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오토 에두아르트 레오폴트 폰 비스마르크(Otto Eduard Leopold von Bismarck, 1815~1898)-정계 진출
작성자관운작성시간16.01.24조회수424 목록 댓글 002. 오토 에두아르트 레오폴트 폰 비스마르크(Otto Eduard Leopold von Bismarck, 1815~1898)-정계 진출
공직 생활 재개와 통합지방의회 의원 활동
결혼식 몇 주 전부터 비스마르크는 다시 공직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는데, 이 무렵 1847년 5월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철도 거설에 필요한 재원으로서 공채를 발행하기 위해 프로이센 통합의회를 개원한다.'는 칙령을 발표했고 그에 따른 선거가 각 지방에서 실시되었다. 당시 비스마르크는 융커들로부터 충분한 신임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통합지방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통합지방의회 의원들 중 어느 한사람이 지병으로 활동을 하지 못할 경우 그를 대신해 보궐 의원으로 활동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실제로 브라우휘트시(Brauchitsch)라는 의원이 지병으로 의원 활동을 포기함에 따라 그는 1847년 5월 8일 작센의 통합지방의회 의원에 선출되었는데, 이는 독일 역사상 최초의 실제적 대의회였던 통합지방의회는 온건적 성향의 자유주의자들이 주도했다. 그러므로 왕권 및 융커 계층의 이익을 대변했던 우익 세력은 상대적으로 소수에 불과했다. 작센의 통합지방의회 의원에 진출한 비스마르크는 보수적 성향을 보였는데, 그는 헌법을 인위적으로 제정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과 국왕 및 융커 계층의 봉건적 관점을 방어해야 한다는 관점을 피력했다. 여기서 그는 지방의회 의원들의 강한 반발을 야기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이러한 비판적 시각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국왕 및 귀족 계층의 권한 증대를 향후 자신이 펼쳐야 할 주된 과제로 인식하는 민첩성도 발휘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가 참여한 통합지방의회는 철도 건설을 위한 공채 발행에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예상보다 일짝 활동을 그만뒀는데, 이는 통합지방의회 의원들이 철도 건설을 위한 공채 발행에 동의할 법적 권리가 자신들에게 있지 않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3월 혁명
1848년 3월 13일,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에서 프랑스의 2월 혁명의 영향을 받아 민중봉기가 발생했다. 3월 18일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혁명의 열기게 거세지자 이에 위협을 느껴 두려움 속에서 자발적으로 자유주의적 제 권한을 보장하는 헌법 제정을 승인했다. 아울러 국왕은 프로이센이 독일을 연방국가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할 것임을 공언하기도 했으며, 베를린에 주둔 중인 군대를 포츠담으로 철수시키겠다는 약속도 국민들 앞에 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와는 달리 혁명적 상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으나 여기서 뜻밖의 사태를 맞게되는데, 군대가 민중들에 대한 우발적인 발포로 상황이 급반전돼버린다. 군대는 도시 여러곳에 바리케이트를 설치했고, 이어서 격렬한 시가전도 펼쳐졌다. 이러한 심각한 사태속에서 인식한 국왕은 그러한 요구를 수렴했을 뿐만 아닌 그 자신이 독일 제후, 민족과 함께 독일 통합에 매진할 것도 약속했다. 다음달 4월 초, 자유주의자들이 대거 참여한 신내각이 베를린에서 구성되었고 통합지방의회 소집을 위한 작업도 병행되었다.
3월 혁명 전후 활동
1848년. 비스마르크와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베를린에서 전개된 이러한 상황속에 비스마르크는 사태가 크게 번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혁명세력을 붕괴시키기 위해 자신의 충실한 소작농들을 무장시켜 베를린으로 진격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구상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파악한 후 포츠담에 가서 군부의 핵심인사들인 묄렌도르프, 프리트비츠 등 인사들과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 내용은 혁명 세력을 타파할 반혁명적 소요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묄렌도르프는 국왕의 명령없이는 어떠한 군사적 행동을 펼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결국 비스마르크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실현시키기 위해 국왕을 알현하려 했다. 국왕을 알현하기 위한 노력 끝에 그는 국왕과 몇분간의 독대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여기서 비스마르크는 민중봉기를 군사를 동원해 무력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국왕은 이에 반대했다. 특히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자신이 프로이센의 상황을 알기 때문에 사태를 파악 하고 있음을 언급했고 비스마르크는 황족인사들을 만나 자신의 입장을 밝혔으나, 역시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아져 거부당했다. 결국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고 고향인 쇤하우젠으로 돌아왔다. 이후부터 비스마르크는 혁명의 진행 과정을 방관자적 입장에서 지켜보아야만 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및 프로이센 지방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간헐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밝히는 데 주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입장을 실현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비스마르크는 1848년 8월 18일부터 개최된 지주의회에 참석하여 자신의 보수적 관점을 다시금 피력했는데 이는 그가 지주의회에서 '무력으로 반혁명 세력을 타파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아울러 그는 라인 지방의 주 장관이었던 클라이스트 레초프 주도로 간행되기 시작한 '십자신문'의 핵심적 인물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게를라흐 형제가 창당한 보수당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한편, 자유주의자들은 이에 고무되어 1848년 5월 헌법제정과 통일을 논의하기 위해 500명의 대표자를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에 소집했다. 대부분 교육받은 중간계급 출신이었던 대표들은 대독일주의와 소독일주의 통합 방안 등으로 크게 나뉘어 파벌이 형성되어 분열을 야기시켰다. 또한 국민의회에 자유주의 세력의 대표들은 입헌군주제에 입각해서 독일연방을 대표할 황제로 프로이센 국왕을 추대할 것을 결정했지만,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이를 거절했다. 힘이 아닌 지식과 양심에 입각했던 대표들이 제공하는 황제의 관은 '돼지의 머리에나 어울린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또한, 프로이센의 융커세력 등 보수적인 귀족계층들은 강력한 군대와 관료제 기구를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유주의자들이 주도한 국민의회는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었다. 이후 독일의 봉건 제후들은 군대의 힘으로 혁명을 분쇄하기 시작하고 끝내 혁명세력은 국가권력의 물리력 앞에서 무력함이 증명되었고 중산층의 자유주의 개혁을 통하여 민족주의를 추구하고자 했던 시도가 깨지고 기존의 보수세력이 승리하면서 자유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은 궁극적으로 분열하고 보수화 되었다. 그러나, 이후 보수적인 체제를 유지하는 프로이센은 나름대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포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혁명이 아닌 점진적인 개혁을 통해서 제도화되었다. 이 당시 비스마르크는 독일의 통합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았지만, 프로이센의 위상 및 독립을 제한할 수 있는 통일 방안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아울러 그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독일권에서 동등한 지위를 확보해야 한다는 관점으로 입장을 밝혔는데 이는 그 자신이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에서 제기된 통합 방안, 즉 대독일주의와 소독일주의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849년 2월 프로이센 통합지방의회 의원으로 선출된 비스마르크는 향후 정치에 전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는데 그러한 입장은 자신이 이미 극우세력의 지지를 확보했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에 따라 그는 자신의 영지인 큐르츠 지방을 임대한 후 가족들과 함께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외교관 활동
프랑크푸르트 연방의회 대사 활동
1851년 5월 15일, 프랑크푸르트 연방의회 대사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프로이센 정부가 당시 외교정책에 문외한이었던 비스마르크에게 대사 직책을 맡은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결정이었는데, 사실 그를 연방의회 대사로 임명한 것에 제안한 자는 레오폴드 게를라흐로 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는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게 비스마르크의 등용을 적극 추천했는데 이는 비스마르크만이 독일권에서 프로이센의 위상을 높일 수 있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프로이센 국왕 역시 비스마르크의 정치적 성향 및 역량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게를라흐의 제청을 수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 후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우선적으로 정리해야만 했다. 당시 오스트리아 정치가들은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와 대등한 국가가 아니며 앞으로도 그렇게 될 수없다는 입장을 피력했었고 비스마르크 역시 이를 인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비스마르크는 독일권에서 프로이센의 위상 증대에 필요한 방안을 강구하고자 했었다. 독일의 통일방식에 대해 오스트리아와의 협조를 주장하였지만 결국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을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는다는 판단을 갖게 되어 오스트리아와 자주 대립하였다.
러시아와 프랑스에서의 외교공사 활동
1859년 1월 23일 러시아 주재 프로이센 공사로 임명되었다. 3월말 임지에 도착한 비스마르크는 러시아 외교 정책의 근간을 파악하려는 노력을 펼쳤고 거기서 자신의 관점을 현실화 시키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도 인지하게 되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러시아 제국의 차르 알렉산드르 2세와 두터운 친분 관계를 맺음으로써 러시아와 프로이센 사이의 우호적 관계 정립에도 크게 기여했다. 러시아 공사로서의 임기를 끝낸 비스마르크는 1862년 프랑스 주재 프로이센 공사로 근무했다. 근무 기간은 채 1년도 되지 않았지만, 이 시기 그는 나폴레옹 3세의 정책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여기서 그는 외교적 업적을 통해 국내 문제를 해결하려는 나폴레옹 3세의 정책 운영과정을 세밀히 관찰해 향후 자신의 정책에도 활용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나폴레옹 3세의 정책의 핵심적인 구도는 실제로 훗날 비스마르크가 수상이 된 후 1860년대 초 군제개혁 과정에서 야기된 의회와의 충돌 및 1870년대 의회 내 반대 세력과의 대립이라는 내정문제를 외교적 업적으로 통해 해결하려한 것 등에서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