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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 이야기

05. 아우구스투스(Augustus, BC 63~AD 14)

작성자관운|작성시간15.12.23|조회수64 목록 댓글 0

 

05. 아우구스투스(Augustus, BC 63~AD 14)

 

 


 

황제 아우구스투스

 

아우구스투스의 동상. 머리 부분은 기원전 30~기원전 20년경에 제작되었고, 몸통은 2세기에 제작되었다.

기원전 29년에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제일인자라는 뜻의 국가 제1시민(princeps civitatis)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흔히 '프린켑스'라고만 쓰는 이 칭호는 공화정 시대에 지도급 원로원 의원으로 인정받은 집정관 역임자이자 높은 위신과 덕망을 지닌 자를 뜻했다. 이 칭호는 실제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폼페이우스에게도 수여된 전례가 있었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에게 이 칭호는 제정으로 나아가고 있던 현실 속에서 로마의 최고 책임자라는 것을 반영한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7년에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위임받았던 여러 특권을 원로원에 되돌려주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여전히 집정관이었고,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가 갖고 있는 금화, 은화 발행권을 되찾아올 만한 힘이 없었다. 또한 직접적으로 속주와 군대를 다스리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로마 제국의 병사들에게 강한 지지를 얻고 있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의 후원에 힘입어 출세한 많은 지지자, 피보호자, 어마어마한 부는 로마의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대중은 엄청난 양의 부를 아우구스투스가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공공건물 건설과 가도 유지·보수에 자발적으로 기여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기대만큼 잘 진행되지 않았다. 기원전 20년에 아우구스투스는 직접 가도 건설에 나섰다. 기원전 16년에 발행된 화폐에는 아우구스투스가 막대한 양의 돈을 공공기금에 기부한 후 이루어낸 가도 건설을 선전하였다.

 

하지만 역사학자인 하워드 스컬러드(Howard Scullard)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의 진정한 권력은 군대와 최종 결제권으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원로원은 내전을 종결시킨 아우구스투스에게 속주의 통치를 맡아 달라고 간청했다. 이 요청은 아우구스투스가 초법적인 권한을 갖는 것을 원로원이 사실상 승인한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에 출석하면서 계속해서 공직을 수행하였으며 10년 기한의 속주 통치 권한을 마지못해 수락하는 척하였다. 아우구스투스가 통치하게 된 속주들은 갈리아, 히스파니아, 시리아, 킬리키아, 키프로스, 이집트 등 로마에 정복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속주들이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집정관일 때, 자신이 통치하는 속주에 파견할 총독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원로원으로부터 부여받는다. 반면 옥타비아누스가 통치하지 않는 원로원령 속주의 경우 원로원에서 임명한 총독이 다스렸다. 속주와 군단에 대한 통치권을 얻어내었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의 권력은 점점 더 강해졌다. 하지만 아직 압도적으로 권력을 독점하지는 않았다. 고대 로마의 중요한 식량 생산지였던 아프리카 속주의 경우 원로원에서 파견한 총독이 여전히 통치하고 있었으며, 시칠리아 속주 및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 등 여러 속주는 원로원에서 임명한 총독이 통치하였다. 하지만 그리 많지 않은 수의 속주만 원로원에서 임명한 전직 집정관 출신의 총독이 다스렸으며, 나머지 지역은 아우구스투스가 임명한 총독이 다스렸기 때문에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에게 감히 대적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광활하고 지리적으로 먼 '황제령' 속주에는 대다수 군단들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아우구스투스는 집정관과 법무관급 레가투스를 임명하고 자신의 재량으로 선전포고와 강화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시민관을 쓴 아우구스투스의 흉상

 

원로원 의원들은 감격하였고, 옥타비아누스에게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수여하였다. 이와 더불어 아우구스투스의 집 출입구의 위쪽에 시민관을 걸고 출입구의 양쪽 기둥을 월계수 묘목 장식으로 뒤덮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가 황금 방패에 공화정을 복귀시켰다는 사실을 새겨 원로원 의사당에 안치하였다. 이 칭호는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였다. 신의 아들(divi filius, 즉 카이사르의 아들)이라는 지위와 더불어 길조를 뜻하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에는 초자연적인 힘이 함축되어 있었는데, 로물루스가 엄숙한 징조(augusto augurio)를 보고 로마를 창건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그는 제2의 창건자로서 또 다른 로물루스로 인정되었다고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를 통해 평화로운 아우구스투스의 시대를 내전 등 끔찍한 사건을 겪었던 옥타비아누스의 시대와 차별화할 수 있었다.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제2의 건국자임을 상징하기 위해서 로마의 건국자인 로물루스와 레무스에서 따온 로물루스라는 칭호도 고려되었지만 로물루스라는 칭호는 왕정을 연상시켰기 때문에 결국에는 아우구스투스를 선택한다. 아우구스투스는 또한 자기 자신을 신군 카이사르의 아들인 임페라토르”(Imperator Caesar divi filius)이라 칭했다. 이는 자신이 신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라는 것과, 승리를 상징하는 임페라토르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받았던 특권인 보라색의 토가를 입을 수 있는 권리, 권위를 상징하는 머리띠와 홀을 쓸 수 있는 권리는 받지 않았다.

 

호민관 특권

 

기원전 23년 아우구스투스의 동료 집정관이었던 테렌티우스 바로 무레나(Terentius Varro Murena)가 아우구스투스에 대항하려 한다. 그 방식은 정확하게 전해지고 있지 않으나 무레나는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칼푸르니우스 피소(Calpurnius Piso)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피소는 널리 알려진 공화정 지지자였는데, 아우구스투스는 동료 집정관과 협력하면서 파벌에 관계없이 모든 이들과 협력하여 국정을 운영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늦봄에 아우구스투스는 자칫하면 죽을 수 있었던 정도로 심하게 병을 앓았고, 사람들은 아우구스투스가 친구인 아그리파에게 자신의 인장을 넘기고 사위인 마르켈루스에게 병권을 위임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인장과, 관리하고 있던 공금 및 군단 통제권을 동료 집정관인 피소에게 위임했다. 이러한 행동은 아우구스투스가 사실상의 황제라고 믿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일이었고,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가 제정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의심을 잠시 거둔다. 아우구스투스는 사유 재산만 자신이 지목한 상속자들에게 수여하려 했다. 당시 로마의 시민들은 여전히 군주정을 좋게 보지 않았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가 만약 권력을 자신이 지명한 후계자에게 물려주려 했다면 반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서기 14~ 20년경에 만들어진 시민관을 쓴 아우구스투스. 마노 세공으로 되어 있다.

건강을 회복한 후 아우구스투스는 집정관 직에서 사임한다. 이후 아우구스투스가 집정관에 선출된 것은 기원전 5년과 기원전 2년뿐이다. 하지만 군 통수권은 여전히 원로원의 요청으로 지니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집정관직에서 사임하여 구 귀족들에게 집정관 자리에 오를 기회를 늘려 주었으며, 전통적인 공화주의자들의 우려를 불식시켰다.(계속 집정관직을 보유하는 것이 마리우스나 카이사르의 행적과 너무나 비슷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는 공직에 종사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전직 집정관으로 속주 통치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또 그는 기원전 27년부터 황제령 속주에 전임 집정관의 명령권(proconsulare imperium)을 계속 보유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오히려 원로원령 속주의 명령권보다 더 우위에 있는 상급 임페리움(maius imperium)까지 얻게 되어 권한이 강화되었다. 그리하여 다른 속주 총독들 위해 군림하고 필요한 경우 모든 군단에 대한 명령권을 행사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는 호민관 특권을 부여받았으며 이를 죽을 때까지 행사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면서 귀족 계급으로서 호민관에 취임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호민관 특권을 손에 넣어 거부권 행사, 선거 관리, 모든 모임에서 제일 먼저 발언할 수 있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호민관 특권을 활용하여 풍기 단속을 담당하고 시민들이 공익을 보존하는지 자세히 감찰하는 역할도 하였으며 그리고 인구 조사와 원로원의 의원을 정할 수 있는 권한도 가지게 되었다. 이 권한까지 손에 넣자 아우구스투스는 포룸에 들어올 때 전통 복장 토가를 입지 않은 사람들은 들어올 수 없게 하여 로마 애국주의의 미덕을 지키려 하였다. 고대 로마의 공화정 체제에서는 아우구스투스처럼 감찰관에 선출된 적도 없던 사람이 이런 권한을 갖는 것과 한 사람이 호민관 특권과 감찰권을 동시에 가지고 있던 전례가 없었다. 이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비슷한 권한을 가졌지만 인구 조사를 시행하거나 원로원 의원 명단을 좌지우지하지는 못했다. 공화정 시대와 비교해서 호민관의 위상은 격하되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호민관을 여전히 법무관이 되고자 하는 평민 계급이 거쳐야 하는 중요한 단계로의 의미는 살려둔다.

 

폰티펙스 막시무스(최고 제사장)의 복장을 한 아우구스투스의 상.

 

아우구스투스는 또한 군 통수권도 손에 넣는다. 이는 이전에는 집정관이나 권한을 위임 받은 장군들만이 가지고 있던 권리였지만, 이후에는 아우구스투스만 이를 사용할 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만이 가지고 있던 절대 지휘권은 오직 아우구스투스만이 명목상 로마군의 최고 통수권자의 자격으로 개선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로 아우구스투스가 임명한 장군들이 전선에서 승리를 거두면 그 영예는 아우구스투스에게 돌아갔다. 아우구스투스의 의붓아들이었던 티베리우스가 유일한 예외였다.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7년에 게르마니아에서의 공적으로 개선식을 거행한다. 아우구스투스는 갖고 있던 절대 지휘권은 기원전 13년에 기한 연장 승인을 받았다. 이 승인을 기다리는 동안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에 머무르면서 퇴역 장병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이들에게 아낌없이 선심을 베푼다.

 

앞에서 언급한 권한들의 획득은 정치적으로 매우 미묘한 위장이었다. 평민 계급이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이를 미루어 알 수 있다. 기원전 22년에 홍수와 기근이 겹쳐서 일반 서민들의 생활이 힘들어졌다. 이들은 아우구스투스에게 영구 집정관직 혹은 독재관직을 부여할 것과 그가 직접 감찰관직을 맡아 곡물 담당관직(cura annonae)를 맡아줄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아우구스투스는 독재관에 취임하지는 않았지만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자비를 부담하여 짧은 시간 내에 사태를 해결하였다. 8년에 다시 발생한 기근 때에는 식량청 장관”(라틴어: praefectus annonae)이라는 관직을 신설하여 로마의 식량 공급을 책임지게 하였다. 기원전 19년에 원로원은 민중의 분노를 사지 않으려고 아우구스투스가 집정관의 상징을 공적인 자리에서 사용하는 권리와 두 집정관의 사이에 앉을 수 있는 권리를 허락했다. 그 결과권력은 공식적으로도 집정관에 취임하지 않더라도 집정관처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하였다.

 

기원전 12년에는 최고 제사장(폰티펙스 막시무스)이었던 레피두스가 죽은 후에 그 자리에 취임한다. 최고 제사장은 종신제인 데다가 단 한 명만 될 수 있는 직책이었다. 기원전 2년에는 원로원과 로마 시민로부터 국부”(라틴어: pater patriae)라는 칭호를 부여받는다.

 

대외 정책과 군사 작전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확장된 영토. 노란색 부분은 기원전 31년 당시의 로마의 영토이다. 녹색 부분은 아우구스투스 통치 기간 동안 얻은 지역이며, 분홍색은 동맹국을 의미한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이미지를 승리와 연결시키기 위해 자신의 칭호에 개선장군을 뜻하는 임페라토르를 집어넣어 신군 카이사르의 아들인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라틴어: Imperator Caesar Divi Filius Augustus)라 하였다. 이후 13년까지 로마군은 아우구스투스가 임페라토르라고 불릴 만한 21회가량의 큰 승리를 거두었고 3회의 정식 개선식을 거행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아우구스투스 업적록의 제4장에 이러한 군사적 성공으로 치른 개선식, 감사제 등에 대해 서술하였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무력으로 점령한 지역도 적지 않았으며, 외교도 적절히 사용하였다. 한 예로 크라수스가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당했던 대패(大敗)를 직접적인 전쟁을 통해 만회하는 대신, 아르메니아 왕국에 친()로마 성향의 인물을 왕위에 앉힌 후에 파르티아를 압박하여 이를 외교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티베리우스의 흉상. 아우구스투스의 가장 유능한 지휘관 중 하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히스파니아의 북부, 알프스 지역의 라이티아와 노리쿰, 일리리쿰, 판노니아 등을 정복하였다. 기원전 25년에는 왕이 후계자도 남기지 않고 죽은 갈라티아를 전쟁을 벌이지 않고 로마의 속주로 만들었다. 또한, 오늘날 스페인의 칸타브리아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기원전 19년에 최종적으로 진압하였으며 이 지역은 히스파니아 타라고넨시스 속주와 루시타니아 속주에 편입된다. 이 지역에서 채굴되는 풍부한 광물 자원은 이후 군자금의 원천이 된다. 대표적인 곳으로 라스 메둘라스의 풍부한 금광이 있다. 기원전 17년과 16년에 일리리쿰 총독 푸블리우스 실리우스 네르바가 알프스 산악 지역의 노리쿰(오늘날의 티롤, 스티리아, 잘츠부르크)에 정복 사업을 개시하여, 황제의 의붓 아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가 완수했다. 그 결과 이탈리아 반도와 게르마니아 사이에 군사적 완충 지대가 생겼다. 지금의 모나코 근교에 알프스 전승기념비가 세워졌고 호라티우스는 이 승리를 예찬하는 시를 지었다. 기원전 12년에는 알프스 근방에서 군사 행동을 재개하였고, 의붓아들인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 형제가 이끄는 군대가 각각 일리리쿰에서 판노니아 족, 동부 라인란트에서 게르만족을 공격하였다. 작전은 성공을 거두었고 기원전 9년에 드루수스가 이끄는 군대는 엘베 강에 도달했다. 하지만 얼마 후 드루수스는 낙마하여 죽었고 티베리우스는 동생의 유해를 로마로 송환하였다.

 

 

라스 메둘라스의 금광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의 동방을 파르티아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여러 동맹국을 완충 지대로 적극 활용하였다. 동방 방위를 위해 시리아 속주에 군단을 주둔시켰으며, 티베리우스가 파르티아와 교섭을 하였다. 이 협상의 결과로 로마는 기원전 53년에 크라수스가 파르티아에 대패를 당했을 때 빼앗겼던 군단기(軍團旗)를 되찾을 수 있었다. 티베리우스는 아르메니아 왕국의 티그라네스 5세를 왕위에 복위시키기도 했다.

 

파르티아가 언제나 위협적인 상대이기는 했지만, 실제 전쟁은 게르만 족을 상대로 대부분 라인 강, 도나우 강 근교에서 벌어졌다. 안토니우스와 최종 전투를 벌이기 전에 달마티아의 부족들과 벌였던 전쟁 이후 로마군은 착실히 도나우 강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러 차례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게르마니아 지역은 로마화하는 데 실패하였다. 9년에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당한 참패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게르마니아의 총독인 바루스가 이끄는 3개 군단이 케루스키 족 출신의 아르미니우스가 이끄는 게르만 족에게 전멸한다. 아우구스투스는 사태를 수습하려 했고, 티베리우스는 이후 여러 차례 라인란트로 진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의 죽은 후에 계승자인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아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하였고, 이후 로마군은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을 주 방어선으로 삼아 방위 체계를 구축한다.

 

죽음과 후계 문제

 

기원전 23년의 자신에 대한 암살 음모가 발각되고, 건강이 크게 악화되자 아우구스투스는 후계자 선정이라는 화급한 문제에 관심을 쏟게 된다. 아우구스투스는 정치 체제의 안정을 위해 후계자를 물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은 이를 대중에게 알리려 하였다. 로마의 시민들, 특히 원로원 계급이 갖고 있는 군주제에 대한 공포심을 자극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이를 추진한다. 기원전 25년에 아우구스투스는 누나의 아들인 마르켈루스와 자신의 딸인 율리아를 결혼시켰다. 하지만 마르켈루스는 기원전 23년에 20살의 나이로 사망한다. 16살의 나이에 미망인이 된 율리아를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와 혼인시켰다. 아그리파 부부는 아들 셋, 딸 둘, 총 다섯 명의 아이를 낳았다. 얼마 후, 아그리파는 5년 기한으로 전권을 부여받아 제국의 동방을 담당하게 되었고, 이와 함께 아우구스투스만 가지고 있었던 호민관 특권도 부여받았다.

 

아우구스투스는 외손자인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후계자로 삼기 위해 양자로 삼는다. 이 두 사람은 아우구스투스의 배려로 기원전 5년과 기원전 2년부터 정치적 경력을 쌓기 시작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리비아가 데려온 의붓아들인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 형제도 아꼈다.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조카인 안토니아와 결혼했으며, 기원전 12년에 아그리파가 죽고 나서는 티베리우스 부부를 이혼시킨 후 티베리우스를 미망인이 된 율리아와 결혼시켰다. 하지만 드루수스는 기원전 9년에 게르마니아에서 사망하고,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6년부터 로마 제국의 통치를 분담하였지만 얼마 후 로도스 섬으로 은퇴해 버린다.

 

서기 2년과 4년에 루키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차례로 요절하였다. 서기 4년에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와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를 양자로 맞아들였다. 티베리우스는 5년 기한의 호민관 특권을 부여받았고, 조카인 게르마니쿠스를 양자로 맞아들였다.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아 평정과 일리리쿰, 달마티아 반란을 진압하였고, 게르마니쿠스는 그 밑에서 착실히 경험을 쌓는다. 하지만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는 방만한 행실로 인해 7년에 추방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를 후계자로 삼을 계획을 포기하게 된다. 이후, 티베리우스는 13년에 아우구스투스가 가진 모든 특권을 부여받는다.

 

14819일에 아우구스투스는 놀라에서 숨을 거두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죽기 전에 건강이 갑자기 나빠지자 티베리우스를 소환해 밀담을 나누었다. 얼마 후, 황후 리비아의 품에 안긴 채 평온하고 조용하게 숨을 거두었다. 티베리우스는 아들인 드루수스와 함께 아우구스투스의 추모 연설을 하였다. 이후 마르스 광장을 지나 아우구스투스 영묘 앞 광장에서 유해를 화장하였고, 영묘에 묻혔다. 얼마 후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를 신격화하기로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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