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세계외교사-신성동맹의 발표와 평가
열강의 가입
1815년 9월 26일 세 군주들은 신성동맹 조약에 서명하고 곧 열강의 가입을 요청하였다. 먼저 세 군주들은 영국의 섭정 조지(George, 훗날 조지 4세)에 서한을 보내 가입을 요망하였다. 세 군주들의 가입요청 서한은 카슬레이가 9월 28일 리버풀(Liverpool, 2nd Earl) 수상에게 보낸 신성동맹에 관한 긴 보고서에 부록으로 발송하였다.
카슬레이는 이 보고문에서 신성동맹에 관해 자신의 평가를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신성동맹은 알렉산드르의 깊은 종교적인 성향에서 비롯됐다는 것, 알렉산드르가 파리에 온 이후 매일 저녁 늙은 광신도인 크뤼데너 부인을 만난 사실, 그리고 신성동맹 조약이란 숭고한 신비주의와 난센스(sublime mysticism and nonsense)에 불과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평화를 추구하는 세 군주들의 소박한 희망을 저버릴 수는 없는 일이어서 대신의 부서(副署) 없이 섭정이 홀로 서명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의견을 덧붙였다.
그러나 리버풀 수상은 동맹의 숭고한 정신에는 찬성하지만 영국 헌정의 전통으로 보아 그러한 조약의 가입을 섭정이 할 수 없다고 카슬레이에게 의견을 전하고 조지는 10월 6일 자로 알렉산드르에게 거절의 서한을 보냈다.
프랑스의 가입에 관해서는 알렉산드르가 다른 두 군주와 상의도 하지 않고 루이 18세에 요청하였다. 알렉산드르는 프랑스에 대한 평화조건을 될수록 완화하려고 고심했는데 11월 20일 제2차 파리 조약의 서명 이전에 신성동맹에 가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루이에게 말하였다. 루이 18세는 11월 19일자 서한으로 가입을 수락하였다. 알렉산드르는 가톨릭 교도인 루이의 가입에 매우 만족하였다.
공화정인 스위스가 기독교 연합의 일종인 이 신성동맹에 동참했다는 것이 특이하다. 당시 스위스 주재 러시아 대리공사는 바로 크뤼데너 부인의 아들 폴(Paul de Krüdener)이었다. 폴의 노력으로 스위스는 1817년 1월 27일 러시아에 가입의사를 전달하였다.
사르디니아도 1816년 6월 8일 러시아에 가입의사를 전달했는데 러시아 주재 사르디니아 공사는 메트르(J. de Maistre)였다. 그는 프랑스 혁명으로 해외에 망명한 유명한 정치이론가였는데 사르디니아의 가입을 전후해 신성동맹에 관한 여러 평을 한 바 있다.
알렉산드르는 1816년 8월에는 미국에게도 가입을 요청하였다. 미국이 주저하는데도 계속 가입을 요구하자 1820년 7월 5일 미 국무장관 애덤스(J.Q. Adams)는 미국은 1783년 이래로 유럽체제에는 관여하지 않는 것이 기본정책이라고 가입 거절을 분명히 하였다.
영국, 터키, 법왕청을 제외하고는 유럽의 주요 국가들이 모두 가입하였다. 러시아는 독일의 군소 국가들을 포함해 거의 80개 국가에게 가입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가입하는 국가들의 입장에서는 세 군주들에게 각각 가입의사를 표명해야 되기 때문에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교황만이 이러한 종교적인 동맹에 가입할 수 없다는 입장을 처음부터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이슬람 국가인 터키에게는 가입을 요청하지도 않았다. 이런 점에서 신성동맹을 제안한 러시아의 진의가 반(反)터키 정책에서 나온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이 팽배하였다. 그리하여 알렉산드르는 신성동맹은 비기독교인에 대해 어떠한 적개심도 함축하지 않고 있다는 내용의 서한을 터키 정부에 전달하였다.
발표
알렉산드르는 파리에서 이 조약을 발표하자고 주장했으나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세 군주들은 적당한 시기라고 서로 동의하는 시점에 가서 발표하기로 일단 합의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르는 러시아에 돌아오면서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다. 그는 러시아의 신비주의 친구들을 다시 만나게 되고 자신이 구세주라는 것을 러시아 국민들에게 보여주려고 하였다. 1815년 성탄절에 그는 신성동맹의 전문을 발표함과 동시에 자신의 조약 원안에 함축되어 있던 사상을 길게 발표하였다. 유럽 열강들이 지금까지 수행해 온 정책의 비판, 새로운 정치질서의 필요, 그리고 인민의 행복을 위한 헌신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1816년 2월 2일자 『프랑크푸르트 신문』(Journal de Francfort), 2월 6일자 『세계 신보』(Moniteur universel)에 신성동맹의 내용이 발표되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오스트리아의 신문이나 잡지에 신성동맹에 관한 기사가 게재되는 것을 금지했던 메테르니히도 침묵을 지킬 수는 없었다. 그는 1816년 11월 5일자 『오스트리아 관찰자』(Österreichscher Beobachter)에 신성동맹에 관해 처음으로 글을 발표하였다.
이 글에서 그는 신성동맹이란 것은 오로지 원칙의 표명이며 군주들의 의사만 표시한 것에 불과하며 대신들의 부서도 없는 문서라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이런 문서로부터는 아무런 법률적인 의무도 나오는 것이 아니며 다른 동맹조약과는 달리 의무규정이 따로 없다고 천명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오스트리아는 이런 신성동맹 조약에 의해 아무런 법적 구속도 받지 않는다는 입장을 명백히 하였다.
평가
위에서 보아 온 바와 같이 성경의 말씀을 현실의 정치세계에 접목시킨 신성동맹의 조약에 관해 자연히 여러 가지 해석이나 평가가 있게 되었다.
신성동맹의 형성과정에서부터 카슬레이, 메테르니히, 겐츠가 이를 비판하고 냉소적인 태도를 가진 것은 앞서 잠시 본 바 있다. 카슬레이는 1815년 9월 28일자 수상 리버풀에 보낸 보고서에서 신성동맹 조약은 “숭고한 신비주의와 난센스”라고 혹평하였다는 것도 전술한 바 있다. 메테르니히도 그의 회고록에서 “공허하고 요란한 유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겐츠는 신성동맹 조약이란 어떤 실제적인 목표를 갖고 있지 않으며 정치적 무효라고 혹평하면서 “19세기 외교문서집 속에 괴이한 유물로 남을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1820년 트로파우(Troppau) 회의 이후 일련의 국제회의에서 각지에서 일고 있던 혁명의 진압을 결의하고 이것이 신성동맹 조약의 결과라고 여겨지자 이 동맹조약 자체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났다. 신성동맹은 “인민을 억압하기 위한 군주들의 동맹”이라고 인식되고 이런 해석이 19세기 자유주의 전통과 맞물리어 신성동맹은 인민의 억압, 혁명 세력의 진압, 그리고 반민족주의의 대명사로 불리게 되었다.
아노토(G. Hanotaux)는 “일종의 제국주의적이고 신비스런 국가의 연합으로서 열강의 프랑스에 대한 동맹”이라고 불렀고 말레(A. Malet)도 “신민에 대항하는 군주들의 상호 부조사회”라고 꼬집었다. 저명한 외교사학자 부르주아(E. Bourgeois) 교수나 드비두르(A. Debidour) 교수도 신성동맹의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였다. 구소련에서 이런 부정적인 견해가 지배적이었던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신성동맹의 긍정적인 측면을 최초로 부각시키려고 시도한 것은 영국의 필립스(W.A. Phillips) 교수다. 그는 신성동맹을 좁은 의미로 해석하지 않고 유럽협조체제와 함께 해석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신성동맹을 국제사회의 조직화를 꾀하는 국제기구의 한 선구자로 해석하였다. 이런 견해는 스위스의 트라즈(R. de Traz) 교수의 연구로 이어졌다. 신성동맹은 제1차 세계대전 후 국제연맹의 창설을 계기로 국제기구의 선구적인 예로 찬양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연합이 탄생되자 부르캥(M. Bourquin)의 연구에서 보듯이 다시 국제기구의 선례로서 신성동맹이 각광받게 되었다.
이런 해석은 신성동맹을 넓은 의미에서 파악하고 그 적극적인 측면을 새로이 내세우려는 시도였다. 좁은 의미의 신성동맹 조약 자체에 관해서도 긍정적으로 해석하려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센크(H.G. Schenk) 교수는 신성동맹을 제안한 알렉산드르의 의도는 평화와 관용에 입각한 국제질서를 새로 세우려는 순수한 것이었는데 그동안 왜곡돼 왔다고 평가하고 있다. 장 자크 루소가 생-피에르 사(L’Abbe de Saint-Pierre)의 순수한 의도에서 나온 영구평화안을 발췌하면서 “광인 사이에서 현자로 남아 있으려는 것은 바보스런 일이다.”라고 말한 사정에 센크는 비유하고 있다.
신성동맹에 관한 귀중한 자료들을 발표한 베르티에(Bertier de Sauvigny)나 레이(F. Ley) 교수도 신성동맹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베르티에는 신성동맹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같이 반동적인 것은 아니며 반동적인 것은 타국의 내정 간섭을 규정한 4국 동맹이라고 말하고 있다. 알렉산드르 1세가 스위스나 미국에게 신성동맹 조약에 가입을 요청한 사실 자체가 신성동맹과 공화정치의 양립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레이 교수도 신성동맹은 알렉산드르의 순수한 동기에서 출발했다는 전제 아래서 그의 사상적인 변천 과정을 자세히 추적하였다.
이런 해석 외에도 신성동맹을 러시아의 팽창정책의 한 표현으로 평가하는 견해가 있다. 4국 동맹은 영국의, 신성동맹은 러시아의 이익을 대변하는 조약으로 파악하고 빈 회의 이후의 유럽협조체제를 이들 두 진영의 대립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피렌느(J.H. Pirenne) 교수의 견해가 이를 대표하고 있다.
그러면 4국 동맹과 신성동맹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유럽협조체제가 현실적으로 어떻게 발전되고 전개됐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네이버 지식백과] 신성동맹의 발표와 평가 (세계외교사, 2006. 5. 25., 서울대학교출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