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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 이야기

112. 세계외교사-제1차 세계대전은 왜 일어났는가

작성자관운|작성시간16.08.03|조회수184 목록 댓글 0


112. 세계외교사-1차 세계대전은 왜 일어났는가

 

 


 

 

베르사유 조약 제231

 

파리 강화회의의 한 위원회인 전범위원회(戰犯委員會)19191월 말 설치되었다. 전쟁책임에 관한 연구조사를 맡은 이 위원회는 보고서 작성을 3월 말에 완료하였고 5월 초 강화회의의 전체회의에서 그 보고서가 채택되었다. 이 보고서의 결론은 다음의 두 가지였다.

 

이번의 전쟁은 독일, 오스트리아가 그 동맹국가인 터키, 불가리아와 함께 사전에 계획한 행위의 결과이다.

독일, 오스트리아는 연합국이 제시한 모든 타협안과 전쟁회피 노력을 의도적으로 무효화시켰다.

 

이와 같은 보고서에 입각해 다음과 같은 베르사유 조약 제231조가 작성되었다.

 

 

연합국, 그 동맹국 정부 및 국민들은 독일 및 그 동맹국들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강요당한 전쟁의 결과로 초래된 손실, 피해의 책임이 독일 및 그 동맹국들에게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독일은 이 점을 수락한다.

 

전쟁의 책임을 홀로 짊어지는 이런 규정에 독일이 쉽게 찬성할 리 없었다. 231조를 반박하는 각서를 작성하였다. 델브뤼크(H. Delbrück)와 베버(M. Weber)와 같은 저명한 학자들이 각서 작성에 참여하였다. 물론 연합국은 각서의 접수를 거절하고 베르사유 조약을 수락하든지 전투를 계속하든지 양자택일을 하라는 최후통첩을 616일 독일 정부에 보냈다.

 

이 최후통첩에서 독일은 다시 한번 침략자이며 독재자라는 낙인을 받았다.

 

 

오랫동안 독일의 지도자들은 프로이센의 전통에 입각하여 유럽에서 지배의 지위를 획득하려고 노력하여 왔다. 그들은 독일이 마땅히 가질 수 있고 또 다른 국가들이 독일에게 허용하려고 하는 자유스럽고 평등한 인민들의 사회 안에서의 번영과 영향력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복종하는 독일인에 대하여 명령하고 압박하듯이 굴종하는 유럽에 대하여 명령하고 압박할 수 있어야 된다고 요구하였다.

 

독일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민족적인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점에서도 베르사유 체제는 강제명령(Diktat)이라고 독일은 받아들이게 되었다. 독일에서는 231조에 대한 반대운동이 곧 일어났다.

 

2차 세계대전 이전의 논쟁

 

파리 강화회의가 끝나자 독일은 먼저 제231조에 대한 비판을 시작하였다. 독일 외무성은 전범국(戰犯局)을 신설해 독일의 전쟁책임론에 동조하는 의견들을 반대키로 하였다.

 

그리고 여러 사설단체들이 조직되었는데, 그중에서도 베게러(A. von Wegerer)가 이끈 전쟁원인규명 중앙사무국이 유명하다. 그는 전쟁원인에 관한 전문 학술잡지를 창간하였고 1939년에는 전쟁 발발에 관한 저서를 발표해 베르사유 조약을 비판하고 전쟁은 독일이 아니라 프랑스와 러시아가 도발한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한 독일 대표의 한 사람인 몬트겔라스(M. Montgelas)는 그의 일생을 전쟁책임 문제 해명에 바쳤다. 그의 주저(1925)는 독일만이 전쟁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영국, 러시아, 프랑스에게도 같은 책임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저술이었다.

 

그 밖에도 델브뤼크, 온켄(H. Oncken),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 팀메(F. Thimme) 등이 비록 독일 제국의 외교정책에 문제점이 있었으나 프랑스의 외교정책에도 침략적인 요소가 있음을 밝히는 연구들을 내놓았다. 독일의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서 독일 외무성은 열강 중 최초로 본격적으로 외교문서를 발간해 외교문서 발간에 있어서 큰 공헌을 했는데 이에 관해서는 참고문헌이나 부록을 참조하기 바란다.

 

독일 이외의 국가에서도 베르사유 조약 제231조에 대한 비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먼저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 한 나라의 침략적인 외교정책으로 말미암아 발발된 것이 아니라 1914년 이전의 유럽 국제정치 구조에 내재돼 있는 결함 때문에 발발했다는 연구들이 나왔다. 디킨슨(G.L. Dickinson)의 연구(1926)를 비롯해 페이(S.B. Fay)는 이 방면의 획기적 연구(1928)를 세상에 내놓았다. 르누뱅(P. Renouvin)도 세계대전은 독일, 오스트리아만이 아니라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열강들의 이해관계가 서로 충돌해 발생했다는 훌륭한 연구들을 이 시기에 발간하였다.

 

이와 같은 관점을 더욱 보강시킨 것은 1933년에 발간된 로이드 조지(Lloyd George)의 회고록이었다. 그는 이 회고록에서 1914년 당시 어느 정치인이건 전쟁을 원하고 있지 않았음에도 열강들은 전쟁의 와중으로 들어갔다고 술회하였다. 구츠(G.P. Gooch)는 이 회고록에 입각해 전쟁의 원인을 유럽 국제정치 구조에서 찾으려는 연구(1936~1938)를 발표하였다.

 

231조와는 반대되는 견해가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전쟁의 책임은 독일이 아니라 영국 · 프랑스 · 러시아 등 협상 측에 있다는 수정주의적인 연구들이 발간되었다. 앞에서 제시한 페이의 연구는 영국을 상당히 비판하고 있는데 무엇보다 반즈(H.E. Barnes)의 연구(1929)가 이런 견해의 고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해석을 계속 주장하는 대표적인 연구는 슈미트(B.E. Schmitt)의 연구(1930)이다. 이탈리아의 연합국 측 참전을 옹호하는 알베르티니(L. Albertini)3권으로 된 획기적인 연구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출판됐으나 그것이 외교사 학계에 영향을 미친 것은 1957년 영어로 번역된 후의 일이다.

 

1951년 프랑스 · 독일 사학자회의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동 · 서 냉전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서독은 자유세계의 일원이 되었다. 따라서 프랑스와 독일은 현대사 일반에 관한 교과서 서술에 합의점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의 르누뱅 교수, 독일의 리터(G. Ritter) 교수를 대표로 하는 양국의 사학자 모임이 있었는데 양국 사학자의 합의문헌 중 제1차 세계대전에 관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1차 세계대전의 책임을 특정 국가의 정부나 국민에게 있다고 믿을 만한 문서는 없다. 일부 독일 군부가 1914년에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지만 이것이 독일 정부의 정책이라고 추정할 수는 없다. 독일, 프랑스 국민 그 누구도 전쟁을 바라고 있지 않았다. 프랑스의 군부보다는 독일 군부가 더 전쟁 가능성을 받아들일 자세를 갖고 있었으나 독일 군부는 독일의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언제나 위협을 받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푸앵카레의 정책으로 전쟁이 발발했다는 오래된 견해는 독일 학자를 비롯해 이제 더 이상 수긍하기 어렵게 되었다.

 

(2) 1914년 당시 독일의 정책은 유럽 전쟁을 도발시키려는 목적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독일의 정책은 무엇보다 오스트리아에 대한 조약의무에 의해 결정되었다. 오스트리아의 붕괴를 저지하기 위해 백지위임에 해당되는 보장을 오스트리아에 제공하였다. 독일은 1908~1909년의 경우와 같이 이번에도 분쟁을 국지화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불가피한 경우 유럽 전쟁의 위험을 감수할 태세는 되어 있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를 자제시킬 조치를 게을리 하였다.

 

(3) 러시아는 전통으로 보나 이해관계로 보나 19147월 세르비아를 원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초 러시아의 오스트리아에 대한 부분동원은 빈 정부에 대한 하나의 압력수단으로 채택된 것이었다. 그리고 부분동원에서 총동원으로 전환한 것은 순전히 군사적인 관점에서 러시아 군부의 주장에 의해 결정되었다.

 

(4) 영국도 19147월 당시 평화의 유지를 진정 원하고 있었고 평화 모색을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하였다. 그레이 경이 독일에게 미리 명백한 입장을 밝히지 못한 것은 영국 내각이 주저하고 있었고 또 만일 어떤 확고한 입장을 미리 밝힌다면 그것이 도리어 러시아의 침략적인 정책을 부추길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5) 1914년 프랑스의 정책도 독일에 대한 복수정책으로 좌우된 것이 아니라 독일을 견제하는 데 필수적인 러시아와의 동맹을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푸앵카레가 러시아 방문 중 러시아에게 약속한 것도 독일이 만일 오스트리아 · 러시아 전쟁에 군사적으로 개입하면 프랑스도 참전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프랑스는 러시아의 오스트리아에 대한 부분동원을 충동질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프랑스, 독일 학자들의 합의사항에 의하면 제1차 세계대전은 특정한 국가의 정책 또는 사전계획에 의해 발발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유럽 동맹체제로부터 발생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베르사유 조약 제231조도 독일 군대에 의한 피해에 대해 독일 정부가 법적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독일 정부에게 어떤 범죄가 있다는 것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의하였다.

 

이런 학문적인 화해분위기가 조성됐으나 독일에게 전쟁책임이 있다는 전통적인 연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슈미트(B.E. Schmitt)1928년 저서가 1958년에 다시 개정판으로 나왔고 같은 해에 알베르티니의 저서의 영역이 완결되었다. 리터는 독일에 전쟁책임이 있다는 알베르티니의 저서를 비판했으나 함부르크 대학의 피셔(F. Fischer), 그리고 가이스(I. Geiss)는 국제적인 업적이라고 찬양하였다. 전쟁원인에 관한 논쟁이 재연될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피셔 논쟁

 

1959년에 발표된 피셔의 한 논문으로 인한 전쟁원인 논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의 주요 저서는 1961년과 1969년에 각각 발표한 두 가지 저서이다. 당시 독일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문제는 거의 해결됐다고 생각하였고 동 · 서독 학자들도 제2차 세계대전이 히틀러에 의해 일어나게 됐다고 양해하고 있는 시점에 피셔는 제1차 세계대전을 독일 역사의 연속성에서 해석해 파문을 던진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의 책임이 전적으로 독일에게 있다는 견해로 말미암아 그는 독일 여론의 지탄을 받았다. 서독 정부는 그의 미국방문을 금지시키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되자 피셔는 더욱 극단적인 주장을 하게 되었고 논쟁도 더욱 가열되었다.

 

먼저 피셔는 1914년 당시 범 게르만 주의자나 군부뿐만 아니라 베드만-홀베크와 같은 온건한 민간 정치인도 전쟁 발발에 책임이 있으며 전쟁 중에 팽창정책을 기도했다고 주장하였다. 이 점에서 군부와 민간인을 구별한 리터(G. Ritter)와는 출발부터 관점이 다르다. 피셔는 독일 정부가 전쟁을 원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계획하고 도발했다고 주장하면서 1905년 이후 경제적인 진출과 정치적인 팽창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독일 정부가 전쟁을 사전 계획했다는 증거로 피셔는 1912128일의 회의를 인용하였다. 영국 · 독일 해군 교섭이 결렬된 후 홀데인(R.B. Haldane) 영국 육군상이 독일 대사 리히노브스키에게 독일 · 프랑스가 전쟁을 하는 경우 영국은 프랑스 편에 서게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었다.

 

이 보고를 받은 카이저는 몰트케, 티르피츠, 그리고 해군의 뮐러(G.A. von Müller) 제독을 소집해 전쟁계획을 논의했다는 회의가 바로 이날의 모임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드만-홀베크는 참석하지 않았을뿐더러 이런 회의가 있었던 것도 일주일 후에나 알았다. 하여간 이 회의의 의의에 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다.

 

피셔는 물론 이 회의에서 이미 전쟁계획이 설정됐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제헬린(E. Zechlin)은 몰트케와 티르피츠의 알력으로 이 회의는 아무런 문제도 결정하지 못했다고 보고 있다. 이 회의에 참석한 뮐러의 일기가 1965년에 발간됐는데 그 일기에서 그도 이 회의의 결론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적고 있다.

 

1972년 에르트만(K.D. Erdmann)이 리즐러(K. Riezler) 일기를 편찬해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논쟁은 다시 베드만-홀베크의 평가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리즐러는 전술한 바와같이 베드만-홀베크의 비서이자 그의 가장 가까운 측근이었다. 베드만-홀베크의 문서들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없어졌기 때문에 리즐러의 일기가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리즐러의 일기에는 베드만-홀베크는 호전적인 인물이 아니라 당시 독일의 지적인 타락과 국제적인 지위 하락을 비판하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피셔의 평가와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피셔가 1969년의 저서를 집필할 때에는 리즐러 일기의 일부만을 보았다고 에르트만은 말하고 있다.

 

리즐러의 일기가 문제로 등장하자 피셔도 이에 관한 저술(1983)을 발표하였다. 피셔는 이 연구에서 리즐러 일기의 정확성을 의심하면서 다음과 같은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리즐러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적 혹은 개인적인 이유로 원래의 일기 내용을 고쳤을 것이다.

그가 1955년에 사망한 이후 그의 일기는 동생(Walter Riezler)이 보관했는데 그 동생이 고쳤을 것이다.

에르트만 자신이 내용을 왜곡했을 것이다.

 

이런 피셔의 비판에 에르트만이 다시 비판하고 있다.

 

피셔의 비판자들은 또 베드만-홀베크가 19147월경 호전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그레이 영국 외상이 배신했기 때문이라고 베드만-홀베크를 옹호하였다. 1914년 초부터 영국과 러시아는 1912년의 영국 · 프랑스 해군합의와 같은 협정을 체결할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유사시 러시아군이 포메라니아(Pomerania)에 상륙하는 것을 영국 해군이 지원하는 등 양국 해군의 공동작전에 관한 협정을 19148월에 체결할 계획이었다는 것이다.

 

1909년 이래 양국의 이런 움직임은 런던 주재 러시아 공사관의 지베르트(B. von Siebert)가 베드만-홀베크에게 계속 알려 주었고 이 정보는 극도의 비밀사항이었기 때문에 베드만-홀베크와 독일 외무성의 고위인사 세 사람만이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베드만-홀베크는 영국 정부에 대한 하나의 압력수단으로 이 정보를 베를린 신문(Berliner Tageblatt)에 흘렸다. 이 신문기사로 영국 의회는 그레이 외상에게 기사의 진위에 관해 질의하였고 그레이는 전혀 그런 사실이 없다고 허위 진술하게 되자 베드만-홀베크는 매우 전투적인 자세를 취하게 됐다는 것이다. 휠즐레(E. Hülzle)와 제헬린(E. Zechlin)이 이 일화에 큰 비중을 두고 있는데 이런 해석은 피셔의 견해를 뒤집는 것이었다.

 

1차 세계대전 책임 논쟁의 개요

 

원인과 책임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는데 대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저서, 논문의 출처는 참고문헌을 참조하기 바란다.

 

(1) 독일에 전쟁 책임이 있다는 전통적인 견해가 아직도 유력하게 존재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베르사유 조약 체결 직후와 같이 231조를 그대로 원용하는 소박한 견해는 이제 수용되고 있지는 않다. 대표적인 학자가 슈미트(B.E. Schmitt)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피셔가 독일의 책임을 더 파헤쳤는데 졸(J. Joll), 테일러(A.J.P. Taylor), 알브레흐트-카리에(R. Albrecht-Carrié)의 견해도 이 범주에 속한다.

 

(2) 독일의 책임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독일 정부가 전쟁을 사전에 계획하고 도발하지는 않았다는 견해들이 있다. 리터(G. Ritter), 제헬린(E. Zechlin), 힐그루버(A. Hillgruber) 등의 견해가 이에 속한다.

 

리터는 독일이 근본적으로 19147월 당시 평화적이고 방어적인 입장을 취했다고 주장한다. 제헬린에 의하면 독일은 1914년 위기 이전에는 유럽에서 패권을 장악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리어 불리한 입장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러시아 영향에 의한 발칸 동맹의 결성, 3국 협상의 강화, 그리고 러시아 군사력의 증강 등으로 위협을 받고 있어서 예방전쟁을 수행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힐그루버도 같은 의견이다.

 

(3) 전쟁책임은 독일이 아니라 도리어 협상측에 있다는 견해들이 있다는 것은 전술한 바와 같다. 3국 협상 측의 전쟁 유인에 독일이 말려들었다는 것이다. 페이(S. Fay), 몬트겔라스(M. Montgelas), 반즈(H. Barnes)들이 이런 견해의 대표자들이다.

 

(4) 독일이나 어떤 특정한 정부의 책임보다는 당시의 동맹체제 또는 유럽 정치질서에 전쟁발발의 원인이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특정한 국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학자들도 이 점을 간과하지는 않는다. 구츠(G.P. Gooch), 르누뱅(P. Renouvin), 리터(G. Ritter), 테일러(A.J.P. Taylor), 파라(L.L. Farrar) 등의 견해가 이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5) 저비스(R. Jervis)가 외교정책 결정과정을 분석하는 데 있어서 인지(perception)와 오인(misperception)이 중요하다고 역설한 이후 제1차 세계대전 발발도 이런 각도에서 분석하는 연구들이 나왔다. 다시 말하자면 1914년 당시 독일 정치인들의 오인에서 전쟁이 발발하게 됐다는 것이다. 리보우(R.N. Lebow), 에베라(S. van Evera)의 업적이 이에 속한다.

 

(6) 전쟁의 원인을 당시 국제경제 구조에서 찾는 견해들이 있다. 피셔의 연구는 실은 독일의 경제적 팽창을 분석하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프아드뱅(R. Poidevin), 지로(R. Girault) 등이 당시의 국제관계를 분석하고 경제적인 이해관계의 충돌을 전쟁원인으로 보고 있다.

 

구소련의 학자들이 제1차 세계대전을 제국주의 전쟁으로 규정하고 그 경제구조에서 전쟁원인을 찾고 있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20~30년대의 소련 역사학계는 포크로프스키(M.N. Pokrovsky) 학파와 그 반대파로 크게 구분돼 있었다. 포크로프스키는 러시아의 경제를 산업자본주의 단계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침략성을 규명해야 되었고 전쟁의 책임이 러시아에게도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그 반대학자들은 당시의 러시아가 영국, 프랑스 자본에 예속된 일종의 반식민지 경제구조를 갖고 있어서 러시아의 전쟁 책임은 발생할 여지가 없었다고 보았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 학자들은 독일의 침략성을 폭로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전쟁 중 소련이 받은 엄청난 피해에 대한 정신적인 복수, 그리고 서독이 서방 진영에 편입된 것에 대한 항의가 필요했던 것이다. 전후 소련학계의 지배적인 견해는 러시아는 1914년 전쟁 발발 당시 자본주의가 성숙돼 국가 독점적인 성격이 있었다고 규정하고 있어서 독일의 침략성과 아울러 러시아의 책임도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구소련에서 제1차 세계대전 문제를 본격적으로 취급하게 된 것은 196411월 모스크바에서 전쟁 50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개최된 이후의 일이다. 그들에 의하면 제1차 세계대전은 자본주의의 불균형발전 조건에서 필수적으로 발생된 전쟁으로서 동맹 측과 협상 측의 제국주의적인 침략전쟁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일차적인 책임은 독일 정부에 있다고 보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1차 세계대전은 왜 일어났는가 (세계외교사, 2006. 5. 25., 서울대학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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