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세계외교사-비스마르크 동맹체제의 재정비
지중해 협정(1887년 2월 12일)
영국의 이집트 점령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프랑스의 튀니스 점령으로 악화된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관계는 관세 문제로 더욱 긴장되었다.
영국과 이탈리아의 지중해 협정은 프랑스에 대한 이런 적대감정과 지중해에서 공동보조를 취해야 된다는 인식에 기초하였다. 이 협정은 각서교환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처음 이탈리아는 두 나라 중 한 나라가 프랑스와 전쟁을 하는 경우 타국이 원조한다는 규정의 삽입을 주장했으나 영국의 전통적인 외교정책으로 보아 이런 약속은 불가능하였다. 결국 비스마르크의 설득으로 이탈리아는 영국의 입장을 양해하였다.
이 각서 교환에 3월에는 오스트리아가, 5월에는 스페인이 가입하였다. 그리고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또 5월에 각서 교환을 하였고 이 각서 교환에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가입하였다. 지중해 협정은 영국과 이탈리아, 영국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와 스페인 등의 세 가지의 각서 교환을 합친 것이며 이런 각서 교환에 관계 국가들이 가입하였다.
영국과 이탈리아의 각서 교환 내용을 보면 아드리아 해, 에게 해, 흑해를 포함한 지중해의 현상유지를 약속하고 있다. 또 이탈리아는 이집트 문제에 관해서는 영국을, 영국은 북 아프리카 문제에 관해서는 이탈리아를 각각 지지키로 합의하였다. 영국과 오스트리아 사이에 교환된 각서는 중근동에 있어서 양국의 공동이해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각서 교환으로 스페인은 이탈리아, 독일, 오스트리아, 그 어느 국가에 대항하는 내용의 합의를 프랑스와 체결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였다.
이 지중해 협정을 구성하고 있는 각서 교환들은 모두 프랑스를 가상적국으로 삼고 있으며 영국이 독일, 오스트리아와 연결하게 됐다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이 협정은 1892년 로즈베리(A.P.P. Rosebery)가 외상이 되면서 종료되었다.
비스마르크 동맹체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던 3국 동맹이 1887년 2월에 다시 갱신된 것도 재정비 작업의 핵심이었음은 물론이다.
재보장조약(再保障條約, Reinsurance Treaty) 체결(1887년 6월 18일)의 배경
불가리아 사태로 러시아가 발칸 반도에서 후퇴하게 되면서 러시아 국내에서는 3제 협상에 대한 비판이 크게 일어났다. 3제 협상은 1887년 6월에 그 유효기간이 일단 끝나게 돼 있어서 그 연장 여부를 놓고 러시아 정부에서는 의견이 갈라졌다.
언론인이며 황제의 측근 카트코프(M.N. Katkov), 절대주의의 신봉자이며 정부에서 큰 영향력을 갖고 있던 포베도노스체프(K.P. Pobedonostsev), 그리고 비쉬네그라드스키(I.A. Vyshnegradsky) 장상(藏相) 등은 3제 협상을 폐기하고 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할 것을 계속 주장하였다. 1886년 11월 러시아에 새로 부임한 프랑스 대사 라불레이(A.R.R.L. de Laboulaye)는 알렉산드르 3세의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차르는 “우리에게는 강력한 프랑스가 필요하다. 귀국은 우리가 필요하며 우리는 또 귀국이 필요하다. 프랑스가 이 점을 이해해 주길 바라는 바이다.”라고까지 말하였다. 이것은 동맹제의로 볼 수 있는 말이다. 당시 이와 같은 양국 관계의 밀착을 비스마르크는 불랑제 운동의 위험이란 명분으로 저지시킨 바 있다. 이러한 프랑스와의 동맹론에 대해 기르스 외상과 독일 주재 대사 슈발로프 등은 3제 협상의 연장이 더 바람직하다고 반대하였다.
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하느냐 3제 협상을 연장하느냐, 두 진로 사이의 대립은 1887년 4월에 기르스 외상이 타협안을 마련해 해소되었다. 오스트리아를 제외하고 독일과 두 나라만이 조약을 체결하고 이 조약에서는 무엇보다 불가리아에서 러시아의 특수이익을 인정받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차르도 이 타협안에 동의해 5월 슈발로프가 베를린으로 귀임하면서 비스마르크와 새로운 조약 체결에 관해 교섭을 시작하였다.
조약 교섭은 큰 어려움 없이 진행되었다. 불가리아 공(公)이었던 알렉산더의 재등장을 반대하는 러시아의 요구를 독일은 본조약과는 별도로 부속된 비밀 의정서에서 수락하였다. 회의 도중 비스마르크는 1879년의 독일과 오스트리아 사이의 조약 전문(全文)을 처음으로 러시아에게 알려 주었는데 러시아로 하여금 독일과 동맹하든지 결별하든지 양자택일을 강요하기 위해서였다. 비스마르크는 또 당시 러시아 국내에서 일고 있던 반독일, 반오스트리아 분위기에 대해 경고하려는 목적에서 1879년의 위 조약을 1888년 2월에 세상에 공개하였다.
재보장조약의 내용
6개 조항의 본조약과 부속 의정서로 구성된 이른바 재보장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두 나라 중 한 나라가 제3국과 전쟁을 하는 경우 타국은 우호적 중립을 지킨다. 그러나 두 나라 중 한 나라가 프랑스나 오스트리아에 대해 공격을 취함으로써 전쟁이 발생되는 경우에는 이 조항은 적용되지 않는다.
(2) 독일은 러시아가 발칸 반도에서 차지하고 있는 역사적인 지위, 특히 불가리아와 동 루멜리아에서 갖고 있는 지위를 인정한다. 그리고 두 나라는 상호 협의 없이는 발칸 반도 영토의 현상유지를 변경하지 않는다.
(3) 해협 폐쇄의 원칙을 다시 확인한다. 본조약의 유효기간은 3년이며 그 내용은 비밀에 부친다.
(4) 부속 의정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독일은 불가리아에서 정규적이고 합법적인 정부의 수립을 지원한다. 그리고 알렉산더 공의 재등장에 독일은 반대한다.
② 만일 러시아가 필요하다고 인정하여 흑해의 입구를 방어할 조치를 취하는 경우 독일은 이를 지원한다.
이 조약으로 러시아는 동 발칸 지역에서 우월한 지위 확보에 대해 독일의 보장을 받았고 독일은 러시아가 프랑스에 접근하는 것을 저지할 수 있었다. 이 조약의 내용이 1879년의 독일-오스트리아 조약의 내용과 상치되지 않느냐 하는 법 해석상의 논의가 있다. 그러나 재보장조약과 같은 고도의 정치적인 조약을 법 형식논리로 해석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이 조약은 유효 기간이 3년이어서 1890년에 다시 연장하든지 종료되든지 결정해야 했다. 이번에는 독일에서 그 연장을 반대해 종료토록 방치하였고 러시아는 결국 파리로 가는 길밖에 없게 되었다. 이 점에 관해서는 다시 후술한다. 이 조약의 존재 자체는 1896년에 비스마르크가 세상에 알렸으나 조약 내용의 전모는 1918년에 가서야 알려지게 되었다.
제2차 지중해 협정 또는 근동 앙탕트(1887년 12월 12일)
1887년 7월에 불가리아 의회는 러시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친오스트리아 인물인 페르디난드(Ferdinand of Saxe-Coburg)를 불가리아 공으로 선임하였다. 이렇게 되자 러시아의 군사개입이 곧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유럽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러시아의 남하 위협에 대비해 이루어진 영국,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3국 사이의 각서 교환을 제2차 지중해 협정 또는 근동 앙탕트(entente)라고 부른다. 이번의 각서 교환도 제1차 지중해 협정과 마찬가지로 솔즈베리 영국 외상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이 각서 교환도 1892년 로즈베리가 외상이 되면서 종료되었다. 영국은 처음에는 독일의 참여를 희망했으나 비스마르크는 11월 솔즈베리에게 독일과 오스트리아 조약의 내용을 전하면서 독일이 비록 직접 당사자가 되지는 않지만 확고한 지지를 하겠노라고 약속하였다. 교환 각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동방(East)의 현상 유지를 보장하며 터키가 외국의 지배를 받는 것을 반대한다.
(2) 터키는 불가리아에서 보유하고 있는 권리를 외국에 양여하거나 외국이 이 지역을 점령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터키는 해협이나 소아시아(Asia Minor) 지방의 권리도 양여해서는 안 된다.
(3) 외국이 그런 양여를 요구하고 터키가 이에 반대할 경우 세 나라들은 그런 터키의 반대를 지원하는 데에 필요한 조치에 관하여 상호 협의한다.
(4) 터키가 만일 그런 양여 요구에 반대하지 않을 경우 세 나라들은 공동으로 또는 개별적으로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터키 영토를 점령할 수 있다.
(5) 본 각서의 내용은 사전 협의가 없는 한 어느 국가에게도 알려서는 안 된다.
독일-이탈리아 군사합의(1888년 1월 28일)
1888년에 들어서면서 독일과 이탈리아 사이에는 군사합의가 이루어져 독일과 프랑스가 전쟁을 하는 경우 이탈리아는 군사적인 지원을 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러한 양국의 군사적인 약속은 급속히 밀착된 양국의 경제 관계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탈리아는 1880년대에 들어오면서 경제 발전을 도모하기 시작하였고 민족 자본이 불충분했던 이탈리아로서는 영국이나 프랑스의 외국 자본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탈리아는 정치적으로는 프랑스에 대항하는 3국 동맹의 당사자이지만 1887년까지 경제적으로는 큰 마찰이 없었다.
1886년 12월 이탈리아 정부는 국내 제철업계의 주장에 따라 프랑스와 맺은 무역협정을 폐기할 움직임을 보였다. 1881년에 체결된 이 무역협정은 1892년까지 효력을 갖게 된 조약이었다. 이탈리아 정부의 이런 움직임에 항의해 프랑스 의회가 먼저 그 협정을 폐기할 것을 만장일치로 의결하였다. 이렇게 되자 이탈리아로서는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베를린에 더욱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위에서 보아 온 바 같이 프랑스의 고립과 유럽 국제정치 질서의 현상유지를 목표로 하는 비스마르크의 동맹체제는 완성을 보게 되었다. 이것을 도표로 작성해 보면 다음의 그림과 같이 거미줄 같은 비스마르크의 조약망을 쉽게 알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비스마르크 동맹체제의 재정비 (세계외교사, 2006. 5. 25., 서울대학교출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