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세계외교사-제1차 모르코 위기와 알헤시라스 회의
모로코 문제
중세 이후 독립을 유지해 온 모슬렘 국가 모로코는 1880년 7월 마드리드 협정으로 열강에 개방되었다. 유럽 열강은 물론 미국도 참여한 이 협정에서 모로코의 독립과 영토보전은 확인됐지만 외국인들에 대한 특권이 규정돼 있어서 형식상의 주권만이 인정됐을 뿐이다.
열강에게 개방됐다 하더라도 모로코가 프랑스의 세력범위에 속해 있음을 19세기 말엽에는 그 누구도 의심치 않았다. 물론 영국과 스페인이 지브롤터(Gibraltar) 해협 맞은편 북부 모로코에 일정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다. 독일은 비스마르크 시대부터 모로코 자체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보다는 다른 지역에서 요구를 획득할 수 있는 보상의 지역으로 간주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독일은 모로코를 특정국가의 세력범위로 인정해 주는 대가로 자신의 요구를 관철할 수 있다고 믿었다.
프랑스의 우월한 지위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열강의 명시적인 승인을 얻게 되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1900년 12월 이탈리아와 체결한 조약, 그리고 1904년 4월 영국과 맺은 조약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 델카세 프랑스 외상은 독일에 대해서는 강경한 입장을 취하였다. 열강의 승인을 먼저 얻어 기정사실로 만들어 독일로 하여금 인정케 하려고 하였다.
독일은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 독일 포위망이 곧 형성될 단계라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먼저 영국 · 프랑스 협상을 깨뜨려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그 기회를 모로코 문제에서 찾게 되었다. 홀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물질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명예 때문에서라도 독일은 프랑스의 모로코 점령 기도에 항의해야 한다. ··· 만일 우리가 모로코에서 짓밟힌다면 다른 곳에서도 그와 같은 대우를 자초하게 될 것이다.”
카이저의 탄지에르(Tangier) 방문(1905년 3월 31일)
카이저는 뷜로 재상과 홀슈타인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지브롤터 맞은편 모로코의 항구 탄지에르를 마지못해 방문하였다. 그는 모로코에서 독일의 이익을 옹호하겠다고 천명하였다. 이것은 프랑스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파리는 흥분의 도시가 되었고 모든 사람들은 전쟁이 임박했다고 믿게 되었다.
뷜로와 홀슈타인의 의도는 무엇이었는가? 당시 이 두 사람이 지배하고 있던 독일 외교는 새로 형성된 영국 · 프랑스 협상이 어느 정도 공고한 것이며 그 본질이 무엇인지 시험하려고 하였다. 또 가능하면 이때에 그것을 붕괴시키려고 하였다. 그리고 홀슈타인은 더 나아가 이 기회를 이용해 프랑스와 예방전쟁을 구상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사실 홀슈타인은 예방전쟁의 신봉자였다.
1887년 독일 참모총장 발더제(A. von Waldersee)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전쟁을 촉발시키려는 비밀계획을 갖고 있었고 홀슈타인도 이에 찬동하였다. 이것을 저지한 것이 비스마르크였고 그의 후임자인 카프리비(G.L. von Caprivi)도 독일 군부의 이런 예방전쟁 계획을 저지하려고 노력하였다. 홀슈타인은 1897년 독일 내정이 혼란하게 되자 다시 전쟁의 도발을 구상한 바 있다.
홀슈타인은 1905년이란 시점이 프랑스에 대해 예방전쟁을 수행할 절호의 시기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영국은 보어 전쟁 후유증으로 지쳐 있었고 러시아는 일본과 전쟁 중이었다. 전쟁이 일어날 경우 프랑스는 고립된 상태에서 독일과 대적하게 될 것이었다. 독일군은 프랑스 군에 비해 월등하다고 자인하였다. 참모총장 슐리펜(A. von Schlieffen)은 그의 절친한 친구였으며 그들은 자주 만나 국제정세를 토의하곤 하였다.
이들은 뷜로와 티르피츠가 추진하는 해군확장과 세계정책은 유럽에서 독일의 지위가 확고해진 뒤에 추진해야만 할 정책 노선이라고 비판하였다. 홀슈타인은 1909년 그의 친구인 란켄(O. von der Lancken)에게 독일을 협공할 포위(Einkreisung)를 타파하려고 카이저가 탄지에르를 방문했다고 솔직히 말한 바 있다.
국제회의의 소집
뷜로는 마드리드 협정 당사자들의 국제회의 소집을 요구하고 나섰다. 프랑스는 물론 이런 제의를 반대하였다. 독일은 국제회의가 소집되면 프랑스는 고립되고 독일은 자신의 지위가 강화되리라고 믿었다.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는 독일을 지원할 것이고 러시아는 러일전쟁 초부터 독일이 베푼 지원 때문에 호의적인 태도를 취할 것이다.
그리고 영국과 스페인은 이런 국제회의를 계기로 프랑스에게 허용한 귀찮은 약속들로부터 탈피하려고 할 것이고 미국은 중국에서와 같이 모로코에서도 문호개방정책을 주장할 것이다. 이 모든 것으로 보아 독일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독일의 예상은 빗나갔다.
영국은 지브롤터 맞은편 모로코 연안에 독일이 진출하는 것을 묵과할 수 없었다. 5월 영국은 프랑스에게 이 문제에 관한 비밀회의 개최를 제안하였다. 델카세는 이것을 동맹제의로 간주하고 찬동했으나 루비에르(P.M. Rouvier) 수상이 반대해 무산되었다.
6월 6일 프랑스에서는 역사적인 내각회의가 열렸다. 델카세는 독일이 단지 협박만 하고 있기 때문에 영국과 공동으로 이에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루비에르를 비롯한 모든 각료들은 러시아가 현재 동북아에서 패전하고 있는 마당에 영국과 어떤 공동행동을 취하게 되면 곧 독일과의 전쟁을 부채질하게 되고, 프랑스는 전쟁준비가 돼 있지 않기 때문에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는 독일과의 협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델카세는 사임하고 말았다. 뷜로의 위협정책이 결국 델카세를 물러나게 하였다. 루비에르가 외상을 겸직하고 독일과 교섭에 임하였다.
독일은 이런 외교상의 승리를 슬기롭게 이용하지 못하고 위협과 협박으로 일관하였다. 뷜로에게 공(Prinz)의 작위를 수여해 프랑스를 모독하기도 하였다. 프랑스는 하는 수 없이 7월 초 국제회의 소집에 동의하였다. 그런데 9월에 양국이 합의한 회의일정은 프랑스의 의견이 대폭 수용되었는데 그것은 독일이 프랑스의 뵈르쾨(Björkö) 조약 가입을 희망했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에 관해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뵈르쾨 조약(1905년 7월 24일)
모로코 문제로 한참 시끄러울 때 카이저는 차르를 뵈르쾨 만(灣)에서 만나 이른바 뵈르쾨 조약을 체결하였다. 모로코는 카이저의 진정한 관심사는 아니었다.
두 군주가 서명한 조약안의 내용은 ① 두 나라 중 한 나라가 유럽의 어떤 국가로부터 공격을 받을 경우 다른 나라는 유럽에서(in Europe) 모든 병력으로 지원하며, ② 조약의 발효시기는 러시아와 일본이 평화조약을 체결한 이후로 하며, ③ 조약이 발효하면 러시아는 프랑스의 가입을 전력을 다해 도모토록 한다는 것이었다.
뵐로는 당초 이런 구상에 반대했으나 대륙연합의 가능성을 생각하고 찬성하였다. 그리하여 모로코를 프랑스의 세력범위로 인정하는 대가로 뵈르쾨 조약에 프랑스의 가입을 얻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런 내용의 조약에 흥미를 가질 수 없었다. 이 조약이 전적으로 유럽에 국한돼 있어서 일본과 대립하거나 세계 각지에서 영국과 대결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위테, 람스도르프 모두가 반대하였다.
한편 프랑스도 이런 조약에 가입할 의사가 없음을 러시아에 전달하였고 러시아는 11월에 뵈르쾨 합의의 폐기를 카이저에게 통고하였다. 독일과 러시아 사이의 거리는 다시 멀어지게 되었다. 대륙연합의 구상이 깨어지자 독일이 영국 · 프랑스 연합에 대항하는 길은 모로코 문제에 관한 국제회의 소집의 길밖에 없게 되었다.
알헤시라스(Algeciras) 회의(1906년 1월 16일~4월 7일)
국제회의 소집에 관한 독일의 구상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영국은 독일이 모로코 북쪽 연안에 진출하려는 움직임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1905년 12월에 외상이 된 그레이(E. Grey)는 적극적인 프랑스 동맹론자였다. 1906년 1월 초 그는 영국주재 독일대사 볼프-메테르니히(P. Wolff-Metternich)에게 다음과 같이 명백히 말한 바 있다. “영국 국민은 영국 · 프랑스 합의로 말미암아 프랑스가 독일과 전쟁에 휩싸이게 되는 것을 묵과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럴 경우 영국 정부는 보수, 자유 그 어떤 정부이건 간에, 프랑스를 지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영국이 대륙 문제에 깊이 간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영국, 프랑스의 육 · 해군 수뇌들은 1905년 12월부터 비공식적인 접촉을 해왔다.
러일전쟁 초부터 러시아를 지원한 독일은 러시아의 후원을 믿었다. 그러나 뵈르쾨 조약 폐기로 양국은 다시 멀어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는 전쟁으로 파탄된 경제 재건을 위해 프랑스의 도움을 바라고 있었다. 그리하여 알헤시라스 회의에서 러시아가 프랑스를 지지하는 대가로 러시아 공채 모집에 프랑스가 협력하기로 합의하였다. 이탈리아는 3국 동맹에 회의(懷疑)를 품었고 1900년에 프랑스와 맺은 약속을 고수하려고 하였다.
결국 오스트리아만이 독일 편에 서게 되었다. 독일은 고립되었으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조금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의 중재로 3월에 타협안이 마련되어 최종의정서가 채택될 수 있었다. 이때가 바로 홀슈타인이 물러날 시점이었다.
미국을 포함해 13개국이 서명한 최종 의정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모로코의 주권, 독립, 영토보전, 그리고 무역자유와 평등을 확인한다.
(2) 경찰조직은 프랑스와 스페인이 담당한다. 알제 국경지역의 경찰조직은 프랑스가 독자적으로 담당한다.
(3) 국립은행을 설립하고 프랑스가 이 은행을 통제한다.
이렇게 볼 때 모로코의 국제적인 성격과 문호개방이 규정돼 있어서 독일의 입장이 반영된 것 같으나 실은 프랑스의 특수이익이 모두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았다. 독일은 영국 · 프랑스 협상을 붕괴시키기 위해 모로코 사태를 일으켰지만 결과는 독일의 의도와는 반대로 영국 · 프랑스 협상을 강화시켰고 독일의 고립을 자초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제1차 모로코 위기와 알헤시라스 회의 (세계외교사, 2006. 5. 25., 서울대학교출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