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오토 에두아르트 레오폴트 폰 비스마르크(Otto Eduard Leopold von Bismarck, 1815~1898)-프로이센 수상
작성자관운작성시간16.01.24조회수150 목록 댓글 003. 오토 에두아르트 레오폴트 폰 비스마르크(Otto Eduard Leopold von Bismarck, 1815~1898)-프로이센 수상
군제개혁으로 인한 국왕과 의회의 대립
1859년 호헨촐레른 가의 새로운 지배자로 떠오른 빌헬름 1세는 섭정 지위에 있을 때 전쟁장관과 육군 참모총장으로 임명했던 알베르트 폰 론(Albrecht von Roon)과 헬무트 폰 몰트케로 하여금 프로이센군을 증강시킬 수 있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강구하도록 지시했다. 빌헬름 1세의 명령을 받은 알베르트 룬은 군사력 증강 계획과 그에 따른 예산 확보 방안을 1860년 2월 10일 하원에 제출했다. 그 내용은 '1817년 이후 매년 4만 명으로 고정된 신규 징병 규모를 6만 5천 명으로 늘리고 일반 병사들을 일선 부대에서 3년간 복무 시킨 후 예비군 4년간, 그리고 지방군에서 7년간 복무하게끔 제도를 고친다.'는 내용안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규모가 확대된 군대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매년 추가 군사비 명목으로 950만 탈러(taler)를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병력 증강안에 대해 자유주의자들은 원칙적으로 견해를 같이했으나 그들은 예비역 및 후비역 축소가 해방전쟁(befreiungskrieg)의 전통을 계승하고 군제 개혁가 등의 이상이었던 시민과 군대가 결속되었던 전통에 위배된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자유주의자들의 이러한 우려에 대해 빌헬름 1세는 엄격한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군대만이 대내외 문제에 대처할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반론을 제기했다. 이 때문에 군제개혁을 단순한 기술적, 군사적 범위를 넘어 '시민의 군대인가, 국왕의 군대인가'라는 제도 이념적인 갈등과 대립을 함축하게 되었다. 하원은 국왕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군비증강을 위한 잠정 예산 승일을 가지고 빌헬름 1세와 타협하고자 했으나 빌헬름 1세는 의회 동의없이도 군제개혁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즉, 그는 군제 개혁을 국왕의 통수권으로 간주한 것이다.
수상 임명
1860년의 비스마르크.
군비 확장 문제로 국왕 빌헬름 1세와 의회와 충돌하던 시기에 전쟁장관 알베르트 폰 론(Albrecht von Roon)은 비스마르크만이 이러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1862년 9월 18일, 당시 프랑스에 있던 비스마르크에게 '지체하면 위험하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내 조속히 귀국할 것을 종용했다. 아울러 알베르트 론은 빌헬름 1세에게 비스마르크가 당시 제기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적의 인물이라는것도 주지시켰다. 그러나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의 재상임명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비스마르크 역시 빌헬름 1세가 자신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알베르트 론으로부터 전보를 받은 즉시 베를린으로 출발했다. 베를린에 도착한 비스마르크는 9월 20일부터 베를린 근처의 바벨스베르크(Babelsberg)성에 머무르면서 당시 국왕과 의회 사이의 대립을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했다. 9월 22일 빌헬름 1세는 자신의 계획인 왕권 양위를 실행하기에 앞서 비스마르크와 서너 시간에 걸친 독대를 했다. 여기서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에게 군제 개혁을 완수할 장관으로 취임할 수 있는가를 물었다고 한다. 또한 비스마르크가 의회의 다수 세력에 의해 관철된 사안을 번복시킬 수 있는지도 확인하고자 했다고 한다. 빌헬름 1세의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비스마르크는 '의회와 대립과정에서 군주를 위험에 놓이게 하느니 차라리 그와 더불어 몰락하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아울러 그는 빌헬름 1세에게 의회의 기능을 무시한 독재의 시대를 한시적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것도 강조했다. 이러한 비스마르크의 확고한 자세는 빌헬름 1세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받았다. 1862년 9월 24일,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재상으로 임명되었다.
프로이센 수상으로서의 활동
프로이센 수상 시절때 비스마르크.
프로이센 수상으로 임명된 그는 예산위원회에서 국가 예산 중 군사비 항목이 삭감된 것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명백히 밝혔다. 즉 그는 1862년 9월 30일 의회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을 하였다.
“ (....)헌법에는 의회에 대한 해산권을 연달아 12번까지 규정하고 있습니다만은 이는 실제로는 온당치 않은 일입니다. 예산안의 편성이라고 하는것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법에는 편성안에 대한 거부권의 행사횟수를 제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몇몇 의원분들께서는 이를 이용하여 상비군은 무용한 것이며 따라서 이에 필요한 예산 역시 불필요한 것이라는 주장을 통과시키려고 하십니다. (....) 헌법이 위기에 놓여 있다고 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고, 오히려 명예롭기까지 한 것입니다. 우리는 헌법을 무리하게라고 지켜야만 하는 것인 양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아주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론은 바뀌는 법이며, 신문이 보도한 것을 여론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 국민을 대표하는 의원의 사명은 일반인의 목소리를 지도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행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군비가 빈약한 우리 몸에 너무 큰 것이라 해도, 그것이 우리에게 이로운 한, 우리는 그것에 익숙해지려는 정열을 가졌으며, 또 감히 그렇게 하고자 합니다. 독일이 현재의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프로이센의 자유주의가 아니라 그 군비입니다. 빈 회의 이래 우리의 국경은 정상적인 국가에 어울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시대의 중요한 문제들은 더 이상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며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1848년과 1849년에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당면한 문제들은 오직 철과 피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발언은 그 유명한 ‘철혈정책’발언으로 훗날 그가 '철의 수상'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하원의 반발로 차기 연도 예산이 확정되지 못한 상태에서 비스마르크는 상하 양원의 불일치로 예산이 통과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한 헌법규정이 없음을 파악했다. 따라서 그는 하루라도 국가 통치가 중단되어서는 안된다는 결점이론을 부각시켰던 것이다. 여기서 그는 "프로이센이 영국이 아니기 때문에 베를린 정부는 런던 정부처럼 의회에 대해 책임을 지지않아도 되며 헌법적인 교착 상태가 초래될 경우 오직 국왕만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는 입장도 밝혔다. 이후 그는 긴급권을 발동하여 예산 승인 없이 국가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의회의 예산권은 무력화 되었고 군제개혁을 둘려싼 분쟁은 헌법투쟁으로 비화되었다. 비스마르크는 관료와 군대를 장악하고 예산 불승인에도 불구하고 조세 징수를 감행했다. 이에 자유주의자들은 납세 거부를 국민들에게 호소했으나 그러한 시도는 비스마르크의 탄압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는 사실상 자유주의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고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상황이 되었다. 1863년 8월,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독일연방의 개혁을 논의하기 위해 전체독일군주회의를 프랑크푸르트에서 개최했다. 회의의 주요 의제로는 첫째, 정례적인 제후의회의 소집, 둘째, 집행권을 보유한 '5인 집정부'설치, 셋째, 민족주의적 감정을 완화하기 위해 각국 의회에서 선출된 300명의 의원으로 자문회의를 구성하는 것 등이 선정되었다.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이러한 제의에 대해 독일권 대다수 국가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그에 따라 이들 국가의 군주들은 제후의회에 참석했으나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의 조언에 따라 회의 참석을 거부했다. 그러나 회의에 참석한 군주들로부터 다시 초청을 받게 됨에 따라 그의 결심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에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국왕이 회의에 참석할 경우 이는 단지 독일권에서 오스트리아의 위상만 높여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견해를 밝혔다. 당시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1세가 자신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사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이는 빌헬름 1세에게 커다란 갈등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비스마르크 없이는 국정운영이 돌아갈 수 없을뿐더러 비타협적인 의회와 다시 대립해야 했기 때문이다. 장시간동안 비스마르크와의 개인면담 끝에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의 의견에 따라 제후의회에 불참했다. 한편, 제후의회는 프로이센 국왕의 참여없이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고 오스트리아 빈 정부가 제출한 의안 역시 통과되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승리는 프로이센의 참여없이 아무것도 성사될 수 없다는 것이 현실적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 의안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프로이센-덴마크 전쟁
1864년 2월 16일부터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와 더불어 덴마크와 전쟁을 벌였다. 그 이유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9세가 1863년 11월 16일 슐레스비히 공국을 덴마크에 편입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비스마르크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를 당시 제기되고 있던 독일 통합과 연계시키려는 의도도 가지고 있었다. 이 전쟁은 같은 해 8월 1일에 종료되었고 덴마크의 소유령이면서 독일 연방의 일원이었던 슐레스비히는 프로이센의 신탁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승리의 대가로 홀슈타인에 대한 신탁 통치권을 확보했는데 이는 향후 프로이센과의 대립을 유발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이 당시 비스마르크는 독일권에서 오스트리아가 지향하는 의도를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독일주의원칙에 따른 독일권의 통합을 지향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관점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도 불가피하다는 판단을 했는데, 이는 오스트리아 빈 정부가 소독일주의원칙에 따른 독일 통합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빈 정부가 독일 통합을 진정으로 원하지 않고 있다는 확신을 가진 비스마르크는 군사력 강화 정책을 실시했다. 아울러 그는 1865년 10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를 비밀리에 만나 '보오전쟁이 발발할 경우 프랑스의 중립'을 약속받았고, 1866년 4월 8일에는 이탈리아 왕국과 3개월간의 한시적 군사동맹 체제를 체결하여 오스트리아가 패전할 경우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지방 합병도 인정한다는 약속을 맺었다. 또한, 러시아 제국과의 친선관계는 비스마르크가 1859년부터 약 3년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대사로 근무했을때부터 친선을 맺었기 때문에 이미 구축된 상태였다. 1866년 5월 7일, 페르디난트 코헨블린트라는 대학생이 베를린의 운터덴린덴 거리에서 비스마르크를 암살하고자 몇 발의 총을 쏘았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기적과도 같이 부상을 입지 않았고 코헨블린트는 그자리에서 체포되었고, 코헨블린트는 감옥에서 자살했다.
1866년 6월 21일 비스마르크는 의회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 군대를 홀슈타인으로 출병시켜 보오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오스트리아는 즉시 독일 연방의회를 개최하여 프로이센의 침략 행위를 규탄했고 참여한 국가들 대다수를 자국 측에 가담시켰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군의 신식무기와 신속한 작전에 밀려 3주 만에 홀슈타인령을 상실했다. 이어 7월 3일에는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주력군대는 몰트케가 지휘한 프로이센 군대에 대패했다. 이 전투가 끝난 후 비스마르크는 프랑스 나폴레옹 3세의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 1866년 8월 23일 오스트리아와 프라하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오스트리아가 주도하는 독일연방은 해체되었을 뿐만 아닌 오스트리아 역시 독일 통일 문제에서 배제되었다. 한편, 쾨니히그레츠 전투가 시작되는 날 실시된 하원 선거에서 진보적 성향의 정당은 참패했고 보수파는 대약진을 했다. 비스마르크는 이 기회를 이용해서 1862년 이후부터 예산 승인 없이 사용한 경비에 대해 '사후승인'을 받는 안을 1866년 9월 3일 의회에 제출해 다수결의 승인도 받아냈다. 이후 비스마르크는 자유주의자들과 타협했고 그로써 의회는 프로이센 국왕의 대권, 특히 군 통수권을 승인하고 군제 개혁 역시 기정사실화 되었다.
북독일연방 결성
붉은색이 북독일 연방이며, 남독일의 국가들과 알자스-로렌은 1871년 북독일 연방과 함께 독일 제국으로 편입되었다.
독일 연방이 붕괴된 이후 독일권은 마인 강을 경계로 남북 두 개의 블록으로 나뉘었다. 비스마르크는 1866년 10월부터 마인 강 이북의 영방들과 조약을 체결하여 연방 조직을 형성했다. 이에 따라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작센, 하노버, 쿠어헤센, 나사우 등을 포함한 22개 영방으로 구성된 북독일연방을 결성했다. 북독일연방은 단순한 국가연맹체였던 독일 연방과는 달리 중앙 권력을 갖춘 연방 국가의 성격을 가졌다. 연방 의장은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가 차지했는데, 그에게는 국제법상 연방을 대표하고 전쟁과 평화를 선포하고 체결할 수 있는 권한 및 연방군에 대한 최고 지휘권, 법률안 선포권, 연방 수상 임명권 등 여러 권한이 부여되었다. 연방 각 정부의 대표로 구성된 연방참의원과 보통, 평등 선거에 의해 선출된 제국의회(라이히스타크)는 입법권을 장악했다. 따라서 의사 진행의 주도권은 프로이센이 북독일 연방에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권력행사도 가능하게 되었다. 이와 반대로 마인 강 이남 지역에서는 정치적 통합이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남부 독일 국가들, 특히 바이에른, 바덴, 뷔르템베르크, 헤센-다름슈타트 등과 비밀 공수동맹을 맺고 프랑스 나폴레옹 3세의 야심에 대비하고자 했다. 아울러 그는 1867년에 개편된 관세동맹을 통해 이들 국가들을 북독일 연방에 결속시킬 수 있었다. 이로써 관세 및 통상에 국한된 통합이었으나 내용적으로는 남부 독일 대표들을 참여시킨 보다 확대된 북독일 연방 및 프로이센이 군림하는 전 독일적 연방 국가이 원형이 창출되었다.
보불전쟁
북독일 연방 결성 당시 독일권의 상황 변화에 대해 프랑스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사실 프랑스는 자국과 인접한 독일권에서 강력한 통일국가가 등장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따라서 프랑스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간의 전쟁을 휴전 주선하면서 그것의 반대급부로 라인 강 좌안 지역을 강력히 요구했다. 아울러 프랑스 정부는 프로이센의 강대국화를 막기 위해 라인 강을 경계로 한 독일 문제 처리에 개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1866년 8월에 프라하 조약 체결할 당시 나폴레옹 3세가 요구한 라인 강 좌안지대의 할양을 거절했다. 대신 그는 구 독일 연방과 관세동맹의 가입국으로서 네덜란드 지배하에 있던 룩셈부르크에 대한 프랑스의 야욕을 묵인했다. 이에따라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 동북방의 경계를 변경시키기 위해 1867년 9월 네덜란드로부터 룩셈부르크를 매입하려고 했다. 비스마르크는 그러한 매입을 용인할려 했으나 북독일 연방은 동의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국제 여론은 나폴레옹 3세에게만 불리하게 작용했다. 이후 영국의 중재로 룩셈부르크는 중립국으로서의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비스마르크에 대한 기대가 무너짐에 따라 프랑스와 프로이센 간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 당시 비스마르크는 프랑스가 독일 통합에 대해 부정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통일 국가 독일을 저지하려는 의도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868년, 스페인에서 혁명이 일어나 부르봉 왕가는 쫓겨났고, 혁명 지도자들은 프로이센 빌헬름 1세 국왕의 사촌인 레오폴드 공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제안하였다. 레오폴드 공은 이를 거절했는데, 비스마르크는 이 소식을 듣고 전쟁의 좋은 구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스페인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빌헬름 1세는 반대했지만, 비스마르크는 1870년 6월 21일에 수락발표를 해버렸다. 프랑스는 이에 반발하여 프로이센 인의 스페인 왕위 계승을 철회하라는 문서를 보냈다. 7월 12일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철회하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레오폴드 공은 스페인의 왕이 되지 못했고, 스페인에서는 1871년 혁명가 아마데오 1세가 왕으로 선출되었다. 1870년 7월 12일, 프랑스 대사 베네데티는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가 머무르고 있던 '엠스 온천'에 가서 '호헨촐레른 가문이 향후 스페인 왕위 계승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보증을 받아 내려고 했다. 빌헬름 1세는 프랑스 대사의 무례한 행동을 즉시 비스마르크에게 알렸고 비스마르크는 이를 왜곡시켜 발표했다. 즉, 비스마르크는 프랑스 대사가 빌헬름 1세를 모욕했기 때문에 빌헬름 1세 역시 이에 걸맞게 맞대응하겠다는 내용으로 발표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서 양국 사이의 대립은 첨예화 되었고 결국 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는데, 이것이 보불전쟁이다.
나폴레옹 3세와 비스마르크. 스당(Sedan)에서.
일찍부터 개전을 예견했던 비스마르크는 남부 독일 국가들과 비밀리에 체결한 '공수동맹'에 따라 이들 국가들로부터 군사적인 지원을 받았다. 아울러 그는 러시아 제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로부터 사전에 중립을 약속받았다. 또한 그는 몰트케 장군에게 전쟁 준비를 철저히 할 것을 명령했고 그 결과 독일 연합군은 병력, 장비, 훈련 등에서 프랑스군을 압도했다. 따라서 전쟁이 시작된 지 2개월도 채 안되어 1870년 9월 4일, 나폴레옹 3세는 8만 6천 명의 프랑스군과 함께 스당(Sedan)에서 항복하고 강화를 제의했다. 그러나 프랑스에 대해 철저한 타격을 가하고자 했던 비스마르크는 강화 제의를 거부하고 이듬해 1871년 1월 29일 프랑스 수도 파리 시를 점령했다. 하지만, 유럽 국가들이 중립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판단하에 비스마르크는 가능한 한 빨리 전쟁을 종결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1871년 5월 10일 비스마르크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프랑스와 알자스-로렌 지방의 할양 및 50억 프랑의 배상금 지불을 내용으로 하는 조약을 체결하고 전쟁을 종결시켰다.
독일제국 선포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의 독일제국 선포식 (하얀 제복을 입은 이가 비스마르크, 그의 옆은 몰트케 장군)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후들에게 추대되는 형태로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가 독일제국 황제로 즉위함으로써 제국을 선포하였다. 이로써 '독일 제2제국'이라 불리는 독일제국이 성립했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탄생한 독일제국은 4왕국, 18공국, 3자유시 등 25개의 국가와 2제국령(알자스-로렌)으로 구성된 연방 국가였다. 비스마르크는 1871년 독일제국 제국수상이 되었다. 이 당시 독일제국의 수상은 프로이센 수상도 겸임했다. 또한 비스마르크는 의회가 아닌 황제에게만 행정적 책임을 졌기 때문에 황제와 더불어 국정을 실질적으로 운영해 나갈 수 있었다. 한편, 북독일 연방이 창설된 이후부터 비스마르크를 지속적으로 지지해온 국민자유당은 제국 창건과 더불어 당세를 비약적으로 확장시켰다. 비스마르크는 국민자유당의 절대적 지지를 토대로 경제 정책과 법률 정비에 박차를 가했고, 1871년 그는 마르크를 통화 단위로 채택하고 다음해에는 은본위 제도를 금본위 제도로 전환시켰으며 1875년에는 제국은행도 설립했다. 또한 각 지방마다 달랐던 도량형도 미터법으로 단일화 시켰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법제적 통일이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에 점진적인 개혁을 채택했다.
독일제국 수립 후 그의 정책
비스마르크는 1871년부터 1890년까지 독일 제국의 초대 총리로 있었다. 그는 통일 독일의 내부를 통합시키려고 했다. 또한 통일 이후 비스마르크는 더 이상 전쟁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 그는 노련한 외교정책을 펼쳐서 프랑스를 고립시키려 했고, 유럽의 세력균형을 이루어 평화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외교 정책
통일을 위해 수많은 피를 흘린 비스마르크는 통일 후에는 사람이 바뀐듯 평화 애호가가 되었다. 그는 삼제동맹, 독일-오스트리아 동맹, 삼국 동맹, 이중보장조약 등 동맹과 협상관계를 체결하여, 숙적이었던 프랑스의 고립화를 꾀하고 독일 지위를 튼튼하게 함으로써 국력을 충실히 하려 하였다. 그리고 러시아-터키 전쟁(1877) 후에는, 베를린회의를 주재하여 '공정한 중재자'의 역할도 했다. 그러나 그의 외교 정책은 비스마르크가 아니면 유지하기 힘든 어려운 정책으로서 후계자가 비스마르크 만큼 훌륭해야 했다. 비스마르크 사임 후 독일제국은 그만한 역량을 갖춘 재상을 가지지 못했고, 프랑스를 고립시키기 위한 외교 정책이 하나씩 허물어지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식민지 경영
그는 원래 현상유지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를 확장하여 아프리카에 토고·카메룬(1884), 독일령 동아프리카(1885, 현재 탄자니아), 독일령 남양 제도와 독일령 서남아프리카(현재 나미비아) 등을 경영하였다. 그의 집권 아래 독일 공업은 유럽에서 가장 발전하였으므로, 비스마르크 시대 말기에는 그의 평화정책에 반대하는 식민주의자가 늘어나 그를 중상하였다. 독일령 동아프리카는 1918년에 영국, 프랑스, 벨기에에 할양되었으며 독일령 남양 제도는 미국과 일본, 오스트레일리아에 할양되었다.
국내정책과 문화투쟁
그에게는 국내에 많은 반대 세력이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반대 세력인 특히 남부 독일을 중심으로 한 로마 가톨릭 교회신자를 억압하기 위하여 가톨릭 중앙당과 로마 가톨릭교회에 공격을 가하였고, 1872년 이후 벌어진 이 투쟁을 '문화투쟁(Kulturkampf)'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투쟁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개신교의 영향력이 큰 프로이센에 대해 종교를 이유로 분리주의적 태도를 취한 데서 시작되었다. 비스마르크는 이에 대응해 수많은 로마 가톨릭교회 수도원을 폐쇄하고 주교와 수사들을 구속하고 예수회를 추방했다. 이에 맞서 로마 가톨릭교회신자들은 교회를 지키려고 가톨릭 중앙당을 중심으로 뭉쳐서 저항했다.이러한 가톨릭 교회 탄압에 대한 불만이 커졌고, 더욱이 독일 의회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세력이 강해지자 그들에 맞서기위해서 가톨릭 중앙당의 지지가 필요해진 비스마르크는 교황 레오 13세와 협상을 시작하였다. 그의 문화투쟁에 대해 개신교 일부에서도 반대가 있었다. 사회주의 곧 사회민주주의 세력에 대해서는 사회민주주의자 탄압법(1878년)을 제정하는 한편, 슈몰러 등의 강단(講壇)사회주의 사상을 도입하여 사고·질병·양로보험·정년제도 등의 사회복지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럼에도 사회민주주의 세력은 증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독일에서의 사회민주주의 운동을 금지하는 법의 틈을 이용하여 독일 이외의 지역에서 사회민주주의 운동을 하는 지혜를 발휘함으로써 탄압을 극복하였다. 또한 보수당 일부에서도 비스마르크의 사회민주주의 탄압에 대해 반대가 있었다. 결국 사회민주주의 운동 탄압은 소기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지 못하지만, 비스마르크의 사회보장제도는 현대 독일정부에서 사회보장제도를 개혁하기 전까지 그 원칙만큼은 사용되었다.
경제 정책
1870년에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자원이 많은 알자스지방과 로렌지방을 획득하고, 50억프랑의 전쟁배상금과 국내 시장의 통합 구축으로 호황을 누리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기업들이 속속 탄생했다. 그러나, 1873년부터 시작된 수년간의 경제 불황과 주가의 대폭락으로 수 많은 기업의 도산 및 노동자들의 대량실업을 야기했다. 통일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지지한 국민자유당의 지원하에 자유주의적 제 개혁을 시행함으로써 독일 경제는 비약적인 성장을 구가했지만 장기간의 공황으로 자유주의자들의 이상은 어려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속에 재상 비스마르크는 국민자유당을 대신하여 보수당과 중앙당으로부터 지지를 얻고자 했다. 이때부터 비스마르크는 기존의 경제 정책을 포기하는 대신 새로운 경제 정책 방향을 제시했는데, 그는 보호관세 제도를 강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중앙정부에 대한 지방정부의 부담금 역시 증액시켰다. 이러한 비스마르크의 정책적 변화는 자신과 국민자유당 사이의 균열을 가져왔으나 보수당과 중앙당과의 결속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은 점차 독일의 자본주의 발전과 산업화가 크게 발달했다. 특히 산업화의 결과는 1871년 인구의 5분의 1을 점유하던 노동자의 수를 급증시켜 1880년대 초에 이르러 그 수가 인구의 4분의 1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노동자들은 장기간 지속된 경제적 불황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상황은 '경제적 평등'을 지향하던 사회주의 세력을 급증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정치면에서는 융커(부르주아)와 군부에 의한 전제적 제도를 그대로 남겨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