무스 휘하에서, 킬리키아에서는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 밑에서 복무하였다. 역설적으로 카이사르가 군 경력을 쌓을 수 있었던 연유는 사제직을 잃은 덕분이었는데, 플라멘 디알리스 사제는 말을 만지거나 자신의 침대가 아닌 곳에서 사흘 밤을 자거나 로마 바깥에서 하룻밤을 자거나 군대를 보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는 미틸레네 공성전에서 공을 세워 시민관을 수여받았다. 비튀니아 임금 니코메데스 4세의 함대를 확보하는 임무를 맡던 중 카이사르는 궁정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어 왕과 동성애 염문이 돌았으며, 이후에도 이 소문은 계속 그를 따라다녔다.
기원전 80년, 독재관에 오른 지 2년 만에 술라는 사임하고, 다시 집정관제를 복원하였으며, 집정관에 재직한 뒤 정계에서 은퇴하여 사인(私人)으로 물러났다. 나중에 카이사르는 술라가 독재관직을 포기한 일을 두고 "술라는 정치의 가나다도 모른다"고 비웃었다. 2년 뒤인 기원전 78년에 술라는 세상을 떠났으며, 국장이 열렸다. 술라의 사망 소식을 들은 카이사르는 로마에 돌아와도 안전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유산을 몰수당한 터라 재산이 없던 카이사르는 로마 시에서 하층민들이 사는 수부라에 평범한 집을 얻었다. 그가 로마로 돌아올 때 반술라파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반란을 시도하였으나, 레피두스의 지도력을 신뢰하지 않은 카이사르는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변호사로 나섰다. 그는 빼어난 웅변에다 인상적인 제스처와 높은 목소리를 갖추었으며, 금품 강요와 부패로 악명 높던 전직 총독들을 가차없이 고발하여 유명해졌다. 키케로도 그를 칭찬하며 "이제 나와보라, 어느 웅변가가 그대를 능가하겠는가?"라고 말한 바 있다. 수사학을 완성하기 위해 기원전 75년에 그는 로도스 섬으로 유학하여 일전에 키케로를 가르친 바 있는 아폴로니우스 몰론 밑에서 공부하였다.
에게 해를 지나던 중, 카이사르는 킬리키아 해적에 잡혀, 도데카니사 제도의 파르마쿠사 섬에 갇히게 되었다. 잡혀있는 동안 카이사르는 거만한 태도로 일관하였다. 카이사르는 포로로 잡혀있을 때 해적들을 십자가형에 처하겠다고 공언하였는데, 해적들은 이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해적들이 그의 몸값을 은 20 탈란톤으로 잡자, 카이사르는 50 탈란톤을 요구하라고 고집하였다. 몸값이 지불되자 카이사르는 배를 모아 해적들을 추적해 잡았으며, 이들을 페르가몬에 투옥시켰다. 아시아 총독 마르쿠스 융크투스는 카이사르의 요구대로 이들을 처형하길 거부하고 해적들을 노예로 팔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해안으로 돌아가 자신의 권리에 따라 이들을 십자가형에 처하였다. 그런 다음 로도스로 갔으나, 곧 아시아에서 군사 작전에 불려갔으며, 폰토스의 침략을 막고자 보조군을 모병하였다.
로마로 돌아오는 중에 그는 쿠르수스 호노룸의 첫 단계인 군사 참모(military tribune)로 선출되었다. 이 시기에 스파르타쿠스 전쟁이 일어났는데(기원전 73~71년), 카이사르가 이때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이에 관여했다. 기원전 69년에 그는 재무관에 선출되었으며, 그 해에 마리우스의 미망인이었던 고모 율리아의 장례식 연설을 하였는데, 장례 중에 (술라 집권 이후로 볼 수 없었던) 마리우스의 상을 전시하였다. 그의 아내 코르넬리아도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 기원전 69년 봄 혹은 초여름에 장례가 끝나고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의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휘하에서 재무관직을 수행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상을 보고는 알렉산드로스가 세계를 제패할 때와 같은 나이에 자신은 이룬 것도 없다는데 불만을 느끼며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재무관직 조기 해임을 요청하여 승인받고 로마 정계로 돌아왔다. 기원전 67년에 돌아와서, 그는 술라의 손녀인 폼페이아와 결혼하였다. 그는 조영관으로 선출되어 마리우스의 승전 기념비를 복구하였는데, 이는 술라파가 아직 정권을 잡고 있는 상황에서 물의를 빚었다. 그는 또 술라의 재산 몰수로 이익을 봤던 사람들을 기소하였으며, 공공 사업과 경기에 막대한 돈을 빌려 써서 동료 조영관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보다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두 차례 반란 모의에 연루된 혐의를 받기도 하였다.
정계에서 두각을 드러내다
기원전 63년은 카이사르에게 파란 많은 해였다. 그는 호민관 티투스 라비에누스를 설득하여 벌족파 원로원 의원 가이우스 라비리우스에게 37년 전에 원로원 비상 결의로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하고 자신을 이 사건을 심리할 두 재판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임명하게 하였다. 키케로와 퀸투스 호르텐시우스가 라비리우스의 변호를 맡았으나, 그는 대역죄(perduellio)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그는 인민에게 청원할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였으나 법무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켈레르가 야니쿨룸 언덕에 군기를 내려 민회를 산회시켰다. 라비에누스는 다음 회기에 기소를 재청할 수 있었으나, 카이사르의 지시로 재청하지 않아 이 문제는 중지될 수 있었다. 카이사르의 목적은 라비리우스 개인이 아니라, 집정관들이 민회에 대한 상소권도 무시한 채 이른바 국가의 적들을 처형할 때 휘둘러온 원로원 비상 결의의 정당성을 공격하려는 것이었다. 덕분에 그는 원로원을 장악하고 있던 주류 세력들이 카이사르와 같은 민중파 정적들에 대하여 궁극적인 방호책으로 삼았던 비상 결의에 반대 여론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라비에누스는 이후 십 년간 카이사르의 중요한 친구가 되었다.
술라가 임명했던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가 그 해에 죽자 카이사르는 로마 국가 종교의 수장인 대신관직 선거에 출마하였다. 그에게는 강력한 벌족파 경쟁 후보 두 사람이 있었는데, 집정관을 지낸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와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이사우리쿠스였다. 후보들은 서로에게 뇌물 수수 혐의로 고발하였다. 선거일 아침에 카이사르는 어머니에게 자신이 돌아올 때면 대신관에 당선되어 있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선거 운동으로 막대한 빚을 져서 추방되리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경쟁 후보들은 뛰어난 경험과 지위를 가졌지만 카이사르가 무난히 당선되었는데, 아마도 두 경쟁 후보가 서로 표를 잠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신관은 신성로(Via Sacra)에 관저가 있었다.
그 해 집정관이었던 키케로는 공화국을 장악하려는 카틸리나의 음모를 알렸으며, 카툴루스 등은 카이사르가 이 음모와 연관이 있다고 고발하였다. 다음 해 법무관으로 선출되었던 카이사르는 이 음모 연루 문제 처리를 놓고 벌어진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였다. 회의 중에 카이사르는 쪽지를 받았다. 그러자 카이사르의 정적인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는 카이사르가 음모자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며 그 쪽지를 크게 읽도록 요구하였다. 카이사르는 카토에게 쪽지를 넘겨주었는데, 당황스럽게도 그 쪽지는 카토의 의붓누이인 세르빌리아에게서 온 연애 편지였다. 반역 음모자를 사형에 처하자는 의견에 대해 카이사르는 설득력 있게 반박하면서 종신 징역에 처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카토의 연설로 결국 음모자들은 처형되었다. 다음 해 이 반란 음모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카이사르는 다시 공범 혐의로 고발되었다. 그러나 키케로는 카이사르가 이 음모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스스로 보고한 적이 있다고 증언하여 문제가 풀렸으며, 고발자 가운데 한 사람과 또 위원회 위원 한 사람이 구금되었다.
기원전 62년에 법무관이었던 카이사르는 당시 호민관이었던 메텔루스 켈레르가 논쟁적인 입법 제안에 지지하였으며, 두 사람은 매우 완고하여 원로원에서 이들을 직무 정지에 처하였다. 카이사르는 계속 법무관직을 수행하고자 하였는데, 폭력에 호소하는 수밖에 없었다. 카이사르가 자신을 지지하는 대중 시위를 진정시키자 원로원은 그를 복직시키기로 하였다.
그 해에 보나 데아(Bona Dea, "선한 여신") 제사가 카이사르의 관저에서 열렸다. 이 제사에는 남성이 출입할 수 없었으나,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라는 젊은 귀족 청년이 여자로 변장하고 몰래 입회하려고 하였는데, 이는 카이사르의 아내인 폼페이아를 유혹할 목적이 분명하였다. 그는 잡혀서 신성 모독죄로 기소되었다. 재판에서 카이사르는 로마의 유력 가문인 클라우디우스 가문을 거스르지 않고자 클로디우스에게 불리한 증거를 제출하지 않았으며, 클로디우스는 막대한 뇌물과 협박으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내 아내는 어떤 의심도 받아서는 안 된다"면서 폼페이아와 이혼하였다.
법무관직을 수행한 뒤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이베리아 바깥) 속주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나, 아직도 상당한 빚을 지고 있던 터라 로마를 떠나기 전에 빚쟁이들을 설득해야 하였다. 그는 로마의 갑부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도움을 받았다. 폼페이우스에 반대하는 자신을 지지하는 대가로 크라수스는 카이사르의 빚 일부를 지불하고, 나머지 빚에는 보증을 서 주었다. 그렇게 하고도 카이사르의 법무관 임기가 끝나 일반 시민 지위가 되면 빚 때무에 기소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속주로 떠났다. 히스파니아에서 그는 칼라이키족과 루시타니족을 정복하여 그의 군대에게서 임페라토르(최고 군사령관)로 환호받았으며, 채무 관련 법을 개혁하고, 매우 존경을 받으며 총독직을 마쳤다.
'임페라토르'로 경례를 받으면서 카이사르는 개선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공화정 최고위직인 집정관직에 출마하길 원하였다. 만일 그가 개선식을 열려면, 행사 전까지 군인 신분으로서 도시 바깥에서 대기해야 하는데, 선거에 입후보하려면 사령관직에서 이임하고 일반 시민 신분으로 로마에 들어와야 했다. 결국 그는 개선식과 선거 출마를 동시에 할 수 없었다. 그는 원로원에 부재중 출마 허가를 요청하였으나, 카토가 이를 막았다. 두가지 사이에서 카이사르는 집정관직을 선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