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기원전 100~44)
파르살루스 전투
기원전 48년 8월 9일 파르살루스 전투는 카이사르의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군단병을 전진시키지 않음으로써 카이사르군이 두배의 거리를 달려오게 하여 그들의 체력을 떨어트리고 전열을 흩어놓으려 하였다. 폼페이우스의 부장 트라아리우스가 제안한 작전이었다. 이는 폼페이우스군이 움직이지 않으면 카이사르군은 무기를 들고 갑절의 거리를 달려가야하고, 따라서 폼페이우스군 앞에 도달하였을때 지쳐서 대열이 흩뜨려질테니깐 그때 맞아 싸우는 편이 더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카이사르군의 갈리아 전쟁 7년의 오랜 전투 경험이 그들이 폼페이우스의 작전에 넘어가지 않게 해주었다. 그들은 중간지점에서 잠시 진격을 멈춰 호흡과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돌격하였다. 그러나 수적으로 우세한 폼페이우스 군단병은 이 돌격을 그럭저럭 버텨냈다. 곧 폼페이우스는 기병에게 출동명령을 내렸고 수적에서 열세인 카이사르 기병은 못 당해내는 것처럼 후퇴했다. 폼페이우스 기병이 카이사르군 배후로 돌아가는 순간 카이사르는 제4열 별동대를 출격시켰다. 카이사르군 별동대는 정면에서 폼페이우스 기병대를 막아섰고 후퇴했던 카이사르 기병도 적군 기병의 배후를 포위했다. 폼페이우스 기병은 곧 격파되었고 이것을 안 폼페이우스는 전투를 단념하고 전장을 떠났다. 그러나 폼페이우스의 군단병은 이때까지 카이사르군의 공격을 버티고 있었으나 새 병력을 교체투입하는 카이사르의 전술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달아났다. 패잔병들은 진영이 있는 언덕으로 달아났으나 카이사르는 즉시 이 언덕을 포위하였다. 폼페이우스 패잔병들은 곧 항복했으며 카이사르는 관용을 베풀어 이들의 귀가를 선선하게 허락했다. 폼페이우스군의 전사자는 6000명에서 15000명, 포로는 총 24000명에 달했으나 카이사르군의 손실은 고작 200명에 불과했다. 다만 카이사르군 백인대장은 30명이나 전사하였다. 이것으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최종 결전, 파르살루스 전투는 카이사르의 압승으로 끝났다.
파르살루스 전투가 끝나고 카이사르는 적군 사령부에 도달했다. 카이사르는 루키우스 렌툴루스를 비롯한 정적들의 탐욕과 사치에 경악하여 이렇게 외쳤다. "모두 그들이 자초한 일이다." 그런다음 바로 폼페이우스를 추격했다. 한편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뗏목에 불을 붙인 역청과 황을 실어 여러차례 카이사르군에게 보내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파르살루스 전투 소식에 크게 사기가 올라간 카이사르군을 공격하자 이에 격분한 카이사르 고참병은 카시우스의 배를 나포하고 그들을 내쫓았다. 카시우스 휘하 폼페이우스군은 그때까지 파르살루스 전투 결과가 카이사르군이 퍼트린 거짓소식인줄 알았다고 한다.
로마에서 카이사르는 독재관으로 임명되었으며 부사령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기병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레이아로 도주한 폼페이우스를 추격하였으며, 이곳에서 폼페이우스는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임금을 조종하는 궁중관료들의 명령을 받은 전직 로마군 장교에게 살해당하였다. 이때 카이사르는 당시 알렉산드레이아에서 프톨레마이오스와 그의 누이이자 부인이며 공동 국왕인 클레오파트라 7세 사이의 권력 투쟁에 개입하게 되었다. 아마 프톨레마이오스가 폼페이우스를 죽이는 데 관여한 탓에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 편에 선 것 같은데, 프톨레마이오스의 내시 포티누스가 선물로 카이사르에게 폼페이우스의 머리를 바치자 카이사르는 이를 보고 울었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리아군과 전투를 벌였고 그때 그는 그의 배에 불을 붙였는데 그 불이 번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불타버렸다. 그 와중에 폼페이우스 암살 주모자이자 이집트의 실권자인 포티누스는 카이사르에게 잡혀 처형되었다. 그의 부하이자 군권을 장악한 아킬라스도 공주 아르시노에에게 지휘권을 빼앗기고 처형되었다. 알렉산드리아 시내에서 카이사르와 아르시노에의 부하 가니메데스는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고 그때 프톨레마이오스 왕은 아르시노에군과 합류하였다. 전장은 시내를 벗어나 나일 강의 삼각주(델타)로 옮겨졌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47년에 나일 강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 군대를 무찌르고,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의 지배자로 삼았다.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는 그 해 봄에 나일 강에서 개선 행진을 열어 알렉산드레이아의 내전에서 승리한 데 축하하였다. 파라오의 배는 400척의 다른 배를 대동하였으며, 카이사르에게 이집트 파라오의 화려한 생활을 보여주었다.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는 결혼하지 않았는데, 로마법에서는 오로지 로마 시민 사이의 결혼만 인정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마지막으로 결혼할 때까지 무려 14년동안 클레오파트라와 관계를 이어나갔으며(로마인의 시각에서 이는 간통이 아니었다) 카이사리온의 아버지도 카이사르였던 것 같다. 클레오파트라는 한 차례 이상 로마를 방문하였는데, 로마 바깥의 테베레 강을 건너면 있는 카이사르의 별장에서 지냈다.
기원전 48년 말, 카이사르는 독재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임기는 1년이었다. 기원전 47년 초 몇 달간 이집트에서 지낸 카이사르는 중동 지역으로 가서 젤라 전투에서 폰토스 왕 파르나케스 2세를 절멸시켰는데, 너무나 빨리 승리를 거두어 그는 과거 폼페이우스가 이런 형편없는 적들과 오랫동안 싸워 거둔 승리를 조롱하였다. 이 승리를 기념하여 그는 원로원에 보낸 서한에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라고 적었다.
그 다음으로 카이사르는 아프리카에 남아있는 폼페이우스의 원로원파 잔당을 처리하고자 떠났다. 당시 아프리카에는 폼페이우스의 장인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카이사르의 숙적 소 카토, 아프라니우스, 라비에누스 등의 폼페이우스 잔당이 쿠리오를 격파한 누미디아왕 유바와 연합하여 카이사르와의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아프리카 북동부에 상륙하여 루스피나 전투에서 라비에누스와 싸웠다. 이때 카이사르는 라비에누스가 지휘하는 누미디아군의 맹공에 큰 위기에 처했다. 이 공격에 카이사르 기병은 반격하지 못하고 적의 포위를 막으려 버티고 있었다. 카이사르 보병과 라비에누스군이 곧 맞붙었고 누미디아군은 투척무기를 던졌고 카이사르 쪽에서도 필룸을 던져 응수했다. 카이사르군이 전투에서 불리해지며 원형진을 이루었다. 이때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군을 향해 '어린 새내기'군대라고 놀렸다. 이 조롱에 격분한 카이사르 제10군단의 한 백인대장이 투구를 벗어 던지며 라비에누스에게 자신을 알아볼 수 있게 한 다음 카이사르의 정예인 제10군단의 힘을 보여주겠다면서 그에게 창을 던졌다. 라비에누스는 말에 창이 맞자 굴러 떨어졌으며 누미디아군의 엄호를 받으며 퇴각했다. 그러나 전투가 불리하게 흘러가자 몇몇 카이사르군은 두려움에 달아났고 카이사르는 한 기병을 붙잡으며 외쳤다. "적들은 저기에 있단 말이다!" 결국 카이사르는 최대한 길게 진형을 늘어트리며 적을 공격했고 라비에누스의 누미디아군을 흩어놓았다. 페트레이우스가 1500명의 누미디아 기병으로 카이사르를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
루스피나 전투에서 힘들게 승리한 카이사르는 마우레타니아와 연합하여 유바가 없는 누미디아 본국을 공격하게 했다. 마우레타니아에는 시티우스라는 로마인이 있었는데 카이사르는 그를 회유했다. 카이사르는 탑수스를 공격하였고 스키피오가 이끄는 폼페이우스군은 군대를 양분하여 카이사르를 봉쇄했다.(탑수스는 바다에 면한 곶 끝에 위치하면서도 육지쪽에는 석호가 펼쳐져 있는데 2킬로미터의 가늘고 긴 육지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카이사르의 탈출을 막으려면 군대를 양분해야 했다.) 기원전 46년에 카이사르는 탑수스에서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소 카토의 군대를 상대하였는데 스키피오군은 중앙에 보병, 좌우익에 기병, 극좌우익에는 코끼리를 배치하였다. 카이사르는 중앙에 기병을 배치했고, 좌우익에는 보병, 극좌우익에는 제5군단 병사를 배치하였다. 전투가 시작되자 코끼리들은 제5군단 병사들의 투창에 전선에서 이탈했고 카이사르 기병은 적군 보병을 뚫고 적군 좌우익의 배후를 포위하였다. 전방에는 카이사르 보병이 배후에는 카이사르 기병이 폼페이우스군을 포위하였고 신속히 그들은 궤멸되었다. 이후 유바왕은 도주했고 자마에서 쫓겨나자 동행한 페트레이우스와 동반자살했다. 총사령관 메텔루스 스키피오는 배를 타고 도망치다가 사로잡히는 것을 면하기 위해 자살했다. 아프라니우스와 파우스투스 술라는 카이사르군에게 잡혀 죽었고 라비에누스와 아티우스 바루스는 그와중에 달아나는데 성공했다. 우티카에 있던 카토는 자결하여 카이사르에 대한 저항이자 자유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표출했다. 이에 키케로는 「카토」를 저술하여 카토의 행위를 찬양하였고 카이사르는 「안티 카토」를 저술하여 이를 반박했다. 탑수스 전투에서 이긴 뒤 사르디니아와 코르시카를 시찰하고 본국으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크게 개선식을 치르고 10년 임기의 독재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렇지만 폼페이우스의 아들인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히스파니아로 도주하였는데, 카이사르의 옛 부관이자 갈리아 전쟁에서 부사령관을 지낸 티투스 라비에누스도 이들과 함께 있었다. 일레르다 전투 이후, 카이사르에게 평정된 히스파니아는 카이사르파 총독 카시우스의 실정으로 폼페이우스파로 돌아섰다. 카이사르는 이들을 격파하고자 파비우스와 페디우스를 파견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이후 히스파니아에 직접 다시 출정한 카이사르는 기원전 45년 3월에 문다 전투에서 마지막 저항 세력을 격파하였다. 기병대를 지휘하던 라비에누스가 카이사르군을 유인하기 위해 기병을 이끌고 뒤로간 것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기병대가 붕괴된 것으로 잘못 보아 군대를 퇴각시킨 것이 패인이었다. 라비에누스는 전사했고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는 도주하다가 카이사르군에 잡혀 죽었다. 폼페이우스의 둘째아들인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만이 히스파니아에서 도주하는데 성공했다. 이런 가운데 카이사르는 세 번째와 네 번째로 기원전 46년의 집정관(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동료 집정관)과 기원전 45년 집정관(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동료 집정관, 그해말 파비우스가 병사하여 이후 보궐집정관은 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에 선출되었다.
내전 이후
카이사르는 아직 히스파니아에서 싸우고 있었으나, 원로원은 그가 부재중인 가운데 영예를 내리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적들을 처벌하지 않고 거의 모두 용서해 주었으며, 그에 대한 대중의 반대도 거의 없었다.
카이사르가 문다에서 승전한 데 기념하며 로마 건국 기념일인 4월 21일에는 대규모 경기와 축하 행사가 열렸다. 플루타르코스는 내전에서 무찌른 적들이 외국인이 아닌 동료 로마인들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로마인들이 카이사르 승리 이후 열린 개선식이 빈약했음을 알았다고 썼다. 이어 그는 기원전 46년 임기 6개월이었던 독재관 임기 규정을 변경, 10년 임기의 독재관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카이사르는 2년 동안 각종 개혁을 실시하였다.
유언장 작성- 기원전 45년 9월에 카이사르는 이탈리아로 돌아오면서 미리 유언장을 썼는데, 자신의 조카손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에게 자신의 이름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상속한다고 썼다. 이어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유언의 공동 집행자로 지명했다. 카이사르는 또 자신이 죽기 전에 옥타비아누스가 죽는다면,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다음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적었다.
복지 정책- 카이사르는 국가에서 곡물의 일정량을 의무적으로 매입하도록 법으로 규정하였다. 또한 카이사르는 곡물 수매에 국가 보조금을 대도록 엄하게 제도화하였으며, 곡물 수령자의 수를 고정하여 줄였는데 모든 수령자는 특별 명부에 기록되었다. 47년에서 44년까지 카이사르는 그의 전역병 약 15,000명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계획을 세웠다.
달력 개정- 카이사르는 대신관으로서 달력을 정비하는 일도 했다. 구 로마력을 철저히 검사한 그의 업적은 매우 오랜 세월동안 영향력을 이어갔다. 기원전 46년, 카이사르는 1년을 365일로 정하고, 4년마다 윤년을 두었다. (율리우스력은 1582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수정하여 오늘날의 그레고리오력이 되었다) 역법 개정으로 로마인에게 어떤 한 해가(아마 현대 역법으로 기원전 46년에 해당할 것이다)이 445일로 길어졌다. 7월의 여러 유럽어 명칭(가령 영어의 'July' 등)은 그를 기념하여 율리우스에서 기원한 것이다.
수도 재개발- 카이사르는 「카이사르의 포룸」을 건설하였다. 포룸 로마눔의 내부에는 로마 최초의 국립도서관과 바실리카 율리아가 지어졌다. 카이사르는 사이프타 율리아, 마르켈루스 극장(훗날, 아우구스투스가 일찍 죽은 조카를 기리기 위해 극장의 이름에 조카의 이름을 붙였다.)도 건설하려 했다. 카이사르는 도심을 확장하기 위해 세르비우스 성벽을 파괴하기도 했다. 카이사르가 완공하지 못한 건축물은 옥타비아누스가 완성했다. 카이사르 이후, 로마황제들은 그를 따라 포룸을 건설 및 발전시켰다.
교사와 의사에게 시민권 지급- 카이사르는 로마의 교육과 의료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교사와 의사에게 시민권을 제공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카르타고와 코린토스 재건- 카이사르는 로마세계의 도시개발을 꾀하여 카르타고와 코린토스를 비롯한 도시들을 재건 및 건설하였다. 이후, 제정시대에 카르타고는 크게 발전하여 아프리카 속주의 주도가 되었다.
금융 개혁- 카이사르는 금융 개혁도 실시하였다. 이자율의 제한을 연리 12% 이하로 정하였고 물가가 폭등한 내전 이전으로 담보물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원로원 체제 약화-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권한을 크게 약화시키는 개혁도 진행시켰다. 갈리아를 비롯한 속주의 유력자들에게 원로원의석을 제공하여 원로원의 정원을 900명으로 늘였다. 이는 키케로나 마르쿠스 브루투스 같이 속주민과의 융합을 싫어하는 보수파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일관적으로 반대의사를 표명해왔던 원로원 최종권고를 완전히 폐지해 버려, 원로원의 강권을 박탈했다.
사법 개혁- 카이사르는 사법 개혁도 실시하였다. 앞서 말한 원로원 최종권고를 폐지하여 재판도 받지 않고 로마 시민이 처형당하는 것을 금지한 '셈프로니우스 법'을 부활시켰다. 배심원의 자격조건을 40만 세스테르티우스 이상의 재산을 가진 사람으로 규정하여 배심원 구성비율을 둘러싼 다툼을 종식시켰다. 카이사르는 재판이 나온 뒤의 항소를 민회가 아닌 종신 독재관인 카이사르 자신에게 제기하도록 바꾸었다. 그리고 정치범에 대한 최고형을 사형이 아닌 추방형으로 규정했다.
교통 규제- 카이사르는 혼잡한 로마의 교통을 규제했다. 낮에 수레가 다닐 수 없게 함으로써 교통의 혼잡함을 없애려 하였다. 그러나 수레가 밤에만 다닐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이 법률로 인해 로마 시민들은 밤에 소음을 들으며 잠을 자야했다.
갈리아 키살피나 주민에게 시민권 지급- 카이사르는 북이탈리아의 주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제공했다. 이것은 갈리아전쟁 당시 카이사르에게 후방지원을 아끼지 않은것에 대한 보상이었다. 동시에 카이사르가 생각한 본국의 경계는 북이탈리아를 포함한 것임을 보여준다.
치안 대책- 카이사르는 기존에는 없었던 치안대를 만들어 치안대책을 강구했다. 카이사르 이전에 치안대가 없던 까닭에 로마에 정치폭력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카이사르는 치안대를 만들어 이를 방지하였다.
그 밖의 개혁-그 밖에 늪지를 개척하는 사업과 오스티아 항만 개조, 해방노예 등용을 추진했다.
카이사르의 암살
종신 독재관 취임- 기원전 44년 2월 15일 그는 원로원과 민회로부터 종신 독재관에 임명되었고, 성대한 취임식을 거행하였다. 이로써 공화정은 붕괴하고 제정이 사실상 시작되었다.
기원전 44년, 3월의 열닷새(Idus Martias)에 카이사르는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전날 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스카라는 어느 "해방자"에게서 음모에 대해 어렴풋이 전해 들었으며, 최악의 상황을 우려하여 포룸 계단에서 약간 떨어져서 카이사르 앞으로 갔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마르스 광장에 있는 폼페이우스 극장을 지날 때 원로원 의원 무리가 그를 가로막더니 동쪽 주랑 현관에 붙은 방으로 그를 이끌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원로원에 다다랐을 때, 원로원 의원인 루키우스 틸리우스 킴베르가 추방당한 자신의 형제를 귀환시켜달라며 청원을 하였다고 한다. 다른 음모자들이 킴베르를 지지하면서 카이사르를 둘러쌌다. 플루타르코스와 수에토니우스 모두 카이사르가 킴베르의 청을 거절하였다고 했는데, 그러나 킴베르는 그의 어깨를 잡더니 카이사르의 투니카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킴베르에게 "웬 무례한 짓인가!(Ista quidem vis est)"라고 소리쳤다. 이때 카스카가 단검을 빼내들어 단번에 독재관의 목을 내리찔렀다. 카이사르는 재빨리 뒤돌아보며 팔로 카스카를 잡았다.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가 라틴어로 "카스카, 이 천한 자야, 무슨 짓이냐?"라고 말했다고 썼다. 겁을 먹은 카스카는 그리스어로 "동지들, 도와주시오!"라고 외쳤다. 순식간에 브루투스를 비롯한 모든 암살자들이 칼을 들어 독재관을 공격하였다. 카이사르는 도망치려 하였으나, 피 때문에 분별을 잃고 발을 헛디뎌 넘어졌으며 주랑 현관 아랫 계단에 무방비로 쓰러지자, 암살자들은 그를 계속 찔러댔다. 에우트로피우스에 따르면, 카이사르를 암살하는 데 60명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이 가담하였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23번 칼에 찔렸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나중에 의사가 부검하기를, 그의 가슴에 두 번째로 찔린 상처 그 하나가 치명적인 일격이었다고 한다.
독재관이 마지막으로 한 말은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으며, 이는 학자들과 역사가들의 논쟁거리이다. 수에토니우스는 다른 사람들은 카이사르의 마지막 말이 그리스어로 "녀석, 너도냐?" 였다고 말했노라고 썼다. 그러나 수에토니우스 자신은 카이사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썼다. 플루타르코스도 카이사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그가 암살자 사이에서 브루투스를 보자 자신의 토가를 끌어올려 머리 위로 뒤집어썼다고 한다. 영어권 지역에서 가장 잘 알려진 그의 마지막 말은 라틴어로 "브루투스, 너마저..."인데, 이 말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에서 나오는 대사에서 나온 말로, 실제로는 라틴어와 영어가 혼용된 문장의 앞부분 구절이다. 이 말은 역사적 사실로서 근거가 없으며, 셰익스피어가 대사에 라틴어를 쓴 것은 당시 카이사르가 수에토니우스가 기록한 것처럼 그리스어가 아닌, 라틴어를 썼다는 주장과도 무관하며, 단지 이 희곡을 쓴 당시 이미 대중적인 구절이었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죽은 뒤에 브루투스는 동료 의원들에게 무언가 말할 듯이 앞으로 걸어 나왔으나, 그들이 건물에서 도망쳤다고 한다. 브루투스와 그의 패거리는 카피톨리누스 언덕으로 나아가 사랑하는 도시를 향해 "로마 사람들이여, 우리는 다시 자유로워졌다!"고 외쳤다. 그러나 연회장에서 도망쳐나온 의원들이 이미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소리쳐 말해서 로마 시민들은 각자 자기 집에 문을 걸어잠그고 틀어박혀 그들에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암살 이후
반란자들은 절대권력자의 죽음에 기쁨을 터뜨렸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죽음이 결국 로마 공화정의 종말로 이어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였다. 갈리아 정복 전부터 카이사르를 열렬히 지지했던 로마의 중류층과 하류층 사람들, 특히 카이사르와 함께 많은 전쟁을 치른 고참병들은 소수의 잘난 귀족 무리가 자신들의 우상을 죽인 데 분노하였다. 카이사르와 떨어져 있었던 안토니우스는 로마 민중의 슬픔을 이용하여 이들의 분노를 벌족파들에게 쏟아버리겠다고 위협하였는데, 아마도 자신이 로마의 지배권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서는 놀랍고도 분하게도, 카이사르는 조카의 아들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를 이미 자신의 유일한 후계자로 정해두었으며, '카이사르'라는 막대한 권위를 지닌 이름을 물려주었다. 그리고 유증을 통해 그에게 유산의 2/3을 지급하였다. 하지만, 유서에는 포로로마노의 시민들에게 자신의 재산에서 한명당 300세르테르티우스를 지급하라는 내용도 있었기 때문에 유산의 2/3은 그리 많지않은 돈이였다.(300 세스테르티우스는 매우 큰 액수는 아니었으나, 로마 노동자들의 평균 석달치 급료에 해당하는 돈으로 상당히 좋은 선물이었다)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는 위대한 카이사르의 아들이 되었으며, 그리하여 로마 대중 상당수의 충성도 얻게 되었다. 며칠 뒤 로마 포룸에서 카이사르의 장례식이 열렸는데, 안토니우스는 1600여 년 뒤 셰익스피어가 쓴 것처럼("친구들이여, 로마인들이여, 동포여, 들어보시오...") 연설을 하지는 않았으나, 로마의 일반 민중들에게 호소력 있게 카이사르의 죽음 이후 여론을 반영한 극적인 찬사를 바쳤다. 게다가 장례 연설 중에 카이사르의 유언장에 따라 티베리스 강변에 있는 그의 개인 정원은 로마 시민에게 바치며, 모든 로마 시민 등록자에게 300 세스테르티우스씩 선물하기로 발표가 났다. 안토니우스의 장례 연설과 더불어 카이사르의 유증이 알려지면서 대중 사이에서 카이사르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으며, 죽음에 대한 애도와 암살자에 대한 분노도 높아졌다. 장례식장에서 들끓어오른 군중은 카이사르의 유해를 놓은 장례용 장작에 마른 가지와 가구, 심지어 옷가지까지 던졌으며, 이로 말미암아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 포룸이 심각하게 피해를 입었다. 그러자 군중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집을 공격하였는데, 이들은 간신히 피해 쫓겨났으며 결국 해방자들의 내전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게 된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다가올 내전의 궁극적인 결과를 예견하지 못하였는데, 특히 카이사르의 후계자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러하였다. 카이사르가 죽을 당시 겨우 19세의 나이였던 옥타비아누스는 상당한 정치 감각을 입증하였으며, 안토니우스가 새로운 내전의 첫 단계에서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상대하는 동안, 옥타비아누스는 당초 빈약했던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
그리스에 막대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와 싸우기 위하여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전쟁 자금과 병사가 필요하였으며, 카이사르의 이름이 지닌 명분과 정당성도 있어야 했다. 기원전 43년 11월 27일 티티우스 법(lex Titia)이 통과되어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카이사르에 충성하던 기병 지휘관 레피두스 세 사람의 제2차 삼두 정치가 공식적으로 결성되었다. 삼두 정치는 기원전 42년에 공식적으로 카이사르를 '율리우스 신'(Divus Iulius)으로 신격화하였으며, 그에 따라 옥타비아누스는 '신의 아들'(Divi filius)이 되었다. 카이사르가 자신의 관대함 때문에 암살당한 것을 아는 제2차 삼두 정치의 세력자들은 술라 이후에 쓰인 적이 없는 숙청의 공포를 다시 일으켰다. 이들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에 대항하여 두 번째 내전에서 45개 군단을 유지할 자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수많은 반대자들을 합법적으로 살해하였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필리피에서 공화정파를 격퇴하였다.
이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정부였던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였는데, 로마를 지배할 발판으로 이집트의 어마어마한 부를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에 맞서 세 번째 내전을 벌인다. 이 마지막 내전에서 악티움 해전을 기점으로 옥타비아누스가 승세를 잡게 되고, 결국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라는 신적인 이름을 달고 로마 제국의 첫 황제가 되었다.
당초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파르티아와 캅카스, 스키타이를 침공하고, 동유럽을 가로질러 게르마니아에 다시 진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카이사르가 암살되면서 이러한 계획은 좌절되었다. 그의 후계자들은 파르티아와 게르마니아를 정복하고자 하였으나, 영속적인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다.
사후
카이사르에게는 무덤이 없다. 그의 유해는 포로 로마노에서 화장되었는데, 불길이 꺼져갈 무렵 내린 세찬 비에 유해를 태운재가 씻겨갔기 때문이다.
건강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근거하여, 간혹 카이사르가 뇌전증을 앓았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이 문제를 놓고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으며, 또 특히 기원전 80년대에 술라가 처벌자 명단을 공개하던 당시 그가 말라리아에 걸린 것은 이보다는 더욱 확실하다.
카이사르는 부분적으로 발작 증세를 보였던 것 같은 기록이 네 가지가 있다. 또 그는 아마도 어린 시절에 소발작(absence seizure)을 증세가 있었던 것 같다. 이렇듯 그의 발작에 대한 가장 최초의 기록은 카이사르 사후에 태어난 사람인 수에토니우스의 글이다. 그가 뇌전증 환자였다는 주장에 대해 일부 의학 역사가들은 그의 병이 뇌전증성 발작을 유발하는 저혈당증이라는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카이사르는 생전에 로마에서 훌륭한 웅변가이자 산문 작가로 인정받았으며, 키케로도 카이사르의 수사와 문체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카이사르의 대표작인 갈리아 전쟁기가 "알몸과 같고 순수하며 의복과 같은 미사여구를 죄다 벗어 던져버렸을 때 생겨나는 매력으로 충만해있다"며 이어 "카이사르는 역사를 쓰려는 자들에게 사료를 제공할 작정으로 썼을지 모르나, 그 은혜를 입는 자들은 군더더기를 덧붙여 화려하게 장식한 역사를 쓰는 바보들뿐이고, 사려 깊고 현명한 이들에게는 역사를 쓸 의욕마저 꺽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라고 평가했다. 그의 유명한 작품 가운데는 마리우스의 아내인 아주머니 율리아의 장례 연설과, 키케로의 소 카토 회고에 대응하여 카토를 비난한 글인 안티카토네스(反카토)가 있다. 불행히도 그의 글과 연설문 상당수는 유실되었다.가장 큰 원인은 그의 사후에 그가 신격화 됨에 따라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갈리아 전기와 내란기등 몇몇 문서들을 제외한 그와 관련된 글과 연설문들의 전량 회수 및 폐기를 명령했기 때문이다.
그가 쓴 회고록으로는 갈리아 전기와 내란기가 있는데, 전자는 갈리아 전쟁 당시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에서 벌인 군사 작전을 기록하였으며, 후자에서는 이집트에서 폼페이우스가 죽은 직후에 일어난 내전을 다루었다. 또 각각 알렉산드레이아,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에서 수행한 전투에 대해 쓴 알렉산드리아 전기(De Bello Alexandrino), 아프리카 전기(De Bello Africo), 히스파니아 전기(De Bello Hispaniensi) 이 세 저작도 역사적으로 카이사르의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 저자 여부는 불투명하다.
이러한 저서의 줄거리는 당시 전쟁 중이나 직후에 "전선에서 급송한 공문서"로서, 1년 단위로 써서 출간되었다. 카이사르의 저서는 문체면에서 분명하게 단순하고 직설적이나, 사실은 대단히 복잡하고 그의 정치적 주장을 선전하는 방향으로 미묘하게 편향되어 있고 특히 로마나, 이탈리아, 속주의 평범한 소귀족 독자를 대상으로 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