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두정치(triumvirate, 三頭政治)
로마 제국에서 황제 체제가 만들어지기 직전의 3인 관료 체제를 지칭한다.
형식적으로는 집정관을 3인으로 늘린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호민관과 원로원의 업무까지 대부분 실행했기 때문에, 사실상 견제 불가능한 최고 통수권을 쥐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단, 1차 삼두정치는 공인된 것이 아니었으며 그냥 세 사람 사이의 협정에 불과했다.
총 2차에 걸친 삼두정치 체제가 있었으며, 두 번 모두 실무담당자/얼굴마담/돈줄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최후의 1인이 전부 실무담당자였다는 점도 공통. 그리고 돈줄이였던 한 명은 듣보잡 신세가 되는 것도 공통점이라고 흔히 알려져 있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크라수스와 레피두스는 사정이 서로 다르다.
크라수스의 경우는 시작될 당시엔 본인은 물론이고 당시 로마인들 대다수가 폼페이우스와 함께 삼두정치의 중요인물로 여겨졌었지만 크라수스 항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신의 능력 부재로 점차 곁다리로 밀려났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무리한 원정을 감행했다 스스로 자멸했다.
반면 레피두스는 아예 시작부터가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완충지대 역할을 할 인물로 지명됐으며 당시 로마의 여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당시 옥타비아누스가 어린 나이 때문에 저평가 됐다고 한들 엄연한 카이사르의 적통 후계자였으며 키케로와 원로원을 속여 넘기고 단숨에 로마 최고 권력자 중 하나가 된 정치적 역량을 보여줬기 때문에 레피두스 정도가 상대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님은 당대 로마인들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의 전투를 끝내고 레피두스가 처음 약속된 자신의 영역인 아프리카 와 시칠리아를 요구했을 때 옥타비아누스가 당당히 레피두스의 캠프로 가서 레피두스의 눈 앞에서 레피두스의 부하에게 직접 배반을 권유하자 레피두스 부하 모두가 옥타비아누스에게 가 버린 것이다.
1~2차 삼두정치 모두 외형적 형태와 결과가 거의 똑같이 나왔기 때문에 각각의 구성 인물들의 능력이나 성격, 그리고 사건의 진행 과정 역시 비슷하다고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제로는 두 사건의 상세한 진행 과정과 인물들은 서로 매우 다른 측면이 많으므로 밑에 나온 각각의 인물들의 항목을 살펴보는 쪽을 권한다.
• 제1차 삼두정치: 율리우스 카이사르, 크라수스, 폼페이우스
• 제2차 삼두정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제1차 삼두정치는 로마 공화정 말기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사이에 비밀리에 맺어진 정치적 협력관계를 말한다.
제1차 삼두정치는 대략 기원전 59년에 설립되었는데 당시 로마의 유력자였던 세사람이 원로원의 눈을 피해 서로의 이익을 도모하는 관계로 창설되었고 주창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였을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60년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자신을 반대하는 원로원에 맞서 폼페이우스와 손을 잡았다.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의 집정관 당선을 도와주면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퇴역병을 위한 토지배분을 추진하기로 비밀리에 합의하고 크라수스도 협력관계에 끌어들였다.
기원전 59년 카이사르는 원로원파인 비불루스와 함께 무난히 집정관에 당선된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외동딸 율리아와 결혼하고, 카이사르는 루키우스 피소의 딸 칼푸르니아와 결혼했다. 집정관이 된후 카이사르는 삼두정치의 협약에 따라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지원으로 농지법을 개혁하고 원로원을 약화를 꾀했다. 카토와 키케로와 같은 원로원파는 이에 저항했으나 퇴역병과 민중을 선동하여 압력을 가한 삼두정치파에 의해 좌절되었다. 공동집정관인 비불루스는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었고 카이사르는 사실상 남은 임기를 혼자 집정관직을 수행했다. 또한 카이사르는 삼두정치의 위력을 통해 '바티니우스 법'을 민회에서 간단히 가결시킨다. 이로써 카이사르는 갈리아 트란살피나, 갈리아 키살피나, 일리리아 3개 속주의 총독이 되어 갈리아 전쟁을 치르게 된다.
기원전 56년 세사람은 루카에서 다시 만나 서로의 이해관계를 다시 한번 정했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이듬해의 집정관직 선출을 약속받고 각각 히스파니아와 시리아의 속주 지휘권을 갖기로 하고 카이사르는 갈리아의 지휘권을 5년 더 연장하기로 합의했다. 세사람이 지휘할 수 있는 군단을 각각 10개 군단으로 하여 총 30개 군단이 그들의 지휘를 받게된다. 그리고 기원전 55년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집정관에 선출되었으며 원로원파 후보는 낙선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54년 율리아가 죽었고 그 이듬해에 크라수스가 파르티아와 전쟁을 벌이다가 카르하이 전투에서 전사하자 삼두정치는 위기를 맞았고 폼페이우스는 "원로원"파로 기울기 시작했다. 갈리아에서 카이사르는 다시 한번 폼페이우스와 정략결혼으로 동맹을 추구했으나 거절당하고 폼페이우스는 원로원 파인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딸과 결혼했다. 이로써 제1차 삼두정치는 종결되었고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서로 정적이 되었다.
제2차 삼두정치는 로마 공화정 말기인 기원전 43년 당시 로마의 유력자인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가 결성한 일종의 정치, 군사적 협약을 말한다. 5년을 단위로 갱신되어 기원전 33년을 마지막으로 파기되었다. 제1차 삼두정치는 원로원의 눈을 피하기 위해 비밀리에 결성되었으나 제2차 삼두정치는 공인된 형태를 취했고 로마 공화정이 붕괴되고 제정으로 넘어가는 결정적인 사건중에 하나가 되었다.
기원전 43년 11월 26일 북이탈리아의 볼로냐에서 모인 카이사르파의 세사람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 안토니우스는 서로 다음과 같이 결의하였다.
"살생부"를 작성하여 반대파를 숙청함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공동으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격파하고 그동안 레피두스는 본국에서 배후를 관리한다.
기원전 42년 필리피 전투에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격퇴한 뒤 옥타비아누스는 서부를, 안토니우스는 동부를 각각 분담하여 복구한다며 나누어 통치했다.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에서 클레오파트라 7세와 화려한 궁정생활을 하는 동안 이탈리아에서는 안토니우스의 동생 루키우스와 그의 아내 풀비아가 반란을 일으켰고 옥타비아누스에게 진압되는 일이 일어났다. 안토니우스는 당장 이 반란이 자신과 관계없다고 주장하고 삼두정치의 세사람은 기원전 40년 브린디시에서 다시 만나 서로의 통치영역을 재확인했다. 또한 옥타비아누스는 누나인 옥타비아를 안토니우스와 결혼시켜 동맹을 강화했다. 그 후 옥타비아누스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다시 협정을 맺고 서로의 적대행위를 종결했다.
레피두스는 일찌감치 삼두정치의 무대에서 내려오고 이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두 사람이 제각기 자기의 영역에서 경쟁하게 되었다.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 결합하고 옥타비아와 이혼했다. 제2차 삼두정치는 기원전 33년 종말을 고하고 로마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내전으로 돌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