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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 이야기

02. 동로마 제국(Byzantine Empire, 330~1453)

작성자관운|작성시간15.12.23|조회수56 목록 댓글 0

 

02. 동로마 제국(Byzantine Empire, 330~1453)

 

 

 

 

헤라클레이오스 시대

 

포카스가 마우리키우스를 죽이자 페르시아의 호스로우는 이를 구실로 로마령 메소포타미아 속주를 침공했다. 포카스는 비잔티움 사료에서도 줄곧 '폭군'으로 묘사될 정도로 인기가 없는 지배자였으며 원로원에서는 포카스를 목표해 줄곧 심모했다. 610년에 포카스는 카르타고에서 뱃머리에 이콘을 붙인 배를 타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온 헤라클레이오스에게 결국 폐위된다. 헤라클레이오스가 즉위하자 사산 왕조는 소아시아로 깊숙히 쳐들어왔으며 다마스쿠스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십자가를 크테시폰으로 가져갔다. 헤라클레이오스가 한 반격은 성전으로서 성격을 띄며, 기독의 아케이로포이에토스 성상이 군기로 쓰였다. (626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한 아바르족을 무찌를 때도 세르기오스 1세 총대주교가 성모 성상을 들고 수도 성벽을 돌았던 덕으로 간주됐다.) 사산 왕조의 주요 군대는 627년 니네베에서 궤멸되었고 629년에 헤라클레이오스는 성십자가를 되찾아 엄숙한 의식을 치르며 예루살렘으로 다시 옮겼다. 이 전쟁으로 양 제국 모두 국력을 소진한 후 발흥한 아랍 무슬림 군대의 침공에 무력하게 되었다. 로마인은 636년 야르무크 전투에서 아랍인에게 대패했고 634년에 크테시폰이 함락된다.

 

650년의 비잔티움 제국. 이 해에 제국은 카르타고 관구를 제외한 나머지 남부 속주를 전부 잃었다.

 

이제 아랍인은 시리아와 레반트를 확고히 장악했고 아나톨리아도 곧잘 급습했으며 674년에서 678년에는 심지어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도 공성전을 벌였다. 비잔티움 제국은 그리스의 불 덕분에 아랍 함대를 무찔렀고 우마위야 왕조와 30년간 휴전 조약을 조인했으나 아나톨리아 공격은 계속됐고 고전기의 도시 문화는 가파르게 쇠퇴했으며, 여러 도시민들은 구 도시 성곽 내의 더욱 좁은 지역을 재요새화하거나 주변 요새로 아예 이주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도시 규모도 상당히 줄었는데 618년에 이집트를 페르시아인에게 빼앗기면서 자유롭게 이용할 곡물 생산지를 잃자 인구 500,000여 명에서 겨우 40,000여 명에서 70,000여 명으로 줄었다. (629년에 이집트 속주를 되찾았으나 642년에 아랍인의 침공으로 다시 잃었다) 구 반자치 수준의 공공 제도가 무너지면서 들어선 테마 제도에 따라 아나톨리아를 각 군대가 담당한 '속주'로 분할하여 민간 업무를 담당하고 제국 행정에 직접 관리받게 되었다. 테마 제도는 헤라클레이오스가 임시변통으로 마련한 방책에서 기원했으나 7세기에 이 제도는 제국 행정의 새로운 제도로 자리 잡는다.

 

그리스의 불은 비잔티움 제국과 아랍인 간 전쟁기에 비잔티움 제국 해군이 처음으로 썼다. (마드리드 스페인 국립 도서관, 마드리드 스킬리체스)

페르시아와 뒤이어 아랍 세력을 막으려고 발칸 반도에서 상당한 병력을 빼내 오다 보니 슬라브족이 발칸 반도 남쪽까지 세력을 점차 확장했고 아나톨리아에서는 여러 도시가 소규모 요새지로 전락했다. 670년대에 불가리아인이 하자르 때문에 도나우 강 이남으로 밀려왔고 680년에는 새로이 생긴 불가리아 정착지들을 해산하려고 파견된 비잔티움 군대가 패배했다. 이듬해 콘스탄티노스 4세는 불가리아의 아스파루크 칸과 조약을 조인해 과거엔 명목상이나마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를 인정하던 수많은 슬라브 부족이 새로이 생긴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지배권하로 넘어갔다. 687~688년에 유스티니아노스 2세 황제는 슬라브와 불가리아에 원정을 단행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트라키아에서 마케도니아까지 그 사람이 어렵게 싸우면서 비잔티움의 패권이 발칸 북부에서 예전같지 못한 사정을 현로했다.

 

헤라클레이오스 황조의 마지막 황제인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중과세하고 '외부인들'을 행정직에 앉히면서 도시 귀족들의 권력을 분쇄하려고 했다. 유스티니아노스는 695년에 권력을 잃었으나 처음엔 하자르에서 다음에는 불가리아로 피신했다. 705년에 그 사람은 불가리아의 테르벨 칸의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와 권좌를 되찾고 정적을 숙청하는 공포정치로 일관했다. 유스티니아노스 황제는 711년에 도시 귀족의 지원으로 결국 재차 쫓겨났으고 헤라클레이오스 황조도 여기서 폐막했다.

 

이사우리아인 왕조에서 바실레이오스 1세 즉위까지

 

레온 3세 시대의 비잔티움 제국. 717년경. 줄이 그어진 지역은 아랍에 침공받던 곳을 나타낸다.

이사우리아인 레온 3세 황제는 718년에 무슬림에게 반격을 개시하여 주로 테르벨 칸이 도와준 덕에 그 사람의 군대로 아랍인 32,000여 명을 죽였다. 레온은 소아시아의 테마를 공고히 재조직하는 작업에 본격으로 돌입했다. 후계자 콘스탄티노스 5세는 시리아 북부에서 대승하고 불가리아의 힘을 크게 약화시켰다.

 

826년 아랍인이 크레테를 점령하고 시칠리아까지 공격했으나 86393일에 페트로나스 장군이 랄라카온 전투에서 멜리테네의 아미르인 우마르 알 아크타와 싸워 대승한 일변, 불가리아 황제 크룸의 지도로 불가리아가 제국의 큰 위협으로 재부상했으나 814년에 크룸의 아들 오모르타그가 비잔티움 제국과 평화 조약을 조인했다.

 

8세기와 9세기는 성상파괴주의 논쟁으로 종교상 논란과 분열이 극심했던 시대였다. 레온과 콘스탄티노스 황제는 이콘을 금지했으나 제국 전역에서 이코노둘레스(성상 옹호자)가 반란했다. 에이레네 황후의 노력으로 787년 제2차 니카이아 공의회가 소집되어 이콘을 받들되 숭배하지는 않게 정했다. 에이레네는 자신과 샤를마뉴의 혼인 협상을 추진했다고 하나 고백자 테오파네스를 좇으면, 황후의 총신인 아이티오스로 말미암아 이 계획은 좌절되었다. 813년에 아르메니아인 레온 5세가 성상 파괴 정책을 재추진했으나 843년에 테오도라 황후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메토디오스 1세가 우조하여 이콘을 유지하는 쪽으로 결정됐다. 성상 파괴 주의는 동서 교회가 더욱 멀어지는 사태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이 시기의 소위 포티오스 논쟁으로 말미암아 교황 니콜라스 1세 콘스탄티폴리스 총대주교 포티오스 1세가 총대주교로서 승격에 도전했다.

 

프랑크 제국의 등장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들은 이탈리아 영토에 대한 종주권 요구를 넘어 이탈리아를 회복해야 할 실지로 여겼다. 랑고바르드 왕국의 군주들은 774년 멸망할 때까지 형식적이나마 콘스탄티노플로 조공을 바쳤다. 그러나 774년에 랑고바르드 왕국을 점령한 프랑크 왕국의 왕 샤를마뉴는 8001225일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서로마 황제의 제관을 받았다. 비잔티움의 황제들은 로마 교황을 신하로 보고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비잔티움 황제들의 지시, 감독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로마 교황 레오 3세는 프랑크 족의 군주 샤를마뉴에게 황제관을 씌웠다.

 

비잔티움 황실에서는 샤를마뉴의 서로마 황제 제관 수여에 민감하게 대응하였고 샤를마뉴를 찬탈자, 가짜 황제로 규정하고 반발하였다. 서로마 황제로 인정하는 것은 거부하되, 프랑크 족의 영토와 군사력을 묵살할 수는 없어 황제임은 일단 인정했다. 공식 문서에서 비잔티움 제국은 샤를마뉴를 서로마 황제나 로마 황제가 아닌 프랑크인의 황제, 프랑크 황제라고 지칭하였다. 810년대에 와서 샤를마뉴의 딸 중 한명과 콘스탄티누스 6세 사이의 결혼 동맹이 체결되기 전까지 비잔티움에서는 프랑크 족 출신 군주를 로마 황제로 승인하기를 거절하였다. 샤를마뉴가 죽은 뒤에 다시 비잔티움의 군주들은 그 후계자인 경건왕 루트비히나 이탈리아인 루트비히를 칭할 때 렉스 또는 레기움이라 칭하여 황제 지위 인정을 거부하였다. 962년 독일 왕국의 오토 1세가 이탈리아 원정 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관을 수여받았을 때에도 역시 비잔티움 제국은 민감하게 대응하였다.

 

 

무슬림과 제국의 전쟁

 

867년 비잔티움 제국

867년에 비잔티움 제국은 동부와 서부 양방에서 구 위상을 회복했으며, 제국 방어하는 군사 구조 효율성 덕분에 황제들은 동방 재정복 전쟁을 개시할 수 있었다.

 

재정복 과정은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졌다. 크레테 섬을 잠시 재정복했다가(843) 비잔티움 군대는 보스포로스 해협에서 패배한 와중에 황제들은 무슬림의 잇따른 시칠리아 침략을 막지 못했다. (827~902) 무슬림은 오늘날 튀니지 땅을 발판 삼아 831년에는 팔레르모를, 842년에는 메시나를, 859년에는 엔나를, 878년에는 시라쿠사를, 900년에는 카타니아를, 902년에는 비잔티움의 최후 거점이었던 요새 타오르미나를 정복한 후 비잔티움 제국은 타지에서 복수에 성공하는데 이집트의 다미에타로 원정해 승리하고 (856), 멜리테네 아미르를 무찔렀으며 (랄라카온 전투, 863), 바실레이오스 1세는 유프라테스 강 쪽으로 반격했다. (870년대) 제국은 시칠리아를 잃었으나 바실레이오스 1세는 남부 이탈리아 지방은 잘 지켜내어 향후 200년간 이 땅은 비잔티움 제국 영토로 남는다.

 

904년에 비잔티움을 배반한 트리폴리의 레온이 이끄는 아랍 함대가 제국의 제2 도시인 테살로니키를 약탈하면서 제국은 시련에 처했다. 비잔티움 군대는 908년에 아랍 함대를 파괴하여 보복했으며, 2년 후에는 시리아의 라오디케이아 시를 약탈했으나 비잔티움 제국은 무슬림 세력에 형편이 바뀔 수 없을 만큼 확실하게 일격하지 못했고 이 사람들은 911년에 크레테 수복을 시도하면서 제국 군대를 대타격했듯 비잔티움 제국과 아랍 간 경계는 번갈하 반격하고 방어하는 부단히 흘러 움직이는 상황인 일변, 바랑인이 860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처음 침략하면서 제국의 새로운 위협이 되었다. 941년에 이 사람들은 보스포로스 해협의 아시아 쪽 해안에 나타났으나 금번에는 격퇴돼 907년에 비잔티움 제국이 바랑인과 외교 조약으로써 침략자를 막으면서 제고된 제국의 군사상 위상을 현로했다. 바랑인을 무찌른 사람은 유명한 장군인 요한네스 쿠르쿠아스로,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유명하게 승리하고 (943), 에데사를 재정복한(944) 일은 특히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만딜리온 성물을 되찾아와 경축받았다.

 

병사 출신의 황제인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963~969년 재위)와 요한네스 1세 치미스케스(969~976)는 제국의 영토를 시리아까지 넓히고 이라크 북서부의 토후들을 무찔렀으며, 크레테와 키프로스를 되찾았다. 요한네스 1세 치세에는 제국 군대가 남으로 예루살렘까지 위협하기도 했다. 제국 최대 위협인 파티마 왕조가 자리 잡은 동부에서 알레포 토후령과 인근 지역은 제국의 봉신국이 되었다. 수차 전쟁 끝에 바실레이오스 1세가 로마령 시리아를 평정하고자 기병 40,000명을 급파하여 제국은 아랍의 최후 위협 세력을 무찌른다. 불가리아와 시리아에서 승리해 얻은 잉여 자원을 동원해 바실레이오스 2세는 아랍인이 장악하던 시칠리아를 수복할 원정을 계획한다. 1025년에 바실레이오스 2세 몰후, 1040년대에 원정대가 출정해 당초 목적을 빈약하게나마 이룬다.

 

불가리아와 제국 간 전쟁

 

불가르인의 학살자 바실레이오스 2세 황제.

 

로마 교황청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좌 간 계속 이어진 해묵은 갈등은 새로이 기독교화한 불가리아에서 양 세력의 종교상 수위권을 놓고 재대두했다. 이 일로 894년에 불가리아의 강력한 차르 시메온 1세가 제국을 침공했으나 제국은 외교 수단을 동원해 헝가리인에게 구구해 이 사람들을 물리쳤으나 불가로피곤 전투(896)에서 비잔티움은 패배했고 불가리아인에게 연공을 바쳐야했다. 912년에 시메온은 한술 더 떠 비잔티움 제국이 자신에게 불가리아 황제인 바실레우스의 관을 부여하고 어린 콘스탄티노스 7세 황제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게끔 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차르가 한 계획은 좌절되었으나 그 사람은 트라키아를 재침공해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점령했다.

 

레온 포카스와 로마노스 레카페노스가 이끄는 거대한 원정군이 출정했으나 917년 아켈로오스 전투에서 제국군은 패하고 이듬해 불가리아는 코린토스까지 남하하여 북부 그리스를 유린했다. 923년과 아드리아노폴리스는 불가리아 군대의 손아귀에 다시금 떨어졌고 이 사람들은 924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공성전을 벌였다. 927년에 시메온이 죽자 발칸 반도 상황이 그제야 나아졌다. 968년에 불가리아는 키예프 루시의 스뱌토슬라프 1세에게 침략받았으나 3년 후에 요한네스 1세 치미스케스 황제는 도로스톨론 전투에서 루시를 무찌르고 불가리아 동부를 제국 영토로 회복했다.

 

코메토풀리 왕조의 지도로 불가리아는 제국에 재저항했으나 바실레이오스 2(976~1025)는 불가리아의 복종을 우선 과제로 삼았으나 바실레이오스의 첫 불가리아 원정대는 트라야누스 문에서 치욕스럽게 패배한 후 몇 년간 황제는 아나톨리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느라 불가리아가 발칸 지역에서 자신의 영역을 넓히는 상황을 좌시할 수밖에 없었다. 양 세력 간 전쟁은 거의 20년 가까이 질질 끌었다. 비잔티움 제국은 스페르케이오스 전투와 스코폐 전투에서 승리해 불가리아 군대를 형편이 바뀔 수 없을 만큼 확실하게 약화시켰으며, 해마다 작전을 수행해 불가리아의 거점을 조직 성격을 띠게 줄여 나아가 1014년 클레이디온 전투에서 불가리아는 결국 완벽히 패배했다. 차르 사무일은 한때 용맹했던 불가리아 군대의 참상을 보고 충격으로 죽었다. 1018, 불가리아의 최후 요새가 항복했고 이 나라는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 승리로 비잔티움 제국은 헤라클레이오스 시대 이래 처음으로 도나우 강 국경선을 확보했다.

 

키예프 루시와 제국의 관계

 

850년에서 1100년까지 비잔티움 제국은 흑해 북부 해안에서 발생한 키예프 루시와 이런저런 관계한다. 양국의 관계는 동슬라브족사에 오래도록 영향을 끼쳤다. 비잔티움 제국은 키예프 공국의 주요 무역과 문화 교류 상대가 재빨리 되었으나 늘 사이좋게 관계하지는 않았다. 양 세력은 968년에서 971년에 불가리아에서 전쟁했고 루시인은 흑해 해안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략하기도 했다. 대개 제국은 루시의 침입을 격퇴했으나 루시인은 보통 자기네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무역 조약을 조인했다.

 

포르피로게니타 안나 공주와 블라디미르 대공이 혼인하고 뒤이어 루시가 기독교화하면서 루시와 비잔티움의 관계는 돈독해졌다. 비잔티움 제국의 성직자, 건축가, 예술가가 루시의 수많은 성당과 교회 건축에 초빙되면서 비잔티움 문화가 전파되었다. 수많은 루시 사람들이 비잔티움 군대에 용병으로 복무한 중에는 유명한 바랑인 근위대도 있었다.

 

절정

 

이제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는 동으로는 아르메니아, 서로는 남부 이탈리아의 칼라브리아에 이르렀다. 제국은 불가리아를 정복하고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의 일부 지역을 병합했으며, 안티오케이아 바깥에서 이집트 침략군을 궤멸시켰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아랍의 시칠리아 지배를 치욕으로 간주한 바실레이오스 황제는 제1차 포에니 전쟁 이래 로마의 땅이었던 이 섬을 수복하기로 계획했으나 1025년에 그 사람이 죽으면서 시칠리아 수복은 계획에 그친다.

 

11세기에는 종교상으로도 중요한 시기였다. 1054년에 동서 교회의 갈등은 돌이킬 수 없는 위기로 치달았다. 이미 조직 분리가 공식 선언된 바 있었으나 그 해 616일 토요일 오후에 성체 의례 중에 교황 특사 세 사람이 성 소피아 성당에 들어와 제단에 파문 교황 칙서를 놓으면서 수백년간 이어져온 동서 교회의 분리의 분수령이 되었다.

 

위기와 분열

 

그 뒤로 비잔티움 제국은 시련을 겪는데 테마 제도가 부실해지고 군대를 소홀히 한 탓이 컸다. 니케포로스 2세와 요한네스 치미스케스, 바실레이오스 2세는 기민하게 군대 단위(타그마타)를 개혁하여, 방어를 중시하고 시민군을 직업군으로 개편하며, 원정군을 점차 용병으로 충원했으나 용병은 비싼 데다가 9세기에 침략 위험이 줄어들면서 대규모 진지와 값 비싼 요새를 유지할 필요성도 감소했다. 바실레이오스 2세는 사망 당시 풍부한 재정을 확보해 두었으나 후계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았다. 바실레이오스의 바로 뒤를 이은 황제들은 아무도 군사상·정치상 역량을 갖추지 못했으며, 제국의 행정은 점차 문관의 손으로 넘어갔다. 비잔티움 경제를 되살리려는 노력은 물가 상승만 초래했고 금화 가치를 떨어뜨린 판국에 군대는 불필요하게 재정에 부담을 줄 뿐 아니라 정치상 위협으로도 비쳐 결국 자국 군대는 정리된 대신 계약에 따라 외국인 용병을 불렀으며, 제국은 새로 등장한 야심찬 외적의 침략에 직면한다. 8세기 초에 이탈리아에 나타난 노르만족이 남부 이탈리아의 비잔티움 영토를 침공했다. 1054년에 동서 교회 분열이 일단락되기까지 양 교회가 싸우는 사이에 노르만족은 느리지만 꾸준히 비잔티움의 이탈리아 영토로 진출한 일변, 1069년에 비잔티움 제국은 크로아티아의 페타르 크레쉬미르 4세의 침공으로 달마티아 해안 도시의 영향력을 잃었으나 최대 재앙은 소아시아에서 벌어졌다. 1065년과 1067년에 셀주크 튀르크는 제국 국경을 넘어 아르메니아로 첫 원정을 감행한 사태로 말미암아 아나톨리아의 군사 귀족이 중시되면서 군사 귀족 출신의 로마노스 디오게네스가 황제로 선출됐다. 1071년 여름에 로마노스는 셀주크 세력을 정규전으로 포섭하고자 동부 지역에 대규모 군사 작전을 개시했다.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로마노스는 술탄 알프 아르슬란에게 경이롭게 패하고 생포됐다. 알프 아르슬란은 황제를 예우했고 비잔티움 제국에 가혹한 조건을 강요하지도 않았으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미카엘 두카스를 지지하는 정변이 일어났고 미카엘 두카스에 대항해 니케포로스 브리엔니오스와 니케포로스 보타네이아테스가 반발했다. 1081, 셀주크는 동의 아르메니아에서 서의 비티니아까지 아나톨리아 고원 전체를 석권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불과 88 km 떨어진 니케아에 도읍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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