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망사르(Francois Mansart, 1598~1666)는 진정한 의미에서 프랑스 바로크를 완성한 건축가였다. 드 브로스와 르메르시에가 이탈리아 고전주의에 기초해서 프랑스 바로크를 완성한 반면 망사르는 프랑스식만으로 바로크 건축을 완성했다. 파리의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으며 평생 파리를 근거지로 활동하면서 지역 전통이 크게 강화된 제2의 프랑스 바로크 양식을 창출했다. 망사르 루프는 좋은 예인데, 프랑스의 전통 지붕을 각색해서 망사르가 즐겨 쓴 것으로 그의 성을 붙인 별도의 명칭으로 불리며 프랑스 바로크를 대표하는 어휘가 되었다.
대표작은 성모 방문 교회(Eglise de Sainte Marie de la Visitation, 파리, 1632)였다. 평면부터 선례 유형에 의존하지 않은 독창적 구성으로 짰다. 정사각형의 전체 윤곽 속에 팔엽형의 중심 공간을 넣은 뒤 반지 형 겹 공간으로 만들었다. 외관은 더욱 독창적이었다. 언뜻 보면 고전주의로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고전 어휘를 사용하지 않고 프랑스 전통 양식만으로 고전주의에 버금가는 새로운 바로크 교회를 창출했다. 중앙의 원형 공간에 해당되는 몸통을 드럼 하나 안에 담았으며 돔으로 천장을 덮었다. 드럼 외벽에는 버트레스를 세워 고전 오더처럼 보이게 했다. 드럼은 이탈리아 족보에는 없는 것이며 선례를 따지자면 들로름의 아네 성채 예배당이 제일 비슷했지만 망사르의 창작품으로 볼 수도 있었다.
프랑수아 망사르. 성모마리아 방문교회. 언뜻 고전주의로 보이나 정식 고전 어휘는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중세 모티브만으로 프랑스 바로크를 정의한 건물이다. | 루이 르 보. 4개국 대학. 루이 14세의 전반부 왕실 수석건축가였던 르 보는 아카데미즘을 체계적으로 정착시킨 인물이었다. |
르 보와 왕실 고전주의의 완성
루이 르 보(Louis Le Vau, 1612-1670)는 루이 14세의 전반부 수석 건축가로서 왕실 고전주의를 정착시킨 인물이다. 왕실 고전주의란 거창한 이름과 달리 은유적이며 아기자기한 구석이 많은 기법이었다. 그랜드 매너도 예상보다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이전까지 개별 건축가들이 순수 창작의 관점에서 시도해오던 내용들을 루이 14세의 절대왕정이 자리 잡으면서 왕실에서 종합한 것에 가까웠다.
르 보는 파리의 건축가 집안에서 태어나서 일찍부터 프랑스 바로크 건축가들의 고민과 성향 등을 접하며 자랐다. 뛰어난 소질은 없었지만 꾸준한 노력으로 왕실에 진출해서 안정적 작품 활동을 했다. 1653년에 마자랭이 프롱드당에 정치적 승리를 거두자 르 보는 그 후광으로 1654년에 왕실 수석 건축가가 되었고 뒤이어 왕실 건축 총감독관이 되는 등 전성기를 보냈다. 이 시기에는 왕궁을 중심으로 루이 14세 양식의 기틀을 닦아 아르두앙-망사르에게 넘겼다.

루이 르 보. 베르사유 궁전. 앙벨로프(envelope)라고 부르는 1단계를 설계하며 베르사유 궁전의 초기 골격을 잡았다.
하지만 르 보의 왕궁 작품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베르사유 궁전의 앙벨로프(enveloppe)를 설계하면서 골격을 잡았지만 루이 14세의 마음에 들지 않아 아르두앙-망사르에 의해 증 개축되었기 때문에 르 보의 작품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루브르 궁전의 동익랑도 담당했지만 콜베르의 견제를 받으며 페로와 르브룅과 공동 작품이 되면서 르 보의 저작권은 거의 없어졌다. 1663년에 콜베르가 집권하면서 스스로가 왕실 건축 총감독관이 되자 르 보는 쇠퇴의 길을 걸으며 말년을 보냈다. 왕궁 이외의 작품은 괜찮은 편이어서 보 르 비콩트 성채(Chateau de Vaux-le-Vicmote, 1656~61)를 중심으로 왕실 고전주의를 완성시켰으며 4개국 대학(College des Quatre Nations=College Mazarin, 마자랭 대학, 파리, 1662~74) 같은 공공건물도 맡아서 그랜드 매너를 시도해보기도 했다.
아르두앙-망사르와 루이 14세
쥘 아르두앙-망사르(Jules Hardouin-Mansart, 1646~1708)는 루이 14세의 후반부 왕실 수석 건축가로 프랑스 바로크를 총 정리하며 최전성기를 주도했다. 철저하게 루이 14세의 건축가로 르보의 왕실 고전주의를 이어받아 그랜드 매너를 강조한 대작들을 남기며 루이 14세 양식과 프랑스 바로크를 대표하는 최고 건축가가 되었다. 프랑수아 망사르의 손자 조카로 망사르를 존경해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망사르가 추구했던 프랑스만의 바로크 건축에 대한 인식을 물려받은 위에 태양 왕 루이 14세의 권위에 맞는 기념비적 고전주의를 첨가한 뒤 자신만의 창작성을 발휘해 독자적 양식을 창출했다.
쥘 아르두앙-망사르. 베르사유 궁전. 르 보의 작품에 만족하지 못한 루이 14세는 증개축 공사를 단행, 건축가 아르두앙-망사르, 화가 르브룅, 조경건축가 르 노트르로 구성되는 드림팀을 구성해서 오늘의 베르사유를 세웠다. | 베르사유 궁전 내 거울의 방. 대연회실 겸 주요 외교 행사가 열리는 등 서유럽 정치의 중심 공간이었다. 화려한 바로크 장식과 역사화로 가득 채웠다. |
파리에서 태어나 망사르의 말년 작품에 참여하면서 건축 일을 시작했다. 초창기 작품이 콜베르의 눈에 들며 1673년에 왕실 성채에 참여했는데 이 과정에서 루이 14세의 명예욕을 만족시키면서 발탁되어 1675년에는 왕립 건축아카데미 교수로 임명되었다. 곧이어 앵발리드 돔(Dome des Invalides, 1676~91)과 베르사유 궁전 증개축(1678~89)을 맡았으며 1681년에는 왕실 수석 건축가가 되어서 두 대작에 전념할 수 있었다. 30대에 전성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 1680년대까지 경력의 대부분을 이 두 대작의 완공에 집중했다.
바로크 왕실 고전주의에서 ‘아르두앙-망사르 양식’이라 부를 수 있는 자신만의 바로크 건축을 완성시켰다. 수평선의 강조, 대칭과 축 구성, 대칭에 기초한 기하학적 조화, 개방적 평면, 오더를 이용한 출입구 강조, 화려한 장식의 절제, 러스티케이션과 재료의 자연색을 이용한 단순화된 장식, 반원 아치형 상인방 등이 대표적인 내용들로 그랜드 매너를 루이 14세의 취향과 자신만의 창작성으로 응용한 것이었다.
베르사유 궁전과 앵발리드 돔
베르사유는 프랑스 남서쪽 2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다. 루이 13세가 1623년 이곳에 사냥용 별장을 짓고 자주 들르다가 1634년에 ‘一’ 자형의 간단한 성채를 지었다. 현재 건물에서 서쪽 제일 깊은 곳이다. 루이 14세는 섭정 때인 1651년에 이 곳을 처음 방문한 뒤 마음에 들어 1661년에 르보에게 첫 번째 증축을 맡겼다. 르보는 첫 번째 성채를 중심에 보존하면서 이것을 남익랑과 북익랑으로 감싸는 ‘ㄷ’자형의 앙벨로프를 만들었다.

쥘 아르두앙-망사르. 베르사유 궁전 대리석 안마당. 건축보다는 회화에 더 관심이 많았던 루이 14세의 취향을 보여주듯 베르사유 궁전의 명성에 비해 아담한 규모이나 이탈리아 오더를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프랑스만의 바로크 어휘로 화려한 장식주의를 완성했다.
르 보의 앙벨로프에 만족하지 못한 루이 14세는 1678년에 아르두앙-망사르에게 두 번째 확장을 맡겼다. 르보의 건물 가운데 중요한 방들을 유리의 방(Galerie des Glaces), 전쟁의 방(Salon de la Guerre), 평화의 방(Salon de la Paix) 등으로 개조했으며 외관도 화려하게 바꿨다. 증축은 르 보의 골격에서 직각으로 꺾여 밖으로 길게 뻗어나가는 2차 남익랑과 북익랑을 더했다. 두 익랑은 각각 두 개의 ‘ㅁ’자형 골격으로 이루어졌다. 조경과 실내장식을 계속해서 르 노트르와 르브룅이 담당하면서 2차 왕실 예술 팀이 탄생했다.
평면은 전체 윤곽을 대칭으로 유지하면서 실내의 각 실 배치는 기능에 맞춘 비대칭을 유지했다. 왕의 방에서 왕실 예배당에 이르는 왕의 동선이 비대칭 배치를 유발한 핵심 기능이며 건축적으로도 그랜드 매너가 가장 잘 구현된 구간이다. 왕은 아침에 일어나 10개의 드로잉 룸을 지나 왕실 예배당에 들러 미사를 올린 뒤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핵심은 드로잉 룸인데, 말 그대로 실내 벽과 천장을 가득 그림으로 채운 방이다. 프랑스의 역사, 승전, 신화, 왕의 업적 등을 그린 아카데미즘 화풍으로 그린 장르화나 역사화였다. 드로잉 룸은 하나하나가 거대한 캔버스이자 미술관이었다. 실내 골격은 미술 작품을 담기 위해 볼트 천장이나 아치 등으로 짰다. 그림은 르브룅이 이끄는 아카데미 소속 왕실 화가들의 몫이었다. 르브룅 자신은 1661~78년 사이에 있었던 프랑스의 승전과 루이 14세의 업적을 찬양하는 그림을 그리는 식이었다. 드로잉 룸들을 다 지나면 프랑스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그림으로 보는 것과 같았다. 왕은 아침에 일어나 이 방들을 지나며 프랑스의 영광을 가슴에 새기며 예배당에 들러 미사를 드리고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쥘 아르두앙-망사르. 앵발리드 돔. 베르사유 궁전이 수평확장으로 루이 14세의 야망을 과시했다면 이 건물은 수직 확장으로 하늘을 향한 그의 야망을 과시했다.
앵발리드 돔은 루이 14세가 상이군인과 퇴역군인을 위해 지은 국가 요양시설인 앵발리드 호텔에 부속된 교회였다. 그릭 크로스와 펜던티브 돔의 전형적인 중앙 집중 형으로 기본 골격을 짠 다음 그랜드 매너로 치장을 해서 왕실 고전주의의 전형을 보여준다. 평면에서는 펜던티브를 받치는 네 벽체에 방사선 방향으로 통로를 냄으로써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는 절대왕정을 상징했다.
파리의 가로 골격으로 대표되는 방사선 구도는 로마를 모방한 것이며 프랑스의 권위의식을 잘 보여주는데 이 건물이 중요한 출처 가운데 하나이다. 방향성의 종합화를 통한 그랜드 매너였다.
외관에서는 수직 확장을 시도했다. 베르사유의 수평 확장과 돔 평면의 방사선 확장과 함께 기본 세 방향으로의 확장을 마무리하는 구성이었다. ‘2단 몸통-2단 드럼-돔-랜턴’으로 수직 복층을 쌓았다. 돔의 구조 골격을 3중으로 해서 높이를 인위적으로 높였다. 아래쪽 드럼의 외피는 미켈란젤로의 성 베드로 돔을 선례로 삼았다. 건물 전체의 높이는 100여 미터에 이르렀고 외관 전체는 1:3의 비례로 수직성을 극단적으로 강조했다.
글·사진 임석재 |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동서양을 막론한 건축역사와 이론을 주 전공으로 하며 이를 바탕으로 문명비평도 함께 한다. 현재까지 37권의 저서를 집필했다. 공부로 익힌 건축이론을 설계에 응용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