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동로마 제국(Byzantine Empire, 330~1453)
비잔티움 제국 또는 동로마 제국, 중세 로마 제국, 로마 제국, 비잔틴 제국은 중세 시대에 콘스탄티노폴리스천도 이후의 로마 제국을 일컫는 명칭으로, 수도는 콘스탄티노폴리스(현재의 이스탄불)였고 로마 황제를 직계한 황제가 다스렸다. 이 나라는 ‘로마 제국’으로 불렸고 제국 주민과 주변 나라 사람들은 ‘로마니아’(Ῥωμανία)라고 부르기도 했다. 로마 제국과 달리 인구 대다수가 사실상 그리스어를 썼다. ‘로마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을 구분하는 것은 주로 현대의 관습에 따른 것으로, 비잔티움 제국이 갈라져 나온 정확한 시점을 잡을 수는 없으나 콘스탄티누스 1세가 아나톨리아의 니코메데이아에서 보스포로스 해협의 비잔티온(콘스탄티노폴리스, 혹은 ‘새로운 로마’)으로 천도한 서기 324년이 분수령이다.
서기 330년부터 1453년까지 1123년동안 존속했다. 비잔티움 제국은 중세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전제 군주제 국가였고 한때 활발한 정복 사업으로써 구 로마 제국의 고토를 거의 되찾아 광활한 지중해 세계를 통일하여 그 중심지 역할을 하였고 심지어 중동 지역으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특히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아시아와 유럽, 흑해, 에게 해의 무역로에 자리 잡고 있어 수세기 동안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다.(전 세계 부의 3분의 2가 모인다고 할 정도) 게다가 비잔티움 제국은 외적인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아랍에 침략받아 영토를 잃기도 했으나 10세기 말 마케도니아 황조 시대에 국력을 회복하여 동지중해 패권국이 되어 파티마 왕조와 대결한다. 그러나 1071년 제국의 심장부인 소아시아 대부분을 셀주크 튀르크 세력에게 잃는다. 12세기에 콤네노스 황조가 영토를 어느 정도 회복하였으나 안드로니코스 1세 콤네노스 몰후 제국은 쇠퇴기로 다시 접어든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수도를 점령하여 제국 영토가 비잔티움 그리스인과 라틴인의 각축장이 되면서 제국은 형편이 바뀔 수 없을 만큼 확실한 타격을 입었다. 1261년에 팔라이올로고스 황조가 정권을 탈취한 뒤, 수도를 수복하면서 제국을 재건했으나 14세기 후반 내전으로 인해 비잔티움 제국은 사실상 멸망했다. 1453년에 오스만 제국이 침공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되면서 비잔티움 제국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비잔티움 제국'은 영어식으로 ‘the Byzantine Empire’라고 표기하며, 대한민국에서는 이 영어식 표기를 그대로 써 '비잔틴 제국’이라고 불렀으나 최근에는 원어를 살려 비잔티움 제국으로 표기하거나 ‘동로마 제국’으로 쓰기도 한다.
1557년 서유럽에서 독일인 역사가 히에로니무스 볼프가 비잔티움 제국의 사료를 모은 비잔티움 역사집(Corpus Historiæ Byzantinæ)을 출간하면서 칭하게 된 ‘비잔티움’이란 표현은 콘스탄티누스 1세가 천도한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개명된 비잔티온(기원전 667년에 메가라의 식민자들이 세운 그리스 도시)에서 나온 말이다. 이때부터 제국 수도의 구 명칭인 ‘비잔티움’은 사서나 시문 외에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1648년 '루브르의 비잔티움'(Byzantine du Louvre, Corpus Scriptorum Historiæ Byzantinæ)이 출판되고, 1680년 뒤 캉주의 '비잔티움 역사'(Historia Byzantina)가 출판되면서 몽테스키외를 위시해 프랑스 작가들 사이에서 '비잔티움'이라는 표현이 널리 퍼져 친숙해졌다. 그 이후 이 표현은 서방 세계에서 19세기에 일반 용어으로 굳어졌다.
비잔티움 제국은 오랜 세월 다민족 국가이면서도 그리스-로마 전통을 계승한 나라였다. 당대 서방과 북방에서는‘그리스인들의 제국'이란 표현이 쓰였는데, 왜냐하면 이 나라에서 점차 비잔티움적 요소가 우세해졌기 때문이다.
서방 세계에서는 동로마 제국이라는 명칭이 로마 제국의 계승자라는 사실을 거부하는 뜻도 있이서 '그리스인들의 제국'(Imperium Graecorum)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적들에게서 자신을 지킬 도움이 필요했던 교황 레오 3세는 로마 제국의 황위가 공위 상태라고 간주하고 서기 800년 샤를마뉴를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인정하여 대관식을 치렀으므로, 로마의 여황 아테네의 에이레네 시대 때 (남성 황제가 아니므로) 동로마 제국이 로마의 계승국이라는 주장은 전면에 걸쳐 도전받았다.
로마 교황이나 서방의 지배자들이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에게 '로마'라는 이름을 쓰려고 할 때 '로마인들의 황제'(Imperator Romanorum) 대신 '로마니아의 황제'(Imperator Romaniæ)라는 표현을 선호했는데, 그 이유는 전자를 서방인들은 샤를마뉴와 그 사람의 후계자를 일컫는 의미로만 썼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시각에서 페르시아, 이슬람 그리고 슬라브 세계에서는 비잔티움 제국을 로마로 보는 생각이 널리 퍼져있었다.
중국에서는 고대 로마를 불러 온 말인 대진(大秦)을 문맥에 따라 비잔티움 제국이나 근동 지방의 여러 나라 또는 시리아 교회로 지칭하기도 하였다. 《속자치통감장편(續資治通鑑長編)》을 보면, 북송 신종 때인 원풍 4년(1081년)에 ‘대진’의 왕인 ‘멸가이령개살(滅加伊靈改撒: 미카엘 카이사르로 추정)’이 사신을 보내 왔다고 기록돼 있는데, 이 대진이 비잔티움 제국으로 추정되며, 비잔티움 제국은 중국에서 ‘불림(拂菻)’으로도 불렸다. 《송사(宋史)》 권490 열전 제249 외국6의〈불림(拂菻)〉에서는 위 원풍 4년의 일을 두고서 《속자치통감장편》과 달리 불림국의 왕인 ‘멸력이령개살(滅力伊靈改撒)’이 사신을 보냈다고 서술한다.
오늘날 역사 지도에서는 기원후 395년에서 610년까지 제국을 가리킬 때는, 610년에 헤라클레이오스 황제가 제국의 공용어를 라틴어에서 그리스어로 바꾸었으므로, 보통 '동로마 제국'이라고 쓰고(당시 이미 인구 대다수가 그리스어를 썼다), 기원후 610년 이후 지도에서는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표현이 많이 쓰였는데, 근래 일본 역사학계 일각에서는 비잔티움 제국 대신에 ‘중세 로마 제국’(일본어: 中世ローマ帝国)이라는 용어를 쓰자고 제안한다. 비잔티움 제국은 비잔티움 제국에서 자칭하던 명칭이 아니므로, 스스로 불렀던 표현인 ‘로마 제국’이 최대한 그 제국을 존중하여 부르는 용어라는 것이다. 물론 이 용법은 비잔티움 제국과 같은 시대에 로마의 후계자로 자처한 신성 로마 제국의 정통성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한다.
로마 제국의 분할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신행정 제도인 사두 체제를 만들었다. 그는 자신과 같은 공동 황제를 두어 아우구스투스라 칭하였다. 공동 황제는 각자 젊은 후계자인 부제를 두어 규칙에 따라 양위할 수 있게 했으나 실제로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밀리아누스가 퇴위하자 이 사두 체제는 무너졌고, 뒤를 이은 콘스탄티누스 1세는 사두 체제 대신 황제 세습 원칙을 세웠다.
콘스탄티누스 1세.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수도를 옮기면서 사회와 종교 체제에 중요한 변화를 일으켰다. 기원후 330년 그는 옛 그리스의 비잔티움을 2번째 로마로 삼아 천도를 단행하였으며 이 도시를 자신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폴리스라고 개명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동방과 서방 간 교역로에 위치한 요충지였다. 그리고 천도와 함께 콘스탄티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도입한 행정 개혁을 다시 개선하였다. 그는 화폐(그가 도입한 솔리두스 금화는 매우 가치있고 바뀌어 달라지지 아니하고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게 되는 통화였다)를 안정시켰고 군사 조직을 개혁하였다.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제국은 상당한 군사력을 회복하였고 안정과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또한, 이 시대에 기독교는 더는 국가에 박해받지 않았으며 황제가 관대한 특전을 베풀어서 황실의 비호를 받았다. 새로운 종교의 통일된 교리를 정하고자 공의회를 소집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아를에서 교회 회의를 소집했고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황제가 교회의 수장이라는 주장을 반영하였다.
395년 이후 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혁과 원칙이 꾸준히 계승되었다. 황조 세습 원칙은 철저하게 확립되어 이 해에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죽자 황위는 그의 아들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가 각각 동부와 서부를 맡았다. 테오도시우스는 제국 동서부 양 지역을 통치한 마지막 로마 황제였다. 동부 제국은 다키아, 마케도니아, 아시아, 폰투스, 오리엔트, 트라키아, 이집트로 이루어졌다.
3세기와 4세기에 동로마 제국은 사회, 문화가 서로마 제국보다 발달했고 재정 자원도 풍부해 공물을 지불함으로서 국가의 침략자를 회유할 수 있었고 용병을 고용할 여력이 있어서 대개 서로마 제국이 직면한 곤란한 상황을 도와주었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을 더욱 요새화하여 어지간한 공격은 대체로 막아낼 수 있게 되었다. 이 성벽은 1204년까지 파괴되지 않았다. 훈족 아틸라의 침입을 피하고자 테오도시우스는 이 사람들에게 공물(300kg에 달하는 금이었다.)을 바쳤고 훈족이나 타 이민족과 교역을 장려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는 상인들에게 혜택을 주었다.
그를 계승한 마르키아누스는 훈족에게 이런 막대한 액수의 공물을 계속 바치는 것을 거부했으나, 아틸라는 이미 서로마 제국으로 관심을 돌린 뒤였다. 453년 아틸라가 죽자 훈족은 몰락했고 동로마 제국은 남은 훈족 무리와 평화로운 관계를 이어나갔으며, 이 사람들은 결국 비잔티움 제국 군대의 용병으로서 싸우게 된다.
아틸라가 죽자 동로마 제국은 평화기를 누렸으나 서로마 제국에서는 476년에 게르만족 출신의 로마 장군 오도아케르가 유명무실한 서로마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켰으며, 다른 꼭두각시 황제를 세우는 대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러나 율리우스 네포스 등은 달마티아와 이탈리아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다시 로마의 황제를 자임했다. 480년 율리우스 네포스 마저 사망함으로서 서로마 제국은 최종 붕괴되었다.
서로마 붕괴 이후
유럽에서는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폐위당하는 476년 또는 율리우스 네포스가 사망하는 480년을 서로마 제국 붕괴의 해로 보지만 당시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자신들이 로마 제국을 통일한 것으로 정치적으로 해석하였다. 당시 비잔티움 정부는 오도아케르와 동고트의 테오도리크를 형식적이나마 이탈리아의 파트리키우스로 봉한 것을 통해 이탈리아를 자신들이 석권한 것으로 봤다. 비잔티움 제국은 480년 이후 한동안 공식 국호를 로마 제국이라 칭하였다. 이들은 멸망할 때까지 자신들을 로마의 정통 후손이라는 뜻에서 대내외명으로 로마 제국이라는 호칭을 썼다. 그리고 이탈리아는 단순히 영향력하에 들어온 실지 영역으로 인식되었다.
이탈리아를 회복하고자 모이시아에 정착해 있던 테오도리크의 동고트족과 협상한 동로마의 제노 황제는 고트 왕을 이탈리아로 보내 '이탈리아 군부 총감'(magister militum per Italiam)으로 삼았다. 493년 오도아케르가 몰락하자 젊은 시절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산 적이 있는 테오도리크 왕은 이탈리아를 스스로 통치하였다. 테오도리크가 동고트 왕국으로 이탈리아를 통치하자 제노 황제는 서방 영토에 최소한 명목상 수위권만 지켰다.
491년 로마인 혈통의 관리 출신인 늙은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황제가 되었으나 새 황제는 498년이 되어서야 이사우리아족의 저항을 제대로 통제했다. 자신이 여전히 기운차게 활동할 힘이 넘치는 개혁가이자 유능한 행정가라는 사실을 드러낸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상품 거래에 범용되는 폴리스(follis) 동화의 무게를 최종 결정하여 콘스탄티누스 1세의 화폐 제도를 완성했으며, 세제를 개혁하고 사람들이 싫어하던 크리사르기론 세금을 폐지하였다. 하지만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죽을 당시 제국의 국고에는 여전히 금이 145,150 kg 있었다.
서방 영토 재정복
527년에 즉위해 로마 제국의 고토를 상당부 회복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일리리아인 농민의 아들로서 숙부 유스티누스 1세(518–527) 치세부터 권력을 쥐고 있었다. 532년에 동부 국경을 안정시키고자 유스티니아누스는 페르시아의 호스로 1세와 평화조약을 하여 사산 제국에 많은 연공을 바치기로 합의하였다. 같은 해에 황제는 니카 봉기에서 살아남았고 봉기한 사람 3만 명이 죽으면서 봉기는 끝났다. 이 성공으로 유스티니아누스의 권력이 공고해졌다. 동고트족 왕 테오다하드가 교황 아가피토 1세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보내었으나 유스티니아누스와 평화협정에 실패했으나 교황은 황제가 황후 테오도라의 지지에도 단성론자 안티모스 1세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비난 조장에 성공하였다.
533년 황제가 북아프리카 구 속주의 반달족을 축출하게 벨리사리우스 장군과 군대 15,000명을 파견하면서 서방 정복이 시작되었다. 이 사람들은 경이로울 정도로 쉽게 승리했으나 548년이 되어서야 주요 독립 부족들을 복종시켰다. 이탈리아 동고트 왕국에서 테오도리크 대왕이 죽고 그 사람의 조카이자 후계자인 아탈라리크와 대왕의 딸 아말라순타는 권력이 약한 테오다하드를 왕위에 올렸다. 535년 소규모 비잔티움 원정대가 시칠리아로 파견되어 손쉽게 승리하였으나 고트족의 저항이 커졌으며, 벨리사리우스가 로마와 나폴리을 포위하여 함락하고 라벤나를 수복한 540년에야 겨우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546년 12월 17일 동고트족은 토틸라의 지휘 아래 이내 규합하여 로마를 함락하였다. 549년 초 벨리사리우스는 결국 소환되었다. 뒤이어 551년 말 아르메니아인 환관 나르세스가 군대 35,000여 명을 이끌고 고트족을 물리쳤다. 토틸라는 부스타 갈로룸 전투에서 패사하였다. 그 사람을 계승한 테이아스도 552년 10월 몬스 락타리우스 전투에서 패하였다. 일부 고트족 부대가 계속 저항하였고 프랑크족과 알레마니족이 침입하였으나 이탈리아에서 전쟁은 결국 일단락되었다. 551년 히스파니아의 서고트족 귀족 아타나길드는 왕에 반역하고 유스티니아누스에게 도와달라고 청했다. 황제는 늙었지만, 훌륭한 군 사령관 리베리우스에게 군대를 주어 파견하여 비잔티움 제국은 헤라클레이오스 시대까지 스파니아(Spania)의 일부 지역을 점유했다.
동부에서는 로마와 페르시아간의 전쟁이 이어지다가 561년 유스티니아누스와 호스로의 사절들이 50년간 화평을 맺었다. 550년대 중반 유스티니아누스는 전장 대부분에서 승리했으나 발칸 반도만은 예외였는데 이곳은 슬라브인의 침입이 계속되었다. 559년 황제는 쿠트리구르와 스클라베니의 대규모 침략에 직면하였다. 황제는 퇴역한 벨리사리우스를 불렀으나 위기가 끝나자마자 자신이 상황을 관리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가 자신의 도나우 함대를 강화한다는 소식에 쿠트리구르인들이 우려하였으나 제국은 이 사람들에게 공물을 지불하고 강 사이에 안전한 통로를 확보한다는 조약을 조인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입법 사업으로도 유명하다. 529년 십 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설치하고 카파도키아인 요한네스가 위원장으로 삼아 고대 로마 법전을 개정하게 하여 로마법 대전(Corpus Juris Civilis)을 편찬하였다. 로마법을 수합한 이 법은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6세기에 동부 지역에서 자고로 이어져 내려오는 그리스-로마 문화의 영향력은 여전하였고 자연철학자 요한네스 필로포노스 같은 자고로 이어져 내려오는 그리스-로마 문화를 대표할 정도로 전형이 될 만한 특징이 있는 학자들도 있었으나 기독교 철학과 문화가 부상하면서 옛 문화를 압도했다. 로마노스가 쓴 성가는 성체 전례를 발전사켰고 건축가들은 니카 봉기로 파괴된 구 성당 자리에 하기아 소피아 성당을 세웠다. 하기아 소피아는 오늘날까지 건축사에서 중요한 건축물이다. 6세기와 7세기에 비잔티움 제국은 전염병 일련으로 인구가 크게 줄고 경제가 쇠퇴해 크게 약화했다.
565년 유스티니아누스가 죽자 유스티누스 2세는 페르시아에 바치는 조공을 거부하는 사이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6세기 말에는 비잔티움령으로 남은 이탈리아 영토는 반도의 1/3 정도에 불과하였다. 유스티누스 2세의 후계자 티베리우스 2세는 페르시아와 싸우면서 아바르족에게는 공물로써 회유했다. 티베리우스의 장군 마우리키우스는 동부 전선에서 활약하였으나 조공만으로는 아바르족을 달래지 못하였다. 아바르족은 582년 발칸 지역의 시르미움과 싱기두눔 요새를 함락하였으며, 투르크인들이 도나우를 건너 침입한 때 황제가 된 마우리키우스는 사산의 호스로 2세와 화평 조약을 맺어 아르메니아에 접근할 권리를 얻었으며, 602년에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을 도나우 강 이북으로 축출한 일변 서방 영토에 이민족이 재침입하자 마우리키우스는 라벤나와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 황제 대리로서 총독을 두어 제국의 영토 확보에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